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발언찬성 측 변론 잘 들었습니다. 반대 측 최종발언 시작하겠습니다.저희는 현재 대한민국이 휴전 상태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 그렇기에 섣부른 모병제로의 전환은 국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에도 치명적이라는 것을 입론과 반론에서 충분히 저희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찬성 측의 입론과 반론에서 나타나는 약점과 모순들을 지적하려 합니다.먼저, 찬성 측께서는 입론에서 대한민국은 북한과 휴전 상태에 있으며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모병제라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특히 입대하길 원하지 않는 국민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병력 모집에 대한 어려움과 국가 안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국가 공리의 이익만을 근거로 들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 안보의 긴장을 늦춰선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두번째로 찬성 측께서는 모병제를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징병제 또한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징병제가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 점을 부분 인정합니다. 일부 강제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라면, 징병제가 모병제보다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징병제는 최소한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병제는 돈과 사회적 인식이라는 결과, 즉 경향성 동기를 내세워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합니다. 하지만 칸트는 경향성 동기가 아닌 의무 동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의무 동기를 따르는 것을 먼저 기초로 삼아야 칸트가 주장한 인간 존엄성의 개념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징병제는 모병제보다 결과가 아닌, 애국심이라는 동기를 가지고 입대를 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다고 생각합니다.세번째로 찬성 측께서는 개인의 자유권에 대한 개념을 입론과 반론에서 명확히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권은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서 모두 강조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자유권이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 찬성 측께서는 주장을 펼침에 있어 중요한 바탕이 되는 자유권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내리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칸트와 롤스는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명확하게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내린 선택이 실제로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다양한 각도, 즉 칸트와 롤스의 입장에서 예를 들며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저희 측에서 모병제를 실시할 경우에 발생되는 부족한 병력을 메우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 공리주의의 입장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성 측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들어 반박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를 중심 입장으로 취한 찬성 측이 주장한 모병제가, 실제로는 공리를 증진시키지 못한다고 저희 측에서 반박했던 근거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국가 안보라는 것은 대권 주자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꼽을 만큼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고 중요한 주제입니다. 국가가 안전해야 그 다음 정치와 경제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 안보를 실현해 나감에 있어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결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 강조하며 이상 반대 측 최종발언 마치겠습니다.
반론모병제 도입에 관한 반대 측 반론자 OOO입니다. 지금부터 반대 측 반론 시작하겠습니다.먼저, 찬성 측에서는 모병제가 국방력을 강화시키고 전쟁 시 징병제를 실시했을 때보다 국가 공리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병제는 국방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공리 또한 감소시킵니다. 휴전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병력의 수는 국방력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모병제를 실시하게 되면 병력의 수가 감소되기 때문에 국방력 강화라는 결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만약 모병제를 도입한다면, 기대되는 병력의 수는 약 15만 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미국외교협회(CFR)는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최소 45만 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병력 부족은 국방력의 약화를 의미하며, 이는 국가 공리의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그렇다면 부족한 병력을 내부적으로, 또는 외부적으로 충당시켜야 하는데, 모두 막대한 비용 지출을 필요로 합니다. 먼저 모병제를 실시하는 여러 국가에서는 지원율이 낮아 정해진 인원을 충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공통적으로 발생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군인의 급여와 복지수준을 향상시킬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추가적인 예산이 발생할 것입니다.다음으로 외부적인 방법에는 용병 제도와 첨단장비를 구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용병 제도는 애국심과 신뢰도가 낮다는 문제가 발생하며, 첨단장비의 구비 또한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이로써 국방예산이 증가하며, 국민의 세금부담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따라서 모병제로 인한 사회적 공리 증진의 총합보다 국방 예산의 증가와 국민의 세금 부담, 국방력 약화에 따른 국민들의 고통, 피해의 총합이 더욱 크기 때문에 모병제는 공리주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습니다.두 번째, 찬성 측은 모병제가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권을 보장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병제가 자유권을 온전히 보장한다고 평면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대안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강제적 요소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모병제를 옹호한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모병제가 개인의 자유권을 완벽히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임의적 요소가 강제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출생과 같이 타고난 환경은 우리가 노력한 결과가 아닌 임의적, 즉 무작위로 정해지는 요소입니다. 롤스는 우리의 선택에는 임의의 요소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고, 그것이 선택의 근거로 작용한다면 자유로운 선택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어려운 가정 환경이라는 임의적 요소가 군에 지원하는 강제적인 이유가 된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병제는 개인의 자유권을 완전히 보장하지 못합니다.마지막으로, 찬성 측은 모병제 실시에 따른 군 급여의 인상이 개인의 생산성 증가로 인한 국내 총생산의 증가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군 급여의 인상은 계층 간 소득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사회 전체의 공리를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찬성 측 주장은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습니다.먼저 군 급여가 인상되는 이유는, 부족 병력 충당을 위해 군대 내의 급여와 복지혜택의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오르는 것이며, 찬성 측에서 제시한 국내 총생산이 증가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다음으로 군인 급여의 인상이 소득 불평등을 완화시켜 사회 전체의 공리를 높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소득 불평등의 완화만으로 사회 전체의 공리가 증가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러한 군대 내 복지와 급여의 인상은 결국 국민의 세금 부담 증가로 이어지게 됩니다.따라서 급여의 인상이 소득 불평등을 조금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국민의 세금 부담은 증가하기 때문에 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아지게 됩니다. 이 결과는 오히려 계층 간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병제는 소득 불평등 완화만으로 사회 전체의 공리를 증진시킬 수 없습니다.이상으로 반대 측 반론 마치겠습니다.
저희 찬성 측의 최종 발언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먼저 반대 측에 저희의 입장을 한 번 더 명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주로 내세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피해자를 포함한 우리 국민들이 더욱 안전한 사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 저희의 정확한 입장입니다. 즉,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함에 대한 알 권리를 주장하는 바입니다.이제 반대 측의 반론에 대해 몇 가지 짚고 최종적인 결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첫 번째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반론하신 부분입니다. 물론 개인의 사생활을 국가가 침해해서는 안되고 범죄자도 우리나라 국민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범죄자는 헌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국민의 책임을 먼저 다하지 않았습니다. 형법을 어기고, 헌법을 어기면서까지 인륜을 저버린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해버리자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권리를 앗아간 자의 권리를 존중해주기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두 번째는 신상공개 제도의 부작용에 국민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전까지 신상공개제도가 연좌의 성격을 일정부분 갖고 있었다는 점 인정합니다. 그러나 점점 이것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감자들의 자녀를 돕는 단체인 ‘세움’의 이경림 상임이사는 신상공개로 인해 범죄자 자녀들이 낙인에 시달리고 있음은 인정했지만 신상공개제도 완화로 그 가혹함을 덜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지원하고 보듬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실제 범죄자들의 가족들을 지원 및 보호하였을 때, 그들의 재범률이 25%에서 5% 대로 대폭 감소하였음을 밝혔습니다. 신상공개제도의 이점을 가지고 가면서도 이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한 대안을 만드는 것은 재범률을 더더욱 낮추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세 번째로 짧게 지적하고 싶은 바는 나치 때를 예로 드시면서 우리의 여론 중심적 사회가 포퓰리즘에 빠질 것이라 하신 부분입니다. 일단, 그 당시의 국민의식과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의식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논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시민의식이 그만큼 낮지 않고 이 제도가 차후 어떤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신상공개에 대한 여론이 특정 세력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국민 청원과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최종적으로 저희의 결론 말씀드리겠습니다.이수정 범죄 심리학자는 지난 n번방 사건 때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피해자만 너희에게 신상이 공개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의 신상도 충분히 공개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해서라도 범죄의 폐해를 알리는데에 일조해야한다.’ 이처럼 범죄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통해 다른 범죄를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신상공개가 실효성이 눈에 띄는 문제 해결책이 아님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범죄율과 재범률을 조금이라도 낮추는 것을 가장 중요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해서, 신상공개제도의 시행이 새로운 범죄를 억제하여 사회를 어느정도 방위할 수 있음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범죄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신상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경각심을 줄 수 있었던 부분마저 사라져 수감자들과 잠재적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더욱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반론 심문반대 측 반론 잘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반론 심문 시작하겠습니다.1. 반대 측께선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시며 헌법 제17조의 내용을 들어주셨습니다. 맞습니까?2. 대한민국 헌법 제2장 37조에서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점 말씀드리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3. 반대 측께선 국민의 알권리로 인한 부작용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알권리가 책임이 없는 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까?4. 또한 그 예로 범죄자 조성호의 신상이 공개가 되었을 때, 일부 시민들이 SNS를 통해 관련된 가족, 그리고 지인들의 신상을 알아냈던 사례를 들어주셨습니다. 맞습니까?5. 범죄자와 관련한 무고한 제3자의 신상을 공개하였던 시민들은 명예훼손 및 모욕죄 등으로 처벌받았다는 점 알고 계십니까?- 이 사례만 보아도 국민들이 부작용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반대 측 주장과는 다르며, 더 나아가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 무조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주장은 반대 측이 과대 해석을 하고 계신 점을 말씀드립니다.6. 반대 측께선 저희가 논거로 제시하였던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 형벌론을 근거로 들어, 신상공개제도가 형벌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맞습니까?7. 그리고 이것이 형벌이 아닌 보안처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신상공개제도와 모순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까?8. 저희는 범죄자의 신상공개제도가 형벌적 정당성을 따지려는 것이 아닌, 앞서 입론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상공개라는 제도가 사회 유지를 위해 공익적 성격, 즉 범죄 예방적 성격으로써의 유지를 주장한 것임을 말씀드리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9. 반대 측께선 현재 운영 중인 성범죄자 신상공개 사이트인 ‘성범죄자 알림e’의 이용률이 감소하고 신뢰성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맞습니까?10. 물론 ‘성범죄자 알림e’라는 서비스를 처음 시행했을 때보다는 현재 이용률이 감소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상공개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운영상 문제라는 점 인정하십니까? 예, 아니오로 대답해 주십시오.11. 앞서 반대 측이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성범죄자 알림e’는 모든 성범죄자의 신상공개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며, 아이핀과 같은 인증절차를 통해야만 열람이 가능하기 때문에 접근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관련 제도를 보완하고 확대해 나갈 문제지, 신상공개제도 자체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말씀드리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12. 반대 측께선 “국민 여론에 의한” 법률 제정 및 수정이 포퓰리즘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13. 그렇다면 반대 측은 포퓰리즘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조선의 지존至尊인 국왕과 조선의 지광至廣인 양반,그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에 대하여조선 국왕의 일생 과 조선 양반의 일생 을 읽고학과 학번 이름어릴 때 나는 사극들을 접하면서 막연하게 대통령을 꿈꾸었었다. 사극에 나오는 왕의 모습을 보면서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고 단순히 생각해서 그런 꿈을 가졌던 것 같다. 물론 현대 사회의 대통령은 삼권 분립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고 그중 행정부를 수반하는 직책이며 ‘옛날의 왕’하면 떠오르는 강력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조선의 왕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고, 실제로 왕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체감하고 싶어 조선 국왕의 일생 을 읽게 되었다.우선 왕이라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를 연상하기 쉽다. 왕은 한 국가의 소유자이고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왕을 일러 모든 사람보다 존귀하다는 뜻인 지존至尊이라고 까지 불렀으니 왕의 자리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단지 왕이라는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힘들고 고된 업무의 연속이며 일반 사대부보다 다방면으로 뛰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공부해야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이나 승정원일기 에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쓰여 있을 정도로 왕은 모든 사생활을 감시받았고 그것을 계속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다. 후대에 와서 우리는 그것이 엄청난 기록문화 유산을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를 배우고 선대의 삶에 대해 파악하지만, 그 당시 왕들이 받았을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왕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왕의 교육앞서 말했듯 왕은 평생동안 수많은 교육을 받았다. 왕자로 태어나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보양청 교육, 강학청 교육, 서연書筵이란 교육과정을 거쳤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경연經筵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재밌는 건 왕이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관통고』라는 방대한 전례서를 편찬하였다. 이는 정조가 예악 정치의 구현을 위해서 국가 전례를 정비한 것인데, 이로 보아 예제를 통해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은 이 중요한 국가 전례를 모두 주관해야 했고, 예제의 종류가 많은 데다 절차 또한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사전에 다양한 예제를 익혀둬야만 했다. 따라서 왕세자는 국가 전례를 참관하기도 하고 실습도 하며 예제의 복잡한 절차를 익히고 추후 그것을 원만하게 수행하도록 하였다.세 번째, 경전과 역사 교육을 받았다. 경전 교육은 사서삼경을 통해 덕성을 함양했고,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통해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갖추도록 하였다. 지식보다 덕성을 중요시한 왕실은 먼저 덕성을 교육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단련한 후에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왕실 교육에는 매우 많은 교재가 사용되었는데, 예에 관한 교재( 소학 , 삼강행실 등), 역사에 관한 교재( 자치통감강목 , 국조보감 등), 성리학에 관한 교재( 대학연의 , 역학계몽 , 성학집요 등)가 있다. 게다가 이런 많은 책들을 배우고 공부하여 평가시험까지 본다. 왕세자의 교육 중에는 회강 시간이 있었는데, 이 시간에는 그동안 배운 내용을 종합 평가했다. 여기에는 왕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모두 참석하고 왕이 참관하기도 하였다.이렇게까지 많은 책들을 배우고 또 공부하여 시험까지 보는 이유는 국왕은 신하가 올리는 문서를 읽고 처리할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새 정책을 시행할 때, 유학 경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일관되게 표현을 해야 했고,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사례를 거론하며 그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추가로 어느 정도의 예술적 능력까지 기르면 이로써 왕이 되기 위한 왕실 교육이 끝난다.이러한 수많은 과정을 거쳐 훌륭한 왕이 길러지면 훌륭한 정치로까지 나타났다. 이는 세종실록 의 “세종이 다스린 30년 동안 백성들은 그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기뻐영조는 청계천 준설과 같은 토목공사를 직접 현장에 나아가 시찰, 감독하기도 했으며, 정조는 수원으로 옮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에 자주 왕래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상을 확인하고 민원을 직접 들으며 이를 국정에 반영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생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 좋은 제도여도 실제로 그것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기의 시대 상황에는 그것이 어려울 수 있겠지만, 관리에게만 보고받을 것이 아니라 국왕이 실제로 궁궐 밖으로 나가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하여 실제 정책에 반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영·정조가 적극적으로 백성의 목소리를 들어 어려움과 불편함을 개선하려 노력하였고, 이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또한 왕의 국정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신에 대한 제사였다. 조선인들은 국가와 왕실, 백성을 보위하는 중요한 힘이 신에게 있다고 믿었기에 이를 제대로 섬기고자 노력했다. 여러 제사 가운데, 국왕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직 제사와 종묘 제사였다. 사직 제사는 토지신과 농업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이 생산의 중심이 되는 사회였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국왕은 제사를 통해 신에게 늘 풍년을 기원했다. 종묘 제사는 국왕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였기 때문에 횟수나 규모가 다른 여느 제사들보다 매우 컸다. 국왕은 이러한 제사들을 담당하는 주재였다. 따라서 제사의 날짜와 절차, 의식 등을 왕이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한 의식과 절차를 자세히 규정하여 항상성을 지니는 것이 중요했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 에 그것이 잘 정리되어 있다.반면 궁궐 안에서의 국정 수행은 대부분 정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왕과 신하들은 자주 소통하며 업무를 보고받고 의견 수렴을 거쳐서 새로운 결정이 내려지고 경연은 태조 즉위 초에 제도가 정비되어 시행되었고 세종대에 들어서는 집현전이 이를 전담했다. 하지만 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경연도 사라졌지만 성종대에 경연이 다시 시행되었다.왕의 학문조선 시대의 왕은 어떤 책으로 공부를 하고 어떻게 하였을까? 다른 사대부들과 똑같은 책으로 공부를 하였을까 아니면 구체적으로 제왕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였을까?조선 시대의 왕도 당시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을 받고, 통치하는 데서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은 알다시피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성리학은 사대부를 정치의 주체로 설정했는데,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삼은 고려 시대의 국왕 중심 정치체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먼저 고려 시대 경연에서는 정관정요貞觀政要 를 주로 읽었는데, 황제를 절대자로 설정해놓고 신하들이 그 절대자를 잘 보좌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왕이 잘못을 하더라도 정관정요 에 그 내용이 없다면 신하들이 왕을 제지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왕을 성인聖人으로 만들 수 없었고, 이에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택하여 국왕에 대해서도 성리학적 수양론을 통해 성인聖人군주로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관점에서 제왕학의 지침을 제시한 대학연의 가 교육과 정치사상의 지침서가 되었다.하지만 대학연의 는 제왕을 중심에 두고 모든 정치를 풀어가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전기에 강력했던 국왕권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신하 중심의 정치체제가 아닌 여전히 왕 중심의 정치체제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훈구파의 각종 정치, 경제적 비리가 발생하여 사림파와 갈등을 빚었고 거의 학살에 가까운 사화士禍가 발생하게 되어 사림파들은 패배한다. 이것이 제왕학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각각 성학십도聖學十圖 와 성학집요聖學輯要 를 집필하여 제왕학으로 제시했다. 그 중 성학집요 는 군주를 사대부의 일원으로 여겨 사대부 논리를 실현하고 따르번 “상위복”이라 외치는데, 유교에서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유교의 예법에서 떠난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대상마다 다른데, 조선의 왕은 5일을 기다렸고 그 후에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 닷새간은 장례 준비 또한 하는 기간이었는데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 입히는 습襲, 옷과 이불로 시체를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이 진행되었다. 대렴이 끝나면 시신을 관에 넣었다. 입관 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다. 이 기간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이라고 하는데, 국장 기간 동안 후계왕은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했다. 국장 행렬은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며 수많은 인원이 참여한다. 예를 들어, 1800년 정조의 국장 행렬에는 총 약 144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왕릉 또한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사신사四神沙를 기본으로 하는 일반적인 풍수지리를 따른 명당을 선정했다.앞서 말했던 것처럼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추모(이른바 삼년상)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예법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고 왕릉 입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현종대에 일어난 예송논쟁이 있다. 인조의 계비였던 조계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서인(대표적으로 송시열)과 남인(대표적으로 윤휴)가 설전을 벌였다. 결국 이 논쟁은 점차 당파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정치 논쟁으로 비화되어 숙종대에 ‘환국’이 발생하게 된다. 백성들은 하루 살기 바쁘고 생활이 각박해지는데 정작 고위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운다는 것에 기분이 씁쓸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지금까지 왕의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조선의 바탕을 구성하고, 국왕을 떠받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을 견제하는 존재였던 양반에 대해 궁금했다. 따라서 조선 양반의 일생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