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 최초 등록일
- 2013.05.02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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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4.3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피력입니다.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1. 제주4.3사건의 개괄적 정리
(1) 사건의 정의
(2) 사건의 전개
(3) 사건의 결과
2. 정부가 사건 해결을 위해 했던 일(2000대 이후를 중심으로)
3. 개인적 견해
(1) 진압의 목적
(2) 일각의 역사적 판단에 대한 비평
(3) 50년 동안의 정부의 태도
(4) 정부의 잘못된 기본적인 인식
본문내용
(1) 사건의 정의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1)
(2) 사건의 전개
광복 이후,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철수하자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제주도에는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중 략>
다음으로 단독정부 수립 후의 탄압의 목적에 대해서 논하자면, 우선 수립 후의 탄압의 주체는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도민의 항쟁은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면서까지 이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좌파 세력과 우파 세력의 대비적인 성향을 가진 집단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기이다. 여기서 이승만 정권은 기본적으로 우파의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좌파 세력의 활동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중 략>
만약 정부가 이를 정식으로 무자비한 세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었다고 인식하였다면 용어의 선별에서부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서고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제정하고 ‘제주4.3사건 진산 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단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임시방편적인 방법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정부가 진정 지난 과오를 청산하고 국민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구하고자 한다면 정부의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참고 자료
http://www.jeju43.go.kr/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