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동안 본 강의를 들으며 여러 소재에 대해 다양한 구상을 떠올려보았다. 그 중 미래에는 어떤 소재가 시대적으로 적합할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나노셀룰로오스’가 그 답이 될 것 같다. 나노셀룰로오스는 셀룰로오스 사슬이 다발을 이루며 빽빽하게 결합한 나노,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막대형태 입자 혹은 섬유를 말한다. 셀룰로오스는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포장 산업, 제지 산업, 여과 장치, 인공 피부, 화장품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고 한다. 나노 셀룰로오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생산할 수도 있으나 박테리아 배양은 비용이 많이 들고 용적 대비 수율이 낮아서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려워서 현재는 대부분 목재 펄프나 비목재 식물에서 얻는다. 이 점이 나노 셀룰로오스의 가장 미래지향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나노 셀룰로오스 소재는 철보다 5배나 가볍지만 강도가 높고 열을 가해도 팽창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이에 더불어앞서 언급했듯이 목재 펄프나 비목재 식물에서 원료를 얻기 때문에 굉장히 타 소재에 비해 친환경적이다. 또한 이 소재에 대해 더 조사해보니 굳이 목재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해조류를 통해서도 원료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산림 훼손도 막아준다. 결합력과 강도도 높아서 센서나 건축자재 강화재료, 연료전지, 의공학 소재 등에 활용할 수 있고 식물에서 유래한 당 구조라서 생체에도 유해하지 않아 약물 전달체나 이식 보조물질, 피부 보습 제품 등에도 쓰인다고 한다. 추가로 나노 셀룰로오스 섬유로 만든 필터는 질산염과 인산염, 불산, 황산염 등 음이온을 띠는 오염물을 흡착하는 특징이 있다. 이를 이용하여 친환경 미세먼지 마스크를 만드는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다.나는 미래에 사용될 소재의 필수 조건이 친환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나노 셀룰로오스는 경쟁력을 갖춘 소재이다.셀룰로오스는 또한 세포 독성이 현저히 낮고, 다공성의 3차원 구조를 가지고 액체나 젤 상태에서 성형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의학 분야에서 사용되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향후 인체 이식의 보조 물질로도 활용이 가능하고 약물의 전달체나 상처 치유 패치로도 활용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셀룰로오스의 나노결정 구조와 물성은 산 가수분해 과정에서 쓰이는 산의 농도, 가수분해 온도, 시간에 따라서도 크게 바뀐다고 한다. 이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 앞으로 개발되는 나노 셀룰로오스는 이러한 주의점들이 더욱 보강되어 한계가 없이 다양하게 활용되면 좋을 것 같다.다음으로는 생분해 플라스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생분해 플라스틱이란 옥수수 등 식물로부터 유래하는 바이오매스를 70%이상 함유한 플라스틱을 말하는데 180일 이내에 셀룰로오스 대비 90%이상이 생분해 된다. 가격 경쟁력, 유통기간중 분해가능성, 물성약화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나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생분해 플라스틱은 분명히 주목할만한 바이오소재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앞서 언급했던 가격과 분해가능성이다. 분해 기작은 미생물 분해인데, 생분해 플라스틱은 매우 고가인데다가 유통 중에 분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의해야한다.더불어 기대만큼 잘 분해되지 않는다는 것도 고려해볼만한 점이다. 그 이유는 생분해 플라스틱의 인증 기준 조건이 실제 자연환경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생분해 플라스틱은 50℃ 이상에서 분해가 되는데 주로 해양에 버려진 생분해 플라스틱 대부분은 이보다 낮은 온도의 심해를 떠다니기 때문에 일반 플라스틱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이를 바탕으로 생분해 플라스틱의 재료로는 우유를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우유를 통해 플라스틱을 만드는 시도들이 있어왔음을 알 수 있었는데, 우유에는 카제인이라는 단백질 분자가 많이 포함되어있어 이 분자를 사용하여 카제인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과정으로는 식초에 뜨거운 우유를 넣으면 혼합물 속에 응유가 보이는데, 이는 식초가 우유에 첨가되면 우유의 pH가 바뀌고 카제인 분자가 펼쳐져 긴 사슬로 재구성되어 응고된다는 점을 이용한다. 이처럼 동물성 재료인 우유를 사용하여 친환경적인 플라스틱을 제조한다면 분해되지않는 미생물성 플라스틱보다는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칠 것 같다.
법구경 리뷰승리하면 원한을 품은 사람이 생겨나고 지고나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빠진다. 이기고 지는 마음 모두 떠나서 다툼이 없으면 스스로 편안하다.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옥죄이고 남들이 세워놓은 성공의 기준에 우리를 욱여넣는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이 새겨야 할 문장이라고 느껴졌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분명 이로운 일이지만,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성공만을 바라본다면 반드시 그런 나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이를 과연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또한 반대로 패배한다면 그 나름대로의 스트레스와 자괴감을 얻게 될 것이다. 어릴 적부터 경쟁에 몰아진 우리는 이 사실이 당연한 진리마냥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나 또한 성공 혹은 실패 이 두 가지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단순히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나의 속도대로 내 삶을 꾸려나가는 것, 성공도 실패도 어느 것에도 연연하지 않고 단지 이전의 나보다 발전된 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이 구절이 전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했다. 작게는 수능에서부터 시작되는 한 사람 생애의 경쟁은 이어서 취업 경쟁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경쟁들이 존재한다. 이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겠으나 얻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괴감을 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 무엇보다 집중해야 할 가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했을 때 발전했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한다.‘대학’이라는 곳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이제는 정말 자유로운 성인이므로 학습과 발전에 있어서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열정에 달려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점이 마냥 장점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때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 이끌려서라도 모두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학습의 질을 가지고 있으나 대학은 본인이 직접 발벗고 나서지 않는 이상 제자리걸음만 할 뿐인 무능력한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전공 공부도 마찬가지, 학교 외의 활동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남들과 비교하게 됐었고, 남들은 이런 것도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마음에 조급해졌었다.
싯다르타 리뷰_나만이 채울 수 있는 자아‘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친구 고빈다의 사랑까지도 항상, 그리고 영원히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를 진정시키고 흡족하게 만족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책 싯다르타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이 구절을 선택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모두에게 사랑받고 브라만 아버지 아래서 부족함없이 자랐으나, 그의 내면에 부족함을 느껴 사마나가 되기 위해 출가한다.싯다르타와 같은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항상 외부로부터 나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려고 했고, 어딘가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그것으로 내 자아를 채우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모자라다 느끼면 나를 불행 속에 가둬두었다. 자존감 하락의 시작이었다. 내 자아는 나만이 형성할 수 있는 것이고 나만이 만족을 채워줄 수 있다. 이를 한참의 불행 끝에서야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많은 고난을 겪고 그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고빈다는 정해진 길을 걸어 가르쳐진 깨달음을 얻었다. 이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이냐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싯다르타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답하겠다. 누군가가 얻은 깨달음을 배우는 일, 자아를 충분히 건강하게 형성한 이에게서 가르침을 얻어 깨달음을 얻는 일 이것은 단지 배움일 뿐이다. 내 자신이 아닌 것이다. 이를 온전히 나의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나는 의문을 품는다.굳이 쉬운 길을 두고 싯다르타의 길이 더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거창한 이유는 없다. 인생은 경험의 연속이며 그 경험이 좋든 나쁘든 그것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기 때문에 울타리를 벗어나 나만이 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되지 않는 22년 남짓의 나의 인생 중 싯다르타처럼 쉬운 길을 두고 홀로 나서본 험난한 길의 경험은 21살이던 해에 이루어졌다. 재수 끝에 입학하게 된 대학에서 활발한 대학 생활을 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으나, 조금 더 욕심이 생겨 휴학을 자처하고 삼반수를 시작했다. 이미 적응이 되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대학에서의 만족스러운 삶을 굳이 그만두고 나는 더 어려운 길에 직접 뛰어들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이었지만, 성공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보는 주변 사람들은 왜 굳이 고생하는 일 자처하냐고 많이들 물었다. 하지만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없을 것이다. 조금은 덜 열심히 사는, 덜 악착같이 매달리는 그런 평범한 23살의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그 경험으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단순히 끈기와 열정만을 배운 것이 아니다. 편한 길을 뒤로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 때 나에게 결과 이상으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앞으로 나의 선택에 주저하지 않게 해줄 힘을 주었다. 나이를 먹고 내가 원하는 목표에 다다른다면, 이때의 경험을 나는 떠올릴 것이다. 내가 거기까지 도달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고.
Ⅰ. 서론 :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탐욕Ⅱ. 인공지능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욕심Ⅲ. 냉동인간 : 생명의 끝없는 연장Ⅳ. 투명화 기술로도 엿볼수 있는 욕망의 잣대Ⅴ. 결론 :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Ⅰ. 서론 :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탐욕21세기에 사는 우리는 현재 기술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음을 익히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 투자는 GDP대비 비중이 1997년도에 비해 2014년에 2%p 증가하였으며,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은 1997년보다 약 6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우리의 일상 또한 많이 달라졌다. 최근 개발되는 대부분의 기술은 인간의 필요보다는 욕구 위주의 기술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아무래도 편리함과 삶의 윤택함을 우선으로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인공지능인데, 원래는 인간의 노동력으로 이루어졌던 일들이 인공지능의 개발로 인해 사람을 대체하여 더 이상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일의 효율성, 정확성을 높이는 장점을 가져옴과 동시에 일자리 감소라는 치명적 단점을 가져왔다. 이처럼 다양한 기술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이 기술들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인간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기술들을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불교에서 탐욕은 삼독 가운데 그 뿌리가 되는 것이며, 탐욕으로부터 여러 고통이 생겨난다.’ 언뜻 보면 기술과 불교적 관점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결국 모든 기술 발전의 양상과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위의 문장처럼 불교적 관점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필자는 기술을 만들어 낸 것은 인간의 탐욕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나열해볼 것이다.Ⅱ. 인공지능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의 욕심책을 통해 알게 된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서는 인간보다 먼저 불성을 깨달은 로봇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러나 로봇 제작사에서 로봇으로 인한 인류의 가치 침범을 예상하며 해체를 하려고 하는데, 불성을 깨닫고 인명 스님이라는 법명까지 얻은 이 로봇은 자신과 같은 로봇의 존재로 인한 인간들의 혼란스러움을 멈추고자 스스로 열반에 든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편리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생겨난 로봇을 결국 인간이 해체하려 들며, 그 끝엔 스스로 해체를 선택하는 그런 인공지능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감당하지 못할 과학의 발전으로 결국 인류의 존속까지 위협하는 인공지능, 다른 누구로부터가 아닌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자행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인공지능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위험으로는 대표적으로 사회 질서의 혼란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사회화를 겪는다. 성인이 될 때까지 정상적인 사회화를 겪은 인간은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만약 앞서 설명한 영화에서와 같이 프로그램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닌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가질 경우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실제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인공지능 로봇 상용화에 따른 위험의 법적 대응방안으로 인공지능 로봇의 법적 책임을 분석하였는데,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었을 경우의 책임 부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고, 오작동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 책임을 지우는데에 그만큼의 세부적인 법적 조항이 필요한데, 이를 기계일 뿐인 로봇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며, 혹여 그러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책임을 물고 배상을 하는 쪽은 로봇의 제작사, 즉 인간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만으로도 인공지능의 과도한 발전은 사회의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 충분한 뒷받침을 해준다. 실제로 옥스퍼드대학교 인간미래연구소에서 낸 보고서 에서는 인류 종말의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인공지능을 꼽았으며, 스티븐 호킹 박사도 인공지능의 과도한 발달로 인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Ⅲ. 냉동인간 : 생명의 끝없는 연장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탐욕을 가지고 살아가며 이제 냉동인간을 통해서 삶에 대한 탐욕을 확대하려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생명을 연장시키는 냉동인간은 과연 정말 행복한 일일까? 또한 죽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과 장수 혹은 불멸에 대한 집착은 인격의 미성숙성에 대한 증표이며, 우리의 삶이 가치 있는 이유는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 필자는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최대 100년 남짓이다. 만일 삶의 끝이 없다면, 우리는 기어이 주어진 기간 안에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청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잠은 죽어서 잔다’ 라는 말인데, 잠을 잘 시간을 줄여서라도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말들 역시 사람들 사이에 도는 이유도 결국 인간의 삶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하지만 단지 생명의 연장을 위해 냉동인간을 도입하여 시행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치 자체를 없애버리는 무모한 기술이라고 생각한다.또 다른 쟁점은 과연 냉동인간을 먼 미래에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은 과연 시대의 간극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 몇 년에서 몇십 년 혹은 100년이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 기간동안 죽어있던 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런 점에서 그 시대의 간극을 어떻게 메꿀 것이며, 이미 동시대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없어진 후이기 때문에 육체만이 살아가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하나 배워가고, 또래 친구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시대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이 태어난 후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벗어나는 냉동인간은 결국 육체만을 보존할 뿐인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불멸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다는 연기 사상은 비어있다는 ‘공사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결국 앞서 언급한 내용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로 볼 수 있다.불교에서의 행복은 끝없이 욕망을 채우고 무한히 삶을 연장하는 데 잇지 않고,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연기의 사슬을 끊는 데 있다고 말한다. 냉동인간이라는 보존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려 하는 것 결국 수명 연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고 계속되는 욕망에 속박되어 윤리적으로 어긋나는 기술까지 발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욕망이 옳은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Ⅳ. 투명화 기술로도 엿볼수 있는 욕망의 잣대절대 실현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투명화 기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투명화 기술은 현재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는 스텔스 기술이다. 이는 레이다 상에서 적을 속여 생존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스텔스는 적의 레이다로부터 아군의 무기 체계를 완전히 숨겨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레이다 상에서 실제보다 훨씬 축소시켜 나타난다. 또 하나는 위장술이고 마지막은 메타물질이다. 메타물질은 아직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은 특성을 갖도록 설계된 인공물질이다. 어떤 메타물질은 전자기파나 소리에 물체가 관측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간섭할 수 있고, 특정 파장에서 음의 굴절률을 갖기도 한다.투명화 기술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군사목적으로 쓰일 경우 적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경로로 편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쓰이기도 한다.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술은 메타물질을 이용한 투명화인데 물체가 가시광선이 반사되어 망막에 맺힘으로써 상을 볼 수 있다는 성질을 이용해 되돌아오지 않게 하여 망막에 맺히지 않게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은 수술실에서, 비행 조종석에서 안전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하지만 이 기술도 불교적 관점에서의 욕망의 잣대를 피해갈 수는 없다. 영화 「투명인간」의 주인공 그리핀은 투명화 기술을 개발하여 스스로 투명인간이 된 후 온갖 사회질서를 망가뜨리고 결국 사람들에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끝이 나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영화 「할로우 맨」의 카인은 본인이 직접 실험 대상이 되어 투명인간이 되는데, 이렇게 투명인간으로 변하게 해주는 약의 부작용이 욕망등의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카인은 결국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혼란을 야기시키는 최악의 결말을 낳는다. 두 명의 등장인물 다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고 욕망을 이기지 못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은 이들이 사는 사회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욕망이며 우리 마음 깊숙이 박혀 있는 갈애이다. 갈애는 모든 욕망의 근저를 이루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이 있어 살아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는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끝없는 욕망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수행 정진하여 실천함으로써 욕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발전하는 과학 기술 속에서 존엄성은 지켜지는가?서론 : 과학 기술의 현주소본론1 :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가짜 유토피아본론2 : 자유가 짓밟힌 ‘문명 세계’결론 : 헉슬리의 경고[서론]우리는 지금까지 넘치는 과학 기술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다. 최근 게재된 한 뉴스기사에 따르면 2020년 세상을 바꿀 5대 과학기술이라는 제목으로 5가지의 과학기술이 소개되었다. 디지털 치료, 차세대 교통수단, 미래 식품, 안면인식 기술, 로봇의 발전이 그 목록이다. 우리는 실제로 다양한 방면에서의 기술 발전으로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위와 같은 기술들 또한 과거엔 발명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기술들이다. 현재 상용화 되어있는 여러 기술들을 예로 들어보자면 대표적으로 인공지능이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 능력과 추론,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인데, 한마디로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인공지능을 둘러싼 다양한 이견이 오가고 있다. 반대의 대표 주자는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로, 생전에 그는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할 정도로 인공지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찬사의 대표주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 발전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2045년쯤에는 전 인류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이 탄생해 인간을 불멸의 세계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이렇듯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두고, 우리는 이를 마냥 올바른 방향으로만 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본고는 ’멋진 신세계’의 내용 중에서도 과학 기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도덕성과 존엄성 그리고 선택의 자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편리함만으로 무장한 세계를 우리는 유토피아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과학기술의 시대적 흐름에 어떤 비판적 시선을 가져야 할지 다뤄보고자 한다.[본론1] ‘멋진 신세계’를 통해서 본 가짜 유토피아‘멋진 신세계’에서의 세상은 현재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질병과 노화에 대한 걱정, 신생아의 적정 체온 걱정 등 어떠한 것도 필요하지 않은, 언뜻 보면 유토피아 같지만 실상은 디스토피아의 온상이다. 모든 인류는 본인의 계급에 맞춰 모든 환경과 조건이 설정되며, 마치 공장에서 로봇을 만들어내듯 인간을 성장시킨다. 이는 획기적임과 동시에 주목해볼 만한 과학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제구호개발단체에서 발표한 전 세계 신생아들의 사망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생후 한 달 이내에 사망하는 신생아가 약 270만 명, 태어난 당일 사망하는 아기만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신생아가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저체온증 때문에 사망한다고 밝혔다. . ‘멋진 신세계’ 속 문명 세계에서는 계급에 따라 성장 정도를 조절하며 주변 환경과 조건을 그 정도에 상응하게 설정하여 태아를 성장시킨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적인 사고가 문명 세계에서는 조절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에 맞게 성장한 인류는 본인의 환경과 위치에 행복함을 느끼도록 세뇌 당한다. 이 점을 고려해보면 언뜻 이 문명 세계가 예기치 못한 죽음과 질병,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부터의 도피가 가능하므로 유토피아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헉슬리가 유토피아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 것이다.유토피아들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다른 성격의 놀라운 질문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하면 유토피아가 철저히 현실화되는 것을 막을 것인가? 유토피아들은 실현 가능하다. 삶은 유토피아들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 시작되는 새로운 세기에는, 지식인들과 교양을 갖춘 계층이 어떻게 하면 유토피아를 회피하고 덜 “완벽하고” 더 “자유로운” 비유토피아적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지, 그 방도를 꿈꾸게 될 지도 모른다.인류가 유토피아를 꿈꿀 때, 헉슬리는 위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를 경계하고 나아가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20세기를 살아가던 그는 신세계와 같은 미래를 예상하며 인류가 어떤 역경을 겪게 될지에 주목하였다. 바로 짓밟힌 인간의 존엄성이다. 책을 보면 알 수 있듯, 인간 고유의 감정은 철저히 배제된 채, 학습된 기억과 행동의 연속으로 삶이 이루어진다. 마지막 부분에 존은 이 세계의 허무함과 극도의 반감을 느끼고 자살함이 암시되어 있는데, 필자는 존을 통해 고도로 발달되어 과하게 편리해진 과학 기술 사회가 편리함과 동시에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었고, 불행과 불편 그리고 불만족이 사라진 ‘신세계’를 우리는 과연 유토피아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본론2] 자유가 짓밟힌 문명 세계이 쯤에서 드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본디 인간은 행복과 만족을 위해 생활을 영위하고, 노화와 죽음을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일생동안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 신세계에서는 우리가 그런 노력을 굳이 들일 필요가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불행만 제외된 우리가 진정 바라던 바가 아닌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이다. 바로 인간이 선택할 자유이다. 우리는 불편하지 않고 편리할 ‘자유’를 선택한 것이고, ‘불편함’의 존재로 ‘편리함’을 느낄 수 있다. 불만족하지 않고 만족할 ‘자유’를 선택하여 현재까지의 인류와 기술의 발전이 있어 왔다. 혹자는 스스로의 발전과 성취감을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함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세계는 이러한 자유가 무참히 짓밟힌다. 이를 결코 행복이 보장된 만족스러운 세상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문명 세계의 표어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다. 이 세계는 철저히 공동체 위주로 돌아간다. 개인의 성취보다는 공동체의 이익, 그리고 계급간의 이익이 우선시되며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일생동안 해내는 것이 문명 세계의 인류로서 해야할 마땅한 일이다. 유토피아의 탈을 쓴 ‘공동체 위주’의 문명 세계를 통해 헉슬리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이로써 더욱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이토록 강조하는 자유는 단순히 생활함에 있어서의 자유뿐만이 아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서 짓밟힌 자유는 바로 내 삶을 내가 선택할 권리이다. 자연스럽게 태어난 모습 그대로, 생김새와 성향, 취향 등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성격 그 자체대로 살아가는 것,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인간의 권리이다. 그리고 누군가와 비교당하며 열등하다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우리는 가지고 태어난다. 그 어느누구도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구별되지 않아야 한다. 이에 관한 적나라한 실상을 20세기에 개봉한 영화 ‘가타카’를 통해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영화의 주 내용은 부모들이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하고 우수한 유전자만을 선별하여 말 그대로 ‘완벽’한 자손을 낳는다. 하지만 원래의 방식대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존재하는데 이로써 그들을 두 부류로 나누게 되면서 태어나자마자 삶의 등급이 매겨진다. 이 처참한 실상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경우 벌어질 수 있는 참혹한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 기사에 따르면, 독일의 윤리학자 한스 요나스는 그의 저서 에서 유전자를 선별하여 종의 개선을 시도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경고했다고 한다. 그는 그 시도를 “오만한 기술의 광기어린 지식 때문에 인격적인 사랑에 의한 선택을 포기해버리는 범죄행위”라 언급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가진 “무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자유를 “인간적 삶의 권리”로서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나온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현실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우리는 이 끔찍한 사회의 현실화를 막아야 한다.[본론3] 우리가 앞으로 맞을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우리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로봇기술, 드론, 자율주행차, 가상현실 등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일컫는 말이다. 2016년 6월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포럼의 의장이었던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은 “이전의 1,2,3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 환경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은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 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동인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고 한다.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되고 인류가 이러한 시대를 맞이한 것도 250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몇 년 전 개봉한 영화 ‘트랜센던스’는 기술의 심화적 발전이 이루어진 사회를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천재 과학자 ‘윌’은 과학 기술 강연 직후 반기술발전 단체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으나 컴퓨터에 업로드된 뇌를 이용하여 재생시키고 자신의 추종자들마저도 복제해내며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 이는 우리가 과도하게 발전한 과학 기술의 도래를 간과한다면, 영화 속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회 질서가 무너진 혼돈의 사회를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우리 사회에서 과학 기술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 십년, 수 백 년에 거쳐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해왔다. 앞서 본 예시들과 같이 모든 과학 기술은 오로지 인류가 살아가는 동안 보다 더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자유를 유린하고 존엄성이 짓밟히는 세상을 목표로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다. 필자에게 ‘문명 세계’는 마냥 벌어지지 않을 미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현재로서도 굉장한 발전을 이룩한 과학 분야에서, 어쩌면 지금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