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문화와 미술] 레포트 ▷투르판의 불교미술에 대해서 ▶투르판의 불교미술에 대해서 1. 실크로드와 투르판 △서역지도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사막길은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갈라진다. 이 두 길 중 남로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더욱 발달하게 되었는데, 도시들을 동서로 이어나가는 남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간에 두고서 다시 서역북도와 서역남도로 갈라지게 된다. 넓게 보았을 때, 서역 남?북도가 모두 천산남로에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 천산산맥의 남록을 따라 뻗어있는 서역북도를 천산남로라고 칭한다. 서역북동 위치하는 주요한 오아시스 취락은 투르판, 쿠차, 악수, 툼숙 등으로, 투르판은 서역북로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판은 타림 분지 동북에 위치한 분지로, 교통의 요충지여서 예로부터 대상로를 장악하려면 약 4,000㎞인데, 절반가량이 염호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는 경작지이다. 중국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투르판은 그보다 서쪽에 위치한 여러 도시들에 비해 중국으로부터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640년 당에 의해 멸망하면서 문화의 중국화가 더욱 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잦은 변화의 흔적이 투르판 지역의 미술에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갖는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스타나 지방의 고분 출토품인 공예품과 회화에 표현된 중국적인 양식, 7세기 중엽에 마니교와 함께 들어온 이란 양식, 그리고 베제클릭의 석굴 벽화에 보이는 위구르 양식 등이 투루판의 대표적인 미술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시대에 딸라 미술이 각기 다른 민족적 특징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투르판의 불교미술 Ⅰ ① ▷불교의 신 -투르판 출토 / 8~9세기 -불법수호의 신이거나 보살상의 머리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목구비가 얼굴의 중심에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분적으로 채색 흔적이 남아있다. ② ▷불법을 수호하는 신 -투르판 무르독 출토 / 6~7세기 -이 조각은 불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신이 표현된 것이라 생각되며, 현재 는 상반신만 남아 있다. 가슴에 보이는 나선형의 무늬는 갑옷을 장식했 던 문양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사원을 장엄하기 위해 이와 같은 소조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소조상을 만들 때에는 우선 나뭇가지를 새끼줄로 묶어 심을 만든다. 그 위에 동물의 털과 식물성 섬유를 섞은 점토를 발라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흙과 채색을 입혀 완성한다. ③ ▷부처 -투르판 야르호 석굴사원 제4굴 / 9세기 -투르판의 야르호 석굴사원에는 모두 7기의 석굴이 남아 있으며, 제4굴과 제7굴의 벽화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 조각은 제4굴에서 가 져온 천불도의 일부이다. 불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각각 천불이 등 장한다고 하는데, 이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것을 ‘천불도’라고 부른 다. 주로 앉은 자세의 불상 여럿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각 불상의 옆에는 부처의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하다. 3. 투르판의 불교미술 - Ⅱ베제클릭 석굴사원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화려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베제클릭 석굴사원은 서역 북도에 위치한 투르판 일대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군이다. 80기 이상의 석굴사원이 만들어졌으며, 불교와 마니교의 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굴사원은 위구르인이 투르판을 지배한 9~12세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요 예배 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인 것이 많다. 중당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① ▷장막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제15굴 / 10~12세기 -회랑 벽면과 천정이 만나는 부분에 그려진 장식 문양이다. 구슬로 장식된 장막을 석굴 내부에 친 듯한 효과를 낸다. ② ▷공양하는 사람 ▷석가모니가 왕이었을 때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제15굴 / -투르판 베제클릭 석굴사원 9세기 제15굴 / 9세기 -서원화의 일부분으로 그림 중앙의 -서원화의 일부분에 해당하 부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는 벽화이다. 여기 갑옷을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입은 사람은 석가모니가 아랫부분에는 당시의 부처 또는 예전에 왕으로 태어났을 과거불이 밟고 서 있던 연꽃 대좌의 때의 모습이다. 왼쪽에는 일부가 보인다. 부처의 광배가 일부 보인 다. 1) 「동양미술사」예경출판사 2)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여러 삶을 살면서 당시의 부처로부터 먼 훗날 부처가 된다는 약속을 받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투르판의 베제클릭 석굴사원에 여러 점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흔히 ‘과거불’이라고 칭하는 당시의 부처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석가모니 이전 생의 모습이 왕, 브라만, 상인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특히 제15굴의 서원화 파편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전통과 권위의 표상 : 고종대의 태조와 고종어진 그리고 제도적 기능전통과 권위의 표상 : 고종대의 태조 어진과 진전본 서평은 조인수의「전통과 권위의 표상 : 고종대의 태조 어진과 진전」을 대상으로 쓰여 졌다. 이 논문은 고종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고종이 태조 어진과 진전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있다. 특히 1872년 태조의 어진 모사가 고종의 왕실 적통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1900년 태조어진은 고려에서 조선을 개창한 태조와,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세운 고종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도이며, 좀 더 적극적인 현실정치적인 성격임을 보여준다. 군주의 정통성을 전통과 역사에서 찾지 않고, 세속적이고 가시적인 기억과 조형물을 통해 신성한 지배질서를 만들어 내려했던 고종을 통해 전통을 어떤 맥락에서 계승하고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폐기할 것인지는 새로운 정치적 현실이 등장함에 따라서 과거 역사가 재해석 되면서 결정되는 문제였음을 보여준다.본 서평의 전개는 먼저 조선미의 『한국초상화 연구』와의 비교를 통하여 이 논문이 지니는 이전 시대 초상화 연구와의 차이점을 알아보고, 조인수의 논문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권행가의 「고종황제의 초상」을 살펴봄으로써 조인수 논문의 한계를 살펴보는 순으로 하겠다.우선 조선미의 책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초상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특히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를 제도적˙유형적˙양식적으로 분석하며 한국초상화에 대한 화론적 접근을 통해 초상화의 어의적 개념˙전신과 이형˙작화의 문제˙감상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끝으로 결론에서 한국 초상화의 형식적 특성, 유형별 특성, 성격적 특성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며 한·중·일 사이에서 한국 초상의 특수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을 형(形)˙영(影) 즉, 전신사조(傳神寫照)라 말하고 있다.반면 조인수의 논문은 일단 연구의 범위를 고종대의 태조어진과 진전으로 하고 고종 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고종이 전환기의 왕으로서 자신의 정통성과 전제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태조어진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인수의 논문에는 도상, 양식, 기법에 대한 분석은 없으며 오히려 시각문화와 정치권력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조인수 논문의 서론에 나와 있는 글을 통해 그가 주목했던 관점을 파악할 수 있다.“공공장소와 기념조형물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결국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누가 이것을 주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기억이라는 것이 논의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렇게 조선미의 책은 초상화의 사적(史的), 형식적 연구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조인수의 논문은 초상 중에서도 어진을 시각문화로 간주하고, 그것을 주권자들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여 고종 개인과 사회맥락의 측면에서 연구한 것이다. 따라서 2006년 조인수의 논문은 1983년 출판된 조선미의 연구와 연구 관점으로부터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조인수의 논문과 같이 초상화에 대한 변화된 관점에서 서술된 권행가의 「고종황제의 초상」과의 비교를 통해 조인수 논문의 한계를 짚어 보도록 하겠다. 우선 권행가의 논문은 정치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새로운 매체인 시각매체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고종 초상을 통해 그 변용과정을 살피고 있다. 또한 이 논문은“고종시대의 어진제작이라는 시각문화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단순히 전통의 쇠퇴나 수동적인 서양의 영향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 보다 내부적인 요구와 필요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서론에서 밝혀 역시 당대 사회와 정치맥락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 조인수의 논문을 읽고 권행가의 논문을 읽자 한마디로 조인수의 논문은 권행가의 논문에서 태조어진에 관한 내용만 발췌하여 쓴 듯한 인상을 받았다. 조인수의 논문이 권행가의 논문보다 한 해 뒤에 나온 것을 유념한다면 전혀 새로운 내용 없이 서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행가의 논문에서의 초점은 고종의 초상이지만, 고종 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를 시대적으로 서술하며 태조어진이 고종의 권위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 조인수의 논문이 태조어진에 초점을 맞춘 것 빼고는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오히려 권행가의 논문을 통해 태조어진을 그린 것이 왜 고종의 권위와 왕권강화를 나타내는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조인수가 공공장소와 기념조형물에 실질적인권위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채로 어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권행가 논문에서는 의례의 기능과 그것을 통한 고종의 왕권강화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재현된 이미지를 공적인 공간 속에 유포시킴으로써 왕조의 정통성을 가시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는 모셔지고, 그 이미지를 둘러싼 의례들, 진전을 둘러싼 공간 등을 통해 상징적 기능이 지속된다. 따라서 전통적인 어진의 상징적 기능은 재현된 이미지 자체의 기능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제도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어진은 여전히 제의적 공간에 봉안되며 일반 백성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대신 백성들이 보는 것은 어진을 봉안하는 행렬들이다. ... 그 대표적인 예가 1900년 태조 영정 모사 후 그 범본이 된 함흥의 태조 영정을 다시 봉안하는 행렬에 대한 기록이다. ... 이 행렬에 대한 기록은 태조의 어진을 모사하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성에서 함흥까지 이어진 행렬 속에서 백성들이 본 것은 태조 어진 자체가 아니라 고종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과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기의 물결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이 자비로 황색 옷을 입고 국기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혁파하는 데 앞장섰던 보부상들이 황제가 된 고종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이 전통적인 어진봉안행렬을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또 고종이 태조어진을 모사하고 진전을 설립하여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면 그것이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켰는지,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조인수의 논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권행가의 논문에서는 풍경궁어진봉안행렬도를 통해 국민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당시 백성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평양 병정(兵丁)들의 부패와 폭행사건이 빈발하고 물가상승과 수많은 무명잡세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물가가 인상되며 수많은 세금문제가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내탕금까지 쏟아 부은 이 서경건설과 어진봉안행렬은 그 의도만큼 효과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 베로네세(Veronese)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이 작품은 구약의 내용 중 앗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 고국 이스라엘을 구한 ‘유디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작가들은 조르조네, 티치아노, 베로네세, 카라바조, 젠틸레스키, 클림트 등으로 무척 다양하며 작품에선 작가들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허구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유대민족이 주변국들에게 겪어야 했던 박해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하는 고난에 대한 교훈의 소재를 각색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합리적이다.베로네세(1528~1588)는 출생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명은 파올로 칼리아리(Paolo Caliari)이며, 베네치아파에 속한다. 1544년경 베네치아로 이사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독특하고 화려한 채색법이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베네치아파 최고의 화가 티치아노(1487∼1576)를 알게 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공간구성을 가진 화려한 양식을 확립하였다. 우의적 주제 또는 성경이나 역사에서 따온 주제를 화려한 색채로 그린 거대한 캔버스화가 그의 전형적인 작품이다.베로네세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는 술에 취해 잠을 자는 적장의 목을 칼로 베고, 이제 막 잘린 목을 하인이 든 자루에 담으려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렸다. 끔찍하고 참혹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유디트의 얼굴은 극히 평화롭고 우아하게 그려졌으며, 마치 축제라도 있는 듯 의상은 화려하다. 여기에서 그는 사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보다 눈을 즐겁게 하는 기교를 동원하여 화려하게 그려 자신만의 그림방식을 살렸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 유디트의 본질은 제시되지 않은 한계가 나타난다. 극도의 명암 대비를 통해 유디트의 피부에는 환한 빛이 떨어지고, 적장의 머리와 하녀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다. 목이 잘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는 자신을 그려 넣었다는 주장도 있다. 베로네세에게 영향을 준 티치아노(1488~1576) 역시 부드럽고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여 다른 그림 속 여인들이 그렇듯 유디트를 온화하고 사랑스럽게 그렸다.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파의 화가인 조르조네(1478~1510)는 유디트를 마치 성인처럼 묘사했다. 그녀는 동이 트는 가운데 한 손에 칼을 쥐고 한 발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밟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이것은 종교를 막론하고 널리 쓰이는 도상의 모습(신이나 성인이 악마를 밟고 섬으로써 정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모습은 인간적인 승리감이나 증오심의 표정 대신 명상하는 것 같은 초월적인 표정을 드러낸다.반면 카라바조(1573~1610)와 젠틸레스키(1597~1651)는 유디트의 모습을 인간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의 목에서 솟는 새빨간 피가 하얀 담요를 적셨고 칼을 잡은 그녀의 팔은 단호해 보인다. 그림 속에는 붉은 빛의 휘장이 있는데 이는 살인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빛과 그림자의 선명한 대비 속에서 더 강렬하게 나타난다.
작품 선정해서방법론 적용시키기-양식 / 문화사●모두를 대신해서 고통당하는 은키시아프리카의 적도 부근 콩고와 자일에는 ‘은키시(nkisi)’ 라고 불리는 이상하고 불가사의한 조각들이 산재되어 있었다.사람들은 병의 치료, 승전의 기원, 죄를 저지른 범인의 색출이나 저주 등 여러 목적으로 은강가라고 불리는 주술사를 찾아간다. 그러면 은강가는 그들의 억울한 사연과 소원을 듣고 알맞은 주문을 소리 높이 외친다. 그에 따라 은강가를 찾아간 당사자는 커다란 은키시 목각의 특정 부위에 못 등의 쇳조각을 박거나 헝겊이나 새의 깃털 등을 단다. 그렇게 한 번 박히거나 매달린 것들은 주술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제거할 수 없다. 은키시에는 하나의 목적에 단 한 개만을 부착할 수 있었으며, 주술 의식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문을 외우게 했다. 또 은강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각상의 눈과 눈썹, 철로 만든 칼날 등을 혀로 핥게 했는데, 이로써 그 조각상이 죄인을 향하여 반응을 보이도록 했다.그래서 은키시에 박혀 있는 못 하나하나마다 온갖 사연이 서리서리 실려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본인과 은강가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설핏 봐서는 은키시에 무더기로 박혀 있는 못의 배열 형태가 무질서하고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나 은키시를 변형시킬 수 없었다. 은키시는 주술 의식이 행해질 때마다 은강가에 의해서 언제든지 변형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은키시는 완성품이 없었으며, 못이 많이 박혀 있을수록 주술적인 효력이 뛰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은강가는 은키시의 주술 효과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폐기했다. 현재 전세계 박물관에 수집되어 전시되고 있는 은키시의 대부분은 은강가에 의해 한 번 폐기됐던 것이라고 한다.은키시는 아프리카에서 ‘약제’라는 의미를 지닌 말로 쓰이는데, 은키시의 배나 머리 등 빈 공간은 보통 그 ‘약제’로 채워진다. 때로는 무덤의 흙이나 강가의 진흙, 광택으로 번쩍거리는 물질들을 넣기도 했다. 그렇게 채워지는 매개체들이 조상이나 죽은 자의 영혼의 활동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힘을 고스란히 부여받은 은키시는 전지전능해진다고 생각했다.은키시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대개 높이 1미터 전후의 목각 입상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편이며, 세심히 손질된 흔적이 역력한 표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다. 그래서 엄숙하고 위엄 있는 얼굴 표정을 짓고 있는 은키시가 아름답고 힘차게 보인다. 때로는 한 손을 쳐들고 있어 힘을 과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은키시의 얼굴 표정은 매우 위협적이다. 그런 표정은 방어적인 동시에 공격적인 표정으로 해석된다. 입술 모양은 두꺼운 것부터 길게 늘어진 것까지 다양하다. 이런 입술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사악한 무리를 단번에 삼켜버리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음을 의미하는 형상이다. 더욱 심하게 표현된 입술은 게걸스러움과 카니발리즘(인육을 먹는 식인 문화)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은키시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데, 목표를 향하여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독일 건축(1772)』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독일문화의 거장 중 한사람이었고 다양한 시대에 시인, 소설가, 극작가, 과학자, 철학자, 정치가, 행정가였으며 다작작가로 그의 수집된 작품 수는 백 권 이상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라이프치히와 스트라스부르에서 공부했으며 1780년대 중요한 이탈리아방문을 제외하고 후에는 바이마르에서 살았다. 그의 통찰력과 에너지는 색채이론물리학에서부터 그의 시대에 예술가적이고 문학적인 활동의 발전까지 많은 분야에서 뜻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가장 큰 영향력은 독일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관심사는 그가 학생시절에 스트라스부르 성당을 방문하는 동안에 만났던 고딕 건축을 역시 포함했다. 이것(고딕건축)은 여기에서 재판된 그 에세이의 주제인데 그것은 원래 괴테의 친구서클의 주도적인 학자였던 요한 폰 헤르더(1744-1803)에 의해 출판된 것이었고 친구들의 고딕에 대한 견해는 괴테를 처음장소에서 그 스타일을 민감하게 만들었다. 몇 달이내로 그는 고딕을 버리고 고전주의와의 연루로 옮겨갔기 때문에 만약 괴테에게 고딕에 대한 견해가 남아있었다면 그것은 거의 확실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 너무 대단해서 그 에세이는 독일에서 고딕부흥의 주요한 원인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었는데 ‘고딕풍의’ 몽상적인 형태는 단념시키고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고전적인 것과 같은 종류의 중대함과 함께 그 스타일에 접근하도록 조장했다. 그래서 헤르더에게 셰익스피어가 소포클레스만큼 위대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딕은 고전주의만큼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그 에세이는 미술역사방법의 논의보다는 천재들의 작품에 칭찬하는 찬가이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포함되어왔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그의 경험(성당)과 함께 그 스타일의 그의 기대와 달랐다는 괴테에게 있던 자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사리주기론에 있는 중세요소 지위와 미술사 서술의 양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사리의 시대 이래로 더 이전은 아니고 고딕양식이 있는 중세건축은 야만스러운 것의 축도로 보여져왔고 (때때로 지지되기도 했지만) 그래서 버려졌다. 스트라스부르 성당의 정면에서의 괴테의 경험은 그를 그 디자인에 숨은 원리가 야만스러운 것과는 상반된다는 견해로 그를 이끌었다.성당에서 마주할거라 기대했던 고딕스타일은 불합리한 것의 통합체였다. 그것은 괴상하고, 멋대로이며, 혼잡하고, 조정되지 않고, 부자연스럽고, 서투르고, 지나치게 장식적이었고 마치 ‘약간 기형이고 털이 가득한 야만인’과 같았다. 대신에 그는 완전한 감동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모든 세부들이 조화로웠고 그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