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민중, 그 삶의 안으로’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감상하고000< 공연물의 내용 요약 >1815 뚤롱, 수감번호 24601 장 발장은 형기를 다 채우고 보석이 된다. 5년의 형량과 탈주로 인한 형이 얹어져 19년의 수감생활을 보낸 장 발장은 법의 노예에서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자베르 경감은 노란색 휴가 증명서일 뿐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실제로 장 발장은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힘든 생활을 이어가던 중 도움의 손길을 건넨 주교를 만난다. 하지만 그는 은 식기를 훔쳐 달아났고 금방 잡혀 오게 된다. 하지만 장 발장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왜 그리 일찍 떠났느냐며 가장 비싼 은 촛대를 건네준다. 이후 장 발장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고, 하느님께 구원해달라고 기도해주는 주교의 모습에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하며 종이를 찢는다.1823년 몽르퇴이유 술 뫼르, 어느 한 공장의 반장은 여공인 판틴에게 추태를 부리고, 다른 여공들은 그들을 손가락질한다. 어느 날 다른 여공이 작업을 끝내고 퇴근하는 판틴의 주머니에서 편지를 빼내어 크게 읽는다. 편지 속 내용은 딸의 약값을 보내라는 말이 적혀있었고 처녀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며 모두가 판틴을 비난한다. 소란이 일자 공장의 사장이 원인을 알고자 왔으나 자베르가 나타나자 사장은 반장에게 뒷수습을 맡긴다. 이후 실직자가 된 판틴은 머리카락, 어금니, 몸 등을 팔며 빚을 갚는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시비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런 그녀를 장 발장이 구해 준다. 치료도 해줄 뿐만 아니라 딸을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베르를 통해 가짜 범인을 잡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장 발장은 침묵 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나는 장 발장. 나는 죄수번호 24601’이라며 자백 후 자신을 잡으러 온 자베르에게 3일의 자비를 부탁하였으나 서로의 대립된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장 발장은 도주 후 여관에 맡겨진 코제트를 1500프랑을 지불하고 데려온다.10년 후 파리의 생 미쉘 빈민가에는 가브로쉬, 앙공라, 마리우스 같은 시민 혁명군이 있었고 떼나르디에 부부와 떨거지, 그리고 에포닌이 있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서로 첫눈에 반하게 되는데, 소동이 일며 자베르가 나타나자 장 발장과 코제트는 자리를 피한다. 이후 혁명 동지들에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며 말하는 마리우스는 혁명과 사랑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한다. 하지만, 라마르크 서거 이후 그의 장례식 날에 맞추어 혁명을 실행하고자 했고, 마리우스는 형제들을 선택하게 된다.혁명군에 자베트가 스파이로 들어오고, 마리우스의 편지는 에포닌이 코제트 대신 장 발장에게 대신 전해준다. 바리케이드 회의 중 자베트의 스파이 짓이 밝혀지게 되면서 묶이게 된다. 그러던 중 소식을 가져온 에포닌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총을 맞게 되는데, 그녀는 마리우스 곁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러자 혁명군들은 바리케이드에서 처음으로 쓰러진 혁명의 꽃인 에포닌의 이름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싸우기 위해 전의를 불태운다. 그러던 중 장 발장이 군 복장을 한 채 들어와서 의심받았으나 공병대 군인과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며 신뢰를 형성한다. 그 후 묶여있던 자베르를 인도받고 그의 목숨을 살려 준다.이후 결전의 날 피바람이 분다. 결과는 혁명군의 패배였고, 그 와중에 도둑질하는 여관 장도 있었다. 장 발장은 총을 맞고 쓰러진 마리우스를 구해 데려가는 중에 자베르를 마주친다. 하지만, 자베르는 장 발장을 놓아주었고 자신이 믿는 법과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서 그가 구해준 자신의 목숨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며 투신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이 지나간 핏빛 거리를 시민들은 혁명군 또한 청년이고 학생이었으며 그들의 희생으로서 새 세상이 오긴 했느냐며 다시 의문을 가지게 된다.그날 이후 장 발장 덕분에 목숨을 구한 마리우스는 죄책감과 함께 자신을 구해준 이는 누구인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얼마 후 코제트와의 결혼식에서 떼나르 남작의 행색을 하고 온 사기꾼 부부에게서 목숨의 은인이 장 발장인 것을 알게 되자 수도원으로 떠났던 장 발장을 만나러 간다. 장 발장은 판틴을 보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자신을 만나러 온 코제트와 마리우스에게 편지와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바리게이트의 시민들이 나오며 극이 끝난다.< 기억에 남는 등장인물과 대사 및 전체적인 관람 느낌 >앙골라, 가브로쉬, 장 발장 등이 기억에 많이 남았지만,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등장인물은 자베르 경감이다. 센 강에서 뛰어내리기 전 “내가 곧 법이고 법이 우스개가 돼서는 안 돼”, “내 믿음은 산산조각 났고, 그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그의 범죄는 씻겨 질 수 있는 걸까?”, “이제 이 세상을 떠나련다. 장 발장의 세상으로부터”라는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법의 기준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 자신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서 말이다. 범죄자였던 장 발장에게 목숨을 빚지고, 전과자인 그가 정의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20년 넘게 법조계에 몸을 담으면서 절대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법과 정의에 대한 사명감이 돋보이는 모습은 자신이 가짜 범인을 잡고 장 발장에게 자신의 죄를 고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자베르의 신념이 무너졌지만 속으로는 내심 그가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투신으로 삶을 끝냈다는 점이 충격적이고 안타까웠다. 자베르도 어쩔 수 없는 당시 프랑스 사회 구조에서 사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사실 레미제라블의 단편적인 장면들은 수업이나 토론시간에 접했던 적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장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영화 레미제라블을 먼저 시청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시청했다. 어느 하나만 봤으면 장면이 뚝 끊기는 부분이 많아서 개연성을 찾지 못해 내용을 많이 헤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와 뮤지컬을 같이 보면서 이해 못했던 부분이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각설하고 예전에 내게 장 발장에 대한 죄목 토론을 했으면 무조건 장 발장은 범죄자일 뿐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배우면서 장 발장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도 사회구조 속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지만, 프랑스 당시 상황을 보면 민중들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재산은커녕 먹을 빵 구경조차 하기 힘든 그들이었다. 악법도 법일까? 라는 질문에 악법은 법이 될 수 없다는 답변으로 가치관이 변한 것처럼 장 발장이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무엇인지, 그 당시 사회가 어땠는지 더욱 궁금증이 생겼을 뿐이었다. 물론 장 발장의 행동을 잘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주교를 통해 개과천선을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주교에게 은 촛대를 받고 이후에 차라리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는 게 나을 거라며 울부짖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관용, 배려, 이해, 나눔의 감정을 처음 느껴서 혼란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굶어 죽으려는 조카를 위해 빵 하나를 훔쳐서 감옥에 간 그였기에 주교의 그런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고 낯선 감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남에게 베풀며 사는 새로운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 그를 보면 관용, 배려, 이해, 나눔이라는 감정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없이 살던 그들에게 왕권이 조금이라도 베풀었으면 혁명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서평‘나의 말을 책임지는 첫걸음’말 그릇 책을 읽고0001. 서론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말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사람의 ‘말’에 관해 생각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여 사람의 말은 기술의 문제가 아닌 ‘마음’에 관한 일이라는 것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사람들은 ‘난 원래 그렇게 태어났어.’, ‘이렇게 말하는 게 습관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 채, 후회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말은 ‘나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인 경우일 수도 있다. ‘말 그릇’이라는 책에서는 진정한 나의 말은 무엇인지, 습관이 된 말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져주며 해답을 찾아간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말을 잘하는 방법이 아닌 나의 말을 돌이켜 보고, 말 때문에 자신의 일상이 외로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이 책은 총 다섯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말 그릇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아본다. 2부에서는 감정이 담긴 말의 표현, 자신만의 공식이 된 가치관과 그에 따른 말의 차이, 내면의 말은 어떻게 습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기 말 그릇을 돌아본다. 3부와 4부에서는 ‘듣기’와 ‘말하기’의 기술에 대한 오해와 이를 해결할 다양한 방법, 그리고 대화의 기술에 대해 연습해본다. 마지막 5부에서는 사람 사이의 말을 이해하고 다양한 법칙을 생각해보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2. 발췌 및 해석사람들은 딱 자신의 경험만큼 조언해준다.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들의 말일 때가 많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대답을 함께 찾아보는 대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말을 해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나의 안쪽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열리게 된다. -part1, 37p이 문장을 읽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움이 되는 조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의 고민을 별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우리는 상대방이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올 때 ‘경험의 말’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대개 상대방은 타인의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 아닌, 따뜻한 배려를 원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필자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지인들에게 배려의 말이 아닌 조언의 말이 나가려 했다. 그런 스스로가 이상함을 느꼈기에 대화를 하기 전, 듣고자 하는 말이 ‘사건의 해결책’인지, ‘공감의 배려’인지 묻고 대화를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저자는 ‘자기 경험으로 재구성된 조언’이 아닌, ‘상대방에게 필요한 조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잊지 말고 말 그릇 속에 사람을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나는 얼핏 보면 ‘화’로 보이는 감정도 원래는 화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감정은 미요하게 원래의 색을 바꾸기 때문에 자신의 진짜 감정을 알아차리려면, 처음에 가졌던 기대가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part2, 69p이 문장에서 저자는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을 구분해야 함을 강조한다. 잘못된 감정은 상대방과의 대화가 다른 목적으로 흘러갈 수 있기에 이러한 감정이 나타나는 진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감정’은 관계를 해치기 위한 ‘방해꾼’이 아닌, 말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상대방에게 감정을 갖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무언의 기대가 있어서’라고 표현한다. 감정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보고 상대방에게 제대로 된 감정을 표현하는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멋대로 가진 기대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긍정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 열심히 살고 싶고, 주어진 것들을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후배에게 핀잔을 주는 선배라고 해서 애초에 괜찮은 선배가 되고 싶은 바람이 없었을까? ???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도록 알아봐주는 것이다. 첫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자신조차 소홀하게 대할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주면, ‘긍정적 의도’의 싹은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part3, 202p이 문장을 보면 앞서 말했듯 상대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실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다. 하지만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였듯 감정이 길을 잃으면 처음에 가진 긍정적인 의도는 사라지고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만 남게 된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아챌 줄 아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길을 헤맨 감정도 다시 본래의 긍정적인 의도로 돌아갈 것이다. 이처럼 ‘말’은 어떻게 듣고, 말하는지에 따라 과정과 결과가 달라진다. 스펙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의 기술 또한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
독후감누가 더 야만적인가‘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책을 읽고000Ⅰ 서론레비스트로스는 질문한다. 우리의 문화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원시 문화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서구 문화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문화가 우월하고, 어떤 문화가 야만적인가. 어떤 문화가 원시적이고 배울 수 있는 태도인가. 라고 말이다. 이러한 질문은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관점을 끌어냈고, 평소의 생각을 뒤집어 생각해보게 했다. 그래서 처음 책을 접했을 때 레비스트로스의 질문이 어렵고 힘든 질문이라 생각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접해서 낯설기도 하거니와 생각해본 적도 없는 관점이 담긴 저자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는 답변인지, 옳고 그름으로 감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 등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도, 읽은 후에도 스스로 질문을 던지던 시간이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며,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논하고자 한다.Ⅱ.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에 관한 고찰1. 서구 문화 패권의 종말저자는 첫 번째 강의 파트에서 서구문화 패권의 종말을 논하며 현대에 직면한 문제를 정의하고 파악한다. 과거와 달리 현재 물질의 발전은 한계를 맞이하였고, 그것이 서구의 문화다. 이러한 서구식 문명은 다른 문명에도, 스스로에게도 더 이상 본보기가 되지 못하며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이렇게 되면서 그늘에 있던 인류학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문자 없는 사회의 연구를 하는 인류학이 현재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 힘이 있을 거라 본다. 인류학자들은 축소 사회 속 문화를 관찰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요소의 고유한 가치를 객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사회를 바라보는 사회방식 또한 객관화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시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저자는 유럽인이기에 서구 문화가 본인의 것이겠지만, 아시아권에서 서구 문화는 따라 하고 싶은 선망의 문화였다. 문화, 예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는 서구 문화를 본보기로 삼아 따라 하고, 그들에게 맞춘 기준을 세운다. 저자는 서구 문화가 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기도 하고, 침략하기도 하고, 역병을 퍼뜨렸기도 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에 반해 원시 문화에서는 겸손함이라는 미덕과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필자 또한 이런 점에서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서구 문화는 자본으로서 강하면서도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점에 선 문명이 과연 본받을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어떤 문화를 기준점으로 삼아야 한다면, 화려한 문화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기준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는 각자만의 개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어느 문화도 가치가 높거나 낮다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며,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발전된 문명이라는 힘을 가지고, 원시 문화의 문명화를 도와주겠다며 식민지화를 했던 서구 문명이라는 오답지가 존재하지 아니한가.그래서 한국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안타깝고, 답답한 생각이 든다. 서구 문화는 새롭고, 세계의 주류로 통하기에 선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본연의 전통이 있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 자국 문화의 힘은 중요해져만 가는데 어째서 더욱 소홀해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전통문화를 잊으면 미래에 우리의 문화는 없어지고 말 것이다. 당장 최근에도 세계인의 축제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뺏으려는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우리의 문화는 필수불가결한 보물이자, 미래이다.어쩌면, 언론의 지나친 사대주의가 지금의 풍조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유럽 디자이너들의 브랜드가 정말 훌륭한 제품인가? 수백, 수천만 원의 값어치가 하는가에 대해 아니라는 대답도 심심치 않을 것이다. 또, 미국의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 정말 훌륭한 작품인가?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렸다는 사실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이 미국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좋은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 미국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냐, 아닌 작품이냐 혹은 미국에서 상을 받은 작품이냐, 아닌 작품이냐에 지나친 관심이 쏟아진다. 언론이 기름을 부으면 붓는 대로, 전등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시민들은 불에 달려든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현재의 과열된 사대주의의 기조를 조금은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다만,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100%의 보존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복이 있다면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 한복의 형태를 그대로 입고 살자는 것이 아니라, 생활 한복 형태로서 편리하게 발전시킨 형태를 이용하자는 뜻이다. 다른 예로 전통으로 내려오는 공예 기술이 있다면, 그 공예 기술을 완벽 보존하자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점이 있으면 보완하고 새로운 기술에도 접목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문화를 지키는 곳도 많지만, 정부 주관 행사를 보면 100% 보존의 형식을 취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미 산업화, 세계화가 된 만큼 전통의 접근성은 떨어진 상태인데, 더욱 멀리 떨어뜨리는 격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서구 문화에 열광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문화를 보존하며 발전시키는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서구 문화, 원시 문화, 우리 문화는 각각의 장점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 다른 문화의 장점을 배우는 점은 좋으나, 타문화에 휩쓸려 자문화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2. 세 가지 현안: 성性, 경제발전, 신화적 사고앞선 첫 번째 강의에서 필자는 각각의 문화에는 배울 점이 존재한다고 하며, 서구 문화와 우리 문화에 중점을 두고 논하였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강의에서는 원시 문화에 중점을 두려 한다. 그래서 저자가 던진 질문을 원시 문화와 관련된 주제로 논하고자 한다.저자는 두 번째 강의 파트에서 앞서 말한 사회를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기를 제시한다. 첫째 가족 및 사회조직, 둘째 조직의 경제생활, 셋째 종교적 사고이다. 집단과 그 구성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떤 조건이 있는지, 어떤 개념인지, 어떤 위치인지,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를 다양한 집단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주제가 결혼에 관한 주제와 축구에 관한 주제이다.결혼이라는 주제는 이전에 결혼의 비즈니스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비즈니스적인 면을 간과했다는 점이 잊히지 않아서 이에 관한 주제를 흥미롭게 읽어 갔다. 저자는 근친에 관한 주제, 유전적?정신적?사회적 모성애에 관한 주제 등에 대해 법적?도덕적?정신적인 판단을 제외한 시각으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수업에서 결혼이 사랑이 아닌 비즈니스적인 계약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고,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혼인 관계와 사회구조의 연관성을 통해 어떠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나의 편견이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자기반성과 같이 어려운 과정이었다.우선 근친혼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났는가? 필자는 근친혼의 찬반이 떠올랐고,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그에 따른 이유는 첫째 유전적 장애가 발생할 수 있어서, 둘째 가까운 친족과 결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어서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이 금지된 이유는 혼인이란 여성을 교환하는 것이고, 이는 집단의 공존 혹은 유출로 연계되기에 금지되었던 사회적 구조일 뿐이었다고 표현했다. 근친혼을 반대하는 이유를 보면 필자는 그저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이었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해되는 시점이었다. 사회에 만연한 문제는 구조적인 결함으로부터 존재했고, 이러한 결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원시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그렇다면 다음으로 축구에 관한 이야기다. 원시 사회는 내적 갈등보다는 통일성을 선호하고, 자연의 힘을 존중하고, 역사적 미래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로 들 원시 사회의 유형이 그렇다. 이들이 산업화에 저항하는 이유를 흔히 들자면 비경쟁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뉴기니의 원주민은 선교사를 통해 축구라는 것을 배웠는데 이들의 경기는 승자와 패자가 나올 때까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진영의 승리와 패배의 균형이 맞춰졌을 때 끝난다고 한다. 단순한 동점이 아니라 더 이상 패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 때 끝난다는 것이다.현재 사회는 경쟁의 과열화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그런 사회에서 뉴기니의 축구 경기 결과에 대한 가치관은 심히 감동을 주는 부분이다. 단순 동점이 아니라, 패자가 없는 경기를 위함이라는 것이 말이다. 아마 이러한 마음은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문명의 발달을 하지 않은 원시 사회라고 얕잡아 보는 것은 미련한 행위라 볼 수 있다. 감히 누가 배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문명화를 이룬 사회와 원시 사회 중에 어디가 더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