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종교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시기에 ‘믿음’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집단의 관습이나 관례, 법규와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흔히 15~16 세기의 유럽은 신 중심의 세계관이 인간 중시의 세계관으로 바뀌는 과도기였다라고 표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고 추진한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존경어린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그래도 그 시대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인 시대였으며, “믿기를 원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 개혁을 추진한 루터와 그 배경을 제시해준 에라스무스 등 휴머니스트들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에라스무스와 루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쉽게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은 휴머니스트라면 루터는 그 알을 부화시킨 종교개혁자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시대의 사람(에라스무스:1469~1536, 루터:1483~1546)이며 종교개혁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염두에 둘 때, 이 말 속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한 평가가 루터에 대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한 개혁의 핵심은 모두 초대 그리스도교 사회로의 복귀였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들은 이들의 대립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마치 물과 불처럼 도저히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관계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이분법적인 태도는 양자의 관계에 있어 차별성에만 역점을 둠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기질이나 성장과정, 국가적 배경 등 차이점을 근거로 들어 그들은 처음부터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가톨릭 진영은 루터를 변절자라고 비난하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루터를 진정한 종교개혁자로 옹호한다. 그리고 가톨릭 측에서는 처음에 에라스무스를 루터파로 간주하였으나 진보적인 정통 가톨릭 신자로 보려는 경향이 있고, 프로테스탄트 의 영역에서 상층계급에 흡수되어 귀족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르네상스 전성기의 교황청은 다른 이탈리아의 궁전과 다름 없었다. 예술가, 문인, 용병대장, 외교관 및 궁정인들이 교황주위에 모여서 지식사회를 형성하였으며 교황의 보호를 받았다. 승진에 있어서도 신앙이나 교회에 대한 봉사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지위가 더욱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점차 세속화 됨에 따라서 차츰 종교는 실생활의 배후로 밀려나게 되었고 교회의 역할은 감소되어 고립된 사상영역 속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방은 이와는 달랐다.이탈리아에서와는 달리 “북방에서는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성장한 시민들이 전통적인 상층계급에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도전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그것은 그동안 그들로부터 받아온 봉건적 압제에 대한 누적된 반감 때문”)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지적, 경제적으로 향상된 시민들은 “학문과 종교사상을 상층계급이 독점한데 대해서, 또한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을 옹호하는 교회도덕에 대해서”)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의 봉사에 따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동시에 중세교회로부터 계승되어온 스콜라의 관념적인 체계도 거부하려 했다. 한편 아비뇽 주재 교황들의 재정정책, 대분열(大分裂)의 추문,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청의 세속화와 부도덕성에 대한 격심한 충격은 북방시민들로 하여금 이미 14세기 중기부터 강력한 반교화적 감정을 유발시켜 왔던 것이다.)3. 북방휴머니즘의 특징결국 북방시민들은 비교회적인 데서 그들의 신앙의 활력소를 찾으려 했다. 즉 “보편적인 기성 가톨릭보다도 예수를 단순히 모방하는 실천적 경건의 생활을 통해서, 또한 신과의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접촉을 통해서 신앙의 내실화를 기하려 하였던 것”이다.) 종교가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이며, 사제의 봉사나 성찬식이 불필요하다고 가르친 ‘근대적 신앙운동'(Devotis Moderna)은 위와 같은 북방시민들의 종교적 요구의 전형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렇게 이탈리아의 휴머니즘을 종교적 차원으년 대륙에 건너오고 이탈리아에서 학자들과 사귀면서 학식을 높인 뒤 1510년 다시 영국에 가서 캠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우신예찬’을 써서 그 학식을 자랑하고 비상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인간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멀리 떠나 자연만을 주신으로 모시게 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권위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살리는 사랑의 세계를 이상으로 하고 국민의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관을 보이며 또, 평화와 대화를 주창하는 등 르네상스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516년에는 칼 5세의 고문관이 되어 바젤에 머물면서 루터의 성서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되는 ‘교정(校訂) 신약전서’와 ‘자유의지론’ 등을 썼는데 특히 ‘자유의지론’은 루터와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뒤 루터파의 증오와 가톨릭파의 반감에 몰려 그의 만년은 루터의 위광과 투지에 퇴색된 채 고난 속에 보내야만 했다.)에라스무스는 “그는 체질상 투쟁형이 아니었고 본능적인 방어형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같은 사람이 가지는 행동을 갖지 못하였고 끝내 휴머니스트의 이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불명예스런 출생, 약한 신체조건은 그의 그러한 기질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방어적인 즉, 비공격적인 공격이라 할 수 있는 풍자라는 문학형식을 그의 주 무기로 선택한 것도 그의 기질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실제로 에라스무스가 스스로 ‘신념’이라고 밝힌 자유에 대한 의지를 살펴보면 에라스무스의 기질적 문제가 그의 행동양식을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결코 무리한 시도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성장 과정과 체질적 문제는 그가 ‘자유’라는 형식의 직접적이지 않은 행동양식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신하였으며 자신의 자유를 무엇보다도 존중하였다. 그의 편지 가운데서 자유에의 열망과 욕구를 표현하는 대목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나는 쥐처럼 단호히 의견을 달리한다. 마치 예수는 너무 복잡한 교리를 가르쳐서 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서조차 거의 이해될 수 없거나 마치 예수의 비밀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제왕의 비밀들은 감추는 것에 이유가 있지만 예수는 가능한 한 그의 비밀들을 폭로하기를 바란다. 나는 가장 비천한 여인들일지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간들을 읽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또한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서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 뿐만 아니라 터키인이나 사라센인들에게도 읽혀지고 알려지기를 원한다.)둘째로 “예수의 단순한 철학이란 윤리적 및 심미적 생활에 대한 요구를 포함한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진실한 기독교인이란 세례를 받았거나 성유를 받았거나 교회에 가는 자가 아니고 그의 마음 깊이 내적으로 예수를 느끼며 경건한 행위로써 예수를 모방하는 자인 것이다.) 즉 “예수의 철학이란 삼단논법이 아니고 성정의 문제이며, 논쟁이 아니고 생활의 문제이며, 철학의 문제가 아니고 영감의 문제이며, 논리가 아니고 변화의 문제이며, 선하게 지음 받은 자연에 몰두하는 것이다.”)“에라스무스의 개혁사상은 성서와 그리스도적 생활의 모방을 중요시 했으며 동시에 성직자에 의해서가 아닌 각 신자의 능동적인 노력과 신의 은총과의 결합을 중요시 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매개를 배제한 신비주의(내적 종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같은 사상은 바울 ‘서신’에 그 본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비성직자주의, 개인주의적 신앙, 성서주의 등 루터의 개혁사상과 일치될 수 있으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간행위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배제한 루터의 핵심사상인 ‘노예의지’ 사상과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에라스무스의 이같은 주장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독일 종교개혁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6.루터와의 논쟁-자유의지론 대 노예의지론에라스무스의 개혁 사상은 크게 교회에 대한 비판과 성서의 연구 방법론 제시에서 당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우신예찬을 비롯한 그의 여러 구원을 얻으려면 자유의지와 함께 신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은총만을 중시하고 자유의지를 인정하려들지 않는 루터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 근거로 두가지 이유를 대었다. 첫째로 신은 절대 불의(不義)할 수 없는데, 만일 신이 자신의 능력을 보이려고 인간의 악행을 이용하였다면 결국 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모든 일이 신의 의지로만 이루어진다면, 선택권이 없는 인간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았다. 에라스무스는 은총을 중시하면서도 자유의지를 인정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서 중용이라는 외줄 타기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루터에게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포기로 비쳐졌다.)루터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신의 선물이라는 점에는 에라스무스와 같은 입장이지만, 타락의 결과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도 타락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유무는 신의 뜻에 좌우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인간을 신과 사탄 사이에 놓인 예속적 존재라고 설명한다. 루터는 선행의 기준이 은총의 개입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은총을 상대적으로 인식한 반면, 루터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파악하였다. 은총이 없는 인간 의지는 노예의지일 뿐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은 오직 악하고 부정적인 일만을 계획하고 행하는데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루터가 은총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한 이유는 첫째, 자유의지의 존재가 교부들에 의해 명확히 입증된 적이 없었으며, 둘째,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는 신에게만 적용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 또한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았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과 에라스무스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성서에서 분명하게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가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고수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성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고라고 비판하였다.)중세의 정통신학은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한 두가지 필수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었을까?
기업이란 이익추구에 궁극적 목적을 두고 고객들의 필요, 욕구, 선호 등을 만족시키기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비즈니스 활동들을 조직화하고 지휘하는 비즈니스 주체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기업들은 다들 제각각의 숙달된 경영방법으로 이윤을 극대화한다. 전반적으로 이전의 기업들은 국내 시장에서의 활동만으로도 충분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계는 단일화 되어가는 추세이다. 이제 경쟁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어느 나라의 기업들과 언제 어디에서든 이루어진다. 더 넓은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이야 말로 기업 이윤의 극대화란 측면에서 볼 때 더할 나위 없는 국내 기업들의 희망사항이지 않을까 싶다.유수의 한국 기업 중 해외진출에 성공한 기업으로 최근 IT업종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최근의 화두가 된 MP3 플레이어로 세계 시장을 석권한 아이리버를 꼽을 수 있다. (주)아이리버는 2000년 7월에 설립되어 현재 MP3 시장에서 국내 50%, 세계 25%를 점유할 정도의 성공한 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아이리버가 세계시장에서 드높은 입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다.차별화된 기술력, 그것을 담아내는 디자인미국시장에서 아이리버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CD형 MP3 플레이어 생산에 그치지 않고 플래시 메모리 타입의 초소형 MP3 플레이어의 개발로 미국 내 대형 유통업체인 “베스트 바이” 입점 뿐 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아이리버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소형화된 프리즘 형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기술을 맞추는 (일반적으로 기술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지만) 역발상적인 제품 생산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앞선 기술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다.최근에는 내장 프로그램(펌웨어) 업그레이드 방식의 우수한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로 이 분야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와 MP3 플레이어의 접목, 컬러 LCD 액정화면 장착 등의 앞선 기술을 보이고 있으며 차후에는 멀티미디어 동영상이 재생 가능한 기술로 차세대 신제품을 개발하는 등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아이리버만의 신기술 집약체를 디자인 협력 업체인 이노디자인의 디자인에 담아내고 있다. 이노디자인은 사업 초창기부터 아이리버와 협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아이리버는 회사 내부에 디자인 조직이 없다. 디자인 분야는 외부 전문가 집단에게 전담시키는 디자인 아웃소싱으로 자체 능력을 극대화 하려는 의도이다. 2002년 이후 MP3 시장에서 우위를 전담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 앞서가는 디자인을 개발, 채택함으로써 차별화된 제품으로서의 자리기반을 확실히 하게 되었다.한 발 앞서가는 시장 예지 능력MP3 시장이 이만큼 발전하리라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견치 못했던 일이다. 일본의 MD 시장의 성공이 한국에 그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MP3 시장 때문이다. MP3 시장은 1990년도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인터넷 열풍과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보급으로 더더욱 확산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 문화를 향유해 온 세대의 요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다.이전의 워크맨, CD 플레이어와는 차별화 될 만큼의 작은 크기는 소비자들의 충분한 구매 이유가 된다. 그리고 타 매체와는 다르게 음질에 변화가 없다는 점 역시 MP3 시장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의 이점들이 소비자들로 하여금 MP3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MP3 시장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 증대와 아이리버만의 차별화 된 기술력은 MP3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요건이 되었다.아이리버는 동종 산업의 타 기업들에 비해 여러모로 한 발짝 앞서가는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이전엔 없었던 혁신적인 프리즘 형태의 모델 생산은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으며 대용량의 (몇 십 GB에 해당하는) MP3플레이어 개발, 디지털 카메라와 MP3 플레이어의 접목 등 여러 측면에서 타 기업 보다 앞서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통신사와 협력하여 MP3, 게임, 뮤직비디오, 동영상 등이 재생 가능한 통합 단말기 개발에 나서고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이처럼 앞서가는 시장 예지 능력은 아이리버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큰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독자적인 브랜드 구축 그리고 신개념 마케팅아이리버란 이름을 처음부터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시장진입 초기 아이리버는 자체 브랜드 없이 “리오”라는 이름하에 제조업자 개발생산 방식으로 미국 소닉블루사에 납품을 하던 기업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뛰어난 기술력으로 시장에서 큰 어려움 없이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브랜드 없이는 미래도 없다는 양덕준 사장의 마인드 때문에 제조업자 개발생산 방식의 납품을 중단했다. 아이리버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에 재진출 했을 때 넉 달 동안 단 한건의 주문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츰 예전 “리오”를 생산하던 기술력 있는 기업이라는 소문이 퍼져 지금의 입지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앞서가는 기술력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자가 브랜드의 단점을 극복한 것이다. 중간 중간 현재의 입지에 오르기까지 큰 위기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러한 위기들을 잘 극복해내어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의 기업이 되었다.마케팅 측면에서 아이리버는 최근 MTV 등과의 제휴를 통하여 세계 뮤직 관련 시상식 등에 제품과 관련된 홍보를 실시하는 등 이른 바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에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 유명 톱스타 들이 아이리버의 MP3플레이어를 착용한 모습들이 찍힌 사진들이 인터넷 상에 떠돌면서 큰 상업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뮤직 시상식 협찬 등 전 분야에 걸친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은 점점 경쟁이 강화되어가는 MP3 시장에서 입지를 더더욱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단순한 해외진출 성공... 그 이상의 것국내에서 한 제품(기술)이 인기를 끌면 그 곳에 우르르 몰려드는 것이 우리 기업의 속성이다. 수입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거의 확실한 수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유사제품이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단기간의 이익을 거둔 후 그 제품은 사장되기 마련이다. 결국 그 분야의 개발업체나 초창기에 뛰어든 회사를 제외하고는 한 몫 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그 제품을 해외에 진출시키려는 노력은 미약하다. 그만큼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다. 더 이상 국내 시장에만 만족한다면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다.
1. 머리말고려 말기 공민왕(恭愍王)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이다. 사료의 부족과 그에 따른 연구의 미비, 북한 지역에 편재되어 있는 문화재 등의 이유 때문에 고려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과감한 개혁정치와 그 자신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으로 많은 흥미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한국사에서도 유례 드문 커다란 전환기였던 14세기 중엽 왕위에 올라 적극적인 반원정책과 개혁 단행을 통해 쓰러져 가는 왕조를 일으키려 하지만 결국 개혁정치의 궁극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당초 드높은 역사의 파고를 헤치며 개혁의 군주로서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끝내는 실패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물론 공민왕을 단순히 실패자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100여 년에 걸쳐 누적된 비리와 모순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개혁은 당대로서는 한줄기 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반원정책은 고려의 주권 회복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개혁에 대한 의지는 계승되어 조선 왕조 개창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의 목표는 새로운 왕조의 건립이 아닌 고려왕조를 중흥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민왕 사후 겨우 20년 만에 고려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보았을 때 결국 실패한 정치가라는 명찰을 떼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그는 엄격하고 과감한 개혁군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림과 서예에 능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원(元)의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의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그와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재미를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공민왕의 진면목은 개혁군주로서의 모습을 살펴보았을 때 제대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복잡한 국제정세와 격동하는 당대의 국내 현실 속에서도 그토록 집요하게 개혁을 시도한 인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이 글에서는 공민왕이 어떠한 정황 속에서 왕위에 올랐는지를 알아보고, 세력의 대립 알력으로 정치적 불안정과 폐정이 누적되어 원의 불신이 가중되었고 고려 연안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의 국방력의 부실함이 드러나자, 원은 14세의 어린 충정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려 조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시킴으로써 공민왕이 즉위하게 것이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馬國)으로서 심한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었다. 원이 즉위와 퇴위(退位)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갖고 그것을 마음대로 행사한 결과 과거에 찾아볼 수 없었던 왕의 중조(重祚) 현상까지 나타났으며 그 결과 고려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3.개혁군주로의 등장새로 즉위한 공민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원의 외압(外壓)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고려 내부의 모순구조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원의 외압이 당시 국내의 사회모순을 심화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이중의 모순구조는 상호 밀접히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먼저 내정개혁을 시도하였다. 공민왕 원년의 즉위교서(卽位敎書)는 이러한 공민왕의 의지가 의욕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대부분 구체적이지 못하고 임시적인 대민안정책(對民安定策)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14세기 전반에 있어왔던 정치운영에 대한 반성과 개편에 대한 시사로서 모든 정사를 국왕중심으로 운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나머지의 제반 사회경제적 개혁 또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회복이라는 정치적 의도를 뒷받침하는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성격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즉위년부터 이러한 개혁의지를 보이고 왕권의 회복이라는 민감한 사항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광범위한 지지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정왕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자신을 추대하려 했던 왕후(王煦), 이제현(李齊賢) 등 많은 수의 국내 정치세력이 계속 지지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 10년 동안 원에서 숙위(宿衛)하는 사이에 조일신(趙日新), 유숙(柳淑) 등 시종신(侍從臣)도 확보하고 있었다며 천조(天朝)가 당당하여 법령이 분명한데, 그 처리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누가 상께 미치지 않을까 신은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원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즉각적 처결을 건의하였고, 그에 따라 왕은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곧 고려는 이 사건의 전말을 원에 보고하였고, 원은 단사관(斷事官)을 보내어 그 일당을 추국하여 처벌을 하였는데, 고려의 백관(百官)은 원에 상서(上書)하여, 공민왕이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점을 변명해 주었다.조일신의 난은 공민왕을 크게 위축시켰고 개혁정치는 더 이상 추진될 수 없었다. 원이 군사파견을 요청했을 때 이에 응하는 등) 원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으며, 기황후의 어머니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기씨 일족을 기용하여) 부원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개혁정치의 분위기는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왕은 이렇게 원 및 부원세력을 무마하는 한편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속해 나갔다.)3.본격적인 반원 개혁정치첫 번째 개혁 정치가 안팎의 반발과 견제를 받고, 조일신의 난의 파동을 겪으며 실패한 다음, 공민왕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자세로 현실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원 제국이 흔들리는 구제 정세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새롭고 본격적인 두 번째 개혁 정치가 펼쳐지게 된다.당시의 중국대륙의 사정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원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한족(漢族)의 반란이 큰 규모로 확산되는 가운데 원, 명 교체의 기운이 무르익어갔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민왕이 원에 머무는 동안 이미 원은 어지러워지고 기우는 형세에 빠져들기 시작 하였고, 왕 자신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민왕 즉위 이후에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고, 공민왕 3년 마침내 원은 한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원군(援軍)을 고려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고려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원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고려인들이 직접 똑똑히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정했던 장하며 유감을 표명하였다. 원이 항의 차 보낸 사신이 돌아가는 편에 이러한 일련의 조치와 뜻을 담아 보낸 것이 사태 발생 후 2개월 반이 지난 7월 30일의 일로, 고려의 반원정책이 사실상 마무리된 다음이었다.)공민왕이 대사를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때를 잘 맞추어 거사했기 때문이었다. 원은 쇠미해져서 힘을 쓸 수 없는 형편이었고, 부원배들의 횡포와 작폐는 대부분의 고려인들로부터 증오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중요한 요소의 하나는 공민왕의 측근 세력이었다. 그들은 이 모험적 변혁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거사를 성공으로 이끄는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민왕 자신이 주권회복과 왕권강화를 통한 왕조중흥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설정하고 과감하게 반원정책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4.개혁의 좌절그동안 누적된 비리와 모순을 시정하고 왕의 위상을 높이면서 고려의 중흥을 꾀하려는 공민왕의 커다란 모험은 성공의 길을 걷는 듯하였다. 그러나 반원정책과 더불어 막이 오른 본격적 개혁정치는 당초 뜻했던 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기철 등이 탈점(奪占)했던 토지와 노비가 환수(還收)되고, 일부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근본적인 개혁에의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치적 안정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고려는 대원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국제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국경지대에 군사시설을 쌓고,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불법적 전민(田民)의 탈점행위를 적발, 처벌하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또한 이 무렵 심상치 않은 일들도 연달아 일어났다. 이미 즉위초부터 커다란 문제거리였던 왜구의 침입이 더욱 자심해져서 조운의 불통(不通)으로 관리들에게 녹봉(祿俸)을 지급할 수 없는 상태가 초래되었다. 그런가 하면 기근(饑饉)이 들고 천변(天變)이 잦았다. 왜구는 공민왕 6년 여름부터 기승을 부려 경성에 계엄(戒嚴)이 내려졌고, 그로부터 해마다 서해안을 비롯한 전국 각처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들은 정세운을 살해하였던 것인데, 그 후 그들은 주장(主將)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모두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공민왕 측근의 유력자 김용(金鏞)이 3원수의 공적을 질시하여 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변명의 기회를 차단한 상태에서 그들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진상은 불분명하지만, 당시 3원수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려 하자 그들의 세력 확대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정치권력 중심부에 팽배했고, 공민왕도 내심 같은 입장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세운과 3원수가 제거됨으로 인하여 공민왕 주위의 공신집단은 거의 와해되고, 공민왕의 세력기반 자체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다음으로 공민왕 12년 윤3월에 흥왕사의 난이 일어나 다시금 큰 타격을 가했다.) 고려 조정은 약 1년 4개월 만에 일단 개경 근교에 도달하여 우선 흥왕사에 행궁(行宮)을 차리게 되었다. 약 2개월이 지난 어느날 밤에 난군(亂軍) 50여 명이 침입하여 숙위하던 신료와 군사들을 죽이고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다. 왕은 환관들의 희생과 노국대장공주의 기지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수상(首相)으로 막중한 위치에 있었던 홍언박은 난군의 습격으로 살해되고 말았다. 이 변란은 원의 사주를 받은 왕의 총신(寵臣) 김용이 저지른 것이었다. 왕은 최영(崔瑩) 등 새로이 대두한 무장들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그의 외사촌형으로 줄곧 공민왕 정권의 지주 구실을 해 온 홍언박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공민왕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이제 공신집단의 붕괴로 세력기반을 아주 상실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그 이후의 사태 진전은 공민왕을 더욱 큰 곤경에 빠뜨렸다. 원은 고려 조정과 공민왕이 안정을 잃은 것을 기회로 삼아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대신 충선왕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을 즉위시켜서, 원의 군사 1만명을 동원하여 덕흥군을 받들고 고려에 진입(進入)케 했던 것이다.) 이번의 전쟁은 공민왕에게 불리한 측면이 많았다. 원의 권위에 따르면, 그는 다.)
고종의 대외인식과만국공법20000064박태진차례1.머리말2.고종 정치력의 원초적 한계3.고종의 대외인식과 자주적 다변외교4..만국공법에 대한 고종의 의식과 밀사외교5.맺음말1.머리말고종이라는 인물은 1863년부터 1907년 7월까지 43년 7개월에 이르는 동안 국가의 최고 정책 결정자인 왕으로서 재임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더욱이 그가 왕으로서 재임한 시대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안에서 중화라는 세계관에 머물러 있던 조선이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생소한 과학기술체계를 앞세운 서구의 근대국가들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한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의미를 지닌 문명사적 전환기에 놓였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찌되었던 결과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합되었던 가슴 아픈 시기가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여 지속적인 주권수호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이시기의 역사가 올바로 평가되고 있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일제에 병합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한말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끔 만든 것이다. 이는 곧 한말의 역사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끔 만들어 마치 일제에 의하여 식민지화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일제의 침략논리를 그대로 수용하게끔 만드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고종황제는 아마추어 서양 역사가와 일본 침략주의 책략에 의해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문화의 창,2000로 그려지고 이는 무분별하게 일반인뿐만 아니라 학계에도 정설로 굳어졌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가 쓰러져 가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행한 외교적 노력을 밝혀주는 문서가 여럿 발견되고{) 고종황제가 을사륵약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그 이유를 밝힌 1906년 6월 22일자 9개국에 보낸 친서(서울대 김기석 교수가 콜롬비아 대학에서 발견하여 공개), 러일개전에서 러시아와 연합 할 것과 러일전쟁 중에 러시아 병사의 경성파견 요청,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서 조선의 밀사 를 러시아대표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 으렴청정과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섭정하에서 왕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강상규, 「고종의 대외인식과 외교정책」,『한국사 시민강좌』19집,1996.또한 대원군의 10년 간에 걸친 섭정도 19세기 이래 계속되어 오던 세도정치를 단절시키지 못하고 왕의 위상을 올려놓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책임 소재를 떠나서 이후 정치에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러한 상황전개로 인해 공적인 국가권력이 사권화되고 국가관료기구가 나름대로 가지는 건전한 역할이 미비했던 반면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세력의 수구성이 커져 시대적 과제에 미봉적인 대응을 하게 되고 올바른 방식의 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인재등용, 정책집행의 차질을 가져오게 되어, 정치가 세력다툼의 장으로 전락되어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을 사게 될 소지가 많은 상태에서 고종은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국내외 주요사건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황으로는 고종이 취할 수 있었던 정치적 선택의 폭을 어느정도 좌우했다고 볼 수 있는 한청관계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근대사에 해당하는시기에 있어 청의 대한 정책의 변화과정은 대개 다섯단계 정도로 나누어 생각하는것이 가능하다. 첫단계는 조선이 조공국이라고 하지만 그 내정과 외교문제는 완전히 자주에 맡겨 간섭하지 않았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청은 병인양요,신미양요,운양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나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조약문을 포함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는 상황에서도 어떠한 구체적 간섭도 하지 않았다. 두번째 단계는 일본의 1874년의 대만침공,75년의 강화도 사건,77년의 류구 병탄 등의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기왕의 위기의식외에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던 시기를 말한다. 이시기에 청은 조선에 대해 구미제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하면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조약문에 명시함으로써 청의 종주권을 확인하려 한다. 세번째 단계로는 이러한 기도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면서 명모거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논의 할 수 있을 것이다.3.고종의 대외인식과 자주적 다변외교1870년대에 들어 고종이 『해국도지』를 통해서 외국의 정황을 알아보려는 자세를 보여주는 내용이 여러 군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1870년대에 이미 고종은 『해국도지』,『영환지략』등의 서양서적이 갖는 중요성에 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고종은 연행사로 가는 사신들에게 반드시 청국내의 서양인들의 동정을 살피고 돌아올 것을 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보고내용은 대개 정치,군사적 위협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서양의 국력,무기,선박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고종의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이 박약하였다. 한 철근,『한국개항기의 상업연구』,일조각,1970,pp319-326참조.고종은 점차 서양을 경계하여 배척하던 당시의 많은 논의에 대해 회의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세를 가속화시킨 것이 바로 『조선책략』이었다. 이 책은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김홍집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책으로서 고종과 관료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황준헌, 『조선책략』, 조일문역, 건국대학교출판부.그 내용은 개화가 곧 자강의 유일한 방법 인 것처럼 수차례 강조하여 논함으로써 개화와 자강이 마치 동일한 개념인 것처럼 이해하게 만들 소지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교 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적은 분량의 『조선책략』안에서만 다섯 번 반복된다. 황준헌, 앞의 책,pp10-11,28,29,31,32.『조선책략』에서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만국공법(국제법)에 관한 논의이다. 황준헌은 서양의 공법은 남의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다. 고 하면서 조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미국과의 조약을 통해 만국공법을 적용할 수 있으며........조선이 무사할 때 조약을 맺어야 공평한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 는 말을 역설하면서 공법의 효과에 대해 논하고 있다.{) 황준헌, 앞의 책호적인 태도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 고종은 이들 미국인의 우호적인 자세가 미국 정부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미국의 힘을 빌어 러,일의 침투를 저지하고 임오군란 이후 강화된 청의 압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고종이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시작되면서 조선은 능동적으로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하였다. 고종으로서는 임오군란이라는 시대상황에서 비로소 속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고 따라서 공봅에 의거한 자주권의 확립은 그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주 란 곧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으로 관념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종이 내린 교서 중에는 혁신적인 정치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광린, 「개화사상연구」,『한국개화사 연구』,일조각,1993년 개정판PP23-26.고종이 임오군란 직후 발표한 교서를 보면(음 1882.8.5){) McKenzie,F.A.,『The Tragedy of Korea』,London,1908,신봉룡 역,『대한제국의 비 극』,pp34-36에서 따온 것...........개국이란 조금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모든 비난을 꾹 참으며 감수하고 있다. 외국과의 교섭은 평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음은 역사가 증명한 바 아직도 그대 유생들은 이를 악습이라 여기고 나로 하여금 다른 나라들과 단절하도록 바라고 있다. ..........외국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의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그들과 맞서서 싸울 수 있겠는가.........우리는 지금 미국,영국 그리고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을 따른 것이며 큰 변혁이나 되는 것처럼 의아한 눈길로 볼 것이 아니다. .............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상투적인 방식을 고집하고 쓸데없는 절차를 행하고 실사구시의 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옛날의 어진 임금과 명철한 군주들의 정사상의 방법과 계책의 대강령이며 또한 새롭게 맞추어나간 뜻이다........얼마 후 청의 지배 책동에 대항하여 김옥균,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데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종은 갑신정변의 방식이 지나치게 급진적일 뿐 아니라 무책임한 방식이라고 느껴 크게 실망{) 『고종실록』 1884.10월17,18일자에 보면 개화파 세력들이 임금앞에서 집권사대당세력인 윤태준,한규직,민태호,조녕하,민영목,류재현 등을 죽이려하자 고종은 연거푸 죽이지 마 라! 애원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만다. 고종의 개화당에 대한 실망은 일종의 두려움과 결합 된 것이었는데 이러한 관념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고종실록』,(고종22년 11월 16일자); 알렌의 일기(1885년 12월 29일자)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러시아와 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한반도에서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러한 와중에서 위기를 극복하려는 고종의 노력은 러시아와의 밀약으로 나타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는데, 고종은 이런 와중에서도 굽히지 않고 청의 끈질긴 간섭을 배제한 채로 한불조약을 체결하는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러시아와의 접근이 좌절되자 고종은 또 다른 외교적 방안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과 유럽 5개국, 일본에 상주공사관을 파견하는 것 이었다. 조선과 수교국가 상호간에 상주외교사절을 교환 파견한다는 규정을 수교조약의 조항에 모두 명문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상대수교국만 일방적으로 조선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하는데 그쳤던 수동적,소극적인 상황과 비교하면 능동적인 외교
누구를 위한 혁명인가?-프랑스대혁명을 보고-20000064 박태진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화 중반에 이르기까지 누가 당통이고 누가 로베스피에르이며 누가 데물랑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했으며, 막심과 로베스피에르가 같은 인물인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또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삼부회 소집, 테니스 코트의 서약 같은 객관식 시험용 지식으로만 혁명의 과정을 파악하고 있던 것이 현실인지라 과정의 설명 없이 단계단계 넘어가는 두시간여의 영화는 답답함을 넘어서 지루함까지 자아냈다. 한편의 비디오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겠지만 확실히 흥행에 성공할 여지가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모르겠으면 공부하고 찾아와라 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주요한 사건들과 중심인물에 대한 기초정보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다소간의 기초 지식이 생긴 뒤에 다시 한번 영화를 보았다. 이미 당통 도 보고난 후라 어느 정도 비교도 하면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개설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보았다. 괜한 감독의 주장이나 의견을 넣기보다는 사건 중심으로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여전히 매끄러운 흐름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보다는 양호한 상태였다. 개개의 사건에 얽매이지 않고, 영화에서 표현 하려한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까지 생각하면서 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영화의 줄거리는 프랑스 혁명의 주요한 전개과정에 맞추어 프랑스 왕실의 재정 위기에서부터 로베스피에르의 죽음까지를 다룬다. 줄거리야 역사책에서 다루는 그것과 같다. 나름대로의 재미를 찾자면 부분부분 에피소드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루이 16세가 폭동이냐고 묻자 시중이 혁명이라고 대답하는 장면 같은 것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었다. 초반에는 혁명 과정의 굵직한 사건에 비중을 많이 두고 후반에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 갈등을 그리고 있다.수업시간에 이미 다루었지만 당시 사회는 혁명이 일어날 만한 여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왕실과 귀족은 충분히 타락했고,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심해졌다. 당시 파리 노동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50%나 되었다니 얼마나 궁핍한 생활을 했으며 사회적 불만이 얼마나 컸을지는 예상이 가는 바이다. 그 와중에 말도 안되는 명목의 세금으로 그나마 수입의 절반은 빼앗겼다. 하지만 그들의 의식은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계몽 사상의 영향이었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절실하게 불행하다고 느꼈고 사회 비판 의식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가 사회문화적 변화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기폭제만 있으면 언제든지 대규모 폭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것이 삼부회였다.1614년 이래로 소집되지 않고 있던 삼부회를 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르주아는 물론 벽촌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음은 분명하다. 제 3신분으로 구성된 대표는 앙시앙 레짐 하의 모순을 낱낱이 파헤쳐 줄 것이고, 삼부회 소집의 목적인 돈 또한 부르주아가 쥐고 있으니 이미 칼자루는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위 성직자들을 포섭한 3신분 대표들은 국민의회의 설립을 주장하였고, 결국 관철된다. 하지만 진심으로 새로운 프랑스 창조를 바라지 않은 왕과 귀족은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이는 혁명의 본격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무력 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다. 이후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된다.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고 앙시앙 레짐 하의 부조리의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이 와중에 빵을 요구하는 서민 여인들의 베르사이유 행진이 있었고 왕은 파리로 강제 송환된다. 이 후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한 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국왕 부부의 국외 탈출 시도로 혁명은 점차 과격해 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은 루이 16세와 부인 마리 앙뜨와네트를 처형하기에 이른다. 이에 놀란 외국의 본격적인 침략과 국내의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대립으로 혁명 양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역사적 사건에 정의와 불의의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애매한 것이지만이 영화 자체만으로는 누가 정의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루이 16세는 당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 없는 왕으로 그려지지만 그다지 죽을 만큼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은 듯 했다. 오히려 아들에게 오늘부터 프랑스에는 왕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측은심까지 불러 일으켰다. 과연 그가 죽어야 했는가? 오히려 그는 당시 귀족과 부르주아에 놀아난 불쌍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혁명을 주도하던 세력으로 그려지는 일련의 인물들 또한 초반에는 굉장히 열정적인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지만 후반에는 기회주의적이고 권력욕이 강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다. 민중들 또한 마찬가지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길로틴의 모습과, 피가 피를 부르는 상황 속에서 오감과 이성이 둔감해진-사람의 목이 떨어지고 유혈이 낭자한 길로틴 앞에서 한가로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민중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마치 반혁명자로 규정지어져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목을 장난감으로 던져주어 민중을 달래는 듯한 모습은 분노마저 일으키게 했다. 혁명 이전이나 혁명 이후나 민중들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은 듯 했고,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 등이 상상하던 사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무엇을 위한 혁명이란 말인가?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왕이라는 존재는 사라졌지만 왕에 필적하는 정치권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들의 뜻 이라는 그럴싸한 명분 까지 쥐지 않았는가? 민중들의 경제사정은 어떠한가? 영주의 토지소유 특권과 길드적 독점권이 사라지고 교회 및 망명 귀족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봉건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토지는 이른바 돈이 있는 사람들의 차지가 되고 민중들의 사정은 혁명 이전보다 오히려 더 나을 것도 없지 않았는가? 신분제가 사라졌다. 하지만 오히려 부르주아가 특권층 되었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부르주아를 위한 혁명, 그들에 의해 의도되었고 진행되었으며 그 혜택 또한 그들에 의해 독식되었던 혁명. 하지만 그 원동력은 민중이었다. 새로운 질서 하에서 사회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지지가 필요했고, 명분이 요구되었다.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민중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지도부의 계산 아래 민중은 조정 당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순수한 민중들에게 자 여기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념이 있으니 가져가고 우리를 도와달라. 라고 요구한 것은 아닐까? 이미 계속해서 성장할 실력을 소유한 부르주아들이 민중을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들의 성장할 길을 닦은 것은 아닐까? 의심은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 과연 부르주아를 앙시앙 레짐 체제의 왕가와 귀족들보다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나? 과연 그들이 루이 16세를 사형 시키고 사회를 새로운 기득권이 될만한 존재였나? 길로틴 앞에서 울부짖던 예전 지도자보다 민중을 사랑하기는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