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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독] 하길종의 영화 인생 평가C아쉬워요
    현실과 이상사이의 희생자 하길종생애하길종은 1941년 4월 13일 부산 초량동에서 9남매중 일곱째로 태어나 불과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살때는 아버지마저 잃었다.친척집에 얹혀살면서 경남중학을 마친 하길종은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교를 거쳐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하길종의 대학생활 4년은 기행과 실험­자기성찰의 나날이었다.김지하 김승옥 주섭일 김송현 등과 함께 「문리대 거지그룹」을 탄생시켰고 교내 영화상을 만들어 신성일에게 「최악의 연기상」을 주기도 했다.신인발굴에 큰 차질을 빚게 했으며 스타란 잘 생겨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었다는 이유에서다. 어느해인가는 머리를 박박 밀고 계룡산으로 잠적하더니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시집을 펴냈다. 암호문을 조립한 듯한 시는 앙드레 브르통을 뺨칠 정도였다.하길종은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에게는 앙가주망이 문제가 되었고 인간의 모든 고뇌 가 우리들 것인양 인상을 쓰며 막걸리를 마셨다. 쉼없이 토론했고 연애에도 미치도록 열정적으로 빠졌다. 4·19세대는 타산적이고 비에고의 세계를 향유했다. 미팅도 대부분 학술모임이었으며 금전상위를 배격한 낭만과 꿈,그리고 사회적 저항으로 응결된 젊음을 보냈다』대학 졸업후 신필름에 입사하지만 연출부 말단을 하다가 에어 프랑스사에 입사하고 1964년 프랑스로 갔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영화공부를 하러감다.1965년 샌트란시스코 예술학원에 입학하고 여기서 사진예술과 미술감각 익히고 명문 UCLA 영화과에 입학했다 . 훗날 「대부」를 찍게 된 프랜시스 코폴라를 만나고 올A를 따내 연구실 조교로 발탁되고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이론과 연출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획득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다.귀국후 7편의 극영화를 만들었다.1979년 2월 23일 일곱번째 연출작 「 병태와 영자」에 몰려드는 관객들을 보며 풀썩 땅바닥에 쓰러졌고 닷새 뒤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고혈압에 따른 뇌졸중. 한많은 영화광의 38년 짧은 생애였다.작품세계미국에서 단편영화 3편과 한국에서 극영화 7편 도합 10편을 만듬단편영화1965 어느날UCLA시절에 만든 단편1969 나의환자한국 음악의 묘미를 살린 작품IIE상을 수상, UCLA시절에 만든 단편1969 병사의 제전미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해부를 통해 미국 젊은이의 가치상실과 방황, 좌표 잃은 그들의 정신적인 무정부상태를 냉혹히 비판한 작품MGM영화사가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드상을 수상UCLA시절에 만든 단편극영화1972 화분하길종 감독이 귀국 후 만든 데뷔작,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에게서 영향의 일면이 많이 보이는 작품. 한국적인 위선의 축소판 같은 푸른집 이 와해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기성 사회의 차단된 현실로부터 드러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고발을 다룬 작품, 새디스틱한 인사의 충격적인 영상 때문에 그의 강한 개성과 독특한 표현은 개봉 당시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1974 수절한사군 시대에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모녀가 윤간을 당한다는 내용으로 반사회적, 저항적이라 하여 공윤의 심의로 수난을 당한 작품.1975 바보들의 행진젊은 세대의 대변자로서 대학생의 꿈과 좌절을 리드미컬하게 그려나간 작품으로 청춘의 하이라이트인 대학시절의 한 단면을 우수어린 시각으로 바라봄.영화음악이 돋보임1976 여자를 찾습니다.무기력한 피해자 이미지를 드러내는 소시민적인 한 시골 청년이 여자사냥 을 통해 도심으로부터 탈출한다는 내용을 다룬 작품. 상업주의와 타협한 작품르뽀적인 현장감, 등장인물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여 그들의 의식을 전달 하기보다는 일상적인 표정만을 보여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작품1977 한네의 승천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의 인과관계를 불교적인 윤회사상을 통해 표현한 작품으로 근친상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충격적이고 새디스틱한 영상보다는 전통적이며 중후한 이미지로 그려냄, 하길종 감독 이 작품에서 전생과 현세와 내세가 한 지평속에서 공존하는 윤회사상을 2대에 걸친 부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향토색 짙은 영상으로 그려보려 했다 고 피력함.1978 속, 별들의 고향정신 이상의 한 젊은 여인과 중년의 미술가와의 비정상적인 만남을 그린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우연성을 지배하는 멜로드라마의 정석을 따름으로 써 현대 젊은이의 고민이 용해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다.1979 병태와 영자 속편 격으로 안정된 기성사회에 도전하는 젊은이를 통해 그들의 적극적인 열정과 사랑을 밝은 분위기로 보여준 작품.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주인공의 달리는 리듬 은 단순한 육체적 운동감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위 풍경 을 촉촉이 축여주면서 행동적인 의미의 주제를 강화시켜 주고 있다.하길종 감독은 영화의 지향점에 대하여 나는 영화 미디어가 지향해야 할 길은 현실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추악한 행위를 진실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영화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되는 것이다. 라는 기치 아래 신문에 날카로운 비평을 쓰며 강단에서 후배를 양성하며 현장에 뛰어들면서 국내활동을 시작함.하길종 감독의 작품세계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진다.실험적 영상시대 - UCLA시절에 만든 단편영화와 귀국 후 처음 만든 화분사회비판적 이고 저항적인 세계 - 한네의 승천 , 수절상업영화 시대 - 바보들의 행진 , 여자를 찾습니다. '속.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하길종은 졸업작품 「병사의 제전」으로 MGM영화사가 전미국 영화과 학생 가운데 4명을 선발하여 주는 「메이어 그랜드상」을 받았다.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되었고 할리우드의 거대한 시스템도 유혹적이었으나 하길종의 결심은 단호했다. 기다려라. 약속 대로 나는 간다. 잠든 그대들을 내가 깨우겠다. 황홀한 이륙이었다. 그때가 1970년 초여름.당시 한국영화계는 지방의 보따리장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년에 2백편이 넘는 영화들이 날림으로 제작되기 일쑤였으니 하길종의 표현대로 「돗데기시장의 난장판」이었다. 1972년 하길종은 한가족의 붕괴를 통해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통렬하게 비판한 「화분」을 선보였다. 한국영화로는 보기드물게 실험적인 영상으로 가득찼지만 관객들은 외면했고 영화제 심사위원들은 아예 심사대상에서 제외시켰다.하길종 감독만큼 검열에 몸서리친 영화인은 없을 터이다.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체제 악을 겨냥한 방아쇠같은 영화 「수절」은 20여분이나 사라졌다. 하길종은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간 내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았다』고 탄식했다. 이때부터 그의 실험정신에 제동이 걸렸고 왕성한 의욕에는 경련이 일어났다.197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는 불황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다. 국군 총 한방에 인민군 너댓명이 쓰러지는 반공영화와 새마을 찬가를 목놓아 부르는 계몽영화,홍등가를 들락거리는 작품들이 쏟아졌다. 하길종의 1975년작 「바보들의 행진」에서 야만의 유신시대 젊은이들의 추락한 꿈과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 저리도록 그려냈지만 이 영화 역시 무참하게 난도질당했다. 잘려나간 필름은 지금 한 토막도 남아있지 않다.
    예체능| 2001.12.07| 4페이지| 1,000원| 조회(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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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비극의 특성] 한국적 비극의 보편성 연구-최인훈의 비극을 중심으로
    한국적 비극의 특성과 보편성 연구-최인훈의 비극을 중심으로Ⅰ.서론고대의 연극부터 현대 희곡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희곡작품들에는 진정한 의미의 비극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작품들이 매우 드물다. 어두운 시대 현실이나 비극적 상황을 소재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주로 저항과 풍자라는 방법으로 소재를 다루고 있지 인간존재의 본질을 운명의 압력과 인간성격의 비극성이란 관점에서 비극적 비전으로 깊이 있게 탐구한 비극적 작품들은 놀랍게도 드물다. 우리 연극전통과 극문학에서 비극이 빈약한 이유를 우리의 문화와 인식체계와의 관계를 통해 생각해보고 서구적 비극정서가 아닌, 한국적인 정서와 심성으로 우리의 문화 전통과의 접맥을 꾀한 한국적 비극 의 전범이 최인훈의 비극 작품들이라 보고 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한국적 비극 의 특성과 보편성을 찾아보고자 한다.Ⅱ.본론1.서구적 비극개념과 한국적 비극개념-서구적 비극개념인간은 삶의 변덕성, 혹은 개인을 초월하는 힘(운명, 섭리 등)에 의해 설정된 한계 내에서 선택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과 세계의 철저한 이원론에서 비롯비극은 희랍문화가 본질적으로 비극문학을 낳을 수 있는 비극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한국적 비극개념한계상황에 처한 개인의 극한적 고통과 운명의 신비, 또는 악의 제어할 수 없는 파괴력 등을 선명하게 상정하지 않는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비극전통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개인과 세계의 대립이라는 비극정신이 첨예하게 존재하지 않았다.1)동양사상과 한국적 정서의 측면동양적 사상체계와 인간관은 신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었던 서양비극과는 다른 형식의 연극을 발전시켰다. 우리 나라의 연극에 국한 시켜서 살펴보면 굿, 놀이, 연극은 이미 원시시대에 미분화된 상태로 등장했고, 신라시대에는 연극적 형식을 갖춘 처용극을 발전시켰다.2)대화문화의 부재대중문화가 비교적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토론하거나 혹은 대화를 통해 문제의 해결에 접근해 가는 태도가 거의 차단되어 있었다. 유교에 의해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설정해서 대등한 관계에서의 자유로운 대화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또 우리 나라의 유교적 문화전통은 연극을 천시했기 때문에 대중의 오락으로 자리잡기 힘들었고 기층문호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가면극 등도 심미적으로 발전될 수 없었고 새로운 희곡작가들이 등장하지 못했다.내면적 성찰이나 문학적 대사를 중심으로 한 서구 비극과는 달리 대사보다는 노래와 춤, 혹은 제례적 성격이 더 두드러진 연극을 발전시킨 것이다.3)우리 전통극의 열린 마당극의 구조우리의 연극의 전통적 형식인 마당극 구조는 극의 치밀한 플롯 전개와 인물 성격을 개연성이라는 관점에서 창조해 온 서구 비극과는 달리, 놀이의 극대화효과를 위해서는 자유롭게 개연성을 무시하며 통일성과 일관성보다는 장면의 독자성을 중시한다.형식의 자유분방함이나, 비장과 골계의 스타일상의 혼합이 우리 연극 전통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한국적 심성과 정서에서는 해학을 가미하지 않은 비극이나 현실초월을 통한 구원이나 내세에서의 구원이란 개념을 동반하지 않은 철저한 비극적 비전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결과 엄격한 형식적 절제미와 숭고미를 가진 비극형식을 창작하기가 힘든 것이다.2.한국적 비극으로서의 최인훈 비극의 특성과 보편성최인훈은 한국의 설화나 고전을 소재로 우리의 민속전통을 수용한 명상적 비극을 발표하였다. 소재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면에서도 한국적 비극을 창조한 최인훈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최인훈의 비극에서는 먼저 존재의 본질이 서구 비극의 운명의 수레바퀴란 개념보다는 인연 혹은 업(業)으로 제시된다. 그것이 제시되는 방법도 관념적으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현실과 꿈의 반영으로 나타난다. 그 꿈의 그림자인 현실을 주인공들이 살면서 어렴풋하게 밖에 윤곽이 잡히지 않는 꿈의 정체, 즉 인연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에는 인간의 만남과 사랑의 신비가 인연의 신비로 그려지고 꿈이 현실보다 더 정말 같은 경지로 표현된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꿈속을 걷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며, 꿈을 살아내기 위해 현실적 삶을 포기한다. 서구비극의 첫 번째 원형인 희랍비극은 존재의 의미, 혹은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 라는 본질적 물음을 주제로 삼으면서 그것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결부시켰기 때문에 운명비극 이라 불린다. 그러나 최인훈은 서구비극의 운명 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우리의 원형적 사고인 인연 을 그의 비극 작품의 형이상학으로 삼아 심화시킨다.첫째, 그의 비극의 인물들은 서구 비극처럼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정적인 공간 속에서 비극적 상황을 인고하거나 ,꿈과 현실을 하나로 통합하거나 ,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낙원을 회복하는 , 우리에게 원초적 경험의 세계를 환기시킴으로써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상적 비극이다.둘째, 서구비극의 신 혹은 운명이라는 개념은 그의 비극에서는 인연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으로 나타난다. . 따라서 그의 극에선 대체로 꿈이 먼저 제시되고 현실은 꿈의 반영으로 나타난다.셋째, 인생이 꿈이요,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동양적 인식체계는 그의 극에서 꿈과 현실의 중첩구조, 혹은 현실과 환상의 착란, 현실의 환상으로의 대체라는 비극적 아이러니로 나타난다.넷째, 민속 전통에서처럼 개인의 비극과 집단의 신명을 대립시키고 역설적 아이러니를 창출한다. 개인의 비극이 집단을 정화시키는 희생양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제의적 구조를 갖는다.
    인문/어학| 2001.12.07| 3페이지| 1,000원| 조회(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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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연출가] 브레히트의 작품세계
    브룩의 가장 최근 작품은 였다. 그 작품은 브룩과 까리에르가 - 그들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작품을 다듬었다 - 18권으로 된 성서보다 15배나 긴 인도의 위대한산스크리트어 서사시를 정리한 것이다. 그 안에 표현되고 있는 이야기와 사상 그리고 또 다른 위대한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종교와 문화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그것들이 수많은 예술적, 문화적 형태로 고전적 형식과 현대적 형식을 빌어 재현되고 있다. 브룩과 까리에르는 이 작품의 준비를 위해 인도로 수없이 여행을 하였고 거기서 그들은 인도의 다양한 대중적 형태의 공연을 연구했으며 리허설 기간의 한가운데 전 극단을 이끌고 2 주간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대본은 리허설 기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수정되었고 심지어 무대에 올려져 공연 중일 때도 수정되었다. 브룩과 까리에르는 그 작품을 사흘 연속 밤마다 3시간이 넘게 공연하는 3부작으로 계획했다. (각 작품의 제목은 Game of Dice>, , 였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공연을 하루만에 전체극을 다 보는 마라톤 식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중간 휴식과 저녁 먹는 시간을 포함 해 11시간이 넘게 공연되었다. 늘 그렇듯이 인류에 대한 브룩의 절망적 시각이 이 작품을 만드는 데 주요한 동기적 요소였다. 작품의 제목을 대충 번역하자면 "세계의 위대한 시"를 뜻한다: 이 작품의 복잡한 형이상학적 그리고 도덕적 실타래 중에서 신화에 나오는 삽화적 이야기인 5명의 판다바 형제와 그들의 사악한 사촌인 카우라바스 가문간의 싸움은 서로 적대적인 인간군대의 전형적인 싸움처럼 보여진다: 원한이 절정에 달하자 8백만 명을 죽이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초래되는, 공연에서는 거대한 폭발로 표현되어진 그 종말은 그 의미를 설명해 줄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으로 설정된 에필로그에서는 희미하게 화해의 기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브룩은 이 작품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좋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좋은 것인가? 그것은 피게 복잡한 이야기와 정신적으로 가볍고 쉬웠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의 비평가 윌리엄 헨리 3세가 했던 "장황하고 지루하다느니, 너무 이상하다느니 하는 모든 흠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 작품은 그 자체로 중요하며 성공적 의미의 경이로움으로 축복받은 황홀한 신화와 우화의 여행이다"라고 한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이 평범치 않은 작품은 1985년 9월에 유럽을 잠시 순회했으며 1987년 영어판 작품으로 세계를 순회하여 BAM에서 두 블록 떨어진 BAM's Majestic Theatre무대에 섰다. 1904년까지 만 해도 우아한 모습이지만 사용하지 않게 되었던 이 극장은 오랫동안 브룩의 작품을 전담하여 공연했던 BAM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특별히 개축공사를 했다. 5백만 달러가 지출되었는데 이것은 예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뷔페 뒤 노르에서 느낄 수 있는 얽은 모습에 야만스런 분위기가 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눈부시게 독창적이었다. 벽은 칠이 몇 겹 벗겨진 느낌을 주도록 긁혀 있었지만 미학적으로 뛰어나도록 조심스럽게 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뷔페에서 만들어진 것과 닮은 앞무대 구역도 만들었으며 객석구조가 가장 혁신적으로 제작되었다.카르멘의 비극 The Tragedy of Carmen - 1981년에 파리에서 개막하여 1983년 말 뉴욕의 비비안 부몽 극장에서 공연하고 1986년에 일본을 순회 공연한 - 은 본래 오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연극작품이었다. 10주간의 리허설은 늘 그렇듯이 즉흥연기에 대해 강조를 했고 동작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연습을 했다. 이것은 브룩이 오페라 가수들의 전통적인 진부한 표현을 벗어버리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신체적 표현수단과 음성적 표현수단을 통일시켰다. 마리우스 콘스탄스는 비제의 유명한 작품을 상당부분 삭제하고 재구성하여 14명의 챔버 앙상블에 맞추었고 이들은 종종 두 그룹으로 나누어 무대에 섰다: 프롸스퍼 메리메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식시간은 없었다).1983년에 을 뷔페에서 재상연했고 1988년에는 BAM에서 엘리자베타 라브로바에 의한 영어판이 공연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것은 모스크바와 소련의 다른 지역들에서 선보였으며(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보다 더 체홉적이라고 갈채를 받았다) 그후 일본으로 갔다. 이 영어로 된 작품은 계속 패리가 라네브스카야 역을 맡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가예브 역에 두각을 나타낸 유명한 스웨덴 배우 얼랜드 조셉슨을 포함한 새 극단을 썼다. 그러나 이 다국적 캐스팅은 혼합된 엑센트로 인해 다소 불편을 겪었다.1980년대80년대 동안에도 브룩은 계속해서 논쟁을 일으켰고 항상 놀랍게도 새로운 개념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전통적인 것은 으로 프랑소와 빌레두가 1959년에 만든 통렬한 드라마를 1983년에 리바이벌하여 히트시켰다. 이 작품은(모리스 베니슈와 합작으로) 몽파르나스 극장에서 15년만에 무대에 처음 서는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주연하여최소한의 장면으로 - 스크린 몇 개와 장식을 하지 않은 채 드러낸 후미벽, 무대담당은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가구를 옮겼다.- 무대에 올렸다. 마스트로이안니의 상대역은 나스타샤 패리였다.10년의 끝맺음1977년 브룩은 Theatre Bouffes du Nord에서 매우 익살맞고 수수하며 단순한 작품인 (순회공연할 때는 로 줄였음)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알프레드 쟈리가 쓴 전환기의 반부르조아이면서 원조 부조리주의자인 "위비"를 중심인물로 한 네 편의 코메디물을 까리에르가 합쳐 놓은 것이다. 이 네 편의 코메디물의 대부분은 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77년과 78년에 유럽과 남미를 순회하였고 런던에서 잠시 머물다가 카라카스에 있는 Theatre des Nations에도 방문하였다. 와는 달리 (자주 영어가 끼어드는 불어로 공연되었다)는 최소한의 세트와 의상에도 불구하고(대개는 그 때문에) 재치있는 연극적 아이디어가 많았다. 즉흥극에 의존한 결과 연극은 막대와 벽돌, 그리고 특히나 두개의 커다란 전선타래와 위해 피얼룩의 색을 연상케하는 붉은 카페트가 깔렸다.의상은 거의 다 단순했고 암시적이었다: 전체 배우가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에서 입는 것 같은 로브를 입었다.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인물을 구별하기 위해 마련된 독특한 요소들이덧붙여졌으므로 의상의 유사성은 점차 없어졌다. 브룩은 과 을 만들 때는 그의 관점에 대한 동의나 영감을 얀 코트에게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브룩은 개인적이자 동시에 공적인 차원을 인정하는 작품에서 오직 개인적인 차원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들어 몇몇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반투명의 판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외부세계는 멀리 있는 비실재적인 곳으로 보였다. 작품의 서사시적 웅장함은 방에서 벌어지는 일로 축소되었다.브룩이 해낸 무대 아이디어 중 어떤 것들은 무척이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는 폼페이의 군함에서 파티를 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파르티아 왕의 아들 파코루스가 학살당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위에 언급한 대로 붉은 카페트를 사용하여 클레오파트라의 기념물을 암시한 것이다.The IK이듬해(1975) 브룩의 그룹은 인류학자인 콜린 턴불 Colin Turnbull의 에 바탕을 둔 엄격한 작품 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우간다 북부의 한 가난한 산간부족이 그들의 전통적인 사냥의 특권을 빼앗아 버린 정부 입법의 결과로 어떻게 비인간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톨린 히긴스와 데니스 캐넌에 의해 각색되었고 프랑스 판은 장 끌로드 까리에르에 의해 준비되었다. 여섯 명의 배우와 두 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극단은 먼지로 뒤덮인 마루 위에서 이 단순한 드라마를 공연했다. 인류학자 역할의 한 배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마을의 여러 인물들을 연기했다. 1976년에 이 작품은 6주간의 런던 라운드 하우스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남미와 여러 미국의 대학들, 동유럽으로 순회 공연되었으며, 1980년에는 다른 주요 작품들과 함께 호주에서 선보였고, 얼마 후 뉴욕의 라마마 극장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공연되었을 때 이 작화적 요소가 강하게 보여지는 것과 현대적 상을 절충했다. 어떤 배우는 심지어 젤라바(아랍인의 긴 옷)를 입고 있었다. 아랍식의 축제와 아랍춤도 있었다. 아페만투스는 알제리의 노동자 옷을 입은 흑인이 연기했다. 그의 모습은 티몬의 과장됨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알시비아데스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아테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인 군사 쿠데타의 상징"으로 연기되어진다.새들의 회의 The Conferance of the Birds첫해에 라는 비언어적 공연 스타일로 주목을 받은 브룩의 극단은 그 다음해 음향과 동작의 훈련을 강조한다. 그 작품의 일부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국립극단National Theatre for the Deaf와 함께 연구한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불어로 된 피터 한트케의 를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해석한 것들"을 다양하게 공연한 점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1972년 후반에 브룩과 그의 극단은 아프리카 외곽을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열심히 돌아다녔고 라는 페르시아의 12세기 시 한편을 가지고 즉석에서 실험을 하였다. 테드 휴이가 또다시 이 시의 언어적 측면을 만드는 것을 맡았다. 는 수피교도 시인인 파리드 우딘 아타르Farid Udin Attar가 지은 알레고리적 시이다. 그것은 신을 찾는 것에 대한 시로서 이 이야기에서 신은 그를 찾는 이들에게 현현하여 그들 사이에서 살고 허무가 먼저 없어져야만 영생이 세계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인물들은 후투티라는 새가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새들로 나온다. 이 작품에서 브룩은 전통적 연극에서 보여주듯이 일상적 존재로부터 커튼 하나에 의해 분리되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적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찾고 싶어했다. 이 두 세계가 어린이의 마음 안에서는 공존할 것이라 믿었던 브룩은 아프리카를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 비슷한 능력이 시골 사람들에게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연극의 공연이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상상적, 그리고 실제적인 면 모두에서 현실을 볼
    예체능| 2001.12.05| 13페이지| 1,0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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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0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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