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화랑세기
- 최초 등록일
- 2007.12.28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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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화랑세기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릴 적 삼국시대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어떻게 한반도의 꼬리부분에 위치했던 신라라는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기운이 쇄한 상태였고, 고구려와 백제 모두 왕권이 흔들렸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이 약해져 있는 상태일지라도 신라 내부를 받쳐주는 힘이 없었다면, 상대적으로 늦게 국가가 형성되었고, 중국문물의 흡수가 더뎠던 신라는 통일은커녕 가장 먼저 멸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신라는 고구려와 다르게 인재를 양성해 내는 학교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결국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은 `화랑세기`의 책을 읽으면서 명료해질 수 있었다. 신라를 지탱해주었던 `화랑도`였던 것이다. 화랑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에도 계속 그 명맥을 유지해갔다.
신라는 태학에서 인재를 양성하던 고구려와는 다르게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러나 화랑외사의 남모와 준정의 이야기를 통해 신라에서는 화랑도가 고구려의 태학을 대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던 왕과 신하는 남녀를 떼 지어 놀게 하여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살펴본 뒤 등용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풍월주라 부르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녀를 가려 원화라고 불렀다. 이렇게 무리를 모아서 인재를 뽑고 그들에게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틀을 마련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초기에 원화로 뽑혔던 남모와 준정이 서로를 시기하여 죽음에 이르자 원화제는 잠시 폐지되었다. 후에 다시 좋은 집안의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고 이름하였다.
참고 자료
화랑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