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인생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부푸는 과정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아득하다. 이 아득함 속에서 나와 너는 가깝고도 먼 사이다. 알고 지낸 세월, 연락 빈도수, 선물 따위의 친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객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지표로 관계를 지속하는 자는 서로 다른 기준에 속상해하며 자기의 기준을 낮추지 못하고 상대방을 재촉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지표를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보고 싶다. 책을 읽는 동안 어렸을 적에는 꽤 친했는데 지금은 가끔 안부 전화나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이 이야기는 외로움으로 들끓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한 명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태어나서 제각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내면의 욕구를 표출하는 방식은 달라도 모두 동일한 마음을 품은 자들로 나는 바라보았다. 외로움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어린 왕자가 찾아간다. 그들은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외로운 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 상태는 어린 왕자가 찾아왔을 때 정면으로 드러난다.어린 왕자의 마음 상태는 그가 바라봤던 해가 저무는 풍경만큼이나 쓸쓸했다. 그는 혼자였을 때에는 해가 저무는 풍경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견뎌냈지만 장미를 만남으로써 그의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모두가 외로워 보이지만 정작 외로움을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캐릭터는 어린 왕자 밖에 없다.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홀로 있을 때는 관계에의 외로움을 떠올릴 수 없었고, 같이 있을 때는 홀로 있을 때의 외로움을 잊어버린다. 만나고 헤어져도, 지나온 만남들이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있어서 외로운 것인지 어린 왕자의 외침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떠나려고 했으나 결국 마음으로 장미에게 돌아갔음을 발견한다. 버리고 외면하며 살아온 그 만남은 끊어낼 수 없는 사랑이었다. 장미를 가련하게 생각하는 어린 왕자 자신도 장미와 다를 바 없이 사랑받길 원했다.오래된 친구는 어린 시절 평생 친구하자고 다짐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은 만남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래된 친구는 ‘오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완전성을 갖는다. 친구는 낡은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낡은 사람으로 남지 않고 서로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성장해나간다. 누군가에게 친구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일이다. 당연하게 친구로 생각해왔던 모든 이들에게 나의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더 예쁘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싶다.내 친구들은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없이 도와주었다. 그들을 통해 학창 시절 학업에 열심을 다할 수 있었고 그들도 나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굉장히 자유로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는데 모범적인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큰 이탈 없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십 대 중반 친구들과 함께 시골의 작은 교회를 나간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서는 갈 수도 없었고,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교회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작은 교회에서 함께 십 대를 보낸 우리는 지금은 다른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흘러간 시간을 넘어 함께 하고 있다.
나는 평소에 ‘벌써’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나만 유독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 사람들이 보낸 문자에서 심심찮게 ‘벌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팔아 여유를 사지 못하고 늘 머릿속에 할 일을 가득 담아놓은 자들일 것이다. 글이 인간의 정신을 확보하고 있다면 벌써는 우리의 현실이다. 벌써는 일상의 속도로 자리 잡았다. 이 말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느니,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이렇게 됐다느니 같은 한숨 섞인 말들이 따라온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10대에는 10km로, 20대에는 20km로 시간이 지나간다고.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아닌가. 해야 할 것은 왜 이리 많은지, 또 그걸 할 시간은 만날 부족하기만 한 지. 아무리 느리게 살려고 해도 시간을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하루 동안 무얼 하는지 관찰해보면 굳이 안 해도 될 일에 시간을 쏟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성실하고 보람찬 하루를 보내겠다고 아무리 다짐을 해봐도 지나간 시간에 푸념만 늘어난다. 무얼 하며 살고 있는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잠깐하고 미뤄두고 스마트폰이나 만지고 있는 모양이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눈을 맡기는 순간 오늘 하루는 이미 다 지나간 것이다. 시간이 무한히 있는 것 마냥 나 몰라라 하는데 또 웃기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여전히 시간을 줄줄 흘려보내며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있다.라다크 사람들은 우리와는 뭔가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물론 내가 실제로 그들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 글에서 풍기는 그들의 얼굴은 평온함 그 자체다. 근심으로 찌들어 있는 나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과 나의 얼굴빛이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삶의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속도가 얼굴빛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위에서 말했듯이 하루를 꽉 채워 살았음에도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고 밥 세끼 먹으면 하루가 끝나 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똑같이, 급하게 하루를 살아간다. 반면에 라다크 사람들은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면서도 넉넉한 쉼을 만끽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적절하게 한다. 무엇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들이 하는 노동은 육체의 에너지를 많이 요구하는 일이지만 그들에게서 지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을 할수록 더 힘이 더 나는 것처럼 보인다. 힘을 쓰면서도 힘이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이 글에 의하면 그들은 지형과 기후의 영향으로 4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일하고 8개월은 쉰다고 한다. 8개월도 그냥 내리 쉬는 게 아니다. 때에 따라 알맞게 일을 하면서 보낸다. 그러므로 그들도 매일 일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속도는 빠르지 않다. 부지런하게 일을 하고 느긋하게 쉰다.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속도를 보며 부지런하다는 것은 늘 바쁘게 사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늦추지 않고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국 사회는 나에게 혹독한 환경인가? 내가 얼마나 게으르면서도 바쁘게 살았는지 매 학기마다 반성을 함에도 좀체로 나아지지 않는다. 최고로 불성실하게 보낸 이번 학기 끝 무렵에 나는 또 다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