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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과학] 공기업의 문제점 및 해결방안
    -목차-Ⅰ. 개념Ⅱ. 공기업의 형태Ⅲ. 공기업의 목적Ⅳ. 공기업의 특성Ⅴ. 공기업과 사기업과의 유사점Ⅵ. 공기업의 장·단점Ⅶ. 공기업 운영 실패 원인Ⅷ. 공기업 운영의 실패사례Ⅸ. 공기업 운영 실패의 해결방안Ⅰ. 개념1. 공기업이란?공기업은 정부 산하기관 중 정부투자기관 또는 정부출자기관을 말한다. 정부투자기관은 정부가 납입자본금의 50퍼센트 이상을 출자한 법인으로서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법인이며, 여기에는 한국전력공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석유공사 등이 해당된다. 정부출자기관은 정부가 최대주주인 법인이거나 또는 최대 주주가 아니더라도 사실상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인으로서 정부투자기관 이외의 법인을 말한다. 여기에는 포항종합제철, 한국통신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이 해당된다. 또 공기업은 『공공성(publicity)』과『기업성(entro-premiership)』의 2개의 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공공성의 개념은 공공에 의한 소유, 통제를 요소로 기업성의 개념은 사업주체의 자율성, 사업주체가 생산, 공급하는 제화와 서비스의 시장성을 그 요소로 하고 있다. 공기업의 구체적 정의는 『공공소유성』,『자율성』,『시장성』등의 각 변수의 개념적 조합에 따라 정의 할 수 있다.⊙ 행정학적 입장공기업은 『국가, 지방 자치단체가 수행하는 사업중 기업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 즉 국가,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하는 사업 중에서 수의성을 띠는 것으로 정의한다. 공기업은 생산주체로서 독자적 내지 이에 준하는 예산을 지니고 있는 식별 가능한 의사결정의 주체이어야하고, 서비스를 생산하여 물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반대급부가 경상비의 50%이상을 차지하는 기업적 성격을 갖추어야한다. 독자적인 의사결정의 주체라고 볼 수 없고, 기업적 성격에 의한 양곡관리사업, 국민생명보험, 우편, 연금사업은 공기업범위에 포함하기 어렵다.⊙ 조작적 정의공기업은 『국가나 공공단체의 공적 출자와 공적 지배에 의하여 공공수요의 충족과 공공복리의 증진을 목적으로 수의적으로 경영의 분류방법에 의거하여 공기업을 정부부처의 형태를 지닌 공기업, 주식회사의 형태를 지닌 공기업, 공사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 견해를 따르기로 한다.(1) 정부기업 공기업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공기업으로 선진국이나 발전 도상국을 막론하고 널리 채택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부부처의 형태를 지닌 공기업을 기업예산회계법에서 정부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철도청, 전매청 등은 정부기업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정부기업은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1 매년 국회의 의결을 얻어 확정되는 예산에 의하여 운영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부기업 을 위하여 특별회계를 마련하고, 일반회계와는 별도로 계리하도록 하고있으나 그 세입 세출예산에 관하여 매년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2 정부기업은 일반행정기관에 적용되는 예산. 회계 및 감사관계의 법령의 적용을 받는다.3 정부기업의 직원은 공무원이며, 그들의 임용방법. 근무조건 등은 일반공무원의 그것과 동일하다.4 정부기업은 일반적으로 중앙관서 또는 상하기관의 형태로 운영된다. 따라서 국.과를 신 설하거나 폐지하려면 직제를 개정해야 하며, 정원을 늘리려면 공무원정 원령을 개정해 야 한다.5 정부기업은 주식회사나 공사와 달라서 당사자 능력을 지니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정부기업은 지나치게 관료적인 경향을 띠기 쉬운데다 신속하고 능률적인 경영이 되 지 못하며 기업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신축성을 잃기 쉽다. 특히 남미에 있어서 정부기업 은 부패하고 비능률적인 행정구조의 하나로 비판받고 있다.정부기업은 기업경영에 필요한 창의력과 탄력성을 상실하기 쉽다고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최고경영자의 빈번한 교체, 조직상의 제약, 인사상의 제약, 재정상의 제약 등으로 기업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결함으로 많은 국가에서 정부기업을 공사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의 방송사업, 전신전화사업, 전매사업을 위시하여 미국. 영국의 우편사업, 일본의 철도사업, 전매사업, 공익사업의 개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내포해야 한다. 첫째, 그 서비스가 국민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규제되거나 소유 경영되는 것이어야 하며, 여기서 국민 생활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 경제적 및 기술적 발전, 사회관습과 국민의 심리와 관련되는 문제이며, 둘째, 그것이 독점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업이어야 한다. 이리하여 공익사업에는 수도. 전력, 가스, 교통, 통신사업 등이 포함된다. 외국은 예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익사업은 오래 전부터 공기업화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점은 공기업과 공익사업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공익사업을 공기업으로 운영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민유민영인 공익사업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2) 금융 및 보험 (banking, credit and insurance)이 부문은 중앙은행. 특수은행. 일반은행. 일반보험. 특수보험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중앙은행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유화 되어있고, 특수은행도 공기업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농지은행, 연방중기 신용은행, 생산신용공사, 등의 특수 은행들이 공기업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국민은행, 한국주택은행 등의 특수은행이 공기업인 것이다. 시중 은행은 사기업인 경우가 많으나 나라에 따라서는 시중은행도 공기업화 되어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대부분의 시중은행과 이탈리아의 3대 시중은행을 들 수 있다. 일반보험분야는 대체로 사기업인 경우가 많으나 나라에 따라서는 공기업화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와 인도, 뉴질랜드에서는 보험회사가 전부 공기업화되어 있다. 특수보험분야에서도 공기업을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 곡물보험공사는 공기업으로 되어 있다.(3) 다목적개발사업 ( multi-purpose development project)다목적 개발사업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33년 루즈벨트 대다.(1) 정부투자기관정부가 직접 투자한 공기업을 정부투자기관이라 하며 우리가 흔히 공기업이라 할 때는 이 정부투자기관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은 정부가 내입자본의 5할이상을 출자한 기업체 를 정부투자기관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다만,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의 경우는 정부출자울이 1983년말 현재 14%이나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법에 의하여 정부투자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정부추자기관은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데 임원 명칭, 임명방법, 임기가 통일 되어 있고 정부의 예산, 결산상의 통제를 받으며 감사원법의 규정에 의하여 그 회계는 필요적 검사사공으로 되어있다.(2) 간접투자기관간접투자기관은 정부투자기관이 다시 투자한 기관으로 정부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간접적으로 출자한 공기업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의 자회사, 한국산업은행 관리기업체, 농어촌개발공사의 자회사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간접투자기관은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므로 임원의 명칭, 임명방법, 임기 등은 상법의 규제에 의하고, 정부의 직접적인 예산, 결산상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모회사의 통제만 받는다. 그런데 간접투자기관의 회계는 감사원법의 규정에 의하여 선택적 검사사공이다.5. 출자자에 의한 분류출자자에 의하여 공기업을 분류하면 국가공기업과 지방공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국가 공기업이란 출자자가 국가인 공기업 즉, 국가가 설립하였거나 투자한 공기업을 말한다. 지방공기업은 출자자가 지방자치단체인 공기업 즉,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하였거나 투자한 공기업을 말한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현재 비교적 공기업이 적은 나라에 있어서도 특히 공익사업부문에서 많은 지방공기업을 찾아 불 수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상당수의 지방공기업이 있다. 지방공기업도 형태에 따라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주식회사나 공사의 형태를 지닌 지방공기업은 드물고 대부분이 사업소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6.조직기구설에 의한 분류조보면 사기업에 있어서 조직의 운영과 의사결정에 있어서 독립성을 유지, 공기업에 있어서 는 실질적으로 어렵다. 공기업은 성격상 독점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아 경쟁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평등원칙 적용에 있어서도 공기업은 업무수행에 있어 고도의 평등성을 유지, 사기업은 고객을 평등하게 대우할 필요가 없다. 사기업은 영리를 최고 목적, 공기업은 공공의 이익이 시장에 대한 노출정도에 있어서도 공기업은 사기업에 노출정도가 낮다.{생존목표목표의수주변환경산출율성격설립근거활동준칙정부통제운영자율성조직상제약인사상제약예산상제약투자결정이윤귀속소유주체가격결정공기업공익추구다수독점적공공재 사적재특별법정치성 경제성강약중중중정치적분단소비자/국민정부/국만정치적보상추구국가기간에비해상대적으로약함사기업사익추구단일경쟁적사적재상법경제성약강약약약경제적가치판단주주개인경제적타당성Ⅵ. 공기업의 장·단점1. 공기업의 장점우선 자본조달이 비교적 쉽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출자하므로 자본조달 능력이 크며 자본을 증자하는 경우에도 저리로 공채, 발행, 융자를 통해 거액 자본조달 할 수 있다. 공기업의 수입은 재정수입이 되는 동시에 조세나 그밖의 공과금이 면제되는 경우가 많다. 조세가 감면되는 예가 많다. 공기업은 독점적인 기업인 경우가 많은데, 사업운영에 있어서 이런 독점적 지위에 서게되어 유리한 점이 많다.2. 공기업의 단점무엇보다도 정치적 간섭을 배제할 수가 없다. 정부기업은 정부의 통제하에 놓여 있으므로 의회제도, 정당정치의 성패에 의해 공기업 관리자가 번번히 교체되어 경영 정책의 일관성과 계속성을 유지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또한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법령이나 예산에 의해 구속을 받으므로 기업경영상 자유재량의 범위가 좁다.Ⅶ. 공기업 운영 실패 원인1. 효율성을 무시한 공공성공공부문이 갖는 비효율성의 원인으로서는 공기업과 공공부문의 경제활동은 공공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공공성이라는 개념 중에는 외부효과와 공공재적 성격을 중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공기업은 있다.
    사회과학| 2004.09.16| 18페이지| 3,0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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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폼페이 고고학] 폼페이에 대한 모든 자료
    머 리 말쾌락의 도시 폼페이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하게 된 것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 영화와, 책으로 나와 있었고 거기에 대한 많은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폼페이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이런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무더기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바로 화산폭발에 의한 화산재로 그 당시의 생활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때 시간이 정지되어서 1,700년 뒤에 나타나다니.본 론◈ 유적의 입지적 환경- 이탈리아의 고대도시.- 캄파니아 주 북서부 나폴리안 남서쪽 23km 베수비오 산 남쪽 기슭에 있음.- 약 3km둘레의 타원형 도시,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성문 8개,- 길은 바둑판처럼 구획정리하고, 7m 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 인도가 양옆으로 有-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시설이 有 ⇒집집마다 수돗물을 사용- 도시 중앙의 광장 주변에는 공공시설(시청 공회당, 신전, 시장, 투표장)이 갖추어져 있음.- 상가나 공장, 주택 외에도 12,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원형 경기장 有◈ 폼페이의 역사폼페이는 BC 7세기의 해양제국마에 항복하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부터 AC 79년 8월 비운의 날까지 약 160년간 이곳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인의 귀족들의 도시로 번성했다.폼페이 최후의 날서기 79년 8월 24일, 나폴리로부터 12km떨어진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야채나 생선을 실은 짐마차가 거리에 돌아다니고 주민들도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나 일을 시작했다. 도시는 활기에 차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해마다 이맘때쯤 시장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오 무렵, 베수비오 화산으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폼페이로 날아들었다. 빵을 구으며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였다. 화산폭발은 며칠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향락과 번영의 도시 폼페이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폭발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전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8월 중순경부터 작은 규모의 지진이 계속하여 일어났으나 폼페이는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1,700년이나 흐른 뒤,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잇던 폼페이는 우연히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 말기 나폴리 왕이었던 샤를르는 이웃 나라의 공주 마리아 크르스티네를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왕궁을 장식할 미술폼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날, 왕궁을 출입하는 상인이 근사한 큐피트 조각상을 가지고 찾아왔다. 정교한 조각상을 보고 마음이 흡족해진 왕은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았다. 상인은 며칠 전 베수비오 화산 기슭을 지나다가 땅에 박힌 무언가를 발견하였고 하인을 시켜 그것을 파보게 하였다. 그렇게 다른 파편들과 함께 큐피트 상을 발견한 것이라고 상인은 말하였다. 이때부터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다.폼페이 중심부 주요건물폼페이의 도로폼페이의 거리는 다각형의 돌들 혹은 용암바위로 포장되어있다. 이도로들은 물이 양가로 흐를수 있도록 하기위하여 중앙에 약간 높은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포장도로는 원도로보다는 높이 설계되어 있고 도로를 따라 놓여있다. 또한 보행자들이 건널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폼페이었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약 17년 전, 즉 서기 62년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열한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경석과 재가 뿜어져 매 시간당 15cc씩 돌과 잿가루로 길거리, 동네, 정원은 물론이고 가옥들의 문지방을 넘어서 집들도 천천히 파묻히게 되자 잿더미는 엄청난 무게로 변해갔고 지붕 위의 재와 돌은 대부분의 가옥들을 무너뜨렸다. 집들이 무너지자 주민들은 창고로 대피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제일 견고하게 지어진 곳이라 생각되는 방으로 피해 결국은 이곳 저곳이 서로 엉켜 한 곳에 뭉치고 서로 부딪치기도 하는 동안에, 문들은 봉쇄되기 시작했다.-피난 많은 사람들이 민가를 버리고 지진이 없는 시골을 찾기도 했다.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는 망토나 방석을 뒤집어쓰고 돌 잿더미 위를 걸어 피신하는 폼페이인들은 목적지 없이 무작정 움직이는 피난민들이었다. 그동안 계속 성을 내던 화산은 자정 즈음 약간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가스와 화산암 덩어리를 분출해 내면서 바위조각들을 화산 등성이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유황과 염소, 화산암 조각들과 바위 조각들이 뒤섞인 가수가 잇달아 뜨거운 열풍이 되어 화산 등성이에 퍼지고 그 지역을 불태워 휩쓸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진흙 사태와 쇄설성의 뜨거운 잿더미가 물에 범벅이 되자 속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에르콜라노의 상황 진흙더미나 물과 재가 섞인 잿더미들은 모두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는데 그 곳은 급류가 흐르는 두 개의 대협곡으로 싸인 해각으로서 바로 에르콜라노 시가가 위치한 곳이었다. 여기 이 곳 주민들은 하루종일 윗동네에서 일어난 엄청난 광경들을 지켜봤지만 그 순간까지는 엄청난 굉음조차도 그다지 무서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고 손톱만큼의 재도 날아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그들도 만약의 비상사태를 감안해 이미 집들을 버리고 바다 쪽으로 피신을 시도했는데 및 시작▷발굴의 계기- 첫번째 계기 중세 말기 나폴리 왕이었던 샤를르는 이웃 나라의 공주 마리아 크리스티네를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왕궁을 장식할 미술품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날, 왕궁을 출입하는 상인이 근사한 큐피트 조각상을 가지고 찾아왔다. 정교한 조각상을 보고 마음이 흡족해진 왕은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았다. 상인은 며칠 전 베수비오 화산 기슭을 지나다가 땅에 박힌 무언가를 발견하였고 하인을 시켜 그것을 파보게 하였다. 그렇게 다른 파편들과 함께 큐피트 상을 발견한 것이라고 상인은 말하였다.- 두번째 계기 왕비가 된 크리스티네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 산 기슭을 파헤쳤다. 이 발굴에서 청동 조각품 몇 개를 찾아냈고 ‘헤르쿨라네움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그들은 화산폭발 당시 용암에 파묻혔던 헤르쿨라네움)을 찾아낸 것이다.- 막무가내식 발굴 1748년 4월 1일,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또다시 산기슭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4월 6일에 돌기둥을 발굴했는데 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더 깊이 파 들어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건물 벽의 잔해가 나왔다. 4월 19일, 청동제 조각과 대리석 조각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사람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폴리 왕국은 떠들썩해졌고, 출토된 보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 얼마 뒤 원형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1754년 이 곳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를르 국왕은 그저 보물찾기에 혈안이 되어 이곳저곳 파헤치기만 했다.- 빙켈만의 참여 1755년 6월,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은 자기 집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小)프리니우스의 “서간집”을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던 곳이 바로 폼페이라는 다.
    교육학| 2004.07.07| 12페이지| 2,000원| 조회(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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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화사]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평가A좋아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답사코스:경주시-강동면 양동마을-안강읍 옥산동 옥산서원과 독락당●답사소요시간(1일코스):대구(어린이대공원앞, 09:00)-(경부고속도로, 하행선)-경주I.C.-경주시경유(안강읍방면)-양동마을(10:30-14:00, 중식 13:00-14:00)-(안강읍경유)-옥산동 옥산서원 및 독락당(14:20-16:00)-(국도이용,영천경유)-대구(어린이대공원앞, 18:00)●답사지 길안내:대구-경주I.C.-(25km)-양동마을-(10km)-옥산동(옥산서원, 독락당)-대구1.양동마을?경주와 유교문화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대문화(古代文化)와 불교문화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교문화(儒敎文化)가 융성하였던 곳인데, 유교문화유산의 규모나 질적인 측면, 그리고 보존상태가 전국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여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보고(寶庫)이다.국보를 포함한 문화재가 즐비한 양동마을과 현재 남아있는 20여개의 서원, 향교, 정자, 영당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이들이 잘 보존된 까닭에 내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유교문화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양동마을의 역사양동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墓制)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백여 기나 있었다는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 (B.C.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경북지방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어서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調)라 일컫는 양민공(壤敏公) 손소(孫昭종손 손성훈씨는 손소의 20대손이고, 여강 이씨 종손 이지락씨는 이언적의 17대손이다.?마을규모와 자연환경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主山)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文章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 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많다.물(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혈자가 된다고 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안으로의 철도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내곡(內谷), 물봉곡(勿捧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 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渴求德)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이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500여 년의 전통의 향기를 품은 총 160여 호의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는 큰 마을이다.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 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마을의 진입로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황토길을 걸어서 답사하다 보면 마을의 규모와 정취에 감탄하게 된다.?문화재양동마을은 유가(儒家)의 법도와 선비 기풍으로 5백년을 다녀 오면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보기 드문 반촌(班村)이므로 전통문화와 한국적 정취가 가장 완벽하게 살아 있다.이 마을의 문화재 수는 국보1, 보물 4, 중요민속자료 12, 유형문화재 2, 기념물 1, 민속자료 1, 문화재자료 1, 향토문화재 2점으로 도합 24점이나 되고, 마을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또 옛 명문 대가의 영광스러운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 있는 200년 이상 된 고가 54호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외거하인들이 살던 가랍집이라 부르던 초가집이 3-5채씩 반드시 딸려 의 전통문화 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학문과 교육의 장으로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왔다는 점이다.조선 중기부터 조선사회와 중앙정계를 지배한 사림(士林)들 중에서 매우 앞선 시기인 세조 5년(1459년)에 이 마을의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공신이 되고 이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손중돈 선생이 성종 20년(1489년)에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 우참찬 등 40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고 청백리에 올랐다.대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언적 선생은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이황(李滉)에 앞서 최초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조선조 성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해동부자(海東夫子)라 불리어 지고 동방 5현의 한 분으로 추앙받으면서 종묘배향(宗廟配享)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역대 임금 및 공자와 함께 위패가 모셔지는 영광을 누렸고, 전국의 향교(鄕校)와 20여개 소의 서원(書院)에 배향되기도 했다.손씨, 이씨를 합쳐서 문과급제 26명, 무과급제 14명, 생진과 급제 76명으로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이나 되고, 음직은 부지기수였을 정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됨으로써 전국에서 가장 이름난 양반마을로 알려지게 되었다.조상들의 학문에 대한 전통이 계속 이어져 일제시대에는 일본과 서울 유학생이 이 마을에만 20명이 넘었으며, 최근까지 장관 2명, 교수 60명, 판?검사가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후손들이 번성하고 있다.경제력안락천(安樂川)을 끼고 마을 서쪽 10여리에 펼쳐진 광활한 안강평야가 마을을 지탱한 경제력의 바탕이었고, 물(勿)자형 산곡이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兄山江)을 역수(逆水)로 안는 형태를 하고 있어서 이것이 마을의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1930년대까지 이 마을에 1,000석 이상의 부자가 다섯집이나 있었다고 한다.서쪽 능선과 성주산 자락에 오르면 드넓은 농토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옛날에는 형산강과 안락천의 수량이 많고 수심이 깊어서 포항쪽의 고깃배들이 종가, 파종가의 정자에서 여름동안 일곱 번의 놀이를 했는데 5월 그믐에 개장하여 유두, 초복, 중복, 말복, 칠석, 입추, 처서 때에 음식과 시창(詩唱)으로 양로(養老), 위안하는 행사였다.해마다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줄다리기」를 했는데, 이때는 아랫마을과 웃마을로 편을 갈라 온 마을 사람들이 총 동원되었으며 이것을 구경하기 위해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하나의 장관을 이루었고, 줄이 9세-10세 아이의 키를 넘었을 정도로 굵었다고 한다. 지금도 정월 대보름에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며 구경오는 사람들이 많다.삼복(三伏)이 자나고 세벌 논을 다 맨 뒤에는 부락 머슴들의 놀이 행사로「호미씻기」를 했다고 한다. 그 동안 농사를 제일 잘 지은 머슴을 뽑아 주인집을 향하여 농악을 울리며 소를 거꾸로 타고 신나게 들어가면 주인은 이에 떡과 술 등 특별히 마련한 음식을 내어 놓아 온 마을의 머슴들이 이 음식을 들고 나와 별도로 자리를 정하여 하루를 즐겁게 놀고, 이 때 농악대를 이끌고 동네를 돌며 지신(地神)밟기를 해 주면 음식을 내어 놓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이 놀이는 농사일에 고생한 머슴을 위로하고 주인과 머슴이 다 같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여유있는 놀이였다. 이와 같이 양동마을은 당시의 마을환경, 교육과 정서, 신분계층의 질서, 가옥구조 등 조선시대 문화환경이 집약된 곳이다.?양동마을의 국가지정문화재-무첨당(無?堂) 보물 제 411호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藩)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에 달린 별당으로, 제청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별당이다.무첨당(無?堂)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글씨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영남의 풍류와 학문’이라는 뜻이다.-향단 보물 제412호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특히 양반집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랍집(초가) 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서백당 중요민속자료 제 23호안골 중심지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양민공 손소 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가집이다.서백당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은 하루에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이다.집터를 잡아준 풍수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이 터에서 세 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 예언했다 하는데, 손소 공의 둘째 아들로서 명신이자 청백리인 손중돈선생과 그의 생질이 되는 이언적 선생의 어머니가 친정에 와서 해산함으로써 이곳에서 태어났고, 한 분은 아직 미탄생이라 한다. 사랑채 마당에 서면 경관이 빼어나고 평화와 행복의 요람처럼 느껴진다.서백당의 안마당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 8호로 지정된 수령 5백년이 넘은 향나무가 한껏 위엄을 부리며 기품있게 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이 향나무 외에도 수령이 수백년 된 향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낙선당 중요민속자료 제 73호손중돈 선생의 아우되는 손숙돈 공이 분가한 집으로 1540년(중종 35년)경에 건립된 주택이다. 지금은 낙선당 손종로 공의 파손댁이며, 당시 양반 부잣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수졸당 중요민속자료 제 78호회재 선생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 공이 1616년에 건립했고, 그의 호를 따라 수졸당이라 부른다. 정조 임금때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낸 양한당 이정규공이 태어나기도 했다 .현재 주인 이종환씨는 이의잠 공의 14대 손이자 회재 선생의 16대 손이다.수졸당의 반월정원은 산 언덕을 그대로 살려서 반달모양으로 꾸민 정원으로 무척 아름다워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적격이다.-두곡고택 중요민속자료 제 77호거림에 있는 대표적인 대가옥의 하나이다. 이준상공이 1730년 건립했고, 후에 두곡 이조원공의 소유다.
    인문/어학| 2004.07.07| 9페이지| 2,000원| 조회(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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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화사] 경주 양동마을에 대한 모든것 평가A+최고예요
    경주 양동마을1. 역사?지리적 배경가. 양동마을의 역사양동마을은 경주에서 포항쪽으로 40리 떨어져 있다. 5백여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마을은 조선왕조시대의 여러 가지 문물을 남기고 있다.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조선왕조시대의 5현의 한 분이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1491-1553)의 고향이란 점과 손(孫)?이(李) 양성(兩姓)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반촌이자 동족부락이란 점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꽃피웠던 명현(名賢)의 고향인 양동 마을은 전국에서 지정?비지정문화재가 가장 많은 “문화재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양동마을의 입향조는 월성손씨 4세 손사성(孫士晟)의 둘째 아들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로 알려져 있다. 그는 1467년 이시애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등(敵愾功臣二等)이 되었다. 그때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그린 영정(影幀)이 지금도 가묘(家廟)에 봉안되어 있다.그는 풍덕유씨(豊德柳氏) 만호(萬戶) 유복하(柳復河)의 사위로 장인을 따라 이곳에 들어와 550여년전 현재의 월성손씨(月城孫氏) 대종가의 서백당(書百堂)(일명, 송첨(松?))을 신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로는 풍덕유씨 후손이 한 사람도 살지 않으므로 손씨문중에서 오늘날에도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고 있다.입향조 논소는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그의 차자(次子)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4-1529)은 이조판서와 좌, 우참판을 지낸 정치인이다. 우재선생의 여동생은 여강이씨(驪江李氏) 이번(李蕃)에게 출가하여 두 아들을 낳았으며, 그 장자(長子)가 회재 이언적선생이다.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양동마을이 “외손(外孫)의 마을”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외손이 번창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지나간 6백여년동안 손?이 양성집단이 갈등과 경쟁,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면서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고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족문화의 원류를 찾고 이를 계승?발전시켜 나가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나. 양동마을의 문가에서의 지정문화재로는 국보 1점, 보물 3점, 중요민속자료 12점이 있고 지방문화재로 유형문화재 3점, 천연기념물 1점 등 모두 20점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고문서, 고가옥 또는 정자들인데, 이렇게 지정문화재로서의 고가옥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전국에서 보기 드물다. 오히려 문화재로 지정된 고가옥의 수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이 중 무첨당(無?堂)(보물 411호)은 여강이씨 대종가의 부속건물인데, 건물의 평면이 ㄱ자형을 이루는 별당건축물로 정면 5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향단(香壇)(보물 412호)은 회재선생이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였을 당시(1543년) 건립하였다는 조선중기건물로 총 51간의 주택이다. 1975,76년간에 해체, 복원되었으며 이 마을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대저택이다.관가정(觀稼亭)(보물 442호)은 건물전체의 평면이 ㅁ자형을 이룬 주택건축으로 월성손씨 대종가 소유이다. 오백여년 된 우재선생의 고택으로 조선중기건물이다.월성손씨 대종가인 손동만씨가옥(孫東滿氏家屋)은 일명 송첨 또는 서백당이라 불리우며 양민공 손소가 29세때인 1461년에 장인의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지었다고 한다. 1970년 12월 29일 중요민속자료 23호로 지정된 이 고가에는 당시 기념으로 심은 향나무(지방문화재 8호)가 5백년이 넘는 풍상을 견디어내면서도 그 웅자를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우재선생과 그의 생질인 회재선생이 출생하였으며 속설에는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 하여 앞으로도 또 한 사람의 위인이 탄생될 것이라고 한다.그 이외의 지정문화재는 낙선당(樂善堂)(중요민속자료 73호, 1540년경 건립), 이원봉씨(李源鳳氏)가옥(74호, 1840년경 건립), 이원용씨(李源鏞氏)가옥(75호, 1730년경 건립), 이동기씨(李東琦氏)가옥(76호, 1780년경 건립), 이희태씨(李熙太氏)가옥(77호, 1730년경 건립), 수졸당(守拙堂)(78호, 1610년 건립), 이향정(二香亭)(79호, 1695년 건립), 수운정(水雲亭)(80년경 건립), 안락정(安樂亭)(82호, 1780년경 건립, 손씨문중 서당), 강학당(講學堂)(83호, 1870년경 건립, 이씨문중 서당) 등이 있다.비지정문화재로는 두곡영당(杜谷影堂), 설천정(雪川亭), 양좌영각(良佐影閣), 낙선당비(樂善堂碑), 경산서원(景山書院), 월성 양동리 성지(城址) 등이 있는데, 이 모두가 역사적으로 깊은 의의를 가진 고가이며 유적들이다.양동마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옥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 마을의 가옥은 과거신분에 따라 그 형태나 규모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또한 가옥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와 고도는 종손과 파종손, 지손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해주고 있다.고가옥들은 마을의 지형인 “물(勿)”자형 골짜기를 따라 구릉선상에 위치해 있고 각 구릉의 제일 높은 능선상에 손?이 양가문의 대종가(大宗家)나 파종가(派宗家)가 위치해 있다. 이들 고가(古家)에는 과거 솔거노비(率居奴婢)들이 거주하던 행랑채가 따로 있는 것이 보통이고 외거노비(外居奴婢)들을 수용하기 위해 초가인 “가랍집”을 서너채씩 그 보다 낮은 위치에 거느리고 있었다. 8?15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가랍집의 수가 40여채에 이르렀다고 한다.다. 지리적 배경양동마을은 안강평야의 한 쪽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북에서 흐르는 안락천(安樂川)과 남에서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이 합류하여 동해로 흐른다. 마을의 북서와 남동에 두 개의 산봉우리, 설창산(雪蒼山)(95m)과 성주봉(聖主峰)(109m)이 마주 쳐다보는 그 사이에 “물(勿)”자형의 골짜기와 능선에 가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철에는 숲에 가려 고색이 창연한 수백년된 고가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口”자형의 고가들은 높은 언덕 위에 널려있어 “양동처녀 엉덩이는 하회에서도 보인다”는 우스개말이 있을 정도이다. 전형적인 반촌으로서 배산임수(背山臨水)에다 너를 들판을 마을 앞에 두고 양반문화를 꽃피웠을 양동마을은 그 위치 덕분에 수 많은 병화를 겪지 않고 지내올 수 있었던 것 같다.19세기 초엽까지는 양좌동(良佐洞)이란 6개 자연부락을 거느린 대촌(大村)으로, 1769년에는 325호를 포괄하고 있을 정도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양동마을만 208가구이던 것이 2000년말에는 142가구로 감소하게 된다. 씨족별로는 월성손씨 15가구, 여강이씨 72가구로 전체의 6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점차 타성가구의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이 양동마을을 일컫는 칠언절귀(七言絶句)가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兄山江北 第一門 行人下馬 萬古尊忠勳元老 襄敏廟 東方夫子 晦齋村」(『樂善堂實記』중에서)2. 민속마을 지정경위양동마을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것은 1984년 12월 24일이다. 그에 앞서 같은 해 1월 10일에는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 6월 7일에는 제주도 정의고을(성읍 민속마을, 중요민속자료 제188호)이 속칭 민속마을로 지정된다. 전남 승주군의 낙안마을은 읍성과 함께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양동마을의 고가옥들은 1965년에 보물(3점), 1970년에 중요민속자료(1점)로 문화재지정을 받았으며 1979년에는 중요민속자료로 11점이 추가,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후 경상북도에서는 이 마을을 민속경관구역으로 지정하여 보존책을 강구하던 중 1984년말에는 국가에서 마을 전체의 보존을 계획하기에 이른 것이다.3. 회재선생과 우재선생회재선생은 조선조 중종(中宗)대의 현신(賢臣)으로 그의 사후 “동방(東方)의 주자(朱子)”라 평가되는 퇴계(退溪) 이황 선생(李滉 先生)(1501-1570)에 의해 동방희유(東方稀有)의 유자(儒者)로 인정, 동방사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는 대유학자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영남학파의 종광(宗匡)인 퇴계선생을 자극하였다거나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한다.그는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12세부터는 외숙(外叔)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김종직문인(金宗直門人), 1489년 식년무과(式年武科), 양산군수(梁山郡守), 상주목사(尙州牧使), 우참찬(右參贊), 대사간(大司諫), 도관찰사(道觀察使), 청백리(淸白吏) 되고 후에 대학자가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가 소위 학문연원수수설(學問淵源授受說)을 낳게 된다. 손?이 양성간의 전수(傳授)와 부전수(否傳授) 주장은 양 문중간의 갈등으로 대두되어 오늘날에도 그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회재선생은 27세때인 1517년 또 다른 그의 외숙인 우재 손중돈과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간의 무극태극설(無極太極說)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인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를 몇 차례에 걸쳐 쓰게 된다. 퇴계선생의 회재선생에 대한 평가는 후일 이에서 비롯된다.그는 문과급제 이래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1547년 양재역의 벽서사건(壁書事件)에 관련, 강계로 귀양가 7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1553년 세상을 떠난다. 그후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配享)되고 선조대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된 뒤 1610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기에 이른다.그의 저술로는 「대학장귀보유(大學章句補遺)」를 비롯한 10여종 50여권이 있는데, 1535년에 쓴 시문(詩文)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은 파직 후 고향에 내려와 쓴 것이다. 이 중 한 수(首)인 「추성(秋聲)」이란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이원재 역, 1984)「오늘밤 솟은 달빛 한없이 밝았구나난간에 기대앉아 조용히 들어보니상(商)소리 한 곡조를 아느니 없건마는귀밑에 흰 털만이 몇 개나 돋아났네」4. 동족조직과 생활관습양동마을에는 아직까지 조선시대의 신분제의 잔재가 남아 있다. 물론 제도상의 신분제는 사라졌으나 신분의 표시물이라 할 수 있는 종가(宗家)와 정자(亭子), 서당(書堂), 재실(齋室), 가묘(家廟), 영각(影閣), 비각(碑閣) 등 고가옥과 족보(族譜), 문집(文集), 분재기(分財記) 등 고문서 그리고 위토답(位土畓) 등이 남아 있다.반상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는 상조계(相助契)에서도 볼 수 있다. 손?이 양가문과 타성받이가 각기 독립된 계를 조직하고 있으며 양 문중의 동족조직은 문중 전체나 파 별로 구성되어 있다. 손씨문중의 경우 4개파, 이씨문중의 경우 5개파로 구성되어 있으나 손씨들.
    인문/어학| 2004.07.07| 5페이지| 1,500원| 조회(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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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재] 21세기 목재의 최첨단 이용 기술 평가B괜찮아요
    INDEXⅠ서론Ⅱ목재의 이용1. 펄프2. 제지3. 목재 탄화4. 목재 주택Ⅲ바이오매스의 이용1 바이오매스의 에너지화와 화학원료화2 목재 등에서 에탄올의 생산3 생물공학에 의한 바이오매스의 생산4 식물배양세포에 의한 물질생산Ⅳ 대체 에너지원으로서의 임산자원1. 대체에너지원으로서의 산림 및 Biomass 생산 가능성2.에너지원으로 이용전망3. Biomass 이용 실례Ⅴ 결론Ⅰ서론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목재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고 또한 목재를 생활해 나가는데 있어서 많이 사용한다. 목재 문화라고 하는 것은 목재와 관련된 인간의 모든 활동의 과정과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것을 인간생활에 맞게 다시 만들어 또 다른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에게 나무가 주는 유익함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수목과 이들로부터 생산된 목재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나무와 오랫동안 동반하면서 불을 발견함과 동시에 인류의 문명을 발달시켰다. 목재는 용이한 가공성과 다양한 용도를 지니면서 우리 생활환경 주위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재료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주거용 움막, 땔감, 무기 등의 각종 생활용구로 폭넓게 이용되어 왔다.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목재는 가구, 악기, 주택, 교량, 선박, 자동차, 비행기, 펄프, 제지, 바이오에너지 등으로 그 용도가 더욱 확대되어 왔으며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재료로부터 아름다운 외관과 자연미를 지니는 목재가 건축의 내외장 재료로 점점 대체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목재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주거용 움막, 땔감, 무기 등 다양한 종류의 도구로써 인류의 생활에 이용되어 오고 또 운송용, 도구 및 무기용, 건축용, 가구용, 목질복합재료용, 제지용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이렇듯 우리가 사용하는 목재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이 생활하는데 밑거름이 되어 함께 발전 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목재는 태초부터 인간에게 유용한 재료로 이용되어 게 되었다. 목탄tar 등도 물론 광범한 용도가 있으나 석탄tar, cokes에 비교해서 劣等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석탄을 원천으로 하는 근대화학공업에 그 지위를 양도한 것이다.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융성한 목재건류공업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여겨진다.-제재-벌채하여 조재해서 운재된 통나무를 원목 그대로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목재는 판재나 각재로 변형시켜 이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목재의 원형을 최초로 변형시키는 공작 수단으로 제재라 하고, 자본과 노동력을 갛여 경제적으로 사업화하는 것을 제재업이라 한다. 제재의 목표는 비싼 제품을 최대다량생산하는 데 있다.4. 목재주택목조주택이란 주택을 포함한 모든 건축물을 건축할 때에는 그 공정상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뼈대를 이루는 골조(구조체)공정이고, 둘째는 그 뼈대에 살을 입히고 화장을 하는 마감공정이다. 목조주택이란 이 두가지 공정 중 뼈대를 이루는 구조체를 목재로 건축한 주택을 말하며, 만약 구조체를 벽돌로 하였다면 조적조주택, 구조체를 콘크리트로 하였다면 콘크리트주택, 구조체를 철골로 하였다면 철골주택으로 분류 할 수 있는 것이다.즉, 목조주택이란 목재를 구조체로 하여 지어진 주택을 말한다·목조주택의 발전 과정목조주택의 시작은 18세기경 북미로 유럽인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처음 짓기 시작한 통나무 주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통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짓던 이들은 통나무 원목을 원목이 아닌 얇은 판으로 자른 후 집을 지으면 보다 적은 양의 자재로 보다 빨리, 각자가 원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차츰 통나무 대신 원목을 자른 각 재목을 사용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이러한 통나무를 자른 각 재목을 사용하여 집을 짓는 것이 19세기에 들어서는 보편화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19세기의 카우보이 영화 안에서의 집들을 보시면 잘 알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건축업이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목재들은 제재소에서 규격화된 크기의 목재로 잘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목재를를 자주 시키지 않아도 항상 신선한 실내 공기를 유지한다.※높은 단열 성능적정하게 시공된 경량 목구조는 일반적으로 에너지 효율이 매우 뛰어나다. 목재의 단열성은 콘크리트의 7배, 철의 176배, 일반 단열재의 1.5배이다. 최근 시공방법은 더욱 두꺼운 단열재를 사용하거나 외장 마감 전에 벽체에 고형 단열재를 시공하는 방법으로 단열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또 스터드, 장선, 서까래 사이의 중공을 유리섬유와 같은 단열재로 충진함으로써 높은 단열성능을 발휘하게 된다. 실제로 같은 평수의 목구조주택과 일반 주택을 비교할 때 냉.난방비를 30%정도 절약할 수 있다.※내화구조에 의해 화재 안전경량 목구조의 내화성능은 일차적으로 내장 석고보드에 의존한다. 벽과 천장에 시공된 석고보드는 20분에서 2시간의 내화성능을 지닐 수 있다. 석고보드가 구조용 목재로부터 폭발성 물질의 접촉을 충분히 보호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화염의 진행속도가 느리며 일정 치수 이상의 목재는 강철보다 열전도율이 훨씬 낮아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쉽게 불이 붙지 않고 유독가스 발생이 적어 인명, 재산의 피해가 적다.충격 흡수력이 뛰어나 지진과 태풍에도 강해 구조재로써 목재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목재는 다른 재료와 비교할 때 무게에 비해 강도가 높고 목재 자체가 유연성을 갖고 있어 건축물의지지 무게를 최소화 한다. 1995년 일본 고베 지진이나 1994년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진 경우에도 목구조주택의 피해는 타구조보다 훨씬 적었음을 증명하고 있다.목구조주택은 평균 내구년수가 50년 이상이며, 보수유지를 철저히 할 경우 200년 이상도 사용할 수 있다. 예로 우리나라의 최고 목구조 건축물이 15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는 사실과 선진화된 목구조 주택의 경우 보존상태가 양호한 경우 백년이 넘는 주택을 도심이나 교회 지역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설계 가변성과 응용성구조체를 구성하는 각 부재들, 즉장선, 스터드, 서까래 등이 가변성을 지니고 있어서 거의 모든양식, 어떠한 형태의 건축물에서도 쉽게 조립되있다.발암작용 : 목재분진에 의해서 코 및 鼻腔의 腺癌 원인이 됨Ⅲ 바이오매스의 이용1. 바이오매스의 에너지화와 화학원료화바이오매스에서 주로 에너지와 화학원료(플라스틱, 합성섬유, 그 밖의 화학공업품 원료)를 석유에 대신하여 얻으려는 연구가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바이오매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재와 사탕수수등의 사탕생산식물 및 캬사바, 고구마, 옥수수 등의 녹말생산식물이다. 목재는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지금도 중요한 에너지원으로서 장작과 숯이 취사나 난방에 쓰여지고 있다. 따라서 석유나 석탄이 없는 곳(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대부분이나 네팔등)에서는 삼림의 급속한 황폐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되어 있다. 선진국에서는 목재를 사용하는 발전 및 보일러를 개발하려는 시도도 있으나 대규모의 것은 적고 현재의 연구 동향은 바이오매스에서 에탄올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2. 목재 등에서 에탄올의 생산배지 현재 에탄올은 석유를 원료로 하는 외에 폐당밀,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의 즙, 미국 등에서는 여러 가지 녹말을 원료로 하여 만들고 있으나 목재를 원료로 하는 것은 소련에서 시행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목재를 원료로 하는 포도당 및 에탄올 생산의 역사는 길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 이탈리아, 소련, 미국, 일본에서 목재 가수분해 공장이 건설되고 얻어진 포도당에서 다시 에탄올이나 사료용 효모가 제조되었다. 전후에도 세계적으로 식량 사정이 나쁠 때가 있어서 미국, 일본에서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 종래 목재의 가수분해는 산에 의한 방법으로서 시행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셀룰라아제 혹은 셀룰라아제를 생산하는 균(Trichoderma viride등)을 사용해서 시행하는 방법이 주로 연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셀룰아제와 반응하는 목재의 표면을 충분히 넓히는 것이 필요하며 여기에 소요되는 원가를 내리는 방법으로서 목재의 푹쇄(팝콘을 만들 때처럼 목재에 온도와 압력을 걸어두고 급속히 압력을 저하시켜 분쇄한다)나 목분 혹은 표면적이 큰 이하게 대장균으로 클로닝할 수 있다. 현재 세계에서 처음으로 소나무류에서 4종, 포플러에서 2종, 유카리류에서는 2종, 합계 8종의 ctDNA의 추출에 성공하여 제한효소에 의한 DNA절편을 다수 얻어냈다. 또한 해송(Pinus thunbergii)에서는 전 영역에 걸쳐 클로닝에 성공하여 물리지도를 만드는 단계에 도달했다.4) 세포융합원형질체(나출된 세포)를 배양하려면 먼저 원형질체를 분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목본성식물에서는 이 기술이 어렵다. 활성이 높은 원형질체를 잎이나 캘루스에서 자유롭게 분리해 내려면 보통 셀룰라아제 오노쯔카 RS와 펙토리아제 Y-23이라는 효소를 병용하는 것이 좋다. 또한 박테리아의 오염이 없는 원형질체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배양에서 얻은 무균묘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런데 목본성식물에서 원형질체배양의 성공 예, 즉 단세포에서 완전한 식물체를 재생한 예는 세계에서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예를 들면, 감귤류(Citrus spp., 바데이 등, 1982), 닥나무등에 한덩되어있다. 목본성식물에서 세포배양의 어려움은 조직배양과 같이 폴리페놀류의 분비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된다. 또 최근에는 소나무, 포플러나무 등에서도 콜로니 형성을 하고 있으므로 가까운 장래에 식물체까지 재 분화시킬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목본성 식물에서는 일반적으로 원형질체의 배양이 어렵기 때문에 세포융합에 의한 잡종식물의 육성은 꿈같은 이야기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1,2년 사이에 대단히 흥미깊은 성과가 얻어져 있고 이제는 임목에도 세포융합에 의한 잡종 창조의 시대가 온 느낌이 있다.4. 식물배양세포에 의한 물질생산식물세포의 대량 배양기술이 확립되면 식물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유용물질을 계절, 기후, 토양, 지리적 조건 등 생육 환경조건에 좌우되는 일이 없이 생산할 수있다. 또한 우량주의 육성, 배양조건의 조절로 목적하는 유용물질의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게 된다.
    자연과학| 2004.07.07| 12페이지| 2,000원| 조회(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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