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에 대한 조선?일본의 인식과 대응Ⅰ. 들어가며19세기 중엽 동아시아 국가들은 내부의 모순과 밀려드는 외압으로 심각한 체제의 위기를 맞게 된다.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서양은 군사력으로 무장하고 인명과 재산을 해치는 아편을 전파하면서 교역을 요구해요는 이적(夷狄)이었다. 이 중 가장 직접적인 위협은 군사적 위협이었다. 서양의 군사적 위협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는지의 여부가 삼국의 근대 전개 양상을 결정짓는데 큰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삼국은 자국에 가해지는 외압뿐 아니라 인접국에 대한 서양의 군사적 위협도 강 건너 불일 수는 없게 되었다.제1차 아편전쟁은 동아시아 국가가 서양에게 당한 첫 번째의 군사적 침략이었다. 청조가 당한 침략은 단순히 청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아편전쟁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과 대응은 이 시기의 동아시아사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선정부와 일본막부가 탐지한 제1차 아편전쟁 관련 정보를 전래된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정리하고, 각 정보의 입수 단계에서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였는가를 살펴보면서 조선과 일본을 상호 비교해보고자 한다.Ⅱ. 조선왕조의 아편전쟁 정보와 그 대응조선정부가 연행사절에게서 입수한 정보에서는 헌종 4년인 1838년 아편에 관한 문제부터 시작하여 청과 영국 간의 교전 사실이 사신의 정보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난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1845년까지 전쟁의 내용과 함께 아편에 관련한 정보가 들어온다.아편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에 먼저 전래된 정보는 1832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온 김경선의 연행록에 전하고 있다. 김경선은 당보(塘報)에서 아편의 흡식(吸食)을 엄금해야 한다는 상주(上奏)를 읽었고, 청조는 근래 아편을 엄금하는 상유(上諭)가 자주 있었으나 그 효과가 없었으며 특히 광동과 복건 등지에서는 장병들의 흡연이 늘어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후에도 아편수입이 증가함에 따른 해독(害毒)의 확산과 은 가격다. 특히 1840년 헌종은 진향사로 파견되었던 이시인(李時仁)에게 아편전쟁과 관련하여 군대의 동원 정도와 전투가 일어난 지역이 어디인지 자세하게 묻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헌종이 중국 정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향후 사태의 진전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였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청과 영국 간의 군사적 충돌에 대한 정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요컨대 제1차 아편전쟁의 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청과 영국의 대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더욱이 이러한 보고 중에는 영국에 의한 청의 위기가 비단 청만의 위기가 아닌 조선의 위기라는 사실도 명확히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2)의 내용을 참조하면 서장관 이정리(李正履)는 청조를 위협하고 있는 서양은 8년 전인 1832년에 이양선을 몰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교역을 요구했던 이들이라고 경고하면서 해방(海防)을 엄중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정리가 해방을 주장하고 5개월 후에 귀국한 진향사 이시인은 청과 영국이 전쟁에 돌입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반년 후 1840년 말에 영국 군함 두 척이 제주의 가파도에 나타나 발포하고 선원 40여 명이 상륙해 소를 빼앗아 간 사건이 발생했는데, 청과 영국의 전쟁 소식과 남해안의 이양선 출몰은 앞서 언급한 이정리의 경고대로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보를 통하여 영국의 무력 침략에 대한 위기감은 더해졌을 것이며 조선은 청과 영국의 전쟁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편전쟁과 관련한 소식이 이어지며 전쟁의 원인과 구체적인 전투 경과도 알려지게 된다.(5-1) 1841년 3월 19일 동지정사 박회수 - 영길리국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것을 평정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단한 걱정거리는 아니나, 소요는 적지 않다.(5-2) 동 서장관 이회구 - 전쟁이 일어난 것은 영길리국인에게 교역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정해(딩하이)가 함락되고 강소?산동?직예?봉천 등지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관병이 많이 상했고 재물의 약탈, 부녀간음 등의 횡포가 있었다. 등정정(鄧廷楨 앞서는 영길리에게 광동 한 곳에서만 호시를 허했는데 소요 후에는 네 곳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한 ‘침범으로 인한 소요의 조짐(侵擾之端)은 없다.’7) 1845년 3월 28일 서장관 윤찬 - 영국은 광동?복건?절강성 연해에 거주하고 있다. … 당초 강화 시에 영국은 90만 냥을 징수하고 나서 파병하였다. 또 40-50건의 조약을 맺어 조정을 위협하니 조정은 한결같이 그 하는 바를 들어주고 감히 그 잘못됨을 말하는 이 없고 홀로 진경용(陳慶鏞), 주성렬(朱成烈)이 싸우나 어쩌지 못하였다. 강화 후 해마다 금과 비단을 보내는데 조금이라도 모자람이 있으면 성을 내며 공갈하는데도 조정은 그 관속을 받는다.전쟁은 통상을 불허한 데서 기인하였기 때문에 1842년 체결된 난징조약에서 통상을 허용하였다는 것은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조선은 난징조약이 체결된 내용을 접하고도 뚜렷하게 차이 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는 보고자가 정보를 의도적으로 완곡하게 전달하는 모습과 더불어 조선 측이 아편전쟁과 관련하여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동지사행에서 돌아온 정사는 청과 영국이 화친을 했지만 ‘침어지폐(侵漁之弊)’가 없다고 국왕에게 복명하였다. 화친은 하였지만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패하고도 영토의 상실이 없었다고 보고한 사실은 조선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파악된다. 실제로 난징조약에서는 홍콩의 할양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조선은 이러한 사실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1845년에 동지사로 다녀온 종친 흥원군은 “중국에는 아무 일도 없다.”고 복명하면서 위기의식은 더욱 완화될 수 있었다. 난징조약이 있은 후 3년이 경과한 후의 보고이므로 청이 통상을 허락하고 광동을 포함한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난 후에 시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7)의 서장관 별단은 1843년의 호문조약의 체결과 1844년 미국과 프랑스와 맺은 망하조약,하여 외교적 조정으로 대응하였기 때문에 서양의 정세를 예의주시하는 선에서 멈추었고 다른 구체적 대응이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이다.Ⅲ. 일본막부의 아편전쟁 정보와 그 대응에도막부는 제1차 아편전쟁에 대한 정보를 나가사키에 입항한 외국 선박을 통해 입수했다. 정보는 청의 상선과 네덜란드 상선의 두 계통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정보를 풍설이라고 불렀는데 청 선박에서 입수한 정보를 당풍설서(唐風說書) 또는 청상구단(淸商口單)이라 하였고 네덜란드 선박이 제출한 정보를 화란풍설서(和蘭風說書)라 하였다. 막부는 청과 영국의 교전소식에 대한 내용을 보다 자세히 요구했고, 이리하여 입수하게 된 보고서를 별단풍설서(別段風說書)라 하였다. 제1차 아편전쟁 기간 중 입수된 화란풍설서는 4통, 당풍설서는 19통이 있었다.제1차 아편전쟁 정보를 먼저 전한 것은 네덜란드였다. 1839년에 풍설서에서는 광동에서 임칙서가 외국 상인이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몰수하여 폐기한 사실과 중국에서의 금연정책의 시행을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막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과 청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단 정보를 접하고부터는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무역선에 더 자세한 정보를 요청하였고 그렇게 입수한 정보가 별단풍설서이다. 여기에는 영국 아편무역의 실태, 청조의 아편 단속의 경과, 영국이 청국에 대해 항의한 것과 교섭의 경과, 1839년 광동항에서의 전단(戰端)을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청의 무역선에도 정보를 제공하게 하였는데 이 무역선은 1839년 11월에 중국을 떠났기 때문에 그 이전의 경과만을 전하였다. 그렇기에 1840년 여름까지 막부는 양국의 개전 사실만을 인지하고 있었고 승패의 추이는 알지 못하였다.1840년 12월에 청국 무역선 3척이 나가사키에 입항하였다. 본래는 7월중에 도착해야 했지만 영군의 해상봉쇄로 여름에는 결항하였고 해상봉쇄가 풀린 이후에야 내항한 무역선이었다. 이 때 제출한 당풍설서에는 영국군이 청의 영토를 점령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가지의 비밀정보를 입수하게 되는데 하나는 나가사키의 상관장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아편전쟁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다.“이번 중국과 에게레스(영국)의 소동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면 일본에서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란 풍문이 있다.”이는 아편전쟁이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쳐 일본도 안심할 수 없으리라는 소문이 네덜란드에서 유포되고 있다는 것이었다.다른 하나는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선이 조난으로 중국의 마카오에 기항하여 체류하는 동안 영국군 고위장교로부터 ‘영국군함이 일본에 가서 통상을 요구할 때 적절하지 못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전도 불사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일본도 그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이 비밀정보의 정확성, 즉 영국이 일본을 무력으로 침공할 가능성은 희박하였다고는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이 일본을 공격한다는 풍설이 널리 유포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 일본은 1837년 비무장이었던 미국의 모리슨호의 입항을 무력으로 막았는데, 막부는 이 배를 영국 상선으로 오인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보복 가능성을 경계하던 터였다. 그리고 두 정보는 그 신빙성을 상호보완해주는 내용이었기에 막부의 위기의식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막부는 청과 네덜란드의 배를 제외하고 무조건 격퇴한다는 이국선타불령(異國船打拂令)을 철회하고 표류해오는 외국선박에게 식량과 물, 땔감 등의 물자를 제공하여 그들이 귀환할 수 있도록 인정을 베푸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어 에도만(灣) 방비체제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1842년에 난징조약이 조인되어 제1차 아편전쟁이 종결되자 이에 관한 정보가 청 상인에게서 전래된다. 이들이 가져온 당풍설서에는 영국의 사포 공격, 진강 점령, 홍콩과 하문 등지의 개항에 대한 사실과 전쟁의 종결 소식이 담겨 있었다. 청이 항구를 개항해 교역을 허가하고 영국군이 귀국한 사실을 전하면서도 이것이 청의 패배로 인한 굴욕적 조약의 결과라는 것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영국군의
사마천의 『史記』를 통해 본 위만조선Ⅰ. 머리말Ⅱ. 『사기』의 특징과 의의Ⅲ.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Ⅳ. 『사기』를 통해 본 위만조선의 논쟁점(1) 위만조선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2) 패수의 위치는 어디인가?(3)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인가?Ⅴ. 맺음말Ⅰ. 머리말한국 고대사는 사료의 부족함에 허덕이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나라의 사료 중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사서는 고려 중기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일 정도이다. 그나마도 초기의 기록은 그 신빙성이 의심받고 있는 상태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을 중국 사서에 의존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이렇듯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고질적인 문제인 사료의 부족은 고조선에 들어서면 더욱 심화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고조선의 기록이 전무하지는 않다. 『관자』, 『위략』, 『산해경』, 『사기』 등의 사서들에 고조선이 등장한다.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사서 중 하나가 바로 사마천의 『사기』이다.『관자』는 고조선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나는 사서이지만 고조선에 대한 단서는 단편적인 내용에 그친다. 또한 『산해경』은 고조선의 지리적인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지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산해경만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비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보다 자세한 것은 『삼국지』가 인용한 『위략』과 사마천의 『사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위에 언급한 사서들도 인용하겠지만 『사기』를 중점적으로 고조선, 특히 위만조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사기』의 특징과 의의『사기』는 전한(前漢) 한 무제 때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로 기전체로 서술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는 중국의 역대 황제의 내용을 수록한 사서이며 《세가》는 제후들의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그 외의 인물, 국가 등은 《열전》에 수록되어 있下?)이라는 곳에 살면서 주변의 진번, 조선의 만이 및 옛날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해온 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이 당시는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효혜제와 고후 무렵이었다. 이 무렵 위만은 요동 태수와 협약을 맺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외신이 되어 요새 바깥의 만이를 보호하여 침범하거나 노략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로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말라.”遼東太守?約??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이 약조를 천자가 허락하니, 위만은 군사와 재물을 갖게 되어 주위의 마을을 침략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진번과 임둔도 복속해왔으므로 사방 땅이 수천 리나 되었다고 전한다.그 후의 기록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대로 전환된다. 이 즈음에는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백성이 늘어났으며, 조선이 한나라에 입조하지도 않고 주변 나라들이 한나라와 통하는 것도 중간에서 막았다고 전한다.이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파견해 우거를 달래려 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섭하가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렀을 때 그를 전송하러 나온 조선의 비왕(裨王)을 찔러 죽인다. 그리고 천자에게 이를 아뢰자 천자는 섭하를 요동의 동부 도위로 삼는데, 조선은 이에 원한을 품고 군사를 출통시켜 섭하를 살해한다.이에 한나라는 죄수들을 모아 조선을 친다.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제나라에서 발해를 건너가게 한다. 그리고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에서 나가 우거를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다 패하였으므로 참수되었으며 누선장군은 7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으나 우거가 병력이 적은 것을 간파하고 공격하여 누선을 공격하니 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좌장군 역시 패수 서쪽의 조선 군대를 공격했으나 무찌르지 못하고 나아가지 못했다.이에 위산을 통해 고조선의 왕인 우거와 교섭을 하게 되는데 우거는 천자의 사절을 보고 사과하며 항복의 의棄市)형에 처해지고 누선장군 역시 군사를 잃은 죄로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이상의 내용이 『사기』 《조선열전》에 수록된 대략의 내용이다. 기사의 전반부는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된 내력과 우거왕까지의 고조선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이후의 내용은 한(漢)의 고조선 침공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열전》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고조선의 강역 및 중심지의 위치를 가늠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에 지명을 정확하게 비정(比定)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가령 패수(浿水)나 위만이 머물렀다는 진고공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漢四郡) 등은 그 위치가 예부터 논란이 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장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대략의 논란을 다루려 한다.Ⅳ. 『사기』를 통해 본 위만조선의 논쟁점(1)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라는 구절로 인하여 위만을 위시한 위만조선 건국의 중심세력을 중국계 유이민으로 보는 주장이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는 한국사의 여명은 중국계 사람들에 의해 열렸으며, 그것은 식민지적 성격을 띠는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일각에서는 위 구절의 위만의 출신을 연나라가 아닌 ‘옛’ 연나라 출신이라고 서술한 점을 들어 위만이 전한 때의 연나라 출신이 아닌 전국시대 연나라 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를 수용할 경우 위만은 한인(漢人)으로 연왕에 봉해진 노관과는 관련이 없으며 위만을 노관의 신하로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도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당시 “북상투를 틀고 만이의 차림새로 동쪽으로 달아났다.”라는 구절은 위만이 중국계 망명객이 아닌 연의 조선고지 점령에 의해 연인이 된 토착세력의 후손, 즉 고조선의 유민일 개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위만의 출신 및 정체성에 관한 기사는 위에 언급한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라는 단 한 구절만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추론컨대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을 신뢰하여 그를 믿고 총애하여 벼슬을경우 고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은 청천강 이남부터 대동강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자연적 경계가 없는 평탄한 지역이기 때문에 대동강의 남안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하지만 패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할 경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 패수가 청천강이라면 위만 집단이 요동을 넘어와 정착한 곳(진고공지)은 청천강 이남이 된다. 하지만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과 한나라의 서쪽 경계라고 말하기보다는 북쪽 경계로 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평양의 석암리에서 진시황 25년(기원전 222년)에 제작된 진과(秦戈)가 습득되었으나 이는 발굴을 통한 출토품이 아니며 이 시기에 고조선과 진 간의 외교 교섭이 있었던 만큼 진의 무력침공에 다른 유물이라고 단정키 어렵다. 그리고 『사기』를 참조하면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때 해군을 이끈 누선장군이 왕검성에 이르러 육군과 회합하고 성의 남쪽에 머물렀다. 이는 왕검성이 강의 북안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패수를 압록강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어떠한지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는 패수의 압록강설을 지지한 사람은 조선시대의 정약용과 이익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도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고 있다. 위와 같이 패수가 청천강이 아니라면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인 만번한(滿潘汗)은 청천강 즈음이며 한나라가 후퇴하고 경계로 삼은 패수가 압록강이고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가 진고공지가 된다는 것이다. 패수를 압록강으로 보는 주장은 평북 박천군 단산리에서 출토된 연제 양식의 와당이 출토된 사실과도 상치되지 않으며, 왕검성의 위치도 자연 대동강의 북안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사기의 기록과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패수의 위치는 청천강보다는 압록강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인다.이렇듯 패수는 청천강 또는 압록강설이 현재의 통설이다. 하지만 후에 언급할 고조선 중심지의 이론의 이설 중 하나인 재요령설에 따르면 패수의 위치는 대릉하로 비정된다. 이를 뒷받다. 첫째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시종 현재의 평양에 존재했다는 재평양설이고, 두 번째는 중심지가 요령성에 존재했다는 재요령설, 마지막은 중심지 이동설이다.먼저 재평양설의 입장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재평양설은 문자 그대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지속적으로 현재의 평양에 있었다는 학설이다. 이는 왕검성이 평양에 존재했다는 문헌상의 기록들을 신뢰하는 입장이며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군 유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례로 『삼국유사』를 참조하면 고조선의 도읍인 아사달은 평양이라고 나와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시기의 평양과 지금의 평양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에서 발굴된 낙랑군의 유적들은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였음을 방증하는 증거가 된다. 점제현 신사비를 비롯하여 봉니, 기와등이 출토되었고 최근 ‘낙랑초원사년 현별 호구통계문서’가 출토됨으로서 재평양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재평양설이 지니는 문제가 없지는 않다. 역설적이게도 재평양설의 증거와 마찬가지도 이에 대한 반론도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가 주를 이룬다. 『위략』은 기원전 4세기 경 연나라와의 각축에서 패퇴하여 서방 이천 리의 영토를 상실했다고 기술한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는 연나라의 침입 이전부터 영토가 한반도 서북부에 국한된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또한 재평양설의 내용을 따른다면 평양을 위시한 한반도 서북부가 고조선의 중심지이고 요동은 고조선의 변방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중심지인 평양에 오래된 양식의 청동검과 토기가 출토되고 변경지역인 요동지역에는 늦은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야 맞다.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은 이와는 상반되는 결과가 나왔다. 상대적으로 시기가 오래된 비파형동검은 평양지역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지만 요하지역에 집중적으로 출토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중심지가 시종일관 평양지역이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재평양설을 지지하는 증거도 있는 반면, 재평양설이 반증하는 내용이이다.
‘히든 피겨스’ 감상문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노골적인 차별이 횡행하는 사회 속에서 가려지고 억압 받는 게 당연한 집단 속에서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꿈을 성취한 이들을 다룬 작품이다. 1960년대 미국 흑인 여성. 여전히 흑백분리정책을 고수하는 버지니아 주에서 이들보다 더 극심한 차별을 받는 자들이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듯이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지 거의 한 세기가 흐른 시점임에도 흑인과 백인의 차별은 공공연했고 이들이 받는 차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통해서 각 분야의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역사 속에 한 획을 긋는 인물들이 되었다.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그 사회는 한 걸음 더 진일보할 수 있었으리라.그렇다면 이 영화를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보여준다고 한다면, 과연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차별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보면서 대리적 쾌감을 느끼는 것? 인간은 날 때부터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이고 예전의 우리는 영화 속 내용과 같이 잘못 된 역사를 걸어왔기에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보편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 어떠한 일을 성공하는 것에는 인종과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그것도 중요하고 느낄 수 있는 교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점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교훈은 바로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차별이 만연한 사회였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남성들은 은연중에 여성들을 자신들보다 열등하게 설정하고 있었다. 캐서린이 부서에 들어가자마자 쓰레기통을 비우라고 건네주고, 레드스톤과 아틀라스의 궤적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분석함에도 이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는 존슨 대령도 그녀가 나사에서 일한다고 하자 여성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고, 잭슨의 남편도 그녀가 나사의 엔지니어의 길을 도전하겠다고 하자 흑인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툰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의 결여가 표출된 것이다. 결국 이들 간의 갈등은 상대에 대해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해소된다.
냉전시기 미?소 우주개발史1969년 7월 21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1면“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을 태운 아폴로 11호의 착륙선이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면서 암스트롱이 말한 유명한 말이다. 인간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도 생중계될 정도로 당시 전 세계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간 우주개발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을 추월하였음을 선언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임과 동시에 지구 이외의 천체에 인류가 첫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우주경쟁의 시작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소련은 냉전체제의 성립 및 상호 간의 핵 공격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우주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렇듯 시작된 우주개발경쟁의 초기에 최초의 자리를 선점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1957년 10월 4일 지름 약 60cm, 무게 83kg인 스푸트니크 1호를 세계 최초로 우주로 발사하여 궤도에 안착시키는 것을 성공하였다.이 사실이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발표되자 당시의 서방진영은 소련의 핵위협에 대하여 가시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일명 ‘스푸트니크 쇼크’가 그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도 궤도에 안착하면서 미국은 부랴부랴 12월에 뱅가드 위성을 발사하지만 지면에서 불과 1.2m 떠오르고 추락하여 폭발하고 만다. 결국 이듬해 2월에야 무게 13kg의 익스플로러 1호가 V2의 개발자인 폰 브라운의 레드스톤 로켓에 실려 궤도에 진입한다. 이처럼 초반에는 소련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항상 위성 발사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1957년부터 3년간 소련은 13번의 위성 발사 중 6번의 성공에 그쳤다. 미국 또한 같은 기간 38번의 발사 시도 중 절반에 못 미치는 18번의 성공만 이루어냈다. 이렇듯 양국 간 초기의 우주개발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소련에 의해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생명체 우주 진출 등의 강렬한 타이틀을 빼앗긴 미국은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는 자신들이 이뤄내기 위해 머큐리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하지만 유인우주비행 역시 소련이 한 발 앞서나갔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1호 우주선으로 우주를 비행한 유리 가가린은 1시간 29분의 지구궤도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하였다. 4개월 후 소련은 보스토크 2호를 통해 티토프를 우주로 보내 지구궤도를 17번 선회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최초의 여성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슈코바가 보스토크6호를 타고 우주비행의 업적을 이루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의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시행한 이후에야 앨런 셰퍼트 해군 대령을 프리덤7호에 탑승시켜 단 15분의 준궤도 비행을 시행하는데 그치고 만다.* 준궤도비행? 지구궤도비행?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1시간 29분간의 지구궤도비행을 실시했다. 지구궤도비행은 인공위성같이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주구 주위를 도는 궤도를 말한다. 반면 미국이 처음 실시한 준궤도비행은 탄도비행이라고도 하며 사진과 같이 로켓이 발사되고 나서 인공위성처럼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탄도미사일처럼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비행을 말한다. 이듬해에는 미국도 지구궤도비행을 성공하였지만 소련에 비하여 궤도비행시간이나 우주비행사의 우주체류기간 등의 차이가 나면서 60년대 초반의 시기까지의 우주개발경쟁에 있어서 소련의 기술 격차 일정 부분 존재하고 있었다.이후 미국은 1962년 2월 프랜드십7호를 이용하여 지구궤도를 세 바퀴 선회하였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34시간동안 지구를 선회함으로써 소련과의 기술적 격차를 줄여나가기 시작하였다.반격의 시작, 아폴로계획이상과 같이 1960년대 초까지 발사체 및 우주개발 분야에서 소련은 미국보다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 이는 곧 냉전시기에서 미국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강력한 안보적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국은 소련에 대한 자국기술의 우월성을 입증해야 했고 이것이 1961년 5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연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달에 사람을 착륙시킨 후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 천명함으로써 아폴로계획의 시작과 미소 간 우주개발경쟁에서의 승리의 중요성을 알렸다. 아폴로 관련 예산은 1965년 미국 연방 전체 예산의 약 3.3%인 52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책정되었고 전체 아폴로 계획에 투입된 예산은 254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당시 미국의 집념은 대단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항공 우주국(NASA)도 아폴로 계획의 수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NASA는 아폴로의 설계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구 궤도에서 우주선의 도킹, 우주유영, 시스템 점검 등의 대비를 위해 제미니계획을 수립했다. 제미니계획은 유인 달 탐사에 필요한 여러 제반기술들을 시험하였다. 이후 아폴로 11호에 탑승하게 되는 우주비행사인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등도 제미니 계획에 참여하여 달 탐사에 필요한 선행과제들을 수행하였다. 이후 제미니12호의 발사를 끝으로 유인 달 탐사 계획은 아폴로로 넘어가게 된다.이렇듯 야심차게 시작한 아폴로 계획이었지만 시작부터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67년 1월 아폴로 1호의 발사 카운트다운 시험 중 합선사고로 선체 내부에 불이 나면서 거스 그리섬을 포함한 승무원 3명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우주비행사 사망자가 발생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서 아폴로 계획은 21개월간 중단되고 말았다.21개월간의 중단 이후에야 미국은 다시 아폴로 계획을 진행시켰다. 종전에 발생한 사고를 보완하였고, 아폴로 4,5,6호까지의 무인시험발사를 통해 실험을 마친 후 3명의 우주비행사가 탑승한 아폴로 7호가 발사되었다. 아폴로 7호는 최초로 비행 중 TV방송을 하여 전 세계 사람들이 우주의 광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2일간의 비행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이제 아폴로 8호부터는 본격적으로 달을 향해 나아갔다. 아폴로 8호는 달을 한 바퀴 돌고 지구로 귀환했으며, 아폴로 9호와 10호는 달 착륙에 대한 모의실험 등을 실시하였다.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착륙하기 위한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가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크 콜린스를 태우고 달을 향해 발사되었다. 이들은 4일간의 항해 끝에 7월 20일 고요의 바다에 착륙하였다. 세 명의 비행사 중 착륙선에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탑승하였고 암스트롱이 먼저 달 표면을 밟게 되었다. 암스트롱은 달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역사에 남을 말을 남겼다. 이 시기에 유행한 눈병에 아폴로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로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놀랄만한 사건이었다.*달 착륙 음모론?미국은 1969년 아폴로 11호를 시작으로 사고로 도중에 귀환한 아폴로 13호를 제외한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에 걸쳐 유인 달 탐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폴로는 달에 가지 않았으며 달에 다녀온 증거들은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주장은 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내세우기 위해 아폴로가 달에 갔다고 거짓으로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에는 과학기술의 불완전성 등으로 인해 달 탐사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달에서 찍은 사진의 모습이 조작되었다거나 일련의 달 탐사 과정에서 불가능한 부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폴로가 달에 방문하였고 실제로 우주비행사들이 달 표면을 탐사한 것은 사실이며 이는 그들이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레이저 반사경의 존재, 일본 등의 타국이 발사한 달 탐사선에 촬영된 달 표면에 남아있는 아폴로 탐사선의 모습 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증명이 가능하다. 달착륙 음모론은 단지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그 이후도킹 후 처음 만난양국 우주비행사들의 악수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이후 사고로 중간에 귀환한 아폴로 13호를 제외한 12호부터 17호까지 아폴로 11호를 포함하여 총 6번의 달 착륙을 하여 총 12명의 우주비행사들이 달 표면을 밟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본래 달에 착륙하는 아폴로 우주선은 20호까지 계획되어 있었지만, 아폴로 11호의 착륙 이후부터 늘어난 국민적 무관심과 베트남전, 예산의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달에 착륙하는 아폴로 우주서는 17호까지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2년 4월 아폴로 17호가 발사된 지 한 달 후인 1972년 5월 24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코시긴 수상이 미소우주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미국과 소련 간 우주의 평화적 조사 및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폐기되었던 아폴로 18호는 비록 달은 아니었지만 우주를 향해 발사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소유즈 19호를 발사하였고 1975년 7월 17일 대서양 상공해서 양국의 우주선이 도킹하는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는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소간의 냉전이 다소 완화(데탕트)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로 거의 20년간 우주과학 분야에서 경쟁에 몰두하던 양국은 우주에서 서로 만나 화합하는 상징적인 만남이 연출되었다.
목면(木棉)의 보급과 의복의 발달Ⅰ. 목화의 전래1. 목화 전래 이전의 면직물문헌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면직물 관련 사료는 660년 당(唐) 시기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한 『한원(翰苑)』에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제조하였음을 언급한 기록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당나라에 대한 진헌품의 하나로 백첩포(白?布)를 보낸 사례도 보이고 있으며 고려 혜종 2년(945) 고려에서 후진(後晉)에 보낸 공물에서도 나타난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종래에는 삼국시대에도 면직물이 존재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자료가 전무하였다. 그러던 중 1999년 부여 능산리 사지 6차 발굴조사에서 면직물이 출토되었고 2010년 조사를 통해 백제의 면직물임이 확인되면서 삼국시대에도 면직물 제조가 이루어졌음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이후 기록에는 면직물 관련 내용이 나타나지 않아 이 시기의 면직물이 직접 재배되어 제조되었는지 확실치 않고 설령 재배가 이루어졌더라도 보편화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이렇게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직물수공업은 고려 중기에 접어들어 견직물(비단)?저직물(모시)?마직물(삼베) 등에 걸쳐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원과의 대외무역에 있어 견직물, 모시 등의 물품이 인기를 누리며 생산량이 급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구조는 원에 종속되어 특정 물품에만 집중되는 왜곡된 구조였다. 이후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역구조가 바뀌었고 이에 따라 그동안 호황을 누리던 직물수공업도 침체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교역구조의 변화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 고려의 직물과 의복은 지배층 위주의 견직물?저직물 일변도에서 벗어나려 하였는데 이 때 새로운 의복의 소재로써 마침 도입되어 보급이 시작되던 목면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친원세력을 축출하려는 공민왕은 목면의 도입과 보급을 통해 원에 종속되었던 경제체계를 떨쳐내고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2. 고려 후기 목 당시를 회상하며 읊은 것이다. 위 시구에는 강남 출신인 섭공소(葉孔昭)가 이색에게 목면 종자를 보내겠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문익점 이전에도 원을 통하여 목화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원과의 교류를 통하여 목면은 고려로 상당량이 유입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원 황제의 사여품 형식으로 들여오거나 사행무역을 통해서도 유입되었기 때문에 고려에 목면이 전래된 것 자체는 문익점 이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그럼에도 당대부터 문익점을 목면 도입의 선구자로 인식한 것은 그가 목면 종자를 들여와 재배하였을 뿐 아니라 목면의 직조를 위한 기기의 도입과 보급을 더불어 시도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2) 문익점의 사행(使行)과 목면의 도입문익점이 원에서부터 목면 종자를 고려로 가져온 시기는 공민왕 13년(1364)으로 파악된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이공수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문익점의 사행은 공민왕의 폐립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찬성사 이공수가 입원(入元)한 것은 원의 공민왕 폐립 소식을 듣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문익점은 이때 원에 의해 옹립된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 정권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익점의 이러한 행동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이었는지는 기록에 따라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문익점은 고려에 침범한 덕흥군 세력이 패하여 실각하고 난 뒤에 귀국할 수 있었지만 고려에 돌아온 후 덕흥군 측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인하여 벼슬에서 파직 당하였고 우왕이 즉위한 1375년까지 정계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시기에 문익점은 경상남도 진주 강성현으로 돌아와 고려로 귀국할 때 원에서 가져온 목면 종자로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를 시도하였다.문익점이 종자를 얻게 된 경로에 관하여는 원의 억류에서 빠져나와 강남지방을 유람하다 목면의 종자를 얻었다는 설과 당시 양자강이남 지역은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유배 혹은 유람이 제한적이었을 점을을 잃고서, “이것은 목면화로 우리나라에서는 법으로 엄하게 금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이것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른께서 이것이 욕심나시거든 모름지기 몰래 감추시어서 수색당하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 붓대 속에다 넣어 가지고 왔다.목면 종자를 몰래 들여왔다는 내용의 서술은 이후 조식의 『목면화기』와 남지의 『세조조사제문』, 『정조실록』에 언급되면서 문익점이 목면 종자를 몰래 들여온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익점이 목면종자를 들여오기 전부터 고려에 목화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고, 무역을 통해서 목화가 유입된 점, 당대의 기록인 『고려사』와 『태조실록』에서는 목면 종자를 몰래 들여왔다는 설명이 없다는 점으로 보아 가전의 이야기는 문익점의 공을 부각하고 목면 도입의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려 한 데서 나온 이야기로 파악된다.Ⅱ. 목면의 보급과 확산1. 목면의 보급과 방직기구의 발명문익점이 목면 종자를 고려로 들여오는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목화를 길러 재배한 다음 이를 보급하는 것은 또 다른 숙제였다. 문익점은 가져온 목면 종자를 장인인 정천익과 나누어 재배를 시도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참조된다.“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써 본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승려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목면의 종자를 가지고 왔고 그의 장인인 정천익이 심은 목화가 살아남아 크게 번성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처음 재배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크게 번식하였다고 언급되어있고, 『태조실록』에는 10년이 되지 않아 나라에 보급되었다고 말한다. 목면의 보급상황과 관련한 내용은 다음의 사료들이 참조된다.“인가의 자손들은 간혹 집이 가난하고 돈이 없으면, 비단으로 된 요와 이불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세월을 늦추다가 혼인에 적절한 때를 놓치기도 합니다. …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혼인하는 집에서는 오로지 면포만을 사용하게 하고 이국(異國)의 물건을 일체 금지하실 것이며 …”『고려사절요』권35 공양왕(恭讓王) 3년 3월“문익점(文益漸)이 처음 강남(江南)에 들어가서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 진양(晉陽) 촌집에 보내어, 비로소 목면을 짜서 진상(進上)하였으니, 이 때문에 목면의 일어남이 진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어, 모든 백성들이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익점이 준 것입니다.”『태종실록』1권 태종 1년 윤3월 1일 경인(庚寅)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공양왕 3년(1391)에 백성들의 혼인에 값비싼 비단 대신 면포를 사용한 요와 이불을 사용케 할 것을 아뢰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이미 고려 말기부터 서민들의 일상에 목면이 광범위하게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실록의 기사를 참조하면 목면이 온 나라에 퍼지고 모든 백성들이 입게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여 목면 보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특기할만한 사실은 기록상에 보이는 목면 재배와 보급에 정천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목면 재배와 더불어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방직기기의 활용이 필수적인데 고려사에는 목면 방직에 필요한 취자거와 소사거를 정천익이 발명하였다 하고 태조실록에는 정천익이 중국 승려인 홍원에게 베 짜는 기술을 배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고려사의 기록은 과장된 표현으로 보이고 실제로는다. 목면의 재배는 직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에 목면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고 뛰어난 생산성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의복은 마포에서 면포로 변화하게 된다.2) 경제적 변화목면의 보급이 가져온 혁신은 비단 보온성을 무기로 한 의복의 변화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목면은 그동안 주로 사용되어왔던 마포와 견주어 엄청난 노동시간의 절감을 불러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방직과정에서 같은 양의 실을 만드는 데 면은 마에 비하여 1/5의 노동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이는 수확 후 방직까지의 일련의 노동이 타 작물은 원시적인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었음에 반해 목면은 씨아, 활, 물레 등의 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월등한 노동생산성을 바탕으로 목면은 도입되자마자 급속히 확산되었고, 더불어 목면의 뛰어난 보온성도 그 동안 동절기에 마포를 입기 위해 들였던 노동력의 절감에 이바지했다.이러한 직물업의 노동생산성 향상은 생산량의 증대로 귀결되었다. 같은 노동시간에 더 많은 양의 면포를 생산한다는 것은 농가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생산력 발전을 바탕으로 경제구조의 많은 파급효과를 불러왔는데, 목면생산이 늘어나면서 면포는 15세기 후반부터 마포로부터 정포(正布)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특히 군역이나 요역, 공부에 대한 면포로의 대납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농가의 경영이 쌀과 더불어 면작(棉作)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뜻하고 이는 소농민이 농업경영에 있어서 자율성과 생산성을 상당부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문익점과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Ⅰ. 문익점(文益漸)문익점은 고려 말기에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삼우(三憂)란 국운의 불진, 성리학의 불전, 자기학문의 불성을 걱정한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그는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하고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에 좌정언이 되었으며 이 시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사행한다.『고려사』에 따르면 원나라에 사신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