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後期 小論의 政治思想目 次1. 서 론2. 少論사상의 형성배경1) 학문적 기반2)禮論을 둘러싼 少論과 老論의 대립3. 少論의 政治思想1) 皇極蕩平論2) 人才의 登用3) 사회경제사상4. 소론사상과 그 역사적 위치5. 결 론1. 서론여러 번의 士禍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적 성장을 계속해온 士林은 宣祖즉위를 전후하여 분립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간파한 李浚 은 君子와 小人을 분별할 것과 사사로운 朋黨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이러한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宣祖 8년에 金孝元 沈義謙事件을 계기로 政界는 東西로 분리되고 만다. 이후 栗谷이 是非調劑와 人士參用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己丑獄事를 계기로 사림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고, 또 광해군의 즉위 문제를 쟁점으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일단의 사건들로 인해서 政爭이 격화되었다. 이것은 군주의 포악함을 조장하는 權奸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과의 대립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仁祖反正이후 北人이 완전 실각하고 西人이 득세하면서 정계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功西와 淸西, 이들과 仁祖, 南人간의 주장에 각각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의 공통점은 대체로 永昌大君 弑害와 仁穆大妃 廢母論과 관련있는 大北계통을 등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仁祖反正의 名分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功西에 속하는 金 는우리가 일만번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 反正을 한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다. 이제 또 黨을 세운다면 반정의 본의가 아니다.{) 고전국역 총서, , 민족문화추진회, 6권 p.411고 하면서 北人인 南以恭을 중용하려고 까지 하였다. 그리고 仁祖 역시 西人의 정계에서의 독주를 방지하고, 朋黨을 중심으로 臣權이 결속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등용되어 상호간의 경쟁과 비판 위에서 정치가 운영되고 있었다. 反正功臣이라는 특수계층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의 자체대립 및 非功臣士類와의 대립을 초래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인조대에는 대체로 朋黨政治가 보다진(李尙眞)만이 소론을 지지하였고, 윤지완(尹趾完), 남구만(南九萬), 유상운(柳尙運)은 연령이나 벼슬이 이들 오간보다 높았으나 소론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소론의 지지기반은 노론에 대항할 정도로 넓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하게 된 계기는 송시열의 문인인 최신(崔愼)의 상소에서 발단한 윤증과 송시열의 회니시비(懷尼是非) 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정경희, 1993 한국사론 30, 133쪽송시열과 윤증은 주지하듯이 노론과 소론의 대표격인 존재였다. 노소분당의 원인이 되었던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부자 사이의 갈등은 윤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즉 송시열은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심히 배척하였으며, 현종대 복제 논쟁에서도 서로 격돌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에 비해 윤선거는 윤휴의 재질을 아껴서 송시열에게 너무 심하게 공척하지 말기를 청하기도 하는 등 그를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송시열은 윤휴와 절교할 것을 윤선거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윤선거도 송시열의 기세에 눌려 한 때 이를 응락하였다. 그러나 윤선거가 생전에 끝내 윤휴와의 관계를 청한하지 않은 사실을 그의 사후에 송시열이 알게 되었다. 윤선거 사후 윤증은 윤휴의 祭文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이를 송시열은 그들이 윤휴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증거가 이닌가 하여 의심하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윤증은 부친의 묘비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면서 부친이 생전에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써두었다가 보내지 못한 편지를 묘비 찬술에 도움을 주고자 그에게 보였었다. 그런데 편지 내용 중에 윤휴를 두호한 부분이 있어서 송시열은 자신의 의심에 확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대단한 배신감을 느꼈다.그러던 차에 윤선거 묘비명의 찬술을 부탁받은 송시열은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따라쓸 뿐 짖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견지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비명을 찬술해 주었다. 이에 윤증은 몇번 수정해 을 제거하고 올바른 朋黨의 이념을 확립하고자 남계는 붕당여부에 관계없이 인물본위의 인사정책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피차를 막론하고 군자는 반드시 진출시켜 친히 하고 소인을 반드시 물리쳐 멀리 해서 고르고 밝은 이치를 밝히신다면,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癸亥熙政堂第二箚, 南溪集 속·권3이것은 전통적인 蕩平思想에 근본하여 朋黨간의 불협화음을 제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남계는 이러한 皇極蕩平說 에 입각하여 정국의 불안한 요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時宣에 알맞게 세 가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곧 첫째가 兩賢思想의 宣揚 이고, 둘째가 嶺南人才의 登用 이며, 셋째가 敎戒의 嚴重 이었다.실천방안으로 첫째는 兩賢思想의 宣揚 으로 李珥와 成渾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남계는 兩賢의 從祀후에도 紛紛한 異見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를 주장하였다. 본래 從享이란 先儒에게 주는 국가의 最高榮典이다.{) 金相五, 부대사학4, 1980, 187쪽따라서 신하의 입장에서는 공자와 함께 배향을 받는 것이므로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는 것이 된다.{) 김상오, 위의 논문, 176쪽先儒에 대한 文廟配享 주청은 泮生들이 주동이 되고, 이 주청에 의해 조정 대신들의 논의에 결정지어지는 것이 常例였다. 남계도 성균관에 있을 때 牛溪栗谷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다가 효종의 태도에 실망하고 낙향한 바 있었는데, 그 시말은 다음과 같다.인조반정 직후 조정에서는 서인이 보다 활발한 정계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그들은 牛·栗從祀問題를 거론했으나, 인조는 신중론으로 대처하고 남인 역시 그에 동조하여 결국 서인의 의논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태학생등 수백인이 우·율의 문묘배향을 주청하고 나섰다. 이에 맞서 경상도 進士 등 900여인이 그 반대 상소를 올렸다.{) 권2, 즉위년 1월그 이유는, 불문에 입적해서 사문에 득죄한 적이 있는 이이와 임란 때 국왕을 따르지 않은 성혼을 종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기에 徐選이 주창하고 찬성 姜希孟이 계승함으로써 제도화되어 그 이후 그들에 대한 禁 가 풍속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 때 쌀을 바치고 허통시키자는 李珥의 주장에 따라 그들의 문무과 진출이 가능해졌으나 淸要職에는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인조 때 崔鳴吉의 주장에 따라 청직에는 진출이 불가능했으나 요직에는 진출이 가능하였다.{) 권10, 3년 11월 무오, 이때 인조도 적극적이었으며, 비변사에서도 또 강력히 변통을 주장하였다.여기서 요직이란 호조·형조·공조 및 各寺를 말한다. 그렇다고 찬성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南漢出城 때 할 복 자살을 기도한 바 있었던 鄭蘊 같은 이는 良妾之出의 허통만 찬성하였지 賤妾之出의 허통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17세기 초반 서얼 허통을 찬성하는 의견이 과반수였지만 반대 의견도 상당하여 조정의 의논이 불일치하였다. 둘째, 서얼 허통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良妾子孫의 허통을 승낙했다. 그후 현종 때 송시열과 박세채 역시 서얼 허통을 찬성하였다. 肅宗祖에 들어서서는 洪宇遠·尹 등에 서얼의 허통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당시 서얼 허통에 관한 조정 내에서의 큰 흐름은 黨色에 관계없이 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朝臣들이 무엇보다도 인재의 收拾에 매우 노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숙종 21년에는 영남 생원 南極井 등 988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서얼 금고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宋俊浩, , 한국사의 이해, 전북사학회 편, 1986, 160쪽그 요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納米許通의 불합리함을 지적하였다. 아비가 평민이고 어미도 평민인 사람들은 과거 응시에 納米하는 법이 없는데, 어미는 신분이 낮지만 아비가 양반인 서얼들은 과거를 응시하는 데 있어서 왜 納米를 해야 하는 것인지를 의아해 하고 있다. 둘째로, 과거 급제 후에 宦路를 개방해 달라는 것이다. 서얼로서 문과에 급제한 자가 백여 명이고 무과 급제자가 수십 명인 데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면서 이를 위한 禁軍·御營廳·訓練都監등의 군력 증강이 이루어지면서 이에 대한 재정확보 책으로서 다시 제기되었다. 金堉에 의해 제기된 유포론이나 元斗杓에 의해 제기된 호포론은 제기된 수준에만 그쳤지만, 1659년 兪啓의 상소에서 제기된 士族收布論은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종대에는 김육과 유계의 호포론이 다시 제기되어 논의되고, 박세당의 사족수포론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15년경에 이르면 허적 등 남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반수포론은 국론이 되고 이를 거두는 방법만이 身布·戶布의 문제로 논의되고 있었다.{) 鄭演植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3지두환, 한국사론 19, 1988숙종 초반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물러나고 윤휴·허적 등 남이 집권하였다. 남인 정국에서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논의 는 1675년 1월 윤휴가 時務九條를 올리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어 4월에 허적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호포를 거둘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2월에 윤휴가 다시 호포법을 제기하자 허적과 허목은 호패법에 따르는 폐단을 우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이렇게 지연된 호포론이 庚申換局·己巳換局·甲戌換局 등 정국의 변화에 따라 활발히 논의 되지 못하다가 숙종말에 서인이 집권하면서 호포론이 수렴되며 군역제 개혁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근기 남인세력이 보수적이고 서인세력이 진보적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으나, 서인들이 호포론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이들이 개혁적 입장에 있었다기보다는 그들의 권력기반이 되고 있던 군문의 양성을 위한 재정확보책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호포론이 신분제 해소의 측면에 중점을 두는 시각도 재고되어야 한다. 호포론으 최석정이 지적하고 있듯이 호포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형제, 친척이 한 호에 밀집되는 경향도 존재하는 등 그 폐단도 많이 나타날 수 있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군제에 대한 최석정의 입장은 조선전기의 진관체제를 기간으로 하는 향병 중심의 방어책으로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自强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별집 다.
朝鮮中期 政治運營 방식과吏曹銓郞의 역할사림은 고려말 성리학 수입과 더불어 등장한 사대부 가운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의리로써 배격하고 초야에 묻힌 길재 계통의 사학파가 연원이며, 조선초 집권 관학파에 밀리어 낙향, 정주학에 몰두하는 한편 재향지주층으로 성장하면서 세조의 찬탈에 동조한 훈구파를 비판하고 留鄕所를 통해서 재기를 준비하다가 김종직이 成宗의 知遇로 등용, 그 門徒가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각하였다. 사림은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당시 서민의 어려움과 몰락을 근거로 하여 훈구정치를 비판하였다. 사림의 훈구정치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정치 주도세력에 대한 비판과 정치 주도세력의 권력남용을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이었다. 훈구의 폐단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힌 이는 李深源이었다.이심원은 민이 권문에 투탁하는 원인을 권문의 침탈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체적 원인으로 먼저 권문의 私債를 지적하였다. 그는 권문에서 사태를 통해 가난한 양민들을 고리대 방식으로 수탈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양민들은 이러한 수탈에 의해서 전토를 잃고 권문에 투탁하거나 流離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원인으로는 권문의 사천들이 권력에 의지하여 役에서 벗어나는 현상이었다. 즉 權臣의 청탁을 받은 수령이 권문의 사천들을 역에서 면제해 주었고, 그 부담은 양민과 공천에게 돌아갔으므로 양민과 공천이 권문에 투속하였다. 당시 수령의 인사는 재상들의 천거에 의존하였고, 인사고과도 재상이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수령은 관계를 가지는 재상에게 뇌물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었고, 자기 관할구역에 있는 재상의 노비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당연하였다. 수령은 단순히 권문의 노비들의 역을 면제해 주는 것뿐 아니라 권문의 도망한 노비를 잡아주는 등 훈구의 노비를 관리해주었고, 나아가 사채의 관리까지 지원하였다.이러한 민의 권문 투탁은 伴人이나 丘史의 형태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었다. 국가는 양민을 반인으로, 공천을 구사로 관이었고, 세조의 주도로 추진되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세조는 무리한 집권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의 상실과 집권 이후 정치 주도권을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세종대를 통해서 다듬어진 관료체제의 관행을 무시하여 관료들의 반발을 적지않이 받았다. 그러므로 세조는 더욱 공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신들에게 사회 경제적인 특권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들의 비리까지도 비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세조 후반에 이르면 공신의 비리는 심각해졌다. 이에 따른 향촌의 저항도 활발하였다. 향촌에서 훈구의 부정은 수령의 비호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세조 후반에 이르면 민이 무력으로 수령에게 저항하는 양상도 빈번해졌다. 집권과정의 부담으로 그 입지가 좁았던 세조는 이러한 민의 저항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결국 공신들에 대한 규제로 연결되는 것이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그러나 저항이 심화되면서 세조는 공신들의 한계를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일정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세조는 보법과 직전법의 시행을 강행하여 부담을 고르게 하였고, 나아가 민에게 수령의 부정행위를 왕에게 직접 고소하도록 하는 直告까지 허용하였다. 그러나 세조 13년 이시애란이 일어나자 세조는 그 수습과정에서 또 한 차례 공신을 책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이 세조 초기에 책봉된 공신들과는 다소 다른 부류였으나, 공신책봉은 세조가 결국 의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왕위계승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세조 사후 한명회 등 공신 핵심세력은 예종 즉위년(1468) 南怡의 獄事를 빌미삼아 다시 정치주도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다. 이미 세조대의 공신들이 과다하게 배출된 상황에서 다시금 명분도 없는 공신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들이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에 몰두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였다. 명분도 없는 과다한 공신의 배출이 반복되는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사림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은 훈척계열의 비리이는 갑자사화와 마찬가지로 훈척계열의 자기분열에 의한 것이었지만 여기에 부수된 사림의 피해도 역시 막심하였으므로 사림의 기세는 다시 한 번 꺽이게 되었다.장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로 사림은 그때마다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지주였으므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고, 서원을 토대로 학문적 기반도 마련하였으므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향촌 사회에서는 사림의 지위가 점점 강화되어 갔다. 서원은 교육과 연구만을 주로 하던 향교와는 달리 돌아가신 훌륭한 유학자 (선현)의 제사를 받들어(봉사) 그 정신을 본받자는 선현 봉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선현 봉사는 같은 서원에 모인 사림들에게 강한 유대감을 심어 주었다. 또 교육을 통해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자신들을 따르는 세력을 계속 만들어 나갔다. 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최초의 서원이며, 그 후 각 지방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서원은 왕이 직접 서원의 간판을 내려 주는 사액이라는 형식을 통해 중앙 정부와 연결되었는데,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으로 사액된 백운동 서원은 국가로부터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받았다. 서원은 개성있는 학문을 발달시켰고, 지방 유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었으며, 중앙의 성균관과도 학문적으로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서원과 함께 지방 사림들의 지위를 강화시켜 준 것은 향약이다. 조선 초기부터 유향소의 조직과 역할을 규정한 향규와 재난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각종 계가 있었는데, 이러한 전통적 향촌 규약을 이어 받고, 여기에 삼강 오륜의 유교적 윤리를 더하여 향촌을 교화하는 규약으로 발전시킨 것이 향약이었다. 향약은 지역에 따라 그 성격이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덕목은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하고, 잘못한 일을 서로 꾸짖으며, 올바른 예절과 풍속은 서로 나누고, 난과 어려움을 서 축적하고, 양민을 사천으로 삼는 등의 행위가 빈번해지면서 이미 세조대부터 이것이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그 처리는 공신으로서의 공로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미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림이 등장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중반 이후 弘文館이 언론기관이 되어 언론 삼사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사림은 매년 수백 건의 인사와 탄핵에 관한 언론을 행사하였는데 이는 사림이 견제의 체계를 잡아가면서 본격적으로 비리에 대해 지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사림은 정치세력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 이면에서 정치구조의 개편도 추진하였다. 이 문제는 권력구조의 개편을 논하는 문제이니 만큼 처음부터 그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사림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는 먼저 언론기구의 기능강화를 통해서 나타났다. 사헌부와 사간원 兩司는 조선 초기부터 형식상으로는 재상들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이었으나,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가지지 못하여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초기부터 「公論」에 의한 정치를 이상시하였고, 양사가 그 이념을 수행하는 '公論所在'라는 관념은 형성되어 있었다. 사림은 이러한 원칙을 강조하면서 양사의 본래 기능을 확보하는 데서 권력구조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결과 '圖議制'의 관행을 확보하여 대간이 문제에 공동 대처하게 되었고, '不問言根'의 관행도 확보하여 언론의 취재원을 보호하면서 언론의 활성화를 추진하였다.사림은 언론기구를 통해서 훈구를 견제하면서 언론에 의한 통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즉 언론은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규제여서 근본적인 통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연산군 초반에 김일손에 의해 제시된 언관확대론이 그 대표적인 방안이었다.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사림이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사림의 의사를 반영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양상을 띠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학맥과 사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동인은 주리 철학적 도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 조식 문하의 영남학파였고, 서인은 주기철학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이이, 성혼 문하의 기호학파 사류들이었다.이러한 학맥과 사상의 차이는 붕당 정치에 기반한 당쟁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유교 정치 사상에서 원래 붕당 정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 송대에 들어오면서 정치 참여 자격 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 층이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붕당 관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된다. 즉, 구양수와 같은 인물은 붕당 을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과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삼는 '소인의 당' 두 가지로 나누고, 전자를 '진붕', 후자를 '위붕'이라고 규정하고 군주가 진붕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정치는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진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 역시 기본적으로 구양수와 견해를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주까지도 '군주의 당'에 끌어들이도록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16세기의 조선은 전통적인 붕당관과 성리학의 붕당관이 엇갈리고 있었다.훈척 세력은 한, 당대의 붕당관에 바탕을 두고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는 동시에 탄압의 구실로 삼았으나, 사림계는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로써 정권을 독점하는 훈척 계열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난했다. 사림 세력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구양수의 붕당관에 따라 당파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의 시초가 바로 동인과 서인이었다. 주리론자들로 구성된 동인과 주기론자들로 구성된 서인들의 정쟁은 시간이 흐를 수록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띠게된다. 동서로 갈라진 뒤 대사헌 이이는 이들 두 당의 충돌을 극소화하기 위해 심의겸과 김효원을 각각 외직인 개성유수 와 부령부사로 물러앉게 한다. 이 후 1580년 낙향했던 심의겸이 예조판서에 제수되자 동인인 장령 정인홍이 그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의 중재로.
安 廓- 安廓의 生涯와 歷史認識 -목 차{머 리 말Ⅰ. 安廓의 生涯와 활동Ⅱ. 安廓의 歷 史 認 識맺 음 말머리말안확은 국문학 관계의 글을 많이 발표하였고 최초의 국문학사인 『朝鮮文學史』를 서술하여 국문학연구사의 시초를 연 사람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국학사상의 사유체계를 분석하였으며 전 생애를 통하여 역사, 문학, 어학, 음악, 미술 등 국학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광범위한 국학세계를 형성하였다. 그 연구범위만 광범위한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자료발굴의 상태나 연구 수준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도 받았다.{) 崔元植, 「安自山의 國學」 『민족문화의 논리』, 창작과 비평사, 1982안확이 남긴 글들은 저서가 5종, 學術誌 ·新聞 등에 게재된 大小의 글들이 도합 140여편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다.{) 李泰鎭, 「안확의 생애와 국학세계」, 『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4한 개인의 저술이 이만한 분량에 이른 경우는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많은 글들이 대부분 國學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안확의 국학이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지금까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행적이 불명한 상황은 간혹 친일을 했기 때문에 그러치 않겠는가 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지만 이러한 것은 결코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는 몇 차례 日人학자 들을 상대로 일본문으로 번역된 글을 그들의 雜誌에 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본인들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는 것에 대하여 오류를 지적하면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뜻에서 기고된 것들이었다. 친일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식민주의적 성향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전환기였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계속되는 위협이 있었고 안으로는 옛 사회질서를 변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1910년에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된 이후에도, 일제로부터 빼기 시작한 다음해인 1896년에 새로 창설된 獨立協會에 친구들과 함께 가서 연설 지도를 받기도 하고, 또 이 협회가 주관한 독립문 낙성식에 참여하기도 한 감회를 적어 놓았다.안확이 독립협회운동의 비상한 흥분 속에서 소학교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1896년 고급 관료의 구락부로 출발한 독립협회는 1897년 이후 토론회를 통해 민주적 역량을 축적하면서 대규모의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던 바, 그 때문에 당시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였다. 특히 학생층, 심지어 소학교 생도들까지도 이 운동에 열렬히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10년 내각 개혁을 목표로 한 徹夜示威에 안확이 재학하고 있던 수하동 관립소학교를 비롯한 소학생들이 다수 참가했던 것은 그 저명한 예다. 소학교 학도로서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고 나라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의 민중투쟁으로 발전한 독립협회운동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그 후의 안확의 삶에 지울 수 엇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1898년 겨울 분쇄되었다. 이 운동이 좌절된 이후 1900년대에 안확은 무엇을 하였는가?독립협회가 해산한 이후로 정변이 數起하고 시운이 일축이라. (‥‥) 차제에 유지인사는 정치운동에 대하야 다대한 실패를 견하메(‥‥) 문화 ·교육에 대한 賭念이 기하다. (‥‥) 차시로 起한 학교가 융희 4년(1910)에 至하기 凡 십년간에 其數가 삼천 여에 달하니라. 교육의 진작할 시에 余도 서북방에 주유하면서 학교를 開함이 수처요 직저 교수하기도 다년에 亘한지라.{) 안확, 『동양문학사』, 한일서점, 1922, p.1221900년대 특히 1905년 이후 합법적인 정치투쟁이 불가능해지자 애국계몽운동은 교육 ·문화 운동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안확은 이 시기에 교육구국 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인용문에서 그는 서북지방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안창호 ·이승훈과 교유했던 것 같다. 안창호는 1907년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에 대성학교를 건립했고, 그의 인도로 이승훈은 1발표하는데, 이 글들에는 매우 격렬한 국수주의적 경향이 발견된다. 그 자신이 유학생이면서도 그는 신라가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을 친 이후 대대로 유학생들이 이 나라를 망쳤다고 맹렬히 경고한다.{) 안확,「二千年來의 留學의 缺點과 今日의 覺悟」, 『學之光』 5호, 1915 참조그는 이 땅에 이식된 모든 외래적인 것에 대해 반대하는데 특히 유교를 조선인의 대원수 로 규정하고 유교정벌에 선봉 을 맡아 나서고 있다. 그러면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國粹이다.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다시 발해로 이어져 오다 발해 멸망 후 지하로 스며든 東夷의 순결한 정신이다. 이러한 발상은 신채호와 유사한 바, 그것은 민족해방의 메타포로서 당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이 시기에 국학연구의 실마리를 구체화했는데,「조선어의 가치」(1915,2), 「조선의 미술」(1915,5), 「조선의 문학」(1915,7)이 그것이다.그는 1916년 말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2권의 국학 연구 저서를 간행하였는데, 『조선문법』(1917)과 『조선무사영웅전』(1919)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는 고대의 건국영웅에서 조선시대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무사적 영웅의 행적을 재조명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에 대한 그의 염원을 투사하고 있는 책이다.한편 1918년에 그는, 망명지에서 국내로 잡입한 友堂 李會榮의 고종 망명계획에 참여한다.{) 안확, 『時調詩學』, 「哭李友堂」, p.178이 계획은 고조의 急崩으로 실패하지만, 그가 민족주의자로 3 ·1운동 후 우리나라 무정부주의 운동의 원로가 된 우당의 동지의 하나였던 점은 주목할만 하다.그런데 고종 망명사건과의 관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국권회복단 사건이다. 1910년대의 가장 중요한 항일 비밀결사의 하나였던 이 단체에 안확은 마산 지부장으로 참가했던 것이다. 이 단체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아직 없어 당시 고등경찰의 기록을 인용하여 그 대강을 보자.1915년 음 정월 15일 경북 달성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이 비밀결사 안에서 안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가는 소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 그의 국학이 민족해방운동과의 깊은 관련 아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1운동을 그는 경남 창원에서 맞이했다. 창원에서의 운동은 매우 크고 조직적이었는데, 그것은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그가 마산 지부장으로 있었던 국권회복단의 활동과 관련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기가 그의 정신이 가장 충일했던 때일 터인데 20년대 초기의 발랄한 문필활동은 그 자연스런 분출일 것이다.3 ·1운동을 경험한 뒤, 그가 가장 큰 뜻을 둔 著述은 『朝鮮文明史』였다. 3 ·1운동 다음해(1920) 여름부터 쓰기 시작하여 1922년 정월에 脫稿하였다고 하는 이 책은 이 무렵에 쓴 글로서는 원고의 분량이 가장 많을뿐더러, 정치사 중심으로 계획한 의도 자체가 3 ·1운동 자체를 그 후의 사회운동, 문화운동과 구별하여 정치운동 이라 규정한 것은 이 책을 정치사 중심으로 계획한 것과 의도면에서 상통한다. 이러한 상관성을 염두에 두면, 이 저술이 민중의 의지에 입각하는 역사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의 다수로서의 민중에 대한 인식은 청년시절 자가운동 때 이미 自由 ·自主 ·自治의 정치사상에서 가진 것이지만 3 ·1운동에서 폭발된 민중의 힘을 직접 보고서 그에대한 확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정치사로서의 『朝鮮文明史』의 가장중요한 관점은 自治制의 발달이었다. 민족사의 先端인 檀君의 건국부터한 사람의 强力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요, 전민족이 그간 일치한 최다수 又 최대강력으로 기초를 만든것{) 『朝鮮文明史』, p.19이라는 견지 아래, 그 多數의 의사 결집 형태로서 자치제의 시대적 변천을 주목한 것이다. 자치제는 실상 자강운동기에서 이미 주목된 것이었다. 즉 『飮氷室文集』에서 立憲共和制 실현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自治란 이론에 접하여 당시 지식계는 우리 역사에서의 자치제는 동양사 중의 特色된 것이라 할 정도로 그 발달의 자취가 뚜는 학자들이 적지않은 수로 서울에 몰려와 지극히 부당한 문화평가를 서슴지 않고 내놓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식민주의적인 학술 태도는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지만, 이제 대학까지 세워서 이를 거점으로 더욱 체계화시켜 나가려는 움직임이었다.우리 諺文에 관한 글에서 그는 일본 학자들이 내놓은 梵字 모방설, 몽고자 模作說 등의 오류를 지적하고 樂理起源說을 내놓는 한편, 고대사에 관한 글에서는 단군신화를 전혀 황탄무계한 것으로 부정하려는 일인학자들의 태도를 적극 비판하였다. 후자에서 그는 일인들이 조선시대의 李瀷 ·安鼎福 ·韓致奫 등 유학자들의 비판론을 고의적으로 악용하려는 것을 직시하고, 후대의 윤색을 감안한 분석을 통해 각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신화의 중요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면들인 이 두 가지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빛이 조금도 바래지 않는 탁견이다.3 ·1운동 후 민족독립운동은 주지하듯이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로 좌우 양 진영으로 나뉘는 추세였고, 그러한 동향은 1927년에 新幹會의 발족으로 일단 통합의 길로 접어들었다. 민족운동의 이 중대한 대목에서 안확의 입장이 어떠했는지는 대단히 궁금스러우나 직접적인 행동은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단지 좌우의 제휴 그 자체를 환영해 마지않는 글이 찾아질 따름이다. 그는 1928년 5월에 『中外日報』에 기고한 「太極紋에 대한 一考」라는 글을 통해 연합의 결실에 대한 찬동의 뜻을 표하였고, 1930년 10월 『新生』이란 월간지에 실은 「조선민족사」란 단문에서는 새로 결성된 신간회가 얼마 갈지 모르겠으나 결성 자체는 민족의 미증유의 大自覺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 일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촉구해 마지않던 자각적 통일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후술하듯이 초대 신간회회장으로 추대된 月南 이상재와도 친분이 있었다.이후 안확은 일체의 사회적 활동에서 물러나 국학연구에만 몰두한다. 30년대 초 그는 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술 세계들어가며고대 그리스인은 BC 2000년경에 그리스 땅으로 남하(南下)하여 고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변천을 겪으면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였고, 이는 후일의 유럽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었다. 그리스 문명은 폴리스의 시민이 이룩한 것이며, 따라서 폴리스의 발전과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귀족정치·과두정치(寡頭政治)·참주정치(僭主政治)를 거쳐 민주정치의 실현과 쇠퇴를 연출한 역사였으며, 경제면에서는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동(東)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통상무역이 성행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던 사회였다. 이와 같은 폴리스 사회를 기반으로, 철학·과학·문학·미술 등의 문화가 매우 다채롭게 꽃피었다. BC 10세기경부터 그리스가 로마에게 정복당하기까지 약 9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그리스의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의 이상적 형상(形象)을 실현, 고전미술을 창시하여 인류문화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그리스의 균형과 조화의 사상은 미술 작품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었다. 미술작품의 주제는 신화 및 종교 또는 일반 시민생활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하며 실로 그것은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된 소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 이 정신은 미술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건축그리스 건축의 예술적 달성은 대리석으로 만든 신전·극장·스토아(stoa), 그리고 다른 공공건물이나 기념비적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으뜸 가는 현존 건축양식은 서양건축의 기본적 양식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리스의 신전은 최초에는 목재, 다음에는 석회석과 같은 무른 석재들로 지어졌으나, 마지막에는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신전은 신의 주거(住居)이며, 신상을 모시는 건물로서, 그 안에 이러한 양식들은 이후 2000년에 걸쳐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도리아식도리아식은 이오니아 건축과 코린트 건축을 합친 세 건축양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주로 도리스(도리아)인이 살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시작되어 본토 각지 및 이탈리아 남부, 시켈리아(시칠리아)에 전파하였다. 건축상의 특징은 기둥이 굵고 주초(柱礎)가 없으며 주두(柱頭)는 얕은 사발 모양을 한 주관(柱冠:echinus)과 네모진 모양의 판관(板冠:abacus)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높이는 대략 직경의 4.5∼6배, 주신(柱身)에는 세로로 16∼20개의 도랑[圓溝]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은 차차 가늘어지면서 엔타시스(entasis)라는 불룩한 부분이 있다. 또한 주신 위의 장식대(裝飾帶:frieze)에는 주로 부조로 된 메토프와 세줄 홈 무늬의 트리글리포스가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그 간소하고 힘찬 취향은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에 비해 그리스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도리스 양식의 가장 오래된 유구(遺構)는 올림피아의 헤라신전(BC 7세기 중엽)이며, 이 밖에 코린트의 아폴론신전(BC 5세기 초엽),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BC 5세기 중엽) 등이 있다.이오니아식이오니아식은 좀더 날씬하고 우아하며 와류형의 기둥머리 장식을 갖고 있다. 기둥이 높고 가늘며, 세부에 걸쳐 조각 장식이 많이 있어서 경쾌하고 우아한 느낌을 준다. 예로부터 대체로 도리스식은 남성에, 이오니아식은 여성에 비유되었다. 기둥과 기단 사이에는 아름다운 주초(柱礎)가 끼워져 있고, 2개의 소용돌이 무늬를 연결한 특유한 기둥머리[柱頭]를 가지고 있다. 기둥 위 제일 아래의 하대(下帶)는 수평으로 삼분(三分)되어 있고, 중간대(frieze)는 트리글리프와 메토프 대신에 두루마리 그림 모양의 연속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다. 주신의 길이는 밑퉁의 8~10배이고 밑통의 차가 적다. 주초가 있으며 배흘림이 약하다. 세로홈은 24줄이 표준이다. 소용돌이 주두(volute)가 있으며, 소용돌이 눈에 보석, 색대리석 등 그 표면에 아칸서스의 잎과 덩굴이 얽힌 모양을 조각했다. 그 이외의 부분의 구성은 이오니아식과 거의 같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변화가 보인다. 전체로서는 이오니아식에 비해 한층 더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그 특징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가까이에 있는 올림피에이온은 가장 현저한 코린트식 신전으로, 전면 8주(柱), 측면 20주의 이중주주식(二重周柱式)이며, 약 17 m 높이의 열주가 l04개나 늘어선 최대의 신전이다. 아테네의 리시크라테스의 합창대 우승기념비도 순수한 이 양식의 유일한 작품으로서, 사각형의 높은 대좌(臺座) 위의 코린트식 기둥 사이에 원당(圓堂:torus)을 두고, 원뿔형 지붕의 정점에는 상품인 삼각배(三脚杯)를 장식한 소박하나 아름다운 건물이다.조각그리스 조각을 서양 조각의 최초·최고의 표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조각이 인간의 육체 그 자체의 미(美)와 생명을 인간의 입장에서 이해하여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조각의 재료는 금·상아·대리석·브론즈·석회암·목재·도토(陶土) 등이지만, 브론즈와 대리석이 가장 많이 쓰였는데, 그것은 그리스 조각의 특질을 발휘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재료였기 때문이다.그리스 조각은 세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 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 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헬레니스틱 시대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 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1500년경 크레타인들의 풍속을 보여주는 《투우사의 벽화》와 같은 훌륭한 회화작품이 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제욱시스(Zeuxis)와 같은 화가들이 탁월한 재현능력으로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회화 역시 건축·조각 못지 않게 발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 회화의 특성은 주로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도기화를 그릴 때에 생각되는 모든 것이 다 보여져야 한다는 고대의 법칙은 무너지고 미술가 자신이 관찰한 바에 의존하기 시작하는 진정한 사태의 변화가 전개된다. 단축법(foreshortening)이 그것이다. 단축법 이란 원근법에 따라 물체의 크기를 단축시켜 그리는 것이다. 에 묘사된 도자기를 보면 젊은 전사의 왼발이 정면에서 단축법으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미술가는 더 이상 가장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그림 속에 모든 것을 담으려 하지 않고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참작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아직까진 분명한 윤곽선과 균형 있는 구성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들이 본 한 순간의 우연적인 자연 형태로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프시악스 (네메아의 사자를 교살하는 허큘리스)라는 작가가 제작한 도기는 본래의 도토(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흙)에다가 흙색으로 대신 하여 검은 색과 어두운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로써 중량감이 있는 두 몸뚱이에 양감이 표현되어 있고, 과감한 단축법의 사용, 그리고 위의 수법에 의해 달성된 둥그스름한 효과가 균형 있고 통일적인 구도와 뒤섞여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프시악스는 이전에 있어 자신의 작품에서 대상을 표현하는 색이었던 검정 색을 반대로 배경으로 삽입하여 바늘에 의해서 가는 형태의 선을 표현하는 불편함을 제거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단축법의 연구가 계속되었고, 이는 바로 평면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조건을 부여하게 된다. 그 후로 그들은 이집트의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클라시즘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의 평면성이 공간감을 가지게 되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