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를 읽고‘법 앞에서’는 법안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한 시골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법이라는 소재에 지레 어려운 내용일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쉬운 문체와 스토리 형식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읽기 쉽다고 해서 이해하는 것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 글에서의 의도를 알 수 없던 문장이나 등장인물의 상반되는 말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요구했다.우선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맨 마지막에 문지기가 한 말이었다. 왜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냐던 시골 사람의 말에 문지기는 이 입구는 단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즉 법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와 문지기 모두 이 시골 사람 한 명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법안에 들어가기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결국 그는 실패하였다는 이야기에 사실 그 통로는 너만을 위한 통로였어라는 내용은 스토리 상으로는 연결짓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 문의 의미에 대해 집중해보도록 하였다. 시골 사람만을 위한 문이 있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문도 개개인별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모두 시골 사람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 모두 시골 사람처럼 행동했을까? 오히려 개개인이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누군가는 나는 법에는 관심이 없다며 자신이 맡은 일을 하러 갔을지 모르고 누군가는 비범하게 보였던 문지기에게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뚫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골 사람처럼 문지기가 허락하기만을 기다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모두 평등할 것이고 이런 기회에 어떻게 대응하여 법에 이르는지는 각자의 역량에 달려있다는 결론이 나온다.이런 문의 의미에 대한 생각은 내가 문맥상 이해가 가지 않았던 문지기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시골 사람은 평생을 걸쳐 법안에 들어가기 위해 문지기를 설득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완고하게 입구를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런 완고함은 시골 사람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이 부분만을 본다면 문지기의 일관된 태도에 오히려 시골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지기의 첫마디는 이와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 시골 사람이 처음으로 출입을 요구할 때 문지기가 한 말이다. 지금은 입장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시골 사람은 다시 한번 물어보게 된다.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나요?” 이에 문지기는 가능하지만, 지금은 안된다는 답변을 남긴다. 내가 처음 이 부분을 접했을 때는 마지막의 순간까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면서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문의 의미에 대한 생각은 문지기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 문지기의 말을 생각해보면 너에게는 아직 법으로 갈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골 사람은 이를 수긍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하지만, 문지기는 그때도 아직 들여 보내줄 수 없다 한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시골 사람의 대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골 사람이 출입을 거절당하고 생각해낸 일은 문지기를 매수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물질적인 요소를 통해 법에 도달하려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시골 사람의 세속적인 모습은 문지기로 하여금 시골 사람이 아직 법에 다가갈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분노가 가득한 사회처음 네이버의 줄거리를 통해 접한 영화에서 나는 무능한 경찰과 이에 맞서는 정의로운 어머니가 대립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한 줄로 소개하라면 이런 식의 줄거리도 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 복합적인 요소가 깔려있다. 영화는 한 여성이 한적한 도로의 전광판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밀드레드로 살해당한 딸의 어머니이다. 문제는 그녀가 전광판을 대여하며 시작된다. 자신의 딸이 강간당하며 죽었고 그 책임을 경찰서장인 윌러비로 돌리는 전광판 문구는 암 투병 중이자 참된 경찰인 윌러비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이 갈등하며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이런 주된 줄거리는 영화의 흐름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끔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은 우리가 평소 클리셰라고 부르는 기본적인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진행된다.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상황임에도 그녀의 어머니 밀드레드를 무조건적으로 불쌍하고 선하게 표현하지 않았으며 입체적으로 묘사된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 맞춰 이해할법한 행동을 한다. 책임자인 월러비를 탓할 수밖에 없는 밀드레드, 암 투병 중이지만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월러비, 그리고 그를 변호하는 마을 사람들 모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인 상황에서 쌓여만 가는 갈등과 분노는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절대적인 선과 악을 구분 짓지 않는 영화의 특징은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자신의 신념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우며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게끔 만든다. 초반 밀드레드의 강인하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가 그런 역할을 맡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는 주인공의 편만 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밀드레드를 관찰하게끔 만든다. 자신의 화에 못 이겨 치과의사의 손가락에 구멍을 낸다던가, 자신의 차에 음식물을 던진 아이들을 향해 발길질한다는 등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공감을 자아내기에는 과한 경우가 많다. 물론 그녀의 터프한 성격에서도 행동의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녀가 처해있는 상황에 있다고 생각한다. 딸은 정체 모를 괴한에게 강간당하고 죽어갔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그럼 여기서 밀드레드는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밀드레드의 이해할 수 없는 과격한 행동은 주체할 수 없는 화를 표출할 대상이 없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그녀의 행동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긴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물론 화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 이외에 키가 작아 난쟁이라 불리는 피터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 같은 경우도 그녀가 절대적인 정의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아무리 강인하고 정의로워 보이는 밀드레드 역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미숙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다. 이것이 이야기가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 관객의 예측을 피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영화의 줄거리와 특징에 관해 이야기해보았다면 이제부턴 영화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전반적인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영화는 차별, 편견, 폭력을 주요 소재로 다룬다. 세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의 주된 감정은 분노이다. 영화에서는 밀드레드의 분노만큼이나 소수자의 차별에 따른 분노를 중요 소재로 사용하는데 이 모습이 현재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세상에 날 때부터 인간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나 혹은 집안의 경제력 등 모든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에게 편견을 가지며 차별하고 비슷한 사람에게는 동질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렇게 동질감에 의해 생성된 집단이 특정 비판을 받았을 때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다른 진영에 있는 상대편을 깎아내리려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처음에는 가벼운 말싸움으로 시작했을지라도 싸움은 순식간에 번져 나중엔 이유는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악한 감정만이 남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한국 사회에서 혐오가 생기게 되는 과정이다. 윌러비는 자살하기 전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동성애를 혐오하는 딕슨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여러 구절 중 혐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표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는 마치 현재의 한국 사회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한남, 여혐, 맘충, 뜰딱 등의 단어들은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세대 차이 등 여러 진영이 서로를 혐오하며 생성된 단어들이다. 각 진영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상황만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이런 혐오가 단순히 개인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혐오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과도 같기에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된 갈등일지라도 점점 자라나 나라를 망치고 분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이런 혐오에서 비롯된 분노가 가득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영화는 밀드레드와 딕슨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그 해답으로 내놓는다. 밀드레드가 앞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 불특정 다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딕슨은 흑인,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밀드레드와 딕슨이지만 그들은 몇몇 사건을 기점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딕슨에게 별 이유 없이 죽기 직전까지 맞은 광고업자는 화상을 입은 딕슨에게 오렌지 주스를 건네며 그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딕슨의 흐릿한 시점에서 광고업자가 천천히 주스를 따르고 빨대를 꽂아 딕슨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이 일을 기점으로 딕슨의 성격은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분노와 편견 속 한 걸음의 친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또한, 이전까지 가해자였던 딕슨과 피해자였던 밀드레드의 관계는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는 과정에서 딕슨에게 화상을 입히며 주객이 전도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밀드레드의 딸에 관한 문서를 챙기는 딕슨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그를 용서하기 시작한다.
윤리적 소비, 효율이 전부가 아닌 사회최근 ‘예스맨 프로젝트’라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다. ‘예스맨 프로젝트’는 한 청년이 BBC 방송국으로 향하는 과정을 찍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방송을 통해 전달한 내용은 세계적인 특종이 되어 전 세계에 보도된다. 내용은 이렇다. 다국적 기업인 DOW가 20년 전 인도에서 일어난 가스 누출사고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고, 피해자들에게는 120억 달러의 보상금을 지원하겠다는 인터뷰였다. 20년간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던 DOW가 갑작스럽게 이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타인의 아픔보단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급급한 지주들은 이런 결정을 반대할 것이 당연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회사가 주가가 내려갈 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당연하게도 전 세계 언론은 BBC에서 보도한 중대 발표에 주목하였고 그와 관련된 기사가 계속해서 쓰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DOW에서 BBC의 보도를 공식적으로 부인한 데에서 시작한다. 자신들은 그와 관련해서 어떠한 논의도 진행된 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DOW의 대변인으로 나왔던 남자는 누구이고 그가 말한 DOW의 입장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DOW의 대변인으로 나왔던 청년은 미국 시민단체인 ‘예스맨’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DOW의 대응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고 문제를 수면 위로 띄우기 위해 한 행동이 이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이것 이외에도 예스맨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한 일들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었다.위에서 예스맨에 관한 얘기를 한 것은 단순히 실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내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잘 담겨있다. DOW가 왜 이 황당한 사기극의 표적이 되었는지, 왜 DOW는 수많은 피해자를 남겼음에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그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공항 이후 정부의 간섭이 늘어나는 것에 반대하며 신자유주의가 도래했고 사회는 공정성보다는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신자유주의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출발한 고전적 자유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시장의 이익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사상이다. 흔히 세계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리라 판단되는 자유무역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효율적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기술적인 측면이든 경제적인 측면이든 여러 방면에서 발전할 수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은 환경이나 인권과 같은 다른 가치를 고려하지 않았고, 각 나라의 정부는 자신들의 주력 상품 혹은 상위 계층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주도하며 시작된다. 이 점을 발단으로 하여 계층의 서열화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곧 극심한 빈부격차를 초래하였다. 그렇게 나눠진 계층 간에는 다시 차별화된 정책이 적용됨으로써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실제로 미국 월가에서는 빈부격차의 심화와 공정하지 못한 사회의 시스템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게 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결국, 내가 꿈꾸는 미래는 효율성만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다. 단순히 눈앞에 떨어진 이익만을 좇을 게 아니라 환경, 인권과 같은 여러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윤 추구가 최고 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가치를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화폐의 성격은 현 사태를 더욱 부추기는 요소가 된다. 화폐가 생기며 화폐가 모든 가치를 대변해줄 수 있는 신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사치품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능력까지도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화폐는 전능한 신과 같다는 생각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화폐는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화폐가 없던 시절에는 각각의 물건은 고유의 가치를 지녔다. 이를 사용가치라 하며 사람들은 필요한 정도만큼만 그런 재화를 사용하였는데 예시로 일상생활에서 치약이 필요하다 한들 집에 쌓아놓을 정도로 많이 소비하지 않는 모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화폐는 상황이 다르다. 이전까지는 각각의 용도가 다르기에 두 물품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었지만, 화폐가 생긴 이후 모든 재화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생기며 모든 재화가 교환 가능하다는 교환 가치가 생기게 된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이전의 치약과는 달리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가 높아지고 제한도 없는 화폐에 충분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해서 추구하게 된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니 사람들이 돈이 목적을 이룰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가 돼버린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이렇듯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가 화폐의 특성에 의해 하나의 본능이 된 시점에서 본능을 억누르고 다른 가치들을 고려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효율성만을 따지며 최대의 이익에만 목맨 결과가 어떠한가. 앞서 말했듯 극심한 빈부격차와 불합리한 경제, 사회 시스템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우리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그렇다면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이 필요할까.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각자가 할 일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으로 정부는 낙수 효과보단 소득주도 성장에 초점을 맞춰 정책을 내걸 수 있을 것이고 기업은 공정무역 제품 유통과 같은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개인, 즉 각각의 시민들의 의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초점을 맞췄다. 단순히 정책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보다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하였고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소비라는 점을 고려해 윤리적 소비에 주목하였다. 윤리적 소비란 공정무역 운동을 포함하는 소비자 운동으로 인간, 동물, 환경에 해를 끼치는 상품의 소비를 지양하고 공정하게 판매되는 물건을 소비하는 행위이다. 단순히 최대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자유무역과는 다르게 인권이나 환경적인 측면과 같이 다양한 면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작은 움직임부터 시작한 윤리적 소비가 점점 퍼지게 된다면 후에는 윤리적인 가치판단에 기초한 합리적인 소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윤리적인 기업 제품의 구매거부와 윤리적 제품선택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소비자의 윤리적 선택에서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생산자에게 저항할 수 있는 장치이다. 윤리적 생산과정을 거친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사회적 책임을 무시할 수 없는 기업의 생산 공정에 변화를 이끌 수 있으며, 정부에 대해서는 소비자의 압력을 통해 윤리적 생산과 소비 정책을 유도할 수 있다.
저출산, 고령화 이대로 괜찮은가나는 XX년생으로 XX에서 태어났다. 2000년도는 출산율이 1.47%로 그리 낮은 수준이 아니었고 XX는 약 XX만 명의 적지 않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는 비슷한 연령대의 또래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회 시간에 배우던 저출산이라는 키워드는 나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우연히 이전에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는 창문에 적힌 숫자를 통해 어디에 몇 반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1, 2학년이 3반까지밖에 적혀있지 않던 모습은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후에 알고 보니 겨우 3년 만에 반의 개수가 7개에서 3개로 반 토막이 난 것이었고 그런 사실은 당시의 나에게는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이런 경험은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가 얼마나 급격히 진행되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인 2018년도 합계출산율은 0.98명으로 가임여성 1명당 1명의 아이도 출산하지 않는 굉장히 낮은 출산율을 보였다. 출산율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에 반해 사망자 수는 늘어났고 어느새 사망자수가 출생아수를 능가하며 ‘인구자연감소’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인구 감소의 문제는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경제 활동이 가능한 인구수가 줄어들게 되면서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잠재 성장률이 낮아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소득이 있는 사람들이 명당 부양해야 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세대 갈등과 같은 사회 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그렇다면 왜 출산율은 이토록 급격히 감소하는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결혼 가치관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배우자가 있는 여성의 출산율을 분석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한 여성은 평균적으로 2명의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물론 다시 줄어드는 조짐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수치가 1명을 넘지 못하진 않는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혼 이후가 아닌 결혼 자체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혹은 결혼과 육아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등의 이유로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인식이 이전 세대와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정부는 150조에 달하는 출산 장려를 위한 기금을 마련해 현 상황을 해결해보려 하였지만 0.98명이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큰 효과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이 결혼한 부부 중심으로만 쏠려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결혼이 출산의 전제 조건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고려해봤을 때 결혼한 부부를 중심으로만 저출산 대책을 짜는 것은 반쪽짜리 대책에 불과하다. 결국, 저출산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조혼인율 높이기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부동산에 관한 정책이다. 결혼하지 않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금전적인 부분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거주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신혼부부를 위한 거주 지원을 통해 조혼인율을 높이는
Can You Say That Placebo Is Always Right?In articles on placebo, the majority of people tend to highlight placebo`s advantages, citing examples of patients who have improved through the placebo effect. So is placebo always right? I think placebo is not always right for two reasons. First of all, it's an ethical probl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