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2. 교부들3.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들4. 빅터주의자들5. 생 빅터의 앤드류6. 성경 교사들: 코메스터, 챈터, 스테판 랭튼7. 수사들8. 나가며1. 들어가며이번 학기에 중세교회사를 들으며 바뀌게 된 고정관념이 있다면 ‘중세는 암흑기이다’라는 생각이다. 곧 중세의 교회를 부정적으로만 보거나 타락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셨던 중요한 시기로 봐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를 강조하는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중세교회사 수업을 듣기 전에는 중세를 신앙적, 영적 침체기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성직 매매, 성경의 권위를 추월한 교회의 권위 등 당시 교회의 부패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Ad Fontes’ 의 정신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즉 중세교회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신앙을 따랐던 교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가 추락한 교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중세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이를 큰 움직임으로 만들려고 했던 운동들이 있었음을 이번 학기의 수업을 통해 배우고 있다. 그렇기에 중세는 암흑기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암흑 속에서도 빛나는 보석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던 시기로 여길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이러한 관점의 전환의 연장 선상에서 이번 수업을 통해 접하게 된 ‘중세의 성경연구’는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종교개혁에서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구호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으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의 회복을 말한다. 종교개혁의 파급력이 커지게 된 원인 중의 하나로 일반 대중들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점을 꼽는다. 당시에는 라틴어 성경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어서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제들이나 일부 지식인들만 성경을 접하고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중들은 성경교사들, 7장에서는 수사들에 대해서 본서에서 서술한 내용에 대한 견해를 기록했다. 그리고 8장의 결론으로 본 독후감을 맺으려 한다. 2장에서 7장까지에서는 본서의 각 장에 대한 요약과 함께 해당 장에서의 내용에 대해 느낀 바와 새롭게 성찰한 바를 함께 기록하였다.2. 교부들교부들에 관한 내용에서는 크게 ‘알레고리’와 ‘렉티오 디비나’에 대해서 다루었다.중세의 교부들은 사람의 몸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 또한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성경의 문자들이 말하는 내적 의미, 영적 의미를 드러내려고 했다. 교부들은 문자적 의미보다 영적인 의미를 높이 평가했으며, 중세의 성경관은 이러한 특징들이 반영되었다. “심각하게 영적인 해석이 언어, 사상, 정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일상의 삶에 침투”한 것이다.렉티오 디비나, 즉 거룩한 독서법은 읽기 (lectio)로 시작하여 기도 (oratio)로 마쳐진다. 이러한 독서법은 “그 깊은 사랑의 연습은 마침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의 작품에서 다시 그를 구하게 하는 것”으로 관상적인 삶의 기초가 되었다. 교부들은 호기심과 박식함에 흥미를 두었으며 성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문학과 학문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설교와 성경 연구에 있어서 세속적인 학문을 활용하여 양심적이고 학문적인 시도를 했다.알레고리적 해석은 예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와 보수적 신학노선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 단순히 성경 해석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언어, 사상, 정치, 일상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이 인상이 깊었다. 어떻게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은 그 출발과 기원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소 벗어나 있지만 그 해석의 결과가 사회 전반, 개인의 삶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는 표준주석은 성경 연구, 로마법, 교회법이라는 세 학문에서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작업이 이루어진 표준주석은 이를 편집한 교사들에 의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주해는 그 위치가 가장자리, 행간 혹은 연속적으로 위치하기도 했고, 텍스트와 주석이 나란히 작성되기도 했다. 주석에서 질문 부분은 “간단한 설명을 생략하면서도 커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주석이 전혀 없이 질문들로 구성된 주석도 있었다. 또한 질문들은 주석에서 발췌되어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흔히 생각하는 중세의 이미지는 지성에 대한 측면을 경시하는 것이었다. 성화나 성물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지성적인 측면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된 결과로 여겨졌다. 그런데 중세 당시에도 일반 대중들의 지식의 부족, 즉 무지에 대한 대안으로서 성경 연구의 예비 교육 프로그램이 제시되었다는 것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종교 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중세 당시의 여러 사람들 또한 지식의 축적과 체계화를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토양을 형성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이 당시에도 이미 텍스트가 오염되었다는 것은 인지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수많은 필사본들에 의해 텍스트가 오염되었다는 것을 당시에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오염으로부터 원래의 텍스트의 의미를 찾기 위해 텍스트를 체계적으로 개정했다는 것은 당시에도 말씀의 원의(原意), 즉 원래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또한 흥미로운 지점은 주석에 있어서 ‘질문’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지식의 전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질문은 바로 그러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주석에서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질문으로만 구성된 주석이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에 지적인 흥미를 채우며 본질과는 무관한 질문들 (예를 들어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에 관심을 두었다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말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휴가 가졌던 학문적 모험심을 놓쳤다. 오히려 앤드류가 휴의 학문적 계승을 했다고 볼 수 있다.먼저 중세 당시의 빅터주의자들이 시도했던 개혁, 그들이 가졌던 고민이 시간적, 공간적 간극이 어마어마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흥미로우면서도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배우고 가르치는 역할은 학자에게 있고 기도하고 애도하는 역할은 성직자에게 부여되어 이분화가 된 것은 오늘날의 신학 현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현장의 목회자도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 있지만 오늘날 신학의 새로운 주제들이나 담론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는 신학자가, 일선 현장에서의 목회는 목회자가 전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이 이런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 때로 성도들은 새로운 성경적 진리, 오늘날 생겨나는 무수한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대답에 대해 목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의 목마름에 대해서 목회자가 천편일률적인 대답, 뻔한 대답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권면하는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다시금 빅터주의자들이 했던 그 개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야 함을 생각해본다. 물론 현장 목회자들이 감당하고 있는 사역의 무게가 결코 적지 않기에 배우고 가르치는 것과 성도들을 목양하는 것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이며, 성경의 진리로 그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현장 목회자에게도 학자적 태도가 요구된다고 생각된다.5. 생 빅터의 앤드류앤드류의 삶에 대해서는 휴나 리처드보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들은 앤드류가 독특한 사람이었음을 말한다. 그는 고고학에 흥미를 지녔던 인문학자로서 경건하며 보수적인 방법을 따라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세부적인 그는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되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며 이성과 믿음의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설명이 합리적이고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경우에는 이를 수용하기도 했다.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텍스트가 말하는 의미에 다가가기 위해 가까이 파고들고자 했다.앤드류는 문자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포용을 통해 유대화된 주석을 만들어 냈으며 자신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정통적인 정신으로 성경 연구가 지속이 되도록 하였다. 앤드류는 자신의 스승인 휴가 신학에 미쳤던 영향력을 이어받았다. 휴가 제2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렸다면 앤드류는 제2의 제롬이라 불릴 수 있으며, 빅터주의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감당했다.앤드류를 보며 느끼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그의 포용성에 대한 생각이다. 유대주의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서 취할 것을 마땅히 취하는 것은 진취적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포용성이 자칫 방향을 잘못 설정하게 되면 잘못된 진리에 대한 타협이나 진리의 오염으로 이어질수도 있지만 앤드류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유대교에서도 마땅히 성경적 진리에 부합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기꺼이 차용한 것이다. 오늘날 보수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노선들에서는 이러한 다른 노선들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도가 있는지 질문해보게 된다. 과연 다른 노선에서도 논리적으로, 신앙적 양심에 비추어서도 받아들여지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가? 학문적 포용성은 어마어마한 용기를 필요로 함을 다시금 생각한다.한편, 그가 성경에서 난해하거나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들에 집중하여 파고 들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많은 경우 이러한 난해한 주제에 대한 연구는 자칫 길을 잃고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길로 가기가 쉽다. 이단이 그렇고 사이비가 그렇게 끝에 이르렀지 않을까? 그런데 앤드류는 난해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성경적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금 점검해보게 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