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가제사와 종교1. 국가제사사회적 생산력이 상대적으로 저급하던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자연현상이나 역사현상은 信仰의 대상이 되어 왔다. 朝鮮은 전근대의 국가였고, 儒敎理念을 統治理念으로 한다는 점에서 國家祭祀는 중요한 행사로 생각되어 왔다. 여기에 性理學의 排他的인 종교관념은 조선시대 국가제사의 성격을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또한 農業生産力의 증가에 따라 정치의식과 역사의식이 왕조 교체에 따라 전반적으로 고조됨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왕조의 정통성을 보여 줄 수 있는 國家祭祀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祭祀가 지니는 성격에 대해서는 어떠했을까? 이것은 조선왕조를 開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정도전·남재의 말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1국가의 大事로는 祭祀가 중요한 것이니, 宗社를 받들고 神明과 교감하는 까닭이다. 반드시 안으로 誠敬을 간직하고 밖으로 儀文을 구비한 후에라야 신명을 感格시킬 수 있다. - 鄭道傳,《三峰集》卷8, 〈朝鮮徑國典〉下 憲典 祭祀,2귀신의 道는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淫한 자에게는 화를 준다. 사람이 덖을 닦지 아니하고 넘치는 제사를 지낸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 이치상 마땅히 제사해야할 대상 이외의 기타 淫祀는 일체 금한다. - 《太祖實錄》 卷2, 태조 원년 9월 갑술3 귀신에게 제사하는 일은 誠敬이 주가 된다. 음사에 넘치게 빠지는 것은 제사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 《定宗實錄》 卷6, 정종 2년 12월 임자위의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의 祀見觀은 神明의 능력보다 인간의 행위를 중요시하였다. 인간 행위에 따라, 신명이 결정되므로 좋은 일, 즉 福을 받기 위해서는 淫祀를 금지하고 제사 받아야 마땅할 대상에게 제사의 全力을 집중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까지 존재하였던 雜祀의 폐지나, 전체적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제사의 종류가 감소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大祀의 종류는 고려시대8종류 → 조선시대3종류(宗廟·社稷·永寧殿)로 감소하였으 며, 中祀의 종류는 고려시대3종류 →조선시대 12종류, 小祀의 종류는 10→11종류로 오히려 숫 자면에서는 증가했으나, 17종류의 雜祀가 폐지됨으로서 전체적 감소를 볼 수 있다. (38→26)조선시대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국가제사를 비중에 따라 大·中·小祀로 나누고 차등을 두어 致祭하였지만, 전체적 숫자의 감소라던가 유교적 명칭과 성격을 띠는 제사가 나타남으로써 그 특징을 고찰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그리고 祈福이라던가 致誠의 잡다한 의례를 혁파하고 역사를 이루어 가는 왕권이나 국가의 존엄에 어울리는 祀傳으로 변화시킨 것도 특징이다. 여기서는 그것을 종묘와 사직, 여러 자연신, 문묘, 그리고 역대 시조로 구분하여 차례로 고찰하기로 한다.우선 宗廟란 先王의 神位를 봉안하는 왕실의 家廟이고, 사직과 더불어 국가제사의 大宗으로 간주되어 왔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반드시 종묘에 먼저 고하는 儀禮절차를 거친 다음에야 의결되고 시행되었으며, 旱魃·洪水등과 같은 국가적인 천변지재가 발생할 경우 先祖英靈의 陰德을 기원하는 祈 祭가 빈번히 행하여졌다. 이러한 종묘는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통치체제를 공고히 다지며 지배이념을 재해석하는 등의 기능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聖所였다.한편, 토지신인 祀와 곡물신인 稷에게 제사하는 단을 社稷壇이라 하는데, 社壇은 동쪽, 稷檀은 서쪽에 설치하였다. 토지와 곡식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지배적인 생산수단과 그 생산물을 의미하였으므로, 토지신과 곡물신에 대한 信仰은 이미 고대로부터 그 의미가 중시되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국가제사로 정립되고 致祭되어 왔다. 사직이 종묘와 더불어 국가제사의 大宗을 이루어 온 것은 그러한 인식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할 것이다. 사직단에서는 仲春·仲秋의 첫 번째 戊 字가 든 날과 臘日(섣달)에 제향을 받들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정월에는 祈穀祭를, 그리고 가뭄·旱魃 등 천재 기변이 일어날 때마다 祈雨·祈請 등 祈 祭를 가끔 행하였다.다음으로 자연신에 대해 알아보자면, 고려나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天·地를 포함하여 風·雲·雷·雨·名山·大川등의 여러 자연신에 대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수준이 상대적으로 저급하여 성취수단의 대부분을 자연에 의존해야 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자연현상 자체가 곧 인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外境스러운 존재였으므로, 그에 대한 崇仰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특히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그런데, 주지되었듯이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통치이념은 儒敎的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에 자연신에 대한 崇仰의 형태와 존재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려시대에 정립된 전통적 祀天·祀地의 의례인 圓丘{) 五方(靑帝·赤帝·黃帝·百帝·黑帝)의 天에 기거하는 天神와 皇天上帝에게 제사하는 의 식.·方澤祭는 이 때에 와서 폐지되었으며, 농업과 관련된 여러 자연신은 雜祀에서 中祀로 격상되고, 나머지 자연신에 대해서는 小祀로 일괄 정리하되 道敎·佛敎와 관련된 여러 祭祀는 폐지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다양한 국가제사 규모에 비하여 훨씬 간략하게 정비된 편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에서는 사직단·성황단·여단은 중앙은 물론 지방 각 군,현에서도 이른바 「三壇」이라 하여 정기적으로 致祭하도록 제도화하였다. 토지신·곡식·국토수호신뿐 아니라 왕토 안의 어떠한 無主百神도 국가제사에서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전국적으로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또한 文廟란 孔子, 즉 文宣王을 享祀하는 사당을 가리킨다. 국가제사의 하나로써 문묘의 위상과 그 제례의 변천과정은 유학에 대한 국가의 尊崇 여부와 밀접히 관련된다. 특히 성리학이 배타적 국가교학으로 정립되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 하에서 이루어졌다. 또 문묘에는 공자 외에도 이른바 10哲·72賢등 공자의 여러 제자들 및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儒賢들을 配享하였던 바, 그 의례의 내용과 성격은 당대에 있어서의 이른바 유학의 學統 정립 문제와 밀접한 관련 속에 운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환언하자면, 일반적으로 고려시대까지의 문묘 제례는 공자라는 한 사람의 성현에 대한 尊崇의례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왕조에 이르러 그것은 공자를 만왕의 왕으로, 堯·舜보다 훌룡한 성인으로 대우하는 의례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학자를 尊崇하며 도통을 중시하는 여려 의례를 구현함으로써, 성리학을 유일의 교학으로 운용하던 조선사회 나름대로의 도덕적 가치질서를 정립하는 데에서 기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의 수직적 정치 지배권력만이 중심이 되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라던가 명분·절의와 같은 성리학적 덕목을 상대적으로 좀 더 사회 저변으로까지 확산시킴으로써 수평적 사회관계와 그 가치관의 성장에 크게 기능하였으리라고 이해된다.여기서 또 하나의 崇仰대상인 歷代始祖에 대한 祭祀儀式을 알아본다면, 고려시대에는 역대의 시조 가운데 기자와 동명성왕만을 小祀, 그것도 雜祀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조선왕조에서는 기자 이전의 단군으로부터 고구려·백제·신라의 시조는 물론 고려 태조 이하 소위 「功德」이 있는 4왕에 이르기까지, 즉 우리나라 역사상 국가를 開倉한 역대 시조 전체와 또한 전대 왕조의 치적이 큰 국왕들에 대해서까지 다른 자연신보다 훨씬 넉넉한 예우를 갖추어 국가사전에 정식으로 모셔 정기적으로 祭祀를 드리게 되었다. 그것은 자국 역사의 상한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과 공간적으로도 광범하다는 사실을 다 포괄하는 인식의 확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보다 인위가 주도한다고 생각하여 인간의 역사를 더 중시하게 된 세계관의 진전으로 인하여 성취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고려 귀족지배층의 경우보다 조선왕조 지배층의 자국의 역사와 동족에 대한 인식의 폭과 깊이가 역사적으로 한걸음 진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 학1. 한문학1) 한문학의 맥락(1) 조선왕조 개국과 한문학한국 한문학의 본격적인 출발은 賓貢科 출신들의 신라와 발해로의 귀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들이 귀국하여 활동하기 전에는 아마도 우리 고유의 민족문학이 근간이었을 것이다. 빈공과 출신으로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최치원이다. 한문학의 수입에 의한 민족문학의 위축은 일단 짚고 넘어야 할 사안이지만 최치원을 비조로 한 한문학의 발휘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민족문학으로 승화시켰다.유가적 주제의식에 의한 한문학의 전개는 조선 한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사실이고 이는 강조되어야 할 특성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자기 아닌 타인의 종교나 사상도 존중되어야 하고, 각각의 문화도 제 모습을 지닌 채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고려시대 지식인의 종합적 사유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후 불가와 도가적 주제의식의 배제는 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주제 영역이 그만큼 좁아졌다는 사실과 아울러 주제의 순정화가 이룩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가능하다.노장사상과 불교사상·기층사유 등은 고려시대 학술계에서는 용인된 학문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한문학의 주제는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시대 한문학의 주제영역이 선명화 내지 단순화된 것은 태조 이성계를 추대한 건국 주역들의 사상적 성향과 직접 관련된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은 조선왕조 문학의 지향점으로서, 문학의 이념은 성리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한문학과 성리학의 무르녹은 접합은 선조대에 들어와서 성립되어 性情美學으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2) 《동문선》과 조선문학태조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건국의 주역을 담당한 지식인들은, 개국의 기틀을 전통적인 禮樂思想과 右文政策으로 삼았다. 예악사상과 결부된 한국 한문학의 유산은 풍부하다. 예악사상과 접맥된 한문학의 꽃은 樂章文學이다. 현재의 기록을 참작하면 악장은 신라·고려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예악사상에 입각한 명실상부한 악장이 정도전에 의해 조나 한다.《동문선》은 조선의 右文政策과 관계가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문학의 종합정리 및 편찬간행은 뜻깊은 작업이었다. 《동문선》과 《속동문선》은 중국 《문선》을 모방하여 편찬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의 《문선》보다 더 풍부하게 수록하고 더 훌륭하게 엮어낸다는 이식을 지녔던 것 같다. 《동문선》은 오늘날의 문학전집류와는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동문선》은 중국문학에서 독립하여 민족문학 수립의 의지와 접맥되었던 것이다. 조선문학의 수립 의지와 민중 교화에 목적을 둔 이 같은 동문선의 편찬의도는 매우 값진 것이다.(3) 문이재도론의 전개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형성된 조선문학 정립의 의지는 1세기가 지난 후 동문선과 속동문선으로 구체화되었다. 조선문학이 고려시대의 문학과 다른 점은 조선왕조 특유의 문학론을 깔고 있었다는 데 있고, 그 문학론의 핵심은 문이재도이다. 문이재도의 道는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다. 재도론은 주제론에 가깝다. 문학의 정당한 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단히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본격적인 재도론의 시발은 도의 어의적 범주를 성리학적 이념을 주개념으로 삼은 이후부터 잡아야 한다. 조선 전기는 문이재도론의 영향으로 작품의 미학적 검토와 접근이 약화되지 않았나 한다. 문이재도는 주제의식에 더 치우쳐있다. 문이재도는 고려문학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근거할 때 13세기 초엽에 이미 문이재도적 주제의식이 형성되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학에서 문이재도론을 이론적 체계를 세워서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람은 정도전이다. 13세기 이후 수입된 성리학은 당시 학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정도전이 전개한 재도론은 16세기 재도론과 대비하면 성리학적 심도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국공신에 의한 재도론의 고취는 당시 詩壇에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17세기가 지나면서 성리학은 그 광휘를 잃기 시작하였고 이와 더불어 문이재도론도 힘을 잃어 갔다. 조선 전기, 특히 16세기는 운데서 특히 외물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들은 외물 가운데서도 산수, 즉 강호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강호의 미를 볼 것이 아니라 강호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강호의 미를 본 것이 아니라 강호의 理를 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극력 배척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이들 사상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들을 은연중 수용하고 있었다. 이황은 노장사상에 대해서 특히 경계할 것을 주장했고, 이이는 불교사상에 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단 목릉성세에 생존하는 행운을 얻은 그들은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세계사에 우뚝선 업적을 남겼다. 이 같은 사상적 축적을 기반으로 하야 고도의 문예 미학인 성정미학을 완성했고 이를 단순히 이론적 정립에만 머물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성정미학을 작품을 통해 확실하게 구현시켰으며, 아울러 그들은 이른바 음영성정의 구체적 모범시문을 시단에 제시했다. 그들은 또 문학이 주제론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품격론을 제기 또는 전개하여 성정미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그러나 문학을 지나치게 이성에 근거하도록 유도하여 서정의 폭을 좁혔기 때문에 시를 생경으로 나아가게 한 결함을 배태하고 있었음도 지적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완미한 미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그 자체가 미학에 있어서 보수적 정체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17세기를 지나면서 성정미학은 풍화되기 시작했고, 뒤따라 음영성정이 아닌 天機流動의 미의식이 대두하여 사단에 뿌리를 내리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은 것은 조선왕조 문예미학사의 진행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2. 국문학1)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학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세계 문자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문자이다.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문학사는 기록문화의 성장에서 한문학이 등장한 첫 번째 시기와 차자표기 문학이 시작된 두 번째 시기로 나눌 수 며 시조와 가사를 발전시킨 것은 시가는 노래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대부 부녀자들은 한문을 익히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문을 일상생활에 널리 썼고 이는 국문소설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한가지 조건이 되었다.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끝나자 국문만 사용하고, 문학은 국문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르렀다. 이처럼 국문 사용의 확대와 국문문학의 성장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의도나 계산과 관계없이 문자생활을 둘러싼 상하층의 경쟁, 중세와 근대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국문은 시대마다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2)《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龍飛御天歌》는 건국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는 노래이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건국신화 표방을 재현했다. 민간전승까지 캐서 신이한 내용을 갖추며, 필연적인 힘에 따라 영웅적인 투쟁을 거쳐 위대한 과업을 성취했다고 하는 오랜 전통을 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에 입각한 합리적인 통치방식이 더욱 강조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문학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는 것은 계속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훈민정음을 표기수단으로 택했기에 잡다하게 변모될 수 있는 설화가 아닌, 엄격하게 다듬어지니 서사시를 지어서 보급할 수 있었다. 《용비어천가》를 노래부를 때 곡명은 이라고 했는데, 이는 감화가 백성에게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기약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창업시조의 행적을 6대에 걸쳐서 노래해 전체적인 연관이 서사시다운 맥락을 지닐 수 있게 했는데,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석가 한 사람만 다루면서 선조 대대로 있었던 일 대신에 석가가 거듭 태어나면서 전생에서 겪었던 바를 서두로 삼았으니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우리 전통을 활용하여 문학작품 형성화의 독자적인 역량을 키우는 과제가 훈민정음의 창제로 새롭게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가 제왕이 앞장서서 중세 문학의 이상을 다시 설정하자는 것이었기에 한계를 가진다.월인천강지곡이라는 말은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기능을 함께 수행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악장과 경기체가는 자취를 감추고 가사만 계속 번창한 것이 또 한번의 커다란 전환이었다.악장은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목적으로 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인 형식을 형성하는 데 이르지 못했으며, 자연스럽게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기체가는 형식이 다른 어느 것보다 까다롭기 때문에 나타내는 내용이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결함을 지녔다.악장·경기체가·가사는 모두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그런데 음악으로서의 구실과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견주어 본다면 단계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악장에서 경기체가로 , 경기체가에서 가사로 올수록 음악으로서의 구실은 줄어들고 문학으로서의 구실이 확대된다.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통치질서의 상징인 예악을 정비하고자 해서 새로 지은 노래이다. 그러나 악장은 끝내 문학적인 안정을 얻지 못하였다. 음악을 선결조건으로 삼아야 했던 점이 계속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이미 있는 악곡에 가사를 맞추어 넣으려 하니 문학으로서는 독자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어려웠다. 경기체가는 우리말 노래이면서도 한자어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서 악장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한시에서 국문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체가는 크게 보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악장의 구실을 하는 경기체가이다. 또 하나는 승려의 노래인 경기체가이다. 세 번째 부류는 개인적인 노래인 경기체가이다.4) 시조와 가사시조는 공식적인 기능은 없으며 개인적인 노래이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왕조 창업이 칭송은 시조와 무관하고 고려를 회고하는 시조는 거듭 이루어져 시조가 개인적인 노래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자아화 되지 않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조선시대 사대부는 자연과 정치가 마음에서 만족스러운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희망이다.
◎조선초기의 대외무역1. 대외무역의 역사적 배경- 조선 초기의 대외무역 활동과 그 성격 내지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 대외무역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와 조선이 교체된 14세기 후반에는 동아시아 지역에 급격한 정세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대륙에서 원과 명이 교체되어 동아시아 지역에서 여러 나라들은 정치적 변혁을 통해 새로운 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국가를 이룩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확립을 모색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정부도 사대교린을 특징으로 하는 새국가의 대회정책을 채택 추진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의 제반 국가정책 목표는 궁극적으로 완성단계의 민족통일국가에 적합한 문물제도를 정비 확립하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주변 민족들과의 안정을 꾀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조선정부가 개국 초부터 명에 대한 사대외교와 여진 일본 등에 대한 교린 외교를 펴는 등 사대교린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의례로서 문화교류와 함께 경제적 교류가 이루어 졌다.2. 명과의 무역- 태조 이성계는 사대의 예로써 명과의 외교관계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명의 외교정책이 원인이 되어 양국관계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대 이후에는 조선에 대한 명의 외교정책 변화로 조선정부의 명에 대한 사대외교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전되어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변동없이 2백 년간 지속 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왕조 초기부터 正朝使 聖節使 千秋使를, 얼마 후에는 冬至使를 더하여 매년 네 차례의 정기사행과, 임시사행을 명에 보내었다. 대체로 명에 보내는 사행은 正使 副使 從事官 通事 畵員 등 40 여 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과 명과의 사이가 전혀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은 명게 각종의 정기 및 임시사행을 통해 사대외교의 예로써 조공을 명에 보냈고, 명은 조공에 대한 답례로 상사나 사여를 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명 사이에는 조공과 상사 등의 형태로 양국 사이에 이른바 관무역이 행해지는 동시에 사행의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 정부가 명에 보낸 조공품 중 금은 세공은 그 당시 국내 금은 생산량으로 볼 때 과중한 부담이었다. 즉 매년 금150냥과 은700냥을 명에 보내기로 되어 있는 금은 세공은 조선정부로서 감당키 어려운 부납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금은 세공을 면제받기 위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여, 마침내 세종 11년(1429)금은 세공을 우 마 포 등으로 대납하게 되었다. 조선의 사행은 북경의 東平館에서, 또한 명의 사행은 서울 남대문안 太平館에서 각기 유숙하게 되었다. 이상의 관무역과 사무역 이외에도 조선 상인과 명의 상인들 사이에는 양국이 법으로 금하는 潛貿易이 이루어졌다.- 조선의 수출품 중에는 금 은 우 마 등과 같은 생산재 내지 자본재가 다량 포함되어 있는 반면, 조선의 수입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 소비품이나 사치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조선에서 수입한 명의 물품은 국내의 소비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동시에 금 은 우 마 등 생산재 내지 자본재의 대향 국외유출은 궁극적으로 사회생산력과 상품 교환경제의 발전을 위축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청에서 비단을 직접 수입할 것이 아니라 그 직조기술을 도입해 와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 그 손실을 알 수 있다.3. 여진과의 무역- 조선정부가 교린정책으로 대응한 여진은 제반 사회생산력의 미숙으로 주요 생활 필수품을 조선과 명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이에 여진은 의식주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종종 북방 변경에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조선정부는 침략해 오는 여진을 방어, 소탕 내지 정벌하는 한편 회유무마책을 썼다. 회유무마책으로서는 여진의 귀화를 권장했으며, 조선의 명예관직을 받은 여진인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 1년 또는 수년에 몇 차레씩 서울에 와서 進上과 回賜 賞賜 형태의 관무역을 할 수 있었다. 조선과 여진 사이에는 관무역 뿐만 아니라, 여진인이 유숙하는 동대문안 北平館을 중심으로 일반 상인이 참여하는 사무역도 이루어졌다. 금 은 보석 12승포 마포 등의 재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물품이 거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진은 관무역과 사무역을 통해서는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국경교역을 위해 貿易所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5년 두곳에 무역소를 설치하였다. 조선과 여진간의 거래 품목내역은 대체로 목축과 수렵에 의해 획득한 조자반 모피류 등 천연산물을 조선에 수출하고 의료 식료 등 생활 필수품과 철제 농기구 들을 수입해 간 여진쪽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 되었을 것은 쉽게 집작 할 수 있다.4. 일본과의 무역조선정부가 여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린정책으로 대응한 일본은 조선과 명으로부터 침탈행위나 평화적 교역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였다. 태조는 즉위 이전에도 왜구를 토벌하는데 힘썼지만, 그 이후에도 해방을 엄히 하는 한편 일본막부에 사람을 보내 왜구의 금압과 동시에 무역거래를 촉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대마도 宗氏였다. 대마도는 이미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을 回賜받는 관계에 있었다. 한편 이들 일본인이게는 여진의 경우처럼 회유무마책을 써서 受職倭人이라 하여 관직을 주어 우대했고, 귀화한 向化倭人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어 국내 거주를 허락하였다. 또한 조선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興利倭人에게는 국내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과 귀환하는데 필요한 식량을 지급하였다. 세종 원년(1419)왜구의 창궐이 빈번해지자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 뒤 세종은 다시 회유무마책을 서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역을 통제하고 해방도 공고히 하는 등 화군 양면책을 썼다. 양국간의 무역거래로서는 우선 일본의 진상과 조선의 회사 형태로 행해지는 과무역이 있다. 또한 포구와 성주 화원현 및 서울의 왜관 동평관 亞平館 등의 장소에서 사무역이 활발하게 아루어졌다. 그리고 국가가 불법적 무역거래라 하여 금지하였던 잠무역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조선초기의 일본 진상품 중에는 銀 銅 丹木 甘草 水牛角 象牙 등이 있고, 진상에 대한 조선정부의 回賜品은 米를 비롯해 花文度 書籍 등 이었으며 서적 중에서도 대장경에 대한 일본측의 욕구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로 소비재를 수출하고 생산재 내지 자본재를 수입하는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거래는 국내의 사회생산력과 상품 교환경제 발전을 증진시키는 등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조선측이 얻은 경제적 이득 역시 작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의 중앙정치구조1. 정치구조의 정비와 정치기구1) 정치구조의 정비조선의 중앙 정치구조는 개국과 함께 고려의 관계를 계승하면서 성립되었다. 최고 의결·국정기관에 도평의사사가 있고, 그 아래로 문하부·삼사·예문춘추관·중추원·사헌부·개성부·6조, 상서사·성균관·각문·훈련관·서운관과 봉상시·교서감 등 寺·監 및 10衛, 사선서·요물고·풍저창 등 署·庫·倉, 내시부·액정서와 전악서·아악서가 등차적으로 편제되어 각각에 부여된 일을 맡았다. 이러한 개국 초의 정치구조는 마지막 《經國大典》이 반포되는 성종 16년(1485)까지 왕권·의정부기능, 6조의 지위향상과 서무분장, 6조 屬司·屬衙門制의 정비, 提綢제 등 겸직제의 정비, 冗官혁거, 1인의 장관을 정점으로 한 획일적인 관직제정비, 재정긴축 등과 함께 조선적인 것으로 정립되었다. 가장 큰 변화의 조선 초기의 중앙 정치구조는 개국 초의 도평의사사체제에서 의정부·6조체제로 개편되었다. 도평의사사는 의정부로 개편되면서 소멸되고, 의정부가 6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을 통령하였다는 것이다.2) 정치기구의 기능과 구성조선 초기에 중앙의 여러 정치기구의 기능과 국정 수행을 위한 행정체계는 대개 조선 개국으로부터 태종 4년까지는 도평의사사나 의정부가 6조등 모든 관아를 통령하면서 국정을 수행하였다. 태종 5년 이후에는 의정부가 6조를 지휘하거나 6조가 속아문을 지휘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다.{) ·의정부사서제: 태종5∼13년과 세종 18년∼단종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왕-의정부-6조-시·감·관·창·고·서 의 체계 하에서 국정을 운영한 것.·6조직계제: 태종 14년∼세종 17년과 세조 원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왕-6조-시·감·관·창·고·서의 체 계 하에서 국정을 운영한 것.또 여러 정치 기구는 그 직장과 관련하여 태조 즉위로부터 정종대까지는 도평의사사, 의흥삼군부가 각각 최고 의결·집행기관, 최고 군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여 국정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태종대 이후에는 의정부·6조가 국정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승정원은 왕명출납하고, 평의사사와 차이가 없었으나, 태종 5년 정치만을 관장하고 의정부 관원으로만 구성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의정부제로 정립되었다. 기능은 법제적으로 정종 2년으로부터 태종 원년까지의 시기에 도평의사사의 최고 국정·의결기관으로서의 기능, 문하부의 백관의 서무를 관장하는 기능, 周官 3공의 論道經邦·攝理陰陽의 기능이 융합되면서 摠百官·平庶政·理陰陽·經邦國으로 규정되어 《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물론 법제적인 기능이 중심이 되기는 하나 왕권의 강약, 의정부 구성원의 자질, 6조·승정원·3사의 국정운영을 둘러싼 상호관계, 院相制 운영 등의 요소와 관련하여 6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운영을 총관하였다. 그 참여 범위는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외교 등 국정 전 분야였다. 의정부의 정사는 구성원의 직질·기능과 관련하여 대개 3정승이 찬성 이하의 보좌를 받아 합의로써 처리되었다.나) 6조6조는 고려 말의 6조를 계승하여 정 3품 아문으로 성립되었다. 태종 5년에 정 2품 아문으로 격상되면서 서정을 분장하고 장관인 판서가 朝政에 참여하게 되더니 속사·속아문제의 정립과 함께 국정 수행의 중심 관아가 되었다.·이조: 文選·勳封·考課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속사에는 종친·문관·잡직·승직의 임명, 고신·녹패·문과·생원·진사시 합격자에 대한 賜牌·差定·取才개명, 錄案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文選司, 宗宰·공신의 封贈, 시호·老職·命婦의 爵帖·鄕吏給帖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考勳司, 문관의 공과·휴가·여러 관아의 아전의 근무 일수·향리 자손 등을 분멸 처리하는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考功司가 있었다. 속아문에는 충익부{) 세조 2년 이래로 운영된 충익사를 세조 12년에 충익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願從功臣의 支待에 관한 일을 맡았고, 도사 2원이 있었다.·상서원{) 고려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운뎡된 상서사를 세조 12년에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璽寶·符牌·節鉞을 관장하였 다.·종부시{) 고려 말의 제도를 계승하여 운영된 전중시가 태종 원년에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 맡았다.·광흥창{ ) 모든 관원의 녹봉에 관한 일을 맡았다.·전함사{ ) 서울과 지방의 군함과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다.·평시서{ ) 市廛을 단속하고 도량형기를 공평히 하며, 물가를 조절하는 일을 맡았다.·사온서{ ) 궐내의 술과 단술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의영고{ ) 기름·꿀·후추 등의 물품에 관한 일을 맡았다.·장흥고{ ) 油芚·紙地 등의 물품에 관한 일을 맡았다.·사포서{ ) 園圃와 채소에 관한 일을 맡았다.·양현고{ ) 성균관 유생에게 미두 등의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5부(중·동·서·남·북부){ ) 소관내 坊里 주민의 범법사건, 교량·도로·禁火·家垈측량·檢屍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가 있었다.·예조: 예악·제사·宴享·朝聘·학교에 정사를 관장하였다. 속사에는 의식·제도·조회·경연·史官·학교·과거·印信·表箋·천문·國忌·墓諱·喪葬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稽制司, 宴亭·제사·牧豆·의약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典享司, 사신·왜인·야인의 영접, 외방의 조공과 이에 대한 宴設과 賜與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典客司가 있었다. 속아문에는 홍문관{ ) 궐내의 경적을 관장하고 문한을 다스리며 왕의 고문에 대비하는 일을 맡았다. 성종 13년부터 20년까지의 시 기에는 법제적인 직장, 성종의 호학 및 당대의 정치분위기 등은 감찰·언론기능도 행사하게 하였다.·예문관{ ) 조선 개국 이래의 藝文春秋館을 태종 원년에 예문관과 춘추관의 두아문으로 분립하여 예문관의 관원은 녹관 으로, 춘추관의 관원은 겸관으로 충원하면서 성립되었다. 왕의 사령서를 창제하는 일을 맡았다.·성균관{ ) 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의 성균관을 계승하면서 성립되었다. 유학교육에 관한 일을 맡았다.·춘추관{ ) 조선 개국 이래 예문춘추관을 태종 원년 예문관과 춘추관의 두 아문으로 분립하면서 성립되었다. 그때그때 정사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승문원{ ) 태종 5년 이전부터 운영된 文書應奉司를 태종 11년에 개칭하면서 성립되엇따. 사대문서와 교린 문서에 관한 일을 맡았다.·교서관{ ) 조선 개을 맡았다.·문소전{ ) 태조 7년 이래로 節妃 神懿王后韓氏의 신주를 봉안한 仁昭殿을 태종 8년에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세종 14 년에 태조·태종의 위패가 추가로 안치되었다.·연은전{ ) 성종 6년에 덕종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성립되었다.·각 능전{ ) 경기 내에 소재하는 여러 왕의 眞影을 모신 전각을 맡았다.등이 있었다.·병조: 무선·군무·儀衛·우역·兵甲·器仗·門戶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속사에는 무관·군사·잡직의 임명과 고신·녹패·附過·結假, 무과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武選司, 程驛·보충대·조예·나장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乘輿司, 군적·마적·병기·전함·군사의 점호·사열·무예의 훈련·숙위·城堡과 군관·군인의 파견과 군역의 교대, 結保·結假·侍丁·화포·봉수·改火·禁火·符信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武備司가 있었다. 속아문에는 오위{ ) 義興衛, 龍 衛, 虎賁衛, 忠佐衛, 忠武衛를 합칭한 명칭이다. 평상시에는 병종별로 입직·행순하는 것이 주임 무인 제색군사를 지휘하였다.·사복시{ ) 왕이 타는 수레, 말과 마구, 그리고 목축에 관한 일을 맡았다.·군기시{ ) 병기를 제조하는 일을 맡았다.·전설사{ ) 장막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세자익위사{ ) 동궁을 모시고 경호하는 일을 맡았다.·훈련원{ ) 군사의 재예를 시험하고, 무예를 연마시키며 武經을 습독시키는 일을 맡았다.가 있었다. 아울러 병조는 군정기능과 관련하여 군령권도 행사하였다.·형조: 법률, 詞訟, 詳 , 노예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속사에는 死罪를 상세히 覆審하는 사무를 맡아보던 詳覆司, 율령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考律司, 형옥과 금령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掌禁司, 노예의 장적과 포로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掌隸司가 있었다. 속아문에는 장례원{ ) 노예의 장적과 노비 송사를 처결하는 일을 맡았다.·전옥서{ ) 옥에 구류된 죄수에 관한 일을 맡았다.가 있었다.·공조: 山澤·工匠·營繕·陶冶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 속사에는 궁실·城池·公 ·토목·工役·피역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면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명칭·직제상으로는 조선 개국 이래의 중추언에서 비롯되었다. 관장하는 일은 없었으나 소임이 없는 문·무의 당상관을 소속시켜 조정에 참여시키고 녹봉을 지급하는 등의 혜택을 주었다.·오위도총부: 세조 12년에 오위진무소를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기능상으로는 태조 2년 이래로 독자적으로 군령을 관장한 의흥삼군부·삼군진무소·의흥부, 병조와 함께 군령을 관장한 삼군진무소·오위진무소에서 비롯되었다. 오위의 군무를 관장하여 다스렸다. 오위도총부의 5위에 대한 군령기능은 법제적으로는 전장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조의 군정과 5위가병조의 속아문이라는 점 등에서 병조와 횡적으로 협조해야 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 영향 아래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의금부: 의금부는 義勇巡禁司와 의용순금사 때의 당상관과 상호군 이하를 도제주·제주와 진무·부진무·지사·도사로 각각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기능상으로는 조선 개국 이래의 巡軍萬戶府, 巡衛府, 義勇巡禁司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세조 12년 전후에 도제주는 혁거되고, 제주와 진무 이하는 판사·지사·동지사와 경력·도사로 개편하면서 정립되었다.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였다.바) 한성부·개성부·한성부: 태조 4년 전년의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천도에 이어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경기의 과전과 관내의 토지·호구·농상·학교·사송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한성부의 업무는 전국 각 지역과 관련되고, 그 하는 일이 6조 업무와 상호 연관되었기 때문에 일부 일은 전국이 포괄되고 6조와 관련 아래 수행되었다.·개성부: 고려 말의 개성부를 계승하여 경기의 토지·호구·농상·학교·사송 등의 일을 맡았다.사) 종친부·돈녕부·충훈부·의빈부·종친부: 종친부는 세종 12년에 左內諸君府를 개칭하고, 종실 제군을 소속시키면서 성립된 종실제군의 관부였다. 관원은 典籤·典簿를 제외하고는 관계별로 관직만을 제시하였을 뿐 그 인원수는 규정하지 않았다. 종친은 고려와 같이 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 구축을 염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국가재정1. 재정관계관서조선시대에는 재정이 일원화되어 있지 않아 재정은 중앙의 경우 호조와 그 소속아문에서만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조·예조·병조·공조 소속관서에서도 관여하였고, 지방에서는 감영, 병영·수영과 군현, 역·院, 津(渡) 등에서도 각기 재정에 관여하고 있었다. 또한 府中의 왕실재정과 국가재정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지도 않았다. 조선 건국 초의 재정관계관서들은 여러 번 개편, 폐합 등을 겪다가 《經國大典》에 이르러 정비되었다.2. 중앙재정1) 세입·세출국가재정의 수입원은 租稅·力役·貢物 등이었다. 고려이래 조선 초에는 貢案을 제정하여 그 세입을 거두어들이는 데 여러 규정이 있었으나 세출에는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세조 때에 일종의 세출일람표라 할 수 잇는 횡간(橫看)의 제도가 마련되고 세입일람표라 할 수 있는 貢案이 재조정된 것은, 국가재정제도에 있어서 일대 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횡간·공안 제도는 구속력이 있는 기준으로서 운영되었다.2)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중앙의 세입재원은 부세를 비롯하여 魚鹽稅·鑛業稅·林業稅·工商稅·船稅 등이 그 중요했으며, 16세기부터는 환곡도 국가재원의 일부가 되었다. 어염세·광업세·임업세는 어업·염업·광업·임업에서의 공안으로서 생산구역을 관유로 하거나 생산물을 공납 또는 전매하거나, 또는 개인에게 소유·처분을 허가하면서 거기에 과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공상세는 농본억상을 답습한 것으로 등급을 매겨 과세하였으며, 선세는 선박에 대해 과세한 것이었다. 중앙의 세출항목은 상공을 비롯하여 국용·녹봉·군자·의창·의료 등이 중요하였다. 上供은 왕실비용으로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녹봉제에는 祿·俸·科 등으로 구분되었고 원칙적으로 京官祿을 위한 제도였다. 군자는 군량과 흉년 등에 대비하는 국가의 예비재원으로 軍資監에서 관장하였다. 의창은 고구려 진대법에서 시작하여 고려 성종 때 설치 된 것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계승한 것으로 관에서 곡을 비축하였다가 봄·여름 사이에 군현의 빈민에게 대여하여 추수다. 각족 지방관아의 수입은 국가로부터 분급된 토지에 의한 수입을 최대의 재원으로 삼았으며 전세수입 중에는 지방재정으로 나누어 주는 것은 없었다. 役에는 요역과 신역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중앙재정을 위한 것이나 지방재정을 위한 것도 있었다. 공물 중 지방관아의 수입이 되는 것은 鄕貢이라 하였다.지방재정의 지출면을 보면 지방관에게는 원칙적으로 祿科가 없었다.4. 조세1) 전세과전법의 특색을 보면 개혁의 원래 취지는 전시과의 기본원칙에 환원함으로써 관료 지배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은 國有가 원칙이며, 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며,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職散者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고, 사전인 경우는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전시과와는 달리 柴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佃戶가 田主에게 50 %의 租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과전법에 의한 토지개혁은 耕者有田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전·守信田·恤養田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과전법의 조세규정은 세종 26년(1444)에 새로운 전세제도인 貢法으로 개혁되어 성종 20년(1489)에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공법 실시를 위한 논의는 세종 12년부터 전국적으로 여론을 수집하고 세종 18년에 貢法上程所를 설치하였으며, 세종 26년에 하3도 6현에 실시되었고, 세종 32년에 전라도, 세조 7년에 경기도, 세조 내용의 새 세제안을 마련하였다. 앞서의 경묘법이 폐지되고 다시 같은 수확량을 낼 수 있는 면적을 과세단위로 하는 결부제로 환원하되, 이제까지처럼 농부의 손마디 길이를 근거로 한 자로 토지를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확한 주척(周尺)을 사용하도록 하였다.토지가 비옥한가 메마른가에 따라 6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그 해의 농사의 풍흉에 따라 9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조정하여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차등 있게 내도록 하였다. 行在所에서 가까운 충청도 청안현(괴산군 청안면)을 표본으로 골라 이 세법을 적용하여 토지생산력과 토지등급 구분을 위한 기준을 정하여 그 해 11월에 전제상정소에서 최종적으로 토지를 기름진가 메마른가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田分六等法), 다시 그 해의 농사형편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에 차등을 두어 거두는 것(年分九等制)을 골자로 한 세법을 완성하였다.토지세 부과의 기본단위인 1결의 수확량을 400말로 보아 그 20분의 1에 해당하는 20말을 1결의 세액으로 정하되, 그 해의 농사형편을 읍을 단위로 아홉 등급으로 나눠 20말에서 4말까지 차등을 두어 징수하도록 하였다. 농사짓지 못하고 묵힌 땅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되,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인 正田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해를 입은 토지에 대한 세금의 감면은 10결 이상일 때만 허용해주도록 하였다.이러한 내용의 세법안이 《경국대전》 호전 수세조에 실렸다. 이와 같이 오랜 논의과정을 거쳐 확정된 새로운 토지세법은 토지를 측량하여 그 땅이 기름진가 메마른가에 따라 여섯 등급으로 나누는 작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실시할 수 있었다.그 과정은 기름진 토지가 많아서 비교적 유리한 남부지방에서부터 시작되어 새로운 세법이 공포되면서 바로 남부지방의 6개 고을, 그 중에서도 이미 토지등급 구분이 끝난 충청도 청안과 비인에 먼저 적용되었고, 곧이어 광양 ·고산 ·함안 ·고령 등 나머지 4개 고을에 토지의 등급을 구분하는 작업과 함께 시행하였다.요컨대현 단위의 액수는 다시 각 민호에 배정되었다. 공물의 分定은 실제 지방관에 맡겨지고 그것을 또 향리들이 임의로 분정하였다. 세종 17년에 이르러 제정된 5등호에 준거하여 공물을 분정하였다. 공물에는 상공과 별공이 있는데, 매년 항상 정해 있는 공물을 상공이라 하고, 그 외 정부에서 필요로 한 것을 불시로 배정하여 공납하게 하는 것을 별공이라 하였다. 원칙적으로는 토산물로 부과하는 것이나 실제로 생산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차정되었다. 이것은 공납제의 큰 모순이 되었으며 대납을 촉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단위는 지방관부였으며 상정된 액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변경되지 않았다.민호중에는 관아에 소속되어 신역으로 생산 노역에 종사하는 定役戶가 있었다. 후에 이것은 폐기되고 공납의 역은 일반 민호에게 전가되었다.2) 방납공납제는 전국 각지의 토산·물산을 왕실 정부재정으로서 주로 중앙에 납입하는 것이므로, 중앙으로의 수송이나 납입과정에 있어서 상납의 청부 즉 대납의 문제가 일어났다. 대납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어 그 하나는 납입물품에 대신하여 다른 물품을 납입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상납해야 할 당사자 대신 납부하는 경우가 있었다.공물의 종류와 수량은 국가에서 소요되는 것을 기준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천재(天災)를 입었다 하더라도 감면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까지 부과하여 백성은 현물을 외지(外地)에 가서 사와서 납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상인·관원이 끼어들어 백성 대신 공물을 대납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를 붙여 착취하였다. 또, 직접 공납하려 하여도 방납자와 악덕 관원이 결탁하여 관청에서 물품을 수납할 때 그 규격을 검사하면서 불합격품은 이를 되돌려 다시 바치게 하는 점퇴(點退)가 행하여져, 백성은 이 점퇴의 위협 때문에 이후의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 공물을 방납자들이 대납하도록 맡겼다. 따라서 방납은 백성이 직접 납공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하여 생긴 말이다. 또한 지방에서 직접 공납이 가능한 물품이라도 국가의 수요(需要부업자가 물리쳐버리는 것이었다.官備貢物은 민호에게 막중한 요역이 되었는데, 공물의 포납화에 따라 요역도 포납화되었다. 공물의 포납화 이외에도 신역이 포납화 되고 잡역도 포납화 되어, 군현에서는 혹은 地稅化 하거나 혹은 인두세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납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貢案을 개정하고 방납을 두절케 해야 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 개혁의 성과는 私大同에 집약되어 나타났고, 이 사대동은 공물작미, 반대동과 함께 대동법의 선행형태로 분류되었다.6. 진상진상은 본래 세로 바치는 의무라기보다 국왕에 대한 지방장관의 禮獻으로 국왕의 御膳을 비롯하여 궁중의 祭享·약재·기타 등에 쓰일 물품을 감사, 병사·수사 등이 월 1차 상납하는 것이었다.1) 진상의 종류정기적인 물선진상은 삭망진상이라고 한다. 매월 행해지므로 월선이라고도 일컬었다. 물선의 종류는 각 지방의 산과 바다에서 난 좋은 식료품을 위주로 하고 그 밖에 기구·장식품 등이 첨가되었다 방물진상으로는 명일방물, 行幸방물, 講武방물 등이 있었다. 명일에 방물을 바치는 날은 국왕의 탄신을 경축하는 성절과 동시, 정조의 세 명절 이외에 왕비 탄신일과 여러 명절들이 이에 속한다. 병기를 위주로 모피·기구·가구·白布 그리고 산해진미를 바쳤으며 제주목에서는 말을 바쳤다..행행방물은 국왕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지방관이 문안과 함께 토산물을 헌납한 것이며 강무방물은 국왕 감독 하에 행하는 강무 때에 지방관이 문안과 함께 토산물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제향진상은 지방관이 왕실의 각종 제사에 쓰이는 제수를 바치는 것이다. 지방 각관으로 하여금 진상케 한다. 약재진상은 관찰사의 책임 하에 왕실 의료업무를 전담하는 內醫院에 상납되었다. 공물약재는 지방 군현에서 중앙 의료기관인 典醫監·惠民局·濟生院 등에 상납되었고, 왕실의 어용으로 쓸 것은 특별히 진상이라 하여 공물 외로 상납케 했다. 응방진상은 각 감영과 병영·수영에서 매를 사육 또는 생포하여 응방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2) 진상과 민호의 부담전세에는 豊凶에 따라 감면의 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