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골리언 계통으로 언어의 계통도 같은 알타이어 계의 언어를 쓰고 있다. 고2001년 6월 9일 토요일, 9시 35분신명조중고딕견고딕신명조중고딕견고딕신명조중고딕신명조중고딕신명조신명조중고딕명조초등학교에서부터 줄곧 중국의 역사에는 조금이나마 배워서 익숙하지만 일본의 역사에는 접한 적이 없는 관계로 조금은 낯설었다. 처음 대해보는 일본의 역사에는 그 구성면에서나 흐름 면에서 우리와 유사함을 느꼈다. 그 후 계속된 역사 전개과정에서 일본의 빠른 문호 개방과 체재정비는 오늘날의 우리와 일본을 낳게 했다. 그럼 일본의 역사는 전개되었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기로 하겠다.일본은 우리 민족과 같은 몽골리언 계통으로 언어의 계통도 같은 알타이어 계의 언어를 쓰고 있다. 고대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좀 더 늦은 기원전 300년 전에야 농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그러나 정작 일본여사에서 처음으로 나라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야마토(大和)라고 불리는 나라였다. 239년에 중국 황제로부터 금도장과 구리 거울을 받아오는 등 왜(倭)라는 이름으로 국제 무대 등장한다. 야마토 시대에 오오키미(大王)로 불리던 일왕이 덴노(天皇)로 바뀌게 된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가 백제이다. 백제를 통해 일본은 538년 불교가 들어오고 천자문과 논어도 전해진다. 이 시기 일본의 고유문화가 형성되는데 이 시기를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한다. 이때 일본은 덴노의 존재를 만들었다. 덴노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이라는 신격화로 일본 정통성의 상징이 된다. 이는 대륙문화와는 다른 페쇄적인 일본의 독특한 문화이다. 덴노를 비롯해 덴노를 섬기는 신토(神道)라는 종교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덴노의 신격화와 정통성은 일본의 앞으로의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친다.아스카시대는 588년 건립된 아스카데리의 명칭으로부터 나왔다. 이 시기에 우리가 잘 아는 쇼토쿠태자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일본 최초로 여성 덴노가 나와 셋쇼라는섭정을 한 시기이기도 하다. 쇼토쿠태자가 다스리는 동안 그는 고조쿠로 불리는 귀족세력을 눌러 덴노 중심의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견수사를 파견하여 해외 문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17개조의 헌법을 발표하는데 그 헌법에서 나온 것이 와(和)의 강조이다. 와는 일본이 고립된 섬나라라는 지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와는 일본의 국시(國是)이자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와정신은 일본이 종교문제를 격지 않은 몇 안돼는 나라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쇼토쿠태자가 견수사로부터 견당사까지 중국을 보고 느낀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였다. 그 당시는 덴노의 권한이 절대적이지 못 했기 때문에 외척이었던 소가 가문을 제거하고 당나라의 조·용·조 제도를 모방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이룬다. 다이카 개신으로 일본은 새로운 나라의 틀을 짜지만 그것만으로는 국력으로 증강시키기에는 힘들었다. 이후 덴무덴노가 즉위하고 후지와라교를 건설하여 도읍을 옮김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이 시대가 가장 먼저 오오키미에서 덴노로 칭호를 바꾼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이 시대에서 상용되기 시작한다.헤이안 시대(701년)에 일본은 법제도를 정비한 율령구가로서의 고대국가를 완성한다. 간무텐노가 즉위했을때에는 795년 헤이안(平安)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곳이 현재의 쿄토이다. 이 시기부터 약 400년간을 헤이안 시대라고 부른다.헤이안 시대의 견당사 견수사는 일본이 남의 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국민성을 보여 준다. 중국식 국가 제도와 천자는 일본의 율령국가와 덴노를 만들고 이를 혼합하여 바쿠후라는 일본 고유의 제도를 만들어 냈다. 후에 또 나오겠지만 일본은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창조하는 국민성이 있다.헤이안 시대가 흔들리는 계기는 헤이제이 덴노가 밀실정치를 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는 스스로 율령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 결과 국가기강이 흐트러 지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는 귀족의 시대라 할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후지와라 가문은 약 200년간 일종의 섭정정치라 할 수 있는 셋쇼와 간부쿠자리를 독점한다. 후지와라 가문의 독점이 계속 되면서 10세기 초 율령제는 서서히 무너졌고 그 와중에 형성된 것이 부시(武士)계급이다. 처음엔 폭력집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후엔 귀족의 신변을 보호하는 시종이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간의 분열과 귀족과 덴노의 분열은 부시계급을 필요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부시계급의 세력이 커져 귀족세력을 몰아내고 부시정권을 수립한다.헤이안교(平安京)에 천도하여 교토가 일본의 수도가 된 794년부터 가마쿠라 바쿠후라는 부시정권이 수립되던 1192년까지의 400년간의 헤이안 시대는 귀족의 시대이자 일본 문화를 꽃 피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에 가나(假名)가 쓰이기 시작 하였고 고쿠후 문화 후지와라 문화라고 불리는 새롭게 창조된 문화를 만들었다. 헤이안 시대는 일본이 독창적인 면모를 잦추기 시작한 시대라는 의미가 있다.부시계급은 천한 농민계급에서부터 중앙 귀족으로 진출, 바쿠후라는 부시정권을 세운다. 이는 곧 부시계급에 의한 군사정부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12세기 일본은 덴노와 전 덴노인 조우고의 권력투쟁으로 지배계층이 완전히 나다. 이는 현실적인 힘인 부시계급을 정치의 핵심으로 만들어 준다. 이 권력투쟁으로 겐지가문과 헤이지 가문은 일본의 정상에 서게된다. 그후 일어난 헤이지의 난은 헤이지(=다이라)가문의 승리로 끝나지만 후에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반 헤이지세력(겐지중심)이 다이라 가문을 꺽는다. 1192년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쇼군이 되고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설치하게 된다. 이것이 바쿠후 시대의 개막이된다.조큐의 난(11210년 이후 덴노는 메이지 이신때까지 실권이 없다. 바쿠후의 최고 권력자 쇼군이 실질적인 권력은 다 가지고 있었다. 쇼군은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다이묘(大名)를 파견하고 다이묘(슈고 다이묘)에게 세금을 거둘수 있는 권리와 부시를 통솔할 수 있는 군사권까지 부여한다.처음에는 바쿠후의 권위가 더 높았지만 점차 세력이 커진 다이묘들은 스스로 나라르 만드는 등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된다. 이 시대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센코쿠라고 불리는 이 시댕는 우리가 잘 아는 세명이 나오는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들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병농 분리와 조총의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서 무로마치 바쿠후를 망하게 하고 일본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하지만 부하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고 그후 도요토미 히에요시가 권력을 이어받게 된다. 1590년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고 1592년 정한론(征韓論)을 앞세워 임진왜란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권력을 이어 받는다.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가 다이묘로 있던 에도에 바쿠후를 세운다. 그래서 1603-1868년간을 에도시대라고 부른다. 다이묘의 세력이 강한 시기 였기 때문에 그는 산킨 고다이) 가족을 볼모로 잡아 쇼군이 전 일본의 다이묘들을 지배하는 것(1635)라는 것을 실시한다. 이런 바쿠후 시대는 메이지 이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 유지된다.18세기 부터는 에도 바쿠후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힌다. 대 기근으로 인해 농민은 폭동을 일으키고 서양의 배들이 자주 나타나서 교역을 요구하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페리제독의 함포외교에 일본은 개국을 하게 된다. 이 때 사쓰마한과 조슈한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에서 바쿠후 타도와 개국을 준비한다. 결국 1867년 다이세이호칸으로 바쿠후의 모든 권력은 덴노에게 바쳐지고 약 7백여년 동안 일본을 지배해 온 부시정권은 사라진다.1869년 에도란 이름을 도쿄(東京)로 고친다. 1868년부터 시작된 메이지 이신(明治維新)은 부시계급 중심의 봉건적 농경 사회에서 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근대 산업국가로의 대 전환이었다. 또 한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지역사회에서 도쿄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신분 차별의 계급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를 추구하게 되었다.메이지 이신 이후 산업을 발전시키고 강력한 군대를 만들자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력이 상승한 수 떠오른 것은 정한론으로 조선정벌이었다. 조선정벌의 이유는 부시계급의 불만을 없애기 위한 면이 많았다. 이 후 조선을 합방한 수 1차 대전에서 승전국에 속함으로서 많은 이권을 얻고 2차 대전하에서 일본은 중일 전쟁을 하고 인도차이나를 침공하는 등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으로 1945년 8월 원자폭탄투하에 의해 항복을 한다. 이 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일본의 역사는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적응해 가면서 독특하게 발전해 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일본의 국민성중 문화의 귀화화란 것이있다. 섬나라인 일본은 고립되어 있어 반도나 대류같이 왕래, 교류, 충동이 없다. 이에 단순한 교역만이 가능하고 민족적인 이동은 없다. 이런 역사적 상황과 자연적인 환경은 일본이 일본인이라는 동질성을 강하게 해 준다. 이런 일본의 동질성은 외국의 것은 받아들이되 자신에게 맞게 일본화하는 민족성을 만들어 준다. 예를 들면 일본이 신토라는 종교위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는 소나 돼지 같은 육식은 먹지 못 하나 생선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이 4면이 바다인 섬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메이지 이신 이후 고기의 소비가 늘자 돈가스, 고로케, 카레라이스 같은 변형된 음식을 만들어 낸다.또 메이지 이신때 들어온 서양식 자본주의는 독점거래자본이라는 재벌(자니바쓰)을 만들어 냈다. 그전 쇼군, 다이묘, 부시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대주면서 크게 발달한 일본의 상업을 그런식으로 변형 시켰다. 와콘이라는 일본정신을 가지고 마콘요사이를 만들어 냈다.
베네치아 공화국 1천년사의 이야기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책의 진고민수2001년 6월 6일 수요일, 12시 39분신명조중고딕견고딕신명조중고딕견고딕신명조중고딕신명조중고딕신명조신명조중고딕명조베네치아 공화국 1천년사의 이야기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 책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감상문을 쓰는 나 역시 읽기 전에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려니 했다. 거의 모든 역사소설이 그러하듯이 이야기의 순서는 정치, 경제, 문화순의 서술이 대부분이다. 이 책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탄생에서부터 흥망에 이르기까지 서술을 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서술상의 차이가 있다. 보통의 역사소설은 거의가 그러하듯 판에 박은 듯한 서술형식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몇 년도에는 어떤 왕이 지배를 하였고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당시의 경제와 문학사조는 이러이러 했다"는" 식의 결과를 전달하는 방식이 보통이다. 하지만 소설의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는 그녀만의 나름대로의 역사전달방식을 꾀하고 있다. 그의 역사관이 그러하듯 역사를 평가하기보다는 과정을 추구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전혀 생소했을 배 구조 이야기나 건축물의 생성과정, 개펄이 많은 그곳에서 어떻게 배 길을 운용했는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흥미를 자아내게 했다. 굳이 찾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야기들이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였고 페이지의 수를 늘려나가게 했다. 특히나 나는 국제통상학과의 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베네치아상인들이 자신들의 주어진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당시 무역을 독점하였는가, 그 방법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베네치아는 바다로 둘러 싸엿다든가 주어진 자원이 절대적으로 빈약하다든가 하는 우리와 지리적 여건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성자필쇠'. 융성한 국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쇠락하고 만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낸 나라가 바로 이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 공화국이라고 필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한번도 국체를 바꾸지 않고 천년의 세월을 유지해온 국가의 저력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라는 국가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단순히 베네치아의 흥망성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하여 지중해와 그 주변 바다를 누비고 다녔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사람을 제외하고는 천혜의 자원이라고는 소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작은 섬나라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 유럽 최강의 해양국가가 되지만 늘 주변 강대국에 의해 시련을 겪는 모습은 세계대전 이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통해 이제는 경제대국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이 처해있는 상황과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가 조국의 국민들을 향해 '여기 이렇게 우리들이랑 똑같은 처지이면서 이렇게 멋지게 살아온 사람들이 있어'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만이 아니라 상당수의 일본인들도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인들에게 쏘아진 외침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비단 일본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시오노 나나미는 뛰어난 글쓴이임에 틀림없다.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발견한 1차 사료를 제시하고 부족한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마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눈을 통해 역사를 보는 기쁨을 준다. 또한 베네치아를 비롯한 당시 유럽의 사정을 비기독교인의 눈으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설명한다. 십자군의 힘으로 이슬람세력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함으로써 지금까지 치욕적인 일로 치부되던 제4차 십자군 전쟁에 관한 서술은 이해당사자였던 유럽인들의 시각에서는 베네치아를 단지 악역의 붕괴후 훈족이라는 중앙아싱의 야만족이 유럽으로 침입, 이탈리아에도 쳐들어 왔을때 그 난을 피하여 바다 가까운 개펄로 옮겨 사람이 살수 있는 수상마을 베네치아를 건설하고 다시 그곳을 발판으로 바다로 진출하는 이야기로 시오노의 베네치아사는 시작된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야만족 내습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한계적 역경에서 베네치아인들은 불굴의 의지와 합리적 정신으로 바다의 일부인 개펄지대의 바닷물과 개펄을 잘 관리하여 안전하고도 건강하며 온갖 산업화동과 공공활동도 가능한 수상도시를 건설한다. 그 다음 베네치아인들은 그 안전하고 건강한 수상근거지로부터 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여기서 배가 사활의 중요성을 갖게 되는데 비교적 값싸고 손쉽게 건조할 수 있는 기술과 그것을 운용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 베네치아인들이 성공을 거두는 기본적 발판이 된다. 안전한 수상 근거지의 건설과 갤리선이라는 배와 항해술의 개발. 이 두 가지 성공을 기본조건으로 하여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가 '지중해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게되는 무역입국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이것을 대성공으로 이끈 것은 그들의 뛰어난 상업조직, 노련하고 기민하기 이를 데 없는 외교 ,그리고 겹겹이 안전장치가 둘러쳐진 공화제정치제도의 결합된 힘이었다. 실로 놀랍도록 잘 조직된 그들의 상업활동과 정치제도는 특히 중요한데 오늘날 위기에 빠져있는 우리 나라로서는 개혁의 큰 방향을 참고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베네치아의 외교는 그 착실하고 현실주의적인 노선과 기민한 활동으로 동시대인과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베네치아가 주요 교역대상국에 외교관을 상주시킨 세계 최초의 나라라는 사실과 그들 외교관이 본국정부에 보내온 보고는 당시의 제1급 정보로 보관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즉 그들의 이러한 치밀함이 있었기에 당시 제일의 교역국이 가능했을것라는 말이다. 베네치아 외교망과 첩보망의 정보능력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정확한 정보의 적기확보를 통해 옳은 판을 내릴 수가 있었고 쇠퇴기 비잔틴제 예컨대 제해권의 획득과 수호를 위해서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종교전쟁에 뛰어드는 비용지불도 마다하지 않앗다. 베네치아는 3만3천500명의 십자군 병력수송을 의뢰받아 계약을 완전히 이행하고 십자군에 6천명을 파병한다는 약속을 지키는 대도박을 한다. 거금의 대금 지불은 십자군의 능력부족으로 부도가 나고 정복한 땅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반대급부는 실익이 없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베네치아는 이 대도박으로 명실공히 '동지중해의 여왕'의 지위를 확고히 굳힌다. 결과를 내다본 냉철한 정치적도박의 승리었다.베네치아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중에는 그들이 뛰어난 뱃사람과 항해꾼들을 많이 가졌고 또 '한정합자회사'라는 자본확보와 위험분산을 가능케하는 훌룡한 제도를 가졌다는것을 들어야겠지만 그것은 베네치아만의 것은 아니었다. 피사나 제노바는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한 수 위였다. 베네치아가 이탈해양도시국들의 최후로 승자로 살아남게 된 중요한 원인은 정부가 상인들의 활력을 억누르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동시에 또 철저히 개입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어찌보면 오늘날 국가가 재벌을 해체하고 또 성장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힘의 조절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보다 한 수위라는 생각이 든다.국유 상선단에 의한 '무다'라는 이름의 정기항로방식은 베네치아만이 채택한 유니크한 제도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베네치아에서는 누구나 해외무역에 참가할 수가 있었고 대상인의 독주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베네치아에서는 피렌체에서처럼 대상인이나 대금융자본가는 끝내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서 대재벌을 낳고 또 그것으로 인해 나라가 경제속국에 처한 상황을 볼 때 국가와 제도가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무다' 제도에 의해서 해양무역은 사실상 많은 시민이 참여한 국가적 사업이 되고 그래서 대중적활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각별히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러한 조치, 이러한 산업정책은 대상인의 장악아래 있는 정부가 궁리해사적 싸움, 그리고 불가피하게 겪는 하강·쇠퇴 국면의 이야기이다. 베네치아는 15세기 중반이후 동으로는 인구와 영토의 면에서 비교가 될 수 없는 대터키제국과 200여 년 동안에 7회의 걸쳐 전쟁을 벌인다. 서쪽으로도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 강력한 군주국이 대포를 중심으로 한 기술력까지 갖추고 위협해와 때로는 이탈리아반도의 태반이 점령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대서양 항로의 개척은 불가피하게 지중해 세계에서의 베네치아의 경제적비중에 위축을 가져온다.그러나 베네치아는 그 주력을 교역으로부터 공업과 농업으로 돌림으로써 번영을 계속 누린다.이러한 번영도 결국은 '성자필쇠'의 원칙이라는 시대의 조류에 의해 종언을 고하고 만다. 1797년 5월 16일 4천명의 프랑스군이 베네치아에 진주함으로써 단 한 번도 무장한 외국군을 들인 일이 없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이와 같이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와 우리 나라는 지리적 유사성이나 많은 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관계적 위치 등에서 현재의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먼저 자연 자원의 부족이다. 우리 역시 주어진 자원의 절대적 빈곤으로 수출 위주의 산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수출국 역시 몇몇 나라에 한정되어 있는 실정이고 주요 수출국인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다. 결국 그들의 경제 상황에 따라 우리의 경제가 결정되는 실정이고 그러다 보니 경기 변동이 주체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경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베네치아와 같이 본격적인 통상국이 되어야 한다고생각한다. 소위 중계무역의 전진기지로서 우리의 관계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 잠재력이나 동아시아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계적 위치로서의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이제는 대륙과 해양의 전초지로서 능동적으로 우리의 여건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아시아에서 정보화 인프라가 가장 잘 갖추어진 나라로서 인재육성같은 소프트 적인 산업을 투자해야 할 한다.
소설 "상실의 시대" 는 장르로 치자면 단순히 연애소설에 불과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유명세는 그칠 줄 모른다.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분명 이 소설에는 보통의 연예소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 점이 "상실의 시대"를 스테디 셀러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럼 무엇이 이 소설을 그토록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하였을까?난 소설속에 녹아있는 우수짙은 공허감과 도시적 색채의 묘사력을 꼽고싶다.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않다. 주인공인 '나''와 나오코, 미도리 사이의 삼각관계와 주변인물- 레이코와 와타나베의 선배-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난 그러한 점에서 소설자체의 줄거리나 평론가들이 으례히 하는 것처럼 인물간의 갈등구조 따위의 이야기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 소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다시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 감상문 역시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술방식이나 소설 속에 진하게 녹아있는 도시적 감수성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다.이 소설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95년 군대에 있을 때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이 소설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주제 자체가 그리 큰 흥미를 느끼만 할 것이 아니었고 이야기 전개 역시 빠른 그 무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 - 반복되는 일상의 따분함 - 에 있었기에 이 내용 자체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을 때면 가슴 한 구석 어딘 가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이를테면 도시적 생활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소설의 전반에 깔린 도시적 색채와 우수는 나에게 그것을 충분히 공감가게끔 해 주었다. 당시의 나는 강원도 두메산골에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대할 때면 더욱 더 그러했었다. 이 작품에는 도시적 색채와 현대 도시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허무함이나 서글픔이 진하게 베어있기 때문 일거라 생각된다. 더욱이 '숲을 보기 위해서는 숲에서 나와야 한다' 는 말처럼 도시 생활에 대한 근원적인 이국적 감각과 고독을 잘 느끼기 위한 곳으로 바로 '군대만한 곳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마지막 미도리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은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표현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도시 일상 생활속에 묻혀버린 우리자신들의 이야기말이다. 그런면에서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중 하나인 미도리라는 인물을 애타게 부르는 장면은 잃어버린 자아를 가진 현대인들의 서글픔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반적인 소설의 환경설정에 대해 난 좀 더 문학적인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도시적 감수성이 뛰어나다'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가게 하는 요소이면서 마치 옅은 블루톤의 화면 장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 '그대안의 블루' 의 전체적인 화면색조가 도시의 차갑고 냉정함을 상징하는 '블루'이듯이 말이다. 단지 여기서 주의할것은 도시생활에 대한 허무나 고독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소설에서는 현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철저히 거부하고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오직 사랑 이야기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적 감수성의 바탕위에 쓰여졌기 때문에 이 소설의 사랑이야기는 그 효과를 더하지 않나 싶다. 단순한 지나간 청춘시절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란 것이다.또한 소설이 갖는 매력으로 '분위기의 미학'를 꼽을수 있다. 이에 대한 것으로 평론가들의 글을 잠시 소개하기로 한다.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가벼운 미열과 함께 몸 전체로 서서히 퍼져 나가는 약기운처럼, 그의 문장엔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가장 환상적인 장면조차도, 바로 눈 앞의 정경처럼 구체적으로 떠올려 주는 조형 능력을 자랑한다."고 말했다. 또한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김정란은 ," 너무나 아름답고 가볍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완벽한 상징적 장치속에 배치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제목에서도 그러하듯이 원제 "노르웨이의 숲"은 왠지 이국적인 취향과 어느 새벽 안개가 자욱한 숲속에 양쪽 나무로 둘러싸인 길다란게 난 오솔길은 상상만해도 읽는 이의 감수성을 잘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작품전체에 깔린 분위기속에 이 소설을 읽는다면 특히 그러한 추억을 안고 있는 독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작품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먼저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이 소설은, 서른일곱 살인 내가 18년 전의 사건=실연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학에 갓 입학하여, 주위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나는 어느 날 전차 속에서 우연히 고교 시절에 자살한 친구 기즈키의 연인인 나오코를 만나다. 여러 차례의 데이트를 거듭한 끝에 나와 나오코는 재회한지 1년 후인 어느 비가 내리던 날 -나오코가 스무 살이 되던 생일날- 에 나오코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잔다. 그러나 나오코는 그 직후 실종되어 버리고, 그 후 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나오코가 쿄토의 산 속에 있는 아미료라는 요양소에 들어가 있음을 그녀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이 무렵, 나는 진한 색깔의 미도리를 만난다. 미도리는 같은 대학의 1학년생이며, 마치 봄을 맞아 세계로 갓 뛰쳐나온 작은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동감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여성 사이를 오거는 나의 격렬하고 슬픈 연애가 진행된다. 나오코가 들어가 있는 교토의 요양소는 외계와 차단된 조용한 세계이다. 거기서 살고 있는 나오코는 조용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고무공 같은 미도리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요양하고 있는 나오코와 발랄한 이미지의 미도리. 이 두 사람은 각각 정(靜)과 동(動) 혹은 사(死)와 (生) 등의 무라카미의 유(流)의 두 개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세계를 번갈아 가며 그려 가는 스타일은, 폐쇄적인 이야기와 개방적인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전개되어 가고있다. 이를테면, 나와 미도리의 두 차례의 키스 신, 그리고 미도리와 섹스를 할 수 없는 내가 미도리의 속옷에 사정을 하는 장면, 그리고 향락주의와 금욕주의가 공존하고 있는 듯한 기숙사 선배인 나가사와와 그의 연인인 하쓰미, 나와 나오코를 잘 이해해 주는 레이코 여사. 이러한 등장 인물들과 장면 묘사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나오코를 비롯하여 나오코의 언니, 나의 친구인 기즈키, 미도리의 부모, 나가사와의 연인인 하쓰미 등의 많은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결국 이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도 나오코는 깊은 숲속에서 목을 매달아 죽고 만다. 끝내 나는 그녀를 구해 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전화 부스 속에서 정신없이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온 세상에서 너 외에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 침묵 끝에 미도리가 "당신,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하고 물어 어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내가 전화기에 대고 미도리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장면에서 이 작품은 끝이 난다. 이 어디도 아닌 장소에 도달해 버린 마지막 장면도, 이 소설의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어딘가 미진한 느낌을 준다. 단순히 나오코에 대한 사랑이 미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행한 것으로 읽는다는 것은, 작가에 의해 의식적으로 저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함부르크에 착륙한 서른일곱 살인 내가 과거를 회상 하는 제 1장에, 미도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온지 않기 때문이다.상실의 시대가 연애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것은, 등장 인물들의 외부와의 현실적. 상상적인 격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에는 외부를 형성하고 있는 어른이 주인공들보다 약간 연상인, 나오코와 같은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던 레이코 여사를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일로서, 등장 인물들은 청춘 이라는 이름의 진공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이 가벼운 느낌을 주는 이유의 하나는 이 진공 상태와 같은 청춘밖에 묘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는 나의 실연의 경과가, 마치 그림처럼 섬세하고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기 위해, 또 하나는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던 공기라는 것을 그려 보기 위해 썼다고 한다. 즉 작가는 이 소설을 연애 소설 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과연 이 장편 소설을 그렇게 간단하게 연애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까? 분명히 이 소설에서는 한 사람의 남자가, 즉 주인공이 두 가지의 연애를 경험하는 모습이 상당히 극명하게 드러나있다. 그리고 사랑이라기보다는 다정함이라고나 해야 할 주인공의 연인들에 대한 따사로움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