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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페미니즘적 관점과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작품이해(에곤실레,에릭피슬,뭉크) 평가A좋아요
    - 목 차 -Ⅰ. 서론Ⅱ. 본론PARTⅠ.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에곤 쉴레와 에릭 피슬의 작품 분석1. 에곤 쉴레의 작품 분석2. 에릭 피슬의 작품 분석PARTⅡ.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을 이용한 작품 해석1. 분석의 동기와 방향2. 작품 분석A. 에곤 실레A-1). Freud의 정신 분석적 성격 모형으로 분석한 인간 에곤 쉴레B. 뭉크Ⅲ. 결론Ⅰ. 서론1. 연구 동기하나의 그림 작품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또 때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작가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내가 접했던 수많은 그림 작품들 중 특히 에곤 쉴레, 뭉크, 에릭 피슬 이 3명의 작가의 작품들은 그 인상이 너무 강하고 충격적이어서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에곤 쉴레 그림 속의 도발적인, 때로는 몽롱한 듯한 표정의 전라의 소녀 혹은 여성들의 모습, 괴로움에 떨다 금방이라도 내 눈 앞에서 자살이라도 할 것 같이 절규하던 뭉크 작품 속의 찌그러진 인물, 여성에게서 모든 주체성을 빼앗아 간 듯한 에릭 피슬의 작품 속 여인들은 내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으며, 나에게 그들 각각의 그림 속에 숨어 있을 작가들의 내면 세계를 파헤쳐보고 싶게 했다.2. 연구 방향에곤 실레의 경우 두 가지의 시각(페미니즘적 시각, 정신분석적 시각)으로 분석해 봄으로써 그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자 하였으며 나머지 두 작가들의 경우, 뭉크는 정신분석학적 시각으로, 에릭 피슬의 경우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분석해 보았다.Ⅱ. 본론PARTⅠ.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에곤 쉴레와 에릭 피슬의 작품 분석* 작품 선정 기준에 관하여앞으로 언급할 3명의 작가들의 작품 선정 기준에 관해 선행적으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언급을 하고자 한다.분석의 방향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경향성을 분석하고 그것을 그려야만 했던 작가의 내면 세계와 연결시켜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인 만큼 나는 작가가 그의 무의식이나 통제되어 있는 성향 등곧 감상하는 이의 시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쉴러의 시선이 여성의 음부에만 강하게 집중되어 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며 언제나 관찰을 ‘당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림으로서 결국에는 감상하는 이들에게 여성은 성적으로 주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관음의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포르노 물(그렇다고 쉴러의 작품이 포르노라는 의미는 아니다)을 볼 때 같은 성을 가진 여성이라는 존재가 나왔을 때 성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자신과 같은 몸을 가진 여성의 몸을 보는데 성욕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 여성의 시각이 자신도 모르게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곧 여성 자신의 주체적인 시각이 아닌, 남성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쉴러의 그림에서와 같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관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앞의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쉴러의 그림 속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관음의 대상이 되며 타자화 되고 성적 대상화가 되며 결국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남녀간의 불평등과 여성의 성과 몸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이러한 관음증이 쉴러의 경우 자기 자신에 대한 가학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자신의 성기를 당당하게 드러냄으로써 남근선호사상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하는 자화상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 스스로를 일그러뜨리는 자화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관음증적 시각이 담긴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출인 것일까? 「얼굴을 찡그린 남자- 자화상」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포효하고 있는 듯 보이며 여성에 대한 가학적 표현을 그려내는 대신 자기 그림 SEQ 그림 * ARABIC 3. 얼굴을 찡그린 남자- 자화상자신을 대입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2. 에릭 피슬의 작품 분석에릭 피슬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성적 욕구, 훔쳐보기, 근친상간, 알코올 중독 등 금기 시 되어절하는, 분리되었으나 서로 의존하는 세 가지의 심리적 구조를 기술한다. 그리고 계열적 혹은 단계적 요소는 민감한 신체 부위, 발달 과업, 그리고 심리적 갈등이 달라지는데 따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진행을 강조한다.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Freud의 정신분석 이론의 요소 ]이와 같은 Freud의 견해 중 특히 계열적 요소와 구조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에곤 쉴레의 내면 세계를 분석해 보도록 한다.② 상황 설정에곤 쉴레를 분석하는 데 있어 서론 부분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에곤 쉴레가 실제 Freud라는 심리학자에게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간 것이라는 상황을 가정하였으며 분석 역시 Freud가 상담을 받으러 온 에곤 쉴레라는 환자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할 것이며 물론 약간의 픽션적인 요소가 들어갈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언급해 두겠다.③ 에곤 쉴레, Freud를 만나다.2004년 6월 x일. 여성단체의 회원들에게 한바탕 욕을 얻어먹을 에곤 쉴레는 오늘따라 마음이 착찹하고 심란하다.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심리학자라는 Freud씨를 찾아 가보기로 결심했다. Freud씨는 에곤 쉴레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에곤 쉴레는 Freud시의 요청에 따라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Freud씨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주었다.“ 쉴레 씨는 지나치게 강렬한 ‘원초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 같군요. 모든 정신 에너지는 원초아로 투자되며, 반사나 반사적인 행동에 의한 기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바로 이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죠. 원초아의 에너지는 전적으로 쾌락원리에 통제되고 억압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곤 하죠. 보통 원초아의 무의식적 충동은 인생을 통해서 그 비중이 작아지게 되므로 이 원초아와 연합하는 정신 과정은 그 비율이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쉴레씨의 경우에는 자아가 초자아와 건전하게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꾸만 원초아로 회귀해 버리려는 사로서 세상에 복수하려는 심리가 나타난 것이죠. 그 매개체는 여성, 혹은 자기 자신이고 말이죠. 또 당신의 유년을 떠올릴 때면 성에 대한 당시 자신이 가졌었던 이미지 속에는 네 살 어린 여동생 게르트루데가 존재한다고 하셨죠? 그녀는 당신 그림의 모델 역할을 한 적도 많다고요? 17살 때에는 단 둘이서만 트리에서테로 기차 여행을 떠났고 더블 룸에 투숙한 적도 있었고요…제 생각에는 쉴레 씨의 불안했던 자아가 치유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가지게 되었던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 쉴레 씨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뒤틀리고 불안정한 상태로 고착되어버린 원초아와 자아 간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며 동시에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를 고양시킬 수 있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공격적 성향과 적개심 등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표출시킬 수 있는 – 이것을 승화(Sublimation)라고 합니다.- 치료 역시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쉴레 씨에게 음악 치료법을 권고해 드립니다.”④ 에곤 쉴레, Fredu씨가 제안한 음악 치료를 방아 보기로 결정하다.Freud씨와의 상담을 마친 쉴레는 그가 추천한 다음의 Freud의 정신역동 모델에 관하여 읽어 본 후 그의 음악 치료를 받아 보기로 결정하였다.Freud의 정신역동 모델(Psychodynamic Model)정신역동 모델은 프로이드가 발전시킨 이론에 근거한다. 이 모델은 감정의 문제를 대부분 어린 시절에 생긴 갈등 관계와 부정적 사건들의 내적인 갈등의 결과로 보며, 치료사가 맡은 역할은 환자가 무의식적 갈등을 현재의 불안과 연관하여 좀 더 잘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모델에서는, 무의식적인 욕구와 대립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내고 자아의식을 강화함으로써 감정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행동은 본능의 욕구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사건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이드의 추종자 중 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겪은 저러한 스트레스적 상황이 당신을 코너로 몰아붙이며 자아의 건강한 발달을 저해시킨 듯 합니다. 당신은 타인들보다 죽음에 대한 본능을 삶에 대한 본능보다 더욱 크게 느꼈고 그러한 주체할 수 없이 넘쳐 흐르는 죽음에 대한 본능을 그림을 매개체로 하여 ‘승화’라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적절히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그림 SEQ 그림 * ARABIC 6. 절규 HYPERLINK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ser_id=carpediam&board_no=21335&nid=3364" t "_blank" 그림 SEQ 그림 * ARABIC 7. 불안당신이 그린 「절규」라는 그림에서 그러한 심리적 에너지가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그 방어 기제는 당신 내면에 쌓여 온 신경증적 불안을 완전하게 해소시켜주지는 못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불안」과 같은 작품에서 보인 공허한 듯 하면서도 무언가 의미를 찾으려는 듯 기묘하게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정신분열적 심리에서의 표현성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HYPERLINK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ser_id=19061234&board_no=13644&nid=3946" t "_blank" 그림 SEQ 그림 * ARABIC 8. 마돈나 HYPERLINK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ser_id=blue3moon&board_no=11711&nid=1165" t "_blank" 그림 SEQ 그림 * ARABIC 9. 흡혈귀어릴 때 겪었던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은 당신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그저 공포스러운 경험으로서만 남아있기 때문에 「흡혈귀」나 「마돈나」같은 작품들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신에게 있어 여성의 이미지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니까 17
    예체능| 2004.12.02| 20페이지| 1,000원| 조회(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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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 자본이라는 이름의 흡혈귀(자본론을 읽고)
    ‘자본’이라는 이름의 흡혈귀( ?자본론?을 읽고 )며칠 전 자본론의 노동일 부분을 한번 통독한 다음쯤이었던 것 같은데, 등교길에 라디오에서 ‘독일 지멘스사의 휴대전화 공장이 최근 노사 합의로 주당 노동시간을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연장했고,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등 다른 서유럽 국가들도 노동시간 연장을 검토중’이라는 보도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텐데, 노동시간이란 말이 나오니깐 자본론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는지, 왜 노동시간을 줄이는 현 추세에서 다시 늘였는지? 현재의 노동시간에는 잉여가치율이 얼마나 될 것인지?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등 많은 질문들을 머리 속으로 해보게 되었다.그 후 인터넷으로 한번 조사를 해보았는데, 서유럽 국가들이 노동시간 연장을 하는 이유는 노동시간의 감축이 실업률 감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데다 노동자들이 임금이 싼 동유럽 국가로 공장이 옮겨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며, 예로 든 독일의 지멘스도 주당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늘리지 못할 경우 경쟁력이 약화돼 2개 휴대폰 공장을 헝가리로 옮기고, 2000명을 감원하겠다고 하자 노조가 지난달 24일 임금 동결 및 주당 40시간 근무제에 동의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근로시간을 축소해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긴 했지만 국제경쟁력은 감퇴되고 있다며 최근 근로시간을 연장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프랑스는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고 있는 원인 중 하나로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꼽고 있고, 민간부문에서도 주 35시간 근무제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는 기사도 읽을 수 있었다.위의 기사들을 요약해보자면 경쟁력의 약화와 경제성장의 둔화, 그리고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임금이 더 싼 곳으로 공장이 이전함에 따른 일자리 상실을 우려한 노동자들의 동의가 최근 서유럽의 노동시간 연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한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타당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경쟁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누가 더 많이 착취해서 더 많은 자본을 증식시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노동자에게 실업의 위협을 가해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은 과거 하루 14~15시간씩 일하면서도 불평할 수 없었던 노동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차라리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적게 일하는 쪽을 훨씬 좋아하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들 중에는(다른 나라의 노동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실업상태에 있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노동시간 연장을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즉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더 장시간 노동하느냐 아니면 해고되느냐일 뿐이다.)최근 우리나라도 주 40시간으로 법정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일정을 기업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적용하여 며칠 전인 7월 1일부터 비로소 10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주40시간 근무가 시행되었다.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현재 프랑스의 2배나 될 정도로 많은데, 앞으로 노동시간이 개선된다는 점에서 이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본론으로 들어가서 ?자본론?의 노동일 부분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폐단, 그리고 자본가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노동일이란 무엇인가? 자본은 하루분의 가치를 주고 구매한 노동력을 얼마 동안 소비할 권리가 있는가? 노동력 그 자체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어 얼마나 더 연장될 수 있는가? 이에 자본은 대답한다. 그가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은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바쳐질 노동시간이라고 말이다.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일은 결코 최소한도까지 단축될 수는 없다. 이는 노동자가 애초에 상품의 소유자로서 자본가와 대등하게 상대하더라도 자본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으며, 일단 자본가가 노동력을 그 하루의 가치로 구매하면, 1노동일 동안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자본가에게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본질적으로 잉여가치의 생산이고 잉여노동의 흡수이기 때문에 자본을 가진 자본가는 1노동일 안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의 지출(그 지출이 아무리 병적이고 강제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노동력의 수명을 줄이더라도)을 요구하게 된다. 자본가에게 자본의 가치증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노동자에게는 노동력의 초과지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초과지출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어린 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과도한 노동시간에 허덕였으며,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얻게 된 질병은 그에게 노동의 기회마저 박탈시켰다. 이에 노동자들은 노동시간과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계속했고, 규칙적인 식사시간 보장, 작업환경 개선 등과 같은 요구사항에서 시작해 8시간이 1노동일로서 충분하다는 표준노동일을 결의하기에 이른다.규칙적인 식사시간을 보장하고, 야간에 기계를 쉬게 하고, 아이들에게 10시간 이상씩의 일을 시키지 않을 경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보다 손실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자본가들은 그럴 경우 공장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엄살을 떨며 반대하지만, 실제로 손실은 자본가의 부담한도 내에서 발생할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한 손실은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식사하지 못하며 먹은 것을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또한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결과 일어나는 생명력의 낭비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력의 낭비는 궁극적으로 노동력의 영구한 부족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그렇다면 이렇게 노동자를 혹사시키는 자본가를 탓하고 그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인가?마르크스는 자본가는 자본의 단순한 화신, 즉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본가의 혼은 자본의 혼인데, 자본에게는 자신을 가치 증식시키며,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자기의 불변부분인 생산수단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게 하려는 단 하나의 충동이 있을 따름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이것은 생산수단에 이미 응고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 또는 죽은 노동과 대비되는 것인데,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띤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설명을 기초로 자본가에게 내재하는 난폭성은 자본에서 기인한 것으로 자본가에게 돈벌이 이외에 다른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하므로 자본가도 이런 점에서는 자본주의의 일종의 피해자일 수 있다고 생각을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가가 그들의 난폭성으로부터 해방되어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잉여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노동자 입장에서의 결론’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경영/경제| 2004.12.02| 3페이지| 1,000원| 조회(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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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문학] 카프카 법 앞에서
    카프카 1. 작가 소개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1924]- 1883년 7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이었던 프라하에서 부유한 유대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9년 프라하 시내의 독일어 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후 프라하 시내의 국립 도이치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사이 남동생 둘이 태어났으나 연이어 죽고, 대신 세 누이동생이 태어났지만 나이 차가 많아 카프카는 이 누이동생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였고, 어머니마저 장사로 분주하여 카프카는 몹시 고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세 누이들은 모두 뒤에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1901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법률을 공부하였고, 1902년 막스 브로트의 쇼펜하우어에 관한 강연이 인연이 되어 그와 평생을 절친하게 지내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은 대부분 사후에 알려졌는데, 카프카가 죽은 뒤 모든 작품을 소각해 달라는 그 유언과는 반대로 유고를 계속 발표하고 또한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를 겪으며 이를 지켜내어 후에 가능한 한의 완전한 전집을 간행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1903년 전기 법학 국가 고시에 합격한 후 졸업 시험을 마치고 법학사가 되어 민사 재판소에 실습을 하다가 1908년에 노동자 재해 보험 협회에 취직하여 건강 문제로 퇴직하게 될 때까지 평생을 이곳에서 근무하였다. 이는 규칙적이고 넉넉한 여가 시간이 보장되어 작품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912년 장편 를 쓰기 시작했고, 8월 페리체 바우어라는 여인을 알게 되어 이 여인과 그 후 5년간 교제를 계속하며 세 번이나 약혼했으나 정신적 고민으로 세번 다 파혼하였다. 단편 을 9월 2일 밤부터 쓰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에 탈고한 것을 계기로 문학적 독자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를 계속하여 쓰는 한편 도 이 해에 완성하였다. 1915년 을 발표하였고 로 폰타네상 수상하였다. 1919년 유리에 보리체크와 약혼하지만 이듬해 파혼하였고, 와 를 출간하고 자전적 요소가 짙은 를 집필하였다. 1922나이는 거의 끊임없이 문지기를 관찰한다. 그는 다른 문지기 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이 최초의 문지기야말로 법률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장애라고 생각하게 된다. 첫해에는 큰 소리로 불운한 우연을 저주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투덜투덜 중얼거릴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되어버리고, 여러 해 동안에 걸쳐 문지기를 관찰한 결과 그 모피 깃에 벼룩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을 도와주도록 그리고 문지기를 설득해 주도록 부탁을 하기도 한다. 마침내 시력이 약해져, 자신의 주위가 정말로 어두워졌는지 아니면 자신의 눈이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암흑을 통해서, 여러 겹의 법률의 문으로부터 꺼지지 않고 비쳐 나오는 빛을 확인한다. 그는 이제 오래는 살지 못하리라. 죽음을 앞둔 그의 뇌리에는 전생애의 모든 경험들이 모여들어, 이제까지 문지기에게 던진 일이 없는 하나의 질문이 된다. 이제는 점점 굳어져가는 몸을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에,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이 구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서로 키가 차이가 나는 것은, 사나이 쪽이 훨씬 불리한 것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제 새삼스럽게 무엇을 알고 싶단 말이오?’하고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싫증을 내지 않는군.’ ‘누구나가 모두 법률을 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여러 해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고 원하는 자가 없지요?’하고 사나이는 말한다. 문지기는 사나이가 이미 임종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희미해 가는 청력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친다. ‘여기는 당신 외에는 아무도 들여보낼 수 없었소.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오. 이제 나도 가겠소. 그리고 문을 닫겠소.’3. 내용 요약 이야기는 전체 의 축약본이라고도 이야기될 만큼 같은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누군가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직자는 말했다.“그러니까 나는 재판소 사람이오”하고 성직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 당신에게 용무가 있겠소. 재판소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를 않소. 당신이 오면 맞이하고, 가면 내버려둘 뿐이오.”4. 작품 분석4-1 사회적 관점으로 분석(지배-피지배 관계, 소외, 이성-비이성)시골 사람은 법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여기서 법의 문을 사회, 체제로의 편입의 통로라고 한다면 들어갈 수 없는 시골 사람은 그 사회에서 배제된 소외된 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시골 사람은 소외되는가? 법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귀족의 신분적 특권, 자유보장을 위해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귀족의 법체계의 본질로 시골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저지될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국민을 위한 자유의 대헌장이 아니라 군주와 등족간의 약정서로서 등족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헌장인 ‘마그나 카르타’에서 현재의 기본권 보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보통사람들은 법의 능동적 참여보다는 당위성에 의한 수동적인 억압만을 받는, 즉 법 근처에 맴돌기만 하다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소외자였던 것이다. 시골사람이 빛의 세계를 목격하였지만 그것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존재의 대상들은 소속과의 갈등으로 단절이 발생하는데 카프카는 이러한 단절을 통해 소외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는 문지기 역시 소외자이다. 문지기는 하수인으로써 시골 사람에게 힘을 과시하며 법으로의 접근을 막는 행위를 하지만, 그 역시 법으로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시골 사람이 갈때까지 또는 죽을때까지 그 곳에서 그렇게 지키고만 있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은 하수인이며, 문을 등지고 있어 새어나오는 빛조차 보지 못하는 철저히 진실에 외면당한 또 다른 소외자일 뿐이다.그런데 나는 제일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모든 방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안쪽으로 갈수록 더 욱더 힘이 세진다. 세 번째 를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잘 나타난다. 체포는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고, 또한 생일날 이루어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포획상태는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듯이 말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다 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런 인식이 어떤 계기에서든 올 수 있는 것이다.에서는 의 요제프 K가 겪는 이런 포획상태를 법 앞에 선 시골 사람이 문지기에게 가로 막혀 법의 문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그 곳을 떠나갈 수도 없는 상태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포획된 상태로 죽어간다. 죽으면 그의 포획상태는 끝이 나는데, 그는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상황에 의해 죽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골사람이 잘 살다가 법 앞에 오게 된 것은 요제프 K가 서른이 되는 생일날 체포를 당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포획상태를 인식하게 되는 시점이나 그 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우연히, 어떤 필연성도 없이 찾아오기에 더 가혹하다. 시골사람이 법 앞에서 문지기에게 애원하고 문지기의 벼룩에게 통사정하는 것과, 요제프 K가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 화가, 신부를 찾아다니며 애쓴 시간은 같은 의미로서, 바로 우리 삶의 과정의 실제 모습이다. 하지만 시골사람이나 요제프 K나 이미 그런 포획상태에서 벗어 날 수 없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 의문을 가지거나 혼란스러워 하거나 서서히 체념하는 일 뿐이다. 그리고 시골사람도 요제프 K도 죽음으로써 삶이라는 포획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골사람이나 요제프 K에겐 출구가 부재하다. 어디에선가 이끌려 와서 어디론가 이끌려 가는 포획상태, 그것을 카프카는 삶이라고 파악한 것 같다. 카프카가 제시한 죄목은 바로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4-3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둔 해석) (의무를 지우고 싶은 욕망)1) 법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사랑의 가치, 종교적 가치, 경제적 가치)을 담고 있지 않으면서 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모방적 욕망’이라는 현상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행된 공동체적 가치체계의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 가치체계의 구속이 사라진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자발적인 욕망을 품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이나 권위에 심리적으로 예속되며, 이 때문에 대상 자체의 가치는 공허해진다. 는 이처럼 예속된 주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2) 문지기법으로 입장하려는 주인공과 입장을 막는 주인공은 두 개의 상반된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충돌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두 인물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것은 주인공이 문지기의 말에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문지기를 자신의 의지를 가로막는 적대자로 보지 않고, 그것을 승인해 줄 상위의 권위로 받아들인다. 민담에서 주인공을 승인하고 상벌을 내리는 왕과 같은 권위적 존재, 즉 발신자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을 매달리는 시골남자의 강력한 의지와, 그 의지를 가로막는 문지기에게 저항하지 않고 손쉽게 굴복하는 예속적 태도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대로, 사나이가 추구하는 것이 ‘해야 함’이라는 의무라면, 문지기에 대한 사나이의 태도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문지기가 법으로의 입장을 금지하면서 ‘나는 힘이 세다’고 주장할 때, 주인공에게 그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될 권력을 쥔 발신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지기는 발신자로서 지금 입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주인공에게 의무라는 양태적 가치를 제공한다. 문지기의 금지는 내용면에서는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주인공의 의지와 배치되는 것이지만, 양태적인 면에서는 주인공의 욕망에 부합한다. 욕망의 대상인 법과 이 법에의 접근을 막는 금지령은 양태적인 면에서 ‘등가’이고 따라서 법 안으로 입장하려는 사나이의 집요한 시도와 문지기의 금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동일한 욕망의 상이한 표출’이다.4-4 죽음 앞에서의 자기분열(시골사람의 일인극)“언제다.
    인문/어학| 2004.12.02| 9페이지| 1,500원| 조회(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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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론] 미술론입문 - 영화 폴록,프리다,취화선을 보고
    - 영화 ,,을 보고이상하게도 천재의 일생을 다룬 대개의 영화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범한 재능과 그와는 반대급부적인 불우한 삶을 다룬다. 그리고 공식처럼 그들의 재능은 주변 사람들마저 불행에 감싸이게 한다. 20세기 추상 미술의 대가이자 액션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의 생애을 그린 역시 천재의 광기가 낳은 위대한 예술의 경지와 순탄하지 않았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4대화가로 일컬어지는 천재화가 장승업의 일생을 그린 우리영화 도 마찬가지이고, 20세기 멕시코 화가로서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프리다 칼로의 일생을 담은 또한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 세 작품중 는 다른 사람들과 화합하거나 삶이 동화되지 못한채 삶을 불행하게 마감하는 다른 두 작품 속의 주인공과는 달리 슬픔, 아픔, 고뇌를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숨쉬고 느끼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유지한다는데는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세편의 영화는 제각각 다른 시공간의 화가들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데 불안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창작의 고통에 또는 인정받기위해 괴로워했으며(영화 프리다에서는 그녀의 창작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삶의 고통에 초점을 둔 것 같지만), 그리고 알콜중독자(폴록과 장승업)였다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이렇게 영화들끼리 비교하게된 것은 주말 영화소개 하는 TV프로그램처럼 영화들을 비교분석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천재예술가는 불행한가? 행복한가? 하는 의문이 들다보니 어떤 정형화된 틀을 기대하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럼 각각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잭슨 폴록은 수업시간에 자세히 다루고 영상으로도 본바 있어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수업시간에 배운 추상표현주의와 평면성, 물감의 본성과 같은 개념은 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의 의미라든가, “이미지가 그림을 지배해서는 안된다”라는 잭슨폴록의 대사나, “물감은 물감이고 캔버스는 캔버스일뿐”이라는 비평가의 대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무리없이 전달받게 해주었다. 영화에서는 잭슨 폴록의 부인인 리 크래스너의 역할도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녀는 폴록이 그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후원자이면서 “그림만 그려!”라고 말하며 그를 구속하고 그의 성공에 목말라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런 리 크래스너가 폴록의 성취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라는데는 이의가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폴록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그의 작품이 고가에 팔려나가는 것에 도취되며, 비평가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쓰는 폴록의 모습에서 ‘예술가가 뭐 저래?’ 라는 생각보다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구나’하는 생각에 오히려 친숙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그의 예술 외적인 삶의 모습도 시선을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물감을 바닥에 뿌리는 기법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물감을 뿌리며 작업하는 장면은 빈번하게 나왔는데 그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투명한 판 위에서 물감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밑에서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마치 내 얼굴에 물감이 떨어지는 양 물감의 차갑고 끈적끈적한 질감이 느껴졌고, 화면에 뿌려지는 물감의 모습은 불안함과 난폭함, 억제할 수 없는 광기가 뒤섞인 폴록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우리영화 의 장승업은 상당한 면에서 폴록과 닮아있지만, 영화가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건 마치 동양 산수화가 주는 자연속의 인간의 모습(서양화 프리드리히의 ‘수도승’이란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런 인간으로서의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몇장의 수묵화로 본 느낌이었다. 취화선의 첫느낌은 정말 영상미가 뛰어나다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장면들은 답답한 일상에 찌든 내 가슴을 뻥 뚤리게 해주었다. 영화속의 장승업은 폴락과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을수록 기대 이상의 작품을 그려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괴로워하고 고뇌하며, 끊임없는 발전에 목말라있다. 그의 천재성은 노력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매일 술에 의지해 살면서도 그림 그릴때는 진지한 그의 모습에서 폴락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영화속에 등장한 그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자기 시중들던 아이에게 그려준 새떼들이 매에게 쫓겨 무리지어 도망가는 그림이다. 새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살아있는 듯 생동하는 그림은 그야말로 수작이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그리고 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두 작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한 화가를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그림은 불행했던 그녀의 삶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에게는 다른 두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정신적인 불안정성도 안보이고,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남편 디에고와의 가정문제와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 또는 고뇌가 있긴 했지만 자신의 그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거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괴로워하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화이기 때문인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여성 화가로서 우뚝 선 것만은 다른 두 작품의 주인공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녀의 작품의 주제는 불행한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고통받은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한 그림들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강렬하고 부드러우며 섬세하고 혹독하다는 영화속의 대사처럼 많은 수식어를 가능하게 하는 특색있는 작품을 형성한다.
    예체능| 2004.12.02| 2페이지| 1,000원| 조회(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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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 철학] 계몽의 변증법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 평가B괜찮아요
    「계몽의 변증법」 문화산업 :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1. 들어가면서...우리는 살아가면서 TV, 라디오, 신문 등의 매스미디어에 접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으며, 그를 통해 즐거움과 정보를 얻고, 간간히 주말에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을 인생의 커다란 기쁨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말한다. 문화적 통제라는 효과적인 지배의 무기를 통해 자본가들은 대중의 의식을 유순한 시민,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로 조작하고 있다고 말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은 문화산업이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에게 묻는 것처럼 언급하지만, 사실 문화산업이 사람들의 적극적인 사고나 감정 혹은 반응을 제거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문화생활을 하면서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상품, 지식, 기쁨 등이 조작된 것이라는 생각은 몹시 불쾌하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각자 판단해 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2-1.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문화산업론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산업부분에서 대중문화를 상품문화, 소비문화로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구화하며, 허위적 욕구를 재창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주의의 온상을 배양하는 허위문화로 보고 있다.) 또한 아도르노는 사회의 지배적인 생산양식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문화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이러한 지배는 정치적 수사, 뉴스 보도, 광고, 그리고 PR등에서의 노골적인 선전을 통해서나, 일상생활의 문화적인 모든 국면에서 그 생산자나 소비자들에 의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무의식적으로 흡수됨으로써 영속화되고 있다. 더욱이 중앙집권화된 매스 미디어에 의한 여론조작은 이와 같은 경향을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매스미디어는 지배계급이나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는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다수의 수용자에게 전달되고 향유되는 대중문화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사회화됨으로써 체제의 가치와 문화에 자연스럽게 통합된다. 아도르노는 그의 문화산업론에서 매스미디어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여 대중에게 자본주의적, 소비지향적 허위욕구를 조장하며 저항의 역동성을 무력화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조작적 기능과 문화적 상부구조를 통한 권력과 통제의 행사와 조정을 통해 원자화된 사회구조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로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오늘날 문화는 모든 것을 동질화시킨다. 영화와 라디오와 잡지는 개개 분야에 있어서나 전체적으로나 획일화된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고, 도시의 주택사업은 위생적인 소주택을 보급하여 개인들을 자율적인 주체로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절대적인 자본의 힘에 개인들을 좀더 철저히 종속시키고 있다. 이렇게 독점하에서 대중 문화는 모두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비동일적인 특수자는 보편자에 포섭될 수 없으며 현대 사회는 이러한 특수자를 억압하고 무시함으로써 획일화된 체계를 만들며,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수한 이해나 입장밖에 될 수 없는 특수자를 곧 보편자로 착각함으로써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문화 산업에 의해 점차 심화된다.사적인 문화 독점하에서 폭군은 육체를 자유롭게 놓아두는 대신 곧바로 영혼을 공략한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너의 생명이건 재산이건 계속 네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순응하지 않는 별종은 경제적인 무능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정신적 무력증을 초래하게 된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무가치성을 자각하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문화 산업의 생산물은 여가 시간에조차 소비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노린다. 개개의 문화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휴식시간에도 잡아 놓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환이다. 어떤 영보면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작용을 사람들에게 가하려 한다.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 든다. 정신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모든 부문을 동일한 방식에 의해 동일한 목적 아래 굴복시킴으로써, 또한 저녁때 공장을 떠난 후 다음날 아침 정확히 일터로 복귀할 때까지의 시간 동안 사람들의 감각을 낮 동안 행하는 노동 과정의 연장선상에 묶어 둠으로써, 문화 산업에 의한 문화의 장악은 실현된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의 노동 과정에서 해방되는 것은 단지 여가 시간에도 그러한 노동 과정에 동화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사람들의 여가 시간은 문화 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 생산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데, 오락물의 내용들도 겉보기에는 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변화 없는 반복일 뿐이고, 자본주의적인 생산은 그들의 육체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제공된 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도록 묶어놓는다.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 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미리 자신에게 주어진 수준에 걸맞게 자발적으로 행동하며 자기와 같은 유형을 겨냥해 제조된 대량 생산물을 고른다. 소비자는 자신을 영원한 소비자로서, 즉 문화 산업의 객체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 체계의 원리다. 문화 산업은 자신이 행하는 기만이 욕구의 충족인 양 소비자를 설득하려 들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 문화 산업이 무엇을 제공하든 소비자는 그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주입시킨다. 문화 산업의 위치가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더욱더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조종하고 교육시키며 심지어는 재미를 몰수할 수도 있다.)2-2.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에 대한 비판과 다원주의적, 진보주의적 진화이론 소개이러한 아도르노의 문화비평이론이 현실을 통찰력있게 분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체로 긍정하지만 자본의 교묘한 지배에 의해 가치의 수용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비판의식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현상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을 선호할 것인가에 대한 대중의 선택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는 선택의 자유마저도 계획된 범위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대중의 다양한 선택을 완전히 포함할 수 있는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또한 매스미디어가 독창적이지 않다라는 사실은 확실히 맞는 말이지만, 문화산업의 매스미디어가 아도르노가 말하는 것처럼 획일성 대신 끊임없는 창조성의 표현이나 다양성을 그 특성으로 갖고 있고 또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지면을 채워야 하는 신문과 잡지, 엄청난 시간을 채워야 하는 TV와 라디오, 정기적으로 항상 예외 없이 발행되어야 하는 매스미디어의 근본적인 이러한 제약들과 심지어는 일상적이 아닌 신선한 것도 자주 보게 되면 또다시 일상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 매스미디어를 어느 정도 획일적이고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만든다. 더구나 독창성이란 균형이나 공평한 취급을 초월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는데 매스미디어는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수업 텍스트로 아도르노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점을 다루다보니 대중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편중되는 것 같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론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으로 대중사회에 관한 진보주의적 진화이론을 간략히 소개해 보려 한다. 이들의 이론은 산업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이루어진 인간의 창의와 발전 그리고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을 축하해 주고 있다. 사회는 어떠한 집단도 지배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복합적 사회구조의 사회라 말할 수 있다. 다원적 사회에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광범위한 대량의 인구가 민주적인 대중문화에 관여함으로써 사회생활은 메마르게 되기는커녕 더욱 향상된다. 현대 산업사회가 교육수준의 향상, 여가시간의 증대, 그리고 생활의 풍요를 가져다줌으로써 고도의 대량소비 여건을 형성하였고, 이는 사람들이 고급문화물을 받아들이는데 더주의는 방대하고 동질적이며 문화적으로 야만적인 대중을 형성시키기 보다는 여러 가지 상이한 취미수준과 상이한 수용자나 소비자들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문화는 계층화되고, 그 소비 역시 다양화되었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은 사회구조 내부에서 여러 세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코 문화산업의 여러 기구를 통해서 유순한 많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들은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전체주의적 성격으로 보고 있지 않다.)3-1. 「법앞에서」의 재해석(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으로 해석해보기)「법앞에서」의 시골사람은 문 앞에 선다. 그 문은 죽기 직전 문지기가 밝혔듯이 그 만을 위한 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마련되어 있지만 (이는 시골사람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라는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그 문은 누구도 그것을 통과하게도 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게 한다. 즉, 여기서의 문은 사물의 정곡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기만적인 것으로서, 대중은 본질을 구경하지 못하고 거대 자본 또는 권력에 저항을 포기하고 그들이 설정하는 데로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골 사람의 본질에 대한 추구는 그 거대함 앞에 쉽게 좌절된다. 그렇다면 왜 시골사람은 그 들어가지도 못하는 문을 속시원하게 포기못하고 그 앞에서 죽어가는 것일까? 이는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따르든, 저항을 생각하든 문화산업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산업의 분류 속에 그러한 이견을 가진 사람도 일단 등록이 되면 문화산업에 속하게 된다. 그는 문 앞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영원한 소비자, 즉 문화산업의 객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또한 문화산업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을 내리는 이른바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의 성장을 방해하고, 획일적인 사고방식, 모습을 주입한다. 마지막 시골사람의 질문을 통해서 시골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가
    인문/어학| 2004.12.02| 2페이지| 1,500원| 조회(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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