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가해자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식민지를 겪은 한국인의 후손으로서 나는 원폭투하를 비롯한 일본에 대한 처벌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알고 있던 건 거기까지였다. 일본은 가해자이며 우리는 피해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처벌은 당연하다고 말이다. 이번 수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처음 놀란 부분은 2차 대전 중의 일본의 피해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피폭자와 일본의 원폭 피해 상황이었다. 원폭투하가 이루어졌고 정당한 응징이라는 ‘사실’ 만을 알았을 뿐 그들의 피해와 상황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피해상은 ‘여름꽃’ 에서 보았듯이 실로 참담했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에게 식민지배의 아픔을 주긴 했지만 원폭투하는 분명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다음으로 전쟁의 피해는 일본 전체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모든 곳이 황폐화되고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헌데 ‘여름꽃’에서 보면 여행 중에 피폭된 사람이 있듯이 모든 일본인과 일본 영토가 전쟁의 암흑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토지수탈, 위안부, 강제징용 등 온갖 억압과 핍박을 받고 있었다.’ 고 알고 있었다. 헌데 우리의 피해상들 중에는 위안부를 비롯해서 실은 피해가 아닌 자발로 움직인 부분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철저히 묻힌 우리의 과거였다. 이에 더 나아가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들은 누구나 다 일본인들에게 억압받고 당했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고 있지만 어쩌면 2차 대전 중 일본 전체가 전쟁의 어두움에 뒤덮여 있지 않았던 것처럼 식민지 하의 조선도 한반도 전체가 식민 지배의 암울함으로 뒤덮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생각을 해 본다.이처럼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바와는 많이 다른 사실들을 접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왜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내 생각과 여러 도서를 참고하며 내린 결론으론 교육이 그 원인이었다. 단순한 교육이 아닌 ‘민족주의적인 교육’ 에 의해서였다.교육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국가나 민족에게는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교육을 통해 한 사람을, 한 국민을 원하는 방향으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지의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일본에 대한 부정적이고 단편적인 모습들만을 일본의 모습으로 보여주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한민족의 단결을 촉구하고 자극하는 민족주의적인 교육을 해 왔고 우리는 받아 왔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개인의 견해와 비판적 사고는 제외된 채 상당히 편협된, 여전히 일제 식민지하에 있는 국민처럼 민족주의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으르렁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60년 동안의 교육의 결과이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당하지 않기 위해선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뭉침은 애국심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애국심의 근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결국 민족주의적 교육에 의해 자 ? 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아닌 자국이 옳다는 시선만을 갖게 되고 일본에 대해선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미지화된 단면들로만 보게 되며 그것만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일본의 경우는 어떠할까.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은 패전이후 우리와는 다른 교육을 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상에 의한 피해를 전쟁을 통해 경험했고 이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 나라를 위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중시하는 교육을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애국심은 전쟁 중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애국심에서 애기심(愛己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기에 현재 독도나 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일본의 다수가 아닌 여전히 민족주의적 사상을 갖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다.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현 한일관계를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가 열변을 토하는 대상은 전(全)일본이지만 실제 대다수의 그들은 교육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일에 관심이 없어진 사람들이고, 사실상 일본 내 소수의 우파들과 대한민국이 옥신각신하는 재밌는 상황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교육을 통해 현재 서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된 한일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두 가지 관점을 통해 이러한 한일관계에 대해 알아보자.우선 두 관점은 모두 한일간의 상호이해와 협력을 진정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 과정과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첫 번째 관점은 현 우리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어느 정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입장이다. 요점인즉, ‘한국과 일본의 공존은 실로 필요한 것이지만 한국은 언제나 일본에게 당해오며 관계를 유지해왔다. 왜냐하면 여러 모습을 가진 일본을 하나의 일본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속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전략적 대응책을 마련하고 일본보다는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서로의 화해와 협력을 꾀해야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다.두 번째 관점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되짚어보면 결국은 피장파장이다. 민족주의적 교육에 의해 우리 안에서 우리가 감춘 우리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들도 있으며 우리가 피해 입은 만큼 남들에게 피해를 줬고 그들이 피해 준만큼 그들도 피해를 입었다. 누가 더 착하네, 깨긋하네라고 말할 수 없는 오십보백보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소모적인 잘잘못 가리기는 그만하고 서로 간에 이해와 더욱 활발한 교류가 필요한 때이다.’ 라는 다소 파격적이라고도 느낄 수 있는 생각이다.
한민족의 중앙아시아 이주의 배경과 과정에 관한 고찰1.머리말오늘날 한인들은 약 500만 이상이 문자 그대로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바로 그 시작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때부터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면하기 위하여 각지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비록 당시의 조선왕조가 국경을 봉쇄하고 이민의 물결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이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한인들이 이민의 장소로 쉽게 택할 수 있는 곳은 중국 만주 혹은 러시아의 연해주였다. 강 하나만 건너면 쉽게 국경을 넘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역의 인구가 희소하고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토지가 풍부하다는 점이 이 지역으로의 이민을 가능하게 하였다.한민족의 해외 이주가 이같이 대개 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자발적인 것이었음과 달리 정치적인 이유로 강제로 이주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러시아의 한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 중에서 중앙아시아의 한인들과 사할린의 한인들이 아직도 강제이주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물론 전자는 소련의 책임에 기인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일본의 책임에 기인한 것이다.오늘은 주어진 제목대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현재와 같이 거주하게 되었는지, 또 현재 당면한 문제들은 어떠한 것인지 등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2. 강제 이주 이전 한인의 중앙아시아 이주강제 이주 이전 중앙아시아에 얼마만큼의 한인이 어느 경로를 거쳐서 정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 잘 밝혀져 있지 않다. 한인들이 극동방면으로 진출한 후 서진을 계속하여 유럽 러시아에 정착하게 된 만큼 다시 이와 유사하게 1910-1920년대 사이에 한인들이 러시아 전역에 걸쳐 거주하게 되었고 이 무렵에 아마 극소수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 쪽에도 거주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된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통계로는 1926년에 조사된 것이며 이 조사에서 현 카자흐공화국의 아크모린스크, 세미팔라탄스크, 시르다리아에 모는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192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극소수의 한인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인들의 이민 가능성이 검토된 것은 1930년의 일이다. 1930년에 소련은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1625명의 한인들을 이주시키는데 이 때 1455명은 하바로프스크 근처로 170명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졌다. 이 중에 431명에게는 강제적인 이주조치가 실시되었다고 하니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는 이 때가 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이 당시 실험적으로 한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이주되어 영농의 가능성이 검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정치적인 범죄자로서 이주된 것인지, 혹은 그야말로 실험적으로 집단이주를 염두에 두고 실행된 일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1928년부터 극동에서의 한인의 강제이주가 실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강제이주의 후보지로서 물색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질 수가 있다. 이 방면에서의 조사가 진행될 필요가 있다.3. 1937년 강제이주이제 1937년 강제이주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7년 강제이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강제이주가 이미 1928년부터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강제이주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한 점이라는 것을 밝혀둔다.이 점을 잠깐 언급하는 것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현재는 1937년 강제이주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료에 입각해 보면 제정러시아 시기는 차치 하고서라도 소련은 1922년 극동지방에서 일본군이 철수하자마자 내전의 협력자였던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고 하였다. 한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그리고 아직은 소련이 이주계획을 실현시킬 여건이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은 소련당국이 한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몇 년 지나지 않아서 1926년 전연방소비에트집행위원회 간부회는 한인들에 대하여 강제이주의 기본적인 원칙을 마련하였다. 그 요체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북위 을 것이다.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나 왜 이 강제이주정책이 시행되었는가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연구가 실증적인 자료를 통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먼저 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은 첫째로는 러시아-소련정부의 일관된 정책, 즉 한인들을 한-러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려는 한인고립화정책의 일환이었음은 문명하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비교적 소수이기는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어있다.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공산당이 집권한 소련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은 늘 안보상의 이유로 인하여 한인들이 한국과의 국경근처에 거주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왔다. 일시적인 완화책과 강경책이 시기에 따라 달리 집행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인의 노동력 활용이라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러시아의 국경확보라는 정치 안보적 목적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때 한인들은 언제나 추방의 위협을 받았다. 한인들을 극동지역 특히 국경근처에서 추방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반복이 되었던 바 이는 러시아 시절이나 소련시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길게 보아 한인들의 주거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상존 하였다고 할 수 있다.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37년의 독특한 국제정치적 환경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이는 극동에서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소련은 극동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1929-30년에도 일본과 소련은 국경충돌을 경험한 바가 있고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은 소련으로서는 상당한 안보상의 위협이 되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극동지방에서의 한인들의 존재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인들은 당시 국가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신민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국과 내통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이 자국의 국경 내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다고 생각될 수 있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연해주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자국의 정책수행에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될 수 있다.말하자면 이는 극동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함에 있어서 소련과 일본 당국 사이의 일종의 이해관계의 일치에 입각한 묵계 내지는 밀약이 성립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가능성을 던져주는 것이다. 소련에서 일시에 대거 한인들을 추방함에 있어 민감해야 할 일본도 당시에 이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도 이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여하튼 아직까지 뚜렷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의 외교적인 입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관련문헌을 분석한다면 이러한 방면에서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4. 이주경로와 과정1937년 한인강제이주는 1937년 8월 21일 소련인민위원회와 소연방공산당의 '극동지방 국경부근 구역에서 조선인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No.1428-326cc)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스탈린과 몰로토프에 의하여 서명된 이 문서에 의하여 한인이주는 1938년 1월 1일 이전까지 즉 약 3개월 이내에 이주를 완료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강제이주의 집행은 내무인민위원회의 예조프가 담당하였다. 예조프는 하바로프스크내무인민위원국 책임자 리슈코프가 이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이주를 11월말까지 완료시키도록 하였다.이주는 몇 단계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제 1차는 8월에 시작하여 9월 21일 까지 진행되었다. 일차 이주의 목표는 주로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시급히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카자흐로 21296명, 우즈벡으로 30003명, 총 10369가구 51299명이 일차로 이주를 완료하였다. 제 2차 이주는 극동지역의 전역의 한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9월 2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사업이 시행되었다. 이렇게 하고서도 잔류된 한인들은 캄차트카, 오호츠크, 특수이주민 등 약 700명이었는데 이들도 11월 1일까지는 이주예정으로 이들을 실은 열차가 11월 15일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하였다고 예조프에게 보고함으로써 극동의 한인은 모두 제거되었다.사할린의접적 희생자는 1만 5천 정도는 될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18만이라는 이주민 수를 감안하면 이 희생자수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 지 짐작할 수 있다.한인들의 희생은 단지 생명과 재산의 손상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한인들의 심리에 뿌리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1937년 강제이주는 한인들의 외상(trauma)이 되어서 한인들을 짓누르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한인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서로와 친해지려는 노력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공연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도적으로 민족적인 언어, 풍속, 사고를 부정하면서 살아야 했던 한인들의 존재는 자기정체성에 말할 수 없는 손상을 초래하였다.5. 소연방의 붕괴와 한인의 분산1953년까지 한인들은 갇혀있었지만 스탈린의 사망 이후 해빙기가 도래하면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부터의 이민(emigration)이 시작되었다. 한인들은 그동안 죄수처럼 거주지를 제한받으며 갇혀 살다가 삶의 터전을 새로 개척하기 위하여 혹은 교육을 받기 위하여 타지역으로의 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이주는 기본적으로는 극동지역으로 재이주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옛 연고지인 극동지역은 여전히 한인들에게는 금지된 땅으로 남아있었으며 대개의 한인들은 유럽 러시아 지역의 도시로 이주를 시작하였다. 비록 거주지 제한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공산치하의 한인들은 기본적으로 거주이전의 제한을 받아서 자유롭게 이민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그러나 정치적 조건의 변화로 타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1945년 북한정권의 성립과 남부사할린(카라후도)의 소련편입은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에게는 또한 타 지역 진출의 기회였다. 북한정권의 창설자로서 그리고 새로이 소련령에 편입된 사할린 잔류 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이 파견되었다.한인들이 중앙아시아를 떠나 다시금 극동지역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그 결과로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日本 武士道 精神의 現代的 意義{目 次. 국문초록Ⅰ. 머리말Ⅱ. 일본인의 특성1. 일본인의 도덕적 관념2. 일본인의 公윤리3. 忠·孝·善·義理의 의미Ⅲ. 무사도의 성립1. 사무라이의 신분2. 사무라이의 윤리 및 삶의 태도Ⅳ. 무사도정신의 사상적 배경1. 士의 의미2. 禪과 무사도 정신3. 朱子學과 무사도 정신Ⅴ. 무사도 정신의 현대적 의의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국문초록일본은 20세기에 들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 이러한 급속한 발전의 배경에는 일본인들의 정신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무사도 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 다. 사실 무사도 정신은 전통적인 그들 사회에서 중추적 기능을 해온 무사계급들의 행동규범이 나 삶의 철학으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세월을 거치면서 무사도 정신은 무사계급 만을 위한 싸움기술로서의 존재적 가치를 뛰어넘어 일본정신의 대표적 정신개념으로 자리를 잡 았다. 사실 무사가 사라진 시대에 더 이상 무사도 정신은 생존의 수단이나 종족보존의 수단으 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사도 정신에서는 육체뿐만이 아닌 정 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체 일본인들의 公윤리, 도덕적 관념의 잣대를 무사도 정신에서 찾음 은 일반적인 사실이다.현대 일본사회에서 무사도 정신과 무도수련의 중요성은 수련자가 수련을 통하여 신체적인 발달 을 추구함은 물론 정신수련을 통하여 진정한 나를 발견하며, 나와 남과의 관계를 돌아볼 줄 아 는 사회성을 획득하는 것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주먹이나 칼을 휘두르는 봉건주 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일본인들은 옛날 무사들이 칼을 잡을 때의 진지한 자세와 삶 의 철학을 무사도 정신을 통하여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정신을 통하 여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미래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한국사회에서의 대표적인 정신사상을 선비정신에서 찾는다면 일본사회에서의 정신적 구심점은 바로 무사도 정신인 것처럼 무사도 정신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사실을 쓰는 또 하 나의 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일리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어김없이 공존한다. 이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세로와 가로의 줄이 되어있고 이들은 모두 진실이다. 칼도 국화 도 똑같은 그림 속의 일 부분인 것이다. (Ruth Benedict, 1991)흔히 일본인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칼로 비유하는 경향이 있으며 김용운(1994)은 그의 책 한국인과 일본인 에서 칼로 벤 자리가 직선이 되듯, 칼로 규제된 사회체제도 선이 분명하 다. 일본문화는 직선의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로로 가른 선이 엄격히 지켜지고 위계질서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히는 행위는 용납이 안 된다. 인위와 자연의 선은 본질적으로 다 르다. 자연의 세계에는 선은 있으나 직선은 없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생활태도는 일반 가정에서 아이를 기를 때도 적용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반 일본 가정에서 아이를 기를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절도 있는 마음가짐이다. 무슨 일에나 절도를 지키고 확실하게 한다. 부끄러움을 알라 도 중요한 덕목인데 단정하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가르친다. 절도 법도, 즉 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다는 사상이다.(김용운, 1994) 이러한 일본인들의 직 선적 방식의 사고체계 및 삶의 방식은 칼을 소중히 여기는 칼의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 다.한편 일본인은 대개 전통을 존중하고 권위에 복종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진 외국 문명을 주동적 으로 섭취한다. 또한 일본인은 대개 충성심과 단결력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大勢에 기민하게 적응한다. 일본문화의 독특한 성격도 봉건성과 현대성, 계급관념의 구속과 상무정신의 원시적 야성 등이 混在 하면서도 서로 모순된 이들 양면이 신기하게도 뒤엉키지 않고 정갈하게 나타 나는데 있다. 이러한 모순적 성향은 20세기의 산업사회에 적절하게 적용됨으로써 일본이 선진 산업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1. 일본인의 도덕적 관념쿠로즈미 마코토(19 國家를 의미하며, 私는 자신을 상징하는 1인칭 을 의미한다. 반면 중국에서의 최고의 公은 天, 公平, 平等을 의미하며, 私는 利己, 偏私를 의 미한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일본의 公私는 領域的, 限定的 인데 비 하여 중국의 公私는 原理的, 道德的 이라고 할 수 있다.(동양사상과 사회발전, 1996)溝口雄三(1996)는 일본과 중국의 公개념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천황과 국가를 최 대의 公으로 하는 일본의 특수한 公개념은, 자국의 富國强兵化를 절대시하는 편협한 국민 국 가 의식을 창출했다. 이것은 중국의 孫文이 公利 즉 인류보편의 평등과 공정을 표방하고, 모 든 민족의 평등과 평화공존을 호소하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동양사상과 사회발전, 1996) 이는 곧 일본인의 公개념은 중국과 비교해볼 때 자신이나 自國만을 위한 편협하고 이기 적 개념임을 의미한다.이러한 일본인들의 公개념은 에도시대의 封建領主制 가운데 領主를 公으로 하는 관점과 영주 에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忠의 관념이 결합하여 생긴 관념으로 개인의 일을 억제하고 公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이러한 滅私奉公의 정신이 군국주의 시대에는 천황과 국 가를 위하여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싸우는 정신으로 되었으며, 2차대전후에는 회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한편 일본에서는 孝보다는 忠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사계급의 영주에 대 한 忠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私보다는 公을 우선시 한 그들에게 있 어 公은 바로 領主, 天皇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습은 근대에 들어와 국가에의 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회사에 대한 忠으로 이어져 일본의 경제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 다. 반면에 이러한 편협한 公개념으로 인해 그들은 타국으로부터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 제동물집단이라는 汚名 또한 얻게 되었다.3. 忠. 孝. 善. 義理의 의미일본인들에 있어 忠, 孝, 善, 義理 등은 한사람에 대한 인격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으며, 다음에 士 란 어떤 종류의 큰 도끼를 가지고 부릴 수 있는 재능 있는 자, 戰士(兵士), 전문적 道와 藝를 수업한 자의 지칭, 武士의 뜻이며 道란 行 한다, 바르게 한다., 다스린다, 이끈다, 펼친다, 돕는자 의 뜻이다 라 하여 무사도란 봉건적인 집 단의 계급인 무사가 항상 갖고 지켜야할 도덕적, 윤리적 규범의 그 자체를 말한다.(김정행, 1997)1. 사무라이의 신분사무라이는 본래 일본 봉건시대에 처음 생겨난 무사계급으로 한자로는 侍라고 쓴다. 侍는 모 신다 는 뜻으로 당시 영주와 같은 귀인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경호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무 라이는 신분상 지배계급에 속하며 智·仁·勇을 목표로 극기훈련을 그 정신적 요체로 한다. (강효백, 1995)사무라이는 최초로 나라(奈良)시대 말기의 광인(光仁)천황 보룡(寶龍)연간 서기 770년 전후에 출현하게 되었다. 당시 황실의 실권은 미약했으며 대장원을 소유한 호족들의 세력이 발호할 무 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 보호 및 확장을 위하여 동족의 자제들과 수하들의 무장화를 통하여 무장세력을 양성화하였으며, 이러한 상설된 무장집단을 사무라이 라고 하였다.(강효백, 1995)초기의 사무라이의 신분은 귀족 수하의 노복(종)에 불과하여 농민과 함께 家人 이라 불렸으나, 헤이안조(平安朝)이후 무사계급이 발달됨에 따라 官이나 院에서 경호를 위한 무사계급의 필요 성에 따라 점차 특수한 집단으로 세력과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다.1192년 관동의 사무라이 집단은 군사권력 기관인 幕府를 설립하여 중앙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당시 법에는 郞黨을 거느리고 말을 탄 무사 를 사무라이라고 했으며,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상급무사를 사무라이라 칭하였다.1603년경 에도(江戶)시대에는 도쿠가야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사무라이 의 신분을 고정 시켰다. 법령의 내용으로는 첫째, 士. 農. 工. 商중 士에 속하는 자를 사무라이 라 칭한다. 둘째, 신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들은 죽음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눈물 은 약자에 대하여 보이는 동정심을 의미한다.사무라이의 생활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철두철미한 반성적 태도. 즉 사무 라이는 자신의 인격에 맞는 행동을 하였는가 항상 검증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둘째, 사무라이는 생활의 검소, 소박함을 중히 여기며, 전쟁에서는 사무라이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셋째, 그들에게 있어 염치를 아는 것이 최고의 도덕준칙으로, 명예가 훼손 되었을 경우 割腹 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애쓴다. 이때 목숨을 버리면서 수호하려고 하는 곳은 개인의 명예가 아닌 사무라이의 신분과 명예를 의미한다.(강효백, 1995)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정치사회학자인 Rieseman은 사무라이의 문화형태를 수치감의 문 화 (sense of shame)로 간주하며, 그들은 강렬한 감정적 색채를 띤 사회도덕과 여론의 구속력 과 집단 안의 개인의 명예를 중시한다고 하였다.전통적 일본사회의 지배계층은 사무라이들이었으며 그들은 일상생활에서의 節約과 儉素를 강 조한다. 일반적으로 지배계층이 사회의 전반적인 것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현대 일본인들의 절 약과 검소의 정신은 바로 위로부터의 행위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Ⅳ. 무사도 정신의 사상적 배경1. 士의 의미士의 의미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같이 엘리트계층을 지칭하고 있으나 한국적 의미의 士는 선비, 즉 글을 읽는 교양인을 의미하나 일본의 경우 士의 의미는 사무라이 즉 武人을 의미한다. 전통 적 일본적 관념에 따르면 무술을 뺀 다른 교양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독서를 배 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다. 겉으로는 양반이란 文과 武를 아울러 지님을 가리켰으며 또 일본 사무라이도 文武를 겸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기는 하였지만 현실사회에서 는 文과 武 중의 어느 하나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도의 정신은 무인계층의 지배와 결속 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을되었다.
【일본근대문학사】-목차(개요)-1.移行期,啓蒙期,文明開化의 小?2.??主義3.浪漫主義4.自然主義5.反自然主義(1)余裕派(2)耽美主義(3)白樺派6.新現?主義(1)新感?派(2)奇蹟派7.プロレタリア文?과 新感?派8.?後文?(1)民主主義 文?(2)無?派?作小?飜?小?政治小?명치 1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진제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고 전통적인 일본국가의 문화를 개량시키려는 운동이다. 시가와 연극의 개량운동과 함께 坪?逍?、二葉亭四迷가 사실주의를 제창하고 명치 20년대에 들어와서 이 사실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활발한 창작 활동을 전해겠다.(1)坪?逍?일찍부터 새로운 문학이론을 확립하려고 명치 1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영문학의 소양을 기반으로 정리한 문학론이 「小?神?」이다. 이것은 문학에 있어서 공리주의를 배제하고 문학의 자기목적성을 명백하게 하고 황당무개한 줄거리를 배제, 심리묘사에 치중해야함을 주장한 것으로 권선징악이 대부분이었던 기존의 문학에 획기적인 충격을 준 것으로 근대문학의 일대 지표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주의 문학이론의 실천이라고 보여지는 소설 「?世書生?質」는 시대의 최첨단을 밟고 있는 엘리트인 대학생들의 풍속과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낸것에 불과하고 ?作문학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인물의 묘사도 피상적이었다.(2)二葉亭四迷「小?神?」는, 정치를 향해있던 청년들의 눈을 문학세계로 이끄는 계기를 준 것으로 영향을 받은 한명이 二葉亭四迷이다. 그는 트루게네프, 푸쉬킨, 콘챠로프 등의 러시아 근대문학에 강하게 끌려있었지만 「小?神?」를 읽고,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것 사이에 의문을 느껴, 직접 坪?逍?를 만나, 그 시사하는 바에의해 「浮雲」의 집필에 착수하여 명치 24년에 발표했다. 당시는 그 가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지만, 근대적 자아에 눈떠 인간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주인공, 현실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소외되어 어쩔수 없이 독립해야만 하는 고뇌나 회의는 다시 말하면, 근대 지식인의인 서구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문단에서도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경향이 강하게 되고, 그 중심을 이룬 것이 硯友社였다. 硯友社는 尾崎紅葉、山田美妙、石橋思案 등에 의해 명치18년에 결성되어 「我樂多文庫」를 발간했다. 동인들은 「小?神?」의 영향을 받았지만, 형식상의 신공부와 외면적으로 자세히 서술하는데 그쳐, 「西鶴」를 지향했지만 인간의 전형을 표현하는 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표현면에서의 모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동인으로서 등이 연이어 참가해 일시적이었지만, 문단의 큰 위력이 되어 다음 세대의 문학으로의 과도적인 역할을 완수했다. 동인중에서도 가장 빨리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山田美妙로 언문일치운동에 활약하고 「夏木立」를 시작으로 「武?野」「胡蝶」등 이른바 ‘です調’의 참신한 문체와 고전적인 정서를 지닌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4)尾崎紅葉서로 경쟁했던 山田美妙에 대한 저항의식을 바탕으로 「二人比丘尼色懺悔」를 썼다. 이것은 비애감을 기초로 하여 우아한 말과 속어를 절충한 문체로 참신하고 정교한 수법에 의해서 서정성을 높이고 있다. 이윽고 西鶴의 문체에 입각하여 「伽羅枕」「二人女房」「三人妻」등을 발표해 문단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이후 신세대의 풍속을 도입한 「多情多恨」「金色夜叉」등을 쓰고, 문체에 개량을 더해 심리묘사에도 조금 보아야 할 것이 있었지만, 피상적 묘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5)幸田露伴일한의 고전이나 불서를 시작으로 근세말의 ?本등에 친숙해, 한 때 전신기수로써 홋카이도에 부임해 있었는데 20년에 귀경해 「露??」으로 작가에 입문하고 「風流?」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예술지상주의적 골격을 가진 「五重塔」을 남성적으로 웅대하고 거침없는 필치로 표현해 문단적 지위를 확림했다. 이 동양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이상주의적 문학은 여성적인 풍속을 즐겨 쓴 尾崎紅葉와 나란히, 명치 20년대에 紅露時代를 이루었다. 그 이외에 「風流微塵?」「天うつ浪」등의 사실적 작품도 발표했다. 문체는 漢語, 프랑스어를 온통 섞어 쓴 시원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학대받고 사는 당시의 여성의 불만을 구체화하고, 인생에 소극적이면서 도전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고, 그것이 아속절충(雅俗折衷)의 의고문체로 쓰여져있다. 그 중에서도 「たけくらべ」는 당시의 문단에 절찬을 더해 받은 작품으로 사춘기의 소년소녀의 미묘한 심리가 확실하게 표출되어 있다.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전반에 서구자국에 전서의 타파, 자유스런 창조적 개성의 신장, 범신론적 자연관 등이 특징이다. 일본에서는 명치 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시가와 소설이 일대 주류가 되고, 특히 森?外、北村透谷를 중심으로 하는 ‘文?界’사람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1)森?外4년간의 독일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森?外는 군의사관인 동시에 ‘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하고 외국문학의 번역과 시, 소설, 평론 등의 다채로운 활동에 의해 문학의 계몽을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早?田文?’지상의 坪?逍?와의 사이에 주고 받았던 ‘몰이상논쟁(?理想論?)’은 유명하다. 소설의 처녀작인 ‘舞?는 서구의 자유스런 공기 안에서 근대적 자아에 눈뜬 청년이 일본의 특수한 세속성 앞에 좌절해 가는 모습을 그리고, 계속해서 ’うたかたの記''文づかひ'를 가문체로 발표했다.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은 번역하면서 낭만적 심정을 잘 표현해 원작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얻을 정도였다.(2)文?界와 北村透谷명치 26년에 창조된 잡지 ‘문학계(文?界)‘는 뒤늦게 北村禿木를 지도자로 해서 島崎藤村、平田禿木、 뒤늦게 馬場狐蝶、上田敏이 참가했다. 그 젊은 정열과 자아의 각성과 확충에의 욕구는 낭만주의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北村透谷는 시인으로서 활동 외에 평론가로서도 정열적인 논조를 전개한 ’厭世詩家と女性‘’人生に相?るとは何の謂ぞ'등을 차차 발표했다. 그러나 이 낭만적인 정신은 역으로 개인을 억압하던 시대의 봉건성 앞에 좌절하고, 뒤에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비극을 초래했다.(3)심각소설(深刻小?)과 관념소설(?念小?)청.일 전쟁이후 급속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점차 심각화된 사회적 모순신비의 세계는 통속적인 성격이 살펴지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5)?富蘆花와 木下?江?富蘆花는 ‘不如?’에 따라서 일약 각광을 받은 한편, 낭만적인 자연묘사의 수필인 ‘自然と人生’로 거듭 더욱더 문명을 높이고, 시대의 정계의 내막을 여실하게 그린 ‘?潮'등 문제작을 냈다.木下?江의 ‘火の柱'는 반전운동을 중후하게 그린 작품으로 당시의 갖가지 사회악을 드러내 보였던 ’良人の告白'와 함께 칭찬받은 사회주의 소설이었다.(6)?木田??서정시인으로서 출발한 ?木田??는 트루게네프와 워즈워스의 영향아레 섬세한 자연관점과 시정(詩情)에 찬 ‘武?野'를 썼다. 그 외에도 ’源叔父‘ ,’忘れぬ人?','牛肉と馬鈴薯'등을 발표했으며, 만년의 작품은 점점 자연주의적 색체를 띠고, ‘窮死','竹の木?'등으로 과도적 위치를 보였다.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학상의 주의로, 일본에서는 특히 에밀졸라의 영향이 강했다. 자연과학적 방법을 문학에 응용시키고, 유전과 환경을 중시하는 소위 졸라이즘의 방법으로 小杉天涯는 ‘はつすがた,','はやり唄에서, 永井歌風 '地獄の花'에서 이 방법에 의한 작품화를 시도하였지만,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 일본의 특수한 사회사정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이전에 일본독자의 사소설적 자연주의가 차츰 분단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1)島崎藤村문학계 동인으로서 낭만적인 시를 발표했고 명치 30년대 중반 산문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명치 39년에 자연주의 문학의 최초 성공작이 된 '破戒'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의 모습에 자기자신의 청춘기의 각성과 좌절의 편력을 투영시키고, 사회적인 여파를 보여주는 근대문학의 가능서을 충분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러나 문학계 동인ㄴ들의 애환을 자전풍으로 그린 ‘春’이후는 자기표현의 문학에도 스스로를 몰아 넣은 작품을 쓰게 되어 '家'에서는 일본의 전통적 가족제도의 문제를 규명하고, 혈통에 속박되어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대정기에 들어서는, 자신과 조카딸과의 연애문제를 대담하게 보여준 ‘新生'에서 반향을 불렀다. 이윽고, 소화4로 해서, 중년의 작가가 아름다운 여자 제자에 대한 애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예부터 전해오는 소설작법을 타파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찾아내려고 하여 藤村도 큰 시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花袋는 사실을 사실그대로 쓴다는 ’평면묘사론‘을 주장했으며 ’生','妻',‘?'의 자전적 작품 삼부작도 썼다. 또한 지방의 어린 소학교 교사의 생활을 자연주의의 묘사로 그린 ’田??師'도 있다.(3)?田秋?硯友社의 동인이었으며 ‘新世?'등을 써서 냉정한 인생관과 객관적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작풍을 확립시켰다. 대표작으로는 ’足跡','黴','あらくれ'가 대표작이다. 암담했던 서민생활의 실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소화시대에 들어서면서 ‘??人物’등을 썼다.(4)正宗白鳥출세작 ‘何?へ'는 작가의 작풍을 농후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인생의 희망과 목적을 부정했던 주인공이 삶을 맡길만한 의의가 있는 생활을 구하면서, 목적을 볼수 없는 회의적이고 허무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5)岩野泡鳴‘耽溺'이후 자연주의 소설을 쓰게 되어 문단의 이채가 되었다. 대정에 접어들면서 발표했던’一元描?‘는 주목받아야만 하는 방법론이다.1.余裕派자연주의 문학의 주류가 되었던 명치 40년대에 그 시대 흐름에 따르지 않고 초연히 독자적인 문학을 수립한 작가로 夏目漱石와 森?外가 있다.(1)夏目漱石영문학자로 활동함과 동시에 하이쿠나 단문을 발표했다. 일본문학으로서는 적지않은 유머를볼수 있는 ‘坊っちゃん',전기 3부작으로는 ’三四?',‘それから'.'門'의 삼부작이 있으며 여기서는 사랑을 둘러싼 인간심리의 갈등을 깊에 추구하려했다. 후에 후기 3부작인 ’行人‘,’こころ','彼岸すぎまで'에서는 작품마다 잔악한 이기주의의 해부에 전념하고 죽음에 의해 中絶한 ‘明暗’에서는 부부, 친자, 연인, 친구등의 각자 인간관계에 따른 잡다한 심리를 집요하게 추구하려했다.(2)森?外낭만주의 이후, 잠시동안 문단으로부터 멀어졌던 森?外는 자연주의 문학의 발흥과 漱石활동에 자극을 받아 새로이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싲가하고 잡지‘明星’폐말한다.
신문은 하루가 지나면 역사교과서가 된다는 말이 있다. 타 언론매체와 달리 당 시대의 사건, 사고들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한 판단과 주장이 문자화되어 하나의 논조를 띔으로써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나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현재 한국은 언론이 정?재계와 함께 3대 권력의 축으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으며, 신문사가 그 첨병에 위치해 있다. 각 신문사들은 여론조성과 함께 정책 및 사회비판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이른바 조 ? 중 ? 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과 한겨례 신문이 서로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앞 서 언급한 역사교과서라는 단어에서처럼 이들 신문사는 각자의 논조에 따라 사건을 파악하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호별, 세대별 등으로 세분화 되어 각기 다른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독자층의 연령과 시대적 가치 등으로 인해 각 신문사에 대한 인식도 가지각색이다. 세간에는 크게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헤게모니를 둘러싼 각 신문사들의 논조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헤게모니를 둘러싼 이들 집단의 이해관계라든지 진실여부에 관해서는 그다지 흑백논리로 다가가고 싶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 나름의 분석과 논리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어떤 논조이든 간에 비판세력 없이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에는 반대의 뜻을 표하고 싶다.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어야 바른 정치 구현이 가능하듯, 설령 현재에는 누가 봐도 옳다고 여기는 긍정적인 정책과 시안들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상대세력’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균형 잡힌 여론조성 방향의 입장에서 지금 굳이 손을 들자면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서 굳건히 자신의 논조와 입지를 굳혀가며 다른 시각에서의 소리를 내고 있는 ‘한겨례’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최근 이슈로 떠올라 많은 이야기와 사회갈등을 낳았던 종부세(종합부동산세)나 분양가 원가공개문제에 관해서도 신문시장에서 압도적 입지를 점하고 있는 일명 ‘보수신문(조 ? 중 ? 동)’들이 이해관계에 얽힌 나머지 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약속이나 한 듯 한편이 되어 종합부동산세나 재산세 강화 등 정부의 보유세 강화 정책을 '세금폭탄', '포퓰리즘론'등의 다소 격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정부를 몰아붙이는 중에도 다른 쪽에 서있는 타자(他者)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대리인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이 그나마 한겨례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책의 시비여부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비판의 방법론에 대해 지적하려는 뜻은 없다. 한겨례 역시 조 ? 중 ? 동에 대한 비판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대안제시 보다는 자기 측 입장만을 대변하는듯한 논조는 조 ? 중 ? 동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같은 지면상에서 다른 논조의 기사나 글이 나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사실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 해 줄 수 있는 장치가 있을 때 비로소 균형 잡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