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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를 읽고, 일연, 한국사 리포트
    삼국유사를 읽고 -을유문화사 2002과 목 명 : 한국사소 속 : **********학 번 : **********이 름 : **********제 출 일 : 2017.일연 그는 누구인가?일연은 고려 말기의 승려이면서 학자였고 호는 목암(睦庵)이다. 그는 고려 희종 때 최충헌을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시대가 한창이었던 1206년에 경북 장산군, 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이 김(金)씨이고 본명은 견명(見明)이며 처음 승려가 되었을 때 회연(晦然)이라는 이름을 썼으나 뒤에 일연(一然)이라고 고쳤다. 일연의 어머니가 태양이 배를 비치는 태몽을 꾼 뒤 태기를 얻고 그를 낳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러므로 일연은 태양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아버지를 이른 나이에 여읜 그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지금의 광주 무등사 자락에 위치한 무량사에서 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총명이 이를 데가 없었고 가끔 혼자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4살에 중이 되기 위해 삭발을 하고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진전사로 발걸음을 하였다. 이후 선종에 속하는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학, 설법을 하는 동안에 그의 평판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이 와중에 고려의 정세는 무신정권의 횡포에 의해 계속된 악화의 반복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종 14년 겨울에 승과에 나가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의 천하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약 20년 동안 여러 절들을 두루 거치며 수도 생활을 하는 참다운 면모를 보였으며, 그 깨달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가면서 왕명에 의해 법회 같은 주요한 불교 일들을 주관하였으며 그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55세부터 71세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는 왕명을 받들어 청도의 운문사로 옮기게로 내려가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날을 보내며 그곳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나이 84세 일 때 어느 날 밤에 둘레가 큰 별이 절에 떨어졌고 다음날 아침에 그는 오늘 떠나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몇몇 승려들과 죽음에 대한 문답을 한 후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전해진다. 일연은 사람됨이 과묵하였고 모든 일에 가식없는 모습으로 대했으며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학문하는데 있어서도 특별한 스승을 거치기보다는 스스로 덕을 닦으며 수양하였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항상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불교적인 업적과 발행한 다양한 저서들이다. 일연이 쓴 책은 모두 100여권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의 총명함과 박학다식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일연은 조계종 부흥기의 초기에 큰 행적을 남긴 위대한 승려이며 무엇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작자로서 불멸의 광채를 남겼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다.(1) 일연,?일연은 누구인가??,『삼국유사』,김원중 옮김,을유문화사,2002.(2) 정출헌,『김부식과 일연은 왜』,한겨레출판사,2012.삼국유사의 해제-일연은 왜 삼국유사를 지었는가?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목적과 그의 의도는 삼국유사 편의 처음 부분에 잘 나타나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 고려는 이미 몽고와의 30년 전쟁으로 귀족,평민 나눌것 없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무신의 난과 몽고와의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고려는 이처럼 내부적으로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일연은 우리 민족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자각’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게 하고 분열을 단합으로 이끌어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일연은 고려의 뿌리, 즉 우리 민족의 뿌리에서부터 탐색하여 당대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삼국유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삼국유사는 5권 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에 나누어져 있을만큼 분량이 많다. 단군의 개국신화부터 역대 왕조의 신화와 전설 및 불교 설화 등을 시대순으로 정리하였다. 제일 마지막의 「가락국기」는 가야 왕조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3편 「흥법」은 불교가 어떻게 이 땅에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서술하였다. 4편 「탑상」에서는 불탑과 불상이 건립된 유래를 정리하여, 고려 국토는 성스러운 불국토였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이를 통해 고려 민족에게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5편 「의해」는 원광(圓光)ㆍ양지(良志)ㆍ자장(慈藏)ㆍ원효(元曉)ㆍ의상(義湘) 등등 고승들의 행적을 소개하여 신앙심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6편 「신주」는 밀본(密本)ㆍ혜통(惠通)ㆍ명랑(明朗)의 세 밀교의 승려들이 주문을 통해 재앙을 물리친 일등이 기록되어있다. 7편 「감통」은 고승들이 아닌 평범한 승려나 일반인들이 겪은 감응을 기록하였다. 사람은 신분이나 겉모습이 아닌 마음씨와 정성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8편 「피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산 승려와 일반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을 기록하였다. 9편 「효선」은 효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일연에게 있어서 효는 중요한 불교의 실천 윤리였다는 점을 보여준다.-삼국유사의 가치단군신화를 처음으로 기록하여 민족의 형성과정과 자주의식을 보여주며 「가락국기」를 통해 가락국에 대해 설명해주는 등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문헌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교와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서 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역사적 기원을 밝히는 설화, 지명의 유래, 속담과 격언 같은 여러 관습과 제의행위를 통해 민속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자료의 인용을 최소화하고 우리나라의 자료를 다양하게 인용하였다. 까다로운 제약들로부터 벗어났던 일연의 독특했던 집필방식 덕분에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사료에 대한 윤곽과 그 내용들을 통해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 받을 수 있다는 사학적 가치를 을 본 그나라사람이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아뢰오니 결국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고 그녀를 세워 귀비로 삼았다.이때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신하가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신라에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일이 생긴것입니다“하였다. 왕은 일본에 사신을보내 부부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였으나 연오랑은"우리가이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니돌아갈수없다.대신세오녀가짜놓은비단이있으니,이것으로하늘에제사를지내면될것이다“하고비단을주었다.사신이돌아와이처럼전했다.왕이그말에따라제사를지내자해와달이예전처럼돌아왔다고한다.태양과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일식과 월식이 차례로 이어졌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과거에 태양은 제왕을 상징했기 때문에 태양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왕의 힘이 상실되고 있다는점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우리 고유의 문화 중 제천의식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왕이 힘을 잃어간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제천행사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켜보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 하지만 결국 밑천은 다 드러나게 된다.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거짓된 모습보다 진실 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함께 나아가기 위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만파식적제31대신문대왕은세상을떠나면서자신이죽은뒤화장하여동해의큰바위에장사지내게하여 사후에큰용이되어불교를받들고국가를지키겠다는아버지를기리기위해동해가에감은사를 지었다. 이듬해 5월 동해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앞에서 떠다닌다는 소식을 신하들이 아뢰었다. 일관에게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문무왕과 천신이된김유신이신문왕에게 나라를 지키는 보물을 내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왕은 감은사로 향했다.신문왕이해변에 행차하니 산모양은 거북 같고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 밤에는하나로합쳐졌다.왕이배를 타고 산에 가니 용이 검은 옥띠를 바치고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이라고 말지만 내적으로는 편안함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이 계속되고 있다. 남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겨야만 비로소 빛을 보게 되는 안타까운 사회에서 만파식적의 피리 소리를 통해 잠시나마 평온하고 따뜻한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황룡사의 9층탑신라 27대 선덕여왕 즉위 5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자장법사가 어느 날 중국 태화지 둑을 지나가는데 문득 신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희나라에는어떤어려움이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웃 국가들의 침입이 잦은 신라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신인은 자장법사에게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고 그러한 이유로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고국으로 돌아가서 황룡사의 호법용에게 명령을 받고 황룡사 절 안에 9층짜리 탑을 세우라” 고 말했다.자장법사는 그 말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황룡사에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건의한다. 선덕여왕은 백제에서 탑을 세울 공장을 데려와 탑을 세우기 시작한다. 탑의 크기는 철반(鐵盤)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탑이 완성된 후 자장법사는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00알을 탑 기둥 속,통도사 계단과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 이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 라는 소리를 듣고 고구려왕은 신라를 정복할 계획을 그만두었다고 한다.황룡사에 세워진 이 거대한 탑 덕분에 신라는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나라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황룡사 9층탑은 불교를 통한 호국정신의 결정체였다고 할 수 있다.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황룡사 9층탑의 정신적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단지 9층짜리 탑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키고 삼국통일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이 9층짜리 탑은 이후 5번의 벼락을맞는등 기이한 현상을 보였고 고종 16년 겨울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절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했다.
    독후감/창작| 2022.03.16| 6페이지| 1,000원| 조회(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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