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스콧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닉 캐러웨이의 관점에서 개츠비와 그의 주변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관찰자적 서술로 담아낸다. 세계 1차 세계대전 이후 과열된 미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저마다 하나씩 아메리칸 드림을 품었다.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 그것이 곧 개츠비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바다. 개츠비의 종말처럼 아메리칸 드림에 현혹된 사람들의 끝에 남은 것은 허황과 사라진 믿음이었다. 사랑했던 연인 개츠비와 데이지는 이별 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우연히 만난다. 그들의 만남의 다리가 된 사람이 바로 닉 캐러웨이였다. 닉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편견없는 시선으로 개츠비라는 인간의 폄하된 낭만을 알아봐준 친구였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는 파멸로 끝나고, 데이지는 자신의 남편 톰과 원래의 인생을 다시 살아간다. 닉은 개츠비의 위대한 낭만을 기억하는,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예일 대학교의 풋볼 선수로 활동한 톰은 데이지의 남편이다. 그는 폭력적이고 거만하다. 아내 데이지를 두고 정부와 남몰래 떳떳하지 못한 유희를 즐기는 등 극히 이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데이지 역시 남편과 결이 다르지 않다. 작품에 『유색 인종 제국의 발흥』이라는 책에 관해 두 사람이 식사자리에서 생각하는 바를 나누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여기서 톰은 백인을 지배 인종이라 칭하며 다른 인종이 세계를 제패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경고한다. 데이지는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백인이 아닌 인종들은 꾹꾹 밟아 버려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톰과 데이지, 이 두 사람은 재산을 과시하고, 물질적 가치와 향락을 쫓는 거만하고 위선적인 사람이다.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개츠비의 기억 속, 그가 사랑했던 과거의 데이지는 현실이 아닌 이상적 이미지로 왜곡된 상태였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라는 사람은 사랑, 이상, 꿈, 그의 삶을 지탱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개츠비의 이러한 이상은 결국에 무너지고 만다. 데이지는 그의 이상 속 존재하는 구원자도, 순수함도, 희망도 아니었다. 이상이 무너질 때 사람은 비로소 파멸한다. 개츠비의 육체적 죽음과, '데이지'라는 그의 이상 중 무엇이 먼저 무너졌는지 알 수 없다.데이지는 머틀을 차로 쳐 죽이고 만다. 머틀의 남편 윌슨은 아내를 잃고 큰 상실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죽인 뺑소니범에게 복수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처음에 그는 톰을 찾아 간다. 톰과의 대화 후에 윌슨은 뺑소니범이 개츠비라는 오해를 한다. 톰은 윌슨의 분노 앞에 침묵한다. 증오하는 개츠비를 남의 손을 빌려 죽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남몰래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사실 머틀을 죽인 사람은, 그 차를 운전한 사람은 데이지였다. 그러나 데이지가 아닌, 개츠비가 윌슨의 총에 맞아 죽는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희생 앞에 침묵한다. 그녀는 개츠비의 죽음 앞에 회개하지 않았다. 사랑은, 이상은, 믿음은 힘이 없었다. 개츠비의 죽음은 데이지의 배신으로 더욱 비극을 맞는다.왜 책 제목이 '위대한 개츠비'일까? 사랑이나 이상 따위를 믿는 부자, 개츠비는 어리석었다. 낭만적인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지만 낭만은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병폐로 취급된다. 산업사회에서 낭만은 힘이 없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희망과 꿈, 순수함을 가지고 자신이 사랑한 이상을 용기있게 쫓았다. 스스로 낭만이라는 약점을 택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약함을 스스로 택한 개츠비의 낭만이 그의 이름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허락한 것이 아닐까.그러나 또 한가지 드는 의문은 이 소설에서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은 과연 누굴까라는 것이다. 정부와 아내를 동시에 기만한 톰은 아닐 것이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진정으로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는 애증의 관계인 남편 톰을 더 사랑했을까. 개츠비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순정을 겁 없이 쫓은 남자의 끝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개츠비는 어리석고 바보 같지만 동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허락 받았다.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과 혼돈의 시대에 흥분한 이들의 이야기와 갈등을 다룬 책이다. 작가의 인생을 읽고 나니 개츠비와 작가가 겹쳐 보였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를 읽고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필명이었던 스티븐 데덜러스와 흡사한 이름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제임스 조이스의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한 인물이다. 자아를 탐색하는 소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은 자전적 소설의 형태다. 작품의 배경은 아일랜드가 독립운동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 가운데 정치 사상이 대립했던 가족들의 갈등이 작품에 등장한다. 스티븐은 그가 속한 가정, 학교, 사회 속에서 자신의 창조성과 자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클롱고우스를 다니던 유년기부터 예수회 명문 학교 벨비디어 칼리지로 편입하고 이후 사제라는 진로를 잠시 생각하지만 결국에 포기한다. 그는 사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폐쇄적인 억압의 사회에 갇힌 지혜로운 소년이 자신의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 모색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에 스토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아일랜드 독립 당시에 독립을 지지한 세력은 기존의 정치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국가적 내분은 가정의 내분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외부 갈등 상황을 목도하며 섬세한 성품을 지닌 주인공 스티븐 역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지만 또래와 어울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스티븐이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말하길, 그 역시 아이들의 흥겨운 놀이판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스로 음울한 존재임을 깨달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대신에 그가 선택한 것은 고독의 기쁨이었다. 철저히 스티븐이라는 소년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읽어낼 때 주인공과 동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또래에 비해 성숙한 감수성의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종교의 요구에 부담을 느끼고 일찍이 고뇌한다.성장과정에서 그는 점점 활달한 성격으로 바뀐다. 그러다 사창가를 가는 등 도덕적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깊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티븐은 고해성사를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개선했다고 생각한다. 자문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일랜드에서 예수회 학교를 다니며 자란 소년에게 종교란, 신의 존재랑 그의 가치관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였다. 그러던 와중에 교무주임 신부는 스티븐에게 사제로 진로를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소년의 인생에서 사제의 근엄한 목소리는 어느 정도의 무게였을까.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이 단락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었다.사제는 스티븐에게 말한다. 사제라는 소명을 받는 것은 전능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영광이노라고. 엄청난 권세. 과연 이렇게 사제의 권위를 칭송하는 사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했을까. 추상적 언어로 가득한 그의 말은 읽는 내내 거부감이 느껴졌다. 사제라는 인물은 신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라기보다 권위를 앞세워 자신을 포장하는 일종의 권력과 폭력으로 느껴졌다. 결국 스티븐은 사제로 진로를 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에 회의감을 느낀다. 아일랜드의 독립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역시 그의 목을 옥죄는, 사상이라는 이름의 감옥이었다. 스티븐은 자신을 찾기 위해 독자적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국적, 종교, 가족 등 외부의 어느 요소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찾아 그는 떠난다.자유를 찾아, 사회적 규율을 버리고 자아를 택한 스티븐을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배신자.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대신에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그것에 묶여 자신의 새로운 성장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다. 한 소년의 내적 성장을 차근히 따라가는 과정 속에 느낀 것은 결국 자신 안에 모든 인생의 답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어른은 그에게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한 자유는 그래서 더 가치있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니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예술가란 직업은 특별하다. 사제가 아닌 예술가를 택한 스티븐, 그는 자신의 길을 창조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선택한 예술은 사회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때문에 스티븐은 예술가가 될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의 인생에 한 발 짝 다가선 기분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조와 박쥐』를 읽고용의자의 죽음으로 30년 전 종결된 살인사건이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자백하고 들고 나서며 사건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한다. 신뢰란 무엇인가, 선한 거짓말은 존재하는가. 나비효과에 의한 기막힌 우연을 소설에서 다룬다. 서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살인사건의 피고인의 아들과 피해자의 딸이 사건의 진상에 뒤틀린 오류가 있음에 동으하고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협력한다는 설정이다. 나카마치라는 형사는 두 사람의 협력에 대해 마치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백조와 박쥐의 관계와 같다고 소설에서 평한다. 선과 악은 때로 그 가장자리를 맞대고 있어 명백하게 선을 그어 잘라내는 것이 어렵다. 회색지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딜레마는 범죄에 서사가 붙는 것에 무감각해진다는 점이다. 허구임에도 범죄는 범죄다. 마음 한편으로 주인공 범죄자를 변호하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죄 추리소설에서 펼쳐지는 서사가 그토록 매력적이고 재미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통 추리소설에서는 범죄자와 피해자, 그 당사자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 이 소설은 주변인물들, 유족 등 남겨진 이들이 겪는 상처와 슬픔이 소설의 주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선과 악은 상대적이다. 회색지대의 딜레마를 깊이 파고든 작품이다.소설을 읽으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은 구라키 다쓰로라는 인물이었다. 친절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사람. 그렇다면 그는 선한 사람일까. 구라키 다쓰로는 아사바 모녀, 30년 전 종결된 살인사건으로 긴 시간 고통을 받은 그들의 슬픔에 자신의 책임이 일정 부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거짓으로 자신이 30년 전 범죄자였다는 거짓말을 한다. 또 한 명의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시라이시의 죽음까지. 자신이 죽이지 않은 2명의 사람을 죽인 범죄자로 거짓 자백을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타적 행위였다. 비록 그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설정이 있었음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거짓 누명으로 불명예 속에 살아야 했던 아사바 모녀의 슬픔에는 공감하면서 왜 자신의 선택 뒤에 남겨진 죄 없는 제 아들의 고통은 미리 헤아리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 점에서 구라키 다쓰로는 좋은 사람인가?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선악 판단은 이토록 애매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복수를 위한 범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일정 부분 자의적인 선악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때로는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해석되는 사건도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감히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주체일까. 소설을 읽으며 선과 악, 회색지대, 착한 거짓말은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등 다양한 소재에 대해 계속해 고민하고 나만의 답을 내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에 책을 놓기 어려웠다. 빠르게 읽어낸 책 중 기억에 남는 또 한 가지의 키워드는 신뢰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자백함에도 구라키 다쓰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 아들 쿠라키 가즈마는 아버지를 향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그의 자백에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최선을 다한다. 아버지는 절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설령 그가 가족일지라도 완벽한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나는 누군가를 그토록 신뢰한 적이 있는가, 타인에게 나는 온전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던가. 내 삶에 대한 성찰도 뒤따랐다.피고인의 아들과 피해자의 딸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협력한다는 매력적인 서사 아래에서 나비효과라는 키워드를 기억하며 글을 읽는다면 새롭게 느끼는 바가 많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선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는 결론도 나왔다. 나비효과에 의해 그 선한 의도는 변질된 결과로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직과 신뢰라는 가치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거짓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회색지대에 대해 뒤따르는 고민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후속작을 더욱 기다리게 만든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고죽음은 곧 삶의 숙명이다. 불가피한 운명 속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인간이 마주하는 숙명적 질문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페스트는 단순한 전염병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병, 전쟁, 폭력 등 부조리한 현실의 고난의 총체를 상징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페스트는 삶이란 무엇인지, 이를 지탱하게 하는 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이야기한다. 기자 랑베르, 성직자 파늘루 등 소설에서 페스트를 마주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목도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떠올리게 한다. 의사 베르나르 리유의 시점에서 연대기의 형식으로 오랑 시에 발생한 페스트를 목도하고 기록한다. 페스트는 곧 인생이다. 전염병이 끝나도 우리의 삶에는 또 다른 형태의 죽음과 폭력이 남아있다.소설의 배경인 오랑 시는 현대사회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권태에 절어 장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 사람들은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랑을 나누고 쾌락과 젊음을 칭송한다. 권태로울 정도로 평화로운 오랑 시에 갑작스러운 절망이 찾아 온 것은 쥐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를 토한 채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은 쥐의 사체를 의사 리유는 발견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감각한 대응을 보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종기가 몸에 난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다가 죽음에 이르자 더 이상 방관한다고 끝날 일이 아님을 모두가 알게 된다. 의사 리유는 오랑 시에서 페스트 환자를 치료한다. 그것은 그의 숙명이자 의무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성실한 의사로 묵묵히 일을 한다.코로나 당시의 사회가 소설을 읽는 내내 겹쳐보였다. 코로나로 혼란한 시대 속에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과학적인 방법이든, 종교적인 사고로든 코로나의 원인과 이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끝없는 토론을 나누었다. 그러나 목적을 알 수 없는 토론의 끝에 우리가 얻은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결국 변하지 않는 사실은 어떤 방법으로든 질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 삶이 주어졌다면 끝내 살아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진리는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칭찬을 받을 만한 것 따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온 결론에 불과했다.페스트가 오랑 시의 시민들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또 한 가지를 더 꼽자면 그것은 육체적 존재와 애정의 교류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페스트가 끝나고 격리된 사람들이 재회하는 장면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잃어버린 일상에 포함되는 것은 단순히 건강한 신체 따위로 요약되지 않는다. 관계, 사랑, 애정, 그 모든 교류의 단절.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21세기 사회 속에 보이지 않는 페스트는 무엇일까. 페스트는 첫 문단에서 말한 것처럼 일종의 메타포다.소설에서 말하길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내면에 페스트를 지니고 살아간다.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병독을 품고 살아가는데 그 삶의 숙명 속에 우리는 끊임없이 피로를 느낀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병독을 퍼트리지 않기 위해, 또 스스로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아둥바둥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타인에게 페스트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소설 속 타루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타인의 죽음에 묵인하는 것, 타인을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것, 사회의 폭력에 침묵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페스트의 일종이다.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페스트의 숙명 속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정하지 않고, 끊임 없이 발버둥치며 인생이란 그런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삶을 마땅히 살아내야 하며, 결코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페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인간의 부조리를 탐구한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만든 책으로 기억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을 읽고고양이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일본 사회를 고양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속 주인공 고양이는 위선과 개인주의로 점철된 인간사회의 모순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적한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인간사회를 통찰한다는 것, 허풍과 잘난 체하는 인간의 부끄러운 속내를 미물에게 들킨다는 것은 우스꽝스럽지만 고양이가 전하는 교훈과 대사 속에 뼈가 있다. 소설의 첫 대목에서 고양이는 서생이라는 제 주인은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 평한다. 많은 고양이를 만났으나 이런 등신 같은 족속은 없었노라 하는 녀석의 넋두리가 한 편으로는 마냥 귀엽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인간과 고양이를 비교하는 대목도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인간은 이기주의에서 나온 공평의 의미를 고양이보다 잘 알고 있을지라도 지혜의 면에서 보건대 고양이보다 한참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쏟고, 만사를 복잡하게 여기는 인간의 사고가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법 하다. 인간에 비해 고양이는 단순하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먹고 싶을 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은 생각컨데 '자유'다. 또 다른 의미로는 '솔직함'이다. 반면 고양이의 입장에서 제 주인과 같은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존재다. 인간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세상에 차마 보일 수 없는 제 속내를 어두운 골방에서 뱉어내기 위함이라는 것인데 이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다.고양이의 주인은 위장병을 달고 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남들에게 숨긴다. 고양이는 주인의 고통을 비롯해 각종 희노애락을 유일하게 훔쳐보는 친구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을 미물은 인해한다. 위장병을 혼자 걱정하면서 남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하는 주인을 보고 고양이는 오기를 부린다며 비웃는다. 주인의 이런 행태는 변명을 해서라도 제 체면을 지키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욕구를 거스르면서까지 대외적인 평판을 중요하게 여길 정도록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란, 타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숙명 속에서 자신의 진솔한 모양을 감히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이들이라는 의미기도 하다.작가 소세키는 일본의 천황제 중심의 국가주의 속에 종속된 일본인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이 작품을 썼다. 지독한 개인주의 속에서 윤리적 가치관을 상실하고, 위선과 겉으로 교양을 과시하는 것에만 갇힌 사람들을 고양이의 시선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이 주로 향한 대상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돈을 제일 중심으로 하는 물질주의적 사회 속에서 다른 윤리적 가치를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소설은 변화하는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고고한 척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사회와는 구별된 체 교양스러움을 과시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풍자와 해학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일본 소설을 하나 꼽자면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주저 없이 고를 것이다.작가의 허무주의적 태도는 소설의 전반에 나타난다. 고양이가 인간사를 바라보는 태도가 곧 작가의 시선이다. 인간의 술을 먹었다가 실수로 물독에 빠져 죽는 고양이의 인생, 그럼에도 달관적 태도를 보이는 고양이의 종말은 양가적 감정을 들게 만든다. 덧없는 인간사를 비판한 고양이의 유쾌한 재치, 그러나 그 고양이의 끝도 허무하기 짝이 없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인간과 고양이는 완전히 구별된, 다른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책의 말미를 읽어갈 쯤에는 주인공 고양이가 인간의 위선적 사고를 일부 모방하는 듯한 느낌 역시 들었다.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인간 세상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기발한 재치와 세밀한 묘사가 일상적인 사건들과 잘 어우러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21세기 한국 사회를 고양이의 시선으로 본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