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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 진제국의 패망과 초한의 전쟁 평가A+최고예요
    Ⅰ. 序論B.C. 230년 韓의 병합으로 시작된 秦의 統一戰爭이 B.C. 221년 齊의 정복으로 완결되면서 秦의 空前의 大帝國을 이룩하였다. 統一帝國의 출현에 대한 염원이 戰國時代에 이미 팽배하였던 것을{) 「戰國時代 統一論의 形成과 그 背景」, 東洋史學硏究, 1975.고려 할 때, 秦帝國의 출현은 어느 의미에서 시대적 여망에 부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사적인 승리를 통하여 급속히 팽창한 大帝國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조직, 통치함으로써 제국의 정치적 안정과 영속을 보증할 것이냐는 문제는 역시 秦帝國이 당면한 과제였을 것이다. 이에 진은 당면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으로 체제를 구축{) 『史記』卷 6, 秦始皇本紀 26년조 참조.하였으나 그 壽命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秦이 國家的 完成에 있어서 問題點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취지에서 短命의 原因을 고찰하여 秦王朝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한다.Ⅱ. 秦帝國의 敗亡 原因1) 舊六國民의 反秦感情秦의 爲政者들은 무력에 의한 六國倂合을 「義兵을 일으켜 殘賊을 誅滅하고 海內를 평정」한 것으로 주장하면서, 그들의 구현한 大統一의 질서속에서 天下가 모두 복종, 太平을 구가하게 되었음을 크게 선전하였다.{) 『史記』卷 6, 秦始皇本紀 26년 조 「寡人以 之身 與兵誅暴亂 賴宗廟之靈 六王咸伏其辜 天下大定…今陛下興義兵誅殘賊 平定海內…」, 同 28년조 山刻石 「初幷天下 罔不賓服」, 琅邪刻石 「六合之內 皇帝之土…人迹所至 無不臣者…澤及牛馬 莫不受德 各安其宇」.秦始皇이 天下를 巡行하면서 각지에 세운 공덕 頌德刻石文에 특히 현저하게 나타난 이러한 자부심을 액면 받아들일 사람은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戰亂속에서 평화를 갈구하던 戰國時代人들이 오랫동안 天子의 출현을 待望하였음을 상기할 때, 秦이 구현한 통일 자체는 일단 크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었다. 漢初 賈誼의 다음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秦이 海內를 평정, 諸侯을 겸병하고 南面, 稱帝하여 四海를 기르니 天下之士가 홀연히 鄕風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무성들은 生命의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허심으로 위를 바라보며(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史記』卷 6, 秦始皇本紀 附 過秦論.그러나 統一自體를 환영한다는 것과 그 통일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보면, 과연 舊六國民이 새로운 王者 秦의 지배를 정말 허심하게 환영하였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정복자에 대한 일반적인 적개심은 일단 차지하더라도, 진에 대한 六國民의 인식은 결코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春秋初 諸侯의 班列에 오른 본래 戎族이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쨌든 秦이 지리적인 위치는 물론 住民의 구성이나 문화적인 성격면에서 戎狄的인 요소와 전통이 강하다는 것은 흔히 지적되고 있다.{) 好 隆司, 『周秦少數民族硏究』, 龍門聯合書局, 1958, p24∼25.이러한 秦에 中原諸國이 異質感을 느끼고 戎狄視한 것은{) 『史記』秦本紀 「秦僻在雍州 不與中國諸夏之盟 夷翟遇之」, 同 六國表 「秦始小國僻遠 諸夏 賓之 比於戎狄」.오히려 당연하였을 것이다. 春秋末의 銅器로 추정되는 秦公鐘의 다음과 같은 銘文, 즉秦公曰 丕顯朕皇祖受天命, 宅禹迹 十有二公 在帝之不 嚴恭 天命 保雲厥秦 事蠻夏{) 吳鎭峰, 「新出秦公鐘銘考釋與有關問題」, 考古與問物, 1980.는 秦이 夏의 始祖라는 禹王의 故地에 자리잡은 것을 명기함으로써 夏王朝의 계승자임을 자부하면서도, 동시에 「秦」과 「蠻·夏」를 병렬시킨 것을 볼 때, 春秋末까지는 秦자신도 諸夏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뚜렷한 것 같지 않다. 또 孝公時 商 이 진의 「戎翟之敎」를 바꾸었다고 自讚한 것{) 『史記』卷 68. 商君列傳 「商君曰 始秦戎翟之敎…今我更其敎」.역시 그때까지도 秦에 中原諸國의 전통과 다른 이른바 「戎狄의 풍속」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商 이후 그것이 어느 정도 改變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 할 필요도 없었지만 오랜 사회적, 문화적인 전통이 變法을 통하여 쉽게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라면, 戰國末 魏의 信陵君이 安釐王에게 「秦與戎翟同俗 有虎狼之心 貧戾好利無信 不識禮義德行」이라고{) 同上, 卷 4 충분히 인식하였을 것으로 보아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華夷觀보다는 秦王國의 정치에 대한 평판은 舊六國民에게 더 큰 불안감을 주었던 것 같다. 당시 他國의 일반민이 秦의 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충분히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秦이 斬首의 功을 크게 강조한 것은 비교적 날리 알려졌던 것 같다. 戰國時代의 각국도 모두 軍功爵制를 확립하였고,{) 朱紹侯, 『軍功爵制試探』, 上海, 1980, p14∼21 참조.齊의 경우도 斬首의 功에 대한 賞賜制度가 확인되는 만큼{) 『荀子』議兵篇 「齊人隆技擊 其技也 得一首者 則賜續 金」.斬首의 功에 대한 포상제도는 秦만의 특유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일견이 이 때문에 진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荀子』議兵篇이 齊의 技擊, 魏의 武卒, 秦의 銳士를 각각 비교하면서 유독 진의 「五甲首二적五家」, 즉 斬首 5級까지는 爵이 1級씩 累進되면서 1戶씩 추가로 戶가 시급되는 제도를 명기하고, 이 때문에 秦의 銳士가 가장 뛰어나다고 지적한 것이라든지,{) 同上, 「齊人…是亡國之兵也…魏氏武卒 以度取之 衣三屬之甲 操十二石之努 負服矢五十個 置戈其上 …得而後功之 功賞相長也 五甲首而隸五家 是最爲衆强長久…」.『商君書』 利祿·官爵은 반드시 戰功을 통해서만 얻도록 하여 백성들이 오히려 戰功을 기뻐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또 出戰하는 병사에게 가족들이 戰功을 세우지 못하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이 强國之民의 태도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商君書』賞形篇 「所謂壹賞者 利祿官爵博出干兵…而富貴之門必出干兵 是故民聞戰而相賀也 起居飮食所歌謠者戰也」, 同 劃策篇 「凡戰者民之所惡也 能使民樂戰者王 强國之民 父遺其子 兄遺其弟 妻遺其夫 皆曰 不得 無返」.보면, 확실히 秦은 타국에 비해 戰功, 특히 斬首의 功을 크게 강조하였던 것 같으며, 이 때문에 秦의 병사들은 유달리 斬首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史記』秦本紀·秦始皇本紀·六國表 및 各世家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B.C. 361∼234년 사이에 秦 잔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厚賞을 기대고 斬首·生捕에 열을 올리는 秦軍을 전장에서 직접 묵도한 六國民들이 진의 잔혹상에 대해 공포심과 증오심을 가졌을 가능은 충분하다고 본다.이와 같이 統一이전 六國民의 反秦感情은 피정복자가 정복자에 대해 으레 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적개심 이외에도 보다 강한 反秦感情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舊六國民들에 反秦感情이 秦帝國의 短命의 原因이 된다고 생각된다.2) 秦代의 暴政秦始皇의 사업은 농민을 搾取·壓迫하면서 십 수년이라는 단기간에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秦代 통치가 갖는 暴政의 特色이다. 秦 통일 후 십 수년간 秦始皇은 막대한 軍隊를 유지하고 막대한 관료기구를 만들었으며, 대규모적인 戰爭을 진행하여 거대한 국방건설과 토목건축을 완성하였다. 엄청난 인력동원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秦始皇은 租稅와 負役의 징발을 증가시켜 力役은 옛날에 비해 30배에 이르고, 田租·口賦·염철의 이익은 옛날에 비해 20배에 달하는 {) 『漢書』食貨志.정도이었다. 당시 兵役에 복무하는 사람이 200만을 초과하여 장년 남자의 1/3 이상을 차지였다 {) 『續漢書』郡國志에 근거하여 추산하면 전국 말 인구수는 약 1천여 만이며 진 때도 대략 이 와 비슷하다.고 헤아려 지며 兵役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農業生産에서 이탈되어 농민에 의해 양육되어야 하는데 이는 바로 남자가 농사를 지어도 양식이 부족하고 여자가 방적을 하여도 의복이 부족하여 천하의 자재가 고갈되는 {) 『漢書』食貨志.상태가 되어 秦의 기초가 크게 동요하였다. 秦朝는 또한 지주계급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嚴刑峻法으로서 농민을 鎭壓하였고 이에 수십만 농민이 지주계급의 죄수로 변하였다. 封建制度의 내재적 모순과 暴政으로 인하여 秦始皇의 통일사업이 완성됨과 동시에 진왕조 붕괴의 조건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西漢의 가산이 秦代에 盜賊이 무리가 산에 그득한 상황을 말하면서 진황제 자신의 시대에 천하는 이미 파괴되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漢書』賈山傳.기이르기까지 제공하게 하였다. 또한 요역징발의 대상이 더욱 확대되어 농민의 고통은 극한점에 도달하였으며, 사회생산력의 파괴는 극심한 상태에 이르러 대규모적인 농민기의는 이미 一觸卽發이었다.Ⅲ. 陳勝·吳廣의 反亂秦에 대한 반항의 불을 지핀 것은 陳勝과 吳廣이라는 두 農民이었다. 陣勝은 陽城 사람으로 고농 출신이고, 吳廣은 陽夏 사람으로 농민이며 그들은 모두 戍卒의 屯長이었다.{) 『商君書』境內篇에 의하면 1둔은 인이다.2세 원년 7월 漁陽으로 부임하러 가는 閭左·戍卒 900인이 大澤鄕에서 비를 만나 기일 안에 漁陽 변경지대에 도착할 수 없었다. 秦法은 기한을 어기면 斬首에 해당되어 이 900인의 戍卒은 斬刑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이에 陣勝과 吳廣은 共謀하여 戍卒을 인솔하여 지휘관을 살해하고 이미 賜死된 진의 공자 扶蘇와 楚나라 장군 項燕의 이름을 사용하여 농민을 모으고 진에 반란을 일으켰다. 陣勝 등은 대택향 주변의 현성을 공략해 불만을 품은 농민을 규합하여 戰國時代 한때 楚의 수도가 있었던 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본거지로 정하고 陣勝은 추대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張楚라 이름짓고 秦왕조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陣勝이 나라를 세웠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나가 각지에서 농민들은 봉기했다. 陣王은 사방에 진토벌 군대를 파견하는 한편 주장을 장군으로 한 수십만의 주력군을 秦의 수도 함양으로 향해 공격시켰다. 2세 황제는 비로소 사태의 중대함을 느끼고 함양의 상비군에다 여산능에서 일하는 수십만 명의 罪人이나 奴隸를 방면해 군대를 편성하고 장감을 장군에 임명하여 응전시켰다. 주장은 실전의 경험이 없고 또한 군대는 조직이나 통솔도 없어기 때문에 초전에서 패하고 다시 난을 일으키려 했지만 구원군은 없고 秦의 맹공격을 맞아 격파되고 주장은 자살했다. 주력군의 이 패배는 반란군에 있어 치명적이었다. 장감이 이끄는 秦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해갔다. 형양을 포위하고 있던 吳廣의 군 내부에 동요가 일어나 吳廣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또한 이 무렵 陣王이 사방에 파견된된다.
    인문/어학| 2003.05.27| 7페이지| 1,000원| 조회(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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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고학] 한국불상의 흐름 평가A좋아요
    Ⅰ. 머리말삼국시대에 한국에 전래된 佛敎는 한국 사람들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정치에 관여함으로 인한 종교적 타락이 있었으며 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해서 사회적 지위가 크게 떨어진 때도 있었으나 그 생명력은 끊기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우리 민족사의 한 흐름이며 불교에서 빼놓은 수 없는 불교가 우리 나라만을 고유문화에 속하는 종교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불교의 대표적인 조각인 佛像이 또한 그러하다. 불교가 민족사의 한 흐름이라고 하면 불상 역시 우리 민족 예술이 한 흐름이다. 불상이 불교적인 유물이라서 관심이 갖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불교신자들만이 관심을 작을 것이 아니라 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표현된 미적 가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한국의 예술품인 불상은 한국에 불교를 전래한 중국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았으므로 중국 불상의 양식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떠한 점을 수용하고 또한 어떠한 점이 다른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중국 불상의 양식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살펴보고서 그 영향을 받은 한국 불상과 함께 한국 불상의 특징을 알아보기로 하겠다.Ⅱ. 중국 불상의 양식과 그 변천중국 불상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양식의 변화가 있었으나 기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보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漢시대에 이미 불교가 종교로 자리를 잡았으나 4세기에 들어와서야 큰 불상이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시간이 경과됨과 지역에 따라서 불상의 양식이 변화하였다.중국의 五胡十六國 시대에는 모방을 주로 하였으며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양식이 절충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禪定印坐像과 통인의 如來立像이 주로 만들어졌다.5세기 北魏시대에 이르러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사이 일어났으며 불상은 중국화되어 大衣는 중국의 袍服式으로 바뀌었다. 이때는 매우 건장한 모습이 넘치는 장부의 기상이 담겨있는 불상이 雲岡石窟을 중심으로 주류를 이루어 만들어졌다. 그러나 6세기로 접어들면서 불상의 얼굴과 몸은 길쭉해진다. 길쭉한 몸매는 그 시대의 금동불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북위시대의 특징은 홀쭉한 몸매에 비하여 매우 두꺼워서 그 속에 가리워진 몸은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法衣가 좌우에서 대칭으로 전개되었고 옷 주름이 여러 단으로 표현되었다. 우리 나에서도 삼국시대 말기가 되면 이러한 형식의 옷 주름이 나타난다. 6세기 중엽 東·西魏로 갈라지면서 북위양식이 그대로 반영되었으나 차츰 북위 불상의 강직한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온화해지면서 우아한 모습이 띠게 되었다.동위 불상은 북위 불상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서위 불상은 동위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이 새대는 碑像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온화한 모습의 양식이 北齊시대에 정착되어 둥근 얼굴에 어린아이 모습이 되며 몸은 풍만해져서 어깨, 가슴, 손들이 둥근 맛을 내며 몸에 밀착된다. 옷 주름은 線刻으로 변한다. 이것은 중국 불상이 北齊周 이후에 인도 불상의 형식으로 복귀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隋시대에 불상은 독특한 양식은 나타나지 않고 齊周시대의 양식이 계승되었고 후반기에는 당시대의 양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으나 전시대에 온화한 표정과는 달라졌다. 法衣는 두 어깨에 걸쳐 있고 두껍게 표현되었으나 팔, 다리의 윤곽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몸에 살이 올라 있으나 큰 양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으로 바뀌었고 대좌가 8각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제주시대의 양식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동시에 唐시대 양식으로 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唐시대에 이르면 신체는 풍만해지고 옷 주름은 날카롭게 돌기선으로 표현된다. 이 때의 불상은 이상적 형태를 지향하고 있으나 얼굴 모습은 중국인의 모습을 띠고 옷 주름은 사실적이 도어 중국 나름의 양식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을 고비로 중국 불상은 神性을 잃고 너무 인간적이 되어 세속화를 걷는다.唐시대 이후에는 불상은 급속하게 쇠퇴하여 遼, 宋시대의 것이 있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시대의 성황을 따르지 못하였고 다음의 元시대에는 라마 형식의 불상이 약간 만들어졌을 뿐 더욱 퇴화의 과정을 걷게 된다.Ⅲ. 한국 불상의 양식우리 나에서의 불상 양식의 변천은 거의 중국 양식의 변천과 같이 하고 있다. 불교의 유물은 우리 나만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었으며 일정한 형식과 테두리 안에서 구성되어졌다. 이것은 한국이 중국 양식의 영향을 받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1 삼국시대의 불상삼국시대의 불상은 대체로 중국 南·北朝시대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연가 7년명 금동불임상(539년 추정)은 명분이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예로 긴 얼굴이나 옷자락이 몸 양옆으로 날카롭게 뻗어 있는 기법 등에서 중국 북조의 북위 불상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반면의 백제는 남조 특히 梁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태안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 불상에 보이는 따뜻한 미소나 자연스러운 곡선에서 한국적인 인간미와 부드러운 조형감을 느낄 수 있다.이러한 고구려, 백제의 불상양식은 뒤늦게 발달한 신라는 불상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7세기에 이르러 북제, 북주 또는 隋시대의 새로운 불상 양식이 반영되어 삼화령 미륵삼존상과 같이 통통한 얼굴이나 佛身의 입체감을 강조하는 불상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반가사유형 보살상은 미륵신앙과 결합되어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였다.삼국시대의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있고 손과 다리의 조각표현에는 그다지 입체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의 각기 특징 있는 불상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호류지의 목조관음상이나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과 같은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삼국시대 불상의 표현 감각에는 신비성이 농후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얼굴의 미소나 手印의 형식이나 옷 주름의 형식에서 모두 신비적이 느낌을 느끼게 하며 半跏像의 형식에서 더욱 강하게 느끼는데 이는 삼국에서 모두 유행하였다.이 시기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1 몸은 살이 빠져서 얼굴은 갸름하다.2 눈은 은행 열매 같고 입가에 미소가 있다.3 法衣는 通肩이고 두껍다.4 옷 주름은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었고 양옆에서 여러 단 고기 지느러미 같이 좌우로 전개 된다.5 중국과 같이 심하지는 않으나 좌상에 있어서는 裳懸座의 형식을 취하였고 좌우대칭으로 복잡한 옷 주름이 나타나 있다.6 보살에 있어서는 天衣 자락이 앞에서 X형으로 교차된다.7 목에는 三道가 없고 手印은 通印이나 與願印에서 약지와 소지를 꼬부린 것이 많다.8 삼국시대 말기에 가까워지면 살이 올라서 齊周양식에 접근하여 감을 볼 수 있다.9 자세는 입상과 좌상이 많으나 半跏像이 유행하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⑩ 대좌는 연화 대좌가 많고 광배는 舟形, 寶珠形이 많은데 舟形 광배 주위에는 화염문이 조각되어 있다.⑪ 삼국시대 말기부터 암석에 龕室을 파고 조각의 초기 형식이 나타난다.이상의 형식은 시간의 경과나 지역의 차이를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로 공통된 양식을 따르고 있다.2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삼국 정립의 시대가 지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삼국 통일의 시대가 되면 중국에서는 수에 이어 당왕조가 성립되었다. 당은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선지 불상에도 인도 불상의 감각과 표현양식이 농후하게 가미되는 등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당의 이러한 불상 양식의 변화는 통일신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은 경주지역에 모여있는데 8세기의 감산사지 출토 석조아미타불 및 미륵보살입상이나 석굴암 불상군 등에서는 한국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통일신라시대 후기에는 금동불이 적어지고 석굴암의 본존불을 따르는 항마촉지인 불좌상 형식과 지권인의 철조지로자나불좌상이 새로이 등장하여 신라 말에는 고려 초기까지 유행하였다.그 당시의 양식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1 肉 는 작아지고 螺髮이 많아진다.2 미소가 사라지고 단정, 근엄한 모습이 된다.3 목에 三道가 나타난다.4 법의는 右肩 袒이 많아진다.5 衣紋의 표현에서 좌우대칭의 양식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표현된다.6 상현좌의 형식이 사라지고 衣端은 대좌 위로 올라가 대좌가 완전히 노출된다.7 대좌는 伏蓮의 하대석, 8각 혹은 6각의 중대석, 仰蓮의 상대석으로 구성된다.
    인문/어학| 2003.05.27| 4페이지| 1,000원| 조회(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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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근대사] 신민회에 관한 연구 평가A좋아요
    Ⅰ. 서론韓國 獨立運動은 1894년 甲午倭亂에 대항하여 義兵이 봉기하고 이어 日本軍의 침략을 맞아 東學이 다시 일어나 獨立運動의 포문을 연후, 1945년 解放에 이르기까지 50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舊韓末에는 의병전쟁과 啓蒙運動으로 나타났느데 大韓帝國이 滅亡한 뒤인 1910년에는 獨立運動의 공간을 海外로 확장하는 한편 獨立運動의 전열을 정비하고 역량을 축적하여 지속적인 31운동의 결실을 맺었다. 한말 救國運動이 義兵運動과 啓蒙運動으로 양립하여 전개되었는데 韓末 啓蒙運動을 救國運動으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단체가 新民會였다.반식민지 상태하의 1905-10년 사이에 전개된 구권회복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단체가 1907년 4월에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였다. 만민공동회의 세력계보와 1902년에 결성되었던 개혁당의 조직계보를 이은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이라는 목표하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교육과 언론계몽을 비롯한 출판 실업 청년운동 등의 여러 부문에서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내었다.그러나 가장 두드러지고 고도 획기적인 활동은 종래의 민족운동의 양대흐름이던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방략을 지양종합하여 발전시킨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1910년말부터 주요 간부와 회원들을 국외로 망명시켜 전개한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이었다.이 운동의 성과로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북간도의 동림무관학교 북만주의 밀산무관학교 등이 독립군기지의 핵심체로 속속 건립되었으며 그것은 31운동 이후 만주 각처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독립군투쟁의 기반이자 모체가 되었다.그러나 신민회의 국내조직은 일제가 조작해낸 안악사건 , 105인사건 ,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 등으로 전국의 애국지사 8900명이 잇따라 검거되는 와중에 기능이 마비되어 1911년 가을 해체되고 말았다.신민회는 전통적 臣民이 아니라 새시대의 新民으로서 國權을 회복하여 自由獨立國家를 세우는 것이며, 政治形態는 힘없는 君主制를 극복한 共和政治體制를 수립하려했다. 그리고 목표달성을 위하여 獨立의 筆하고 있다. 4장에서는 신민회 탄압과 와해를 筆하고 있다.Ⅱ. 新民會의 성립배경과 결성, 조직1. 신민회의 성립배경과 결성1904년 2월에 발달된 러일전쟁은 한국과 중국 동북지방을 위요한 러일간의 제국주의전쟁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러시아가 대표하는 제국주의의 대리전쟁이었고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은 침략전쟁이었다.일본은 러일전쟁과 더불어 불법적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군사적 압력하에 이른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전략상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적, 인적 중원동원은 강요하였다. 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정을 체결하에 이른바 고문정치를 자행하고 정치적 및 경제적 침략과 함께 내정을 간섭하였던 것이다.특히 1905년 7월에 이등박문을 특령전권대신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 군사적 위협으로 강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망국적인 을사5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일본에 박탈당하고,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내정의 지배와 더불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어 갔다.이 을사조약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지만 조직적인 국권 회복운동으로서는 항일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의 두 조류가 있다.일제의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항일의병투쟁은 국권회복을 제1차적인 과제로 삼고 일본제국주의와 그에 동조하는 매국세력에 무력으로 대결하는 것이었고, 당초 재향지주층인 유생들이 그 조직 자로서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주재로서 문종직, 최익현, 박병천등을 들 수 있으며 그들의 반침략적 주장은 종래의 위정척사사상의 일정한 변용과 더불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특히 1907년의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이 군대들이 의병투쟁에 합류함에 따라 더욱 전국적으로 발전하였고 유력한 군대출신 및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등장하여 의병투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을사조약을 계기로 하여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의 추이와 더불어 있던 공립협회의 해외유학생을 모집하려는 것이었다. 귀국후 그는 서울에서 서우학회등과 연결을 맺고 평양에서는 미국 선교사 등과 왕래하면서 주로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는 연설회를 가졌다. 그의 연설은 당시 애국적 지사나 민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그는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되었다.신민회는 1906년 국내에서 민족적 및 민권적 성격이 강했던 신진 지식층들이 국가의 위기에 직면하여 국권을 회복수호하기위하여 조직한 것이었고 그 뒤에 안창호 이갑 이승훈등 새로운 지도자들이 참가하게 됨으로써 그 조직{) 新民會는 1907년 4월초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을 총감독으로 해서 양기탁(梁起鐸) 전덕 기(全德基)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안창호(安昌浩) 등이 창건 위원이 되고 이와 함께 최광옥(崔光玉) 노백린(盧伯麟)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이회영(李 會榮)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조성환(曺成煥) 김구(金九)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이강(李剛) 임천정(林蚩正) 이종호(李鍾浩) 주진호(朱鎭浩)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였 다. (신용하, 『한국근대의 민족운동과 사회변동』, 문학과지성사, 2001, p126)이 정비 확대되어 본격적인 온건, 강경 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었다.2. 신민회의 조직상황신민회는 그 조직목적을 1.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사을 고취할 것. 그통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3.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4.각종 상공공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등 피탈된 국권의 회복과 국가의 자주독립을 그 최종적인 지표로 책정하고 추진했다.이런한 지표를 가지고 모인 신민회 구성원의 총수는 백범일지 에 따르면 약 400명이었다.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은 대체로 그 구성원을 전국각도에서 명망있고 애국심이 강한 믿을 만한 지사로 규합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민회회원들은 주로 경물과 각회원들의 개인적 만남에서 신민회의 지향하는 바 민족의 자주독립 을 위한 구국운동의 방향을 제시받고 각 지역에서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앙조직은 신민회의 이름으로 그 대표적인 구국운도을 전개하면서 회원들을 고무시켰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민회의 조직은 분산성을 면치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분산적 조직하에서 신민회는 근대적 민족주의사상을 보급하는 교육계몽 및 민족경제자립운동을 전개하고 한편으로 무력적인 국권회복의 방향을 모색하였다.한편 신민회는 국내조직 이외에 중국 및 시베리아 연해주 미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연결을 가지고 해외로의 발전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10년4월을 전후하여 국내 신민회 인사들의 해외 망명과 연결되어 1910년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Ⅲ. 신민회 활동1. 신민회의 국내운동신민회의 최종적인 지표가 국권회복이었지만 당면과업으로서 역점을 두고 추진한 사업의 하나는 교육언론을 통한 민중 계몽운동이었다.당시 한국사회는 애국인사들에 의해서 교육구국의 이념 아래 수 많은 민입사학들어 설립되었다. 신민회는 이러한 교육구국운동의 선봉에 서서 국민대중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이때 신민회에 의해 설립된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대성학교, 오산학교, 청년학우회, 태극서관등을 들 수 있고, 언론기관으로는 신민회의 동지들이 관계한 대한매일신보{) 애국계몽운동기간에 있어서 가장 과감하게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언론활동을 전개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 등이 영국인 Bethell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양기탁이 주필이 되어 한영합작으로 1904년 7월에 창간된 신문이었다. 처음에는 1896년의 독립신문과 같이 하루의 신문 6면에 국문 전용의 한글판과 영문판을 같이 수록하여 발간하다가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은 국한문 혼용의 대한매일신보, 영문판은 The korea Daily News라는 별도의 신문으로 나누어 간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립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을 통해서 외국의 경제침략에 대한 국민의 자각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그들은 상공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한편으로는 유교의 전통적인 상공업 천대사상을 공박하여 민중의 의식구조의 개조에도 노력했다.이와 같은 경제자립을 위한 계몽적 운동 외에 신민회가 민족경제자립운동의 일환으로 벌인 사업은 평양 마산동의 유기회사였다. 이 회사는 1908년 기업인으로서 대성을 하였던 이승훈을 주축으로 하여 합자하여 설립한 것으로서 현대적 회사조직으로서는 최초의 자기회사였다.신민회의 민족경제자립운동은 한국전체의 경제구조에 미친 영향은 비록 적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민족의식의 발로에서 시작한 민족운동으로서의 국민대중에게 민족경제자립의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유교적 전통사상에서의 상공업 천시관을 탈피할 수 있게 하는데 이정한, 여갈을 하였으며 기존 상인에게는 표본적인 사업으로 합자형식의 기업형태를 제시하여 줌으로써 새로운 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많은 학회 사회활동단체들이 민족산업부흥의 과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구호로만 외치는데 끝났던 것에 비해 실천적으로 그 시범을 보여준 데 그 의의가 또한 크다할 것이다.신민회는 을사조약에 의해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권이 저장된 것과도 관연하여 광범한 국민을 나라의 근간으로 삼는 이른바 新民 으로 만들어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교육, 언론을 통한 온건한 애국계몽운동과 함께 지하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종래 신민회를 정치성을 배제한 수양단체로 보려는 경향마져 있어왔다.신민회는 일제침략의 가중화와 더불어 국가존망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보다 투쟁적인 방향으로의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민회의 강경운동 은 이른바 급진파 의 주도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몇 가지 사례를 자료에 의해서 추적할 수 있다. 즉 이갑은 이강과 함께 숙청단 을 조직하고 사위 라는 다시 일본인의 토지수탈에 중개를 해주는 한인과 기타 친일분자를 응징하고자 하였다.안중근은 다.
    인문/어학| 2003.05.27| 15페이지| 1,000원| 조회(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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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 빈체제 평가A좋아요
    Ⅰ. 서론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9세기 초 유럽사회는 평화가 찾아오는가 했더니 각국별로 자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시민혁명의 소리와 총성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이 절정에 달한 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소식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유럽국가들은 프랑스에 대한 공동적 대처를 하고자 1차 대불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영국이 주도하여 유럽의 강대국들과 함께 나폴레옹 제정이 붕괴되기까지 3차례나 대불동맹이 더 결성되었다.이렇듯 나폴레옹을 제거하기 위해 대불동맹을 통한 유럽 강대국들 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은 일단의 체제가 뿌리를 내딛게 하였고 나폴레옹 제정이 붕괴된 후 황폐해진 유럽의 질서를 재편성하려는 모임이 빈에서 개최되었을 때 실질적 체제로서 국제사회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빈 체제는 나폴레옹 이전의 왕정으로 복귀하려는 반동체제로 역사적 흐름에 있어서 역행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붕괴 될 수밖에 없었다.당시 유럽사회에는 나폴레옹 전쟁 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이 싹트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산업혁명이 진행되어 자본주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이런 근대화의 물결로 인해 빈 체제는 붕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빈 체제와 성격을 알아보고 빈 체제가 붕괴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해보고자 한다.Ⅱ. 빈 체제와 성격프랑스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황폐된 유럽의 국제질서를 재건하기 위하여 1814년 9월부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즉 이 회의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의 유럽의 재건과 그 선·후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시로 최대의 회의였다.당시 역사의 흐름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오랜 전란으로 전쟁에 대한 공포증으로 전쟁을 혐오하고 있었고, 또한 기근, 유행병, 범죄, 빈곤 등 때문에 자유보다 평화를 염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성립된 것이 빈시아, 영국, 러시아의 결정을 여타국의 승인으로 합법화하려 하였으나 대국간의 이해 관계가 상이하므로, 탈레랑은 4대국의 전제적 행위를 누르고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4대국과 동등한 발언권을 갖게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빈 회의는 실질적으로 이 8개국 중의 위원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가에 이르렀다. 이 회의의 진행과정을 보면 18세기 풍의 궁정의식과 연회, 음악회, 무도회를 통한 각국대사들의 접촉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8개국 위원회의 결정 사항을 전달하는 형식과 공문 비공문의 각양각색의 사교회합으로 국경이 조정과 자국의 이익에 몰두하였다.그러나 각국의 입장과 주장들이 상이하여 많은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대체로 문제해결은 강대국에 유리하고 군소국의 이해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영국주장과 입장은 나폴레옹 타도가 최대 관심사였고, 전쟁 중 점령된 해외요지를 합병하여 전통적 해상왕국의 세계제국으로의 확대강화를 모색하여 유럽대륙의 세력균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하여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세력의 약화와 러시와 세력의 저지가 목적이며 영국의 프러시아 강세는 오스트리아의 위험으로 반대하였다. 다음 러시아의 입장을 보면 러시아의 유럽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점령한 바르샤바 공국과 구 폴란드왕국을 합병하여 러시아 왕이 이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리고 대륙 제1의 육군국으로서 유럽의 중재역할을 기도하였고 프러시아가 영토를 확대하여 오스트리아를 견제할 것을 바랬으며 프랑스를 회유하여 영국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프러시아는 장차 독일의 패권 장악이 목적이었으며 대 오스트리아 전략 요지인 작센을 점령할 것을 기도하였다. 또한 프랑스는 패전국이지만 대등한 발언권을 얻으려 함과 동시에 정통주의를 주장하여 나폴레옹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여 프랑스 이전의 영토소유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강국들이 자기이익에만 치중한 나머지 약소국은 불리하였고 각기 자국의 이익만을 주장함으로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그리하여 이해문제로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결탁하게되고 영국과 오스트리 열강은 서로 협조하여 동년 6월 5일 8개국의 주도에 의해 빈 조약이 체결되었다.이러한 빈 회의 결정사항은 특히 군소국가의 만족을 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직 메테르니히의 보수 반동주의와 탈레랑의 정통주의가 주동사상으로 결론을 맺게 됨으로 세력균형의 선에서 결정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취지는 당시 자유주의적 세론이 이 회의에 바라던 영구평화보장과 군비축소, 노예 폐지와 약탈·나포의 금지 등이 광범위한 사회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였다.Ⅲ. 자유주의와 민족주의4국동맹이 성질이 변화되고 있던 1818년대에 들어와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지배자간의 대립이 아니고 혁명과 민족주의 소란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유럽제국에서는 또다시 반동정치에 저항하여 자유주의사상과 혁명사상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독일에서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계기로 자유주의사상이 전파됨과 동시에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 자유주의적 통일운동이 학생층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도 통일과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청년들의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당이 활동하여 1820년 나폴리 왕국에서 한때 입헌정치의 실현에 성공하였다. 이에 메테르니히는 다음해에 4국동맹을 배경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무력으로 이 운동을 진압시켰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한때 승리를 거두었으나 1822년 메테르니히가 소집한 베로나 열국회의에서 진압이 결의되어 프랑스의 병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러시아에서도 1825년 알렉산드르 1세의 서거를 계기로 자유주의적인 귀족과 사관을 중심으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바로 진압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제국이 독립운동이 일어나 여러 나라가 독립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중남미 지방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러한 독립에 대해 메테르니히는 하나의 혁명으로 보고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외상이었던 캔닝은 영국이 상업적 이익을 내세워 간섭을 반대했다. 미국의 먼로 대통령도 대륙이 아메리카 제국의 독립운동에 간섭하지 말 것을 선언하년에 독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보수 반동정치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유럽일대에서는 자유주의사상이 재등장으로 혁명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이 이후에 일어난 프랑스의 7월 혁명은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주의 운동을 더욱 격화 시켰다. 빈 의회이래 오스트리아령으로 네덜란드와 병합되었던 벨기에가 독립하게 되었고 폴란드에서도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러시아령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독립반란이 일어나 1830년 11월에 독립선언을 하게 되었다. 일부 독일 연방 군주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으며 프러시아 중심으로 관세동맹이 일어나 독일이 통일되기 일보 전에 경제통일을 이룩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즉, 마치니에 의해 청년 이탈리아당이 조직되어 새로운 국민적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7월 혁명에 의해 타격을 받은 빈 체제는 그 후에도 각국에 있어서 자유주의, 국민주의 또는 공화주의, 사회주의 운동에 의하여 더욱더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1848년 2월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에 의하여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Ⅳ. 영국의 산업화산업혁명은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후반기에 19세기 전반기까지인데 사실 영국에서는 15세기 이후 진행된 농촌경제의 오랜 변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영국은 17세기 시민혁명의 의하여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속박이 제거되어 공업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인 공장제 수공업이 힘차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거대한 공장을 일으킬 자본이 축적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에서는 새로운 공업을 일으킬 자본의 조달은 개인적 지방적 차입에 의하여 행해졌으나 이윽고 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생겨 저리의 자금이 융통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일찍이 종획운동으로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의 성장과 농촌수공업의 발전에 의한 자영농민의 대두 그리고 농업 근로자의 배출은 18세기초의 농업혁명의 모태가 되었고 농업자본형성이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17세기 시민혁명을 치른 영국은 다른 유럽제국보다 조기에 국 수 없게 되었다. 또 영국은 산업혁명의 필수 요건이 석탄·철광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은 산업혁명의 3대요소인 자본·시장·노동력과 지하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은 영국으로 하여금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게끔 하였다.이렇게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산업혁명은 나폴레옹 전쟁 후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쟁 후 간신히 사회의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흉년이 들면서 밀 값이 130실링으로 다시 폭등하자 노동자들은 생활을 할 수 없어서 항의하기 시작했다. 전쟁 당시 군수품을 만들고 있던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자 실업자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또 오랜 전쟁으로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피폐하자 영국제품을 수용 할 능력이 없어져 자연히 영국의 노동자들은 임금 면에서도 압박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영웅인 25만의 군인들마저도 정부가 대책을 세워주지 못하자 실업자로 거리를 헤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기계에게 인간이 직장을 빼앗기는 상황이어서 노동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영국은 세계 최초로 대공황의 실현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택했다. 1811년 러다이트 운동이 그 시작이며 이때부터 이런 운동을 대변하는 혁신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이로써 중산도시의 시민계층이 드디어 선거권을 갖게 되었으며 영국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선거법 개정이후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줬으나 아직 풀리지 않은 근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식생활 문제와 임금 문제였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수입곡물에 대해 관세를 철폐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였던 사람은 필 수상이였다. 필은 관세를 통한 보호무역이 결코 영국의 장래를 밝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관세개혁을 정부차원에서 과감히 시작하였다. 마지막까지 농민에 반대에 부딪히던 곡물법 폐지로 인해 수입곡물이 영국에 무제한으로 들어오자 그 동안 고통을 받던 도시 노동자들의 식생활 비용이 현저히 감소하여 비록 예전과 같은 임금을 받다.
    인문/어학| 2003.04.21| 5페이지| 1,000원| 조회(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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