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향가'는 '사뇌가'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신라부터 고려 초까지 불려지던 노래이다. 작품 형성의 시기로는 고대 가요에 해당하지만, 향가는 향찰이라고 하는 독특한 표기법으로 기록되어 한역되어 전하는 다른 고대 가요와는 구분된다.향찰이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으로 옛문헌 자료 중에 향가에서만 볼 수 있는 표기 방법이다. 대체로 실사(실질형태소) 부분에서는 한자의 뜻을 이용하여 표기하고, 허사(어미나 조사와 같은 형식형태소) 부분은 음을 빌려 표기하였다. 이는 고유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한 신라인들의 노력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그 표기 방법이 일반화 되지 못하였고, 향가라는 노랫말 기록이라는 제한된 목적으로 사용된 표기법이었기에, 서리들이 사용한 이두와는 달리 향가가 사라지면서 그 맥이 끊겼다.향가는 신라 진성여왕 때 '삼대목'이라는 책으로 집대성 되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지 않고, 다만 삼국유사에 신라의 작품 14수와 균여전에 균여가 지었다는 보현 십원가 11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향가의 향찰은 양주동에 의해 그 해독이 정립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하여 이제 그 해독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향찰에 표기된 것을 신라어에 조금이라도 근접하기 위해 양주동은 15세기의 표기법에 준하여 해독하였다.1. 향가의 명칭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의 명칭에는 '도솔가' '사뇌가' '향가' 등의 용례가 보인다. 이에 대하여 과거 오구라 신뻬이·양주동씨는 주로 어학적인 면에서 그리고 조윤제 교수는 주로 문학사적인 면에서 그 의의와 개념을 추구한 바 있었다. 이에 응당 이 3자의 문헌상 용례와 그것을 밝혀낸 선배들의 소설을 일일이 열거하여 그 시비를 가려내는 것이 옳을 것이나 이미 학계에서 상당히 많은 이들이 논란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번거로운 논의를 생략하려 한다.첫째, '도솔가'는 전장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고대 시가 중에서 종교적인 요소가 표백되고 순연한 서정적인 가요로 성립된 일련의 시가를 이름시가 형태들은 필연적으로 도태되거나 혹은 이 패션에 융합되어야 할 것이니, '향가의 전형적인 형식은 10구체로, 주동적인 작가는 승려로, 지배적인 내용은 불교적인 것으로' 라는 단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패션을 하나의 장르로 설정하는 데서 주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향가를 대표하는 시형으로 우리는 사뇌가 장르를 정립시켜 마땅하리라고 본다.4. 향가의 형식그러면 이외 같은 사뇌가적 장르의 형성 과정은 여하한 경로를 밟아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득한 옛날 원시적인 미분화 종합 예술체 가운데서 배태된 국문학의 시원은 원시적인 서사문학기에 들어서자, 독자적인 문학으로 분화하여 구비적인 방법으로 유동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개임과 사회를 통일·단합시키는 기능을 발휘하였겠고 그 향유 방법은 항상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각국의 건국 신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상신의 신성화, 또는 『삼국사기』열전에서 보이는 바 『해론가』『양산가』라든지, 『삼국유사』에 전하는 『물계자가』를 비롯한 영웅들의 영용한 행동들을 찬양하는 이른바 무용담들이었을 것이다.그러다가 원시적 서사문학의 내용은 점차로 인지가 발달하고 그 감정이 순화함에 다라 개성의 각성을 보게 되고 과거에는 초인간적이요, 또한 영웅적인 데서, 인간적이고 범인적인 내용으로 변화하였겠고, 그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도 전에는 객관적인 서술 묘사를 주로 하였던 것이, 주관적인 전달 호소의 방법으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변천하는 가운데 장편적인 서사시의 일부분이었던 서정적인 요소가 서사시에서 분화하였거나, 종교적인 요소가 표백되어 도솔가와 같은 새로운 시형이 이룩되었을 것이다.그 형식은 현존하는 한역시나 일부의 향가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4구체 혹은 6구체라는 단형적인 서정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립한 서정형은 인간의 감정이 점점 복잡하여짐에 따라 차차 장형화하려는 경향을 이루어, 삼국 통일기에 들어서자, 과거에 4구체·6구체·8구체·10구체 사이를 이러한 사뇌가 장르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는 어떠한 부류의 작가들이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는가를 살피기로 하였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선배들이 전래 문헌의 편파성을 고려하고, 또 현전하는 향가의 작가들이 불승을 비롯하여 낭도·촌녀·견우노인 등 널리 편재해 있는 사실로 미루어 그 범위를 넓게 잡는 데에 의견들이 일치되어 왔었다. 과연 전게한 통계표에 의하여서도 우리는 향가 작가를 넓은 테두리에서 찾을 수 있을 듯이도 생각된다.그러나 좀더 세밀히 고찰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 할 것이다. 즉 승려의 작품 18수를 필두로 하여, 승려와 가장 긴밀한 유대로 연결되어 있던 낭도의 작품이 3수, 그리고 여류의 작품 1수는 독실한 불교 신도의 작품이었으니, 이러한 작품을 종합하여 보면 현존하는 향가 25수 중실로 22수가 불교에 관련된 사람, 또는 그러한 고도한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고급 문화인에 의하여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세를 풍미하던 당대의 이름 높은 향가 시이들은 대부분 월명사, 충담사, 융천사, 석 영재, 균여대사와 같은 고승들이었음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이처럼 향가의 작가는 결단코 광범위한 데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려 또는 화랑도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문화층에 속하는 극히 국한된 부류만이 향가의 작가일 수 있다는 결론을 지어 마땅하리라고 본다.더욱이 고문헌의 전하는 바 비록 전래 문헌의 편파성을 충분히 시인한다손 치더라도 역시 향가의 작가는 당시의 귀족 문화층이라 보는 편이 좀더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하는 바이다.6. 향가의 내용과 수사적 특성그러면 이러한 내용을 갖고 있는 향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사적인 기교를 필요로 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향가의 수사적(修辭的) 특성을 살펴보면, 《사뇌가》는 발원의 성취라는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도 수사적인 기교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예컨대, 월명사의 《제망매가》에 작자의 골육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에 전해오는 신라시대 향가의 작자층이 승려·낭도·부녀자·신료·노옹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앞에서 인용한 대목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월명사·충담사·영재 등은 이른바 '선향가자(향가를 잘하는 사람)'들로서 그 이름이 신라 당시 상하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었음이 고문헌을 통해 밝혀졌는데 이로 보아 전문적인 작자층까지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는가 헤아려 볼 수 있다.『삼국유사』에 실린 열네 수 작품만을 놓고 살펴보면, 향가의 전성기는 아마도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 그 중에서도 30대 문무왕 때로부터 38대 원성왕 때에 이르기까지 약 백 여 년 간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그렇게 판단 할 수 있는 근거는 이 기간 중에 현전 작품 중 사분의 삼 정도가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기세를 떨친 향가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서 마침내 신라 말기인 51대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이 편찬되기에 이른다. 『삼국사기』 진성여왕 2년조에 보면 왕명에 따라 각간인 위홍과 대구화상에 의해서 그때까지 전해 오는 향가들을 모아 편수했다는 기록이 엿보인다. 왕의 측근 인물들이 왕의 명을 받들어 향가집을 엮었다는 사실은 향가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반증해 주는 동시에, 책으로 편찬해낼 정도로 많은 수의 향가가 그 당시까지 쌓여 있었음을 말해 주는 자료가 된다. 이렇게 문학사적으로 귀중한 향가집이 전해 오지 않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나말여초의 승려인 균여대사는 향가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지은 「보현십원가」 열한 수는 개인의 작품으로는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그 한 대목을 노래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적인 독창성은 결여되어 있으나 표현기법에서는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균여의 향가는 세상에 전파되어서 담이나 벽에도 적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에 의해 불려진 노래였다. 뿐만 아니라 번역하여 중국에까지 전파시켜 저들이 이를 보고 균여를 높아, 이 몸 남겨두고四十八大願 일고샬까 48 큰 소원 이루실까제 30대 문무왕대의 **인 **이 지은 「원왕생가」다. 미타신앙에 바탕을 두고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불가임에 틀림없다. 이건 사실은 『삼국유사』의 관계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러나 각도를 달리해서 음미할 때, 「원왕생가」는 전반적인 흐름과 성행에서 어김없는 순수 서정시의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바가 서정방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냄에 있어서 그는 불교의 교리를 조화하거나 이념의 언어로 채색하지 않았다.아미타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피하고 달을 통해 간접 청원하고 있는 발상부터가 종교시의 엄격성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고, 무엇보다도 노래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넋두리 體의 하소연은 이 노래가 서정시 본래의 자유스런 정서의 流露에 바탕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원왕생가」는 교리와 신앙을 개념화하지 않은 청순한 시로서 남는다.화랑을 찬모한 노래에는「讚耆婆郞歌」와 「慕竹旨郞歌」가 있다. 그 중에서 문학적인 성취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전자를 살펴보기로 한다.咽嗚爾處米 열치매露曉邪隱月羅理 나타난 달이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흰 구름 좇아 떠 가는 것 아니야?沙是八陵隱汀理也中 새파란 나리에耆郞矣□史是史藪邪 기랑(耆郞)의 모습이 있어라.逸鳥川理叱□惡希 일로 나리 조약에郞也持以支如賜鳥隱 낭(郎) 지니시던心未際叱□逐內良齊 마음의 끝을 좇누아져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아, 잣가지 높아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서리 모르시올 화반(花判)이여35대 경덕왕대에 ***인 ***는 절절한 심정으로 기파랑을 기리고 있다. 기파랑의 존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화자는 '달'과 '서리 모르올 잣가지'를 원용하였고, 이에 비해 너무도 하찮은 자신의 존재는 '냇물의 조약돌'에 견주고 있다. 대칭과 상극의 비유를 통해서 드러나는 기파랑의 모습은 文士的이고 求道者的으로 형상화되어 있다.이런 구도와 시적인 발상에서 출발한 이 찬양의 시는 시종 작가의 감정 이입되면서 진행된다. 걸 노래
7.근대산문1. 개화기 ∼ 1910년대의 소설@시대배경개화기 문학은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동시에 이루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출발하 였다. 다시 말해서, 이 시기의 문학은 내적으로는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근대적 질서로 나아가야 하며, 외적으로는 밀려드는 서양 세력 앞에서 자주 독립을 달성해야 하는 절대 절명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개화기 문학은 무엇보다도 국민을 깨우치고 이끌어 주는 계몽주의적인 속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특 징(1) 신소설의 등장신소설은 개화기에 등장한 소설 장르로, 당시의 독서 대중의 확대와 출판 기술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나타난 대중적인 소설이었다. 신소설은 전기(傳記)식의 고전 소설에서 벗어나 사건 중심적이고 묘사성을 지닌 소설로 발전하여 근대 소설로 이어지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다. 이러한 신소설은 내용에 있어서도 유교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신교육 강조, 자유 결혼관 주장, 신문명 도입 강조, 신여성관, 근대적 민주 사상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소설은 친일적인 성격도 매우 짙었다.@주요 작가와 작품이인직:'혈의 누', '모란봉', 귀의 성' 치악산', '은세계' 등이해조:'자유종', '화의 혈', 고목화' 등최찬식:'추월색', '안의 성', '춘몽' 등안국선:'금수회의록', '공진회' 등(2) 근대 소설의 등장 ― 이광수의 '무정'1910년대는 근대 문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시가 문학에서는 신체시가 나타나 정형성의 틀을 깨어 나가고 있는 때에, 소설 문학에서는 1917년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됨으로써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렸던 것이다. 이것은 개화기 문학이 본격적인 근대 문학으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징표였다.2. 3.1운동 무렵 ∼ 1920년대의 소설@시대 개관1920년대의 소설은 이광수를 극복하고자 한 김동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의 소설은 초기의 사실주의적 경향과 카프가 결성된 이후의 계급주근대 소설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3인칭 시점과 과거 시제의 사용 등을 통해 근대 소설의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시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분명히 이광수로 대표되는 과거의 소설에서 한 단계 발전된 것이었다. 또 김동인은 간결하고 개성적인 문체를 통해 단편 소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 이와 함께 현진건이나 염상섭 등에 의해 시도된 사실주의적인 소설은 주로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작품화되면서 1920년대 소설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을 통해 완전한 언문일치체가 이루어지고, 사실주의적 수법이 자리잡으면서 치밀한 묘사를 통한 사실감의 확보, 인상적인 결말 처리 등으로 완전한 근대 소설이 정착되었다. 김동인의 소설이 무대(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위에서 조종되는 인형의 모습을 그리는 듯하다면, 이들의 사실주의 소설은 있는 세계(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사실대로 그리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들은 이러한 사실주의를 통해 당대의 사회 현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얻은 소재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궁핍화 현상과 조선의 서민 계층의 뿌리뽑힘에 대해 예리하고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주요 작가와 작품김동인:'감자', '배따라기', '태형' '목숨' 등염상섭:'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만세 전' 등현진건:'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2) 계급주의 소설의 등장카프가 결성되면서 소설에서도 계급주의를 표방한 작품이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카프의 활동은 주로 비평 분야에서 이루어졌지만, 문학 작품 창작의 경우 시보다는 소설이 더 앞섰다. 이들이 보여주는 소설 세계는 식민지적 현실 아래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빈궁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하층민의 가난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였다. 즉 식민지 수탈 정책 때문에 피폐해진 조선 농촌의 실상이나, 그 결과 양산된 도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존 문제를 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식민고취하기 위해서 문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문학을 정치적 선동과 선전의 도구로 취급하고, 계급 투쟁을 위해 사회에 대한 적의와 살인, 방화, 약탈 등 극단적인 해결 방법을 선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학의 황폐화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의해 우리 나라 민중의 삶이 문학의 중요한 소재로 부각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들이 표현해 내고 있는 당대의 소외된 계층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최서해나 조명희, 이무영 등이 보여 주는 농민들의 참상이다. 일제 수탈의 구체적인 현장은 농촌이었고, 그것은 곧 농촌 경제의 파괴를 가져와 당시의 농민들은 더 이상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유랑하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피폐해진 농촌과, 토지를 잃고 간도나 만주로 떠도는 유랑민들의 삶을 그려 내었다. 이와 함께 주요섭, 박영희 등은 당시의 또다른 소외 계층인 도시 노동자의 삶을 다루었다.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도시 노동자들을 주로 다룸으로써 당시의 식민지적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민중들을 부각시켰던 것이다.@주요 작가와 작품주요섭:'인력거꾼', '살인' 등최서해:'탈출기', '홈염',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륙' 등박영희:'사냥개', '철야', '지옥 순례' 등3. 1930년대의 소설@시대 개관1930년대는 무엇보다 소설의 장편화 경향이 두드러져, 단편 소설 중심의 1920년대와는 달리 장편 소설 중심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1930년대 소설은 먼저 세태 소설이나 풍자 소설 등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지식인 소설, 농촌을 배경으로 한 농민 소설, 소재를 역사로부터 끌어 온 역사 소설,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족들의 변천을 다룬 가족사 소설 등이 많이 발표되었으며, 이와 함께 토속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소설이 창작되기도 했다.@특 징(1) 모더니즘과 지식인 소설이 시기에는 현대 도시 문명이 지닌 병적인 징후와 도시가 지닌 세태를 제시하고 관찰하며 비판하는 모더니즘 소설이 충실하였다.@주요 작가와 작품이 상:'날개', '봉별기', '종생기', '지주회시' 등박태원:'소설가 구보씨의 1일', '천변 풍경' 등채만식:'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탁류', '인테리와 빈대떡' 등(2) 농민 문학의 대두와 농민 소설일제 시대의 농촌은 일본 제국주의의 일차적인 수탈 대상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수탈이 극에 이른 1930년대의 우리 농촌은 빈곤과 식민지적 모순의 구체적인 현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농촌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31년 주도로 시작된 '브나로드' 운동 때문이었다. 당시 민족 운동의 일환이었던 '실력 양성 운동'이 농촌 계몽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이 '브나로드' 운동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을 담은 농촌 계몽 소설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들 소설은 주로 지식인들이 농촌에 들어가 은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감으로써 실감 있는 농촌 문제를 담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계열의 소설에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가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민족 운동의 계몽성이나 사회주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농촌 사회와 궁핍하고 고통스런 농민의 생활 실상과 형태를 사실적으로 다룬 농민 소설들이 있다. 김 유정은 '봄봄', 동백꽃' 등을 통해 농촌을 배경으로 한 향토적 서정미가 넘치는 문학 세계를 보여 줌과 동시에, '소낙비' 등의 작품을 통해 농촌의 궁핍한 현실과 절망적인 침체상을 그리고 있는 박영준의 소설, 병든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회귀하는 이무영의 작품 등이 있다.@주요 작가와 작품이광수:'흙'심 훈:'상록수' 등김유정:'봄봄', '동백꽃', '소낙비', '금따는 콩밭', '만무방', '노다지' 등이무영:'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농민' 등(3) 역사 소설의 발흥1930년대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작가들의 내적인 고민이 점증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는 작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들을 제공했다. 이처럼 역사에서 얻은 소 있다. 이러한 작품에는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태평천하', 이기영의 '고향' 등이 대표적이다.@주요 작가와 작품이광수;'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이차돈의 사(死)' 등김동인:'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대수양' 등박종화:'금삼의 피', '다정불심' 등현진건:'무영탑', '선화공주' 등(4) 김동리의 토속적 신비주의이러한 일련의 작품 이외에 토속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의 소설로 독자적인 지평을 열어간 작가로 김동리의 소설로, '무녀도', '바위', '을화', '황토기' 등을 들 수 있다.4. 해방 공간의 소설@시대 개관해방 공간 소설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귀향과 식민지적 의식의 극복이었다. 이것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맞물리면서 민족성 회복이라는 중요한 과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분단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많은 소설들이 창작되었고,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을 그린 소설들도 다수 창작되었다.@특 징(1) 식민지적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반성적 소설일제 말기 문인들의 친일 경력이 문제가 되면서 이러한 경력에 대한 자기 반성과 사회적 반성을 촉구하는 많은 소설들이 창작되었다. 식민지 치하의 생활이나 체험을 뉘우치거나 속죄의 관점에서 쓴 이러한 소설들은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싶은 심정에서 쓴 소설들이었다.@주요 작가와 작품이광수;'도산 안창호'김동인:'반역자', '망국인기(亡國人記)' 등채만식:'민족의 죄인', '논 이야기' 등(2) 해방 전후의 조국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소설은 구체적 시대 상황을 담아 내기가 시보다 훨씬 용이하다. 이러한 장점을 이용하여 해방 전후의 시대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이러한 소설에는 귀향 의식을 다루기도 하고, 당시의 사회 현실 속에서 변해 가는 인간 군상들을 비판적인 안목에서 그리는 작품들도 있었으며, 분단 의식을 형상화한 작품들도 있었다.@주요 작가와 작품(귀향 의식) 김동리:'혈거부족', 정비석 '귀향', 엄흥섭 '귀향일지' 등(사회 비판)김영수 '혈맥', 있다.
1. 옥스퍼드의 설립초기옥스퍼드 대학은 런던 북북서 80km지역에 있는 설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2세기초에 헨리 2세가 템스강 상류(옥스퍼드 사랍들은 아이시스 강이라고 부름)의 옥스퍼드에 설립한 영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종합대학교이며, 영국 최고의 대학이다. 옥스퍼드 학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초엽이다. 12세기에 헨리2세가 옥스퍼드에 산재해 있던 학교들을 통합하여 세운 것으로 캠브리지 대학과 함께 영국을 상징하는 전통있는 대학이다. 1167년 파리대학교에서 영국 학생들의 입학을 불허하자 12세기 말에 대학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249년에 최초로 학료를 설립, 대륙에서 번영하던 파리대학을 모방하여 조직하였다. 대학 설립 초기에는 학생과 시민간에 충돌이 있은 다음해에 에드워드3세가 학생편을 지지하여 그들에게 특허장을 줌으로써 대학의 권위가 견고해졌다. 1133년 파리대학에서 신학자 R.뷜랑이 초빙되어 강의한 것을 대학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68년 무렵, 파리대학을 빠져나온 영국인 학생들이 귀국해서 이곳에 옮겨올는 한편, 헨리2세의 칙령으로 해외유학이 금지된 학생들도 여기에 들어오면서 대학의 기초가 더욱 확고해졌다. 12세기 말 대학은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통의 학위인정권을 취득하였고, 13세기 초에는 로서 파리대학 다음가는 지위를 부여 받았다.2. 소르본느 대학의 설립초기소르본느 대학(파리대학)은 1170년경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전형적인 유럽의 대학교이며, 프랑스의 국립종합대학이다. 프랑스의 모든 대학이 그렇듯이 73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소르본느 대학도 공립이다. 소르본느 대학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학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른 중세기 대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교수와 학생들의 조합이었다. 1180년 루이 7세의 인가를 받았으나 1215년에 로마 교황이 자치권을 인정함으로써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통칭 소르본 대학이라 부르는 것은 57년 신학자 소르본이 신학생을 위하여 설치한 기숙사를 중심으로 파리대학이 발전하였e를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남녀공학을 허용하게 된 college가 많아졌다. 17세기 전반 총장에 취임한 대주교 W.로드는 학위시험제도를 개정하고 제복을 정하였으며, 다수의 교수직 신설과 함께 대학 출판부를 창립하는 등 대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산업혁명 뒤에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대학의 기구 개편은 19세기 후반 이후 진전을 보였고 1877년에는 자연과학부분의 충실을 도모 하였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은 35개의 college와 5개의 홀 그리고 여러 교육시설 및 부대시설이 런던 교외 옥스퍼드시에 있다. 각 college(단과대학)는 독립된 건물과 조직기구를 가지고 독자족으로 학장과 교수들을 선임하며 또한 학생선발도 독자적으로 하고 있는데 학생의 생활과 학습등의 지도·감독에 최우선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대학 전체를 나타내는 유니버시티는 이들 college의 연합체이며, 실험실, 도서관, 미숙관, 강당 등의 공동시설을 갖춤과 동시에 입학의 최저수준과 교육과정의 여러 조건을 정하며 학생 전체 시험을 실시하여 학위를 수여한다. 이들 독립된 college를 공통의 교육 과정에 바탕을 두고 연결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이 교수들의 전문 분야별 조직체인 18개의 패컬티(학부과정)이다. 따라서 유니버시티가 제공하는 강의를 듣고 공통의 설비와 시설을 이용하여 학생이 소속된 college의 교수님들로부터 이와 같은 긴밀한 개인지도제는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에서 발달한 영국대학교육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이다. 19세기에 학생과 교수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1878년 옥스퍼드 최초의 여자대학인 레이디마거릿홀이 세워졌으며, 1920년부터 여자의 입학이 전면적으로 허용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유니버시티, 밸리얼, 머턴의 3개 단과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300-1555년 사이에 12개의 단과대학을 설립하였고 1571년 법령에 의해 이들 단과대학을 통합했다. 이 대학은 연합체계(college)과 5개의 연구사립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학부생의 경우 일단 단과대학에서 입학어가기 위해선 고등학교 졸업시험에서 탁월한 성적을 얻어야만 가능하다.상위 4%안에 드는 최우수 성적의 학생들이 2년동안 그야말로 죽도록 공부한 뒤 그랑제콜별로 치르는 선발시험을 거쳐야 한다.이중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40명을 선발하고 있다.준비반 2년과정을 거친 뒤 그랑제콜시험에 낙방한 학생들은 재수가 허용되지 않는다.재미있는 것은 이들 낙방생은 원하는 일반대학 어디나 3학년(졸업반) 과정으로 곧바로 편입할 수 있다.그랑제콜과 일반대학의 수준차와 사회적 인식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만 합격하면 진학할 수 있는 일반대학과 달리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려운 입학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워낙 시험이 어렵기 때문에 바칼로레아 취득 후 1∼2년간 그랑제콜 준비반(프레파)에서 시험준비를 해야 한다. 프레파 입학도 만만치 않아 바칼로레아에 합격해야 하는 것은 물론 고교 성적이 전교 상위권 5% 이내에 들어야 한다. 결국 수재 중의 수재만이 그랑제콜 학생이 되는 것이다.각 분야 최고의 전문인력양성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랑제콜의 수업은 이론강의보다는 세미나와 현장실습 위주로 진행된다. ENA의 경우 교육기간 2년 중 정부부처 실무수습이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수업도 △법안과 예산안 △사회 현안과 관련된 설문조사 △정부에서 선정한 과제에 대한 보고서 작성 등 실무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랑제콜 출신들이 졸업하자마자 일선 현장에서 능숙하게 일처리를 해낼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이같은 독특한 교육제도 덕분이다. 그랑제콜 졸업자와는 달리 대학 졸업자는 취직이 잘 안되어서 학생들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강제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 입학율이 낮다. 학생들은 학업과 취직이라는 두가지의 고민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대학의 입학금은 누구나 공부할 수 있게 약 3만원 정도이고 학생식당도 국가가 지원해 주기 때문에 싼 값에 밥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입학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졸업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그만큼 많은 노력이 있어 학교를 분권화하고 학생들을 대학 행정에 보다 많아 참여시킨 교육개혁이 일어났다. 이것의 결과로 1968년 프랑스의 고등교육법이 재정, 시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파리 대학교 및 파리 지역의 대학들이 파리제1대학교, 제2대학교 등의 13개의 국립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가대학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파리제1대학교: 파리 대학은그 기원을 11세기의 주교들의 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 이들 대학과 단과대의 조직은 13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정착되었다. 프랑스 지성과 정치생활의 중심이 되어 온 파리 대학교는 그 후에도 많은 혼란을 겪었다. 파리 대학교를 모체로 해, 1971년 국립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파리 팡테옹 광장에 있다. 문학, 예술, 인문과학, 법학, 경상 계열의 예술학과, 철학과, 노동사회학 연구소, 지리학과, 역사학과, 파리 인구통계 연구소, 미술사 및 고고학과, 도시 연구 대학 센터, 평생 됴육 센터, 등 23개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파리제2대학교: 파리 대학교를 모체로 해 1970년에 국립대학교로 설립되었으며 파리 팡테옹 광장에 있다. 문학, 예술, 인문과학, 법학, 경상계열의 9개 학과가 있으며 특히 법학, 경제학, 사회과학 학과가 유명하다.●파리제3대학교: 파리 대학교를 모체로 해 1970년 국립대학교로 재정비 되었으며, 파리 소르본가에 있다. 문학, 예술, 인문과학계열, 체육학계열의 17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언어와 문학계열 학과가 우세하다.●파리제4대학교: 파리 대학교를 모체로 해 1970년 12월 13일 법령에 의해 개편되었고 1984년 7월 17일 법령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파리 빅토르투쟁가에 있다. 27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 예술, 인문과학, 체육학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파리제5대학교: 12세기 줄반 파리에 있었던 의학 및 인문과학 학교(Ecoles)을 모체로 해 1970년 법령에 의해 국립대학교로 개편 되었으며 파리 에콜드메신가에 있다. 17개의 과로 구성 되어있으며 문학, 예술, 인문과학계열, 보건학, 로 한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근대적 학과목도 추가하여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여자를 위한 학교도 설립하였다. 13세기에 옥스퍼드에 도미니쿠스회와 프란체스코회 같은 여러 수도회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옥스퍼드 대학교는 신학 부분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대학건물이 없어 교회난 홀을 빌려서 강의를 했다. 초기 옥스퍼드 대학교의 명성은 신학 및 교양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파리 대학교 보다 더 깊이 물리학을 다루기 시작했다. 로저 베이컨은 파리를 떠난 뒤 1247-57년에 옥스퍼드에서 과학적인 실험과 강의를 했다. 그는 13-14세기에 이 대학교 내에서 영향력이 지대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한사람 이었다. 16세기 교수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과학연구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 되었다. 문예 부흥기 에는 에라스무스가 새로은 교육을 도입했으며, 그때부터 전통적으로 고전, 신학, 정치적 분야에서 최고의 학문과 교육을 자랑하게 되었다.교육방법은 "옥스포드는 교수와 학생간의 개인지도 (Tutorial) 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방법을 통해 학생들에게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능력을 키워주고 있다. 또한 학생이 교수와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인격적인 훈련을 쌓고 있다."장:대학 총회에서 임명하는 종신제로 뽑힌다.이사회:관리직원과 교직원으로 구성대학의 입법과 행정권 관장한다.6. 소르본느 대학의 교육 과정&방법대학은 바깔로레아 (baccalaureat) 시험에 합격하면, 연령 제한 없이 학생의 희망에 따라 학과, 학교 등을 마음대로 선택하며 서류전형 (♠ 외국학생들의 편입학의 경우 전형방법이 다양함)을 통하여 입학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육은 연속적인 3기 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과정을 졸업하면 국가학위 혹은 대학학위가 수여된다.♠ 특별전형 : 바깔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도 특별 전형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즉, DAEU 과정은, 다음의 조건에 해당하고 적어도 2년간 학업을 중단했으나 대학에서 학업을 다.
소르본느(Sorbonne)소르본느 건물은 가운데 네모단 마당이 있고 ㅁ자 모양으로 네 개의 건물이 어깨를 마주대 고 있다. 미국식의 커다란 캠퍼스가 아니고 ㅁ자 모양의 건물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프랑스 교육의 자존심이며 산 증인이다. 마당 한쪽에 빅톨 위고의 동상이 있으며, 현재 파 리 1대학, 2대학, 3대학, 4대학이 건물을 나눠 쓰고 있다.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그랬듯이 파리 대학 중소르본느 대학은 대혁명 전까지는 국가속 의 국가라고 할만큼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소르본느 대학은 1253년황제의 고해 신부였 던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에 의하여 신학교로서 창립되었다. 대학 도서 관에는 약 100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으며 유럽 최대의 대학이라는 명성에 맞게 학생수 만도 20만명에 이른다.생루이 (St Louis)의 고해신부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 (Robert de Sorbon)은 1253년에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대학을 설립하였고, 당시의 교황이 이 단체의 설립을 허가함으로써 후에 파리대학 (UNIVERSITE DE PARIS)이 되었다. 이 당시의 학생들의 생활은 변증법, 천문학, 문법, 수사학 그리고 산술학 등의 강의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으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진행되는 매우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 당시에 학생들이 공부하였던 건물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오늘날 소르본 광장(Place de la Sorbonne)에서 볼 수 있는 예배당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리슐리웨 (Richelieu) 추기경이 1622년 8월에 소르본 대학의 교장으로 선출되고 난후 건물의 재건축을 결정하면서, 1627년 3월 28일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소르본 예배당 (La chapelle de la Sorbonne)은 1635년에 완공되었고, 1642년에 사망한 리슐리웨의 무덤이 있다. 1883년에 현재의 소르본 대학이 재건축되었고, 대강당, 강의실, 2백만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 천문대 등에는 PARIS 8대학으로 되었다. 그리고 1980년 SAINT-DENIS로 옮겨졌다. 9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 예술, 인문과학, 법학, 경상계열, 이공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9. UNIVERSITE PARIS DAUPHINE (파리 제9대학)6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학, 경상계열, 이공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10. UNIVERSITE DE L'OUEST PARISIEN (파리 제10대학)어려운 초창기를 거쳐 현재 법대, 경상대, 인문과학대로 나뉘어져 있고, 11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 예술, 인문과학, 법학, 경상계열, 체육학 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11. UNIVERSITE DE PARIS-SUD (파리11대학)9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학, 경상계열, 이공계열, 의약계열, 체육학 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12. UNIVERSITE DE PARIS VAL-DE-MARNE (파리 제 12대학)11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계열, 예술, 인문과학 계열, 법학, 경상계열, 이공계열, 의학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13. UNIVERSITE PARIS NORD-VILLETANEUSE (파리 제13대학)7개의 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계열, 예술 및 인문과학계열, 법학, 경상계열, 이공계열, 의학 및 보건학 계열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대학의 교육과정대학은 바깔로레아 (baccalaureat) 시험에 합격하면, 연령 제한 없이 학생의 희망에 따라 학과, 학교 등을 마음대로 선택하며 서류전형 (♠ 외국학생들의 편입학의 경우 전형방법이 다양함)을 통하여 입학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교육은 연속적인 3기 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과정을 졸업하면 국가학위 혹은 대학학위가 수여된다 :♠ 특별전형 : 바깔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도 특별 전형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 즉, DAEU 과정은, 다음의 조건에 해당하고 적어도 2년간 학업을 중단했으나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구제간의 1/3은 현장 실습이고 2개 외국어가 필수이다. IUP 1학년 입학 자격은 DEUG나 CPGE의 1년 과정을 마쳤거나 혹은 BAC + 1 (♠ 바깔로레아 합격 후 1년간의 고등교육)을 받았어야 한다. 따라서, IUP에서 1학년을 마치면 DEUP, 2학년은 LICENCE, 3학년을 졸업하면 MAITRISE 학위와 엔지니어-교사 자격을 얻게 된다프랑스에만 있는 고급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 학교로, 인문계, 자연계 구분없이 전 분야에 걸쳐 공, 사립 학교가 전국에 수백 군데 분산되어 있다. 대학과 그랑제콜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지원 자격, 선발 방법, 재학 연한, 교육 방법 및 졸업 후의 역할 등을 들 수 있다.일반 대학은 대학 입학 자격 시펌(바칼로레아)만으로 무시험 진학하는 데 비해, 그랑제콜은 경쟁 시험을 거쳐야만 입학이 허용된다. 또한 선발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대학 입학 자격 시험 합격 후 1-2년간의 시험 준비 과정을 필히 이수해야 한다. 이 준비 과정은 주로 고등학교에 설치된 그랑 제콜 준비반인 CPGE에서 이루어진다.관공서나 각 기업체의 고급 간부 및 엔지니어 양성을 위주로 하는 이 학교들은 졸업 후 중역급으로서의 사회 진출을 보장하고 있으며, 수업 기간은 학교에 따라 10개월에서 4년까지 다양하다.학비는 국립 특수 학교 일부에서는 학생들에게 '월급'까지 주며 공부를 시키는가 하면, 사립 학교의 경우 연간 수천, 수만 프랑의 학비가 소요되는 등 큰 차이가 난다.외국인은 아주 특수한 고급 행정 간부 학교에 청강생 자격으로 수업에 참석할 수 있고 대부분의 학교에는 프랑스 학생과 동등한 자격으로 입학 시험과 서류 전형을 통해 입학하게 된다.참고할 점은 이들 학교의 졸업 학위는 일반 대학의 석, 박사 학위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입학과 수업 과정이 정예 위주인 만큼 외국인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열려져 있다.전 세계에서 프랑스에만 존재하는 교육 제도로서, 전문직의 고급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실시되는 국, 공, 사립의기말엔 학우들 강의노트를 빌려다가 리포트를 제출하는 것으로 한 학기를 때우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입학당시 결정한 전공을 재학중 바꾸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정씨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도 못할 나이에 선택한 전공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게 가혹하다”며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접한 뒤 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이런 대학들과 달리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치는 소수의 귀족적인 학교들이 일부 있다.그랑제콜(Grand Ecole)이라고 통칭되는 이 학교들은 프랑스 엘리트 양성의 산실이다.대통령부터 국회의장,대법원장,은행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고위관료,저명한 학자 등도 대부분 그랑제콜 출신이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그랑제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국립행정학교(행정관료)와 파리고등사범학교(학자),폴리테크닉(군사관료 및 기술자) 등 3개이다.입학즉시 그랑제콜 학생들은 전원 공무원 신분을 부여받으면서 급료를 받는다.학비를 따로 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졸업후 진로는 약간씩 다르지만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분야에서 최고지위까지 오르도록 보장돼 있다.학사운영도 특이해서 학교에서 별도의 학위를 주지 않고 다른 일반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든지 연구소에 들어가서 개인적인 공부를 하든지 마음대로다.국가는 그랑제콜 출신들을 평생 관리한다.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랑제콜 준비반을 2년동안 거쳐야 한다.일부 고등학교에만 설치가 허용된 이 준비반에 들어가기 위해선 고등학교 졸업시험에서 탁월한 성적을 얻어야만 가능하다.상위 4%안에 드는 최우수 성적의 학생들이 2년동안 그야말로 죽도록 공부한 뒤 그랑제콜별로 치르는 선발시험을 거쳐야 한다.이중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40명을 선발하고 있다.준비반 2년과정을 거친 뒤 그랑제콜시험에 낙방한 학생들은 재수가 허용되지 않는다.재미있는 것은 이들 낙방생은 원하는 일반대학 어디나 3학년(졸업반) 과정으로 곧바로 편입할 수 있다.그랑제콜과 일반대학의 수준차와논문(MEMOIRE)을 작성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전공할 분야와 연구방향의 윤곽이 잡힌 후 그 방향에 가장 적합한 교수를 선택하여 면담 후 연구지도의 허가를 받게 된다. 인문, 사회계열의 석사과정은 수업과 논문으로 이루어 지며 학점을 모두 이수한 학생은 약 100-150페이지 가량의 논문을 제출하여 심사를 받아야 학위를 취득할 수가 있다.- 인문, 사회계열 외에 이공계와 경영계통에는 LECENCE와 MAITRISE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DEUG 이후 2년간의 과정을 마치면 다음의 석사학위를 주고 있다.MST (MAITRISE DE SCIENCES ET DE TECHNIQUES) - 과학, 기술 석사MSG (MAITRISE DE SCIENCES DE GESTION) - 경영학 석사MIAGE (MAITRISE DE METHODES INFORMATIQUES APPLIQUES A LAGESTION) - 경영정보처리학 석사제3기 과정 (3EME CYCLE) : 연구과정고급 전문과정, 연구자 양성과정, 한국의 대학원 과정과 같다. 각종 박사(DOCTORATS) 및 그 밖의 학위취득을 목적으로 한다. 이 과정은 석사 수준의 제2기 과정 학위를 가진 학생으로서 지도교수가 연구지도를 수락한 학생만이 등록할 수 있다.- D.E.S.S. (DIPLOMES D’ETUDES SUPERIEURE SPECIALISE)1974년 4월 16일자 법령에 의해 만들어진 학위인데, 고도의 전문기술의 응용과정으로서 생활에 응용되는 교육을 한다. 특정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기술의 습득을 목적으로 한다. 제2기 과정의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만이 입학자격이 있으며 수업연한은1년이다.- D.E.A. (DIPLOME D’ETUDES APPROFONDIES)전문분야 연구에의 입문과정으로 수업연한은 1년 내지 2년. 박사 예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역시 지도교수의 승인이 있어야 등록할 수 있다. 제3기 박사 폐지후 통합 박사과정이 실시됨에 따라 D.E.A.과정도 많이 강화되어 예전처이다.
♧중세의 대학 도서관♧1) 중세 도서관의 유형과 특징고대로부터 계승되어 오던 사원도서관이나 궁전 도서관 그리고 회교의 이슬람 도서관들은 고대의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구실을 했고 중세의 수도원 도서관은 주로 신학 분야의 문헌을 복사-수집하였고 세속적인 작품과 문헌은 부수적으로 취급하였다. 모슬렘의 도서관은 그 활동의 폭이 넓고 다양해서 과학분야에 있어서 희랍 시대의 과학을 한층 더 발달시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자료 제공 이용이란 면에 있어서는 역시 폐쇄적인 보존 위주의 운영을 해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성당에 부설되어 있는 학교들은 그들의 도서관을, 전통적인 문화 유산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널리 이용시키는 데 있어서 진일보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일반 대중들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도서관이 좀더 보편화되고 이용이라는 절대 명제를 구현하기 위하여 중세의 대학이 생기고 여기에 부속되는 대학 도서관이 나오게 되었다. 역시 대학의 출현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었다.2) 중세 대학의 성립(가) 사회적 배경학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학문의 전용어는 라틴어였으며 일반인이 독립된 분야를 연구하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뚜렷한 변화가 오기 시작한 중세 후기부터 도시의 발달과 경제 문화의 발달로 도시에서는 상역과 제조업이 급속히 발달하여 중류 계급이 대두하기 시작하였고, 읽고 쓰는 지식 활동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이들 중류 계급 사이에서도 문화와 교육에 대한 각성과 욕망이 점차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프란체스코, 도미닉과 같은 새로운 수도회가 도시에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속세에서 격리된 은거 생활에서 벗어나 복잡한 현세의 생활 속에 직접 뛰어들어 설교와 교화로써 그 폭을 넓히고 지식에 대한 새로운 지도 방향을 갖기에 이르렀고 중세기말 큰 대학들의 출현도 그들의 협조가 컸다고 볼 수 있다.(나) 중세 중요 대학의 창설13세기 전까지는 대학의 출현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오래 전에 조직화된 기관 같은 것이 있었는데 높은 학식을 가진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그 주변에 모였던 운집하게 되었다. 볼로냐 대학의 경우 투쟁은 경제적 이해 관계에 있었고 대상은 시(市) 당국이었다. 볼로냐 대학의 시 당국과의 충돌은 나폴리, 피사, 파두아 등의 도시로 교수와 학생들의 이동을 유발하여 이태리 지방에 많은 대학이 생기게 되었다.㉢옥스퍼드 대학: 이 대학은 프랑스 국왕이 영국 유학생을 추방하였는데 그들이 귀국하여 런던의 근교인 상공 도시 옥스퍼드에 모이게 된 것이다. 옥스퍼드도 싸움이 있었으나 보통의 싸움이었기에 대학 조직에 큰 발전은 없었다. 중세가 경시하였던 자연 과학 사상이 발달되었다는 것과 신학도 그 연구 경향이 실천적이며, 경험적이라는 점이다. 근세 학문의 길을 개척하는 데 전념하였고, 교황의 직접 간섭이 없었으며, 국왕의 호의로 일찍이 신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살레르노 대학: 중세 대학 대부분이 그렇듯이 남 이태리 살레르노 대학도 의학으로써 성립되었고 발전하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베네딕트 교단이 7세기경 살레르노에 구호소를 설립한 것이다. 그 후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학생들을 자기 영외로 전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231년에 살레르노 대학을 공인하고 칙령에 의해 의과 선생이 타지방에서 교수할 수 없게 하며, 시험 위원회를 통과한 후보자에게만 교수 자격을 부여하였다.(다) College 제도중세 대학을 알려면 당시의 college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중세 대학사에서 이것은 학사(숙소)한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이 college는 대부분 기부 행위로 건립하게 된다. 대학사에 있어서 college제도의 출현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college제도는 파리 대학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 대학에 파급되었고, 특히 영국의 각 대학에 이르러서는 college로서 완벽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파리의 college: 자치적이 조직이 자체적이 못 되고 외부 세력이 항상 간섭하여 학생들의 애교심 말살, college를 대학의 참된 단위로 되지 못하게 하였다.∵영국의 college: 자치적, 대학 도서관들의 대부분이 16세기 이전까지 장서의 규모가 작았다. 펨브루크 대학 도서관이 1347년에 시작되었고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도서관이 1350년에, 킹즈 칼리지의 도서관이 1441년에 각각 창설되었다. 1418년 피터하우스 대학 도서관은 단지 380권 정도, 그 중에 220권은 참고 도서로 쇠사슬로 연결되었고 나머지는 회원에게 대출되었다.㉢그 외의 대학 도서관: 유럽에서 대학 중앙도서관의 형성은 도서관의 설립 이후 수백년 동안이나 지연 되었다. 유럽의 대학 안에서 이러한 중앙 도서관은 별로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못했지만, 독일은 좀 사정이 달랐다. 카알 4세에 의해 1366년에 설립된 프라그의 가장 오래된 대학인 카롤리눔 칼리지는 빠른 속도로 도서관이 발전되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창설된 보헤미아 국민 대학도 곧 도서관을 설립하였다. 학자이며 사본 수집가였던 에르푸르트의 암폴로니우스가 창설한 도서관의 기능을 겸한 학생관은 특히 유명했다.(다)도서관의 운영㉠자료 수집: 초기 대학 도서관은 기증 형식을 통하여 크게 성장했다. 대학에 책을 기증한 주요 인물들은 왕, 귀족, 주교, 상인, 서적 수집가 등이었다.많은 대학 도서관들이 기부금으로 책을 구입하였는데 도서관 기금을 위해 몇몇 대학들은 요금을 모은 흔적도 보인다. 대학 도서관장서는 15세기 후반부터 인쇄된 책이 보급되는 16세기까지 소규모의 장서였다.㉡목록: 초기 대학 도서관의 모습은 수도원 도서관과 매우 유사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지 틀린 점은 단과 대학이나 학부에서 가르치는 과목에 따라서 나누어져 있다는 점이다.초기 대학 도서관 목록은 손으로 베낀 서가 목록이나 색인 목록 정도였다. 카탈로그나 북 리스트들은 보통 ABC순으로 배열되었으나 때로는 저자, 타이틀, 캐치워드에 의해 복잡하게 배역되기도 했고 위치의 표시는 진열대, 책상, 선반의 번호를 사용하였다. 소르본느 대학의 경우 학부마다 색이 표시되어 있었으며 책은 어느 것이나 소속하는 학부의 색으로 도장이 찍혀져 있었다. 14세기 영고, 그 중에서도 색스니 지방의 학교 도서관들이 특히 유명하였다. 한편, 가톨릭 세계에서는 반동 종교 개혁 운동이 강해짐에 따라 도서관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도서관들은 공공 도서관으로 통용되고 있었지만,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공 도서관의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6세기에는 많은 지방 영주들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들은 통치를 하면서도 한편 학문적인 연마를 계속하였다. 그들이 화려한 도서관을 설치하게 된 것은 그들의 권위를 높이고, 아울러 계속 증가하는 행정상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에 필요한 행정용 도서 자료를 비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도서관 설립의 동기는 때에 따라 개인적인 필요성일 수도 있었고, 또 때에 따라서는 국가적인 필요성이기도 하였다. 이 때에 인쇄술을 주로 도서의 대량 생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개인의 사치벽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도서의 장정뿐이었다. 16세기의 독일은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의 국제 도서 교역의 중심지도 또한 독일이었으며,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 목록은 전 유럽의 문헌을 가장 완전히 알려 주는 역할을 하였으나 독일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지도력은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17세기에 있어서 가장 규모가 큰 주요 도서관은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이들 도서관은 바로크 양식 도서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이룬다.♧중세의 개인 도서관♧1)개관초기의 도서관에 있어서 도서관 장서를 크게 네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사원정서, 정부 고문서, 사업적 기록, 구리고 개계에 대한 기록이다. 가족과 가계에 관한 기록물들은 개인 도서관의 원초적 형태이며, 이것이 점차 커지면서 다른 장서와 합쳐 개인 도서관이 되었다. 유언장, 증서, sales forms, 가축, 심지어 노예의 목록 등이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기록들을 이루고 있으며, 한 가족의 가계 및 그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족보학이 여러 세대 동안 기록되어 왔다. 만일 그 가정이 부이 통례였다. 기원전 1세기 말경부터 도서 수집의 풍조가 로마 귀족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제국 절정기의 수백년 동안에는 부유층 로마인과 학자들 사이에 책 수집의 취미가 더욱 보편화되어 갔다. 또한, 의사와 법률가를 포함한 일반 로마인들이 장서를 수집하여 상당한 규모의 도서관을 세웠다는 증거도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도 다른 개인의 도서관들이 일반화 되었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도서 애호의 경향이 당시 로마 제국의 일반적 유행이 된 것과 병행해서 로마 시내에 있는 귀족들의 저택은 말할 것도 없고 교외에 있는 그들의 호화로운 별장에도 장서를 구비했을 정도였지만 학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장서들은 저택 내의 장식품 구실을 했다. 귀족들은 장서 수집을 의해 교육받은 노예를 고용하거나 또는 무역상들의 손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켰다. 개인 도서관들은 그 소유자의 부와 그 장서의 규모에 따라 물리적인 수용설비에 있어 다양하였다. 현재 구라파의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귀족들의 저택이나 그 안에 있는 개인 도서관의 모습으로 추측할 때, 고대의 개인 도서관은 권력고 부의 상징답게 호화 찬란했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나)비잔틴 및 모슬렘 사회와 개인 도서관㉠비잔틴 시대의 도서관: 325년부터 1453년까지를 말하는 비잔틴 문명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명이었다. 비잔틴의 도서관은 주로 왕실 도서관, 대학 도서관이었지만, 개인 도서관들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키릴로스(Kyrillos)는 10세기 초엽에 성 소피아(St. Sophia)에 있는 Patriarchal Library의 사서였는데 그 자신의 개인 도서관을 소유하였다.㉡모슬렘 시대의 도서관: 회교 문화권의 개인 도서관은 크기에 있어서나 그 우아함에 있어서 다른 시대보다 뛰어나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는 지식과 직업으로서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 실제로 전쟁과 정복 다음에는 이것이 가장 존경받는 전문직이 되었다. 그리고, 장서의 수집은 이용과 전시의 목적을 겸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