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인류의 역사와 함께 줄기차게 변화하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 중에 속담이 있다.속담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쉽게 흘려버릴 것 같은 짧은 한마디에 불과 할 수 있지만 그 말 속에 포함되어있는 무궁무진한 철학적 진리는 천 마디, 만 마디 미사여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우리 겨레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전해온 속담은 조선 시대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렀으며 비수처럼 날카로운 속담으로 길고 긴 당쟁을 비유한 이야기, 일제 강점기나 자유당 말기의 서민적 풍자는 가히 절정에 이르고 있다.속담에는 그 나라 국민의 특성, 정신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속담을 통해 그 민족의 역사, 종교, 미신, 풍속, 제도, 인정 등을 아우르는 민족적, 사회적 관습인 에토스를 살필 수 있다.지금부터는 한국인의 속담을 ‘인생과 운명’ 의 측면에서 분류하여 각각의 속담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 본 후 그 속에 담겨 있는 한국인의 민족적 정신을 추출해 보기로 한다.한국인의 인생관, 운명관, 삶의 자세현재 전해지는 속담을 한국인의 인생관과 운명관 및 삶에 대한 자세로 분류하여 각 속담의 의미를 알아보자.1. 생사(生事)관①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 아무리 고통스럽거나 욕된 삶이라 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②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천하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③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천하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④ 산 돼지가 죽은 석숭보다 낫다.: 아무리 천하고 구차한 처지라도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좋다.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다.: 죽는 일이 먼 것 같으나 실상은 가까이 있다.⑥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하다.: 죽은 뒤 아무리 잘 해도 살아있을 때 조금 생각한 것만 못하다.? 인용한 속담의 의미를 종합하자면, 우리 조상들은 내세보다는 현세의 삶에 더 많은 가치를 두면서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부질없는 죽음보다는 낫다는 것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자는 한국인의 긍정적인 인생관을 살펴 볼 수 있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⑤번 속담과 같이 죽음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생사에 대한 깊은 인식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생사관에 대한 속담이 많은 것을 보면 한국인이 어느 민족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많았음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으며 성실하고 근면한 한국인의 기질은 바로 이러한 인생관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2. 운명관① 팔자는 독에 들어가서도 못 피한다.(=잘 살아도 내 팔자요, 못 살아도 내 팔자): 사람의 운명은 마음대로 안 된다.② 부귀빈천이 물레바퀴 돌 듯 한다.: 사람의 운명이 쉴 새 없이 변한다.③ 삼천갑자 동방삭이도 저 죽을 날 몰랐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을 모른다.④ 팔자가 사나우니까 의붓아들이 삼년 맏이라.: 팔자가 안 좋으니까 의붓아들이 나이가 더 많다.⑤ 복 있는 과부는 앉아도 요강 꼭지에 앉는다.: 운수 좋은 사람은 하는 일마다 운 좋은 일만 생기게 된다.⑥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여자는 시집을 잘 가거나 못 가거나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⑦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 일이 안 풀릴 때는 뜻밖의 재화까지 일어난다.⑧ 안 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안 되는 놈은 두부에도 뼈라): 일이 안 될 때에는 예측할 수 없던 뜻밖의 재화까지 일어난다.⑨ 봉사 문고리 잡기: 재주가 없는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잘 했거나 무턱대고 한 일에 좋은 결과가 있을 때 쓰는 말⑩ 산 넘어 산, 갈수록 태산(= 재는 넘을수록 높고, 내는 건널수록 깊다.) : 갈수록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을 직면할 때 이르는 말? 위의 속담들의 의미를 종합하면, 한국인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알 수 있다. 삶에 있어서의 길흉화복은 인간의 힘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팔자)이라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자칫 이러한 운명관을 비관적 허무의식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겠으나, 소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 의미로 이해하기 보다는 노력하는 자세와 최선을 다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 속에서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있음을 당연하게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인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또한 인간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시시각각 자신의 삶을 주의 깊게 돌아보라는 경계의 뜻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한자성어도 있듯이 인생의 머나먼 여정에서 길흉화복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불쑥 찾아올 수 있는 것이기에 주어진 삶에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이를 통해, 한국인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자연에 순응하는 동양적 사고방식 또한 살펴 볼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고 염세적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처하고자 하는 능동적 자세가 훨씬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한국인의 내면에 기저해 있는 긍정적이면서도 건강한 사고방식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자연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도 엿볼 수 있다.3. 희망적 삶의 자세① 고생 끝에 낙이 있다.: 어려운 일, 괴로운 일을 겪고 나면 즐겁고 좋은 일이 찾아온다.② 궁하면 통한다.: 사람이 궁지에 빠지면 이것을 모면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동원하기 때문에 좋은 꾀나 방법이 생기게 된다.③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 계속해서 노력하면 기어이 뜻대로 이룬다.④ 무쇠도 갈면 바늘 된다.: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힘든 일도 할 수 있다.⑤ 돌도 십 년을 보고 있으면 구멍이 뚫린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오래도록 바라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⑥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일도 오래 지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⑦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침착하게 대처하면 극복할 수 있다.⑧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시련을 겪고 나면 사람이 더 성숙해진다.⑨ 상전벽해 되어도 비켜 설 곳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아무리 큰 재해가 닥쳐오더라도 살아날 희망이 있다.⑩ 죽는 수가 닥치면 사는 수가 생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위 속담들에 담긴 의미를 종합해보면, 선조들의 지혜와 기지, 인내심, 긍정적 사고관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의식, 지혜로운 사태 해결 자세,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사고방식 등을 엿보게 된다. 닥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것은 숱한 세월을 통해 우리 민족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오늘날의 대한민국이 개개인의 끊임없는 노력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 할 때, 이는 무엇보다도 굳건한 정신력과 강건한 마음자세, 긍정적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숱한 시련을 겪어 왔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우리 한민족의 저력은 무한한 가능성을 늘 잠재하고 있는 폭발적 힘이었다.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 전진할 수 있다는 긍정적, 낙천적인 마음가짐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초가 된다고 볼 때 이러한 사고관이 우리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표출되어 왔다.
교육 신화교육 신화, 라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었다. 아니. 교육 신화라고? 학생을 교육시키는데 신화적인 인물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해 쓴 글인가? 아니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교육의 신, 이 있어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다닌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인가?나중에 알고 보니 '신화' 라는 말은 '16강 진출의 신화를 창조했다' 와 같이 정말 하기 힘든 놀라운 일을 했거나 엄청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 의해 참인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념을 일컬을 때도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왜 헷갈리게 시리 그런 상반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신화' 라는 말을 사용할까?'신화' 는 신을 주제로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의 이치나 자연 현상을 메타포의 형식을 빌어서 그럴법하게 꾸며놓은 것이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혹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과학적으로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간이 밝혀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참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념' 을 신화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신화에는 어떤 권위나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타성, 그리고 그 자체가 형성하고 있는 질서가 내재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깨뜨리려고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진리인 양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교육에서의 신화는 다른 여러 부문에서의 신화보다 더욱 강렬하고도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교육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부분이고 또한 교육을 통해 전수된 신화적 가치관이 다음 세대에게 아무런 반성이나 비판 없이 다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교육 현장에서 으레 그렇게 생각할 법한, 그러나 조금만 다시 생각하면 아주 잘못되었고, 심지어는 교육받는 이에게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받을 때는 가슴이 뜨끔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왜 다른 사람들은 정말 말도 안되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걸까? 라고 의아해 하던 생각들을 저자가 비판했을 때는 정말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읽었다.필자는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신화들을 세 가지 형태로 정의한다. 첫 번째 형태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문화적 신화이고, 두 번째 형태가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들에 대한 신화이다. 그리고 세 번째 형태가 이를 실제 교육 현장에 적용함에 있어 우리가 흔히 범하게 되는 오류들에 대한 지적인데, 이러한 신화들은 모두 우리가 흔히 가질 수 있는, 그래서 더더욱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의 예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목표는 행동적 용어로 분명히 기술하여야 한다' 라는 명제의 경우엔, 이것이 '신화' 라는 이름의 책 안에 들어가 있어서 제목을 보고선 '아,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하고 호기심을 가진 정도였지 만일 그게 아니라면 아마 '행동적 목표로 분명히 기술해야 하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라고 맞장구를 쳤을지도 모를 명제였던 것이다.이런 교육계의 전반을 둘러싸고 있는 신화는 일단 행동의 준거 틀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해 보이고 보다 문제를 또렷하게 부각시켜준다는 점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지지되어왔고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서건 분명한 방향제시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점을 분명한 한마디의 문장으로 제시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점이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혹은 으레 그러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왔던 사실과 다를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지금까지 용인되어왔던 준거 틀에 끼워 맞춰 문제의 본질을 축소, 혹은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바로 신화의 유지 기제였던 것이다.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여러 가지 신화들 중에서 내가 정말, 과연 그러하다-라고 받아들인 신화의 예를 나의 경험에 비추어 몇 가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이 책의 필자도 다른 여러 그릇된 신화들, 독자들도 나름대로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교육 신화들을 규명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보기를 권하지 않았던가.)책에서 저자는 '갈등은 공격과 위무간의 양자택일로 해결하여야 한다'라는 명제가 신화일 뿐, 실제로는 제 3의 선택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 제 3의 선택을 저자는 '인도적 접근' 이라는 용어로 편의상 부르고 있다.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우리는 어떤 양극을 설정해 놓고 그 양극에만 이름을 부여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선함과 악함이라던가, 추함과 아름다움, 약함과 강함, 군림과 굴종 등등... 그러나 그 양극을 수직선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의 삶은 어느 한 쪽 양극에 치우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이의 적당한 지점에 점을 찍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지점들은 적당한 이름이나 개념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편의상 어느 한 쪽으로 범주화 되고, 그것은 그 사람의 주 특질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범주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눈은 별론데 코 하나는 일품이야~ 그리고 입술도 너무 얇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긴 얼굴을 좋아해' 라고 말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못생긴 축에 들어' 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앞서 말한 신화의 양극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호 아니면 불호, 모 아니면 도 식의 사고방식은 모든 가치를 이분화 함으로써 나와 다른 생각을 모두 적으로 몰아대는 배타적인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필자가 말한 그 제 3의 방안, 즉 '인도적 접근' 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양극을 가로지르는 수직선위의 어느 한 점으로써가 아니라, 양극점의 간극을 메우는 선적인 개념으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신화를 타개해나가는 길 일테니.또한 내가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은 '정의적 영역을 중시하면 지적 영역이 약화공 수업 수강 경험으로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부분이었지만 그다지 가슴으로는 와 닿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왜냐면 솔직히- 나는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충분할 만큼 정의적 영역의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공부라고 하면 지적 능력, 그 중에서도 하위에 해당하는 지식만을 습득하는 수업을 받아왔고, 가치관이나 태도 등을 함양하는 교육은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홀하게 교육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모르면 비판할 수도 없다고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아보았던 적이 없으니 정의적 영역의 수업에 대한 갈망이나 필요성 같은 것을 그닥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요새 C. Rogers가 쓴 '학습의 자유' 라는 책을 읽고 있다. C. Rogers는 미국의 대표적인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그는 학습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강제로부터 탈피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학습을 학습자로부터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시된 예는 나로서는 많이 충격적이었다. 아무런 강제나 구속 없이 교사와 학습자의 인간적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학습자를 자율적인 학습으로 이끌고 있었다. 게다가 정의적 영역에 관심을 기울인 학습은 오히려 지적 영역의 학습 의욕까지도 자극해서 비인간적, 강제적 수업을 강행한 반보다 더욱 높은 학습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실증적인 통계 자료를 제시해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 지적 영역의 학습에도 시간이 모자라 정의적 영역의 소양을 키우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은가? 필자도 똑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학습은 객관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의 발견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학습은 결코 지적 능력이 학습자보다 뛰어난 교사 한명이 주전자에서 찻잔에 물을 따르듯 일 방향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간의 인격적인 관계 수립을 통해 학습 의욕의 자발적 고취를 불러일으킨 다음, 그것을 통다는 명제가 신화로써 교육 과정과 철학에 작용할 수 있다는 필자의 주장 또한 나에게는 흥미로웠다. 나는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다. 그리고 이 두 분야는 인문학 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또 분명한 법칙이나 원리를 밝혀낸다는 점에서 과학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교육학이나 심리학에서는 통계나 실험이 연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실험 상황은 언제나 조작적으로 통제가 되어있고, 목표나 실험 결과가 정확한 수치로 기록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교육학에서 "르네상스의 개념을 이해한다"라는 말 보다는 "중세 미술과 비교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라던가, "2차 방정식의 원리를 안다" 보다는 "3분 안에 주어진 문제를, 2차 방정식을 활용하여 풀 수 있다"라는 식으로 목표 설정하는 것을 선호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일면 더욱 정확해 보이고 가, 불가를 판단하기도 쉽다는 장점이 있으니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런 식으로 배워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화의 특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신화는 '부분적으로 참' 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부분까지도 일반화하여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행동적 목표 접근은 일면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연구 제시를 위해 꼭 필요한 목표 설정 방법이기는 하지만, 필자의 발에 따르면 행동적 목표 접근은 일반적으로 교사들에게 자기들의 과업을 마치 산업체의 경우에서처럼 목표 설정의 엄정한 절차를 통하여 분명히 하고 수업의 결과를 평가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도 그럴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수업 사태는 지극히 복잡하고 특정한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과정이고, 그 간에서 알게 모르게 (목표로 설정되지 않은 결과라고 해도) 성취되는 많은 것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모두 무시한 채 '3분 안에 2차 방정식을 풀도록' 만드는 것만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