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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클리드의 창 독후감
    유클리드의 창[2장 데카르트 이야기]장소의 혁명위치를 규정한다는 것은 한 지점에 이름을 붙이는 것 이상의 일이다. 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전"(평면, 공간 또는 구면의 점들을 명명하는 체계)은 시작에 불과하다. 위치 이론의 참된 위력은, 서로 다른 위치와 궤적과 도형을 서로 연관 시키고 등식을 적용하여 조작하는 능력에 있다. 즉, 기하학과 대수학을 결합하는 능력에 있다. 위치의 혁명으로 향하는 조짐은 증명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초기에 지도가 발명되면서 동장했다. 그리스인들이 및 가지 세부적인 개량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종말은 연구를 미완성으로 남게 했고, 역량을 집결되지 못하게 했다. 위치 혁명으로 가는 다음 단계는 그래프의 발명이었는데, 이 발명은 암흑시대에 이어서 일어난 지적 전통의 부활 이후에 이루어졌다. 마침내 혁명의 기운은 1,0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위대 한 그리스의 수학자들과 지도제작자들의 마지막 세대의 뒤를 밝았다.위도와 경도의 기원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지도를 처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집트인들이 기하학을 발명하게 된 동기와 같은 동기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2300년 경에 만들어진 이 단순한 점토판 지도들에는, 기호설명이나 종교적 헌사 가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세에 관한 메모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와 바빌론에서는 부동산의 경계와 소유자 등의 정보를 기록한 부동산 지도가 흔히 사용되었다.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대양을 향한 탐험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지도 제작의 주목적은 보다 생명에 직결된 문제로 바뀐다. 향해가들과 탐험가들이 대양에서 통과해야 할 절대절명의 시험은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지구의 표면 위에 있는 당신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두 개의 좌표는 위도와 경도이다. 위도와 경도를 이해하기 위해 서 구면 한 개와 직선 두 개, 그리고 점 세 개를 생각해야 한다. 먼저 공간에 떠 있는 지구를 생각하라. 다음 세 개의 점을 놓는데, 하않았다. 지도들은 기하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만들어지지 않았고, 축척의 관념도 거의 없었다. 지도들은 대개 상징적이고, 역사적이고, 장식적이고, 종교적이었다.정신의 발전을 막은 이 모든 장애요인들에 앞서 가장 큰 장애요인은 보다 직접적인 제약이었다. 중세의 학자들은 성서가 글자 그대로 진리임을 받아들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요구에 따라야 했다. 다른 주장을 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교회가 이성의 부활을 두려워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일 성서가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면, 자연과 도덕에 관한 성서의 권위는 절대적으로 신앙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서는 때때로 관찰과 수학적 논증으로 도출한 자연의 개념과 충돌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대학을 키움으로써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자연과 도덕에 관한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에 기여한 셈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을 곁에 서서 방관하지는 않았다.중세 후기의 주된 자연철학적 흐름은 새로운 대학들, 특히 옥스퍼드와 파리에 중심을 둔 스콜라 철학이었다. 정신적인 대립을 막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주된 노력은 그들의 물리학적 이론과 종교를 화해시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의 철학의 중심 물음은 성서에 주어진 지식이 이성을 통해서도 도출되거나 설명될 수 있는가 라는 메타질문이었다.최초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는 논리적인 추론이 참을 결정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2세기에 파리에 살았던 아벨라르이다. 중세 프랑스 에서 그런 입장을 택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벨라르는 파문당하고 그의 저술들은 불태워졌다.스콜라 철학은 서양 세계 지적 전통의 부활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철학으로부터 많은 것을 수혜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알마뉴 지역 캉 근교의 마을 출신인 프랑스인 성직자이다. 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미래에 가장 크게 빚을 발한 것이 바로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를 기억 하게 해주는 것이 지구에는 거의 없으나 달에는 그를 거리기 위해 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분화구가 하나 있다. 기하학 전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유클리드를 반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도약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묘사한공간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클리드는 수학의 본성을 정의한 것만이 아니다. 그의 책은 교육과 자연철학에서 논리적 사고의 모범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세기까지, 모든 건축기술, 모든 회화의 구도, 모든 과학적 이론과 방정식이 예외없이 유클리드적이었다. 유클리드는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추상적 논리 체계로 변환시키고, 그 체계로부터 명제를 도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유클리드의 공리들 중 하나인 평행선 공리는 모든 학자들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공리는 유클리드의 다른 전제들과는 달리 단순하지도 직관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프톨레마이오스의 실수평행선 공리를 증명하려는 첫번째 알려진 시도는 기원후 2세기 프롤레마이오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평행선 공리와 동치인 다른 형태의 명제를 전제하고, 이 명제로부터 원래의 공리를 도출했다. 몇 가지 형태의 평범한 가정들이 평행선 공리의 다른 형태라는 것이 밝혀졌다.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200-300년이 지난 후에 프로클로스가 평행선 공리를 증명하는 두번째 시도를 했다. 그는 유클리드의 작품을 분석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이후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진 기하학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프로클로스의 논변을 쉽게 이해하려면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 앞에서 선보인 바 있는 평행선 공리의 다른 형태, 즉 플레이페어의 공리를 이용한다. 둘째, 프로클로스 논변의 학문적 용어들을 쉬운 말로 약간 바꾼다. 셋째, 그리스어를 번역한다.그러나 프로클로스 논변이 저지른 실수는 정당화되지 않은 가정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실수이다. 9세기의 바그다드의 학자 타비트도 이와 유사한 실수를 범했다. 타비트의 시도는 공간의 개념에 관한 보다 심층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체계는 도형을 주위로 움직여 서로 겹쳐 놓을 수 있는 가능성에 의존한다. 이 방법을는 일이다. 쌍곡선 공간에서의 평행선 공리를 플레이페어 형태로 푸앵카레 모델에 맞추어 진술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푸앵카레-직선 하나와 그 푸앵카레-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이 있을 때, 그 외부점을 지나면서 그 푸앵카레-직선과 교차하지 않는 푸앵카레-직선들이 많이 있다.푸앵카레의 모형은 단지 쌍곡선 공간의 모형일 뿐만 아니라, 쌍곡선 공간이다. 수학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쌍곡선-평면에 관한 모든 가능한 수학적 진술이 푸앵카레 모형에 관한 진술과 동일함을 수학자들이 증명했다는 것을 뜻한다.쌍곡선 공간이 발견되고 20-30년 후에 또다른 유형의 비유클리드 공간인 타원 공간이 발견되었다. 타원 공간은 평행선 공리를 다른 방식으로 위반했을 때 생겨나는 공간이다. 즉 평행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했을 때 얻어지는 공간이다. 증명된 바에 따르면, 유클리드의 체계를 따를 경우, 평행선 공리를 대체한다고 할지라도 타원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문제 있는 체계로 밝혀진 것은, 타원 공간이 아니라 유클리드의 공리 체계 그 자체였다.인류라고 부르는 어떤 곤충들1810년 이후 10년 동안 가우스는 많은 시간을 집을 떠나 독일의 여러 지역을 탐사하는 데에 보냈다. 탐사의 핵심은 도시들 사이의 거리를 비롯한 여러 기준점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그 자료를 모아서 지도를 만드는 것이었다.가우스가 극복해야 하는 첫번째 어려움은, 측정도구들의 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직선은 각각 일정한 정도의 측정오차가 있는 보다 작은 여러 개의 선분들로 구성 되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오차는 급행 누적되었다. 이 어려움에 직면한 가우스는 확률과 통계를 다루는 현대 수학의 분야에 핵심이 되는 개념을 발명했다. 규칙 없는 오차는 평균값을 중심으로 종 모양을 그리는 곡선을 따라서 분포한다는 정리를 제시했다.오차 문제를 해결한 가우스는, 고도의 차이 및 지구의 곡률 때문에 3차원으로 되어 있는 자료로부터 2차원의 지도를 만드는 어려움을 맞는다. 이 어려움은 지구의 표면 점에서 서로 교차한다.그러므로 "사이” 개념의 해석도 불분명해진다. 유클리드는 제1공리를 기반으로 해서 이 개념을 설명했다. 임의의 두 점이 있을 때, 그 두 점을 끝점으로 하는 선분 하나를 그을 수 있다.주어진 두 점 사이에 있는 한 점을 만들려면, 유클리드는 그 두 점을 잇는 선분을 그을 것이다. 이때 선분 위에 있는 모든 점은 두 점 “사이”에 있다고 간주된다. 리만의 모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두 개의 점을 대원의 부분으로 연결하는 방법이 항상 두 개가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는 아프리카 적도 지역과 남아메리카 적도 지역 사이에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적도를 따라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잇는 대원 선분을 그리고 그 선분이 인도네시아를 통과하는지 조사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리만의 모형에서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잇는 방법이 두 개나 있다. 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 움직여 남아메리카에 닿을 수도 있고, 서쪽으로 움직여 닿을 수도 있다. 이때 한 경로는 인도네시아를 통과 하지만, 다른 경로는 통과하지 않는다.이 애매함 때문에 점들을 잇는 선분을 긋는 것과 관련된 유클리드의 모든 증명들이 구면에서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몇 가지 기묘한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한 예로, 반지름이 지구처럼 약 6,400킬로미터가 아니라 64킬로미터인 리만의 구면 우주를 생각해보자. 이 우주에서 산다면, 앞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또는 훌라후프를 돌린다고 해보자. 훌라후프의 반지름은 대략 1미터 정도이다. 훌라후프를 돌릴 때 우리는 훌라후프 안에 있다. 자동차 경주로만큼, 훌라후프를 지름이 1.6킬로미터가 되도록 확대해보면, 우리가 상상한 우주의 반지름인 64킬로미터에 비하면 작다. 훌라후프를 더 확장하면, 훌라후프의 둘레가 당신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하면, 훌라후프는 줄어든다. 마침내 훌라후프는 처음처럼 반지름 1미터가 되고, 훌라후프의 중심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정반대 쪽에 있는 구면 위의 한 점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홀라후프 밖에 있는각했다.
    독후감/창작| 2023.08.22| 22페이지| 2,500원| 조회(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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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수학의 필하모니, 유클리드의 창 독후감
    수학의 필하모니, 유클리드의 창 독후감 평가A+최고예요
    유클리드의 창서론아리스토텔레스는 배의 선체가 돛대와 돛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우리가 사는 행성의 거시적 구조를 관찰하기 위해서 그는 기하학의 창을 통해서 내다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관찰하고 논리를 적용하고 오랜 시간 동안 하늘을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성질과 구조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기하학의 도움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지평 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세계사에서 일어난 다섯 차례의 기하학 혁명의 배후에 있었던 물음이다. 당신은 우주에 관해서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공간이 휘어져 있을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차원이 있는가? 기하학은 조화로운 우주의 통일성과 질서를 어떻게 설명하는가?기하학 혁명은 피타고라스가 고안한 간단한 기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지렛대의 원리에서부터 천체의 궤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학적 문제를 기하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듯이 보였으나 그리스 문명은 기울고 로마인들이 서양 세계를 정복했다. 그 후 문명이 다시 등장하자 기하학도 다시 새롭게 등장했다. 새로운 기하학은 르네 데카르트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정신적인 노동을 덜기 위해서 기하학과 수를 결합했다. 그의 착상인 좌표를 통해서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위치와 도형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수를 기하학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로 인해서 미적분학과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보다 추상적인 발상, 즉 휘어진 공간에 대한 발상도 가능케 했다. 휘어진 공간의 수학은 기하학 뿐만 아니라 수학 전체의 논리적 토대에 혁명을 가져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휘어진 공간의 수학에 의해서 가능했다. 존 슈바르츠는 15년에 걸쳐서 소위 끈 이론을 연구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끈 이론을 믿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의 타당성을 믿는다.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지배하는 물리적 법칙들의 근원은 그 공간의 기하학이 만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지역에 또 하나의 정착 문명이 생겨난다. 페르시아 만 북부에 살던 사람들이 남쪽의 이웃 부족들을 정복했는데 승리를 거둔 지배자 함무라비는 도시 바빌론의 이름을 따서 통일 왕국을 만들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이집트인들보다 훨씬 더 정교한 수학 체계를 남겨놓았다. 바빌로니아인들의 수학적 지식은 아시리아 지역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의 기술자는 무턱대고 인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운하를 팔 때, 바빌로니아의 기술자는 운하의 단면이 사다리꼴임을 생각하여 파내야 하는 흙의 양을 계산하고, 하루 동안 한 사람이 파낼 수 있는 양을 생각하여 몇 사람이 며칠 동안 일해야 하는지를 알아내었다. 바빌로니아의 금융업자들은 심지어 복리 계산을 했다.이들은 방정식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모든 계산은 말로 기록되어 있다. 문제를 언어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사실은 큰 단점이 아니라고 해도, 방정식에 적용할 수 있는 연산을 어구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이 단점이 극복되기까지는 수천 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덧셈 기호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1481년에 쓰여진 독일의 문서에서이다.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학에 대한 기여는 후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여러 가지 수학적 사실들과 실용적 기술들을 전해준 것에 국한된다. 두 문명은 모두 피타고라스 정리를 알고 있었지만, 어느 문명도 우리가 오늘날 으로 표현하는 일반적인 법칙을 분석해내지 않았다. 왜 이런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또는 어떻게 이 관계를 응용해서 더 많은 앎을 얻을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 있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변의 길이가 1인 단위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1.4142129로 계산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 길이를 정수나 분수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이 사실은 큰 정신적 충격이었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인 비율이에 이름을 붙인다. 빗변은 빗변이라 하고 다른 두 변은 각각 a와 b라고 하고 두 변 중 더 긴 쪽을 a라고 한다. a와 b를 합한 길이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을 그린다. 다음 각 변을 a 길이의 부분과 b 길이의 부분으로 나누는 위치에 점을 찍고, 그렇게 해서 얻은 네 점을 연결한다. 증명에 필요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번째 방법은 빗변의 길이가 같은 변으로 된 정사각형과 네 개의 나머지 삼각형을 얻을 수 있다. 두번째 방법은 변의 길이가 각각 a, b인 정사각형 두 개와 나머지 직사각형 두 개가 얻어지는데, 이 두 직사각형을 대각선을 따라서 나누면 첫번째 방법으로 얻었던 것과 같은 네 개의 나머지 정사각형이 된다. 여러 조각으로 나눈 두 개의 커다란 정사각형의 면적은 서로 같다. 따라서 네 개의 나머지 삼각형을 제하고 남는 면적도 서로 같다. 그런데 첫번째 방법에서 나머지 삼각형들을 제하면 빗변을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이 남고, 두번째 방법에서는 a를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과 b를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이 남는다. 따라서 피타고라스 정리가 증명되었다.이러한 새롭고 성공적인 앎에 고무된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수와 수의 성질이 없다면, 존재하는 것들을 분명히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과학을 뜻하는 그리스어 마테마로부터 수학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 어원은 수학과 과학이 밀접한 관계를 맺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수학과 과학은 엄밀히 구분된다. 이성적인 말과 허튼 소리 역시 엄밀히 구분되어야 하는데, 피타고라스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수적인 관계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경외심은 그로 하여금 수에 관한 여러가지 신비적 믿음을 가지게 했다. 그는 최초로 수를 짝수와 홀수로 나누었으며, 그 둘을 의인화했다. 그는 홀수를 남성, 짝수를 여성이라고 불렀다. 피타고라스는 특정한 수와 관념을 결합시켰다. 예를 들면 1은 이성, 2는 의견, 4는 정의와 결합된다. 그의 사상에서 4는 정사각형과 관련되므로, 정사각형은 정의와 연결된다. 피타고라스의 입장을는다는 원칙을 깨뜨렸다. 그는 난민들을 송환하지 않도록 크로톤 사람들을 설득했고 결국 전쟁에서 크로톤이 승리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실수는 되돌릴 수 없게 되어 피타고라스 집단은 적들에게 공격당해 도피 후 그들의 삶은 불분명해졌다.그들은 그 공격 이후에도 얼마간 유지되다가 두번째 공격을 받아서 소수만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살당했다.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은 여러 형태로 기원전 300년경까지 전승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인에 의해서 부활되어 초기 로마 제국의 주도적인 힘이 된다, 피타고라스주의는 당대의 여러 종교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기원후 2세기에는 피타고라스의 수학이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기원후 4세기에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다시 억압을 받는다. 로마인들은 피타고라스의 철학자 후예들이 기른 긴 머리와 수염을, 그들이 쓰는 아편 등의 약물을, 그리고 그들의 비기독교 신앙을 싫어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폐쇄하고 철학 교육 또한 금지했다. 피타고라스주의는 이후에도 몇 세기 더 희미한 빛을 발하다가, 기원후 600년을 전후하여 암흑시대 속으로 사라졌다.유클리드의 선언기원전 300년경 지중해 남쪽 해안 나일 강 서쪽 인근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남긴 업적은 성서와 경쟁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연구는 철학을 일깨우고 수학의 본성을 정의했다. 그 오랜 기간의 대부분 동안 그의 업적은 고등교육의 필수적인 내용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중세 유럽 문명의 부활에 역사가 된 것 역시 그의 업적이었다. 스피노자가 그를 모방했고, 링컨이 그를 공부했고, 칸트가 그를 변호했다. 그의 이름은 유클리드이다.유클리드의 책 ‘기하학 원본’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읽힌 책들 중 하나이다. 우선 ‘기하학 원본’은 책이 아니라 열세 개의 양피지 두루말이이다. 그런데 처음 네 개의 두루말이는 이전에도 있었던 내용이다. 유클리드의 네 개에 있는 내용각의 정의를 회상해보면 지각은, 한 직선이 다른 직선과 만나면서 교차점에서의 인접각이 서로 같도록 만날 때 만들어지는 각이다. 한 직선이 다른 직선과 수직으로 만날 때 교차 각은 양쪽 모두 90도인 것이다. 그러나 정의만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정의에는 각이 항상 같은 수가 된다는 것조차 명시되어 있지 않다. 두 직선이 어떤 특정 지점에서 만나면 교차 각이 90도이고, 다른 지점에서 만나면 다른 값이 되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직각이 같다는 공리는 이런 일이 생길 수 없음을 단언하는 것이다. 이 공리는 직선이 어느 부분에서나 같은 모양이라는 것을, 즉 일종의 곧음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유클리드의 다섯번째 공리는 평행선 공리라고 부른다. 이 공리는 유클리드가 수집한 기존의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창작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공리가 공리로서는 너무 복잡해서 좋아하지 않았고 증명 가능한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리는 다음과 같다.두 직선을 가로지르는 선분이 있어서, 선분을 기준으로 같은 쪽에 있는 교차 각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으면, 두 직선은 결국 (그쪽에서) 만난다.이러한 평행선 공리를 위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평행선이 전혀 없는 경우, 그리고 한 외부 점을 통과하는 평행선이 하나 이상인 경우이다.문명, 수학의 필하모니사상과 수학수와 표상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것은 음악이나 그림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시나 산문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웃음이나 눈물 또는 춤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지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초보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추상적인 개념까지 나타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의 대표적인 것이 ‘수’이다.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것은 수이다. 그러나 인류가 오늘날과 같이 수를 표현하게 될 때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않았고, 다른 사물을 수식하는 개념으로 쓰였다호는 ‘
    독후감/창작| 2023.08.22| 23페이지| 2,5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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