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료]다산초당과 정약용
- 최초 등록일
- 2005.11.21
- 최종 저작일
- 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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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약용과 다산초당에 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정약용
(2) 초당 건물의 배치
본문내용
강진만을 한눈으로 굽어보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자리압은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이곳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취가 남아있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별명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서 유래한다. 다산 정약용을 잠시 살펴보고 가자.
(1)정약용
다산은 영조 38년(1762)에 출생하여 헌종 2년(1836)에 사망하기까지 영.정조대의 문운부흥기에 활동하였다. 그는 남인 정재원의 아들이며 이승훈의 처남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다산은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일단은 정약용은 그의 인생을 3기로 볼 수 있는데 다산초당의 모습은 유배 즉 귀양살이 인데 제1기는 그가 관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제2기는 귀향을 갔을 때 제 3기는 그가 향리로 돌아 갔을 때를 말한다. 그는 신유사옥 사건으로 유배를 가지만 바로 여기 강진으로 간 것이 아니고 경상도에서 유배를 하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4번이나 거처를 옮겼는데 1801년 강진의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간 계셨는데, 그곳을 사의재라 하였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하며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이런 때문에 그 발의 이름을 ‘네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고 하였다. 1805년 보은 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당대의 명승인 혜장을 만나 유불상교의 학문적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1806년에 그의 제자 강진읍 목리의 이학래 가옥으로 옮겨 거처하다가 1808년 순조8 봄에 다산초당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쓰게 된다.
그는 귀향에서 있는 한문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호히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보다 많은 학문을 연구하고 탐구하여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