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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익점과 목면에 관련된 답사집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목면(木棉)의 보급과 의복의 발달
Ⅰ. 목화의 전래
1. 목화 전래 이전의 면직물
2. 고려 후기 목면의 도입
Ⅱ. 목면의 보급과 확산
1. 목면의 보급과 방직기구의 발명
2. 목화 전래 이후의 사회변화
2) 문익점과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Ⅰ. 문익점(文益漸)
Ⅱ. 산청 목면시배유지(木綿始培遺址)
본문내용
문헌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면직물 관련 사료는 660년 당(唐) 시기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한 『한원(翰苑)』에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제조하였음을 언급한 기록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당나라에 대한 진헌품의 하나로 백첩포(白氎布)를 보낸 사례도 보이고 있으며 고려 혜종 2년(945) 고려에서 후진(後晉)에 보낸 공물에서도 나타난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종래에는 삼국시대에도 면직물이 존재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자료가 전무하였다. 그러던 중 1999년 부여 능산리 사지 6차 발굴조사에서 면직물이 출토되었고 2010년 조사를 통해 백제의 면직물임이 확인되면서 삼국시대에도 면직물 제조가 이루어졌음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이후 기록에는 면직물 관련 내용이 나타나지 않아 이 시기의 면직물이 직접 재배되어 제조되었는지 확실치 않고 설령 재배가 이루어졌더라도 보편화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직물수공업은 고려 중기에 접어들어 견직물(비단)‧저직물(모시)‧마직물(삼베) 등에 걸쳐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원과의 대외무역에 있어 견직물, 모시 등의 물품이 인기를 누리며 생산량이 급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구조는 원에 종속되어 특정 물품에만 집중되는 왜곡된 구조였다. 이후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역구조가 바뀌었고 이에 따라 그동안 호황을 누리던 직물수공업도 침체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교역구조의 변화와 사회의 흐름 속에서 고려의 직물과 의복은 지배층 위주의 견직물‧저직물 일변도에서 벗어나려 하였는데 이 때 새로운 의복의 소재로써 마침 도입되어 보급이 시작되던 목면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친원세력을 축출하려는 공민왕은 목면의 도입과 보급을 통해 원에 종속되었던 경제체계를 떨쳐내고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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