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 최초 등록일
- 2007.05.26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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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의 조선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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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제강점기의 제3기로서 대체로 1931년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침략에서부터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까지를 가리킨다. 1920년대 말기부터의 경제공황에 타격을 입은 일본제국주의는 그 대응책으로 파쇼체제로 전환하는 한편, 공황탈출구를 만주침략에서 찾게되었다. 이 침략전쟁이 이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짐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적 성격도 달라졌으며 이에 따라 그 식민통치정책도 파쇼체제, 전시체제로 전환되어갔다. 한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파쇼 정책은 1920년대의 민족분열통치기를 통해 상대적으로 다소 느슨했던 사상통제를 강화하면서 국내의 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사상보호관찰령 ․ 조선사상범예바구검령 등의 악법을 제정하여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조선방공협회 ․ 시국대응전조선보국연맹 등을 사상범의 전향을 강요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전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조선에도 국가총동원법을 적용시키고 국민총동원연맹을 결성하여 전시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일선동조론을 강조하고 한글사용을 금지했으며, 조선인에게도 일본어 상용과 신사참배․궁성요배등을 강요하고 나아가서 그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을 강요, ‘일본정신발양주간’을 두어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했다. 한편 저축보국주간을 두고 ‘애국공채’를 강매함으로써 전쟁비용 충당에 광분했다. 더욱이 일본제국주의는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전쟁물자와 인력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조선인에게도 국민징용령을 적용시켜 보국대․징용․여자정신대등을 통해 전쟁노동력으로 동원했고, 나아가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징집제도․학도지원병제도 등을 실시하여 조선인을 직접 전투인력으로 동원했다. 파쇼 통치기를 통해 약 50만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전투인력으로 동원되었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1920년대 말기부터의 경제공황으로 저선의 농촌경제가 파멸상태에 빠지자, 조선총독부는 그 대책으로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펴는 한편, 조선소작조정령․자작농지설정사업 ․ 조선농지령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효과를 보지 못한 중일전쟁의 도발로 본격적 전시체제로 들어서게 되었다. 전시체제하에서 식량부족상태에 빠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미곡배급조정령 ․ 임시미곡배급규정(1940) 등을 발표하여 미곡의 강제공출제도를 실시했다. 파쇼 통치기의 경제는 공업부문에서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1920년대까지의 조선은 일본에 대한 식량공급지로서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경제공황을 겪는 과정에서 조선쌀의 일본으로의 과잉유출이 일본 농촌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게 되었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은 식량공급지로서의 역할 위에 다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더 요구받게 되었다. 즉 수력자원을 비롯한 조선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는 공업화 요구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1920년대에도 조선에 대한 일본독점재벌의 침투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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