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플라톤에 있어서 교육은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부수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주질서의 필수적 기능이었으며, 국가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플라톤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고 후원하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사회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도모하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했던 교육의 목적은 모든 개인이 똑같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 사회적이고 행복한 인간을 만들고, 고결한 인격의 발달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이렇게 하려면 사회는 안정을 유지하고 질서로 단합되어야 한다. 에서 플라톤은 정의의 본질과 그것이 개인의 영혼이나 국가 안에서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정의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조화와 행복을 보장하는 관계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에서 플라톤은 절대적인 진리와 국가의 본질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가에 대한 그의 교육사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본론에 제시된 플라톤의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교육이란 합리적 본성의 각성을 도와주는 과정이며, 이런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헛된 그림자만을 바라 는 삶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의 배후에 있는 실재를 사색하거나 관조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교육받은 사람은 고결한 인격을 갖게 되며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영혼은 감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를 관조하는 방향으로 전향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공정한 조건에서 행복하게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플라톤은 오랫동안 끈기있게 교육을 해야만 선의 형상을 아는 철학자, 즉 통치자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에 따르면, 철학자는 절제와 자제 그리고 용기와 같은 도덕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지식과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는 세심한 훈련을 통해서 지식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그의 지식은 상상(eikasia)과 신념(pistis)의 세계에서부터 이해와 이론(dianoia)의 세계로 진보되어야 한다. 그는 지식의 최고 수준인 이해가 가능한 것(to noumenon), 즉 순수형상(eide)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직관(nous)의 힘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제1원리인 선(to kalon)에 도달해야 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오랫동안 교육해야만 철학자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에서 플라톤은 무지의 상태에서부터 자신이 목표로 간주했던 지식에 이르는 과정을 선분에 비유했다. 그는 영상과 신념 그리고 오류에서 벗어나 진정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지각과 상상의 세계를 가시계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지와 진지의 중간에 위치한 능력인 의경의 대상이기 때문에 의견계라고도 했다. 반면 오성과 이성의 세계는 사유계이며 유의 세계이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여기에 대응하는 능력은 사유나 지이다. 또한 선의 이데아는 인식의 대상과 인식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며 근거이다. 이것은 가시계에 있는 태양에 해당된다. 즉 빛을 발하는 태양은 시각에 시력을 주며 가시물에 가시성을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 이데아는 인식되는 것에 진리를 주며, 인식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는 것이다. 이렇듯 플라톤은 인간지식의 진보과정을 네 단계로 구분했다. 인간의 지식은 상상력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단계, 지각을 통해서 현실의 사물을 인식하는 단계, 오성을 통해서 과학의 이론들을 인식하는 단계 그리고 이성을 통해서 개개의 이데아와 선 이데아를 인식하는 단계로 진보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인식론은 교육의 과정과 교육과정이 교육적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그는 교육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굴의 비유를 통해 변증법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서술한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죄수가 영사의 세계에서 벗어나 태양을 보게 되는 과정은 현상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지혜에 대한 직관으로 인간의 인식이 상승하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실재의 본질이 파악되는 과정은 변증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와 현상 간의 대화가 사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플라톤은 선과 태양의 비유를 통해서 교육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태양과 선의 관계를 시각기관인 눈, 눈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의 색깔, 눈과 대상을 연결하는 매체인 빛, 앞에서 언급한 3요소들이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 일어나는 실제로 보는 행위 그리고 빛의 근원인 태양으로 구성된다. 그는 태양의 빛과 시력을 통해 보는 대상 간의 관계는 선의 이성적인 활동과 활동의 대상 간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선과 지성의 관계는 태양과 시력의 관계와 같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플라톤은 가지계와 가시계의 관계를 설명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형성되고 소멸되는 대상은 지성이 결여된 영혼이 소유하고 있는 의견의 기초이지 진정한 지식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플라톤은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 태양과 선의 관계를 설명했다.플라톤은 태양을 ‘선과 형상’에 비유했다. 그런데 이것만이 존재와 본질의 핵심이며, 이것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교육의 과정이다. 이렇게 볼 때, 선은 지성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며 원인인 것이다. 이것은 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가 그림자를 바라보는 상태에서부터 인식이 심화되어 동굴 밖에서 실재를 보게 되는 상태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의 과정은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인식을 각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와 학생은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운데서 현상계의 인식론적인 지위를 검토한다. 예컨대, 교사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학생이 아름다운 대상을 보게 한다. 그리고 나서 교사는 그러한 대상을 보면 정말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학생에게 묻는다. 현상계에 있는 대상의 모호한 성격 때문에 학생은 그런 대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식적인 경험의 대상에 관한 지식을 검토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학생은 점진적으로 형상의 세계를 인정하게 되며 형상 가운데서 가장 종합적인 ‘선의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이렇게 볼 때,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의 과정은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성격을 띤 것이며, 학생중심이나 어린이 중심의 학습과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을 받으려면 학생은 스스로 반성하고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교사는 이런 과정에서 학생을 도와주어야 한다.플라톤은 지식의 명확한 구조에 입각해서 구조화된 교육과정을 제안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지식의 구조에 관한 분석 결과가 교육과정의 내용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교육과정의 선별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는 ‘선분의 비유’에서 인식이 영상과 의견의 상태에서부터 이성의 단계로 발전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식의 심화수준이 교육과정을 선별하는 기준인 것이다. 음악과 체육을 통해서 인격을 연마하고 어느 정도 지적으로 성숙한 인간은 현상계에 관한 탐구에서부터 벗어나 확고하고 변화하지 않는 진정한 지식을 탐구하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과정에서 산수와 기하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학은 현상과 환상의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서 실재의 세계를 추구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명제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직관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수학적인 검증의 비경험적인 성격은 초월적인 형상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수학적인 모형과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검토하게 되면 학생은 변화하지 않는 특징들이나 형상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정의, 아름다움, 착함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파악하게 된다. 학생은 이런 활동을 통해서 모든 형상의 근거인 선의 형상이나 실재의 통합적인 구조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과정과 교육적인 과정의 목표는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플라톤은 수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고등교육의 교육과정에서 기술과 음악 그리고 시를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순수예술이 아니라 도덕적인 교훈의 측면에서도 예술의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술과 시는 학생과 현상계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형상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대상을 이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감각을 통해서 대상을 지각하는 것과 이성을 사용해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구분하고, 후자를 지식의 본보기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상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절대적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지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므로 실재와 순수성을 지닌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그러면 플라톤이 생각한 선의 형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무엇일까? 모든 문제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알 수 잇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옳은 것일까?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명제가 실제의 상태와 일치하거나 그것을 기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지식은 참명제나 참명제의 체계를 뜻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고 있는 명제는 진실이어야 하며, 명제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명제가 진실인 것을 믿어야 하며, 그는 명제의 진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면, ‘진리는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는 ‘진리는 문화적으로 결정된다’와 같은 표어가 거짓인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지식’이란 말도 진리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표어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보재하지 않는다.
존듀이의 경험중심 교육사상과 그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서 론존 듀이의 교육론만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거론되고 있는 교육론도 드물 것이다. 현대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에 빗대어 현대의 교육학은 듀이에 대한 주석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교육론이 교육과 관련된 논의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리 기이할 바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또한 플라톤의 교육사상과 듀이의 교육론은 교육학자들은 물론이고, 교육이 가장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는 금세기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철학과 현대 교육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 두 인물의 교육사상은 서로 대치된다. 그러므로 나는 본 보고서에서 두 듀이가 주장한 경험주의 사상과 그를 비판하는 플라톤의 교육적 입장을 두 인물간의 가상 대화를 통하여 소상히 밝히고자 한다.본 론듀이 : 교육의 고유한 목적이나 가치는 무엇일까요? 나는 교육의 가치나 목적을 실생활의 장면에서 위력을 갖는 가지들로 보지 않으며, 또한 그것을 교과의 세계에서 중시되는 좀더 높은 수준의 진, 선, 미 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의 경험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경험을 담고 있는 그런 수준의 교과를 교육의 소재로 삼아 현재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의 충실성에 상응하는 만큼의 교육적인 가치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경험의 계속적인 재구성 활동에 충실히 임하는 이상, 누구든지 간에, 그가 어린 아동이든, 성숙한 성인이든, 교과와 관련하여 초보자이든, 아니면 전문가이든 간에, 동등한 교육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적인 가치의 체험은 인간의 성장이 최종점을 갖지 않고 부단히 이루어지는 이상, 결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플라톤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육을 행하는 이유는 교육을 통해서 이 지상에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기울어져 가는 아테네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상주의에 입각한 철인정치와 스파르타를 모방한 군국주의적 체제의 결합이라고 믿습니다.듀이 : 당신의 견해에는 이상주의가 빠지기 쉬운 국가사회주의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군요. 그러나 나는 교육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가 단순히 하나의 이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체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플라톤 : 우리는 교육을 꼭 현실적인 체험가능 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한 교육보다는 상기설에 근거한 방법을 지향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는 것을 탐구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도 탐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은 탐구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은 무엇을 탐구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살인이 죄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살인이 죄임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며, 살인이 죄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살인이 죄임을 가르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단계의 인간에게만 가르침이 가능한데, 이렇게 한 때 인식했던, 혹은 전세(前世)에서 배웠던 것을 상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 상기의 계기를 주는 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꼭 체험을 지향할 필요는 없습니다.듀이 : 당신의 논리는 지극히 이상적입니다. 나는 교육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가 단순히 하나의 이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체험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그러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방법은 교육의 활동에 해당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반성적 사고를 제안합니다. 반성적 사고가 바로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 작용하는 지력을 수반한 활동인 것입니다. 반성적 사고는 경험의 재구성 활동이며, 따라서 그것은 교육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경험의 재구성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교육적으로 성장한다고 할 때, 그러한 성장의 양상은 어떠한 것일까요? 나는 성장이 지향해야 할 최종적인 상태를 가정하지 않습니다.플라톤 : 당신의 교육이론에 의하면 무엇이 성장이라면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존재해야 되는데, 당신은 이상적인 성장의 형태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성장에 관한 논의 속에는 성장의 준거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습니다.듀이 : 당신의 말처럼 성장의 준거를 분명히 한다면, 어떠한 형태든지 간에 이상적이며 완성된 형태의 성장을 상정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정하는 완성된 형태의 성장은 그것을 상정하는 우리의 현재의 성장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 마련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는 성장의 최종점은 현재 우리가 도달해 있는 성장의 양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장의 준거를 밝히라는 요구는 현재의 관점에서 규정된 성장의 관념을 그러한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어떠한 성장을 가늠하는 데까지 부당하게 적용하는 오류를 낳을 뿐입니다.플라톤 : 나는 교육의 이상적인 성장의 형태는 바로 국가의 정의 실현이라고 봅니다. 교육의 목적은 소질에 따라 계급을 배정하고, 그 계급에 알맞게 자기를 실현하는 국민을 양성하는 데 있습니다. 국민 각자가 자기 능력에 알맞게 배정된 단계 안에서 자기 몫만을 해야 합니다. 즉 일인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인 성장의 준거가 되는 것입니다.듀이 : 나는 당신처럼 최종적인 결과로서의 성장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부단한 성장의 과정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을 성장이라고 말하려면, 설사 완성된 형태의 성장을 준거로 삼지는 안는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경험이 이전의 경험보다 개선된 것이라는 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경험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후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데에 필요한 발판이나 도구로 활용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경험은 다시 그것보다 이후의 경험을 낳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는 종착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플라톤 : 당신은 성장의 준거로 작용할 만한 완성된 최종적인 성장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군요. 그러나 나는 당신과는 다르게 절대적이며 최종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나는 궁극적 가치, 절대적 목적에의 접근 내지 실현 가능성, 인류와 인격의 어떤 완전가능성에 대한 신뢰 위에 서서, 모든 현실적 존재 및 실천을 이 이념적 목적에 비추어 규제하고 방향 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생멸-변전하는 현상계와 영겁-불변하는 이데아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참된 존재, 즉 진실재는 이데아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삼각형은 세 직선으로 만들어진 도형입니다. 그러나 정말 엄밀한 의미의 삼각형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도 없거니와 그려낼 수도 없습니다. 실은 삼각형은 ‘삼각형’이란 이데아로 우리 머릿속에 정신적으로만 존재하는 관념적 실재이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경험 또는 사물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이데아계. 즉 ‘저세상’(피안)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삼각형은 ‘저세상’에 존재하는 완전한 삼각형의 이데아의 불완전한 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진실된 이데아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주장하는 경험과 경험의 재구성보다는 학습자의 지적능력입니다. 참된 지식은 정신의 내부에 있으며, 오로지 정신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육이 최우선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학습자의 정신적 발달입니다. 요컨대 안다는 것은 이미 정신 속에 현존해 있는 잠재적 이데아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지식이란 실재의 근본이 되는 정신적 원리에 관한 것이며, 이러한 실재에 대한 지식은 이데아의 형상을 지닙니다. 만약 지식이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아에 관한 것이라면, 교육이란 학습자에게 이데아를 의식화 시켜주는 지적 과정입니다. 당신이 주장하는 경험의 재구성이란 이데아의 불완전한 영상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그칠 뿐입니다.
서 론말로의 작품에서 첫눈에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그것도 어떤 이념이나 사상, 테마 등과는 관계없이,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는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의 삶의 형태이다. 본 수업의 텍스트 ‘인간의 조건’속에서 그것을 분석해보겠다.본 론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조국을 떠나거나 국적의식이 상실되고, 일정한 사회에 뿌리박지 않고 방황하는 인물들이며, 정상적인 가정이나 부부관계조차 가지지 않은, 따라서 자연스런 전통적인 일체의 연줄(liens)을 끊어버린 고립된 인간군이라는 점이다. 이 등장인물들의 대타관계, 즉 그들과 남과의 관계의 특징은 그들이 뿌리박힌 생활환경과의 관계 즉 조국, 고향, 혈연가족(가정), 남녀관계(동거,정부,창녀) 등에 대한 철저한 이탈(거부,부정,멸시,증오)현상이다. 그런데 이탈만으로는 삶의 의미는 고사하고 생존자체가 부정되어야 하므로, 그 보상으로 반드시 각 인물마다 독특한 집착(긍정,참여,사랑,복종 등)으로 나타난다. 이 네 가지로 크게 분류되는 ‘이탈-집착의 대응구조’ 속에 말로의 가장 본질적이며 특징적인 점이 들어있다. 또한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각 인물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그들은 예외 없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안간힘을 다해 싸우고 있다. 또한 그것이 내면세계와 외향적 의지 및 외부세계에서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 일체를 지배하고 있다. 나는 본 보고서에서 작품 속에서 드러난 이탈-집착의 대응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 이탈-집착의 대응구조에서 이탈이란 등장인물들의 타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로부터 ‘고독’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며, 집착이란 그 고독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각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먼저 이탈의 형태를 분석해보도록 하겠다.여기서 이탈(detachement)이라 함은 성격 혹은 심리적으로나 또는 사상적으로 타자와의 연관관계의 연줄을 부정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거부-혐오 내지 단절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에 반하여 집착(attachement)은 정적인 애착을 비롯하여, 정신적 결함 혹은 의지에 의한 연줄의 고수 내지 복종 등을 통틀어 가리킨다.a. 이탈1. 실향,부동인간군말로의 초기 3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렇듯 이 인간의 조건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대부분 고국을 떠나 동남아에 흘러 들어온 유럽인이며, 일정한 직업에 전념하지 않는 따라서 그 사회에 뿌리박지 않은 인간들이고 전통적인 한 가족 속에 귀속되어 있는 인물은 예외적일 만큼 찾기 힘들다. 따라서 어느 모로 보나 실향, 부동인간들이라 할 만하다.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국적이 모호한, 상하이로 흘러들어온 잡다한 부동 인간들이다. 주인공 기요 일가는 예외적으로 아버지와 부부 3인으로 한 가족을 이루면서도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부친 지조르는 프랑스인, 사망한 모친은 일본인, 그 혼혈아 기요의 처는 상하이에서 출생한 독일 여인, 3국적이 동거하며, 혈통상으로는 프랑스,일본, 그 혼혈, 독일 이렇게 네 혈통이 모인 셈이다. 그의 친구인 또 다른 등장인물 첸을 어린시절부터 돌보며 가르친 지조르 노인이 보기에는 첸은 ‘거의 비인간적인 철저한 자유로 하여 철두철미 이념에 몰입’함으로써 ‘이에 중국인이 아니며’, ‘중국을 떠났다’고까지 평한다. 여기서 또한 말로는 클라피크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이 무국적,실향,부동인간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상하이를 무대로 무기, 예술품, 골동품 따위를 닥치는 대로 중개 거래하여 그 커미션을 유일한 수입원으로 삼으며, 창가 겸 유흥소 ‘블랙 캣’이 본거지인 양 주색과 도박으로 수입을 털어버린다. 스스로 모친은 헝가리 여인이고 부친 혈통은 프랑스인이라고 밝힌다. 이렇듯 등장인물 대부분이 정신적인 무국적 내지 실향인들이며, 그들이 한 작품에 얽혀든다는 특징부터가, 아무리 같은 모험적 행동이나 프로레탈리아 혁명을 다룬다치더라도, 한국 작가의 작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간관계에 속한다는 점에 우선 주목할 수가 있다.2. 혈연. 가족 관계무국적, 부동 인간이란 일체의 예사롭고 자연스런 연줄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거부-이탈한 인간 밖에 없다. 따가서 말로의 작품에서 혈연과 애정의 얽힘으로 이루어지는 가족관계는 극히 예외적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말로의 작품에서, 예사롭고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엿한 가정을 이루는 유일한 경우가 지조르-기요 부자, 기요-메이 부부가 이루는 한 가족관계다. 혁명가 기요를 주축으로 부친 지조르는 혁명 이데올로기를 한때 북경대학에서 투입,전파한 경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직업적으로나 행동상으로나 사회의 권외에서 관조하고 분석하는 관찰자의 자리에 안주하며, 심지어 아편으로 현세의 고통에서 도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념가 부친과 행동가 아들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위하여 하나로 통합되어 서로 보완될 수 있는 이념상의 분신이며, 과거와 현재로 대를 이루는 통시적 분신이다. 기요의 아내 메이는 당 소속 병원에서 병든 동지, 상하지 봉기투쟁 중에는 부상자 치료를 담당하는 혁명동지로, 평범한 가정적 내조자가 아니고 적극적 혁명행동가들을 치료간호로 보호해 주는 보조자로서의 동지, 결국 성을 달리하는 공시적 음양의 상호 보조의 분신이다. 이 두 분신 사이를 맺는 연줄로 애정과 이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강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속단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이미 세상사를 초연히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지조르 노인은 문제 밖에 두고, 적어도 자기 생애의 의미를 혁명에 걸고 있는 기요에게는 그 혁명 이념을 떠난 아버지나 아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설사 있다 치더라도 이 작품에서는 아무 문제도 업는 부정적 존재이며 방해자일 뿐이다. 이 책 속에 있는 단한번의 부부간의 애정문제가 개입되는 에피소드(메이가 시가전에서 처참한 전개와 피, 죽음의 살벌, 허망한 광경에 충동적 자극을 받고 다른 남자와 동침을 했다는 고백이 기요에게 일으키는 충격과 갈등- 이념상으로는 아내의 완전한 자유권에 속함을 인정하면서도, 또 그런 행위가 애정 문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음을 알면서도, 감정상으로는 소화시킬 수 없이 응결되고, 따라서 무조건의 일체감으로 결합시켜주던 그 애정 자체에 변질을 일으켜, 기요가 메이와의 분리, 단절 거리감 새삼스러워진 메이의 얼굴 모습 등 실존적 반응을 일으킨다. 기요의 이러한 애정에 의하여 입은 상처가 기요의 속에 응결되어 있고 그 이후로 계속 애정 번뇌가 뒤따른다) 역시 애정은 혁명가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아킬레스의 발뒤꿈치’ 일 수도 있으며, 적어도 행동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부부 간에 아기가 없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3. 남녀관계의 파탄과 에로티시즘말로의 작품에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않는 남녀 결합의 관계는 대체로 동거생활, 정부관계, 매음관계 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인간과 조건의 등장일물들 중 가장 강인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철석같은 의지의 사내 카토프와 그를 사랑하는 여공에 대한 에 대한 삽화는 일체의 애정의 연줄은 행동(모험, 혁명)을 방해하고 ‘한정된 숙명’으로 묶여, 삶을 침체 부패케 한다는 것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정부관계인 프랑스 상업 회의소 회장 페랄과 부유한 디자이너 발레리는 통속적인 정부관계가 아닌 서로를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관계이다. 페랄은 사업가로서 항상 남을 지배하고 사업에의 이용도로 사람을 평가하듯이 그는 오만으로 섹스를 통하여 발레리가 자아를 상실하고 굴복(성감의 도추로)시켜 여인을 소유하며, 그것을 확인하여 지배자의 쾌감을 만끽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명 발레리는 애무를 통하여 이 도도한 사내의 어린 시절의 일면이 별안간 드러나기를 기다리며 결국 자기를 사랑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선 정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발레리가 자신의 품에 안긴 사내가 어린이처럼 천진스러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변모되기를 기다리는 반면 페랄은 에로티시즘에 갇혀있는 한사코 섹스를 통하여 여자 얼굴에 나타나는 굴욕의 표현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이것은 전지 스탠드 스위치를 끄는 발레리에 거역하여 다툼 끝에 스위치를 멀리 던져버리고, 끝내 발레리가 성감에 몸을 내맡겨 도취 속으로 떠나가면서도, 의식의 한 구석에는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싹트게 하는 것이다. 결국 발레리는 지독한 우롱으로 복수를 한다. 그리하여 남녀 양쪽이 자기 섹스를 매개로 각기 따로따로 한때의 자기 욕망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는 동상이몽을 깨닫게 된다.4. 반사회, 반세속 고립인간군지조르는 가장의 사회 혐오와 이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늙은 가장이라면 누구보다도 오랜 연륜으로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고 종횡으로 여러 가지 관계의 연줄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예술이지만 말로의 작품에서는 그들조차 그와는 반대의 인간상이다. 지조르는 처음에는 이념적으로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며 퍼뜨림으로써 사회 전복에 소극적으로 참여했고, 아들 기요가 행동으로 실천할 때는 거의 l사회에 무관심한 이탈자(기요는 인간문제 이외에는 자기 투쟁의 내용조차 그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 인간문제, 고독, 인간에 의한 타인의 이해의 한계 등등을 명상하는 현자의 모습으로 변모하며 아들 기요가 체포되어 자살한 후로는 아편으로 고통을 마비시키곤 한다.
왕정복고 시기의 시, 시인1.왕정복고 시대의 배경과 문학적 특징청교도 혁명으로 수립되었던 공화 정권이 무너지고 Charles 2세가 1660년 왕권을 회복함으로써 왕정복고 시대가 열렸다.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률을 표방하던 청교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회복되자 전시대에 대한 반발심이 강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왕정복고 시기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허황된 상상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으로 새로 얻은 지식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질서 의식을 존중하게 되었다. 따라서 질서를 갈망하는 마음은 엄격한 법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질서에서 벗어난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풍자하는 기풍이 생겨났다. 그리고 Bacon 이후에는 막연한 개념보다 실제로 사물을 관찰하여 타당하게 얻은 결론을 중시하는 과학적인 태도가 이 시기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가들은 현실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직시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자유로운 공상에서 벗어나 객관적로 어울리는 어법과 문체를 이룩하려고 하였으며 개인적이고도 공상적인 문학, 열광적이고도 낭만적인 문학을 배격하였다.2. 시인들2.1 Samuel Bulter(1612~1680)대표작 :Hudobras(제1부:1662, 제2부:1663. 제3부:1667)- 청교도인 Sir Samuel Luke의 광신적 태도와 그 주변의 허황된 광신자들을 모델로 한 신랄한 풍자시- 심각한 주제를 천박한 문체와 투박한 과장법으로 망가뜨리는 광시의 일종- 약강 4보격 대구(iambic tetrameter couplet)로 작품을 쓰면서 대담하게 우스꽝스런 rhyme을 만들기도 하고, 말장난과 짧은 격언을 수없이 꾸며 냄.- 이 시대의 문예사조가 그렇듯 Bulter역시 기사도적인 로맨스를 허무맹랑한 것이라 여겨 그것을 변형시켜서 풍자적인 설화의 틀로 삼음.- 이 시가 발표되자 청교도들한테 억눌렸던 Charles 2세와 왕당파에게서 찬양받음.- 그러나 첫 성공에 너무 우쭐한 나머지 닥치는 대로 풍자를 하다가 나중에는 인기가 떨어져 가난에 허덕이다가 죽고 맘.- 설화로서는 성공한 작품이 못되지만, 사회적인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 풍자시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함.2.2 John wilmot(1647~1680)- 감각적 쾌락을 추구, 짧은 일생이 자아 중심적 개인주의, 쾌락주의와 회의주의에 완전히 둘러싸임.- 철학적이고 회의적인 어휘- Carpe diem을 짙게 나타내다가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 대표작 : ① Earl of Rochester- 경쾌한 기분가 가벼운 필치로 사랑과 명예, 일편단심과 변덕 등을 노래Silly Swain, I'll have you know,'Twas my practice long ago :Whilst you vainly thought me true,I was false in scorn if you.By my tears, my heart's disguise,I thy love and thee despise.Womankind more joy discoversMaking fools, than keeping lovers.② A satyr against mankind- 우아하면서 단순하고 회화적이면서도 명쾌한 문체- 자기 자신의 방탕한 생활의 허무감을 솔직하게 표현, 냉소적인 염세주의를 스스럼없이 드러냄.2.3 Sedley(1639~1701), Oldham(1653~1683)- Sir Charles Sedley, 전형적인 난봉시인, 대분분이 “Song”이라는 제목의 시, 신나는 후렴- John Oldham, 고전 시인들의 풍자시를 모방하여 현대적 상황에 적용2.4 John Dryden(1631~1700)- 왕정복고 시기의 문학을 주도, 시인으로서 극작가로서 산문작가로서 또 비평가로서 다방면에 걸친 눈부신 활약.- 작품에 시대적 특징과 공적인 문제가 뚜렷하게 나타나있음. 따라서 그의 시 대부분이 시사성을 띠고 있음.- 초기의 시의 대표작 “Heroic Stanzas91659)": metaphysical 시인의 수법이 나타남, 과장된 표현의 거침없는 사용으로 Cromwell의 우대성이 드러나도록 함.- 청교 정권이 물러나고 Charles 2세가 왕정을 회복하게 되자 국왕을 찬양하는 “Astaea Redux(1660)” 씀. 의미심장한 수식어, 당당한 구절, 균형 잡힌 대조법, 장식적인 어구.- 후기의 시 : 초기의 시가 주로 찬양시였다면 후기의 시는 주로 풍자시와 논증시로 이루어짐.집권당의 반대파를 풍자하고 자기 자신의 노선변화에 대해서 변명하는 작품을 씀."Mac Flecknoe(1682)" - 나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 행사를 기본틀로하여 등장하는 인물들의 어리석은 언행을 엄숙하고도 화려한 어휘와 어조로서 움장하게 표현함으로써 풍자의 효과를 높임.“Absalom and Achitophel(1681)" - 그의 가장 위해한 작품, 당시 정치계의 위태로운 상황을 구약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역사의 한 토막에 빗대어 교묘하게 엮어 놓은 풍자시, Charles 2세의 기품, 그의 서자 Absalom의 사람됨, 청교 정권 시대부터 카톨릭 음모 사건까지의 영국 정치 종교 논쟁사, Achitophel의 성격과 유혹, 그 유혹에 넘어간 Absalom의 타락, 반대파 인사들의 성격 묘사, Absalpom이 시골 행렬 등등을 내용으로 함.Some of their chiefs were princes of the land:In the First rank of these did Zimri stand;A man so various, that he seemed to beNot one, but all mankind's epitome:Stiff in opinions, always in the wrong;Was everything by stars, and nothing long;
Nineteenth - century novelist1. Jane Austen(1775~1817)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창작활동을 한 작가이다. 당시 영국이 정치 경제사적으로 볼 때 근대화 과정을 완성해가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독립운동과 프랑스 대혁명 등으로 절대군주체제가 와해되고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과 함께 자급자족적인 장원경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전이가 상당히 진척되었고, 사회적으로는 토지와 가문에 기반을 둔 귀족들을 대신하여 상공업과 교육에 기반을 둔 신흥 부르주아계급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당시 영국은 소귀 ‘개량’운동이 진행되면서 영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변화해가던 시기로서 이후 인류 전체의 삶의 질에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변화를 가져올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었다.그런데 바로 그러한 변혁기에 출판된 오스틴의 문학세계는 의외로 고요하다. 날카로운 지성과 풍자정신을 소유한 오스틴의 작품에서 서술자는 서술대상과 거리를 유지한 채 감정분출이 억제된 내용을 절제된 형식 속에 담는다. 교구목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지역을 떠나 외국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좁은 세계에서 인생을 보냈으며, 독특한 감수성과 관찰력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장면과 문제만을 다루었다. 당시의 정치적, 지적, 예술적 혁신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과거에 대한 curiosity가 없었고 또한 국제적인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 속엔 고전주의의 정신(질서, 조화, 지성)이 주입되어 있다. 또한 그녀는 ‘terror' tale을 풍자하고 비난했으면 윤리적 시점이나 당시에 유행했던 sentimentalism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이 소설가는 소설을 정밀하고 정확한 수련을 요구하는 예술의 형식으로 간주하였고, 예술가로서의 성실성을 견지했다. 이 성실성이란 좋은 작품을 계속 쓰고 개작하는 것과, 상세한 사실주의적 묘사와 더불어, 사건는 결과적으로 오스틴을 당대의 사회적 맥락에서 제외해버린다. 그러나 소소한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중요한 쟁점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고 당대의 문화적 맥락은 언어ㆍ문화형식ㆍ인물ㆍ플롯 등을 통해 작품 속에 반영되게 마련이므로 오스틴 소설을 작은 소재를 다룬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보다는 더울 세밀하게 텍스트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② 오스틴의 계급의식소재가 제한되고 작다는 것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세밀하게 텍스트를 읽었을 때 드러나는 오스틴의 가치관이다. 오스틴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하여 잠재적으로 도전적인 개인을 기존 사회의 가치관에 동화시키는 보수적인 플롯을 거듭 사용한다. 또한 오스틴이 한 인물의 도덕적 됨됨이를 시험할 때 잣대로 사용하는 기준들, 즉 감성과 반대되는 이성 상업주의 및 이기적 개인주의와 반대되는 온정주의(paternalism), 속물성과 반대되는 진정한 우아함 등은 18세기 사회의 주도세력인 신사계급(gentry)이 표방하던 덕목이다.18세기에 영국의 지주들은 유럽대륙의 귀족들에 비해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경제적 기회를 포착하여 광산ㆍ철도ㆍ운하ㆍ도시 건설에 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부의 축적을 꾀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지주들은 더 이상 지역사회의 자애로운 아버지로서의 전통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경제활동을 통한 부의 축적을 꾀한 점에서 신흥 부르주아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스틴이 명목뿐인 덕목을 들어 젠트리의 존재와 태도를 옹호한 것은 이미 변질된 젠트리의 실상과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해체되기 시작한 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몸짓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스틴은 젠트리가 개인의 올바른 행동을 통해 공공연히 탐욕스러운 사회를 개량할 수 있다는 소위 ‘개량의 도덕’을 내세워 자기합리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사회의 권력관계가 유지되는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드러낸다. 젠트리에 대한 오스틴의 시각은 후반부로 가면서 큰 변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③ 오스ennet)집안의 경우나 전처 소생의 아들 부부에 의해 재산상속에서 소외되는 『분별과 감성』의 대시우드(Dashwood) 딸들의 경우처럼 여성에게 불리한 법적ㆍ경제적 토대를 확실히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주인공들이 결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따라서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오스틴의 결혼 플롯은 잠재력 있는 여성에게조차 결혼 이외의 대안이 주어지지 않는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묵시적인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한편 소설이 끝나는 지점(다시 말하면 결혼)까지 여성의 성장과정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은 본시 다른 여성들보다 탁월하기는 하지만, 지성과 도덕적 지표가 검증되는 시험대에 올라 실수를 저지른 후 일련의 성숙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한다. 이는 여성이 이성적인 존재이며 올바른 교육에 의해 개선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당대의 선진적 여권론자 메어리 울스턴 크래프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소설의 플롯이 아무리 기존 가부장사회에 대한 동화를 북돋운다 해도, 결국 이야기의 행보는 여주인공의 도덕적 성장을 재확인하는 것이고, 여성의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성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1.2. About 『Pride and Prejudice』Pride and Prejudice의 도입부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However little known the feelings or views of such a man may be on his first entering the neighbourhood, this truth is so well fixed in the minds of the surrounding families, that he is considered as the fightful property of some one 인다. 소설의 줄거리는 역시 엘리자베스가 어울리는 짝 다씨(Darcy)와 결혼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그에 대해 사랑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 하필이면 그녀가 펨벌리(Pemberley) 저택을 본 후이기 때문에, 작가가 가부장적이며 신분 중심적인 사회의 통념에 굴복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또한 신데렐라와 같은 엘리자베스의 신분상승적 결혼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만으로는 오스틴 소설의 복합적인 통찰을 파악하기 어렵다.오스틴은 결혼을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게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샬롯의 결혼을 물론 오래 기다려온 제인과 엘리자베스의결혼식에 대한 묘사마저 “베넷 부인이 훌륭한 두 딸을 시집보내는 날”이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만다. 이는 주인공이 결혼과 함께 소설이 끝나는 것이 관계이기 때문에 결말을 그렇게 처리하되, 결혼 그 자체는 묘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그리고 오스틴은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제약받는 여성의 삶을 묘사하고 결과적으로 당대 사회를 비판한다. 사랑과 결혼이 주된 플롯이지만 오스틴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그림은 오히려 반낭만적이고 현실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물질적이다. 위의 유명한 시작부분에서 여성의 재산(property)이라고 언급된 남자들의 수입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자들의 가치에 대한 최초의 평가는 그의 경제력과 정확히 비례한다. 베넷 부인은 빙리(Bingley)가 일년에 4,5천 파운드의 수입을 지닌 재산가라는 말만 듣고 그를 자기 딸 중 하난의 남편감으로 점찍는다. 또한 무도회장에 처음 나타난 다씨가 연간 1만 파운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곧 회중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는 것은 그가 빙리에 비해 적어도 두 배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신랑감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소설의 다섯 딸들은 애초에 한정상속이라는 가부장제의 법률에 따라 만일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여유 있는 결혼을 하지 못하면 비참함 상는 여성이고 처음부터 완벽한 여성이 아니며 편견과 때로는 속물적인 본성까지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여성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역시 서술자의 비판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지만 서술자의 지성에 가장 근접해 있는 인물이고, 자신의 단점을 짚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솔직히 그 지적을 인정하고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인간으로 그려진다. 여성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발전 가능한 이성적 존재로 그려냈다는 사실은 오스틴이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에 여주인공들을 동화시키는 중에서도 그나마 일궈낸 개가일 것이다.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오스틴은 젠트리 출신으로서 대체로 젠트리에게 우호적인 작가이다. 오스틴은 의무는 유기한 채 신분의 권리만 고집하는 지주층과 상업과 제조업으로 재산을 이루어 새롭게 젠트리로 신분상승한 부류의 속물근성과 부도덕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도덕성과 자애로움을 갖춘 젠트리 본연의 덕목이야말로 급변하는 시대의 혼란을 바로잡을 가치로 보았다. 이 소설의 다씨는 이런 점에서 이 세계의 중추적 인물이 된다. 펨벌리에 걸려 있는 그의 초상화는 그가 “오빠로서, 지주로서, 가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볼보고 있음을 웅변해주며, 바로 이런 점이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되돌리는 요인이 된다.2. Charles Dickens(1812~1870)디킨즈는 빅토리아조 당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대중적 인기가 사그라든 적이 없는 작가이다. 저작권 관련법이 미비하던 19세기 내내 그의 작품은 불법 출판과 표절, 번안의 대상이 되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디킨스의 작품은 당대부터 디킨스 본인의 낭송회를 통해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도 거의 모든 작품이 연극ㆍ영화ㆍ뮤지컬ㆍ만화 등으로 각색되어 아직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영화나 만화로 된 디킨즈 작품 한두 편 정도는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영문학계에서도 디킨즈는 19세기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이다. 학계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