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7살의 피끓는 젊은이. 나름대로 꿈도 많고 희망도 많은 젊은이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은? 없다. 직업은? 백수.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으신다면 나도 할 말은 많다. 내가 이렇게 지내고 싶어서 지내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까.언제였었던가..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모 중견벤처기업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내 능력을 믿어주고 나에게 기회를 준 고마운 회사였기에 내 스스로도 나의 능력을 믿고 열심히 일할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 시작은 이렇게 거창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만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나를 트집잡고 괴롭히는 상사들, 허리가 휘어지고 잠도 제대로 못자게 만들 정도의 과중한 업무들.. 꿈과 현실간의 차이는 너무도 컸었다. 시행착오를 수십번 겪은 뒤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다 싶은 입사후 1년이 지난 어느날엔가 회사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구조조정 열풍이 불고 벤처회사가 도산하는 상황이 주변에서 많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나는 설마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 다음날, 회사에 지급을 요구하는 어음 몇십억원을 결재하지 못해서 부도가 날 위기에 처해있다는 참담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 이럴수가 있는건지..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서 나름대로 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었는데.. 이대로 회사가 부도가 난다면 직원들은 거리로 나앉을 수밖에 없을텐데 하는 절망만이 가득했었다. 결국 1차부도, 2차부도에 이어지는 연쇄부도로 인해 직원들은 회사에서 짤리고 말았다. 물론 나역시 짤렸다.이걸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여기저기 입사지원서를 내밀어 봤지만, 당시 취업난이 너무도 극심해서 경력이 고작 1년밖에 안되는 나를 받아주기에는 다들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속으로 나는 이를 갈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를 안받아준 것을 후회하게 만들거라고..
바둑이 스포츠이냐 아니냐를 논하기에 앞서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스포츠라는 것의 개념을 어디까지로 잡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를 논의하고 바둑이라는 것의 특성을 스포츠의 개념에 맞추어 본다면 스포츠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개념 확립이 될 수 있을 것이다.독일의 사회학자인 Carl Diem은 “스포츠란 유희의 한 현상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신체활동이 스포츠인가 아닌가는 본인의 마음의 자세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 두명이 사냥을 나갔는데 한사람은 사냥을 즐기기 위해서 하고 있고 다른 한사람은 생업을 위해서 하고 있다면, 전자의 경우는 스포츠, 후자의 경우는 직업이 된다는 것이다. 영국의 스포츠 사회학자인 P.C. McInosh도 스포츠를 놀이의 한 행태로 보고 “스포츠의 기본적 특징은 승리에 대한 노력이다.” 라고 규정하면서 비슷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견해에 맞춰 본다면 바둑 역시 유희를 즐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 있고, 즐기기 위해서 한다면 스포츠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스포츠는 거의 대부분이 신체의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스포츠의 사전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신체운동” 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도 신체운동이라고는 손 움직이는 것밖에 없는 바둑은 스포츠로 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단순히 이런점들만을 가지고 바둑은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신체활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신체기관과 근육의 움직임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포츠에서의 신체활동을 근육운동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고도의 정신력을 필요로 하고 인간의 신체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인 뇌를 활용하는 바둑은 스포츠로서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에너지 소비면에 있어서도 바둑 역시 다른 어느 스포츠종목에 못지 않는 육체적 활동인 것이다.바둑과 어느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외국의 말판게임인 체스와 카드게임인 브리지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스포츠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는 브리지가 시범종목으로 개최되었던 적이 있다. 2002년 1월 25일에 대한체육회는 한국기원의 인정단체 신청을 받아들였었다.현대의 스포츠의 개념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해왔으며 현대에 이르러 그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게 확대되었다. 원시시대의 스포츠가 신체적 활동이라는 점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현대에는 신체활동뿐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정신적, 감성적, 사회적 요구에 의한 활동전반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 띄어쓰기1. 불완전 명사는 띄어쓴다.- 데 (1) 불완전 명사 : 어린이들이 놀 데가 없다.(2) 어미 : 얼굴은 예쁜데 마음은 밉다.- 바 (1) 불완전 명사 :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방법, 수단)(2) 어미 : 진찰을 받아본바 아무 이상이 없더군.- 지 (1) 불완전 명사 : 내가 온 지도 닷새나 되었다.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다. (시간의 경과)(2) 어미 :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 보자. 그가 누구인지 나도 모른다. (막연한 의문)☞ 불완전 명사의 예다섯 개 가량. 다섯 되 가웃. 아는 것이 힘. 내 나름대로. 말할 나위 없이. 아픈 데 먹는 약.자는 둥 마는 둥. 꺼지는 듯 큰 한숨. 사과, 배 등의 과일. 오직 전진할 따름. 보는 족족 모조리.이 즈음. 가까이 보이는 쪽. 서울 갔던 차에. 갈 참이었다. 옷을 벗은 채. 그럴 리가 없다.큰 부자인 양. 없으면서도 있는 체. 나도 갈 터이다. 그럴 턱이 없지. 소란을 피우는 통에. 신나게 노는 판에. 우리 편 만세. 시키는 대로 하여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오너라. 될 대로 되 라.* 먹을 만큼 가져 가라. (분량, 정도)/ 그것이 나의 신념이니만큼.(이유)* 두 달 만에 비가 왔다. (시간의 경과)/ 그 학생은 공부만 한다. (한정), 너만 못한 사람은 없느 니라.(정도)* 직원을 갈아치울 듯하다. 미친 듯하다. (불완전 명사 + 접미사 = 보조용언) / 비 오듯, 북을 치 듯(어미)* 윗말과 굳어 버린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붙여쓴다.이것, 저것, 그것, 날것, 들것, 별것, 탈것, 생것이번, 요번 저번, 그이, 이이, 저이, 동쪽, 위쪽, 오른쪽, 이편, 저편2. 관형사는 띄어쓰고, 접두사는 붙여쓴다.☞ 접두사의 예 : 갓서른, 강추위, 강주정, 개살구, 날김치, 늦바람, 늦더위, 늦잠, 돌배, 맏아들, 민대가리, 민며느리, 새파랗다. 선하품, 선잠, 애호박, 애송이, 웃사람, 웃옷, 웃돈, 잔재간, 잔손질, 짓이기다, 짓누르다, 짓씹다, 풋고추, 풋콩, 풋내기, 햇보리, 햇닭, 홑이불 홑옷,☞ 관형사의 예 : 각 가정, 갖은 고생, 고 안중근 의사, 그 사람, 근 열흘 동안, 금 20일, 단 하루, 몇 사람, 몹쓸 놈들, 무슨 수작, 순 우리말, 아무 고생인들, 여러 가지, 첫 사랑, 오만 가지, 온갖 수단, 요 근처, 요만 고생, 웬 소리, 이 나그네, 저 사람, 전 장병, 조 아이,* 다음 말에 한하여 관형사 새 는 뒷말에 붙어 굳어 버린 것으로 보고 붙여쓴다.새달, 새댁, 새마을 운동, 새봄, 새색시, 새서방, 새싹, 새아기, 새해.* 관형사 첫 은 다음 경우에 한하여 뒷말에 붙여쓴다.첫봄, 첫걸음, 첫술, 첫아기, 첫인상,* 한 (1) 접두사 : 한가운데, 한가을, 한걱정, 한겨울, 한고비, 한길, 한동안한밤중, 한복판, 한숨, 한잠, 한집안, 한통, 한패, 한평생(2) 관형사 : 한 사람, 한 켤레, 한 번... (하나의 의미)** 한가지(서로 같다는 의미)/ 한 가지(한 종류의 의미)이러나 저러나 한가지다. 한집에서 산다. / 산맥이 한 줄기로 뻗었다.3. 접미사는 붙여쓴다.* 들 (1) 접미사 : 오늘 저녁의 모임에는 여러 나라의 대사들이 옵니다.(2) 불완전 명사 : 자리에는 담배, 성냥, 재떨이 들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뿐 (1) 접미사 : 우리 민족의 염원은 통일뿐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2) 불완전 명사 : 공부를 할 뿐이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예외) 밖에 (1) 조사 : 하나밖에 없다. (하나뿐이다). 가는 수밖에 없다. (갈 뿐이다)(2) 부사 팥이나 그 밖의 곡류( 이외에 의 뜻)* 하다 , 시키다 , 되다 , 받다 , 당하다 등은 접미사이므로 윗말에 붙여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띄어써야 한다.(1) 조사 다음에 올 때에는 접미사가 아니라 동사이므로 띄어쓴다.독서하다/ 독서를 하다. 산책하다/ 산책을 하다. 진행시키다/ 진행을 시키다.오해받다/오해를 받다. 결박당하다/결박을 당하다.(2) 앞에 꾸미는 말이 오면 띄어쓴다.재미있는 말 하시오, 남의 이야기 하기는 쉽다. 그런 사정 하러 갔었다.무슨 생각 하느라고 말이 없나? 좋은 일 하였구나!* 삼다 , 나다 , 짓다 , 들이다 (접미사/동사)문제(일, 벗, 장난, 표준)삼다/ 큰 문제 삼을 것이 없다.결판(결론, 끝장, 사고, 소문, 이름, 일, 탐)나다./ 꼭 결판 내고 말겠다.결정(결론, 관련, 단정)짓다./ 분명히 결정지어라.정성(공, 길, 정, 힘)들이다./늘 정성 들여 보살핀다.* 되다 (1) 접미사 : 하다 가 붙을 수 있는 말에 하다 대신 쓰이는 경우결정하다/결정되다, 해결하다/해결되다: 형용사적 명사나 부사적 어근에 붙어서 형용사를 이룰 때참되다, 거짓되다, 망녕되다.(2) 동사 : 문제 되는, 절반 되는 (문제나 절반에는 하다 가 붙지 않으므로)* 명사나 명사의 성질을 가진 말에 없다 , 있다 가 붙어 한 문법적 구실을 나타내는 것들에서 다음의 낱말은 붙여쓰지만, 앞에 꾸미는 말이 올 때에는 띄어쓴다.- 거침(꾸밈, 끊임, 끝, 난데, 덧, 맥, 밑도끝도, 버릇, 빠짐, 상관, 속절, 수, 아낌, 여지, 종작, 지각, 철, 틀림, 한)없다, 별 꾸밈 없이, 늘 아낌 없이.- 맛(멋, 값, 재미)있다./ 아주 재미 있다. 퍽 맛 있다. 굉장히 멋 있다.4. 복합어는 붙여쓴다.- 가랑잎, 개고기, 개소리, 겨우살이, 겹옷, 고깃배, 곶감, 그림책, 기와집, 길바닥, 꽃가루, 꽃놀이, 나들이, 냇가, 눈싸움, 단물, 달맞이, 땀방울 …- 가로놓이다, 게으름피우다, 값나가다, 값싸다, 걷잡다, 겁먹다, 뒤보다, 마음놓고, 마음먹다, 못마땅하다, 배부르다, 발맞추다, 보다못해, 사이좋게, 소리치다, 양지바르다, 예의바르다, 자리잡다, 정떨어지다, 좀먹다, 주고받다…
얼핏 보면 과학과 정의는 관계 없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과학은 당위와는 거리가 먼 사실을 설명하는 객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 객관성 추구가 규범으로부터의 독립을 으미하는 반면에 저으이는 그 자체가 인간의 가치 판단이 깃든 주관적인 성격을 띠는 규범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한상진 교수님의 "현대문명과 사회정의"라는 논문에서는 이 기존의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사고의 출발점이 제시되어 있다. 즉 여기서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혹한다고 생각되는 정의의 문제를 현대사회에서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는 과학에까지 연결시키려는 것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그 논리의 전개는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먼저 학문을 수행하는 과학자가 어떤 주제에 흥미를 느껴 과학적 탐구를 하는데 이러한 선택성은 분명히 가치판단이며 실천적인 의지이다. 어떤 대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방법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의도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과학자의 삶의 체험에서 나오는 과학자의 의도에 학문활동의 근본이 있는 것이며 이런 의도(의지)를 성찰하는 것은 학문 외의 작업이 아닌 학문의 불가피한 점이다. 이런 학문과 삶의 관계를 터득하는 것에서 사회정의와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다음으로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살피면, 과학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지만 그것이 속한 사회 안에서 일정 방식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과학의 실제적 기능으로 과학은 과학자의 의지에 관계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매개변수가 너무 많고 우연성이 크기 때문에 과학이 자신의 이런 실제적 기능을 예견할 수는 없다. 그 겨로가 과학자의 현실 참여가 수반된다. 즉, 과학은 가치중립적 지식으로 남아 있으면서 과학자는 현실참여적 태도로 과학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하는 양립가능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학문 외에서가 아니라 학문 내에서 학문을 통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즉 과학은 끊임 없는 비판성과 맹목적인 추종성 혐오를 통해 사회 합리화에 기여하는 점진적 사회개혁 패러다임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또한 과학은 당연시되는 규범들(이는 실천적 효과를 야기하는 비가치중립적인 성격을 띤다)을 중요성 정도를 고려하며 취사선택할 수 있는 힘을 내부에 지닌다.마지막으로 학문 자체의 틀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생태문제를 진정으로 고민하면서 생태정의의 가치를 관철시키는 물리학, 생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수도 있고 사실과 가치의 분열, 인지과학과 규범과학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결합 가능케 하는 종합과학의 패러다임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서 과학과 정의의 연결점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이런 과학과 정의의 양립 가능성에서 도출되는 문제는 과학자가 과연 과학을 가치중립적인 곳으로 두면서 실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과학이 자체의 학문틀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떤 상황 아래서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것이라 하겠다.일반적으로 결정론적으로 규정된 질서 상태가 사회정의에 부합된다고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사회에서 질서란 어떤 특정 상황(그곳이 불평등이 일반화되어있는 것과 같은 사회정의와 모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이 단순 반복 혹은 외적 강제력을 통해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 안정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힘이 있는 자는 약한 자를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된다는 사상이 퍼져 있는 노예 사회에서 질서란 오히려 정의의 측면에 반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질서의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혼돈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최무영 교수님의 카오스이론에서 본 혼돈과 질서는 위의 점에서 사회 정의와 연결점을 찾고 있는 것 같다.먼저 혼돈 이론을 간략히 가펴보면 혼돈은 아마존 밀림에서 나비가 날아갔기 때문에 날씨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나타나듯이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에도 결과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는 것이다. 혼돈이론을 규율하는 식은 분명 결정론적 질서의 의미를 띠는데(이는 혼돈의 개념과 오히려 상반된 의이이다) 여기서 초기 조건이 정해지면 모든 결과가 정확하게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상 완전히 동일한 초기 조건을 지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도 있는 미세한 초기 조건의 지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각기 엄청난 차이를 보일 것이므로 혼돈이라 부를 수 있다. 이렇게 결정론식에서 나오는 혼돈이 결정론적 혼돈이다.지금까지 사회는 뉴턴의 기계론, 환원론적 세계관이라는 결정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위에서 지거했듯이 필연적으로 여기에는 결정론적인 혼돈이 따르게 되고 여기서 현대 문명의 병폐가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 혼돈은 처음 서두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그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혼돈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즉 완전한 질서의 결정론에서도 혼돈이 생기고 혼돈에서도 상당한 질서가 있다는 점,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결정론과 예측불가능성의 변증법적 통일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서두의 혼돈의 의미로 되돌아가면, 혼돈은 병폐현상의 모순에 찬 사회 현실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고관을 지배하며 획일적이고 부패된 사회의 기득권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조직된 사회체제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혼돈이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라는 실천적, 예언적인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돈이 좋다, 질서가 좋다, 이렇게 획일적으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의미없는 일이 될 것이다. 위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혼돈이 질서 사회가 경직되고 발전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는 것을 막아주는 데 의미가 있고, 질서는 혼돈이 스스로 도취에 빠져 내부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규칙이 없게 되는 상태를 막아주는 그런 상호보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혼돈이 사회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느 조건이나 관계에서 그러한가에 대하여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사조의 문제점을 인수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대안제시해 보고자 시작된 지적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모더니즘의 특징에 대해 간략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은 근대화와 보편성이라는 것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무지몽매에서 벗어나 계몽화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더니즘의 이상은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통상강요와 식민지 건설, 기독교의 전파로 변질되었다. 모더니즘은 결국 서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결과론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이 내세운 근대화는 자신들의 고유문화의 전통을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서구화를 의미하고, 보편화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종속시키는 서구문명의 보편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이는 정의의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보편주의적인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각자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의미를 지닌 실질적인 자유, 평등이 아니라 절차적인 자유, 평등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김성곤 교수님의 현대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위의 논점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을 얻을 수 있다.위에서 언급한 모더니즘의 특성 외에도 모더니즘은 능률과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기계화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절대적 진리라 생각하고 엘리트 문화를 선호하는 특성을 지닌다. 여기에 반동적인 사상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것은 서구 서구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고유의 전통, 문화 등을 중시하며 기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을 우선 생각하는 환경운동, 생태운동의 활성화, 절대적 진리에 회의를 갖는 태도(상대주의적 진리관), 대중 종류 문화라는 특징을 지닌다.이는 정의의 문제에 모더니즘보다도 연관된 점이 많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간 혜택을 누려 온 기득권층보다도 소외된 자 중심으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인간이 수단화되고 행복추구권이 사실상 제한되는 자를 위하는, 권위주의와 독선적인 것에 맹목적인 순종이 아닌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떳떳이 표현하는 것은 기득권층이 강요하는 절차적인 자유, 평등 대신 실체적인 자유, 평등을, 기르고 단순한 허울뿐인 자유주의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정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 더 다루어져야 할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보편주의, 절차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일 것이다.건축과 사회정의가 무슨 상관일까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달한 기술혁신에 가장 직접적이고 복잡한 영향을 받은 것이 건축이며 그래서 산업시대의 건축에 긍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부분도 나타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건축이 기술의 구체적인 현실 반영 형식으로 사회와 가지는 관련성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 건축과 사회정의를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김광현 교수님의 건축양식에 드러난 시대의 변화에는 건축이 사회 사조의 반영이며, 앞서 다루었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달리 모더니즘이 건축에서 지니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다루고 있다.근대의 건축은 해체와 조립이 언제나 가능한, 부분으로서의 요소가 서로 결합하여 전체 형태를 이룬다는 개념을 지닌 기계의 이미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예컨대 100여년 전 빅토 오르타는 오텔 타셀을 설계했는데 이 저택의 내부에는 바닥, 벽, 천장을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이 담겨 있다. 철을 이용한 장식이 바닥과 벽, 천장을 하나의 공간으로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는 철을 생산한 기술의 결과이며 이 시대의 기술이 사회와 문화와, 기술과 건축이 서로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하는 조응관계가 있다.오늘날의 건축은 윤곽이 분명하지 않고 공중에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오늘날의 건축에는 파르테논의 고전 건축에 전개되는 빛과 그림자의 이원론 사상이 나타나지 않고 분산되 빛 속에서 존재자가 뚜렷하지 않다. 이는 건축이 기술 그 자체가 아니지만 기술의 이미지를 간접적인 방법으로 표상하려 하기 때문에 기술의 조건과 첨단의 이미지를 건축이 표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