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園 이광수(香山光郞)-■ 목 차 ■Ⅰ.서론------------------------------------1pⅡ.생애 및 활동---------------------------1~5pⅣ.사상----------------------------------5~9p1910년대---------------------------------------------------5~6p1920년대---------------------------------------------------6~7p1930년대---------------------------------------------------7~8p1940년대---------------------------------------------------8~9p해방이후------------------------------------------------------9pⅤ.맺음말--------------------------------9~10p■ 참고 문헌 ■-----------------------------10pⅠ.서론초기 계몽사상가, 근대문학의 개척자라고 잘 알려져 있는 이광수가 활동했던 시기는 우리 역사에 있어근대의 형성과 성립의 구체적 시기로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1910년 근대의 형성기에서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 시기가 지니는 의의를 검토하고, 그가 집필한 소설이나 글을 일부 살펴보고 그 속에서 이광수가 지니는 사상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이 글은 이광수의 생애와 활동을 간략히 서술하고, 시기별 그의 사상과 문학 담론의 변화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Ⅱ.생애 및 활동-1892년 2월 전주 이씨 문중의 5대 장손으로 출생, 11세의 나이로 부모를 잃고 외가와 재당숙 집을 전전하며 방랑생활.-1903년 동학당에 거두어져 동학에 입도. 박찬명 대령 집에서 기숙하며 동경-서울로 오가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일을 담당한.-1905년 일진회와 접촉, 일진회에서 세운 小公洞學校의 일어교사로 채용,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침-수필 「H군에게」집필-흥사단友가 되어 임시반장으로 임명-사료편찬위원회의 해산과 《독립》신문사의 운영난-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의 위원이 됨-독립운동의 침체로 절망, 상해로 떠나다 신의주로 연행되어 서울로 송치, 불기소 석방-「감사와 사죄」집필-해외에서 귀국한 김항작, 김태진, 곽용주, 이항진, 박현환과 국내의 김윤경, 김기전, 원달호, 강창기, 홍사용 등을 앞세워 발기(2월)-宗學院에 교사로 초징되어 강의-「金剛山遊記」를《신생활》에 연재-「민족개조론」의 필화사건으로 《개벽》에도 글을 싣지 못하고 문필권에서 제외됨.-단편 「할멈」집필, 「嘉實」집필.-장편『開拓者』의 성매.-송진우의 추천으로 단편 「嘉實」을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동아일보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집필.-「先導者」의 연재(3월)-기행문 「초향록」의 발표-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을 번역 간행(9월)-「허생전」의 연재(12월)-연재사설 「民族的 經綸」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 퇴사.-《靈臺》의 일원이 됨.-「인생의 향기」연재, 「再生」의 연재.-《朝鮮文檀》2.3호를 담당.-「세가지 맹세」,「혼인」의 집필.-《朝鮮文檀》主宰사퇴.-「가을의 들」집필.(9월)-「修養同盟會」와 「同友俱樂部」의 합동교섭에 앞장섬.-修養同盟會」와 「同友俱樂部」두 단체가 합하여 「修養同友會」로 조직됨.-종합교양지 《東光》의 창간을 돕다.-논문집 『新生活論』, 단편집 『젊은 꿈』박문서관에서 간행(10월)-동아일보사 편집국장에 취임.(이 무렵 미국인 크로올리와 교류)-《동아일보》에「流浪」의 연재.(1월)-신병으로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직을 사임, 편집고문으로 전임(9월).-『麻衣太子』를 박문서림에서 간행.-「病窓語」,「端宗哀史」를 《동아일보》에 연재-수필 「山菊」집필.-건강상의 최악의 상황.-동아일보사 편집국장으로 부임.-「혁명가의 아내」(1월),「사랑의 다각형」(3월), 「충무공유적순례」(5,6월)-「신비의 세계」(7월), 「정의는 이긴다」, 「삼봉이네 집」등을 집필.-민족주의 문학에 관한 양주동과의 논쟁(1월)-《동광》에「無名氏傳등법원 상고심에서 전원 무죄.-각지를 돌아다니며 친일연설.-「원효대사」를《매일신보》에 연재.-조선총독부의 명으로 조선인학생의 학병권유차 동경행.-자서장편 「사십년」을 《국민문학》에 연재.-광동중학교에서 영어 강의-흥사단의 부탁으로 사릉으로 돌아와 전기「도산안창호」집필-국회에서 제정된 반민법에 걸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1월), 이후 병보석으로 출감(2월)-「사랑의 東明王」서시「朱蒙과 禮姬」를 짓다.-장편「서울」《태양신문》에 연재.-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6.25의 발발 이후 內務署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북한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감.Ⅳ.사상1.1910년대1910년대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성장기라고 볼 수 있다. 구한말에 시작되었던 자본주의적 근대화론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이광수의 정치적 입장은 문명개화, 실력양성, 풍속개량의 입장에서 부르주아 계몽운동가들과 성격을 같이한다. 그는 실력양성을 통하여 구시대의 사상과 관습의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중대하고 난해한 시험문제’가 무수히 놓여있으며, 그것은 산업문제, 교육문제, 사회제도개량문제, 농촌개발문제, 도덕문제, 남녀문제 등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광수는 식산흥업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의식개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이광수의 실력양성론은 교육의 진흥으로부터 나타난다. 그는 여러 글을 통하여 교육이야말로 문명개화를 앞당기는 가장 확실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류가 성취한 문명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교육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사업이며 의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교육 중에서도 실생활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또한 여러 글을 통해 보통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보통교육을 통해 전체민중들을 각성시키며, 나아가 이를 지도할 뛰어난 지도자의 양성이 실력양성의 구체적 방법이라고 보았다. 이와 함께 여성의 교육참여와 평등교육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계몽의식이 가지는 민주주의적 특징을 볼 수 있다.두 번째 속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데, 1.개인주의의 확립, 2.과학적,합리적 사고의 중요성 강조, 3.경제의식과 직업윤리. 사회적 공리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2.1920년대이광수는 1922년,「민족개조론」을 통해 20세기 조선민족이 수행해야 할 개조는,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처이나 우연성에 근거한 변화가 아니라, ‘의식적 개조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동서양의 사상적, 종교적 인물과 사건을 민족개조의 관점에서 고찰하며 몇 가지 원칙들을 도출하는데, 첫 번째는 민본주의에 근거한 청년운동이다. 두 번째는 단체의 중요성, 세 번째는 정치참여의 배제 또는 정치에 대한 무간섭주의다.(그러나 그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더불어 그는 민족개조의 절차와 과정을 몇사람의 선인-(기하급수에 근거한)재생산-사회적 도태로부터 촉발되는 자연도태로 보며 민족의 개조가 종결을 갖지 않는 영구한 사업이 될 것임을 말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민족개조는 하나의 민족이 진화에 대한 자기의식을 수반하며 진화를 추구하고, 점진적으로 다른 민족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이야기 한 것이다.1920년대 이광수가 주장하는 문화 담론은 일제의 식민주의 담론인 정신주의를 모방하면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민족주의를 형성하는데 이를 활용하였다. 그의 담론은 곧바로 문화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키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언설의 양상과 달리 정치성을 내포하는 민족주의로 나아간다. 그는 문화 민족주의가 정치적 정통성의 문제에 발생하는 근본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1920년대 문화 담론은 공유된 기억과 공통의 신화를 통해 민족성을 고양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문화정책이 추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모방하였다. 이광수는 조선인들만의 공유된 기억을 회복하여 민족성을 회복하고자 하였고, 그 밑바탕에는 조선인의 공통된 문화와 기억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즉 각각의 개인이 공동의 사회 집단에 소속되계로 넘어가야겠다고 주장했다.그는 불교를 세계관의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심리적 의지처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향이 있었고, 그의 글 「육장기」에서“부처님 말씀이 나도 성인 된다고 하셨다. 『법화경』을 읽노라면 언제 한 번은 성인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믿고 그저 『법화경』을 읽을란다.”위 같은 표현을 통해 그가 참선보다는 간경에 주력하는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1938년 일기를 통해 독실한 불교신앙을 지니게 된 후에도 기독교의 성경을 읽고 깊은 감동을 느끼며 수용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종교를 생각함에 있어 세계관의 측면보다는 주로 심리적 의지처라는 측면에 주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그러나 그가 종교에 몰두했다 하더라고 과거로부터 지녀온 사상이나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광수는 근대 자본주의와 자연과학의 세계관과 대립되는 부분이 없는 불교를 신앙으로서 새로이 가진 것이며 근대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의 강도가 다소 약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1940년대1940년대 이광수는 식민지 조선인을 황민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광수는 1940년대 황민화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조선인은 저마다 저를 개조하여야 한다. 제 인생관, 사회관을 한번 근저 로부터서 두들겨 고처서 행주좌와에 몽매에라도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일본인이다. 제국의 운명을 부담한 국민이다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저를 개조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끌려가는 일본국 민이어서는 아니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자발적, 적극적으 로내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부분을 끄트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니하여서는 아니된다.이는 조선인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일본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1940년대 이광수는 황민화를 위해 기존의 사상과 생각을 적극적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본인은 진정한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는 전제하에서 조선인 .
박헌영목 차Ⅰ.머릿말--------------1pⅡ.연보--------------1-3pⅢ.본론-------------3-10p1.생애-----------------------------3-7p2.사상----------------------------7-10pⅣ.맺음말-------------10pⅤ.참고문헌-----------11pⅠ.머릿말현재 한국인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공산주의에 대한 배척선고가 내려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어가고 있는 남한의 오늘날에는, 한국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분류나 전파, 이를 연구했던 혹은 이를 위해 힘썼던 수 많은 인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는 초중고의 역사, 사회 교육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공’, ‘빨갱이’를 외치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억압하던 예전에 비해서는 보다 자유롭게 선택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긴 하였지만,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이전의 흐름이 남아있다.이전에 한국의 근현대사를 학습할 때 아무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시대의 한 흐름으로서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전부였다, 만약 역사를 전공하고 근현대사를 선택하여 배우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래동안 모르는 채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투쟁과 노력으로 인해 분명히 오늘날 현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또한 한민족의 과거와 오늘날,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연구했던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위인이라거나 영웅이라고 표현하는 교과서는 없다. 하지만 제국주의에 몸을 던져 싸우고, 해방후에 민중을 위해 열심히 애썼던 그의 생애와 사상연구를 조사해봄으로써 당대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한 발짝 다가가고자 한다.Ⅱ.연보○ 출생-1900년 5락을 취하고 전남 일원의 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에 종사.▶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 패망○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9월 8일 서울계동에서 열린 장안파 조선공산당 열성자대회에 재건준비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 1945년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 1946년 4월 7일, 조선공산당,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1946년 10월 6일, 평양 월북○ 1946년 12월 10일,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선임.○ 1948년 8월 25일, 남조선 인민대표자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남북조선로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 1948년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 1948년 10월 7일, 북한 내각 제5차 회의에서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임.○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36명의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950년 10월 초,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가 되다.(인민군 중장)○ 1953년 하순, 체포(추정 1953년 3월 21일)○ 1956년 7월 19일,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방학세에 의해 평양 교외에서 권총으로 살해당하다.(57세)Ⅲ.본론1.생애학창시절과 3.1운동1900년 5월, 박헌영은 예산에서 출생하여 1915년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 직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 소속되어 영어강좌를 이수하였다. 그가 경성고보를 다닐 때에는 세계사적 격변의 시대였는데,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과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 그리고 1919년 윌슨의 선언으로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이 수차례 화합을 가지고 조선 독립을 호소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던 시기민족의 해방을 맞이했다.해방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이후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종로2가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선포하였다. 박헌영은 광주에서 해방을 맞았기에, 서울에 올라와 우선 경성콤그룹을 비롯한 동지들을 만나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8월말부터 원산과 함흥을 이어 개성, 평양 등지까지 진출하여 군정을 실시하였고,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 서울에 진주하여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고 미군정을 선포하였다. 이 때 박헌영은 계동 열성자대회에서 다수 사회주의 세력의 지지에 기반하여 9월11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는 박헌영이 작성한 「헌정세와 우리의 임무」이른바 「8월테제」를 정치노선으로 채택하였는데, 여기서 박헌영은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과업으로서 있다.”라고 규정하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가두 행진, 파업의 자유’와 ‘8시간노동제실시’, 일본제국주의자 소유의 모든 토지와 공장, 은행 등 일체 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 할 것 등 인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사실상 장악하고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중앙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다.우파와 미군과의 갈등1945년 10월 박헌영은 미 제24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처음으로 회견을 가졌다. 그는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등에 대해 답변하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적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차한다.’고 주장하며, 미국 측이 자신들에게 협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1945년 12월 12일 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해버렸고, 인민공화국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 될 당시 박헌영은다. 좌익 세력들은 우익 청년단과 경찰의 테러공격에 시달렸고, 남로당은 사실상 불법화되었다.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이후1948년 7월 박헌영은 김일성, 스티코프와 회견이후 소련, 죽한 관계와 남북한의 선거 준비과정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남북조선로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8월 25일, 박헌영은 민주주의민족전선소속 영등포 선거구의 입후보자로 올랐으며, 이날 회의에서 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날 남북조선로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삼팔선 이남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3주일 후 9월 9일에는 북한땅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마침내 한만도에 두 개의 공식적인 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북에서 단독국가가 설립되던 9월 9일 박헌영은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되었다. 부수상 겸 외무상은 김정일이 허용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조심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심지어는 외무상으로서 외국 손님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조차 김일성에게 전화로 확인하고 허락을 받을 정도였다.이후 8월 남북로동당 합동지도부가 구성된 뒤에는 영향력이 대촉 감소되었다. 이후 1949년 북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돌아와 그해 6월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에 참여하고 36명의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남북전쟁 이후의 상황과 박헌영의 죽음남북전쟁의 발발 이후 김정일은 박헌영을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다. 전쟁은 뒤로 갈수록 북한에게 불리해지고, 소련조차도 소련군 동원을 허용하지 않자,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1950년 10월 초, 인민군 내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박헌영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인민군 중장의 책임을 맡은 박헌영은 곧바로 마오쩌둥을 만나 휴전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향후 친중공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내용을 서면으로 제출하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파병에 합의했다. 이후은 토지에 결박되어 악조건하에서 지배자에 대한 무조건 복종, 강제적인 노역, 국가적 의무의 부담 등이 강요되었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봉건적 계급관계가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조 말기 수공업이 농업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으며 ‘인민들은 봉건귀족 양반 관료와 지주의 착취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할 수 없이 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상황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봉건적인 착취를 해온 조선조의 농노적 소농민경제가 세계사적 발전과는 무관하게 독특한 발전양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조류에 의하면 제국주의 시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국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넘어갔기 때문에 조선이 폐쇄된 채로 있을 수는 없었고, 일본을 비롯한 다양한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가장 진보적이고 부동한 진리이며 인류발전사의 필연적인 법칙’이라고 주장하고 역사에 있어서 자기해방과 발전을 위한 투쟁을 강조했다.조선 공산당사건으로 인한 긴 수감생활 이후 소련으로 탈출한 박헌영은 자신의 이론적 전망을 확대하고자 코민테른에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청하였다. 러시아혁명의 이념인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제국주의의 문제와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사회의 상을 습득하고, 이를 식민지 한국사회에 실천 및 구현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해방, 사회주의사회의 건설을 지향했다. 그러한 박헌영의 인식은 곧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과 그 지배이념인 사회주의를 세계변화 양상과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준거로 삼은 것이었다. 박헌영은 사회주의자의 당면임무로 “이성적, 연구적 태도로 자본주의 사회조직을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설정하였는데, 이는 사회혁명운동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운동방침을 규명하여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다.
현진건의 소설 와 은희경의 소설 의 패러디 관계현진건의 소설 와 은희경의 소설 의 패러디 관계먼저 줄거리 차원에서 살펴보면 현진건의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의 소설은 집안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가 전당잡힐 것을 찾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K의 동년배이자 친척들에게 칭찬을 받는 경제력 있는 T가 그의 아내에게 줄 양산을 사가지고 들려 아내의 물질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을 들쳐놓고 간다. 조용히 있던 부인이 동요를 일으키고 가벼운 투정을 해 주인공은 아내와 서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찾던 것은 전에 벌써 전당 잡히었고 빈곤으로 인해 정신이 없어진 아내를 보며 도리어 아내에게 화를 내며 옛 생각을 한다. 아내와 십육 세 때 결혼한 후 곧 집을 떠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거지같은 형색으로 집에 돌아 왔고 아내는 처가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결국 세간과 의복을 팔게 된 것이다. 결혼 초, 아내는 격려를 해 주었으나 점점 아내는 가난에 찌들려 허무함과 설움을 느껴갔다. 오늘도 멍하니 눈물짓는 아내를 보고 자신의 무능함을 들어 위로했다. 이 위로에 아내는 약해졌던 자신이 잘못 했다고 한다. 다음 날 장인 생신으로 인해 처가 집에 가게 되고 못 먹는 술을 넉 잔 먹고 인력거에 실려와 처가 집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차린 저녁을 먹으라는 아내에 의해 깨어나서 부유한 처형과 남편과의 평탄치 못한 생활을 듣는다. 이틀 후 처형은 남편이 준 돈으로 자신의 옷감과 신발 그리고 아내의 신발을 사 가지고 와 남편과의 원만치 못한 생활을 이야기하고 떠나간다. 아내에게 부가 있으면 거기에 따른 고충이 있다는 말을 하고 아내도 동의하였지만, 아내는 처형이 사온 신발을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나는 그 신이 예쁘다고 동의 해 주면서 곧 성공 할 것이라고 힘을 주어 말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내와 나의 사랑은 더욱 깊어 간다.반면 은희경의 는 현대인의 생활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새롭게 패러디 하였는데, 이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내는 일을 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자신의 일상을 항상 일기장에 남긴다. 남편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만 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물로, 일이나 친구와의 만남 등을 핑계로 자주 귀가가 늦고 가정과 아내에게 소홀해진다. 그들의 삶은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부부의 일상이다. 아내의 일기장에는 아내가 겪고 있는 내면적인 갈등과 심리가 드러난다. 가정보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남편을 기다리는 공허한 시간 속의 외로움과 고독은 물론, 여자로서 받고 싶은 사랑이 결핍되며 느끼는 고통과 불행도 나타난다.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삶의 고단함을 말하는 동시에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도 나타난다. 어느 날 아내의 일기장을 보게 된 남편은 아내의 숨겨왔던 괴로움, 고통 등에 대해 처음에는 놀라워하고 분노하지만 곧 아내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소홀했던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 결말 부분의 ‘똥‘에 대해 쓴 글에서는 아내의 인식이 변화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똥을 보며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곧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존재로 받아들이며 가족 같다고 말하고 있다. 즉, 아내는 아무리 더럽고 부정하고 싶어도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현실인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정답다‘고 표현한 아내의 긍정적 인식에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그러한 삶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겠다는 희망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이를 본 남편은 모두 얼음 모양 틀과 같이 부부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삶을 지켜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지함과 엄숙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현진건의 는 한 마디로 ‘가난한 예술가의 자아실현 욕망과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현실은 물질적인 결핍으로 인해 고통과 부담을 겪고 있다. 또한 그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할 것인지, 물질적인 풍요를 따룰 것인지에 대해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정신적인 만족감으로 경제적 무능력을 감추고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자신으로 인해 어려운 살림을 애써서 꾸려가는 묵묵한 아내의 사랑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가 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21년 일제강점기로, 식민지 조선은 자본주의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더욱 커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작가라는 예술가를 꿈꾸는 지식인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속물적 행태가 만연한 사회, 그러한 사회의 유혹에 끌리고 있는 그의 아내를 통해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다.은희경의 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무관심으로 인해 야기된 부부 간의 소외감이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소설이 발표돤 시기는 1990년대로 대한민국은 산업화로 인한 산업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당대 사회는 근대적인 가족의 의미와 형태에서 점차 새로운 가족의 의미와 형태에 안정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각자의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고 공허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부부의 모습은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또한 남편만이 일에 종사하고 아내는 집안일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에서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종속되어있는 아내의 삶 또한 잘 드러내고 있다.두 소설은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 가정에 소홀한 남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두 소설 다 사회적으로 자본주의사회, 산업변동의 사회로 변화하는 변동의 시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내를 보았을 때 현진건 소설 속 아내는 완전히 무능력한 남편에게 종속되어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은희경 소설 속의 아내는 자신에 정체성과 자아에 대해 깨달음을 얻고 자신만의 만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근대와 현대의 여성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확연히 드러낸다.
Ⅰ.저자 소개위대한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기원전 427년경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양친 모두 아테네의 명문가문에 속했다. 그는 시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지은 비극 시를 가지고 경연에 참가하기 위해 극장에 갔다가,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생존 중에 자기가 살게 된 것을 운명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얻었지만, 등을 저술하고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학습과 인재 양성에 매진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교육과 저작에 몰두하며 80세에 생을 마감한다.Ⅱ.줄거리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하나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이 끝난지 5년 후인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정치계 유력자인 아뉘토스의 후원을 받는 멜레토스에 의해 ‘젊은이들에게 해와 악을 끼치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아테네의 법정에 고소되었다.공판 석상에서 원고 측의 뒤를 이어 피고인 소크라테스는 500명의 배심원과 시민 청중들 앞에서 예전의 고발자에 대해 자기는 허황된 자연학(自然學)을 연구한 적도 없으며, 다른 궤변론자들과 같이 많은 보수를 받고 교육한 적도 없다고 반론한다. 그리고 새 고발자 멜레토스에게 자신은 영적 존재인 신을 인정한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피력한다. 그러나 표결 결과 소크라테스는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후 형량을 제안할 때 소크라테스가 비교적 강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재판관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다음 표결에서 ‘사형’을 해야 한다는 원고측의 주장이 가결되고만다.Ⅲ.교육 목적과 의미고대 그리스 철학교육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원문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며 교육 자체를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칼리아스(Callias)와 나눈 이야기를 예로 들며, 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덕(德)과 지혜를 갖추기 위함임을 드러낸다. 즉-1-교육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그 목적은 한 인간에게 훌륭한 덕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주로 수사학(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한 언어기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교육하고, 세상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던 소피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당대 거액의 돈을 받고 교육을 하던 소피스트와는 다르게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선생이라고 칭하지도 않고, ‘자신은 그저 각자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만 발을 들여 놓았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개인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며 보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 스스로를 돌보며 영혼의 정화를 위해 힘쓰기를 강조한다.Ⅳ.교육방법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교육내용을 현재의 교육평가에 비교해 보았다. 소피스트는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며 상대주의적 논리관과 함께 논쟁에서 언어로 승리하는 것을 강조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윤리관에 입각하여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탐구했고, 이는 자신을 돌보고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가능함을 강조했다. 이런 두 철학가들의 교육방법을 오늘날의 평가 방법과 연관시켜 소피스트를 오늘날의 상대평가로, 소크라테스를 오늘날의 절대평가로 바라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수사학을 바탕으로 타인과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강조하는 소피스트의 교육방법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대체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대주의적 평가를 떠올렸다. 또한 개인의 성장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을 보며 학습자 개개인의 성장과 발달을 확인하고자 하는 절대평가를 떠올렸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학교시험이 상대평가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유학기제의 시행과 수능시험 일부 과목의 절대평가 시행 등 아이들 개개인의 성장을 평가하기 위한 절대평가를 시도하려는 노력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절대평가 보다는 상대평가가 지배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피스트는 수사학을 중심으로 타인과의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지나친 경쟁의식을 초래하였고, 소크라테스가 개인의 깨달음과 지혜의 획득을 중시 하였지만 이는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두 학자의 교육방식에서도 문제점이 있던 것처럼, 상대평가와 절대평가의 문제점은 계속해서 지적되고 있다. 상대평가는 아이들의 지나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개인의 학습지도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확인 할 수 없다. 또한 전체적으로 우수한 학생이 많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같은 비율로 평가를 할 경우, 평가-2-결과에 형평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절대 평가 또한 문제점이 있다. 집단간의 비교가 어렵고, 교사의 주관에 의해 평가가 좌우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미래의 교육에 있어 학생들을 평가할 때 이 두 평가 방식이 가지는 문제점을 고려하여 학습자들의 학습성취도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학습요소에 대해 어느 한 쪽만 집중적으로 시행하기 보다는 두 평가방식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교육목표달성과 성장을 확인하고 교사의 주관적인 판단이 최대한 개입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Ⅴ.교사의 역할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와 달리 교사임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교사의 개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결정짓는 교사가 아니라, 그저 개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교육을 통한 기계적인 훈련과 지식의 몰가치적 주입이 아닌, 언어를 사용한 대화교육을 통해 함께 반성하고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교사에게 받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교사의 사소한 한마디에 아이들의 생기가 살아나기도 하는 반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크게 상처입기도 한다. 그만큼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교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고 조심스럽다. 아이들에게 학습동기를 유발하고 학습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적절한 훈련과, 올바른 자세와 윤리 규정 등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주입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학습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기르기 위해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방치이지만, 교사가 전적으로 학습자들의 모든 방면에 개입하고 자신의 가치나 판단을 주입시켜선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식처럼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완전히 이끌어 주기 보다는 발 돋움판 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의 역할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학습자들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고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정도까지는 괜찮지만,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공부방법, 공부시간 등을 정해주는 등 학습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범주까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교육방법처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함께 반성하고 무지를 깨닫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교사가 한 학생의 전담 상담교사가 아닌 이상, 학생 한 명 한 명과 끊임없이 대화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촉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굿 리스너’는 될 수 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열린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며 언제든지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사에게 털어 놓을 수 있도록 환경과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가 언제나 학습자들에게-3-확실하고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어도 들어주고 그에 대해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정리하자면, 보편적인 규정과 규범, 그리고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기초적인 주입은 어느 정도 필요 하지만, 학습자에 대한 교사의 개입은 소크라테스의 교육방법처럼 그들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발판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한다. 또한 실질적 측면에서 고려해 보았을 때, 끊임없는 대화보다는 학습자들이 교사에게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이나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학급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고, 언제든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을 다해 들어줄 태도를 갖춰야 한다.
BTS(방탄 소년단) 케이팝을 글로컬 세계로 확대시키다.1) 방탄소년단, 그들은 누구인가?2013년, 빅히트 엔터테이먼트에서 싱글 앨범 [2 COOL 4 SKOOL]으로 데뷔한 방탄소년단은 RM(리더), 슈가, 진, 제이홉, 지민, 뷔, 정국 7명으로 구성되었다. 2013 멜론 뮤직 어워드 신인상을 시작으로 다수의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들은 마침내 2018년, 빌보드 순위권에까지 오르게 되면서 전 세계적인 팬 층을 형성하며 글로컬을 이루어냈다. 최근 2018년 9월 24일, 유엔총회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이제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케이팝 그룹의 면모를 뽐냈다.2) 방탄소년단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하다.2018년 6월, 방탄소년단은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LOVE YOURSELF 轉 'Tear')'로 '빌보드 200'의 1위에 올랐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러브 유어셀프 전 '앤서'(LOVE YOURSELF 轉 'Answer')'로 올해 두 번째 ‘빌보드 200’의 1위로 올랐다. 방탄소년단은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인 '빌보드 200'과 '핫 100' 차트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리며 글로벌 인기를 입증했다. 여기에 그래미의 초청으로 토크쇼까지 서게 됐다.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그래미의 초청을 받아 아티스트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한국 가수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한 한국가수는 방탄소년단이 처음이기에 더욱이 의미가 있다. 이제 방탄소년단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 세계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다양한 국적의 팬 층을 확보하면서, 국적에 상관없이 단지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팬들끼리 글로컬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예전에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쳤을 때 ‘코리아’하면 ‘강남 스타일’이리하고 했던 것처럼, 방탄소년단에 대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것이다.3) 방탄소년단 유엔총회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다.9월 한 달간의 ‘러브 유어셀프’ 북미투어의 방탄열풍은 유엔총회 연설로 정점을 찍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고,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방탄소년단은 지난달 24일 뉴욕 유엔본부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에서 진행된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 청년 어젠다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 행사에 참석했다. 그 곳에서 리더 RM(본명 김남준·24)은 대표 연설자로 나서 단상에 올랐고 유창한 영어로 자신만의 스토리를 전달했다. 그들은 연설 속에서 자신들이 글로벌을 성공시켰으며, 세계적 ‘로컬’의 중심에 서 있다고 이야기 했다. 또한 ‘스스로를 사랑하라’ ‘여러분의 목소리를 내달라’ 등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로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