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증산의 생애와 증산교
- 최초 등록일
- 2016.12.13
- 최종 저작일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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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강증산의 생애
2. 천지공사
3. 후천개벽의 시대
4. 증산교의 분열
본문내용
1. 강증산의 생애
강증산(1871-1909)은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풍속은 새댁이 아기를 배면 친정에 가서 해산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도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 있는 친정에 가서 해산을 했고, 그는 시골 가난한 선비 집안의 14대 종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몸을 덮자 온 천하가 환하게 밝아지는 태몽을 꾸었다. 그리하여 열석 달 만에 세상에 나왔다고 전한다.
강증산은 종교적 지도자로 받드는 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특히 그 모습이 꼭 금산사의 미륵불을 닮았다고 한다. 항상 그렇듯 그도 어릴 적에 글을 배웠고 하늘 천자를 배우자 하늘의 이치를 알고 땅 지자를 배우자 알았다고 하며 15살적에는 배울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증산이 성년이 되자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와 그의 부모들은 마흔 번이나 퇴자를 놓았다. 이리하여 그때로서는 노총각의 신세가 되었다. 따라서 매파의 발길이 끊어지자 그의 부모들은 초조했다. 이럴 즈음에 중매가 들어와 선도 보지 않고 성혼을 시켰는데 장가를 들고 보니 절름발이였다. 그러나 신랑은 병신 아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아껴주었다.
이 즈음 강증산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가는 곳마다 참담한 민생을 보았고, 희망 없는 민중을 보았고, 꺼져가는 나라의 운수를 보았다. 그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많은 곳을 돌아보고 많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뒤 세상은 더욱 어지러웠고 민생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증산은 유불선 합일의 동학이 결국 그 한계에 다다랐다고 보았다. 그런 탓인지 증산은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뒤 고부 유생들이 이를 축하하는 시회를 벌이자 여기에 참석하기도 하였고 뒤에 친일단체 일진회가 결성되어 전주로 들어올 적에 전주 아전들이 이들과 일대 결전을 벌이려 하자 이들을 화해시키는 글로 이적을 보기도 했다.
참고 자료
김탁 저, 《증산 강일순》, 한국학술정보, 2006.
나상민 저, 《증산 강일순, 개벽을 말하다》, 지식공감, 2016.
나상민 저, 《증산 강일순과 동학》, 지식공감, 2016.
이이화 지음, 《한국인물사2》, 한길사, 1993.
조현규 저, 《한국의 윤리사상》, 중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