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성호 이익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8.01.05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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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호 이익의 근대화적인 시각을 알아본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배경
2. 사상
1) 사회적 사상
2) 경제적 사상
3) 현실주의
3. 서양 문물의 수용
4. 천주교와 양명학
5. 느낀 점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배경
성호 이익은 조선 중기의 숙종, 경종, 영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살았다.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가서는 청조가 시작되던 때로부터 100년간이었다. 당시 중국은 성리학과 양명학에 대해서 비판의식이 팽배해 새로운 사조가 일어나던 때였다. 명말청초 무렵 성학의 이기심성론은 번거롭고 공소하게 되었으며, 양명학의 심학은 간단하고 직접적이나 모호하고 방탕함에 빠져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폐단에 빠지고 말았다. 이 같은 폐풍은 새로운 학풍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군다나 서양인들에 의해 전해진 서양의 천문, 지리, 종교, 과학기술 지식에 의해 새로운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 의식 구조가 확대되고 심화되어 자신들의 사회, 문화, 학술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명말청초에 와서는 공소함을 비판하고 경국제세의 실용적 학문을 갈구하게 되어 일군의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황종희, 고염무, 염약거, 호위, 왕부지 등이 실학을 위한 고증학을 창도하였다.
조선 중기 17세기 당시의 학풍은 고루한 주자학 일변도로 흘러 정주의 설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다른 설을 이야기하면 사문난적을 여겼다. 1575년 동서분당이 생긴 이래로 사색당파의 정쟁이 극에 달하던 시기이다. 파가 다르면 나면서부터 원수였고, 서로 혼인도 하지 않았으며, 섬기는 스승도 달라 담소하기도 꺼려했다. 편협한 배타적 태도는 학풍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동인도 남북인으로 분열되었는데, 남인은 이황의 문인이고 북인은 조식의 문인이었다.
이황의 문인인 남인도 제2차 예송 때는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타격을 입고 다시 남인으로 합쳐졌다. 그리고 1683(숙종 9)년 서인도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성호 이익 당시는 사색당파가 질시와 반목을 하여 당쟁이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 의해 학풍도 배타적인 주자학 일변도였고,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학풍은 사회 개혁이나 문화적 발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참고 자료
조선의 사회와 사상 / 이성무
한국 실학사상사 /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 인물 유학사3 / 조준하
星湖 李瀷의 學問精神과 詩經學 / 崔錫起
星湖 李瀷 및 星湖學派 / 불함문화사 편집부
星湖 李瀷 硏究 / 한우근
驪州李氏星湖家門世乘記 : 星湖家門의 世德과 學問 / 李暾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