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벤야멘타 하인학교』.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反 영웅적’ 이야기로,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다.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야기의 흐름, 깊고 예리한 문장들, ‘부’의 지배에 대한 섬뜩한 통찰 등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소설에 뚜렷한 현재성을 부여한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주인공 야콥은 귀족 가문 태생이지만 그의 인생 목표는 하인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부인하는 공간이며 황량함과 정적이 지배하는 곳인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입학한다. 근대 교양 이념을 거부하며 아무도 아닌 자로 살아가려하고 흠모했던 여 선생님이 병들어 죽고 급우들도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 뒤 자아실현을 위해서 유럽을 떠나 원장 선생과 함께 황야로 떠난다.
서구의 근대 담론에 대해 가장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성찰을 제기하기했고, 권력’의 구속력, 개인을 집단사고의 노예로 훈련시키는 매스미디어의 횡포, 규격에 맞는 삶 이외의 대안에 인색한 획일주의적 발전논리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소설은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1. 로베르트 발저의 생애와 작품 배경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생계를 위해 여러 도시를 떠돌며 엔지니어 조수, 은행원, 사서, 비서 같은 직업을 전전했다. 삶은 늘 고독과 불안, 망상으로 얼룩져 있었고, 결국 말년에는 정신병원에서 20년간 생활하게 된다. 작품 활동은 계속되었지만, 집필을 멈춘 채 산책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는 문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한 채 외로운 아웃사이더로 살았지만, 197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이 재조명되며 현재는 스위스의 국민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발저는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베냐민 같은 작가들은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발저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굵직한 사건도 없고,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구성은 평범한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매력이다. 인간 존재의 밑바닥, 사회의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 주류에서 밀려난 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글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발저는 전통적인 의미의 ‘성공’이나 ‘위대함’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인간의 나약함, 작음, 무력함 등에 주목했다. 주류의 가치관에서 보면 초라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 예컨대 하인의 삶, 무명의 삶, 성장하지 않는 삶을 소중히 바라보았다. 그는 작게 존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문학으로 표현했다.
‘새 학교에 입학한 귀족 가문의 소년’이라는 설정이 뿜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주인공인 ‘소년’이 아슬아슬한 모험을 거쳐 학교의 비밀을 밝혀낸다거나, 귄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찾는다거나, 혹은 우정과 사랑의 힘을 경험하며 사교계의 어른이 되어간다는 줄거리는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줄줄이 떠오른다. 나 역시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처음 펼치던 순간에는 비슷한 내용을 상상했었다. 거만한 귀족 자제인 주인공이 하인학교의 생활을 경험하며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과녁의 정반대 방향에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