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송영목 저)1)들어가는 말신약 신학이 기독교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크다.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대한 말씀을 실천한 기록을 담은 일종의 ‘신화’에 대한 기록이자 다소 추상적인 접근에 가깝다면, 신약은 현재의 대중적인 기독교신학의 이론적인 틀과 기반을 닦아 놓은 ‘학문’이자 구체적인 접근이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신학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신약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그렇다 보니 관련 연구 및 서적 출판이 2022년 현재까지도 매우 활발한 상태이다. 그렇게 출판된 서적들 역시 거의 항상 전공자들과 교수들의 책장 혹은 가방 한 켠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송영목 교수의 또한 넓게 본다면 그렇게 나온 수많은 재해석 및 주석본 중 하나로 생각할 만 하나, 저자의 학문적 개성이 뚜렷이 묻어난 이 책만의 특징들이 신약신학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선사한다.본서와 그 개정판 출판 전후로도 계속해서 다른 수많은 신약 신학 책들이 출판되어 왔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현대 신학의 경향 중 하나인 ‘비평학’에 매몰되어 있다는 한계점을 공유하고 있다. 신학의 학문적인 요소에만 집중하다 보니 신약이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또 사역의 현장에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송두리째 빠져 있다. 이는 신학을 지나치게 지엽적으로 보이게 만들며 더 나아가 현실적 문제는 무시한 채 탁상공론에만 빠져 있는 학문처럼 여겨질 위험을 키운다. 본서가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이 점으로, 저자는 기존의 학문적 접근에서 벗어나 실제로 현대사회와 그를 살아가는 방식과 신약 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데 성공한다. 해당 글을 통해 서평해보고자 하는 요소 또한 그것이다.2) 책의 구성 및 분석신약신학 원전은 일반적인 공관복음부터 시작하여 예언적 내용 위주인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신학적 주제를 총 망라하고 있다. 저자 또한 원전의 구성에 충실하게 약 40여개에 이르는 신약 속 신학 주제들을 세부적으로 탐구한다. 구성은 총고루 포괄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상술했듯 이렇게 골고루 포함된 소재들이 현대사회와 맞닿아 있는 것도 본서만의 특징이다. 이에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탐구 비평, 요한복음의 예수의 세족 묘사, 사도행전의 시편, 그리고 바울의 교회에서의 여성 역할 묘사 같이 지금까지 흔히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소재들이 포함되어있다. 해당 특징들을 중심으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2-1) 그리스도 완결적~ 교회 완결적 해석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탐구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 중 하나이자 기독교사의 한 주축을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연관성을 찾는 방식이다. 해당 방식에선 성경의 거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모형론적인 해석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해당 접근방식이 현대신학 연구의 토대가 되오긴 했으나 이것이 과하다 보니 성경의 내용은 단지 분석대상으로,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의 변형을 찾기 위한 단순한 이론적 예시에 그친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반면 본서에서는 기존의 그리스도 중심 해석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여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책 내용을 빌어 설명하자면, 저자는 “기존의 일방적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재고되어야 하며…역동적인 적용을 도와야 한다.”라고 그 소견을 밝힌다. 이는 신학자인 피터 엔스(Peter Enns)가 주창했던 것과도 일치하는데, 엔스는 구약을 해석할 때 기존처럼 구약 내용에서 예수의 인격 및 사역이 포함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완결한 사역의 관점을 가지고 구약을 차례차례 해석해 나가야 함을 주장한다. 저자의 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성경을 단순한 예시의 집합이 아닌 구속사역 및 구원계시사 발전의 맥락 속에서 다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이렇게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으로 시작한 내용의 최종 정착지는 ‘교회 완결적 적용’이다. 책의 내용을 빌자면,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은 구약을 단순히 윤리적으로 해석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인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를 보자. 실제로도 각종 그리스도교 교파들은 이 문구를 근거로 여성을 지도적인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여성인권 신장과 관련된 페미니즘의 등장과 함께 페미니즘 성향의 신학자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는 소재이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지금까지 인권 및 사회적인 측면에만 한정되어온 (단어 그대로 받아들여 내포된 메시지나 신학적 해석을 완전히 간과하고 마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본서와 저자는 그러한 지엽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고 해당 문제를 교리 및 신학적 논리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하며, 이를 신학과 교리, 그리고 질서의 관점을 통해 해석한다. 이는 저자가 처음부터 못 박고 시작하는 ‘사회 이념 전쟁의 도구로 그치는 신학이 아닌,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논리를 여실히 선보인다.다른 저자의 모토가 엿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이다. 4기사, 붉은 용 등 다분히 종말론적으로 해석될 내용이 다분한 이 부분은 언뜻 보기엔 신학적 해석이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본서에서 해석의 소재로 택한 것이 ‘예배’라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종말계시록처럼 느껴지는 내용은 실제로는 참 예배와 거짓된 예배를 구분하는 방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요한 계시록 전체는 사실 “지극히 예전적인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결론으로 그 예전들을 현대 예배에 적용하는 방식 또한 첨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데, 이 또한 앞의 바울 교회 부분에 대한 해석에 이어 또다른 교회 완결적 해석의 정수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렇듯 본서는 탁상공론, 비신학적 이념 다툼의 도구 혹은 왜곡된 해석에 갇힐뻔한 신약 속 신학들을 다시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 끌어올리며 교회 완결적 적용을 통해 현대의 교회가 이들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소상히 덧붙이는 걸 잊지 않고 있다.2-2)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상술했하는 일명 ‘사이비’ 교파들에 의해 확대 해석되는 경우가 잦으며, 이는 기존의 종말론적 해석과 특유의 불길한 느낌을 지닌 성경 부분으로 그 이미지가 고정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그런 면을 생각하고 보자면 저자가 종말론과 요한계시록을 설명한 부분은 그야말로 구원투수처럼 느껴진다.본서는 기존의 ‘종말론 = 종말이라는 단일 주제만을 위한 지식’이라는 편향적인 정의를 과감히 배격한다. 대신 그 용어를 성경만이 좇고 있는 하나의 ‘역사적 목적’과 동일한 더욱 넓은 의미의 단어로 치환한다. 이 전제로부터 본서만의 새로운 질문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교회가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하느냐’ 이다. 이 질문에 대한 자문자답이 포인트로, 종말론을 “고난의 종말론”과 “승리의 종말론”으로 구별하여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종말론으로부터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요점이다. 이는 Already(이미)와 Not yet(아직 아니) 사이의 대립 관계 속에서 제시된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주님의 초림~재림 사이 기간 교회의 모습은 ‘이미’ 고난을 받고 있는 교회이지만, 그 교회와 신도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으로서 ‘아직 아니’ 왔지만 결국에는 도래할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대략적인 그 주장이다. 성경의 내용을 따지고 보면 결국 이렇게 ‘승리하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신도들의 이야기라는 셈이다. ‘종말’이라는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소재를 연상케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찬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예배’와 ‘그리스도’의 차원으로 풀어내는 방법이야말로 탁월하기 그지없다. 불길한 내용 때문에 신학자들의 해석이 더뎌지며, 인정받지 못한 일명 사이비 교파들에 의해 확대 해석되어 오해에 오해를 부르던 기존의 요한계시록이 뒤집어쓴 오명 속에서 그 탁월성은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그래서 본서의 ‘신약신학’은 상술한 신학적 주제들같이 40여여 개에 달하는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과적으로 ‘구원계시사’라는 하나의 결론을 요한계시록이라는 겉으로는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소재를 가져와 구원계시사로 연결시킨 다음 이를 세련되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이 책의 고유의 관점이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가치다. 학문이라는 소재에 집착하지 않고 종교와 믿음 그리고 구원이라는 기본적인 하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보답을 받은 것이다.3) 결론 및 서평기독교신학이 체계화되면서 발전한 점은 분명 많다. 그러나 체계화에 뒤따르는 규격화 및 지나치게 객관적인 ‘학문화’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령 믿음이나 신앙 같은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그 가치가 한없이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럴 때는 지나치게 학문적 및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며 설명하지 못하려는 것을 설명하려 드는 전형적인 현대의 신약 해석보다는 좀 더 보수적이고 근원적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계시사’라는 낡아보이는 이론을 다시 발굴해 설득력 있게 다듬고, 아무도 제대로 시도하지 않던 의 교리적 해석을 풀어내어 신자들에게 희망을 준 송영목 교수의 은 수많은 신약 해석본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아쉬운 점을 뽑아야 한다면, 40여개에 달하는 소재를 한꺼번에 다루다보니 저자가 최선을 다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긴 했으나 가끔씩은 독자의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러나 상술한 본서만의 의의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상쇄되는 단점으로 여겨진다.현대사회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과거와 비슷하거나 더 강해졌다고 보기는 힘든 세태다. 이제 겨우 끝이 보이기 시작한 전염병 바이러스(필자 또한 감염된 바 있다) 때문에 약 2년 동안 세상은 침체되어 있었으며, 올해 초부터는 형제나 다름없는 두 국가가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종교와 신학이 가장 필요할 때이지만, 지금까지 너무 학문적이고 딱딱한 (그리고 잘못된) 잣대를 들이대고 있던 탓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때에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학문적 잣대만으로는 절대 알
왜 지금 자유인가: 존 스튜어트 밀의 다시 읽기서론: 자유는 이제 제한해도 되는 권리가 되었나?“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초대 미국의 버지니아 주지사인 패트릭 헨리가 독립전쟁에서 영국에 맞서야 함을 주장하며 꺼낸 유명한 말이다. 물론, 이제는 자유를 못 얻으면 그대로 죽는 걸 택할 정도로 비장하게 ‘자유’라는 주제를 다루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다. 오히려 인류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자유라는 개념이 제일 친숙하고, 심지어는 친숙하다 못해 따분해질 정도로 보이는 유례없는 시대이다. 극소수의 독재국가들을 제외하면 각국의 정부들은 그 국민들에게 많은 방면에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위는 거센 비판과 항의의 대상이 되어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설령 예외적인 사례가 있을지언정 많은 지구상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의 자유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수호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자유가 이렇도록 친숙하고 완벽하게 사회에 적용되었고, 그 개념 또한 일반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인만큼 이를 부정적인 변화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유례없이 주어진 자유라는 것이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결과들로 표출되는 사례들 또한 잦아지고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져온 자유의 전파를 되려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는 가치관이 생기고 마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들끼리 서로 누리려 하는 자유가 상반될 때 생기는 충돌들이다.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예시로는 대한민국 복지부가 ‘국민의 건강증진’으로 표기한 건강의 자유및 경관 보존을 명분으로 들어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를 제한하려 했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딪혀 포기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당시 반대 여론의 골자는 ‘음주의 자유’를 공권력이 침해한다는 것이었는데, 복지부가 음주 규제를 밀어붙인 것 또한 단순히 다른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닌 시민들이 공공장소의 미관을 오롯히 즐기 보장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도, 자유라는 주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더구나 다른 방향으로 뻗은 수많은 자유들의 충돌이나, 사회 규범을 어기는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여러 사례들을 보며 자유의 전파나 보장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여론까지 생겼다는 것은, 자유를 기반으로 형성되어온 현대사회의 근간까지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때문에 일부의 주장처럼 오남용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 자체를 제한한다는 것은, 시대 퇴행적인 발상인 것은 물론 오히려 더 극심한 사회상의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퇴행적 결정은 할 수 없다면서, 반대로 현대사회가 자유를 두고 겪고 있는 진통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 또한 절대 좋은 결과를 낳기는 어렵다는 딜레마 또한 공존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유에 대한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원칙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그 어느때보다도 강해졌다. 때문에 현대인은 최초로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학문적인 원칙을 정리한 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그 저서인 을 통해 그 개념과 원칙을 확실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술할 내용을 통하여 밀이 정의한 자유들의 대략적인 개념과, 그것이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않은’ 우리의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논해보고자 한다.본론: 자유는 무엇인가?서론에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주어질 자유를 논할 때 중요한 문제는 그 한계점을 어디까지 그리고 어떻게 정해야 하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유의 한계점을 사회 차원에서 명확하게 정하려 했던 시도는 적지 않다. 현대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지만, 은 그렇게 자유를 제한하려 하는 행위들에 적용되는 기준들이 하나같이 일관성이나 정당성이 갖춰지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렇다.“사실 개인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적절한 것인지, 아니면 부적절한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별해내 벌칙이라는 형태의 물리적 힘을 수단으로 해서든, 여론에 의한 도덕적 강압을 수단으로 해서든, 개인을 강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규율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다… 문명화된 공동체가 자신의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지에 반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한 때는, 오직 다른 사람에 대한 위해를 막고자 하는 경우뿐이란 뜻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한 주권은 개인에게 있다.” (자유론, 35p)주권에 대한 서술에서 보이는 것처럼, 밀의 ‘위해 원칙’은 개인의 주권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분명하게 명시한다. 간단하게 말하여 사회 및 국가는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무조건적으로 그를 보장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언급되는 전제인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을 보고, 서론에서 언급한 광복절 일장기 게양 사건같이 자유라는 명분으로 다수에게 불쾌감을 포함해 해를 끼친 사례들에 대해선 정부가 처벌(당하는 입장에서는 억압이라고 주장할 것이지만)을 가할 수 있는 명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밀의 설명은 다소 다른데, 그것이 시민이 각자 지닌 사회적 의무를 위반하거나 명백한 범죄같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러한 행위를 ‘직접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단지 술을 마시고 취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처벌이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군인이나 경찰이 술을 마시고 취한 경우에는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다.” (자유론 161p) 라는 설명에서 보이듯, 똑같이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도 경찰이나 군인같이 특정한 의무를 지닌 시민이 명백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이는 등 사회에 명백한 해를 끼치는 게 보여야 국가가 개입해 이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유사 사례로 언급한 일장기 게양 사건은 수많은 언론 및 시민의 성토를 받았고 그 짙은 자국혐오 성향 때문에 불쾌해한 시민들도 많았으나, 국가가 이에차원에서 정당화되었다가 겨우 폐지된 인종 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성소수자 및 성 차별 문제에 대해 항의했던 여론도 마침내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단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규범과는 다르므로 처벌해야 한다’라는 명분 아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주제에 벗어나는 사상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보다는, 이들 모두가 사실 사회에 아무런 실질적인 피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다. 단지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그것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고 이에 대해 누가 불쾌감을 느끼고 멀리하고 싶었던들, 그것을 의견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입은 실질적인 피해라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자유를 진정으로 수호하는 국가라면, 공분을 산다 한들 실질적인 피해를 끼치지는 않은 사건들에 개입할 명분은 전무하다.이렇게 상당히 파격적인 자유를 두고 다소 과도한 방임주의가 아니냐는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밀이 생전에는 자유주의자에 앞서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자이기도 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 장에서도 설명되다시피 ‘위해 원칙’의 목적은 모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면서도 사회의 평화와 그 질서를 굳건히 유지하는 것으로, 그 안에 내포된 공리주의적 목적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를 3장에서 설명된 인간의 개성의 중요성과 연관 지을 수 있는데, 밀의 표현에 따르면 개개인의 성향은 제각각인데다 추구하는 것도 다르니 결국 자라나는 방향도 각자가 맞는 길을 자유롭게 택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이는 단지 옳은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개인이 양질의 자기계발을 통해 능력과 재능을 발휘한다면 당연히 사회 또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사회는 개개인이 이미 알고있는 자신의 능력은 물론, 혹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식으로 그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선택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개입 또한 지지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많은 공리주의 이론들과 달리, 밀의 수 없게 된 다른 이들도 귀중한 인격 형성의 기회를 송두리째 놓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설령 명백히 틀린 주장들이라고 해도 이들은 묵살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틀린 이유를 알고 있다고 해도, 다시 한번 그것이 틀린 이유를 상기시키고 곱씹어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 이다. 밀 특유의 개인의 자유 기반 공리주의가 다시 한 번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공리주의를 단지 다수의 눈에 보이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아예 틀리거나 혹은 불쾌감을 주는 주장이 처음부터 나오지 않도록 규제한다는 것은 딱히 “도덕적으로나 지식의 면에서나 옳지 못한 일 (자유론 85p)”이 틀림없다. 물론, 그 틀린 주장들을 듣지 않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주장들을 듣고 사람들이 곱씹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뜻임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서론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가지고 자유 자체에 회의를 느끼거나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자, 현대 사회에 울리는 의 묵직한 경종이라 보아야 되겠다.결론: 자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현대사회 속 개인의 자유는 그 어느때보다도 보장받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주장한 실질적인 자유가 보장되는지는 의문이다. 앞서 말한 자유를 규제 당하는 것을 불쾌감을 이유만으로 자청하는 (그럼으로서 다수의 폭정을 다시 재현하려는) 여론이 생겼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예시이며, 또한 정부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검열하지 않는 대신 자발적으로 그 검열의 당사자를 자청하며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입장을 사이버불링하는, 속칭 ‘조리돌림’이라는 자유의 측면에서는 대단히 좋지 않은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 또다른 예시이다. 21세기에 들어 젠더갈등 등으로 격화된 ‘페미니즘’ 사상이나 비슷한 계기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마찬가지로 사상의 옳고 그름은 논제에서 벗어나므로 논하지 않으나, 밀 본인은 남들과 다른 선택의 자유 측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