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4.3 사건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4.11.29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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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문제제기
1) 항쟁이냐 폭동이냐
2) 지금까지의 4.3 사건의 간략한 정의
3) 제주도의 특수성
2.사건일지
2) 1절. 4.3 사건 이전의 상황
2) 2절. 4.3 사건의 진행
3)3절. 4.3 사건 종결
3.4.3 사건 재조명
1) 항쟁인가 폭동인가.
2) 항쟁의 한계
3) 대량학살
본문내용
광복 직후 건국 준비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중앙과는 다르게 좌와 우의 대립 없이 온건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는데, 항일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지역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1947년 3 1절 발포사건 이전까지는 미군정과의 협조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당시 뜨거웠던 제주도 교육 열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중등학교 10개소, 초등학교 44개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B.Cumings)는 1947년 2월 시점에서 전국 각도 15개 군의 15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초등학교 이상의 졸업생 비율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북제주군이 35.7%로 교육 수준 1위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그러나 광복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은 곧 무너지기 시작했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게다가 6만 귀환 인구에 따른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 명의 희생, 대흉년과 미곡 정책의 실패 등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일제 경찰의 미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