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희곡의 시대적 배경
- 최초 등록일
- 2013.10.07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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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그리스 희곡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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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가 말하는 희극이 아테네의 산물이며 현존하고 있는 작품은 고희극에서 신희극에 이르기까지 아테네 시민의 작품이므로 여기서 우선 아테네의 정치사를 개관해 두기로 한다. 무릇 문학은 그 문학을 낳은 사회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 중에도 그리스 희극은 그것을 낳은 폴리스의 정치사와 밀접하게 맺어져 있으며 거기에 큰 특색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 그리고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 때 동방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퇴하여 민족의 위기를 해쳐 나가는 데 가장 공이 컸던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에서 그 지위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때까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자인 스파르타가 그리스에서 제일가는 폴리스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으나 시대는 돌변하고 말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형식상 지휘권을 잡고 있떤 스파르타로서는 그 쇄국적인 국시로 보아 해외에서의 패권은 부자연스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살라미스에서 승리를 거둔 뒤 페르시아 해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에게 해 일대에 있는 폴리스가 형성한 방위 체제의 맹주의 지위가 스파르타에서 아테네로 옮겨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중 략>
희극이 아테네 인의 생활에 얼마나 밀접한 생활 양식이었는가 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평시와 마찬가지로 경연이 계속되었다는 것으로도 분명하다. 이 점에서 현존하는 고희극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는 특히 의미가 깊다. 이 작품은 기원전 405년 초 레나이아제에서 상연되어 1등을 차지하였는데, 당시의 아테네 성벽 한 걸음 바깥은 전쟁처녔다. 에우리피데스나 아가톤은 그 얼마 전에 아테네를 떠나 있었다. 아테네 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소포클레스는 그 전해에 천수를 다하고 사망하였다. 스파르타에 대한 무조건 ㅎ아복을 눈앞에 두고 지극한 궁핍 가운데서 극의 경연이 평소대로 행해지고 우승한 작품의 내용이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우열에 대한 문예학, 심미학적 문제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테네 시민의 정신적 여유에 감탄함과 동시에 연극에 대한 시민의 일반적 교양과 관심의 깊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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