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연습 10.24 11th1894년 甲午東學농민운동과 甲午改革영어영문학전공 3학년 이현우Ⅰ. 들어가며Ⅱ. 甲午東學농민운동- (1) 東學과 농민전쟁의 연관문제- (2) 농민전쟁의 주체- (3) 東學革命의 성격- (4) 농민전쟁의 지향Ⅲ. 甲午改革Ⅳ. 나오며Ⅰ. 들어가며1894년의 농민전쟁과 甲午改革은 朝鮮왕조 封建社會의 해체와 日本 자본주의에 의한 朝鮮의 식민지화, 그리고 민족해방의 담당 주체로서의 민중의 민족적 결집 등의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많은 연구와 축적이 있어왔으나 그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는바 각 사건의 자세한 내용과 전개과정, 원인?결과 등은 뒤로 제쳐두고 논쟁이 되는 爭點들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한다.Ⅱ. 甲午東學농민운동1894년의 농민전쟁을 둘러싼 논쟁들 중에서도 가장 爭點이 되는 것은 東學과 농민전쟁의 연관문제, 농민전쟁의 주체문제, 東學革命의 성격, 지향의 문제 등이다.(1) 東學과 농민전쟁의 연관문제) : 東學운동인가 농민전쟁인가1894년의 농민봉기는 ‘東學亂’, ‘東學농민운동’, ‘東學농민혁명’, ‘東學농민혁명운동’, ‘東學농민전쟁’, ‘甲午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甲午농민봉기’등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명칭 앞부분의 ‘東學’, ‘甲午’, ‘1894년’ 등의 용어가 다른 것이 바로 東學과 농민전쟁의 연관문제에 대한 견해차 때문이다. 이에 대한 주장으로는 크게 東學운동론, 농민전쟁론, 절충론 등이 있다.동학운동론 : 東學사상은 그 자체로 혁명성을 지닌 것이며 곧바로 농민봉기의 지도원리가 된다는 입론이다. 예로서 金龍德의 「동학사상연구(1964)」에서는 “동학사상에서 새 나라의 실현을 기하는 혁명적 요소는 (중략) 농민전쟁이 걸친 종교적 분장, 즉 외곽적인 것이 아니라 교리 자체가 혁명의 원리이며 추진력이었으니, 동학사상 없이 동학혁명이 없었음은 명백하다”라고 주장하였다.한편, ‘동학란’을 동학교문의 종교사회운동으로 보는 견해도 있 封建社會 해체 과정에서 빈발하는 民亂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따라서 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는 東學敎門이나 東學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농민층이었다라고 보는 견해이다. ‘동학은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의 조직적 행동이 가능할 수 있는 조직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은 원래부터 동학과는 별개의 개혁사상가이다.’ 등의 주장을 한다.(2) 농민전쟁의 주체 : 농민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농민전쟁의 주체에 관한 문제는 1894년 농민전쟁에 대한 다양한 명칭이 있음에도 대부분 주체를 표현하는 용어로 농민이란 말을 쓰고 있다. 다만 그 농민의 내용 즉 주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의 편차들이 크다殘班주도설 : 殘班주도설은 “貧士→농민화→징세대상자→반란자”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농민봉기의 주도층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곧 양반 지배신분층에서 탈락된 殘班들이 그들과 처지가 비슷한 평민인 일반 농민과 이해를 같이하여 東學혁명을 주도하였다는 설이다.富農주도설 : 富農층을 부르주아 계층과 ‘비슷한 성격의 계층’으로 설정하여 이들이 執綱所 시기를 통해 보다 광범위하고 확고한 역사주체로 형성되어간 것으로 보는 관점이며 부르주아적 지향성을 가진 富農이 아래로부터의 농민적이고 혁명적인 근대화의 길을 농민전쟁을 통하여 표출하였다고 주장한다.貧農주도설 : 朝鮮후기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층은 계급을 형성할 정도까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富農층들은 근대 사회변혁의 주체로 등장할 수 없었으며 제국주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부르주아적 성격을 띠는 계층은 혁명성을 상실하고 제국주의 세력과 결합함으로써 貧農층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東學혁명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3) 東學혁명의 성격1894년의 동학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체로 반봉건?반침략투쟁이었다는 점에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1970년대까지는 東學혁명의 反封建?反侵略的 성격이 東學혁명의 전개과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東學혁명을 제1단계-古阜民亂, 제2단계-제1차기포, 제3은 좁은 의미로는 1894년 6월말 이후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이노우에(井上馨) 주한일본공사, 혹은 박영효의 등장 이후 2차개혁, 이른바 을미개혁과 이후 을미사변을 거쳐 1895년 12월 28일(양력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까지 진행되었던 일련의 근대적 개혁운동을 지칭한다.) 1894년 東學농민군들이 추진한 弊政改革과 같은 해 개화정권이 단행한 甲午改革은 그 상호연관성 문제가 논의되어 왔으나 농민전쟁에 대한 여러 爭點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甲午改革에 대해서도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8?15해방 이전의 연구시각은 他律性論 즉 식민주의적 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甲午改革은 日本 정부가 淸日戰爭 開戰 이전에 한국 정부에게 그 실행을 촉구한 바 있었던 「내정개혁방안강목」을 지도원리로 하여 주한 일본공사관의 공사 서기관 및 壯士 등이 직접?간접 지도함으로써 성취된 체제개혁, 즉 한국의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국가체제를 정비하려고 한 전면적인 체제개혁이었으나, 朝鮮의 역사적 후진성 즉 개혁추진 능력의 결여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주장이다.1960년 무렵부터 한국사를 내재적 발전이라는 시각에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일어남에 따라 甲午改革 연구에서도 196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甲午改革에는 침략을 위한 整地작업을 하려는 일본의 간섭과 지도라는 他律的인 면이 한 측면으로 있었지만, 동시에 朝鮮의 근대화에 필요하고 한국 역사의 합법칙적 발전을 반영하는 다른 한 측면도 있었다는 연구와 甲午改革은 당시 朝鮮사회의 내재적 요구에 일정하게 대응한 것이었지만 주요하게는 日本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전개된 他律적인 개혁이었고, 그 역사적 성격은 한국의 근대화를 저지했다는 주장의 연구가 나왔다. 반면 이와는 반대로, 甲午改革은 日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화파가 추진한 것이었으며, 그 한계성은 민중의 혁명적 에네르기를 결집하지 못하고 日本의 군사력에 의존하였다는 부르주아 계몽사상으로서의 한계사상 이었던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또한, 갑오개혁의 賦稅 金納化 문제를 분석하여 甲午改革의 시기는 한국경제의 半식민지 半봉건사회화가 심화되는 확고한 이정표가 되었다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Ⅳ. 나오며1894년의 농민전쟁과 甲午改革은 역사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만큼이나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그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란도 많은바 앞에서 짧게 살펴 본 爭點들만 해도 여러 가지이다.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혼란을 초래하는 결과도 발생할 수가 있다. 따라서 다양성은 인정하되 편파적?부분적으로 자신의 견해에 맞는 사실들로 연구를 한다거나 시대의 조류에 따라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며 종합적인 시각에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1.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39, 19992. ______________,『한국사』40, 20003. 金昌洙,「동학혁명 연구사론」『新人間』no.456, 신인간사, 19884. ______,「東學革命에서의 東學敎門의 역할과 영향」『新人間』no.489, 신인간사, 19905. 박맹수,「동학혁명의 연구동향과 과제」『新人間』no.494, 신인간사, 19916. 安秉旭,「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연구현황」7. 李離和,「폐정개혁과 갑오개혁의 연관성 규명」8. 한국사연구회,『제2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79. 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입문3 근대?현대편』, 풀빛, 1996Ⅰ. 東學농민전쟁(1) 東學농민전쟁의 배경개국 후의 朝鮮농민은 국내 封建세력의 수탈과 외래자본주의의 침략에 의하여 이중?삼중의 고통을 받았다. 당시의 정치는 극도로 부패 타락하여 거의 모든 관직이 매매되었다. 돈으로 관직을 얻게 된 貪官汚吏들은 들인 밑천을 뽑아내기 위하여 백성들을 苛斂誅求하게 되었다.정부의 지출은 외국으로부터의 무기구입, 해외사절단의 파견, 배상금 지불 등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팽력4월 8일) 신임군수 朴源明의 설득으로 해산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제2단계는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3월 20일(양력4월 25일) 茂長에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이 全琫準?孫化仲?金開男 등의 지도하에 기포한 때부터 5월 7일(양력6월 10일) 全州和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제3단계는 ‘執綱所시기’이다. 淸軍과 日本軍의 침략으로 농민군이 정부군과 ‘全州和約’을 체결한 5월 8일(양력6월 11일)부터 9월 12일(양력10월 10일)까지 농민군은 전라도 각 군현에 執綱所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를 실시하였다. 제4단계는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농민군이 日本軍을 몰아내기 위하여 재봉기한 9월 13일부터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한 1894년말까지의 시기이다.古阜郡守 趙秉甲의 수탈 아래 신음해 오던 농민들은 마침내 高宗31년(1894) 全琫準의 지휘아래 봉기하여 古阜郡衙를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稅穀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분배하고 萬石洑를 파괴하였다. 이에 놀란 중앙정부는 長興府使 李容泰로 하여금 조사케 하였던 바, 그는 古阜民亂의 책임을 오로지 東學敎徒에게 돌려 교도를 체포 학살하였다. 이에 격분한 全琫準은 교도와 군민을 이끌고 白山을 점거한 뒤 사방에 통문을 돌려 민중의 봉기를 촉구하니, 泰仁?金溝?扶安등 각처의 농민들이 합세하여 와서 東學농민군의 세력은 수천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古阜를 점령한 뒤에 白山에 陣을 옮겨 隊伍를 정비하였다. 白山에서 隊伍를 정비한 東學농민군은 제1차로 全州에서 출동한 관군을 黃土峴 싸움에서 쳐부순 뒤, 井邑?高敞을 거쳐 茂長을 점령하고, 다시 靈光을 거쳐 咸平에 도착하였다. 농민군들은 정부에서 보낸 중앙군을 長城戰鬪에서 패배시킨 후 재빨리 북상하여 全州를 점령하였다.東學농민군이 全州를 점령할 즈음 淸軍이 오고 뒤이어 日本軍도 출동하여 양국 사이에 점차 험악한 정세가 벌어지자 이에 정부는 東學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 회유하여 休戰이 성립되었다. 이에 東學농민군은 全州에서 철퇴하여 각기 출신지로 돌칭한다.
축제와 향연의 역사목차Ⅰ. 들어가며Ⅱ. 축제란 무엇인가?Ⅲ. 축제의 기원Ⅳ. 축제의 의미와 기능Ⅴ. 오늘날의 축제? ? ?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중심으로.Ⅵ. 나오며Ⅰ. 들어가며현재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는 연일 행사와 축제가 행해지고 있다. 국내에만 한정한다 하더라도 축제가 열리지 않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영화축제, 지방민속축제, 음식축제, 연희의 축제… 등이 연일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노동과 경쟁을 필요로 하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놀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축제가 끊이지 않고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나의 고향은 안동이고 그곳에서는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국제탈춤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개최된다. 또한 지금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으로서의 나는 최근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영화축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계속해서 축제를 접해보고 간접경험 함으로써 현대 시대에 와서 왜 이렇게 많은 축제가 열리게 되는지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여기에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Ⅱ. 축제란 무엇인가?연일 계속되는 축제의 현상과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축제의 정의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사전적 정의에서는 축제(祝祭)를 ① 축하의 제전(祭典) ② 축하와 제사(祭祀) (민중서림,『국어대사전』) 혹은 ① 축하하여 제사를 지냄 ② 경축하여 벌이는 큰 잔치나 행사를 이르는 말(동아,『새국어사전』) 등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전자에서는,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의식, 의례, 놀이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후자는 전자의 정의에 큰 이벤트를 추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현재에는 후자의 사전에서 정의내린 것처럼, 전통적인 의례, 의식, 놀이로서의 축제와 이벤트로서의 축제가 공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규모가 크건 작건 간에 ‘축제’라는 명칭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21세기 최첨단화된 세계를 살아간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통적인 지방민속축제가 이다.Ⅲ. 축제의 기원축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한반도에서는 최소한 상고시대(上古時代)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부여-영고(迎鼓), 고구려-동맹(東盟), 예-무천(舞天), 삼한-기풍제(祈豊祭) 등의 제천의식이 행해졌다는 사실은 중?고등학교에서의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상고시대에는 당시 부족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며칠을 계속해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큰 축제가 열려졌다. 이 때의 축제의 의미는 외적으로는 주로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 혹은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강했으며, 내적으로는 국가통합의 의미가 강하였다. 부족국가 시대에는 대부분 왕이 종교와 제사장까지 겸하는 신정(神政)일치 사회였으므로 왕은 축제를 통해 부족을 대표하고 신성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자로 재현되었고, 이를 통해 권위를 부여받게 되었다.하지만 오늘날에의 민속축제는 그 전통을 이어 내려 왔다 하더라도, 그 형태나 의미는 우리가 ‘전통’, ‘과거’라고 부르는 시대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5절에서 다시 다룰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건너뛰도록 한다.Ⅳ. 축제의 의미와 기능류정아는 축제를 분석하면서 세 가지로 분류하였으며, 이를 더욱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축제들처럼 의례나 일상생활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축제? 사회 변화에의 적응 기제로서의 축제, 이 경우에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축제들의 총체는 보다 큰 체계라는 새로운 조건의 영양하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민속’의 형태로 변형된 축제가 있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축제는 여전히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축제의 내용과 의미는 그것이 원래 근원했던 사회?문화?경제적 맥락과 분리되기 시작 한다.(류정아, 1998, pp.21-22)축제를 일상생활의 ‘단절’로 간주할 경우, 축제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의식이 치러지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순간과 장소가 된다. 발랑디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축제 가장 완전한 형태의 혁신이 시도되는 것이다(Balandier, 1984, p.130). 고르동은 축제를 신성성이 부여되는 시간이라고 정의하였으며 그에게 있어서 축제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에너지를 가진 영역에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Gordon, 1983, pp.19-38).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연희되고 있는 축제들을 볼 때 일상생활과 별개로 떨어져서 연희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축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형태와 내용과 의미를 변형시키면서 사회?문화적 또는 정치?경제적인 삶을 구성시키는 부분들의 하나로서 존재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변화에의 적응 기제로서의 축제는 급격한 사회 변화에의 적응 기제가 되면서 그것이가지고 있던 의례적이고 신성한 의미는 부분적으로 상실한 채 일반적인 사회 현상 중의 하나로서 기능하게 된다. 과학의 발전 때문에 초인간적인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사실로 축제의 신성한 의미의 상실을 설명한 포이예(Feuillet, 1991)에 비해서 보벨(Vovelle, 1976)은 이러한 현상을 축제를 구성했던 ‘집단’의 사라짐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축제는 공동체내에서 조직되었던 유력가들, 부르주아, 장인, 자국 농민들과 같은 몇몇 ‘집단’들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연희를 펼쳐 보임으로써 서로 경쟁을 하기도 하였으나 곧 산업혁명의 영향 아래에서 사라져 갔다. 이들이 토대를 하고 있었던 사회는 농업경제, 맹아적인 제조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회구조는 공동체의 고립성, 서열의 차이, 지위의 위계화 등에 기반을 두고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생산과 사회 조직이 설정되는 순간부터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잃게 되었다.그러나 뤼쓰와 바세르스트롬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축제는 현대화의 영향 아래서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본의 축적과 사회적 계층화가 축제 형성?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의 형태로 변형된 축제는 자본주의의 관광산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관광적인 지역주의는 스펙터클이나 기념품 또는 토속음식 등과 같이 가장 먼저 소비될 수 있는 전형적으로 지역적인 것들에 특권을 부여한다. 지역적 또는 마을 수준의 전통적인 축제는 관광객들에게 하나의 매력 인자가 되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혀 전통적이지 않은 요소를 가진 다른 여러 가지의 스펙터클을 새롭게 고안해 내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축제는 점차 또는 불가피하게 외부인에게 보다 근사하게 보이기 위한 ‘전시물’이 되기도 한다.이러한 축제들은 과거의 축제 이름과 구시대의 연희 과정의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의미와 구성은 더 이상 과거의 것과 같지 않다. 즉 이 축제들은 더 이상 초인간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과의 관계 하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또는 관광적 상황에 보다 잘 적응하기 위해서 변형되는 것이다.많은 축제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의 틀 내에서 만들어지고 변형되면서도 전통적인 민속적 형태를 띠게 된다. 이렇게 민속화된 새로운 축제에서는 과거 요소와 현대 요소가 실제로는 전통적이지 않으면서도 ‘전통성’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면서 서로 혼합되어 있다.Ⅴ. 오늘날의 축제 …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을 중심으로.안동이라는 고장은 2005년 올해 “세계역사도시”에 가입하게 되었다. 안동은 국내에서도 “양반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의 전통을 대표하는 도시로써 “세계역사도시”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안동에서 “국제탈춤페스티벌”을 개최한 것은 1997년 부터이다. 개최배경은 다음과 같다.안동문화는 시대별로 편중되지 않고, 종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들이 온전히 전승되어 온 지역이다.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양의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유형적 자산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도 많아 남성대동놀이인 차전놀이, 여성대동놀이인 놋다리밟기, 화전싸움, 저전논메기 소리, 내방가사, 행상소리 등 다양하게학에서 기인한다. 문화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였으며 문화수용과 계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이 결과 동양의 모든 문화가 안동에 유입되었고 유입된 이후 안동만의 가치관으로 재편성되어 꽃을 피운 것이다. 따라서 안동문화는 동양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운데 안동다운 특징을 보여주는 수준높은 지향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이 탈춤페스티벌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즉 문화유산의 가치 속에서 정적인 마음의 고요함을 배우고, 탈춤이 가진 신명을 통해 동적인 발산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춤축제는 안동문화를 답사하는 것과, 축제의 신명을 함께하는 것이 태극처럼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축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본래 탈춤축제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1997년 “국제탈춤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의 큰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해에 이 축제는 문화체육부 ‘10대 문화관광축제’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1998년에는 ‘99 문화관광부 6대 집중육성 축제’로 선정되었으며 99년에는 APEC회의에도 참여했으며 2000년부터 올해까지는 줄곧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전국최우수 축제’로 선정되어왔다.위에서 보았듯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은 전통 문화를 간직한 지방민속축제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그렇다면 과연 이 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요인은 무엇일까?먼저 개최지가 안동이었다는 점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안동을 떠올릴 때면 ‘전통’을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안동시민으로 20여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몇 군제의 전통적으로 보이는 마을, 건물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나 사고방식, 그 어느 것도 다른 도시들과 다를 바 전혀 없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있어서 이 ‘전통’이라는 요소는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고, 유인책이 된다. 따라서 관광산업은 안동을 ‘전통’, ‘양반’의 고장으로 포장하고, 또 특히 그 도시에서 가장 대중들을 많이 유.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와 경험중심 교육과정을 통한 해결방안◈영어영문학과 20010431 이현우- 목차 -Ⅰ. 들어가며Ⅱ. 現 교육에서의 문제… 1. 대학입시… 2. 주입식?암기식 교육… 3. 일상생활과의 유리… 4. 지식의 가치… 5. 목표의 상실Ⅲ. 해결방안으로서의 경험중심 교육과정… 1. 8년 연구(the Eight Year Study)… 2. 해결방안으로서의 경험중심 교육과정… 3. 경험중심 교육과정의 실제적 반영을 위한 전제… 4. 경험중심 교육과정의 비판에 대한 再비판Ⅳ. 나오며Ⅰ. 들어가며현재 우리나라 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교과중심 교육과정이 지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교과중심 교육과정은 “전통”이라는 말로 수식될 정도로 교육과정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하지만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니며 물도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어떠한 학문적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른 것만은 아니며 그 자체에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론과 이론을 접목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그 역시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나에게 굳이 한 가지 해결방안으로서의 교육과정 선택의 문제가 놓여진다면 경험중심 교육과정으로 선택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를 교과중심 교육과정과 연결시켜 파악해 보도록 하고 그 돌파구를 경험중심 교육과정에서 찾아보도록 한다.Ⅱ. 現 교육에서의 문제1. 대학입시언론을 통해 학생들이 성적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심지어 자살행위에까지 이르는 사건을 종종 접하게 된다. 단지 시험을 못 봤다는 이유 때문에 극단적인 자살까지 감행하는 것을 보면 대학입시에서 성적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 교육이 대학입시로 인해 평점이 강조되었는지, 교과중심 교육과정만으로 한 개인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2. 주입식?암기식 교육교과중심 교육과정은 주입식?암기식을 중심으로 한 교사중심의 수업을 강조하여 학생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교육에서 주입식?암기식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것을 너무 강조함으로 해서 학생들의 창의성이나 문제해결력이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3. 일상생활과의 유리교과중심 교육과정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내용을 못 박아 둠으로 학생들의 실제생활이나 경험, 관심사와 멀어지게 되었고 그들의 내적동기를 유발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은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수업을 지루한 것으로 생각한다.4. 지식의 가치전통주의적 관점의 주창자들에게서 교육의 목적은 문화유산의 전달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내용은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선정된 것이고, 인류에게 알려진 것 중 가장 영구적이고, 확정적이며, 객관적인 사실, 개념, 법칙, 기능들이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교과내용을 강조하며, 특히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사실, 기본 지식과 기능, 전통적 가치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위의 3과 연결되는 것으로 학교지식이 일상생활로부터 유리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특히, 지식은 변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교육과정사회학자들에 의해 비판 받는다. 또한 전통주의적 관점은 체제유지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급변하는 사회의 변화에 발을 맞추기가 힘이 들 수 있다.5. 목표의 상실국가에서는 교육과정에 있어 교육목표?목적?이념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교육이 이러한 가치들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학생들은 최종목표를 대학입학에 두고,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지식을 단순히 암기할 뿐 왜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학습의 의의를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Ⅲ. 해결방안으로서의 경험중심 교육과정1. 8년 연구(the Eight Year Stu육과정이었다.1930년 4월 워싱턴에서는 진보주의 교육협회(the 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 PEA)의 연차 학술회의를 계기로 어떻게 하면 고등학교도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서비스를 더 낫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 그 고민의 한결같은 끝은 중등학교가 변화하기는 해야 하겠으나 가장 큰 걸림돌은 대학입시에서 요구하는 과목과 단위를 이수치 않으면 대학입학이 안 되는 상황이니 이를 안 따를 수도 없는 형편 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PEA는 300개 이상의 주요 대학을 끌어들여 8년 연구에 참여한 실험학교와 학교구 졸업생들에게는 대학이 정한 고등학교 이수과목 요건이나 입학시험에 관계없이 입학을 허락할 것을 내락받았으며, 실험을 신청한 250여개 학교 중에서 공사립과 지역별 대표성을 고려하여 고교 교육과정 개혁의지가 있는 학교로서 지역에 개혁의 효과를 미칠 수 있는 학교를 위주로 총 29개의 학교와 학교구가 실험에 들어갔다.② 실험 학교들의 교육과정8년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한 유형의 교육과정이 실험 학교들에게 획일적으로 강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학교는 각자 나름대로 기존의 교육과정을 변경하는 재량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8년이 지난 뒤 교육과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8년 연구에서 가장 큰 변화는 학교의 강조점이 교과에서 학생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육과정 작성과정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교육과정의 내용과 조직의 뼈대는 첫째 성인사회의 요구이고, 둘째 청소년들의 관심사였다. 그 반영정도는 학교에 따라 교사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③ 실험 학교들의 수업이제 교사는 한 교과에 대한 만물박사가 아니라 청소년의 삶의 전반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안내자로 받아들여졌다. 수업의 중점은 문제해결력을 통해 반성적 사고를 개발하는데 있었으며 중등학생들은 단순히 대학 가기 위한 학점을 따는 교육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으로서 교육받아야 했다.④ 중등학교에서의 평가8년 연구에서는 학생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한응도, 사회적응력, 공부하는 습관, 장래 희망 등 학교가 학생들에게 키우고자 하는 특성, 인품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보다 활기찬 교육과정, 보다 향상되고 영감을 주는 수업, 보다 의미있고 종합적인 평가, 학교와 대학의 관계 개선의 기미와 같은 것들은 모두 학교가 남긴 기록과 작성한 보고서에 잘 드러나 있었다. 결과적으로, 대학은 교육과정을 처방하여 중등학교를 제약하지 않고도 입학과 선발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사용된 정보들은 학생에 대한 자세한 정보, 평가도구를 활용한 성적, 기타 외부기관의 검사결과 등이었다. 실험 참가학교를 위해서 많은 대학들은 통상적인 입학시험을 면제해 주었고 대학이 정해 놓은 학과목과 단위수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자율권을 허락하였다. 그 대가로 학교는 대학에 그 학생이 대학공부에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와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였다. 대학은 그 정보에 바탕하여 학생을 선발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가 제공한 정보는 대학이 훌륭한 자격을 갖춘 학생들을 선발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⑤ 실험학교 졸업생들의 대학생활과 공부고교나 8년 연구위원회의 주된 질문은 “과연 대학입시준비를 전통적 방식으로 해오던 데서 벗어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학업과 생활에 장애를 겪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1936년 여름 조사연구진은 위원회 위원, 고교 교장과 교사, 대학 학장과 교수, 졸업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학생들의 대학생활을, a)지적 능력, b)문화적 발달; 여가시간 활용; 예술적 창조적 측면, c)실제적 능력; 상식과 판단; 일상적 기능; 환경적응 능력, d)생활철학(목적유형), e)인격특성(행동유형), f)감성의 균형(정신건강 포함), g)사회적 적응, h)사회문제에 대한 감수성(사회의식), i)신체건강(건강한 습관을 위한 지식과 실천)측면에서 분석하기로 합의하였다. 각 준거들은 다시 소영역으로 분류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한 증거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도 명기하였다.실험집단 학생들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교집단 학생들만큼이나 학문적 분야의 전공자가 많았다.4. 낙제나 유급 횟수는 양집단 학생들이 비슷하였다.5. 해마다 하는 성적우수자 선발에 뽑히는 숫자가 약간 많았다.6. 지적 호기심이나 충동력이 좀더 강하였다.7. 훨씬 정확하고,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8. 교육의 의의에 대해 분명하고 잘 정리된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대학 초반기에 방황이 적었다.9.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우수했다.10.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차이가 없었다.11. 양집단 모두 똑같은 적응문제에 당면해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문제해결에 접근 하는 모습을 보였다.12. 예술활동 등 과외활동에 보다 활발히 참여하였다.13. 종교와 예배활동을 제외한 학생회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4. 교과외 분야에서 우수자가 많았다. 그들은 단체의 장을 맡거나, 간부집단에 속 하거나, 체육?연극?음악 분야 등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15. 현대적인 사회생활에 적응력은 비슷하였다.16. 학교생활에의 적응력은 비슷하였다.17. 방학생활, 휴가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였다.18. 시사문제에 매우 활발하게 참여하였다.2. 해결방안으로서의 경험중심 교육과정위의 8년 연구의 결과는 흥미롭고, 우리나라 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연구결과이고, 우리나라에 적용 가능한 이론인지, 적용을 했다 하더라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나, 우리나라 교육개선에 있어서 하나의 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 해결을 위한 방안을 검토해 본다.첫째, 일회성에 그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몇 차례 되지 않는 학교 시험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교육의 과정과 全人(전인)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전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현 교육에서 과정의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수행평가의 실제적 효용에는 의문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지적능력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더해 그들의 인성이나 있다.
정부가 과다한 사교육비를 억제하기 위해 내신의 중요성을 증대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원가나 과외는 더욱더 성행하게 되었고, 가정의 사교육비는 감소하기 보다는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교육 부총리의 연이은 해임 등 공교육에 대한 여론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 상태이고 공교육의 대한 신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교육비가 날로 증가되고, 공교육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일까? 이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하겠지만, 교수(敎授)활동의 주체인 교사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학생들은 왜 사교육을 받는가? 당연히 성적 때문이고, 대학의 입학이 성적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학교에서의 학습만으로는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교사의 자질문제로 연결이 될 수 있다. 사실 교사의 자질에 관한 문제는 예전부터 논의 되어 왔으며 학생의 성적만으로 교사의 자질을 따지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사의 책무 중, 학생의 학습조장을 첫 번째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상식이다. 학생들의 학습에 초점을 맞추어 교사들의 자질이 떨어진다고 할 때 그 원인으로는 a)순위고사 시대의 교사들이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것과 b)교육 조직의 관료주의적 시스템 c)교사의 처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나열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많을 것이며 모든 요소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져 작동하는 것이다.나는 특히 여기에서 교사의 처우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급여의 문제를 아담스의 공정성 이론에 비추어 교사의 자질 문제와 다루어 볼 것이다.아담스의 공정성 이론은 조직 속에서 개인은 자신이 투자한 투입과 여기서 얻어지는 결과를 다른 개인이나 집단의 그것들과 비교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자신이 투자한 투입 대 결과의 비율이 타인의 그것과 동일하면 공정하다고 느끼며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공정성을 지각하게 되면 공정성을 회복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공정성 이론에 의하면, 과대보상이든 과소보상이든 불공정성을 지각하게 된다. 즉, 개인들은 부족한 보상에 대해서는 불만족을 느끼고, 과도한 보상에 대해서는 부담감을 지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감은 불공정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불공정성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동기화가 작용한다.교사의 보상에는 급여뿐만이 아니라 복지혜택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될 수 있겠지만 앞에서도 제언했듯이 급여문제를 가지고 다루어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일선교사 3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다.첫 번째로 그들은 일단 그들이 받는 급여(보상)를 적당하다거나 혹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다.두 번째로 그들은 타 직종의 급여수준과 그들의 급여수준을 비교해 보았을 때 낮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높은 수준이라고 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세 번째 설문은 첫 번째 설문에서 급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대부분이 급여가 부족한 이유에 대해 투입 대 보상의 비율이 공정치 못하다는 데에 있었다.네 번째 설문역시 세 번째 설문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부족한 급여의 교수활동에의 영향을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설문 결과가 도출이 되었는데 부족한 급여는 교수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낮은 수준의 급여가 교수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다섯 번째 설문은 네 번째 설문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급여가 인상될 경우 교수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설문이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모두 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답을 했다는 것이다.여섯 번째의 설문은 교사들의 그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기 위해 실시한 것인데 그들은 다른 직종에서 좋은 제의가 들어온다 할지라도 직장이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신중히 고려해 볼 문제이다라고 대부분이 답을 해주었다.마지막 설문 역시 여서 번째 설문과 동일한 의도의 설문이었는데, 그들의 자녀가 교직에 종사하려 했을 때 70%가까이 찬성을 하겠다는 응답을 하여 교직이라는 직업에 대해 그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겠다.설문 대상자의 수, 연령대, 지역, 성별 등을 고려하지 않은 점, 그리고 급여이외의 보상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지 않고 급여의 문제에만 그것을 한정함으로써 자료의 신뢰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보편성의 원리,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문제에 집중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의 설문을 아담스의 공정성 이론에 근거하고 나의 의견을 덧붙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교사들은 분명 그들의 투입 대 보상의 비율이 타직종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담스의 이론과는 다르게 그 불공정성이 자신들의 투입, 즉 교수활동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급여가 인상되면 교수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교사의 처우 개선이 그들의 자질 문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들은 불공정성을 지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교직이라는 직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동기를 부여시키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교사의 처우를 개선해 주어야한다.많은 책이나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 사회는 불평등 사회이고 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에는 교육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에서는 학업의 성취도 즉,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며 성적으로 인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지의 당락이 결정되며 또한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이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학업성취도-대학-직장의 연결고리가 성립,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불평등을 재생산해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는 불평등을 초래하게 된다. 현재 만연하고 있는 사교육을 사회에서 매장해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학생들의 사교육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수많은 해결책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교사의 능력 향상 역시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사교육으로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돌려야 하며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학생들이 경제력이 부족해 사교육을 받지 못함으로서의 불평등 재생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교사의 능력향상은 필수적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사의 처우 개선이 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중국사를 시대 구분함에 있어서, 唐에서 宋으로의 전환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唐에서 宋으로의 전환 과정에는 많은 획기적인 변화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이 되고 아직까지도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토지문제이다. 宋대의 토지의 소유와 경작의 근간은 대토지사유에 의한 地主?佃戶制이다. 일본학계 내에서 중국사를 시대구분함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佃戶의 실체이다. 이 佃戶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서양에 있어서의 莊園의 구조와, 송대 이전의 莊園의 성격을 먼저 살펴보고 서로 비교를 해봄으로써 그 목적을 좀 더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중세 西洋에서 지배적인 사회제도는 封建制였다. 封建制의 현저한 특징은 그 相互的(reciprocal) 성격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황제가 위엄있고 절대적이던 옛 로마帝國의 제도와 판이하였다. 封建制 下에서 主權者는 아무도 없었다. 국왕과 국민, 領主와 封臣은 일종의 契約에 의거하여 결합되었다. 양자가 모두 얼마간 상대방에 의존하였다. 한쪽이 이행하지 않으면 의무는 중지되었다.좀 벗어난 이야기지만 西洋은 古代 노예제 사회에서 封建적 中世사회로 전환이 되어갔는데, 중국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唐왕조는 安史의 亂(755~763)을 계기로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되며 五代의 분열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藩鎭 절도사에 의한 무인 정치가 분산적인 지방 권력으로서 무수히 일어나서 中世的?封建的인 사회체제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다음 시대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욱 중앙 집권적인 관료제 국가가 등장하게 된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西洋 封建制 사회에서 領主들의 莊園 下에서는 빈농층이 다수의 대중을 이루고 있었다. 11세기에 와서 莊園 주민들의 대부분은 農奴(serf)들이었다. 그들은 “토지에 예속”되어 領主의 허락없이 莊園을 떠날 수 없었다. 여하간 자기들의 촌락 바깥 세상은 위험한 미지의 세계였으며 다른 곳에 가보아야 별 수 없는 비슷한 莊園들 뿐이었기 때문에 자기 마을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領主로서는 촌락인들을 쫓아버리거나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가 없었다. 領主에게는 그들을 보호하고 재판하여 줄 의무가 있었다. 반대로 그들은 領主의 토지를 경작하고 자기들의 생산물의 일부를 바쳤다. 여기에서 보면 農奴들은 토지에 예속되어 있기는 하나, 領主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정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農奴들의 身分은 경제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명백히 노예가 아니었다. 農奴의 노동력은 領主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領主와의 관계 또한 관습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지만 農奴가 노예는 아니었지만, 인신예속인이었다. 農奴의 특성은 農奴가 領主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農奴가 어디에 가 있건 그의 身分에 특유한 의무들과 관련해서는 그의 영주에 대한 예속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이제 중국으로 돌아와 宋 이전의 莊園制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중국의 莊園은 莊?園?墅?別業?別墅?莊園등으로 불렸고, 그 기원은 멀리 漢代쯤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주로 왕공?귀족들의 별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에 딸린 田園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 것은 唐 이후였다. 宋 이전의 대사유지의 주된 소유자는 귀족이었으며, 경작자는 주로 노예들이었다. 이에 반해 宋 이후의 대토지의 소유자는 단순히 땅의 소유자 地主이며, 경작자는 佃戶들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佃戶의 성격이다. 문제의 要旨는 佃戶는 거주의 자유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地主와의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인지 아닌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인 宋代이후의 莊園制는 어떠했고, 佃戶의 실체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唐왕조는 8세기 중기에 일어난 安史의 亂을 계기로 하여 쇠망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중국은 五代十國으로 다시 분열된다. 일반적으로 중국사회의 지배계층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에 있고, 따라서 대토지의 확보는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올라서는 필수조건이었다. 그런데 唐末?五代는 정치?사회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농업?수공업?유통구조등 경제전반에 걸쳐 중국사회의 새로운 발전이 진행되었고, 이 틈을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한 이들은 신흥지주[形勢戶]이다. 이들은 唐代 귀족이 소유하고 있던 대토지를 사유하면서 새로운 莊園체제로 개편하여 나갔다. 즉, 形勢戶는 몰락한 균전농민[佃戶]을 그들의 莊園에 투입하여 地主?佃戶制에 의한 새로운 생산체제를 구축하면서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확고한 지위를 다져나갔다.일본학계에서 중국역사를 시대구분함에 있어서 宋이후의 시기를 近世로 봐야할지 中世로 봐야할지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것은 앞에서도 진술했듯이 佃戶의 실체이다. 京都大學派는 宋代近世論을 주장하며 全戶는 거주의 자유가 있고 地主와의 계약관계 위에 성립된 近世的 소작인이고 또 地主의 토지소유 형태도 분산된 莊園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東京大學派에서는 宋代中世論을 주장하며, 佃戶에 대해서는 西洋 中世的 農奴와 유사하며 거주의 자유가 없고 토지와 함께 賣買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처럼 佃戶를 양분해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망설임이 있다. 왜냐하면 佃戶에도 여러 부류가 있으며 그것을 지칭하는 용어도 다양하다. 또한 지역에 따라 토지 소유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佃戶의 실체를 한 마디로 기술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지방에 따른 佃戶들의 類型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江浙지방에서 佃戶는 토지가 팔리면 그에 따라 함께 팔리는 身分이었다. 이 지방은 노동력에 비해 경지 부족이 심한 곳이었는데, 그러한 조건에서도 소유자가 바뀌어도 소작인이 자신의 소작지를 확보해 갔다는 것은 地主 혼자만의 생각으로 토지에서 떨려나가 賣買되어 버리는 변경의 佃戶에 비해 보다 진보된 단계의 佃戶라고 볼 수 있다.다음으로 荊湖路 지방을 살펴보면 이 지방에서는 오히려 佃客을 토지에서 떼어놓고, 賣買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태는 江浙지방에 비해 같은 佃戶라 해도 토지에 대한 결속이 극히 약하고 오히려 노예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마지막으로 四川지방을 살펴보면 佃戶는 地主에 대한 身分的 예속도가 매우 강하고 몇 세대에 걸쳐 地主집 가까이 또는 그를 둘러싸고 살며 組와 ?役을 제공하고 있다는 관계를 볼 때, 江浙 지방보다 훨씬 뒤떨어진 보다 古代的 색채가 농후한 생산관계를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