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인스포팅을 읽고만일, 건전하고 성실한 삶을 살고 싶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내꿈을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어떠한 방법을 선택할까?만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에 염증이 생기고, 생활이 무의미 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게 될까?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마음 한구석에 염두해 두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군대에 있을 때 난 이러한 것들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었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 교육, 작업들 이러한 생활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물론, 탈영, 자살 같을 나쁜 생각도 많이 했었고, 이러한 현실속의 고통을 몰래 술로써 위안을 받은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어느정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2년 동안만 이라는 큰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평생 내 꿈도 무시된 채 이러한 무의미 건조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면 나도 미치광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솔직한 심정을 이 영화를 빌려 말하고 싶다. 조금은 건방지고, 말도 안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형식적이고 눈에 뻔히 보이는 말로, '트레인스포팅'이라는 나에게 잊혀지지 못할 영화를 대하기 싫다. 지금까지 살아온'내 삶'을 한편의 영화로 생각하고 '트레인스포팅과' 비교하며 무언가를 진실되게 느끼고 싶다. 그래서 이 감상문의 제목을 '영화대 영화'로 정했다. '트레인스포팅'에서의 주인공인 렌튼은 '마약의 환각과 섹스의 쾌감의 중독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다. 최상의 '쾌락을 제공하는 마약에 깊게 중독돼 있는 청년 렌튼은 이런 삶을 벗어나보려는 욕망도 가끔 느끼지만 이것을 밀고갈 만큼 야무지지는 못하다. 불만은 많되 그때그때 떠랐다가 흩어지고, 대개의 시간은 마약에 취해 있거나 마약을 구하는데 다 사용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들이다. 이들에겐 오히려 정상적인 평범한 삶 자체가 극도의 고차원적인 삶처럼 느껴지고 오직 마약과 섹스만이 전부인 듯 보인다. 그런데 이 친구들중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다. 바로 벡비라는 폭력과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역할인데, 주인공인 렌튼을 돋보이게 한 악역이다. 우리에겐 아주 생소하고 민감한 마약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영화를 젊은 영화라고 본다. 전반부에 주인공이 경찰에게 쫓기는, 국내 음료수 CF에서 봐서 익숙한 장면에는 어떤 폭발적인 에너지와 스피드가 느껴진다. 이러한 속도감은 사회의 속력을 거슬러, 정반대로 내달리는 그들의 인생을 반증하는 사례가 된다. 즉 그들의 삶의 방향은 현실의 반대편을 향해 가속으로 치닫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것이다. 또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호감이 가는 영화이지만, 부모님은 싫어하실 영화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젊은 영화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고 주체하기 어려운 정신적 갈등과 고민 끝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이는 젊은이들이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독과 방황과 일탈행동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안정된 삶과 질서를 바라는 중산층의 인생관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 이는 주인공인 렌튼의 주문같이 화면에 깔리는 독백("인생을 택해라, 직업을 택해라.......)은 '나쁜놈'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선언문을 읽는것같다. 이 영화가 다른 마약을 다룬 영화와 크게 다른점은, 마약과 섹스, 돈을 등장시키면서도 윤리의식을 주입시키는 영화가 아니라,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독특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약과 탈선은 나쁘니까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만든 영화였다면 아주 식상한 영화이었을 것이다. 대신 수 없이 많은 삶의 방식중 선택은 이 영화를 본 우리들이 하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친구들을 배신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어서 황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주제와 무관할 것 같은'아기의 죽음'은 의외로 큰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아이의 죽음' 그것은 그들의 후세에 대한 또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절망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아기가 그들이 마약에 취해있는 동안 죽었다. 그것은 마약중독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익명의 중독자들, 모두의 미래와 전망에 대한 절망적 사망진단서의 상징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러한 나락으로 빠져든 현실엔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약 현대의 거대한 문명속에서 한낱 나약한 개개인에 머문 젊은 세대가 빈틈없이 보이는 현실앞에서 어떠한 존재가치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면, 그가 찾을 곳은 어디인가? 이런 점에서는 이들이 행하는 일탈행동들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영화 초반부터 중반까지 보여지는 마약에 중독된 이들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참혹하다. 렌튼이 경험하는 초현실적 환시-변기속을 헤엄치는 장면, 마약에 취해, 땅속으로 꺼지는 자신을 체험하는 장면, 이것은 환각효과가 주는 영화적 상상력이전에, 렌튼이 현실로부터 탈출해서 비현실세계에서 위안받으려는 바램의 변형일 것이다. 감독은 마치 마약을 경험해본 사람처럼 능숙한 솜씨로 관객에게 마약 투여시의 환각적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생히 표현했다. 아예 변기 안으로 들어간 렌튼이, 수면 위로 영롱한 빛이 반짝이는 깊은 바다 속에서 약을 찾아 건져올리는 모습은, 처절하리만큼 약에 집착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마약이 주는 환상의 세계와 그만큼 암담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은유한 부분이다. 영화만큼이나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음악 때문이다. 랜튼이 변소로 빨려 들어갔다 나오는 장면에서는 마치 아이가 엄마뱃속에서 잉퇴될때의 신비로운 음악이 한 몲을 한다. 또한 첫 장면부터 깔려 나오는 이기팝은 처음부터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해 준다. 후반부로 가면 렌튼은 어렵사리 마약에서 손을 떼고 꿈에 그리던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정상인이 되길 꿈꾼다. 렌튼은 사회가 지향하는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삶에 매료되어 배신을 감수해가며, 세상의 질서에 동참을 하게되는 것이다. 렌튼의 돌연스런 배신은 쓰레기 같은 동료들에 대한 그의 혐오와 무시에서 비롯하지만, 정상적인 삶을 살기위해 갖춰야하는 물질적인 조건, 즉" 새 생활을 할 임대아파트, 멋진 정장, 커다란 tv ,시디플레이어"를 갖춘 정상 궤도에 편승키위해, 그는 천연덕스럽게 배신을 결행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마지막 렌튼의 얼굴이 희미하게 클로즈업되는 장면이다. 친구를 배신하는 것임에도, 끊임없이 정당화 하면서 돈가방을 들고 나오던 그 모습. 처음엔 굳은 표정이었는데, 서서히 배신의 성공을 만끽하는, 마지막에 씩 웃는 그의 모습에서 영화의 전부를 보았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결국, 그는 비교적 영특하고 악의 없는 배신자였던 셈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배신자가 전혀 밉지 않았다는 거다. 렌튼은 정상인으로의 삶으로 편승하려고 뛰어들지만, 결과는 낙관할수 없는 처지다. 왜냐면, 그의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다짐의 결과를, 우리는 이미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부적인 부분이지만, 이경미 교수님의 말씀에서는, '트레인스포팅'은 섹스보다 마약의 쾌락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고 하셨다. 둘 다 쾌락을 동반하는 행위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섹스가 둘이 함께 하는 행위인데 반해, 마약은 홀로 탐닉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마약으로의 탐닉은 절대 고독을 의미한다.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상태에서 만끽하는 죽음의 쾌락이다, 결국 섹스보다 마약이 우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절대 고독을 찬양하는 것이다. 남은 에너지가 없는 상항에서, 그 절대 고독의 끝은? 물론 죽음이다. 트레인스포팅은 뮤직비디오와 같은 느낌 그리고 거침없는 대사와 완벽한 음악으로 이루어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경쾌한 선율과 리듬속에 마약에 찌든 하류층 젊은이들의 허우적거리는 현실을 담았다. 영국신사가 정장에 우산을 들고 거니는 런던의 정중함 속에 가려진 영국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신랄하게 포착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트레인스포팅'의 네 친구들을 닮은 젊은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방식대로 오늘을 살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다. 물론 그 삶이 사회적 통념에서 땅에 떨어진 밑바닥 인생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하루를 선택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인생에 매일 마침표를 찍어 나간다. 그렇지만 분명 그 방법이 틀렸음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트레인스포팅은 '이렇게 살아라' 하고 설교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수 없이 많은 삶의 방식중 선택은 당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본 이완 맥르리거의 모습은 정말 신선함 이었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듯한 그런 캐릭터가 맘에 들었다. 타락한 과거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삶을 택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인상깊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하면과 음악에 난 이 영화를 숨가빠하며 보았다. 빠른 호흡의 화면에서 곧잘 느린 화면으로 빠져 완급을 조절하면서 마약에 의한 오르가즘의 환각을 묘사하는 '트레인스포팅'의 화면 리듬에 취해 있다 보면, 나도 백수건달로 마약에 취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마약은 소재일 뿐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젊음, 폭발적인 젊음, 분노와 열정과 속도감이 있는 진정한 젊음이다. 이 영화를 본후 개인적으로 마약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음을 가끔느낀다. 충격적이고 리얼한, 많은 장면들이 편집과정중 삭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화의 마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세밀했다. 아주 좋았다. 이 수업으로 인해 좋은영화를 보게된점. 행운이라 생각하며, 이만, 이글을 끝낸다.
광고란..광고란 무엇인가? 그리고 광고의 역할은 무엇인가? 광고와 욕망이라니, 광고와 욕망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광고가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광고는 욕망을 제조해내고 광고전문가는 욕망의 전략을 짜는 현대판 마술사쯤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사람들의 욕망에 정보를 제공해주고 이러저러한 상품들이 소비자의 만족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아려주는 소박하고 정직한 중개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광고가 인간의 욕망을 만들어낼까? 광고는 인간의 욕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을 제조해내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거울이고 스크린이다. 우리는 TV를 보듯이 광고라는 영상을 통해 자본주의의 얼굴을 본다. TV에서 뉴스를 보고 쇼를 보는 것처럼 우리는 화장품 광고를 보고 당당하게 여성의 속옷 광고등을 본다. 심지어 TV광고에까지 이르게 되면 TV의 화면을 통해 광고를 보고 다시 그 광고를 통해 자본주의의 무수한 상품들을 보게 된다.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생명이고 광고없이 자본주의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광고는 소비자본주의의 꽃이다. 광고가 상품구매자를 설득하고 소비자의 행동을 규정하는 선전이듯이 광고는 끊임없이 상품을 선전한다. 상품을 사서 쓰고 소비하라고 하는 것이 광고지 상품을 만들고 생산하라는 것이 광고가 아닌 것은 광고가 자연스럽게 생산보다는 소비를 강조하는 것과 통한다. 게다가 광고는 광고가 선전하는 상품들만 소비재인 것이 아니라 광고 그 자체가 소비재이다. 소비재가 상품을 소비하라고 선전하는 것이 광고인 것이다.보는 사람이 현실 행활에 대하여 최대한의 불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그 사회의 생활양식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활에 대한 불만이다. 이 상품을 구입하면 당신의 생활은 보다 윤택해진다고 광고는 제안한다. 다시 말하면 광고가 불러 일으키는 물안은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다. 광고는 소비자가 현재의 자연스런 생활에 최대한의 불만을 느끼게 한다. 광고에서 먼 유럽의 해변가에서 헤엄치는 유쾌한 모습을 광고가 선전할 때 광고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그 바다에서 몇 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현재의 현실에 불만을 갖게 된다. 광고는 그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행복의 결핍을 충족시켜 주겠다고 약속한다. 광고에서는 그 약속이 실현되든 실현되지 않든 아무 관계없다. 광고가 목적으로 삼는 것은 끊임없이 불만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통해 불만을 가라앉힐 수 있는 대리용품, 즉 상품을 소비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광고가 자극하는 불만, 불안, 공포, 불행의 심리적 체계는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시장개발을 위해, 가치증식을 위해 가동하는 결핍, 부족의 메카니즘에 일치한다. 그런데 그 메카니즘이 만들어내는 욕구가 '거짓'욕구이고 상상의 욕구인 것처럼 광고가 강조하는 심리적 체계는 현실이 아니라 백일몽 속에 갇혀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체계일 뿐이다. 광고가 행복을 약속하고, 변신과 변화를 자극시키지만 이것들은 실제적인 변화와 변신이 아니라 상상 속의 변화와 변신일 뿐이다. 광고가 '상상의' 욕구를 창조하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가 잉여의 욕구를 만들어 내고 소비자를 창조하듯이 광고는 상상의 욕구를 만들어 내고 구매자를 창조한다.우리는 매일같이 광고이미지들을 보고 산다. 홍수처럼 넘쳐흐르는 광고이미지들은 이제 우리의 무의식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개개의 광고이미지들을 그때 그때 받아들이는데는 매우 익숙해져 있는데 반해 그것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효과,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낱개의 광고이미지들로부터 눈을 떼어 지속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 전체를 다시 생각해보면 광고 자체가 매우 이상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상의 단면 속에서는 우리가 광고를 보고 선택하는 것같지만 전체적인 과정을 놓고 보면 오히려 광고가 우리를 보고 있으며, 우리보다 광고가 더욱 능동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로 경쟁하는 무수히 많은 광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많은 광고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공통된 언어, 즉 무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키라는 제안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광고는 현재의 순간에 우리들과 접촉하면서도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은 항상 구매자들에게 그들이 팔고자 하는 상품이나 기회를 통해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사실상 어떤 사물이나 상품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아니고 그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구매자가 남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게끔 해주는 가상적인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매력적인 미래는 우리의 능동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광고의 특별한 시스템 자체에 의해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늘상 광고를 보면서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며, 정작 광고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광고가 상품이나 대상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구매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어떤 방식이다 광고가 상품가치의 실현을 촉지하기 위해서는 구매자에게 상품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의 사용가치를 검증해보기 전에 미리 그것의 사용가치가 높다는 점을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약속을 제공해야 한다. 시장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오늘날 모든 상품은 상품의 기능과 품질을 향상하여 사용가치의 객관적 약속을 촉진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구매자의 주관 깊숙이까지 파고들어 강력한 구매동기를 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광고가 주목하는 지점은 상품의 기능과 품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전달이라기보다는 구매자의 주관적 욕구의 불확실하고도 유동적인 충동의 세계다.한정된 사장 내에서 생산력이 증대되어 자본간 경쟁이 심회되면 될 수록,다시 말해서 동일한 종류의 제품들이 한 시장 내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면 할수록 상품을 구매자외 연결시키는 광고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이 때 한 회사의 제품이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타사의 제품들과 무언가 다름을 인지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광고의 기능이며, 제품간의 경쟁은 곧 광고간의 경쟁으로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된다. 이제 상품의 성공 여부는 상품 자체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에 달린 문제가 된다. 광고란 경쟁을 통해서 동일한 종류의 타사 제품을 홍보하는 광고보다 더 인지도가 높고 세련된 표현기법을 구사하게 됨으로써 표현기법상의 발전을 가져왔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제품이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타사의 제품들과 다름을 인지시키기 위해 도입된 광고의 전략적 메카니즘을 차별화라고 한다. 기호학의 성과를 광고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켜 보여준 바 있는 주디스 윌리엄슨은 이 차별화를 광고의 첫째 기능으로 꼽았다. 이러한 지적은 자본간 경쟁이 광고간 경쟁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상호 경쟁관계에 있는 제품들 혹은 광고들 사이에서 차별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광고전략의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광고는 어떻게 동일한 제품들 사이에서 특정 제품의 차별화를 성취해내며 또 그 차별화는 광고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광고는 소비자를 겨냥하여 세심하게 만들어진 기호들로 구성되어 있다. 광고의 기호들 역시 기호학에서 말하듯이 기호표시와 기호내용으로 분석해서 볼 수 있다. 광고에서 기표란 언어적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ㄷ욱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이미지까지도 포괄한다. 아니, 오히려 시각이미지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 카피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팔겠다는 명확한 의도가 없이는 광고가 들어설 이우가 없으며 이 의도를 점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제품을 생산할 리 없기 때문이다. 즉 자동차회사와 광고대행사는 제품의 다양화와 타겟의 세분화를 통해 시장을 넓히고 그러기 위해서 나름대로 과학적인 시장조사에 입각하여 자동차를 만들고 광고를 만들어낸다. 소득수준이나 소비형태, 취미, 의식구조 등을 조사 분석하여 소비자들이 느끼는 혹은 느끼고자 하는 방식에 따라 각양각색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춈망에 부채질을 하며 기존의 통념에 또 다른 통념들을 보태나가는 것이 광고이다.광고의 차별화는 개성, 새로움, 신선함 등을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그러한 차별성은 진보성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진보성은 개발되지 못한 자아를 자극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진정 개발되지 못한 자아를 자극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진정 개발되지 못한 자아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판단은 그것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냐 혹은 오래된 것이냐에 근거한다. 생각하건데 광고 혹은 광고를 만들어내는 '규격화된 지식들'역시 이와 비슷한 노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혹은 나쁜 것인가, 진보적인가 혹은 보수적인가, 합리적인가 혹은 비합리적인가 등의 가치는 차별성으로 귀결될 것이다. 동시에 그 광고가 자본의 생산 재생산에 얼마만큼의 좋은 윤활유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자본 혹은 광고가 스스로의 철학 혹은 도덕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주장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틀린 것이다.
경복궁을 다녀와서..경복궁이라... 거리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선뜻 가지지가 않는곳이며, 24년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도 가지않은 곳이다. 정령 나 자신은 가보지도 못했으면서도, 경복궁에 가는 사람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촌티나는 사람들이거나 외국인들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세계'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그리고 T.V 사극 드라마를 보게되면서 이 모든게 사실인지 직접 느끼고 싶었다. 만일 이 모든게 사실이라면, 중국과 일본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만이 진정한 유산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비록 경복궁 답사후 레포트를 쓰기 위한 목적이 있긴 했지만, 평소 교수님의 터프하고 털털하신 모습때문인지 더욱 기대가 되었다.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서 처음 눈에 보인 것은 광화문 이었다. 교수님과 함께 광화문부터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 아미산 경회루 수정전까지 답사를 하는 동안 경복궁의 규모는 왕궁으로서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답사를 하면서 친구들은 교수님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적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 나름의 답사의 목적은 많이 보고 느끼고 깊게 생각해 보자 였기 때문에 필기는 하지 않았다. 그대신 몇백년 전으로 돌아가 그 시대의 백성으로써 이곳을 견학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설명을 듣었다. 마치 국회의사당을 견학했던 중학교때를 떠올리면서 말이다.지금의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마도 우리사회의 엘리트들이 생활하는, 감히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문해서 사진찍고 음료수 마시며 담배 피우는 이곳은 조선시대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군주가 살던 경복궁이며, 백성들은 이곳을 자신과는 다른 훨씬 위대한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으로 여겼던 곳이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을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만들었고, 어떻게 관리했으며 그곳의 풍수지리적인 위치나 구조, 조경등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풍수지리적으로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은 명당이라고 한다. 그럼 조선시대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군주가 살던 경복궁은 풍수지리적으로 어떠한 곳일까?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무지한 나조차도 이곳의 위치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경복궁은 북문을 나서 산자락을 올라 내려다보면, 뒤로는 도봉에서 삼각산과 응봉을 거쳐 백악(북악)으로 내려오는 웅장한 산세가 보는이로 하여금든든하고, 앞으로는 가슴 시원하게 탁 트인 개활지로 청계천이 가로질러 흐르며 좌로는 인왕산, 우로는 낙타산(낙산)이 호위하고 있어 듣던 바대로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이는 경복궁은 웅장함보다는 주변 지세와의 절묘한 조화와 아울러 잘 짜여진 법도를 느끼게 해준다.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아온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적적히 가미시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궁궐은 지세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전체의 구성은 대부분 비슷한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궁궐의 밖은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주위에는 문을 두어 출입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것은 담장과 문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체격도 작았겠지만, 담장이 외국의 성에서 보던것처럼 높지 않은 것은 외성을 외적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교수님과 처음 간 곳은 근정전이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정전이란 임금이 신하들에게 정치적인 명령을 발표하거나 사 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아직 보수공사중이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도 많이 와있었다. 일본인들은 보수공사중인 근정전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괭장히 즐거워 보였다. 일인들에 의해 무참히 과괴되어 보수공사중인 이곳에서,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니 한국인으로써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야외수업(?)에 참여했기 때문에 떠 밀리다싶이, 임금이 주무시던 침전인 강령전으로 가게 되었다. 임금이 아무리 절대왕권을 행사했다고 하더라도 높은 연륜과 학식을 갖춘 신료들을 다루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라는 체제를 오랬동안 유지할수 있었던 힘, 즉 왕의 힘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위엄과 힘이 느껴지는 강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 정도로 강녕전은 힘이 실린 건축물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다음 평소에 관심이 많았고 기대가 컷던 교태전으로 향하게 되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표지판에는 교태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정침이다. 교태전의 동측에는 원길헌이, 서측으로는 함흥각이 이어지고 동북쪽으론 기역자형으로 구성된 건순각이 면접해 있다.' 임금의 조강지처이고 만백성들의 어머니였던 중전이 살던 교태전을 가까이에서 보게되니 강령전과는 또다른 신비하고 내적인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었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새로 지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라 경복궁 여러 전각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교태전은 강령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건축물이었다. 임금을 용으로 생각했던 시대에 임금이외의 다른 용이 중전이 사는 지붕위에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교태전 후원에는, 교태전의 온돌방 밑을 통과한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 있는 아미산이라는 작은 동산이 있다. 이름이 산이지 후원에 꾸민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아미산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악이 이어 있으며, 백악은 북한산에, 북한산은 한북정맥을 타고 백두대간으로 이어져 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그래서 우리나라 지폐에까지 인쇄 되어있는 경회루는 그 규모면이나 화려함이 경복궁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들어 매어놓을 정도로 훌륭했다. 왕의 정자라고도 생각할수 있는 경회루는 중요한 연회를 배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양녕대군이 경회루의 현판을 쓰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에게는 강령전이나 교태전보다는 경회루가 더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교수님과 견학을 하는 동안 교수님은 많은 불만을 토로하셨다. 불만의 대상은 다름아닌 잔디와 불상, 석탑, 부조 같은 것들이었다. 유교국가인 조선의 유적지에 불교문화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거 같다. 궁궐의 일부분은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고 탑 불상들이 있었다. 얼핏보면 이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기분좋은 생각으로 받아들일수 있지만, 이곳은 과거 한 나라의 궁궐이다. 더군다나 그 궁궐은 여러시간동안 우리들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으로 고난과 상처를 받은 곳이다. 과거 우리가 무능력해서 이곳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유교국가의 궁궐에서 만나는 불교문화의 어색함'이라는 꼬리표가 달리지 않도록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 할것이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는 성격 때문에 교수님과의 답사를 마친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각 층별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주의깊게 본 것은 지하 1층에있는 불교조각실이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불교조각품들이, 보는이로 하여금 조선이 불교국가라를 착각이 들게할 정도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