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은 80년대에 일어난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러닝 타임 대부분이 두 형사, 박두만과 서태윤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다. 범인이 야만, 몰이해로 규정되는 외부적 광기라면 박두만과 서태윤으로 표현되는 경찰 등의 공권력은 자신이 설명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내부적 광기이며 이 영화에서는 범인이 끝내 잡히지 않음으로서 내부적 광기를 들추고 근대 이성의 패배를 보여준다.연쇄살인사건은 그 도시에 주어진 이유를 알 수 없는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이 벌레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형벌이 얼마나 쉽게 인간의 근대 이성을 무너뜨리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영화는 둘의 첫 만남부터 박두만의 방식과 서태윤의 방식을 대조하고 있다. 박두만은 서태윤에게 ‘형사가 싸움을 못해서 어떻게 하냐?’라는 말을 했고 서태윤은 박두만에게 ‘형사가 사람을 못 알아봐서 어떻게 하느냐’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이 영화 전반을 요약하는 대화이다. 이들이 범인을 찾는 과정은 싸움과 사람 알아보는 것이다.서태윤은 서류를, 두만은 자신의 감을 중요시한다. 영화는 초반에 롱테이크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경운기가 지나가는 등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현장에서 감에 의한 수사를 하는 박두만을 보여준다. 범인이 무모증일 것이라고 추리하면서 목욕탕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모습은 이성을 무기로 해야 하는 경찰에서 공권력을 허투루 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박두만은 처음에 죄가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박광호의 운동화로 발자국 증거를 조작한다. 그 때 박두만의 뒤로 기차가 지나간다. 나중에 두 형사는 박광호가 목격자가 되지만 기차에 치여 죽는다. 영화는 박두만이 증거를 조작할 때 이미 박광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두만이 증거를 조작하거나 범인이 아닌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마녀사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녀사냥은 당시의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을 모두 마녀의 탓으로 떠넘기는 것은 근대적인 폭력의 방식이었다. 마치 ‘지주회시’에서 그는 아내가 그의 벌거지를 모두 짊어지는 대속물이 되게 했듯이 박두만은 범인이 아닌 이들에게 벌거지를 모두 짊어지게 한다. 구 반장은 박두만에게 강간범과 여자의 오빠가 함께 있는데 구분할 수 있겠냐는 말을 한다. 박두만은 어떠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유튜버 ‘백수골방’의 해석에 의하면 뒤이어 바로 박두만의 정사장면이 나오는 것이 박두만 역시 가해자인 것이라고 한다. 박두만은 광기라는 요소를 예외의 것으로 떼어놓으면서 근대의 코기토를 형성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진짜 광기라는 요소를 예외의 것을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우는 방식이 되었지만.서태윤의 수사방식은 그에 비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보인다. 서태윤은 영화 초반에 죄 없는 사람을 붙잡아 심문하는 박두만과 대립하면서 범인의 신체적인 단서나 시신의 상태를 살펴 범인을 추리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점점 박두만의 처음 모습과 닮아가게 된다. 경찰은 라디오에 엽서를 보낸 사람이 범인이라는 추리를 하게 되어 박현규였고 그를 조사하게 된다. 여기를 기점으로 서태윤 형사는 점점 자신이 처음에 못마땅하게 여겼던 박두만의 방식과 유사해진다.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이 부드러웠다는 생존한 피해자의 말과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는 것 등의 물증이 아닌 심증으로 박현규를 심문하고 몰아붙이는 모습은 처음의 박두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뒤이어 박두만이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라는 말을 하자 서태윤은 ‘다 필요 없고 자백만 받으면 된다’라는 말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렇다.결국 박현규의 유전자 검사는 결국 범인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나온다. 서태윤은 그 서류를 보고 이건 다 틀렸고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는 초반에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초에 그가 가진 서류에 대한 신뢰는 결국 자신이 설명하지 못할 것, 밝혀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목격자 집단에서의 광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마지막 장면에서 결과적으로 박현규를 총으로 쏜 사람은 서태윤이다. 지주회시의 ‘나’는 아내를 거미로 몰았던 자신 역시 거미였음을, 자신의 내부적 광기를 스스로 자백한다. 서태윤 역시 총으로 박현규를 쏘면서 서류 등 근대의 수사 방식에 대한 자신감 자체가 광기였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영화 초반에 박두만은 서태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강간범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때렸다. 그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그런 박두만 역시 그의 감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수첩을 찢는다. 그 수첩은 영화 시작 무렵 박두만은 범인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노트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끝내 철길에서 비를 맞으며 범인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는 마치 자신의 광기를 스스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박두만의 마녀사냥은 광기를 예외의 것으로 설정하여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려 하는 코기토라면 서태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광기의 내재적 초과로서 자신을 구성하는 코기토라고 볼 수 있다.둘은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박두만과 서태윤은 경찰, 국가 공권력이 스스로를 이성, 명료한 주체성으로 규정하며 외부의 범인들을 바라보는 근대적 목격자들의 집단 내에서의 광기이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은 각각의 방식으로 코기토를 형성한 근대적 이성의 패배인 것이다. 죽은 박광호와 박현규 모두 근대인의 내적 광기의 희생자인 것이다.서울에서 온 형사, 서태윤이 보여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은 영화가 관객에게 걸었던 속임수인 것 같다. 서태윤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고 관객들은 그라면 범인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게 한다. 관객이 이러한 착각을 하게 하고 그를 믿는다. 하지만 그 역시 범인을 잡지 못한다. 아니 도리어 범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박두만이 처음에 보여준 모습보다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관객의 믿음 역시 서태윤과 박두만이 가지고 있던 내부적 광기의 일면인 것이다.80년대 사회 상을 조명함으로서 이 영화는 내부적 광기를 두 형사에 한정하지 않고 경찰이라는 집단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우선 데모하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 경찰 인력이 많이 투입되어 수사에 쓰일 인력이 부족한 것을 보여준다. 시민들이 데모하는 이유는 군부 독재 때문이다. 독재 정권과 이 영화 속에서의 경찰은 어떤 면에서 많이 닮아 있다. 독재 정권은 자만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독재 정권 자신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며 일종의 광기일 수 있다. 당시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국가 공권력인 경찰은 어떻게 보면 싸움을 막기 위한 것인데 박두만이 서태윤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하는 말인 ‘형사가 싸움을 못해서 어떻해?’는 형사는 싸움을 잘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평화를 명분으로 하는 공권력의 근원이 사실 싸움, 물리적인 힘이라는 말은 국가 자체가 가진 내부적 광기를 보여준다.
김연덕, 이기리, 김선오 시 비교 분석3명의 시인 모두 나와 너가 등장하면서 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세계의 종말과 미래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형태로 놓여있는 이들이 등장하는 시들이 큰 서사를 이루는 시집이 ‘재와 사랑의 미래’이다. 이기리의 시는 내가 유령화자가 되어 너를 만나고 있다. 김연덕의 시는 사랑이 세계의 종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매개가 되고 있다. 김선오의 실낙원에서 내가 너를 부르면 너가 사라진다. 크로키에서 얼굴이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나는 너를 부르고 너에게 닿으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선오의 첫이라는 시에서 나와 너는 만나지 못하며 ‘디졸브’에서는 우리는 몸을 맞대도 섞이지 않는다. 수많은 얼굴로 요동치는 너의 얼굴은 너와 내가 닿을 수 없게 한다. ‘내 얼굴에 네가 빠지고’에서는 얼굴에서 너를 건진다. 얼굴은 너와 내가 닿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얼굴은 회전하고 수심이 깊어 빛이 닿지 않는다. 너는 나의 얼굴 속으로 가라앉는다. 얼굴에 빠지고 가라앉는 것은 너와 나는 가까워지려 하지만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얼굴을 단지 표면으로 보는 것이 아닌 깊이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기리의 빛에서 ‘너에게 멀어질 때 환해진다’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시인 모두 결코 맞닿을 수 없는 너와 나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르다. 이기리의 시에서는 너와 내가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고 김선오의 시에서는 어떤 것을 명명함으로서 그것이 오히려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이기리의 시에서 나는 유령으로 나타나 너의 곁에 머문다. 김선오의 시에서는 내가 너와 닿을 수 없음에도 불과하고 끊임없이 너를 찾는다.이기리의 시에서 죽음이라는 개인의 끝 이후의 사랑이라면 김연덕의 시에서는 세계의 끝 이후의 사랑이다. ‘사랑의 미래’는 양극단에 있는 빛과 물, 스위치와 전기가 서로를 향해 침식하고 하나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종말과 시작이 만나는 지점에 사람을 놓은 이 시집의 서사를 축약하고 있다. 재는 종말, 미래는 시작을 암시한다면 그 사이에 사랑이 있어 이 시집의 제목이 재와 사랑의 미래인 것 같다.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77)’에서 산을 깎는 것은 내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있음을 보여준다. 김연덕의 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분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는 베르그송적 시간관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래서 미래는 내가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된다.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는 시간관으로 인해 나는 거시적 시간 위에 놓이게 된다. 네가 산을 깎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런 시간관이 바탕이 된 것이며 이 시집의 종말 역시 마찬가지다.김선오의 시간관은 거기서 더 나아가 과거와 미래 자체를 무화시킨다. ‘시네 키드’, 두 개의 스크린이 있는 상영관에 하나에는 과거가 하나에는 미래가 방영되면서 시작된다. 그 두 스크린은 왼손과 오른손, 빛과 어둠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왼손과 오른손은 방향을 바꾸면 그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어느 쪽이 과거이고 미래인지 알려 줄 수 없다는 안내방송은 시간의 방향성 자체를 지워버린다.김선오의 시에서는 내가 윤곽을 지우거나 윤곽이 사라진 공간에 내가 놓인다. ‘피렌체’에서 ‘조각을 만지면 조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나 ‘디졸브’에서 비 가운데 비의 바깥이 있다. 보양극단의 시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공존하는 김선오의 시로 ‘러브 미 텐더’가 있다. 어깨 위에 눈이 쌓이고 뒤를 돌면 매미가 울고 있는 정황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시는 김연덕의 재와 사랑의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김연덕, 재와 사랑의 미래(43)에는 ‘양극단의 시공간만이 서로를 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라는 행이 있다. 이 행은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겹쳐 있으며 시작과 종말이 겹쳐 있는 이 시의 시간관을 바탕에 두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양극단의 시공간을 겹쳐놓는 이 시의 행으로 눈밭에서 수영하는 한 남자가 나타나거나 다시 눈보라, 어깨, 타일과 뜨거운이 있다. 종말과 시작을 겹쳐놓은 김연덕의 시와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린 김선오의 시는 이런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반면 이기리는 시 안에서 시간을 정지시킨다. 예를 들면 ‘우리 집에는 식물이 없다’에서 ‘시간을 그만하고 싶을 때’나 나무들이 정지된 화면처럼 다시 재생되기를 기다리는 유리 온실을 보면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간직하고 싶은 풍경에 파슬리를 뿌린다는 표현을 통해 마치 동영상을 일시정지 시키듯이 움직이는 세상의 한 순간을 박제하는 사람을 만들고 시간의 바깥에 있는 화자를 설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기리는 조화나 식물인간처럼 원래 움직이다가 정지되어 버린 생명을 가지고 있거나 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멈춰져 있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것을 다루기도 하고 이기리의 시에는 유령화자가 등장하는데 유령화자는 죽음을 거친다. 죽음은 어떻게 보면 멈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리의 시는 시간의 멈춤을 자주 소재로 다루는 것 같다.김선오와 이기리 시 공통점으로 경계의 흐려짐이 있다. 김선오는 사람을 고기 또는 사물로 치환해 종과 종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사물과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김선오의 시 중 폐차가 있다. 차의 유동성이 나의 유동성이 된다. 차가 찌그러지는 것이 내가 찌그러지는 것과 오버랩된다.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관이라는 느낌이 든다. 김선오의 시간관 공을 새로 오버랩하기도 하는데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반면 이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리게 하거나 다른 두 세계의 층위를 지워버린다. 이기리의 시에서는 경계 지워짐의 목적이 사랑, 결합에 있다면 김선오의 시는 경계를 지우면서 해부를 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김선오의 시는 주체를 부분으로 분해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은그렇게 김선오의 시는 부분이 주체가 되는 정동과 연관된다.냉동육, 미디엄 레어가 그렇다. 냉동육에서 살점은 자신이 어딘가에서 떨어져나왔지만 자체만으로 온전해서 그것을 찾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부분이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부분적 신체가 주체가 되는 과정, 떨어져나오는 과정을 그린 것이 김선오의 시다.정동이라는 개념과 연관지어 김연덕의 시를 볼 때 부분이 주체가 된다. 정동은 주체 이전에 분자화된 것으로 김연덕의 긴 초는 손이 주체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2) 김선오의 냉동육 분석냉동육은 치환, 해부, 기존의 사물성 붕괴이라는 김선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다. 나는 어딘가에서 떨어진 살점인 동시에 칼이다. 꿈 속에서 나는 거대한 살점인 줄 알았는데 사실 칼이었다는 것이 시의 전반적인 정황이며 꿈 속에서 하나의 살점이었던 부분과 내가 사실 칼이었다는 것을 아는 부분으로 나뉜다.이 시에서 나는 칼이기도 하고 살이기도 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적대하고 있는 것이 나를 통해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꿈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설득력을 얻는 다.상처 위에 고기를 덮어두라는 첫 연은 발화자를 알 수 없고 누구를 향하는 말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자리인 상처 위에 다른 살점을 올려두라는 말은 나의 살점이 다른 살점으로 치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 거대한 한 덩어리의 살점에서 떨어져 나왔을 수 도 있다는 상상에 가닿게 한다. 그리고나는 거대한 하나의 살점이었는데 내가 어디에 붙어 있었던 것인지 떠올리려 했는데(3연) 하나의 살점으로 온전했다는 4연을 보면 칼에 잘려 떨어져 나온 살점도 나이다. 전체가 나인데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 역시 나인 것은 전체 이전에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정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 부분은 시집의 ‘비와 고기’에서 사람이 고기로 치환된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거대한 살점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으로 치환된다. 4연에서 살점이 스스로를 주체로서 인지했다면 5~6연은 살점이 주체로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눈을 뜨니 옆구리가 찢어져 있었고’의 나는 첫 연의 발화를 수행하기 위해 냉장고의 고기를 꺼내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칼이었다. 나는 분리된 일부 인줄 알았는데 분리시키는 행위 그 자체였다. 분리를 당한 대상이 아니라 분리를 하는 주체였다. 고정된 것을 해부하는 무언가이다. 고정된 주체가 아닌 분리하고 해부하면서 존재하는 주체이다.‘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내가 신문지에 싸여 버려질 때까지’(9연)을 보면 나에게 고기를 자르는 행위는 그것들을 다치게 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부분을 주체로 해방시키는 기쁨을 주는 행위이다.3) 이기리의 ‘더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분석다른 층위에 있어 닿을 수 없는 너와 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얼음은 두 층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눈동자에 비친 얼굴은 너무 작다는 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너와 나는 옆에 있지만 가까워질 수는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항상 먼 곳을 바라보고 있고 가능한 멀리 바라보라고 한다. 강이 흐르는 것을 보며 서로의 입 속에 얼음을 넣는다. 우리는 밤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우리는 다른 층위에 있어 이 곳에서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얼음은 이들을 이어주지만 입속에서 녹는다. 이 시에서는 마음에 얼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한다.구불구불한 뿔을 닮은 우리의 눈빛은 또 얼마나 많은 얼굴에 구멍을 낼지. 눈빛은 실체가 없다. 그런데 눈빛이 구멍을 낸다는 것은 눈빛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눈빛으로 가닿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은 서로 보고 있지만 함께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마치 실체 없이 닿아 있는 너와 나를 비유한 것인지도 모른다.‘순록이 눈과 얼음 사이에 낀 이끼를 먹는 동안’에서 눈은 내리는 눈일 수도 있지만 신체 일부로 있는 눈일 수도 있다. 얼음은 이 시에서 우리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지만 눈은 서로를 보지 못하고 먼 곳만 보고 있다. 그 둘 사이에 낀 이끼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을 뜻하는 것이다.
상징계 vs 실재계와 과거 vs 미래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전쟁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들이 경합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분석해보려 한다. 나를 찾아줘는 성차, 상징계와 실제계의 적대로 두 이야기가 대립하고 나인은 시간의 소급성으로 과거와 현재가 대립한다.그에 앞서 성차라는 개념으로 봉준호의 영화 마더를 분석해보려 한다. 성차 도식을 보면 빗금쳐진 주체는 대상 a를 욕망하고 그 대상 a는 변형될 수 있다. 도준은 28살이지만 엄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상상계에 있는 것이다. 도준은 자신의 욕구 불만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대상 a를 엄마에서 아정으로 바꾸려 하다가 아정을 죽이고 만다. 도준이 감옥에 가면서 엄마와 분리되는 것은 상상계에서 벗어나 법과 규칙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준의 엄마는 도준의 누명을 풀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변호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도준의 누명을 풀려고 한다. 변호사, 경찰에 대한 불신은 상징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준이 죽인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나자 엄마는 그를 죽인다. 도준의 엄마는 상징계를 벗어나면서 도준이 범인이 되는 것을 막았다.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계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성차, 남성과 여성의 차이, 상징계와 실재계 즉 현실과 현실 아닌 세계 사이의 적대에 대한 예시로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를 분석하려 한다. 표면적으로는 아내인 에이미를 살해했다고 누명을 쓴 남편 닉의 이야기이지만 더 복합적이다. 우선 에이미의 엄마는 에이미를 주인공으로 한 ‘어메이징 에이미’를 쓴 동화작가이다. 에이미는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유명하고 동화 속 에이미에는 에이미에 대한 엄마의 욕망이 반영되어 실제보다 더 나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에이미는 첼로를 그만 두었는데 동화 속 에이미는 첼로 신동이거나 그녀는 배구를 그만두었는데 동화 속 에이미는 간판 선수가 되었다. 에이미는 그녀의 일기에서 동화 속의 에이미가 자신의 실체와는 다르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평생을 그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실제 에이미가 동화 속 에이미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생이 포장된 채 책 속의 주인공과 같은 삶을 계속 살았다. 에이미가 상징계 속의 에이미라면 동화 속의 에이미가 실재계 속의 에이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에이미는 상징계의 자신과 실재계, 동화 속 자신 사이의 적대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에이미는 결혼기념일 마다 보물찾기를 한다. 닉에게 에이미는 계속 찾아다녀야 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닉은 기자로 철저하게 현실의 규칙에 발붙이고 있던 상징계의 사람이고 에이미는 오래 동안 동화 속 인물, 가상 세계에서 살아온 실재계의 인물이다. 둘은 굉장히 상반된 환경에서 살아왔다. 닉에게 에이미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묘사된다.에이미는 닉과 결혼함으로서 엄마의 동화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스스로 쓰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난 이후에도 에이미는 닉이 원하는 스타일에 맞춰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연기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에이미는 결혼 기념일에 가짜 일기를 남기고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엄마와 남편에게서 벗어나 에이미가 쓰게 된 자신의 이야기이다. 에이미는 실재계와 상징계의 괴리를 겪으며 살아온 인물로 일기와 편지로 사실을 조작해 이제 상징계에서 벗어나 실재계에 머무르려 하고 자신의 가상을 현실로 만들려고 한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온 에이미는 사라짐으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함으로서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사람들을 조종하면서 자기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의 시선은 곧 세상이기도 하다.결혼기념일 선물에 대한 단서를 남긴 곳에 닉이 바람을 피운 장소였다. 닉은 에이미를 배신했고 닉이 에이미를 떠난 자리에 에이미는 단서를 남겨 놓았다. 닉이 규율을 어긴 곳에서 에이미가 만든 실재계가 침입했다. 영화 초반에 에이미의 편지, 메모 등으로 관객들을 속이지만 영화 중반에 그것은 에이미가 조작한 것임이 드러난다. 닉도 에이미에 대한 반격을 시작한다.에이미는 남편이 자신을 살해한 것으로 만든다. 이 일기는 에이미가 만들어낸 가상이고 그 것으로 관객을 속이는 것이 초반부라면 에이미가 만든 가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에이미의 욕망이 반영된 실재계과 규칙과 규율의 현실인 상징계가 충돌하는 이야기가 중반부이다.에이미와 닉은 남편과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경쟁하는 화자이다. 에이미와 닉은 서로를 서로의 이야기로 포섭하려 한다. 에이미의 이야기에서 닉은 살인자이고 닉의 이야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닉과 에이미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영화 속에서 닉은 상징계, 규칙과 규율의 세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는 형사들의 조사와 그의 진술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변호사는 변론하는 훈련을 시키는데 틀릴 때마다 그에게 과자를 던지는 것은 마치 사육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 반해 에이미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 때 사람들의 기억과 이미지에 의존한다. 총을 살 때 일부러 분홍색 옷을 입어 주인의 기억에 남기도 하고 cctv 앞에서 연기를 하기도 하고 이웃을 통해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조작하기도 한다.그런데 닉과 에이미 모두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에이미가 임신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닉에게는 위기가 찾아오고 에이미는 돈을 빼앗기면서 그렇게 된다. 닉은 사소한 행동으로도 세상의 지탄을 받는다. 함께 사진을 찍었을 뿐인데 아내가 실종되었는데 여자들이랑 놀러다닌다거나 하는 것으로 말이다. 원래 에이미가 세상의 시선에 둘러싸여 살았다면 이제는 닉이 그렇게 되었다. 결국 에이미는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닉에게 돌아오고 에이미와 닉은 다시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에이미와 닉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다. 닉은 에이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닉에게 강간 당한 아내를 떠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닉이 자신을 받아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닉이 연기하지 말라고 하자 에이미는 연기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녀의 현실은 가상과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 가상 역시 현실일 것이다. 결국 에이미가 사인회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다시 동화 속의 에이미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에이미의 강요에 의해 다시 사이 좋은 부부로 돌아간 것과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는 임신을 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에이미에게 시선은 그녀를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를 살인자로 만들고 그녀 옆에 잡아 두는 도구이기도 하다. 둘은 결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적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닉과 에이미는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고 사람들과 언론도 그들이 화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관객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론 앞에서 닉과 에이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은 상징계와 실재계가 혼재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보여준다. 에이미가 조작한 현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에이미는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계를 만들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에이미는 닉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에이미의 이야기는 일부 실패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성공했다. 에이미의 욕망이 반영된 가상에 갇힌 닉은 앞으로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연기하며 살아왔던 에이미의 삶에 합류하게 된다. 이 영화는 각자의 이야기가 경합하고 실패하는 것을 통해 상징계와 실재계의 적대를 보여준다.시간의 소급성에 대한 예시로 ‘나인-아홉번의 시간 여행(2012)’에 대해 다뤄볼 것이다. 나인은 2012년의 주인공이 향을 피워 20년 전으로 돌아가면서 과거를 바꾼다. 시간의 소급성이란 미래를 빌려와 과거를 고치는 것이니 딱 시간의 소급성이 생각난다. 92년의 과거는 12년의 미래에 의해 소급적으로 결정된다. 주인공 선우가 20년 전으로 돌아가 과거를 바꾸면 그것에 맞게 20년 후의 세상에서는 실시간으로 인물들의 기억이 업데이트되고 인물 관계가 바뀐다. 시간의 소급성으로 바뀐 과거는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나인에서 주인공 선우는 과거로 돌아가 형과 형이 그 당시에 사귀던 여자를 연결해주었는데 그 여자의 딸이 주민영이었던 것이다. 주민영은 선우와 사귀던 여자였는데 형과 민영의 엄마가 결혼하게 되면서 주민영은 박민영이 되고 선우의 조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것은 선우가 형과 그 여자가 헤어졌기에 생겼던 소급적 효과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수업시간에 미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더 나아가 과거는 미래의 결과들이 도착한 후에 소급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박선우가 과거에서 한 행위의 의미는 그가 미래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박선우는 미래 해석의 소급적 결과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를 잃게 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이야기가 나인이다. 결국 미래의 선우는 과거에서 죽는다. 그리고 20년이 흘러 과거의 선우가 자신이 과거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남긴다. 과거에서 미래의 내가 죽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미래의 나가 알게 되었으니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이 물음은 시간에서 과거와 미래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을지 묻는 것이다. 미래의 나가 과거에서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다면 과거가 더 우세한 것이고 미래의 나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피할 수있다면 미래가 더 우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