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05. 1. 27. 2002다59788, 손해배상(지)]Ⅰ. 事案의 槪要1. 事實關係원고는 웹디자이너로서 인터넷 도메인 이름 “hpweb.com”(이하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이라고 한다)을 미국 도메인 이름 등록기관인 네트워크솔루션사에 등록하였다. 원고는 “digitalcouple.com"이라는 도메인 이름의 웹사이트를 운영하였는데, 위 웹사이트는 회원들에게 이메일 주소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회원들은 원고가 미리 등록 보유하고 있는 약 450개의 도메인 이름 중에서 원하는 도메인 이름을 선택하여 자신의 이메일 주소로 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이 사건 도메인 이름도 그러한 도메인 이름 중의 하나이다.한편, 일반 최상위 도메인 이름에 대한 등록기관을 지정하는 등 인터넷 주소를 관리하는 국제기구인 인터넷주소관리기구 아이칸은 도메인 이름 등록기관이 아닌 제3자와 등록자 사이에 발생하는 도메인 이름의 등록과 사용에 관한 분쟁의 해결을 위하여, 해결정책 및 절차규정에서 강제적 행정절차를 마련하고 있는데, 일반 최상위 도메인 이름을 등록하려는 자는 등록기관에 대하여 위 해결정책에 의한 분쟁의 해결에 동의하여야 한다.피고는 이 해결정책 및 절차규정에 따라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의 보유자인 원고를 상대로 하여 아이칸이 승인한 분쟁해결기관 중의 하나인 미국의 국가중재위원회에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을 피고에게 이전하도록 명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취지의 신청을 하였는데, 위 신청 당시 피고는 피고가 복종할 관할법원으로서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의 등록기관인 네트워크 솔루션의 주된 사무소 소재지인 미국 버지니아주 헌던시를 관할하는 법원을 선택하였다.국가중재위원회는 “피고는 'HP'라는 표장을 사용하는 23개의 상표를 미국 특허상표청에 등록하여 두고 있고, 컴퓨터 관련 제품에 위 표장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터넷으로 알려진 전 세계적인 컴퓨터망과 폭넓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10만 명이 넘는 피고의 직원들이 'HPWEB'으로 알려진 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판정에 따라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을 피고에게 이전하여 주었다.2. 法院의 判斷原告는 이 사건 판정에 의한 도메인 이름의 이전은 不法 또는 不當한 이전에 해당하므로 被告에게는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을 보유할 權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을 원고에게 다시 이전하라고 청구하고, 또한 선택적으로 원고가 여전히 이 사건 도메인 이름의 보유자임을 전제로 하여 피고에게 상표권에 기한 侵害禁止請求權이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確認을 구하는 訴를 제기하였고, 이에 대하여 原審은 이 사건에 관한 國際裁判管轄은 제1심법원에 있지 않다고 함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소를 却下하였다. 그러나 大法院은 대한민국 내에 주소를 두고 영업을 영위하는 자가 미국의 도메인 이름 등록기관에 등록?보유하고 있는 도메인 이름에 대한 미국의 국가중재위원회의 이전 판정에 불복하여 제기한 소송에 관하여 紛爭의 內容이 대한민국과 實質的 關聯性이 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법원의 國際裁判管轄權을 인정하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하였다.Ⅱ. 爭點國際裁判管轄의 문제는 涉外的인 요소를 갖는 분쟁의 해결에 관하여 국가를 단위로 어느 나라 법원이 재판권을 갖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인데, 이데 관하여 현행 國際私法 제2조가 일반원칙을 선언하고 있으나 그 부칙 제3조는 동법 시행 당시 법원에 계속 중인 사건에 관하여는 동법의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따라서 위 법 시행 이전에 제소되었음이 기록상 분명한 이 사건에서는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일반조항인 동법 제2조가 적용되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그 밖에는 국제재판관할을 직접 규정하는 법규가 없고 또한 국제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조약이나 일반적으로 승은된 명확한 국제법상의 원칙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결국 이 사건에서 대한민국 법원에 국제재판관할이 존재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國際裁判管轄의 配分에 관한 基本理念에 비추어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當事재판소나 국가중재위원회 등이 있다하더라도 이들의 판정이 그대로 집행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강대국이 패소했을 경우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결국 국적이 다른 당사자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첫째로 어느 나라 法에 준하여 판단하여야 하느냐의 국제사법적인 문제와 둘째로 어느 나라 法廷이 관할법정이 되느냐의 문제로 귀착된다.따라서 세계 각국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여러 가지 協約이나 國際規則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등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으며 특히 분쟁의 궁극적인 해결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소송에 있어서의 이러한 방향은 더욱 절실하다. 가장 합리적인 기준에 의하여 國際訴訟의 裁判管轄을 규율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國際訴訟에 관하여는 아직 국제적으로 확립된 法規範이나 法原則이 명백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각국이 國內法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이를 규율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재판관할권에 관한 결정기준이 저마다 다르다. 분쟁에 연루된 訴訟當事者는 어느 나라에 訴訟을 제기하느냐에 따라 裁判管轄權의 유무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國際裁判管轄權이라 함은 어느 특정한 외국적 요소가 있는 사건, 즉 섭외사건에 대해 어느 나라에서 재판하여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느 나라의 法院에 제소하여야 할지의 문제이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한 국가가 특정 섭외사건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즉 국제재판관할권에 대해서는 對物的 제약으로 논하는 견해와, 분배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견해가 있다. 과거 일본의 민소법 학자들은 국제관할권을 재판권의 대물적 제약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관할권을 미치는가를 따질 뿐 피고에 대하여 인적 관할이 미치는가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그러나 국제재판관할권은 특정사건을 어느 법원에서 재판하여야 할 것인가의 분배의 관점에서 고찰하여야 한다. 이는 재판권과 국제재판관할권을 다른 개념으로 보는의 개정국제사법은 재판관할에 관한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기 때문에 위 법규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이에 반해 대륙법계에서는 국제사법상의 관할은 대체로 국내토지관할의 분배로 다루어 왔고 외국법원이 국제재판관할권을 갖는지 여부는 외국판결의 승인요건의 하나로 다루어 왔다. 특히 프랑스법에서는 국내소송법상의 어떤 종류 또는 어떤 지방의 법원이 관할이 있느냐의 문제는 특별관할이라고 부르고, 섭외사건에 관해 어떤 나라의 법원이 관할이 있느냐의 문제는 일반관할이라고 부른다. 국제재판관할권은 ‘직접적 일반관할’, 외국판결의 승인요건으로서 외국법정의 국제재판관할권을 ‘간접적 일반관할‘이라고 한다.)3. 우리나라의 國際裁判管轄權국제재판관할권에 관한 문제는 절차법적인 요소이므로 사실상 국제사법에서 다뤄야 할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현행법에서는 이에 관한 규정을 직접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물론 이 사안에서는 현행법 시행 이전이기 때문에 새로운 법규가 적용될 수 없었다.舊섭외사법에서는 우리 나라 법원이 禁治産宣告 또는 失踪宣告를 할 수 있는 경우를 규정할 뿐 재판관할에 관한 직접적인 규정이 없었고 1929년 Warsaw 조약 제28조에 국제항공운송에 관련된 국제재판관할의 규정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개정된 국제사법에서는 그 규율대상의 영역을 넓히면서 절차법적인 요소인 관할에 관한 문제도 규정하였다.) 그러나 국제사법상으로 국제재판관할권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고 해도 원칙적인 내용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서 국제재판관할의 존재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종전과 같이 학설에 의할 수밖에 없다.학설에는 逆推知說과 管轄配分說 등이 있다. 역추지설은 먼저 우리 나라에 관할법원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우리 나라의 어느 법원도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국제재판관할권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학설은 자국을 우선하는 태도로서 국제적인 고려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합리성이 없다. 또한 국제재판관할배분의 원칙에도 어긋나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반해 관할배분설은 국제재판관선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관할배분설에 대해서는 그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으나, 현재 적용되는 실례를 보면 민사소송법상의 토지관할규정을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법적 안정성을 그다지 해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단 이 판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판례에서 당사자간의 公平, 裁判의 適正 또는 迅速을 기한다는 기본원칙에 기초한 條理에 의할 것을 명시하거나,) 국내관할에 관한 민사소송법상의 규정을 유추 적용하고 있다.)4. 民事訴訟法上 土地管轄規定의 國際裁判管轄規定으로서의 直接 適用 可能與否우리 나라의 민사소송법은 제정 당초부터 섭외사건을 예상한 입법이다. 오늘날의 급격한 국제화현상이 필연적으로 민사소송법의 국제화현상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판례의 대체적인 경향은 민사소송법상 토지관할규정을 적용하고 있고 이 판례 또한 마찬가지이다.우리 나라의 민사소송법 학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재판법학적인 접근으로서 재판권의 한계에 관한 직접적인 규정이 없으므로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 규정으로부터 逆으로 推知할 수밖에 없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 국제사법학설의 영향을 받아 원칙적으로 條理說이 우세하다.) 현재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구체적인 법규가 없기 때문에 이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후 국제적인 조약이나 협약을 통해 국제재판관할에 관한 원칙을 만들어 나갈 필요성은 있다.5. 個別的 裁判管轄權대부분의 섭외사건에서 원칙적으로 被告住所地主義를 취한다. 이는 로마법 이래로 정립된 소송의 일반 원칙이고, 국제재판관할의 원칙으로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는 언어, 문화, 법제도가 상이하고 지리적으로 상당히 隔地間에 있는 당사자간의 소송에서 피고를 보호할 수 있고 피고의 생활 근거지인 주소지에 그의 재산이 소재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판결도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법인에 관해서는 우리 민사소송법 제4조에 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법인의 주된 영업 소재지에 國內土地管轄이 있게 된다. 그런데 영업담당자의 주소가 우이다.)
[대법원 1989. 12. 26. 88다카10128, 물품대금]Ⅰ. 사실관계소외 김씨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목욕탕, 이발소 등의 부속시설이 있는 삼정장여관을 경영하였는데 여관에 비치할 칼라텔레비젼 43대와 냉장고 39대 등의 전자제품을 원고로부터 계약금만 주고 외상매입하였다. 그 후 김씨는 여관 경영의 부진으로 소외 이씨에게서 빌림 금 5,000만원의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고 발행한 어음?수표에 대하여 부도를 내게 되기에 이르러, 피고에게 위 여관과 목욕탕 시설이 있는 이 사건 건물과 위 영업에 필요한 비품일체를 매도하였다. 이와 동시에 피고는 김씨의 이씨에 대한 피담보채무도 인수하였다.피고는 이 사건 건물의 상호를 삼정호텔로 하였다. 이때 원고는 피고가 김씨의 영업을 양수하였다고 하여 상법 제42조 제1항에 의하여 피고에게 외상대금의 지급을 청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원심은 ‘삼정장여관’이나 ‘삼정호텔’이라는 상호는 사회통념상 동일성이 있는 상호로서 피고는 김씨의 영업을 상호와 함께 양수한 자이므로 원고에 대하여 김씨의 채무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따라서 피고가 다시 상고하게 된 것이다.Ⅱ. 판결요지상법 제41조 소정의 영업의 양도란 영업목적을 위하여 조직화된 유기적 일체로서의 기능재산의 동일성이 유지된 일관이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영업의 동일성 여부는 일반 사회관념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할 사실인정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영업재산의 전부를 양도했어도 그 조직을 해체하여 양도했다면 영업의 양도는 되지 않는 반면에 그 일부를 유보한 채 영업시설을 양도했어도 그 양도한 부분만으로도 종래의 조직이 유지되어 있다고 사회관념상 인정되기만 하면 그것을 영업의 양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또한 상법 제42조 제1항에서 말하는 상호의 계속사용은 일반적으로 영업양도인이 사용하던 상호와 그 양수인이 사용하는 상호가 전혀 동일할 필요까지는 없고, 다만 전후의 상호가 주요부분에서 있어서 공통되기만 하면 된다고 볼 것이다.한편 상호를 속용하는 영업양수인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채무승계가 없는 영업양도에 의하여 자기의 채권 추구의 기회를 빼앗긴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영업양도에도 불구하고 채무인수의 사실 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악의의 채권자가 아닌 한 당해 채권자가 비록 영업의 양도가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 해도 보호의 적격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따라서 피고는 원고에게 소외 김씨의 피고에 대한 외상대금을 변제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한 원판결 판단은 옳고, 논지는 모두 이유 없어 상고를 기각한다.Ⅲ. 쟁점이 판결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판시하고 있다. 첫째는 영업양도의 의의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상호의 속용의 의미에 관한 것이고, 셋째 보호받는 채권자의 주관적 요소에 관한 것이다. 판례의 이 세 가지 관점에 대하여 타당한지 검토하여 보도록 한다.Ⅳ. 검토1. 영업양도의 의의영업양도는 영업을 양도하는 채권계약을 말한다. 영업양도의 대상이 되는 영업은 주관적 의의에서의 영업인 상인의 영리활동이 아니라 객관적 의의에서의 영업인 상인이 영업목적을 위해 결합시킨 재산의 전체인 영업재산을 말한다. 영업재산이라고 하더라고 영업을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물건 또는 권리의 집합물일 아니고 사회적 활력을 가지는 유기적인 조직체이다. 즉 기업의 거래관계나 고객?경영비결 등 물적으로 체화되지 아니한 사실관계도 영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는 영업을 구성하는 개별 재산의 단순한 집합체보다도 더 큰 조직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영업양도의 본질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대립되고 있는데, 영업재산양도설은 유기적 일체로서의 영업재산이 양도되면 영업의 주체인 지위는 당연히 부수적으로 이전된다고 함에 대해, 지위교체설이나 지위?재산이전설은 기업자인 지위가 교체되는 결과 영업재산도 이전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한다. 결국 영업의 구성요소 가운데 어디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생기는 견해의 대립으로서 그 결과에 있어서는 별다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자인 지위는 영업의 귀속주체가 당연히 누리는 지위이므로 영업양도를 기업자인 지위의 승계나 교체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영업재산양도설이 타당하다.이와 같이 영업재산이전설에 따른다면 영업양도란 ‘영업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유기적 일체로서의 영업재산을 이전하는 채권계약’으로 볼 수 있다.다시 말하자면, 영업양도는 영업용 재산과 재산적 가치가 있는 사실관계가 기능적으로 조직화된 일체를 양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업재산의 일부매각은 영업양도가 아니며, 주식이나 지분 등의 사원권 양도로 인해 소유관계가 변하더라도 영업양도가 아니다.영업양도에 있어서는 영업재산이 일체적으로 양도되는 결과, 양도인의 영업과 양수인의 영업간에 동일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업 양도시에 영업재산 중 사소한 일부가 제외되더라도, 양도한 부분만으로도 종래의 조직이 유지되고 동일성을 갖추면 영업양도로 인정된다.또한 영업양도 당사자 사이에는 영업양도를 목적으로 하는 채권 계약이 있어야한다. 따라서 당사자 의사와는 상관없는 상속이나 회사의 합병과는 구별된다.2. 상호 속용의 의미상호의 속용이란 양수인이 양도인의 상호와 동일한 상호를 계속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문자 그대로 동일하여야 할 필요는 없고 약간의 변경이 있는 경우에도 사회통념상 동일성이 있다고 인정될 수 있으면 된다.3. 보호받는 채권자의 주관적 요소상법 제42조 제1항은 영업양수인이 양도인의 상호를 계속사용하는 경우에는 양도인의 영업으로 인한 제3자의 채무에 대하여 양수인도 변제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통설은 영업양도계약도 채권계약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양도인의 채권자와 양수인간에는 채무인수나 채무자변경으로 인한 경개 등 별도의 의무부담행위가 없는 한 양수인이 당연히 채무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양수인이 상호를 계속 속용하는 경우와 같이 제3자인 채권자가 영업주의 교체를 알 수 없거나 또는 알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채무인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외관이 형성된 경우 외관법리에 따라 양수인도 양도인의 채무에 대해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주의와 구스타브 쿠르베]사실주의는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당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연과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의 고조, 계몽주의 사상의 파급,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와 실증주의 철학의 확산, 산업혁명,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작용하였다.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즉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사실주의는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즉 당시의 사회는 1848년의 정치적 상황을 경험한 세대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실패, 6월 봉기의 진압, 나폴레옹 3세의 집권 등, 모든 이상과 모든 유토피아가 실패하고 난 이제 사람들은 사실에, 그리고 오직 사실에만 집착하고자 하였다.사실주의의 이러한 역사적 근원은 반낭만주의적 성격을 띈다. 즉 낭만주의식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거부하고 사실 묘사에 있어서 철저한 정직성을 요구한 점, 개관성과 사회적 단결을 보장하는 길로서 개성의 배제와 무감각성을 추구한 점, 현실을 인식하고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개조하려는 자세로서의 행동주의, 그리고 소재의 선택과 감상자 층의 선택에 있어서 대중적인 경향 등 이러한 특징들이 사실주의의 정치적 근원과 관련된 것이다.사실주의의 대표작가로 꼽히는 쿠르베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 전에 입선했다. 그 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하였고 1849년 그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의 초기 작품은 비평가들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1849년에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그림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이 두 그림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미술계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케테 콜비츠]"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위의 말은 케테 콜비츠가 한 말이다. 위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녀는 당시의 시대와 현실에 대응하던 작가로써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 거듭 강조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가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지 않고, 사회에 밀착시키고자 노력했다. 특히 그녀의 작품의 주제는 인간과 인간적인 것으로 일관되어 있고 그 작품 저변에는 공존 공생의 새로운 인간체 형성을 갈구하는 휴머니즘 정신이 깊게 깔려있다.여느 예술가의 경우도 그렇겠지만 케테 콜비츠 경우 그녀의 삶과 예술이 각별히 결합되어 있다. 그녀의 예술은 그의 인생항로와 밀착되어 형성된다. 진보적인 분위기의 집안에서 보낸 어린 시절, 결혼 후 베를린 빈민가의 생활, 세계 제1차 대전에서 아들을 잃는 고통, 내재된 모성 등 이런 삶의 요소들을 그녀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그녀의 작품 세계는 크게 초기와 후기로 대별되는데 초기에는 주로 당대의 문학작품과 현실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전형적인 불행들을 묘사하고 있고,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시작되는 후기 작품에서는 반전과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 중 판화 연작에 대해서 잠시 들여다보기로 하자.◈ : 1893~1897초기 산업화 시대에 일어난 자본가와 수공업자들간의 충돌을 다룬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직조공들』의 줄거리를 6개의 연속된 판화로 압축한 작품.→→→→→◈ : 1902~1908침머만의『위대한 독일인의 농민전쟁』에서 모티브를 얻어 실제로 1525년에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농민들을 선동한 여자 농부 “검은 안나”를 중심으로 폭정에 저항한 농민들의 비극을 묘사함.→→→→→→◈ : 1922~1924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전쟁으로 겪게 되는 동시대인의 고통과 참상을 묘사함.→→→→→→◈ : 1925~1926
《올해의 작가 2005 - 이종구》Ⅰ. 작가 이종구와의 만남미술관을 가기 위해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알아보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하는 《20세기로의 여행 : 피카소에서 백남준으로》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올해의 작가 2005 - 이종구》, 두가지의 기획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피카소, 백남준, 미술에 대한 문외한도 그 이름만으로 대단한 전시회일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법한 전자에 이끌렸다. 더욱이 네덜란드 스테델릭 미술관과 공동 주관하는 전시여서 외국을 여행하지 않는 한 보기 힘든 거장들의 작품을 손쉽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기회여서 더욱 탐이 났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요즘 심각한 금전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내게 만원이란 입장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 《올해의 작가 2005 - 이종구》를 보러 갔다. 그러나 약간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찾은 전시회라 하기엔 너무나도 좋은 전시회였던 것 같다. 어쩌면 가고 싶었던 《20세기로의 여행 : 피카소에서 백남준으로》보다 내겐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피카소의 작품과 같은 추상적인 작품보다 이종구의 작품이 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고, 우리 농촌의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등 작품을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Ⅱ. 농민화가 - 이종구이종구는 1954년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도 그의 고향인 오지리를 그 배경으로 있는데 이를 보면 그의 성장과정이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우리시대 농민화가’로 불리우는 그는 지난 2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농촌을 주제로 한국적 삶의 원형을 탐구해 왔으며, 그것을 예술의 영역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는 농민의 모습과 농촌의 풍경을 극사실적 혹은 낭만적으로 재현하는 일반적인 구상작가는 아니다. 그는 비판적인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에게 내재된 분노와 저항 그리고 희망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작가이다.지난 세월동안 우리의 농촌은 산업화, 도시화, 세계화라는 거친 풍랑을 겪으며 참혹하게 붕괴되고 있다. 특히 쌀수매 값 폭락, 소 값 파동, 우르과이 라운드, 농산물 수입개방, 구제역, 광우병 등 농촌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 이종구는 그러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여건 속에서도 항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한 작가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능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예술가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하며, 그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일 것이다.이번 전시는 이종구가 처음 농민을 그린 1984년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대표작을 총 망라하는 회고전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의 작업을 시기와 주제에 맞춰 “1984-1990년 : 고향땅 오지리”, “1991-1994년 : 고개 숙인 농민의 분노”, “1995-2000년 :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2001-2005년 : 우리 땅, 우리 겨레” 등 총 4개의 시기로 구분하였다.Ⅲ. 나의 눈으로 본 이종구의 작품세계1. 1984-1990년 : 고향땅 오지리작가는 이 시기에 농부인 아버지를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삼아 고향땅 오지리를 중심으로 농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고, 희망을 잃어가는 농민들의 시름을 작업에 반영한다.이 시기의 작품들은 모두 정부미 쌀부대라는 매우 독특한 재료에 그려져 있다. 어떻게 쌀부대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했는지 아이디어가 참 기발한 것 같다. 쌀부대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곳에 찍힌 인쇄 때문에 배경을 따로 칠하지 않아도 그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잘 소화해내며, 오히려 그 어떤 배경보다도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쌀부대는 농민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자, 당시의 시대상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속 농자천하지대본-연혁 / 1984 / 170 x 100 / 부대종이에 아크릴 릭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좌)『지금 지방에선 / 1984 / 160 x 110 /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 작 가 소장』 (중앙)『오지리에서 / 1988 / 200 x 170 / 부대종이에 아크릴릭, 꼴라쥬 / 국립현대 미술관』 (우)좌측의 그림은 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의 가슴에 아버지가 직접 쓴 편지를 붙임으로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가운데 있는 그림은 중앙일보의 “시골에선 못 살겠다. 처녀들 잇달아 도시로, 新婦기근에 애타는 農村총각”이라는 주제의 기사를 작품화한 것이다. 광고란에 그려진 촌스러운 남자 얼굴과 논에 수영복 차림의 여성의 그림은 이러한 이농현상에 대한 작가의 해학적 표현인 것 같다.우측의 그림의 쭈그려 앉은 3명의 아저씨들의 얼굴에는 시름에 잠긴 듯한 표정이 역력하고 그 중 한 아저씨는 담배를 물고 있다. 그 뒤에는 영자 신문, 배추, Marlboro?CAMEL의 양담배, 대선벽보가 콜라쥬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농산물 수입의 정부 방침에 대한 농민들의 걱정과 우려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2. 1991-1994년 : 고개 숙인 농민의 분노이 시기 작품들은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과 농산물 수입개방 이후 점점 더 피폐해져 가는 농촌의 현실에 격분한 농민의 고뇌와 좌절, 분노와 항거가 작품 전반에 나타난다. 또한 전 시기에 주로 사용한 쌀부대 대신 점차 장지, 한지 등 전통재료를 채택하고, 주요 소재 역시 아버지에서 낫, 삽 등 농기구와 소가 단독 소재로 격상된다.『UR - 천씨 / 1991 / 150 x 105/ 종이에 아크릴릭, 꼴라쥬 / 작가소장』이 작품은 논두렁 그림 위에 델몬트 바나나 상자가 콜라쥬 기법으로 그 려져 있고 그 앞에 노인이 그려져 있다. 델몬트 바나나는 외국 농산물 의 수입을 상징하며 노인의 손가락은 그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나타 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기에 생뚱맞아 보이는 바 나나 박스 그림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러한 표현 방식은 다른 작품에 도 종종 나타나는데, 『국토-1990년 가을』이란 작품에 그려진 델타 항공기도 그와 같은 작가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버지의 낫 / 1992 / 188 x 96 / 장지에 아크릴릭 / 작가소장』이 작품은 아버지가 작가에게 쓴 편지 배경으로 그 위에 낫을 그려놓은 작품 이다. 아버지가 계속해서 오랫동안 사용한 낫처럼 녹슬고 낡았지만 날은 푸르 스름하게 서있는 낫의 질감을 매우 생생히 잘 표현 한 것 같다. 특히 손잡이 부분에 묻은 흙을 실제 흙을 붙여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이와 비슷하게 실제 흙과 삽을 이용해 만든 『삽1』,『삽2』란 작품도 눈에 띄었다.『들의 역사 - 백산으로 부터 / 1994 / 145 x 300/ 판 넬에 아크릴릭 / 작가소장』이 작품은 “쌀사수”, “개방저지”등 머리띠 와 “身土不二”란 어깨띠를 맨 농민들의 투 쟁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투쟁하는 농 민들의 끝부분을 보면 머리를 틀어 올린 한 남자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연상시켜 이 운동과 연관짓는 듯하다. 그림 한가운데 크게 그려진 낫은 조금 섬뜩하게도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농민들의 시위를 강하고 날카로운 낫에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이종구는 낫에 대해 “참혹하게 처형당하듯 붕괴되고 있는 오늘날 농촌의 가난하고 쇠잔한 위기를 이 땅을 위해 내가 땀 흘려 바치는 헌사이자 분노이고 또 희망을 위한 내 양심의 표현이며, 본능적 방어를 위한 저항의 몸짓”이라고 표현하였다.3. 1995-2000년 :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이 시기에 작가는 지난 10년 동안 그려온 인물화를 중지하고, 그릇, 신발, 씨앗, 수저 등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 그림의 배경도 농촌 모습이라는 원경에서 흙과 땅이라는 근경으로 바뀐다. 또한 지난 시기에 주로 표현하던 농민들의 수난과 절망 대신 흙과 땅의 이미지를 내세우며 대지가 가지는 생명력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푸른 희망의 싹을 조명한다.『소반 연작(유언, 정안수, 정안수-낫) / 1995 / 소반3 개 / 소반에 아크릴릭, 흙 / 작가소장』이 작품은 실제 소반에 흙을 바르고 그 위 에 그림을 그린 작품이다. 우측의 작품은 볍씨 그림 위에 “똑가치나누어가저라”라는 유언이 적혀 있는데, 상속재산으로 볍씨를 남긴 것은 그것이 농민들의 재산의 기반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정안수를 작품으로 담은 것은 농촌사회에 아직 남아있는 우리의 토속신앙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좌측의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다.『대지-모내기 / 1997 / 207 x 150 / 요철한지에 아크릴릭 / 작가소장』이 작품은 이외에도 이와 매우 유사하게 그려진 다른 세 작품이 있다. 『대지-여름』, 『대지-가을』, 『대지-겨울』이란 작품이 그것인데, 아 버지 얼굴 아래 그려진 논의 모습만이 다르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와 농촌의 사계절 의 모습을 단순히 담은 것일까? 농사일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몸을 논으로 표현한 것일까?4. 2001-2005년 : 우리 땅, 우리 겨레이 시기에 작가는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우리의 국토와 겨레를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한다. 이렇게 주제를 국토로 확대한 것은 작가가 농촌이라는 제한되고 고정된 범주에서 벗어나 민족의 가난한 삶과 사회 모순을 담고자 함이다. 따라서 국토는 오지리 좁은 농토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한반도의 땅과 우리 민족 역사를 모두 일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