『이정(而丁) 박헌영 일대기』 서평◎ 이정 박헌영 일대기이 책은 2004년 7월 『이정 박헌영 전집』이란 이름으로 간행된 총 9권 분량의 전집 가운데 9권에 해당한다. 박헌영의 대중연설이나 저작 등을 중심적으로 다룬 앞선 전집의 책들과는 달리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일종의 연보 형식을 빌려, 그의 행적을 보통 학교 시절의 생활기록부나 일제 경찰의 심문보고서 등까지 동원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한 점이 특징적이다. 일대기를 읽고 있으면 마치 박헌영과 초기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사료집을 접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박헌영의 행적에 관한 필진들의 주관적 해석을 최대한 배제한 채 그저 시간순으로 그것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무척 담백한 인상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 후대의 연구자들을 위해 해석과 평가의 영역을 남겨 놓은 필진들 나름의 고려와 배려 때문인 듯 싶다.책의 구성은 크게 일제 시기와 해방정국, 북한에서의 활동으로 삼분되어 있다. 첫 단락인 일제 시기에는 190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3 ? 1 운동을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하여 세 번이나 감옥에 갇혀가며 일본 제국주의에 처절하게 맞서 싸운 청년 박헌영의 모습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는 이 시기에 고문과 방랑 생활을 겪으며 질병과 자녀를 함께 얻는 애증의 삶을 보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해방정국 시기에서는 조선공산당 총비서를 지내면서 자신의 사상적 지향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며 인민공화국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던 박헌영의 정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대중적으로 생각하는 박헌영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기간이다. 마지막으로 북한 시기는 남북한의 정부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57살에 김일성에 의해 처형되기까지 박헌영 말년의 기록들이다. 여기서는 북한 정권의 부수상 겸 외무상으로서 한국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고 결국 종파 분쟁으로 인해 처형되어 박헌영이 남북한 모두로부터 배척받고 잊이 서술되어 있다.한편, 박헌영 일대기의 첫머리에는 이와 같은 기획을 세우고 편집해갔던 10여 년간의 노력이 서술되어 있다. 이를 통해 1980년대 후반 국제정세의 변동과 더불어 성장한 근대 사회주의 운동에 관한 연구, 1993년 초부터 편집모임으로 시작하여 전집을 저술하게 된 경위,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해금된 소련의 비밀문서와 노획된 북한 측 자료들을 수집하는 과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엄청난 양의 자료수집과 그에 대한 번역 ? 편집 및 교차검증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책의 저술과정이 전문 연구자들에게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명감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박헌영을 복원하고자 한 연구자들의 노고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시대를 살다간 박헌영의 일생은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박헌영의 부재박헌영 일대기를 읽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인물이 이토록 대중적으로 잊혀질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중 ? 고등학교에서 모두 한국사와 세계사 반을 선택하여 근현대사에 대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왔으면서도 박헌영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누군가의 언급 또한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박헌영의 존재는 보통 해방정국에 존재했던 좌파 성향의 여러 정치가 가운데 하나로서 이름 정도만 인식되고, 시대극이나 창작물에서 그가 주인공이나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을 본 일도 없었다. 예컨대, 저항 시인으로 유명한 심훈이 박헌영과 동창생이었고 그를 위한 시까지 써주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죽은지 이제 70년 가까이 흘렀지만, 각각 빨갱이이자 미제간첩으로서 남북한 모두에게 금기시되고 있는 박헌영의 처지는 하나도 변하게 없는 것이다.해방과 미 ? 소 군정의 남북분할, 그리고 단독정부의 수립이라는 현대사의 굴곡을 이제 우리는 역사의 영역으로 좀 더 객관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조금 도 정치관과 국가체제를 어찌 보면 박헌영의 부재라고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남한에서 19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 ? 1 사건 등을 계기로 한 좌익의 영향력을 상실은 박헌영의 월북으로 이어졌다. 그 후, 한반도 남쪽에서 좌파계열의 정당이나 정치 세력은 언제나 불온 세력이었고 이는 뒤이은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의 사형 및 온갖 간첩 조작 사건 등으로 연결되며 21세기가 되기까지 진보정당이 한국에 뿌리내릴 수 없게 하는 정치적 ? 정서적 토양이 되었다. 반세기 정도의 세월 동안 남한 사회에서 남로당과 박헌영이 대변하고자 했던 지점은 진공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한에서 박헌영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트로츠키에게 내려진 혐의와 마찬가지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 간첩 혐의로 처형된 정치범이었다. 그의 처형은 북한 정권의 사상적 경직을 초래하고 김일성 중심의 유일 지도체제를 불러온 1956년 8월 종파 사건의 전초(前哨) 격이었으며, 그의 처형으로 말미암아 북한 사회는 설득과 토론이 불가능한 교조적 공산주의 사회로 점차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가 공산국가 가운데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개인숭배 및 독재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주체사상의 등장인 것이었다.박헌영이라는 소수자(少數者)가 사라진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정부들은 각자의 독재 권력을 강화해가며 사회를 변혁과 반대를 상상할 수 없는 멸균실(滅菌室)로 만든 셈이다. 늘 비타협적이고 교조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린 박헌영이었지만 거꾸로 그의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한반도의 정치지형을 왜곡하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일제 시기부터 월북 이후까지 전 생애에 걸쳐 인민해방과 노동자 국가건설만을 바라보며 달려간 그의 삶의 궤적을 이제는 정치적 낙인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보아야 한다. 역사 속에서 권력에 의해 지워진 박헌영을 복원함으로써 근대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미완의 퍼플 조각을 풀고, 한국 현대사의 완성된 상(像)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박헌영의 두 혈육이 책의 구성 가운데 남겨진 혈육인 박비비안나(박영)와 원경(박병삼) 스님의 일화 및 인터뷰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 속에서 프롤로그의 형식으로 서울의 한 은신처에서 박헌영이 모스크바에 있었던 딸 박비비안나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1928년 박헌영과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주세죽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때는 일본 경찰의 경계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네 살이 되었던 시기에 박헌영 부부는 코민테른의 명을 받아 상해로 파견을 가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양육은 육아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부모의 존재나 생존 사실 따위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소련에서 발레리나가 되어 무용수로서 살아갔다.한편, 또 다른 혈육인 원경 스님의 이름은 박병삼으로 1941년 박헌영과 시골 처녀 정순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해방 후 《해방일보》 주필로 유명했던 정태식의 5촌 조카였으며 당숙의 주선으로 신지식을 배우기 위해 상경했다가 박헌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성례를 올리지 않은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여 정순년을 데리고 그대로 귀향해버렸고, 어린 박병삼은 친할머니와 큰아버지의 슬하에서 성장하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롤로그의 마지막은 1991년 10월 18일, 이 두 혈육이 감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전체적으로 무덤덤하고 무미건조한 자료의 느낌이었던 박헌영 일대기에서 이 부분만큼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을 느끼도록 한다. 특히 “사랑하는 내 딸, 먼 한국에서 네게 안부를 전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박헌영의 편지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혁명가의 문체가 아니라 아버지이자 인간으로서 박헌영의 따뜻한 면모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박헌영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점은 철저히 절제되어 있어 전체 글의 형식은 유지된다. 그 점이 오히려 잔잔한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일대기의 특유의 문체인 것도 같다.책의 마지막 단락에는 원경 스님과 윤해동 교수 사이의 인터뷰가 있어 박헌영의 남겨진 친인척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강의 생애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의 몫일 뿐이라고 말하며, 그 역사적 평가를 위하여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원경 스님의 대답이었다. 당숙과 육촌 등 문중의 사람들이 사상문제로 죽거나 고초를 겪고 본인도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박해를 받았다는 스님은 그 모든 고난을 자신의 운명이자 업보로 여기며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방황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노동조합을 방문해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최근의 기사를 떠올리며 고난과 박해의 당사자가 됨으로써 역사를 새로 인식하고 두 번째 삶을 얻게 되었구나 싶어 안타까움과 존경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박헌영은 오래전에 죽어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아직도 그가 남겨 놓은 자장(磁場) 속에서 필사적으로 삶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 새삼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사회주의를 생각하는 것의 의미박헌영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한국 사회주의 연구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박헌영의 위상은 곧 그가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활동했던 조선공산당의 중요성과 결부된 문제이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국내의 조선공산당,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등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그중에서도 조선공산당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이 책에서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혐의를 받은 105인 사건, 3 · 1운동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제 시기 조선의 3대 사건으로 중요성 있게 다루어진다. 더욱이 일제 치하와 해방공간을 아우르며 이념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내의 활동으로서 다양한 문헌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조선공산당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박헌영이라는 사상가렵다.
일본 중세 국가론에 대한 고찰-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시기 권문(權門)체제론과동국(東?)국가론을 중심으로목차1.머리말2.권문체제론의 성립과 한계3.동국국가론의 성립과 한계4.맺음말1.머리말일본사에서 무가 정권은 오래도록 실권을 장악했지만 천황 혹은 조정이란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가 정권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천황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천황이란 존재는 계속 존속했다. 그러므로 천황과 쇼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일본이란 국가의 권력 구조를 보는 여러 가지 관점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무가정권(武家政權) 시기 일본의 국왕이 쇼군인지 천황인지 아니면 양자의 복합체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일본사의 영원한 논쟁거리였다.이와 같이 일본의 중세사에서 국가권력과 왕권의 성격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최초의 무가정권이라 할 수 있는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이 일조한 바가 크다. 이보다 앞서 다이라(平氏)정권이 무사의 정권으로서 조정을 일시 장악한 적은 있었지만, 무가정권의 독자적인 권력 거점이나 통치기구를 갖추지 못한 점에서 커다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가마쿠라 막부는 동국지방이란 거점의 확보와 막부라는 통치기구의 설립을 통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전국적인 규모로 무사를 결집한 보다 완성도 높은 무가정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막부정권의 탄생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전근대 일본의 권력구조를 만들어내어 단일권력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반박을 촉진시킨 것이다. 한편 그것이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와 에도막부(江戶幕府)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의 무가정권의 원형 내지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가마쿠라막부 시기의 국가론이 일본 중세사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천황을 중심으로 하나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단일 국가론, 교토 중심의 국가와 가마쿠라 중심의 국가가 서로 병존한다는 두 개의 국가론, 아예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토 신이치(佐藤進一)의 동국국가론으로 각각 정립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두 이론의 성립과 발달과정을 통해 가마쿠라막부시기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중세국가론의 성과와 한계에 대하여 검토해보겠다.2. 권문체제론의 성립과 한계근대 역사학의 태동 이후 전후(戰後)인 1950년대까지 일본중세사 연구자들은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혁 주체로서 무사(그 중에서도 특히 동국의 무사)를 설정하고, 그들이 가마쿠라막부라는 무가정권에 결집하여 고대 국가인 조정의 공가정권(公家政權)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역사의 진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 이시모다 쇼(石母田正)로 대표되는 전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무사를 봉건적 영주라는 의미에서 재지영주(在地領主)로 규정하고 봉건제를 추진하는 역사의 주체로 적극 평가하였다. 이른바 재지영주제론 또는 영주제론이라 불리는 이 학설은 봉건국가의 발전을 가마쿠라막부로 대표되는 무가정권을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전후 일본 역사학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제공하였다.이시모다의 설은 일본의 중세를 장원을 배경으로 벌어진 재지영주(도시타카)의 성장과 이를 가로막는 장원영주(도다이지)의 항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원영주를 고대적 세력으로 재지영주를 중세적 세력으로 규정하여 양자를 대비시킨다는 특색을 지녔다. 그러나 그 후 연구가 진전되면서 장원영주나 재지영주 모두 장원을 기반으로 존재했다는 점이 밝혀져 계급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양자를 대립적인 관계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1960년대에 들어 이러한 영주제론에 입각한 중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학설이 구로다 도시오의 권문체제론이다. 그는 1963년 발표된 논문 ?日本中世の?家と天皇?에서, 종래의 통설이 가마쿠라막부시기를 고대적인 귀족정권과 봉건적인 무가정권의 대항 혹은 이중정권의 시대로 보고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여 국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귀족·무사를 포함하여 모든 지배계급이 농민을 비롯한 전인민을 지배하는 여러 기구를 총체적으로 파악는 사원(寺院)·신사(神社) 등으로 이루어진 사사(寺社), 무력(武力)으로 국가를 수호(守護)하는 무가의 세 유형으로 대별되었다. 이들 권문은 권세 있는 가문, 권위·세력을 지닌 문벌가를 뜻했는데 관직이나 관제상의 지위를 의미하기보다는 제도 외적인 측면이 강하며, 하나의 문벌가가 아니라 복수의 불특정 다수를 의미했다. 국정상의 직능을 분담하는 각 권문은 상호 대립과 동시에 보완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국가권력기구, 곧 권문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구로다는 이 같은 권문체제가 11세기 후반 원정(院政)의 성립 시점부터 15세기 중엽 오닌(應仁)의 난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보았다. 고대 율령체제(律令體制)와 근세 막번체제(幕藩體制)에 상응하는 가마쿠라막부의 중세적 지배체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권문체제를 제시한 것이다.구로다가 볼 때 가마쿠라막부의 성립은 무가라는 독자적인 정권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권문체제의 심화에 불과하며 무가정권이 파견한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직권도 공가·사가 등의 권한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막부만이 국가 권력을 독점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개별 권문은 다른 권문을 압도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권문 간에 발생하는 상호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통합자·중재자로서 천황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문 간 상호 협조 체제는 천황의 권한을 극도로 압축시켰지만 거꾸로 천황은 실권이 없었기에 권문의 조정자 내지 국가적 통합자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권문체제론의 등장으로 무가 세력의 성장과 고대 사회의 붕괴라는 재지영주제론적 단순 발전론이 통용되지 않게 되자, 일부에서는 중세형성과 고대의 몰락이라는 관점은 부정되고 오히려 재지영주와 고대 국가체제의 연관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대국가가 무(武)와 관련한 제역(諸役)을 부과하고 이들을 동원하는 과정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무사가 농촌 변경의 개발영주로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율령 국가 권력에 기생하며 성장했다고 보았다. 권문체제론의 등장으로 수세에 처해 있던 재지영주제론자들은 여기서 많은 시사점을음으로, 그들이 완전히 중앙 정치기구에 편입되는 것은 중세가 아니라 근세에 이르러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위 중세 무국가론으로 불리는 이 학설은 중세 국가기구가 다양하고 복잡한 중세의 여러 사회관계를 규율할 수 있는 근본 질서·구조를 갖추었는가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중세 사회를 자력 구제의 세계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중세 국가를 통일적 단일 국가로 설정하고 권문 사이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의 기본전제를 부정한 것이다.이를 시작으로 가마쿠라막부시기를 권문체제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에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권문체제론이 각 권문들의 형태적·표면적 측면만을 자의적으로 열거하였으며, 공가·사사 등의 차이를 단순히 지배의 유형만으로 처리한 결과 그들 간의 차이가 불명확해졌다는 비판이 가장 많았다. 또 이에 대해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는 권문체제론이 권력의 형태 분석이란 정태적 분석에 집착하여 여러 세력 간의 움직임을 시야에 넣은 동태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중세국가론은 권력기구론보다 그 권력을 구성한 계급·계층구조에 기초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권문체제론이 헤이안 이후 가마쿠라 시기까지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설득력있는 요소를 갖고 있는 점을 분명하다. 그의 이론처럼 중세의 권력은 공가, 무가, 사가로 나누어져 있었고 천황가는 천황과 상황, 무가는 쇼군과 싯켄 등으로 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분열로 인해 약체화된 중앙권력의 상호보완을 설명하는데 권문체제론의 강점이 있었다. 그러나 권문의 쇠퇴기인 무로마치 시기에 이르러서는 권문의 통합에 따라 일원화가 촉진되고 자립적인 지방 분권 세력이 성장하여 권문 간의 상호 협력·분쟁만으로는 이를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는 약점이 있었다.3.동국국가론의 성립과 한계앞서 살펴본 것처럼 1950년대 제기된 재지영주제론은 가마쿠라 막부를 봉건 국가의 형성 과정으로 보고, 일본 중세를 고대적 권력인 공가 정권과 중세적 가마쿠라 막부가 병존하는되었다. 여기서 1970년대 막부와 공가의 협조를 강조하는 권문체제론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재지영주제론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구가 나타났다. 이것이 현재 권문체제론과 더불어 중세 국가론의 도달점으로 평가받는 사토 신이치(佐藤進一)의 동국국가론이다. 당초 사토는 가마쿠라막부를 동국정권론으로 파악하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이후 권문체제론의 주장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를 단순한 자립적 정권이 아니라 교토의 왕조 국가와 더불어 양립한 또 다른 하나의 국가(동국국가론)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본래 동국정권론은 1183년 10월, 선지(宣旨)에 의한 동국행정권의 획득을 통해 가마쿠라막부가 공권력(公權力)으로 성립했고, 이 때 동국의 두 본소(本所) 간의 소송에 대해서는 막부가 재판권을 가진다는 원칙 등에서 파생된 논의였다. 사적 권력으로 출발했던 막부가 공권력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조정으로부터의 공권의 수여가 필요 했다는 것과, 그것에 입각해서 막부가 동국지방에 대해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가마쿠라막부의 동국정권적 성격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가마쿠라막부를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사토는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의 시대에 막부가 친왕쇼군을 맞이하여 황친(皇親)추대를 실현하였으며 조정과의 관계를 상호 불간섭과 자립의 상태에 두었다고 보는 등 완전히 양분된 중세 일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권문체제론에 대항하여 국가론으로서 동국국가론이 출현하고, 막부를 서국과 다른 별개의 국가라고 하여 지역 특성의 차이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강해지자, 동국과 서국의 사회적·문화적 이질성을 강조하는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같은 연구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는 관동(關東)은 가마쿠라 정권의 국호(國號)에 준하는 공적인 칭호로서 확정되며, 가마쿠라막부의 직접 통치권이 미치는 범위를 가리키는 광역지역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동국의 수도 가마쿠라에는 왕권의 수호신으로서 학강팔번궁(鶴岡八幡宮)을 제사지내는데, 쇼군을 수장으로이다.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 성립의 배경-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붕괴부터 남북조의 동란까지목차1. 머리말2. 원 침공의 후유증과 호조(北?) 전제정치3. 천황의 쿠데타와 겐무(建武) 신정의 파탄4. 남북조의 동란과 아시카가 막부의 등장5. 맺음말1. 머리말일본사에서 막부정권은 12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약 700년간 존속해왔다. 각각 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로 이어지는 이들 무가정권들 가운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무로마치 막부는 막부시대 연구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박한 관심을 받고 있다. 그것은 선행연구에서 무로마치 막부의 등장이 전통적인 막부정치의 연장과 지속으로 연구되어왔던 반면에 최근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나 60년간 이어질 남북조시대의 개막으로 더 의미 있게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또 남북조의 통일 이후에도 막부정권이 전국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여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은 오닌(應仁)의 난 이전까지의 짧은 기간 남짓이며, 후반기인 센고쿠시대(??時代)의 전성이 사학자들에게 강렬한 인식을 심어주어 막부권력으로서의 존재감을 확고히 굳히지 못한 것도 그 요인 중에 하나로 추측된다. 한마디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는 정치사적으로 독자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그러한 무관심에는 정권의 개창자인 다카우지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저평가도 한몫을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막부의 개창자들이 그들의 호적수들에 비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호간비이키(判官??)의 정서를 갖고 있는 일본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카우지의 경우는 자신의 숙적이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천황에 대한 충절의 대명사로 숭앙된 것에 반해 배반과 기회주의의 상징처럼 인식되었고, 실질적 의미에서 무로마치 막부의 첫 번째 쇼군이라 할 수 있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 역시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 받고 말년에는 천황의 자리마저 넘보는 야욕을 보여주어 무로마치 막부가 주군에 대한 충성이나 황실을 향한 존중 같은 전통적 가치관의 반하는 정권이라는 인식을 주고 말았다. 이정과 배경을 고찰해보는 것은 일본 중세의 연속과 단절을 구분하고 무가정권으로서의 중세라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중요한 시도라 할 수 있다.2. 원 침공의 후유증과 호조(北?) 전제정치13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는 원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표면적으로는 강화된 권력을 누리는 듯 보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막부는 몽고의 침략과 같은 유사시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본래 자신들의 지배영역 밖에 있었던 공령(公領)·장원(莊園)으로부터도 병사와 군용물자를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조정으로부터 획득하는 등 지배력을 확대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즈음부터 막부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고케닌(御家人) 제도에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고케닌들은 원의 침입으로 인해 막대한 전비를 부담해야 했는데, 전쟁 과정에서 군공을 세운 고케닌들은 당연히 그 대가로 막대한 은상(恩賞)을 기대했다. 그러나 원과의 전쟁이 기본적으로 외침에 대항하는 방어전이었던 까닭에 막부로서는 은상으로 하사할 새로운 영지를 전혀 확보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고케닌들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고케닌들이 전후 궁핍에 시달리면서 그들 사이에 막부에 대한 불만이 싹트게 된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막부는 궁핍한 고케닌들을 구제하기 위해 1297년 도쿠세이령(德政令)을 내려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고케닌이 토지를 저당 잡히거나 매매하는 것을 금하는 한편, 고케닌이 지토나 다른 고케닌에게 매각한 토지로 20년이 지나지 않은 땅은 무조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고 고케닌이 서민에게 매각한 토지는 무조건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는 중소 고케닌들이 지닌 영지가 한곳으로 몰리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막부의 이런 폭력적 조치로도 고케닌의 궁핍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도쿠세이령이 내려진 후 얼마가지 않아 점차 백성들은 고케닌과의 금전 거래를 꺼리기 시작하였고 금침공이 가져온 고케닌과 막부 사이의 불신과 반목은 가마쿠라 말기 고케닌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분화와 함께 고케닌 제도에 심각한 동요를 불러온 것이다.한편, 이 무렵 막부 내부에서는 호조(北?) 씨의 독재 경향이 두드러졌다. 호조 씨는 원의 침입 이후 표면화된 국내의 모순, 특히 상술한 고케닌층의 불만에 대해 막부의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싯켄(執權) 호조 도키무네(北?時宗)는 원의 침입을 기화로, 자신의 저택으로 가신들을 불러놓고 그곳에서 정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등 도쿠소(得宗) 중심의 전제정치를 확립하였다. 또한 호조 씨 일족이 중앙의 요직을 독점하여 막각(幕閣)의 회의를 주재하는 호조슈(評定衆)와 무사들 간의 영지 관련 소송을 취급하는 히키쓰케슈(引付衆)에 모두 호조 씨를 임명하였다. 거기에 전국적으로 5할의 가까운 슈고(守護)가 호조 씨로 교체되었음은 물론 지방의 주요 도시·항만·장원 등도 호조가문의 직접지배 하에 두는 강력한 조치가 이어졌다. 이것은 싯켄 정치의 전통인 고케닌 합의제가 무너지고 도쿠소 전제정치기로 넘어가는 가마쿠라 말기의 정치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위와 같은 도쿠소 권력의 유지와 집행을 가능하게 한 인적기반은 호조 씨 가문의 가신집단인 미우치비토(御?人)였다. 그들은 언제나 주요직책에 등용되었는데 본래 고케닌보다 낮은 신분이었던 그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고 일반 고케닌들이 소외되는 현상은 도쿠소 정치기의 대표적인 특징 중에 하나로 지목된다. 당연하게도 미우치비토에 대한 고케닌들의 불만은 호조씨 도쿠소 정권에 대한 저항감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도쿠소 전제정치를 가능케 한 미우치비토의 존재가 오히려 막부의 정치체제를 동요시키고 고케닌 사회의 민심이반이라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 천황의 쿠데타와 겐무(建武) 신정의 파탄유력 고케닌과 막부 내부에서 조차도 호조 씨의 전제정치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반막부의 분위기가 확산되자 그동안 무력했던 조정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당시 조정은한 뒤 헤이안 시대 천황의 정무기구였던 기록소(記錄所)를 재흥시켜 인재를 등용하는 등 의욕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를 추진하는 와중에 막부에 대한 민심이반을 감지하고는 비밀리에 막부타도 계획을 수립하는 대담함까지 보인다.실제 상황은 고다이고 천황에게 나쁘지 않은 듯했다. 새롭게 막부의 14대 싯켄으로 취임한 호조 다카토키(北?高時)는 우둔하여 정치를 돌보지 않았고 막부의 권력은 가신인 미우치비토 세력이 독점하여 정국은 문란해진 상황이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은 두 번이나 막부의 전복을 기도한다. 첫 번째 계획은 1324년 9월 교토에 있는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이에 가담했던 공경들은 막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지방의 호족과 측근들 역시 살해되거나 유배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다이고 천황은 계획의 존재를 사전을 알지 못했다고 발뺌하여 간신히 신변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쇼추(正中)의 변이라고 한다. 쇼추의 변 이후에도 막부타도를 위한 준비를 멈추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아들 모리요시(護良) 친왕을 필두로 엔랴쿠지(延曆寺)의 사원세력을 결집하여 대항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계획은 측근의 밀고로 인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막부는 1331년 주모자들을 체포해 처형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은 오키섬(?岐島)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과 혈통이 다른 지명원통의 고곤(光?) 천황을 세웠다. 이 사건을 겐코(元弘)의 변이라 한다.천황이 중심이 되어 두 차례에 걸쳐 행해진 토막계획은 모두 모두 계획단계에서 미수로 그쳤지만, 이미 민심을 잃은 막부에게는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안겼다. 수많은 고케닌들이 호조 씨의 정치에 반발해 각지에서 거병하였고, 이에 발맞춰 겐코의 변 이후 잠행하고 있었던 모리요시 친왕과 천황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막부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각지에 무사들에게 격문을 띄워 막부타도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정세가 이렇게 흘러가자 1333년 2월 고다이고 천황은 무사들의흐를수록 귀족과 사원 중심의 정치질서를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사들의 요망은 토지의 공평한 배분이었으나 은상은 귀족과 사원세력에게 편중되었고 무사들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게다가 짧은 기간 동안 지나치게 급진적인 천황권 집중을 시도한 나머지 새롭게 얻은 영지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토지에 천황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명령을 내려 대혼란을 초래하는가 하면, 궁궐의 재건을 위한 비용을 전국의 지토에게 부담시키는 성급한 조치를 취하는 등 무사들의 불만을 촉진시켰다.이즈음 막부타도의 공신 가운데 하나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또 다른 공신이었던 닛타 요시사다가 신정부 하에서 천황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출세가도를 구가한 것과 달리 겐무 신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신정부에 대한 무사들의 부정적인 여론을 느끼고 쇼군 자리에 올라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황은 자신의 아들인 모리요시 친왕을 무사들의 총지휘자인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하고 다카우지를 진수부의 지휘자인 친쥬후쇼군(?守府?軍)으로 임명하였다. 무사사회의 일원이 막부의 최고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통은 부정되었고 다카우지는 이 무렵 반역을 결심하게 된다.그는 이후 가마쿠라의 군사책임자였던 동생 아시카가 타다요시(足利直義)를 이용하여 모리요시를 유폐시킨 뒤 살해하고 가마쿠라에 체재하면서 1335년에는 천황의 칙허도 없이 스스로 막부의 쇼군을 자칭한다. 그리고는 겐무신정에 불만을 품은 동국지방의 무사들을 결집하여 신정부를 어지럽히는 수괴로 닛타 요시사다를 지목한 뒤 요시사다의 토벌을 명분으로 궐기하기에 이른다.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닛타 요시사다가 중심이 되어 군단을 편성한 신정부군은 서전에서 승리하여 교토에서 아시카가군을 크게 이기지만, 1336년 큐슈로 퇴각하여 다시 세력을 규합한 다카우지에 의해 교토가 함락되는 결정적 패배를 하고 만다. 이 전투로 천황 측의 군대는 완전히 토벌되었고 고다이고 천황은 체포같다.
일본 무가정권의 성격과 특징-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성립과정을 중심으로목차1. 머리말2. 헤이안(平安) 말기의 혼란과 무사세력의 등장3. 무사세력의 전성과 가마쿠라(鎌倉幕府) 막부의 성립4. 가마쿠라 막부의 특징과 성격5. 맺음말1. 머리말천황이 위치하는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한 조정과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쇼군과 그 가신들이 중심이 된 막부가 공존하는 공무(公武)이중지배체제는 일본사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논할 때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특히 한국이 고려 말의 약 100년간의 무신정권시대를 제외하면 언제나 문인(文人)이 국가를 운영했던 반면에, 왜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의 700년 동안 장기간에 걸쳐 무가정권이 존속했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근대 일본사가 성립된 이래 오랫동안 막부정치는 일본의 중세가 아시아적인 정체를 벗어나 서구적인 역사발전의 경로로 전환한 탈아(脫亞)와 서구(西歐), 진보(進步)의 역사적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 중세사 연구자인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최초의 막부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에 대해서 동양적 고대로부터의 탈각, 나아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한데에서도 확인된다.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혁의 주체로 무사를 설정하고, 그들이 가마쿠라 막부라는 무가정권에 결집하여 고대 국가인 조정의 공가정권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역사의 진보로 서술함으로서 이와 같은 주장을 완성시켰다.이것은 로마제국을 변경(邊境)에서부터 혁신하는 게르만의 봉건제를 염두에 두고서, 동국지방의 무사계급에 의해 일본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중세 봉건제의 역사를 전개했다는 인식이었다. 일본에서의 서구 중세의 ‘발견’을 추구한 근대 역사학은 전후 일본의 역사학에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이 자신들이 이룩한 근대화와 서구화를 설명하는 내재적 논리로서 가마쿠라 막부와 뒤이은 무가정권들을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것회적으로는 공지공민제에 기초한 반전제가 무너져 각지에 장원이 발달하였다. 장원의 증가는 중앙권력의 약화를 초래했으며 부가 일부 권문세가에 집중되어 정치적, 사회적으로 부정부패의 풍조를 만연하게 했다. 장원영주들은 주변의 농민을 고용하거나 혹은 노비와 부랑인을 사역시켜 자신들의 땅을 개간하게 하는가 하면, 중앙의 관리로서 지방의 행정을 책임졌던 국사(?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명목상의 토지를 중앙의 유력한 귀족과 사원에 기진했는데, 이 때문에 토지가 유력한 귀족이나 사원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지방의 많은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 때문에 귀족들의 비리를 조정에 호소하고, 장원영주들에게 반항하는 자도 점차 늘어나 지방의 치안은 문란해져 갔다.이 같은 혼란은 국사나 장원영주에게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지켜줄 무장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로 인해 무력의 사용을 직업으로 하는 무사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주로 재지의 유력 토호나 유력 농민의 자제로서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들이었으며 무예 훈련을 통해 점차 전업무사가 되어갔다. 무사단의 수장에는 국사로 지방에 내려가 그대로 토착화한 황족이나 귀족의 자손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으로 무사들의 신망을 모았으며 무사단을 통솔하는 무사의 동량으로는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와 세이와 겐지(淸和源氏)가 서로 힘을 다투며 성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지방의 무사세력들은 중앙의 귀족이나 장원영주들의 의뢰를 받고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자신들의 실력을 입증하는데 성공했고, 이 과정에서 조정과 중앙의 귀족들은 무사들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한편 중앙에서 약 150년 만에 후지와라 씨의 외척이 아닌 고산죠(後三條)천황이 즉위하면서 섭관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천황가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정치적 개혁이 단행된다. 그는 장원의 정리를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기록장원권계소를 설치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장원을 몰수하여 공령의 증대를 꾀했다. 이어 즉위한 시라카와(白河)천황은 10상황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원을 경비하기 위해 무사를 배치하고 무사단을 조직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는데, 이것은 조정에 반발하는 장원과 사원세력들을 저지하기 위해 원에서 적극적으로 무사들을 등용한 것과 함께 무사들을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원정기의 강력한 천황권의 추구가 결과적으로 무가정권의 씨앗을 잉태한 셈이었다.3. 무사세력의 전성과 가마쿠라(鎌倉幕府) 막부의 성립처음 무가정권의 원시적인 형태를 구현해 낸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平?盛)를 위시한 헤이시(平氏) 세력이었다. 원정이 시작되면서 천황의 발언권이 약화되고 상황과 천황 간의 대립이 잦아졌는데, 원정기 특유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도바 법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그리고 스토쿠 상황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156년 도바 법황의 사망으로 촉발된 황위를 둘러싼 다툼은 급기야 천황파와 상황파간의 내전을 일으켰고, 내전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다이라노 기요모리 등이 가담한 천황파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를 호겐의 난(保元の?)이라 한다. 은상에 불만을 품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1159년에 다시 병사를 일으켰으나, 기요모리의 반격을 받아 살해당하였고 난은 평정되었다. 이를 헤이지의 난(平治の?)이라고 하는데, 이 두 번의 난에서 중앙귀족의 권력투쟁은 무사의 무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또한 두 반란을 모두 진압한 기요모리의 지위와 권력은 전례 없이 막강해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권력을 잡은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조정 최고관직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자리에 오르고 헤이시 일족도 모두 고위관직을 맡아 권세를 누렸다. 헤이시의 권력을 지탱해 주었던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각지에 퍼져있던 무사단의 호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이들 무사단의 일부를 장원과 공령의 현지 지배자로 임명하고 기나이(畿內)에서 서일본에 이르는 지역의 무사들을 자신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게닌(家人)으로 조직하였다. 나아가 기요모리는 천황과 외척관계를 맺고 500여 이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고시카사와 법황을 유폐시키는 등 강압정치를 펼침에 따라, 1180년 유폐된 법황의 황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내린 헤이시 토벌 지령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겐지(源氏)에게 전해지는데 이즈(伊豆)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각지의 반헤이지(反平氏) 세력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게 된다. 이에 요리토모는 그의 장인 호조 토키마사(北?時政)의 원조를 받아 헤이시의 군대를 격파한다. 기요모리는 재기를 위해 노력하다가 1181년 병사하고, 이로써 사실상 헤이시 정권을 몰락시킨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머물면서 동국(東國)에 근거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동생인 노리요리(範?)와 요시쓰네(義?)를 시켜 헤이시의 잔당을 토벌케 하여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い)에서 헤이시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게 된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거병 과정에서 자신의 휘하에 모인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어 고케닌(御家人)으로 삼았는데, 이들의 존재는 이후 막부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요리토모는 1185년, 자신과 불화하여 행방을 감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를 찾고 동시에 치안을 유지한다는 구실로 국마다 슈고(守護)를, 각국의 장원과 국아령(國衙領)에 지토(地頭)를 둘 것을 조정에 요구하여 승낙을 받는다. 슈고에는 동국의 고케닌 중의 유력자가 임명되었는데, 평소에는 관내의 고케닌을 통솔하여 교토의 천황궁을 경비하고, 모반·살인자 체포 등의 치안 유지를 임무로 했으며 전시에는 고케닌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토 역시 고케닌이 임명되어 토지의 관리, 연공(年貢)의 징수, 치안 유지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슈고와 지토의 도입은 장원의 영주인 귀족과 사원·신사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이들 신설 관직은 처음에는 헤이시로부터 몰수한 토지와 모반인의 토지에만 설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무가정권의 토대를 다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을 알렸다.4. 가마쿠라 막부의 특동국무사들을 고케닌으로 삼아 무가정권의 틀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이와 천황의 후손으로 군사귀족의 자제라고 하는 점과, 동국에서 새롭게 성장하던 농촌 무사들의 수령이었다는 점이 주효했다. 이것은 유배된 죄인의 신분이었던 그가 동국의 무사들을 규합하여 무가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요리토모의 개인적인 친소관계와 연고에 따라 뭉친 무사집단들이 그대로 막부의 중추를 차지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초기의 가마쿠라 막부는 사실상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뭉친 무사들의 사조직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불행하게도 뒤이어 쇼군이 된 그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賴家)는 아버지만큼의 명성과 경륜을 지니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세력을 키우고자 했고 요리토모 대의 고케닌들을 억압했다. 그 때문에 그의 어머니이자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北條政子)와 마사코의 아버지 호조 토키마사는 계획을 꾸며 요리이에의 독재를 중지시키고 유력 고케닌 13인의 합의를 통해 정치를 행하도록 하였다. 결국 요리이에의 뒤를 이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朝) 마저 암살되고 막부의 권력은 호조 씨가 싯켄(執權)으로서 장악하게 된다.호조 가문의 가마쿠라 막부는 무가정권으로서 본격적인 체제정비에 돌입하게 되는 것에는 조큐의 난(承久の?)이 끼친 영향이 크다. 미나모토 씨와 호조 씨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막부 내부에 혼란이 계속되자 막부타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교토의 조정은, 1221년 사네토모가 살해되어 겐지(源氏)가 단절된 것을 호기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토바 상황은 호조 요시토키(北條 義時)의 토벌을 전국의 무사들에게 명했으나, 이에 응한 자는 적었고 오히려 막부 내의 고케닌들의 결속을 확인시켜준 꼴이 되어 버렸다. 요시토키는 대군을 보내 순식간에 상황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한 뒤 역으로 조정에 책임을 추궁하였다. 교토에는 조정의 감시와 교토 내외의 경비를 담당하는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가 설치되는 등 조정의 권위는 급속도로 약화되고 막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