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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문화] 파칭코 평가A+최고예요
    2. 파칭코⑴ 파칭코의 기원우선 ‘파칭코'기는 일본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고 한다. 파칭코는 원래 1910년 이전 프랑스 릴 시에서 먼저 시작된 놀이기구였다. 이것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기의 카일형제상회가 1910년 '핀볼게임'기를 등록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도 시작되었는데 한 영국의 상회가 그리스의 고대도시 코린트의 이름을 딴 코린트상회를 열었는데 그 상회에서 발매한 게임기가 코린트게임기였다고 한다.이 코린트 게임기가 일본에 수입되어 개선된 것이 오늘의 파칭코기라고 한다. 또 다른설은 1920년 경 미국 시카고로부터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일본에서 시작된 것은 코린트 게임기의 변형이었던 것은 사실인것 같다.다음 파칭코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니 파칭코는 영어라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파칭코라는 이름은 게임할 때 생기는 마찰음에서 따온 의성어였다. 일본인들에게는 쇠구슬이 못 사이를 돌아내리며 내는 소리가 마치 '파치파치' 혹은 '파칭파칭'하는 소리로 들렸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구슬이 '코로코로' 혹은 돌면서 떨어지는 것 같아 '파친 코로코로' 혹은 '파친코로'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파칭코'로 귀착돼 오늘에 이른 것 이라고 한다.파칭코가 공업지대에서 먼저 시작된 것은 여러나라가 다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는 기계부품으로 볼 베어링은 파칭코 놀이의 핵심인 쇠구슬 대용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카고, 디트로이트는 자동차회사가 있는 공업도시였다. 파칭코는 1930년 나고야 시에서 본격 시작되었다. 지금 70년 이상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전역에서 대중오락의 왕좌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파칭코는 처음에는 과자가게에서 기다리는 손님이나 어른이 함께 갖고 놀던 것이다. 상품이라야 껌, 치약, 초콜릿 등이었다.⑵ 일본의 파칭코① 파칭코의 역사파칭코의 역사를 살펴보면 1929~30년 사이에 나고야에는 500여개의 파칭코기 제조업체가 있었다. 이것이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바로 볼 베어링때문이었다. 무게 5.5g, 직경 11mm 크기의 은색구슬, 구슬은 당시 일본 정밀공업의 상징이었다. 전후 일본의 베어링 제조기술은 미국 나사의 우주 로켓에도 쓰일 정도라고 한다. 파칭코는 역시 직사각형의 눈높이기계와 마주 앉아서 하는 일인기 놀이였다. 쇠구슬을 구멍에 넣어 점수를 얻는 게임이다. 축구 골프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공개석상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기계면적은 1.5mm에 불과하고 무게는 약 20kg정도 나간다. 기계라 하기에는 좀 어색하고 기구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이 기계는 합판,유리,조작기계 등으로 짜여진다. 물론 주인공은 금속제 구슬이다. 일본인들이 다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기계를 만들려면 먼저 베니어판 열한 겹자리 합판이 있어야 한다. 베니어판은 1830년대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베니어는 보통 1.5mm짜리가 사용된다. 합판이란 말은 판을 합쳤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베니어 몇 개를 겹으로 붙인 것을 말한다. 1907년 아사노 요시지로 라는 사람이 합판의 제조에 성공해 대중화되었다. 합판위에 못을 박고 구슬을 돌리게 했던 것이며 일본의 유리는 1909년 이와자키 야노스케의 아들이 처음 생산하였다. 유리를 초자라고 했으며 1907년 아사히 초자회사를 설립 투명판 유리를 제조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파칭코기는 제작이 어려웠다. 목재, 못, 등이 군수품 목록에 들어가 사용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6일 '사치품등 제조판매제한규칙'이 1941년 8월 30일 '금속류 특별회수령'이 각각 내려져 파칭코기 제조는 금지되었다. 기존에 있던 핸들과 못까지 빼가는 실정이었다. 일제는 1945년 전쟁에 패하자 강제 징용했던 조선인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 나고야의 군수공장에서 쓰던 볼베어링은 처치 곤란할 정도 였다. 이때 봉급대신 베어링을 대신 받은 이 베어링을 어디 써먹을 데가 없었다. 어린이들이나 좋아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판자에다 못을 박고 그사이를 구슬이 구르게 하는 기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외국에서 들여온 것의 약식 개량형이었다. 이것이 태평양 전쟁시 한때 중단됐던 파칭코의 재개였던 것이다. 부서진 상점 급조된 구멍가게에 파칭코 가게는 들어섰다. 거리 이곳저곳에 당구장, 커피숍, 카바레등과 함께 우후죽순같이 퍼져 나갔다. 영업시간은 아침 9시부터 밤24시가지였다. 그때 파칭코 판은 양철에 구멍을 내서 쓰는 것이었다. 유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옷을 벗는 모양이다. 당시 일본의 피폐한 상황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 후 이것은 계속 개량발전되어 일본의 명물이 되었고 서민들의 사업이 되었던 것이다.② 일본 파칭코의 특징먼저 우리나라를 보면 카지노와 도박장이 있다. 그러나 일부를 빼고 아직까지 내국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현재 서울시내 곳곳에서 영업하고 있는 도박장은 대부분 불법영업이다. 따라서 이런 업소는 확률 조작의 위험이 크다. 바가지를 쓰거나 큰돈을 털리기가 십상이다. 거기에다 불량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다. 서양에도 카지노라는 것이 있지만 일본의 도박과 서양의 카지노와는 업소의 성격 등이 매우 틀리다.기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도박시설로는 '파칭코'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구슬을 이용해서 기계로 하는 것으로 일본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도박이다. 일본은 파칭코 외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도박장이 많이 있는데, 서양의 카지노와 같은 곳도 있다.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돈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거의 모든 업소에서 돈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도박장이라고해서 분위기가 음침하거나 불량스러운 곳보다는 밝고 고급스러운 도박장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관광개들고 안심하고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일본의 도박장은 자신만 주의한다면 충분히 돈을 딸 수도 있다. 잃더라도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정해진 규칙을 따르며 돈을 적게 걸건, 많이 걸건 게임을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파칭코는 일본인들에게는 돈을 따고 잃는 도박장이 아니라 여가시간을 부담없이 즐기는 삶의 휴식공간 오락장이다. 물론 파칭코에 빠져서 빚을 많이 지고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빠징코를 직업으로 삼아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만큼, 그리 확률이 나쁘지 않은 게임인 거다. 이곳에서 딴 구슬은 생활용품이나 전자제품 등으로 교환할 수 있고, 원한다면 돈으로 환전이 가능하다. 파칭코는 전자오락 같은 게임에 가깝다. 그래서파칭코 장 실내는 매우 시끄럽다. 구슬이 도는 소리와 게임이 진행되는 전자음, 마이크로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종업원의 큰 목소리가 뒤섞여 있으므로, 일행들끼리 마음대로 떠들면서 게임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곳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카지노와는 분위기가 틀리다. 다시 말해 파칭코는 오락실의 분위기와 더 비슷하다.파칭코는 업소마다 확률을 틀리게 해놓았다. 그 확률은 장기적으로는 같으나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평소에 잘 안 터지는 기계는 터질 때 주로 큰 것이 터져 많은 돈을 딸 수 있다. 반면에 평소에 자주 터지는 기계는 한번에 딸 수 있는 돈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카드식 기계보다 코인식 기계가 확률이 적은 대신 배당이 놓은 기계이다. 카드식과 코인식이라는 것은 구슬을 구입하는 방법을 말하는 거다. 기계 앞에 앉아 직접 백 엔 또는 5백 엔 짜리 동전을 넣으면 구슬이 나오는데, 그 구슬로 게임을 하는 것이 코인식이고, 자판기에서 카드를 구입하여 기계에 카드를 꼽아 구슬을 나오게 하는 것이 카드식이다.파칭코를 살펴보면 기계에는 많은 구멍들이 있는데, 그 중 그림을 회전시키는 구멍 외에 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구멍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림을 회전시키는 구멍은 빨간 플라스틱으로 좁은 V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튜울립같이 생겼다고 하여 일본인들은 '전튜'라고 부른다 전은 전자를 뜻한는 말이고, '튜'는 튜울립의 앞 글자를 딴 거다. 대부분 그 구멍은 중앙의 액정 화면 하단에 위치하여 찾기에 별 어려움은 없다 구슬을 발사하는 손잡이는 세게 돌릴수록 구슬도 세게 발사가 되는데, 그 힘을 조절하여 '전튜'로 구슬들이 들어가도록 조정을 한다. 손잡이는 구슬들이 잘 들어갈 수 있는 적당한 위치에서 고정해두는 것이 좋다. 게임의 승리는 '전튜'에 얼마만큼 구슬을 잘 집어넣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전튜'로 구슬이 들어갈 때마다 액정 화면의 그림들이 소리를 내며 회전을 시작한다. 그림은 10초 이상동안 회전을 하는데, 2개의 그림이 먼저 맞으면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림이 2개가 먼저 맞으면 '리치'라고 하여, 그 '리치'중에 나오는 만화 같은 그림들의 상태를 보고 '오오아타리'를 예측하기도 한다. '오오아타리'는 같은 그림들이 3개가 걸리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면 당첨을 알리는 재미있는 그림이 액정 화면에 뜨고, 그 그림이 끝나면 하단에 가로 길이 약 10cm 정도의 뚜껑이 앞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이 뚜껑은 구슬을 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다. 이 뚜껑이 닫혔다 열렸다 15회 정도 반복하면 '오오아타리'는 끝나게 된다. 만일 '오오아타리'가 끝났는데도 뭔가 불빛이 번쩍번쩍하며 음악이 시끄럽다면 이것은 기계가 확률 변동에 들어간 거다. 확률 변동이란 일종의 보너스와 같은 것으로, 터지는 확률이 평소의 10배 정도로 높아진 거다. 그리고 확률 변동을 할 때에는 전튜에 구슬이 하나 들어갈 때보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보너스 구슬이 나와서 거의 구슬 소모 없이 진행이 되므로 100% 다시 오오아타리가 걸린다고 보면 된다
    인문/어학| 2002.01.13| 4페이지| 1,000원| 조회(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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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만화] 일본만화 평가B괜찮아요
    1. 만화(漫畵)(1) 일본 만화의 역사일본 만화는 이미 19세기말에 영국 만화 잡지 의 일본판이 나올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일본 만화의 역사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오사카의 의대생 데즈카 오사무에서부터 시작했다. 특히 데즈카 오사무의 에서부터 현대일본만화가 출발했다고 한다. 데즈카가 학생 신분으로 그린 은 깔끔하고 귀여운 캐릭터, 영화적인 연출 방식, 탄탄한 스토리 등 그때까지의 만화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을 한꺼번에 보여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가 등장하는 1950년대는 ‘데즈카의 시대’였고 그 시대에 오늘날 일본 만화의 확고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단정하고 착하고 귀여운 주인공들이 펼치는 밝은 ‘데즈카 풍’의 만화의 전성기는 196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1960년대가 되어 일본이 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데즈카의 만화를 본 세대가 점차 청년이 되어가면서 일본만화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동경 올림픽, 베트남전, 한일협정, 전공투 학생운동의 격동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1964년 9월 일본 예술 만화의 중요한 보루인 잡지 가 탄생하였고, 12월부터 이 연재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만화는 이제 이야기를 가진 ‘극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이러한 극화가 일으킨 현실적인 만화의 바람은 일본 만화의 커다란 줄기의 하나인 로봇 만화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68년 소년 만화에 에로틱한 코메디를 그려 일본 전역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나가이 고는 다음해부터 새로운 로봇 ‘마징가 Z’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가이 고는 “그때까지 로봇 만화는 모두 아톰 같은 휴머노이드이거나 철인 28호 같은 리모트 컨트롤 로봇이었다.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고 싶었다. 자동차처럼 타고 다닐 수 있는 로봇을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하였다.마징가 Z는 디즈니 풍의 귀여운 소년 이미지의 아톰, 기사의 헬멧을 쓴 유럽형의 이미지였던 철인 28호와는 달리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대단히 일본적인 캐릭터였다. 극화에서도 은근히 드러난 민족주의적인 감수성이 마징가 Z을 통해 소년들의 무의식까지 자극하기에 이르렀고, 새로운 로봇 장난감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나가이 고가 장난감 회사의 부탁으로 변신 합체 로봇의 원조격인 ‘게타 로보트’시리즈를 만들면서 일본 만화는 본격적인 캐릭터 산업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런 식의 거대 전사 로봇 장르는 ‘건담’ 같은 리얼 타입 로봇이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1960년대 중반 의 100만 부 발행 시대에 접어들고, 이후 청년 잡지가 창간되면서 만화는 일본인들에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극화적인 표현은 거의 모든 장르의 만화에 등장하고, 가오사끼 노보루의 , 치바 데츠야의 같은 극화풍의 스포츠 만화 붐이 크게 일었다. 전문 스토리 작가와 만화 프로덕션 체계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때부터이다.일본 경제가 어려움에 빠져들자 만화 출판사들은 스포츠물에서 벗어나 학원이나 일상 생활을 소재로 하고 꿈과 개그를 위주로 한 작품들로 방향을 바꿨다. 한편, 1969년 미즈노 히데코의 를 시작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소녀만화’(우리 나라의 순정만화)는 이께다 리요꼬의 의 선풍을 일으키고, ‘꽃의 24년조’(모두 소화 24년에 태어나 이렇게 불린다)인 하기오 모토, 다케미야 게이코, 오시마 유미코, 야마기시 료오코에 의해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러한 소녀만화는 기존의 소년만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섬세한 심리적 묘사가 그 특징이었다.1970년대 들어 TV 보급이 일반화되면서 마츠모토 레이지의 , 나 미야자끼 하야오의 등에 의해 본격적인 TV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특히 이가라시 유미코의 는 순정만화의 열풍을 TV 애니메이션에까지 이끌고 왔다. 이후 청년지와 소년지의 중간인 영(Young)지가 등장하면서 만화 잡지 체계의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지고, 소녀 만화는 레이디스 코믹스, 미스 코믹스로 분화 발전해갔다.만화 제국 일본은 1980년대부터 완전한 틀을 잡고 강력한 영향력을 동아시아는 물론 서구에까지 미치기 시작하였다. 최근, 일본이 유럽, 미국, 아시아 국가에 수출하는 만화는 증가하고 있다. 대만이나 홍콩,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대규모 일본 출판업자들과의 독점 라이센스 계약하에 최신 인기 만화들이 대량으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키라’(오토모 카츠히로 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미야자키 하야오 作), ‘드래곤 볼’(토리야마 아키라 作) 등의 만화가 번역되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많은 새로운 만화가 일본에서 수입되고 있다.(2) 만화영화1997년 여름, ‘에반게리온의 종말’과 ‘모노노케 히메’(모노노케 공주) 이라는 두 개의 만화영화(애니메이션 영화)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모노노케 공주’는 1,200 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여 일본의 박스 오피스를 강타하였으며, 미국영화인 E.T(일본에서 최고의 상업영화기록을 세웠던)의 흥행기록을 깼다. ‘에반게리온’은 TV 시리즈물로 영화화되어 1995년 10월부터 1996년 3월까지 절찬리에 방영되었다. 그 줄거리는 책으로도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를 담은 CD는 불티나게 팔렸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에반게리온 현상’이라는 표현까지 생겨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는 숲에서 살고 있는 신과 인간들간의 싸움으로 숲이 파괴되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만화는 이미 영화화되어 큰 기대를 모았었다. 인간과 신의 접촉이라는 주제는 ‘미야자키’ 감독의 만화 영화인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이미 다루어진 적이 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이전의 만화 영화보다 많은 관객을 끌었으며 일본의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그 인기가 높다. 애니메이션 영화장르는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했으나 미야자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가 1988년 일본의 여러 영화상을 휩쓸면서 예술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박스 오피스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오리지날 영화장르보다 더 많이 일본에서 수출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이러한 영화들은 일본식 약어(略語)를 차용하여 ‘재패니메이션’ 또는‘아니메’ 등으로 불린다.(3) 일본만화에 열광하는 이유제17회 강담사 만화상을 수상한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라는 만화는 1997년 여름부터 미국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일본 만화가 해외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일은 수없이 많지만 연재가 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 만화의 미국 수출이 본격화 될 것 같다. 프랑스도 미국도 캐나다도 손꼽히는 만화 강국이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일본 만화에 열광하는 것일까?’미국에서는 슈퍼맨, 원더우먼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바쁜 가운데,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만화를 통해 자기들 이야기를 담아 내기 시작했다.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처럼 세계를 지키지도 못하고 대담 무쌍한 모험 활극을 펼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내 이야기’라고 공감할 만한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 가족, 형제, 직장동료들, 그들의 탁월한 스토리 메이킹 능력은 SF, 퇴마, 환타지 등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지만 아주 일상적인 소재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그 정교함은 극치에 달하게 된다. 즉 일본 만화의 성공비결은 견고한 일상성을 바탕으로 한 내용에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TV 만화영화 시청률 베스트 10에서 1위를 차지했던 사쿠라 모모코의 「지비 마루코창」이 그런 경우이다. 여의찮은 살림에 궁상의 극을 달리는 꼬마 마루코의 일상을 보면 “아, 우리도 이랬는데.”식의 묘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또한 「긴급 구조 119」는 소방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로서, 「분노의 역류」주인공이 소방수라기보다 인간의 허를 찌르며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이었다고 한다면 이 만화는 명실상부한 소방수들의 일상을 다룬 만화이다. 이 만화를 보다 보면 일본 만화의 소재가 갖는 위력에 놀라게 된다.(4) 일본 애니메이션의 가슴 아픈 성공비결일본 애니메이션의 성공 비결은 그림과 연출이 멋있는데 있다고 한다. 확실히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국 특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 움직임이 부드럽지 못하고 거칠다.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1초당 24매의 그림(‘셀화’하고 부름)을 사용하는데 반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12매의 그림밖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면을 정지시켜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그림들이 멋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서양의 미학은 끊임없는 율동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움으로 정지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움직이고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한 컷 한 컷을 보면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일본 애니메이션은 가부키, 노, 교겐처럼 ‘정지의 미학’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움직이고 있을 때보다 정지하고 있는 상태, 움직임과 움직임의 중간상태가 더욱 아름답다. 즉,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름답다.
    인문/어학| 2002.01.13| 5페이지| 1,000원| 조회(1,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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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 일본인에게있어서아시아의의미 평가A좋아요
    일본인에게 있어서 아시아의 의미일본은 지리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의 끝에 위치하고, 인종적으로도 같은 몽골리안이며, 역사적으로도 오랜 세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해 있다. 틀림없이 고대의 율령제도 등과 같은 국가제도를, 한국이나 중국을 흉내낸 것을 비롯하여 불교와 유교 등 수많은 문화를 한반도를 경유하여 받아들여왔다. 특히 근세에는 1600년부터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이 끝나는 약 300년 동안 조선 및 청나라와는 교류를 지속해 왔다. 그러나 그 관계는 운명공동체적인 상호관계와는 거리가 먼 오로지 일방적인 수용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의 아시아관은 전체적으로 우호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의 아시아 관이 크게 변화 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은 아시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메이지유신 明治維新(명치유신)·일본 메이지 왕[明治王] 때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변혁과정.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전야인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과정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선회하게 됐다. 그후 140년 정도 경과된 지금 일본은 미국의 뒤를 잇는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는데, 이는 서구세력의 침략에 위기를 느끼고 부국강병 을 국가 목표로서 내걸어 이에 매진해 온 결과 일궈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대외전략상 자주 언급되는 입아론과 탈아론이라는 두 가지 주요 입장이 일본과 아시아 간의 관계를 근간으로 해서 펼쳐졌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1. 입아론일본에서 나타난 대아시아관은 서구세력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기본적 대응 방안과 그 발전 양상에 따라 몇 가지의 다른 형태를 띄게 된다. 서구 침입을 처음 접하게 된 막부 명치 초기에는 일본이 지리적·문화적으로 아시아에 속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아시아에 속해 있는 국가들의 연대론이 대두했다. 이는 서구 열강에 대한 공포의 반사작용으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국이 영국과 아편전쟁을 벌였을 때나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이 개입했을 때, 그 영향이 일본에도 미칠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아시아국가에 공통된 점일 것이라는 견해가 아시아 연대론을 이루게 하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국가간의 연대라는 방안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해 일본의 국가적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외적인 목표를 위한 방법으로서도 제시됐지만, 일본 내에 존재하는 고루함을 타파해야 한다는 대내적인 목표를 위한 것으로서도 제시되었다.·[서구세력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기본적 대응 방안]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이 몰려오는 것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존왕양이{) 존왕론은 일왕의 고대적 권위를 복원하려던 ‘천황숭배’ 사상이며, 양이론은 당시 일본과의 통상을 기도 하려는 외세를 배격하고자 했던 봉건적 배외사상이다. 막부시대 말기에 막번(幕藩)체제의 모순이 첨예화하 고 외세의 압력으로 외국과의 통상이 불가피해지자 이들 두 조류가 서로 결합되어 정치운동의 큰 조류를 형성하였다. 를 통해 존왕론은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한편 양이론은 메이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을 살상하고 외국군과 대적하는 등 한때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그후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일본을 개화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그 기반을 잃었다.(尊王讓夷)론이고, 다른 하나는 공의여론사조(公義與論思潮)이다.존왕양이론은 서구세력의 침입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현실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토쿠가와(德川)막부의 입장이 일본의 우수한 역사적, 국가적 전통을 모멸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대신에 천황을 중심으로 뭉쳐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는 유신 이후의 민주주의적 혹은 입헌주의적 경향을 견제하는 군주적간섭주의 의 성격을 가져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서구 세력에 의해 무너지게 됨에 따라 부국강병의 주장 아래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들어 설 수 있게 하는 데 기초가 된 것이었다.공의여론사조는 여론에 바탕을 두고 정치를 한다는 관념인데, 이는 책의 수입이나 유학이나 경험에 의해 사회계약론이나 천부인권설 등이 소개됨에 따라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을 강력한 힘을 가진 혹은 높은 문명의 단계에 있는 서구와 같은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존왕양이론과 유사하나, 그 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인 측면만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내면적으로 가지게 한 서구의 정치적 제도와 사상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 상이한 점이라고 하겠다.아시아 연대론과 같은 주장들은 기본적으로 국제관계의 본질을 약육강식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과 그러한 기본적 인식 위에서 일본의 문명화라는 이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연대론과 병행하여 일본 내에서는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에 대한 멸시관도 함께 형성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서양의 기계문명에 착안하여 그것을 적절하게 받아들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문명화를 추구하는 일본이 아직도 고루한 틀을 벗지 못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침략이 아닌 제휴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게 하겠다는 입장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시아 국가간의 연대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서양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는 일본은 독립하여 동양에 한 기축을 이루어, 서양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경계하게 하고···벗으로 사귈 수 있되, 적으로는 꺼려야 할 나라로서의 일본을 인식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다. 후쿠자와의 주장은 아시아 연대론에서 탈아론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대내외적인 기본 목표는 항시 우선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통치를 담당한 명치과두정에게 있어서는 더구나 서구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탈아론적 입장은 계속해서 유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Ⅱ. 전후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나는 아시아의 위치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직후의 일본은 사회경제적으로 폐허와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여러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불안정을 겪어야했다. 이러한 일본이 어떻게 현재와 같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견해 중의 하나가 요시다(吉田茂)라인 혹은 독트린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요시다독트린이란 일본의 전후 초기에 장기간 수상직을 지낸 요시다의 정책적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시다 독트린이라는 기본 골격하에서 일본과 아시아 간의 관계는 대체로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고 하겠다. 하나는 대상 또는 범위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아시아와의 관계를 논할 때의 아시아는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를 의미했지만, 공산화된 중국과의 관계가 냉전의 심화라는 당시의 국제정세상 어렵게 되자 동남아시아로 전환되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이 공산화된 중국을 대신하여 동남아시아를 자원공제지로서 그리고 시장으로서 생각하게 된 데에는 미국의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하는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로의 전환이란 중국이나 러시 아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됐다는 것을 이 역시 미국의 중재로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큰 마찰없이 마무리되었다.동남아시아와의 관계가 단순한 경제적 흐름 이상으로 발전한 것은 후쿠다(福田赳夫) 독트린이 발표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트린이 나오기 된 동기는 후쿠다에 앞서 수상을 지낸 다나카가 아세안국가를 방문했을 때 반일시위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일본의 경제적 진출에 따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대일의존도는 상승하게 됐다. 그럼에도 현지민의 불만을 사게 됐던 것인데, 이러한 불만의 누적이 다나카 수상의 동남아 방문 시에 분출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1974년 말에 대외경제협력 자문위원회 에 의한 새로운 공공원조정책의 수립에 착수하고 그 이듬해에는 해외경제협력 각료회의를 설치하였다. 1977년에 나온 후쿠다 독트린은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후쿠다 독트린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없을 것이라는 점, 둘째는 경제적 관계를 넘어선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는 상호이해를 추구하겠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세안의 활력 강화와 더불어 아세안과 인도차이나의 공산국가간의 관계에 대해 일본이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동남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점이다.후쿠다 독트린이 이제까지 소홀히 했던 동남아시아에 대해 일본이 재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면, 꾸준한 성장을 보인 일본경제의 1970년대 상황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며, 이와 동시에 그러한 자신감을 기반으로 보다 적극적인 일본의 외교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후 일본의 대외구상은 상대적인 차원에서 볼 때 대미관계 위주의 또는 서구 지향적인 방향에서 아시아의 재발견이라는 방향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입아론적인 방향으로 전이되고 있는 측면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Ⅲ. 현재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현재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APEC에서 나타나는 일본의 입장을 살다.
    인문/어학| 2002.01.17| 7페이지| 1,000원| 조회(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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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현실] 가이진
    가이진(外人).{{정의 : 구미(歐米)의 백인외국인을 뜻한다. 아시아인은 포함하지 않으며 가이진이라는 한자표기보다는 가타카나로 표기하거나 로마자로 Gaijin'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제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다. 옛날에는 외국인을 가리켜 이진(異人)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었다. 현재 항구도시 고베(神戶)에 가면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살던 서양식 집들이 남아 있는데 이진칸(異人館)으로 불려지고 있다.1) 이진칸(異人館)에 대하여....돌아다니는 사람은 분명 일본인인데 건물들은 일본이라기보단 차라리 유럽 그 자체다. 이 지역은 바로 기따노 쬡(北野町).교또의 기따노뗌만구(北野天滿宮)를 모방한 기따노진자(北野神社)가 만들어지면서 생겨났다. 이 동네는 1867년 개항과 더불어 외국인 거주지가 조성되자 다양한 모습의 양식(洋式)건축물이 들어서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명소가 되었다. 양식 건물 사이사이로 신사는 물론 모스크와 성당까지 끼여있어 그 무렵 일본최대의 인종시장이었을 고베의 모습을 어렵잖게 회상시켜준다. 이곳에 있는 양식건물을 일본인들은 이진칸(異人館)이라 부르는데 ,실제로 외국인이 거주하는 집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전시관이나 레스토랑등으로 내부를 개조하고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점들이다.가이진을 드물게는 게토(몸에 털이 많은 야만인)라는 멸칭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오래 전부터 일본어에 있었던 가이진이라는 말은 원래는 나카마(仲間,동아리)가 아닌 사람 , 적대시 하여야 할 사람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서구의 외국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가이진은 비교적 최근인 2차대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현재의 가이진이라는 표현에도 과거와 같이 나카마가 아닌 사람 이란 뉘앙스가 들어있다.우치(內)와 소토(外),즉 안팎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외부인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인의 대인관계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2) 일본의 차별문화에 대하여...{{일본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집단주의, 대국주의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상이 모두 일본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을 부정하든 긍정하든 간에 일본에는 집단주의나 대국의식에 의해서 파생되는 사회현상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성격을 파악하는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이러한 것들에 의해 파생되는 각종차별의식으로는 민족차별, 언어차별, 문화차별, 인종차별 등으로 존재한다. 그런 차별은 생명권의 차별, 생활권의 차별, 생존권의 차별, 사회권의 차별 등으로 확산되어 매우 큰 타격과 아픔을 주며, 매우 혹독한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런 차별의식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존재하는 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차별화를 자행하고 있음에도 차별인지 아닌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의식하면서도 제도적으로 방관하고 있다는 점등이다.현재 일본에서는 각종방송 특히 라디오방송을 통해 재일 외국인을 위한 방송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각 관청, 병원, 보건소 등에서 외국인을 위해서 언어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또한 지역수준에서는 지역 볼런티어를 활용해서 일본어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영어권 즉 서구인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만 동양인을 위해서는 소극적이다. 그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일본인이 가야할 목표는 서구인들이 세워놓은 사회이며 문화이다. 동양인들이 세워놓은 사회나 문화가 아니다. 일본인에게는 언제부턴가 서양인과 서양언어를 동경하고 동양인과 동양언어를 멸시하는 풍습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외국인을 위한 통역준비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외국인에게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다. 일본에서 이(異)문화공간의 공존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문화간의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형식의 변화보다는 일본인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일본인들이 외국인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들과 평등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이질감을 가진 인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족 서비스나 각종 행정서비스는 외국인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서 제공하기보다는 그들을 잘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일본이 일본적이며 일본사회 및 일본인이 일본적인 이유다.{3) 재일 외국인에대하여...가) 일본사회에 대한 평가.국제도시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사회환경을 수도권에 살고있는 英,美人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평가는 항목에 따라 대단히 좋다 와 개선이 필요하다 로 크게 나누고 있다. 좋은 면으로는 도시의 24시간 안전성, 공중전화, 교통망, 쓰레기수거, 상품의 풍부함과 품질이 좋다는 것을 들고 있다. 한편 자연환경이나 도시경관은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즉, 공해대책이나 녹화(綠化), 공원 수 등을 필두로 건물의 배치, 길에 즐비한 전주나 노상주차 등이다. {나) 일본에서의 생활.일본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4명중 3명이다. 자신이 희망해서 일본으로 온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당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만족하고 있다면 당연히 오래 살아도 좋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대단히 불만이 있다 고 대답한 사람 중 다수가 일본어를 하고 오랫동안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일상 생활에서 일본의 관습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면 정월참배에서, 꽃놀이, 결혼식이나 피로연등에 과반수의 사람이 참가하고 있다. 선물을 증정하는 습관은 어느 나라에도 있지만 의리나 겉치레 표시로 발렌타인데이 선물이나 추석, 송년의 선물, 상업성에 치우쳐 떠들썩하는 크리스마스등에 강한 저항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다) 여가에 대한 자세.일본에 거주하는 英,美人의 입장에서 여가활동의 최대 목적은 친구나 지인, 가족과의 교류이다. 다음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자연을 즐기는 것이다. 일본인은 英,美人과 비교할 때 전체적으로 레저에는 소극적이다. 英,美人을 상회하고있는 것은 마음의 안정과 신체의 휴식, 일상생활로부터의 해방감, 이 3가지이다. 일본인이 어떻게든 일상생활에서 피로, 스트레스를 발산시키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양이나 예술을 즐기는 여유는 심신의 휴양을 얻고 나서 가능한 것이다. 여가를 즐기기 위한 환경으로 英,美人인에게는 회사의 휴가제도나 직장환경에 불만은 없지만 레저시설이나 레저활동 지원이라는 면에서 조금씩 불만이 있다. 가이진들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 중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음악감상, 외식, 독서, 비디오감상 등이다. 가정에서 푹 쉬면서 즐기는
    인문/어학| 2002.01.17| 5페이지| 1,000원| 조회(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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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한국인] 재일한국인
    재일한국인(在日韓國人)일본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 우리민족과 관련된 것으로서 재일 한국인의 차별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옛부터 일본이 한국인을 그렇게 멸시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차별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귀화인은 선진문화를 가지고 들어간 귀빈 적인 존재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 끌려간 많은 도공이나 기술자들은 조선시대의 한국에서는 미천한 신분이 많았지만, 일본에서는 벼슬을 부여받아가며 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였기 때문에 차별이 아닌 대접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1871년 호적법을 제정하면서부터는 차별이 시작되었다.◆ 재일 교포란 무엇인가?재일 교포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화제에 올라가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 보면 사실은 잘 모른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재일 교포"라는 명칭은 우리 나라에서만 쓰는 용어로, 일본에서는 "자이니치 간코쿠, 죠센징(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여기서 "죠센징"이란 단어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일본어로서 "죠센징"이라는 단어는 꼭 멸시감이 포함된 말이 아니다. 재일 교포를 "간코쿠징(한국인)"으로 부르느냐 "죠센징(조선인)"으로 부르느냐 하는 것은 부르는 사람 또는 불리는 사람의 국적이나 신념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간코쿠징"이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민족 호칭으로서 "조선"이 더 알맞다고 생각해서 "죠센징"이라고 불리는 것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간코쿠징"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똑바로 북한을 지지한다거나 "죠센징"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한만을 자기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결국 일본어로는 "간코쿠(한국)"든 "죠센(조선)"이든 자기가 쓰고 싶은 호칭을 쓰면 되는 것이다. 교포끼리 이야기할 때는 "도호(동포)"라는 말이 흔히따라서 해방 후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그대로 거기서 취직을 한 사람은 교포가 아니라 말하자면 "체류 한국인"이 되는 셈이다. 또, 재일 교포와 결혼한 본국인 이나 일본사람과 결혼한 한국인이 일본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뉴커머(new comer)"라고 부르고 이미 사는 교포와 구별을 한다.◆ 재일 한국인의 수현재 일본에는 외국인등록의 46.6%에 이르는 657,159(1966년)의 재일 한국인( 귀화인제외조총련포함) 이 살고 있다. 또 귀화인 한일 혼혈, 게다가 수만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으로부터의 밀입국자를 합치면 그 수는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오사카(재일 한국인 전체인구의 30%)를 시작으로 대도시인 도쿄, 효고, 교토, 가나가와, 후꾸오카에 살고 있는 재일 한국인수가 전체적으로 74%가 된다고 한다. 세대를 생각해보면 2세, 3세가 해마다 계속 증가해 1988년도에 전체의 90% 가까이 에 달해 세대교체가 몇해 이후에는 완전히 끝날 것으로 예측한다. 한국국적과 조선국적으로( 조선은 미 승인국이기 때문에 무국적취급)의 비율은 1971년 1월에 한일 법적 지위협정에 의한 협정영주권의 신청이 마감돼, 한국 국적취급자가 급증하여 현재 한국국적 68%,조선국적 32%이다(1987년) 출신지역은 경상남도 39.6%, 경상북도 24.8%,제주도 15.9%.전라남도 9.6%, 전라북도 1.9% 충청남도2.0% 충청북도1.8% 경기도0.9% 서울1.5% 강원도0.8%로 남한출신이 전체의 9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재일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고향이라고 말하면 자기들이 태어난 일본의 어느 지역이 생각나는 것이 보통이다.◆ "세이와카이(成和會)"란 무엇인가?일본인으로 귀화한 교포가 지금까지 16만 명 정도 있다. 여기서 "귀화"라는 것을 현상 면에서 파악하면 "일본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 해외교포는 일본 말고도 미국, 중국, 러시아 등지에 많이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 일본에서 일본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민족성을 부정하고 일본민족으로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재일 교포가 귀화하려면 한국이름을 버려야만 했다. "김"이나 "이"라는 일본사람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성이란 것은 말하자면 한사람 한사람이 갖고 있는 개성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부정당하고 일본사람임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일본사람으로 귀화한 교포들은 꼭 일본을 사랑해서 귀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일본사람들과 원활하게 사업을 하기 위해서 귀화했고, 어떤 사람은 일본에서 사는 편의상 일본사람으로 있는 것을 선택했고, 어떤 사람은 자녀들의 장래를 우려해서 미리 귀화를 했다. 그렇게 어렵게 귀화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재일 교포"로 간주되지는 않을 뿐더러, "제대로 교포로 살고 있는" 교포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귀화는 해 보았지만, 귀화를 하지 않은 교포로부터는 "민족반역자" 취급을 당하고 일본사람으로부터는 여전히 "한국 놈" 취급을 당하는 신세이다. 어느 쪽 취급도 너무나 매정하고 잔인하다. "일본사람"의 일원이 되었는데도 일본사람은 가짜라고 하고, 같은 피가 흐르는 겨레에게는 배신자라고 뒷손가락질을 받는다. 결국 귀화교포는 기존에 교포사회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본사람들은 여전히 차별을 하니 갈 데가 없어지게 마련이다. 귀화동포 자녀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 귀화동포가 얼마나 구석에 몰리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한 예이다."세이와카이(成和會)"는 그런 귀화동포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이다. 이쪽에도 갈 수 없고 저쪽에도 갈 수 없는 동포가 그 자리에서 다시 자기들의 현주소를 직시하자고 만든 조직이다. 일부 귀화동포 중에는 "모처럼 어렵게 일본사람이 되었는데 여기 와서 자기는 한국사람이라고 밝히고 왜 차별을 받는 짓을 하냐" 하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일본 속담에 "목구멍을 지나가면 (음식의) 뜨거움을 잊어버린다"란 말이 있는데, 편해지면 그 때까지의 괴로움을 잊어이냐 일본 땅이냐는 축도 있고, 한국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라는 축도 있다. 재일 교포의 민족성은 그러한 다양한 축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빠찡꼬, 불고기, 고철상지난 시기, 재일 교포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도 고생이 많았다. 직업상에서 차별이 심했기 때문이다. 소위 "일류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취직을 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동경대학이라고 하면 장래가 약속된 초일류대학이라고 사람들은 부러워하지만, 교포의 경우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동경대를 나와도 취직을 못해, 어쩔 수 없이 가업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 가업이란 교포가 사회적 차별 속에서 겨우 겨우 먹고 살아온 직업들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사람들이 하지 않는 직업들인데, 빠찡코 집, 불고기 집, 고철상 등에 종사하는 사람이 비교적으로 많다.해방 전에 군수공장, 항구 등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한 사람이 많은 관계로, 해방 후에도 그러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노가다로 돈을 모아 토목회사를 만든 운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이다.재일 교포의 대표적인 직업의 하나가 빠찡꼬 집이다. 빠찡꼬는 흔히 "슬롯머신"이라고 소개되지만, 그것보다는 핀볼에 가깝고 도박성이 있는 어른의 오락이다. 도박이 있는 곳에는 깡패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이 직업을 하려고 하지 않아, 그 빈틈을 교포들이 메운 셈이다. 일본에는 빠찡꼬 집이 굉장히 많은데 그 절반 이상은 교포가 아닐까 생각된다. 빠찡꼬 집 건물에 불고기 집이 같이 있으면 틀림없이 교포가 하는 가게이다.불고기집도 교포가 하는 대표적인 직업이다. 일본어로 "야키니쿠야(燒肉屋)"라고 한다. 불고기는 우리 나라 불고기와 전혀 달라, 간을 하고 구운 다음에 먹기 전에 양념간장에다 찍어 먹는다. 불고기 집에 가면 "김치", "갈비", "상추" 등 한국어가 그대로 사용되며 이런 단어들은 이제 일본어로 정착되어 있다. 곱창, 대창구이는 "호루몽야키(ホルモン燒)"라고 한다. 직역하면 "호르몬 구이"가 되는데, 여기서 "다. 70년대에 있었던 취직차별 소송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히타치라는 회사에 입사한 교포가 차별 대우를 받아 소송을 일으킨 것이다. 그 후로 취직차별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지금은 교포도 일본사람과 대등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 오늘날에 재일 교포가 편안히 살 수 있는 것은 선인들이 흘린 피와 눈물 덕분이다◆"왜 나를 한국사람으로 낳았어?"어렸을 때 민족적인 갈등으로 고민을 하지 않은 재일 교포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재일 교포로서 태어난 숙명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교포 어린이는 민족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본학교에 다닌다. 민족학교의 수효가 얼마 안 되는 데다가 일본에서 살아나간다면 일본학교에 다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부모들의 판단으로 일본학교에 다니게들 된다.소학교(초등학교) 때, 대부분의 교포아이는 자기가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꺼림칙하게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나도 확실히 잘 모른다. 흔히 학교에서 민족차별의 세례를 받아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지만 꼭 그 이유 뿐은 아닐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눈에 띄기 쉬운 표면적인 이유이며 사실은 일본사회가 가지는 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자신에게 반영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그래서 일본학교에 있으면 우리 민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느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역사 수업시간에 "조선"이라는 단어가 한 마디 나오면 기분이 어두워졌었다.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애는 그 단어만 나오면 나를 보고 낄낄 웃기도 하니 기분이 더더욱 어두워진다. 물론 애들 중에는 착한 애들도 있고 학교 선생님은 교포에 대해 잘 이해해 준다. 그러나, 평소에 꺼림칙해하다 보니 그런 애들이나 선생님이 긍정적으로 한국 이야기를 할 때조차 꺼림칙해져 버린다. 아이가 자신이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는 더 복잡한 고민이 될 수 있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한국사람을 놀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한테서 "너는 한국사람이다"라고 통고를 받아 자기혐오에 빠지는다.
    인문/어학| 2002.01.17| 6페이지| 1,500원| 조회(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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