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1. 답사지 선정 동기2. 사전지식3. 현장답사1 배리 삼존불2 삼릉3 냉골 석조여래좌상4 마애관음입상5 선각육존불6 마애여래좌상7 석조여래좌상8 상선암마애대좌불9 상사바위와 소석불⑩ 금오산 정상4. 결론1. 답사지 선정 동기경주는 어렸을 때 수학여행을 갔다온 것이 전부였다.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경주 얘기가 나오면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실제로 갈 기회는 없었다. 굳이 가려고 한다면 못 갈 것은 없겠지만 일단 청주에서 멀고, 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보니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과제물을 보고 핑계김에 다녀오기로 했다.가려고 마음 먹고 인터넷을 뒤적거려봤더니 경주에는 볼 것이 매우 많았다. 기억 조차 가물가물한 불국사와 석굴암, 대릉원, 박물관 등등. 그 중에서 고른 곳은 남산이었다. 남산은 서울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경주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좀 더 찾아봤더니 볼 것도 많고, 오랜만에 산을 탈 수 있는 기회도 되겠다 싶었다. 오르는 길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배리 삼존불 →삼릉 → 냉골 석조여래좌상 → 마애관음입상 → 선각육존불 → 마애여래좌상 → 석조여래좌상 → 선각마애여래상 → 상선암선각보살상 → 상선암마애대좌불 → 금송정터와 바둑바위 → 상사바위와 소석불 → 금오산 정상 →대연화대(삼화령)→ 탑기단석 → 용장사지 삼층석탑 → 마애여래좌상 → 삼륜대좌불 → 용장사터 → 탑재와 석등대석 → 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 이 코스였다.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며 자료를 찾아보았다.2. 사전 지식1 배리 삼존불이 세 석불은 이곳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어 있던 것을 1923년에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세운 것이다. 이 석불들은 7세기 중엽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것이다.2 삼릉이 계곡 북쪽 언덕에는 많은 무덤들이 줄지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지금은 세 개의 릉만 남아 있어 삼릉(三陵)이라 부르고 있다. 제일 앞의 무덤은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 917 ~ 924)이라 전해 오는 릉이고 가운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4 마애관음입상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북쪽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죽한 기둥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하계(下界)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은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을 배치하여 관세음보살임을 표시하였는데 목걸이와 가사를 동여맨 끈은 나비날개 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조각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伏蓮)위에 서 계신다.그런데 이 관음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법당을 지을 만한 곳도 없고 기와조각도 떨어진 것이 없으니 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을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산벼랑에 불상을 새기고 산기슭에서 올려다 보며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하여 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劇的)인 모습으로 나타내려 함이 아니었을까? 광배 없이 3m 정도 뒤쪽의 비스듬한 바위를 광배삼아 보살상을 조각하므로서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듯한 모습이다.5 선각육존불계곡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골짝 왼편에 자리잡은 넓다란 바위에 선각으로만 새겨져 있는 불상이 있다.경주에서 음각으로만 되어 있는 불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 선각육존불상은 뛰어난 신라불교의 회화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동쪽 바위 면에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서쪽 바위 면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겨, 현생과 내생을 나타내었다. 아미타삼존불은 좌우에 보살이 두 손에 꽃을 받쳐들고, 부처님은 죽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시는 내영아미타여래하게 8각으로 깍은 하대석과 면마다 안상을 새긴 중대석을 놓고 중대석위에 얹혀 있다.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 위에는 집을 지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처음부터 노천불이었던 모양이다. 집을 지을 경우 주위 환경의 분위기와 조화되지 않을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비바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집을 짓지 않았다. 가장 참된 것은 조화의 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우리 조상님들은 편리하기 위해서 미를 파괴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불상의 광배의 안쪽에는 부드러운 넝쿨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힘있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윗 부분이 조금 깨진 채로 불상 후면에 세워졌으나 1972년 겨울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나 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8 선각 마애여래상석조여래좌상의 옆 계곡 30여m의 바위 절벽면에 머리 부분만 선각으로 새긴 불상이 있다.이 불상은 바위 속에서 숨어있다가 살며시 그림자를 드러내 반겨 주는 듯한 모습이다.9 상선암 마애대좌불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며, 얼굴의 앞면과 귀부분 까지는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불상의 몸부분은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불상의 조각연대는 통일신라 하대로 추정된다.⑩ 상사바위와 소석불금오산신 상심(祥審)이 살고 있는 바위로서 동쪽면은 남근석과 기도처, 서쪽 면은 산아당(産兒堂)으로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들 낳기를 기도하는데 영험이 있다.상사바위의 동쪽에는 머리와 발을 잃어버린 작은 석불이 1구 있는데, 남산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석불이다.⑪ 대연화 편히 올려 주시오."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 보니 거기에서 돌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고 그 아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충담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다려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님이다.(三國遺事 第二卷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충담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에서 왕을 모시었다. 3월 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이 때 마침 큰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었다.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은 "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를 걸치고 삼태기를 걸치고 남쪽에서 왔다.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삼태기의 속을 바라보니 다구만이 가득하여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충담이라 하옵니다.""어디서 왔소?""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나에게 차 한 사발을 주시겠소?"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오?""그렇습니다.""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었다.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국사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을 하고 받지 않았다.⑫ 용장사지 삼층석탑용장사지 동편 능선 위에 자리하여 이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 탑은 현재 3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는데 높이가 4.5m이다. 높이 200m가량 되는 산의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점이 신라인의 자 대좌의 연꽃은 정면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내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불상은 풍만하고 건장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가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상호는 머리 깊이를 반분한 자리에 눈썹이 길게 그어졌고 양눈썹에 이어 아래로 뻗어 내린 예리한 콧등은 얼굴길이의 ⅓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뺨과 군살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았고 머리카락은 나발로 표현되어 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 놓고 있다.두광은 무늬 없이 두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는 명문이 3행으로 10여자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 9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⑭ 삼륜대좌불용장사지의 동쪽 등성이에 우리 나라에서 유래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얹혀있는 석불좌상이 있다. 현재는 머리가 없어져서 존명을 알 수 없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지대석은 자연석을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여진다. 높이 1m 남짓한 이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모양의 중대괴임을 얹고 그 위에 쟁반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고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고 세 번째의 중대괴임을 결구시킨 후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후 그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총 높이는 2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고 오른손은 선정인을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인상을 취하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은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자주 거론하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은 물결처럼 펄럭이며 무릎을 .
1. 수면의 생리하루의 체온변화를 조사해 보면 서카디안 리듬이라고 하여 오후 3-6시에 최고, 이른 아침 3-6시에 최저가 되며 이 온도 변동폭은 0.7-1.2 정도이다.수면시 심부 체온(직장온)의 저하가 클수록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상태이다. 잠들기 시작할 때 급히 저하한다. 이 경우 체표면에 흐르는 혈류는 증가하고 손이나 발은 따뜻해진다. 어린아이가 자고 있을 때 손이 따뜻해지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다. 손이나 발의 피부 표면에서 열을 방산시키므로 심부 체온은 낮아진다.수면 중의 발한량은 최초의 깊은 수면(논렘수면)일 때 가장 많다. 이 발한 작용도 열의 방산에 기여한다. 수면 중에는 대사량도 적고 여러 체온 조절 기능이 심부 체온을 낮추도록 작용한다.해뜰 무렵은 심부 체온이 상승기이며, 또한 해뜰 무렵이 될 수록 렘수면(이 경우 땀은 현저히 적다)이 길어지므로 땀은 적어진다.무서운 꿈속에서 흥분하여(꿈을 꾸는 것은 대부분 해뜰 무렵이다.) 갑자기 땀이 분출되는 경우가 있다. 정신성 발한이 일어나는 손바닥이나 발바닥에서는 전혀 발한되지 않고(정신성 발한 중추의 활동수준이 떨어져 있기 때문) 전신에서 발한한다.또한 수면 중의 특유한 발한으로 압발한이 있다. 이것은 너무 딱딱한 요에서 자는 경우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압박되어 있는 요쪽에서는 땀이 나지 않고 그 반대쪽에서 땀이 난다.수면을 취하여 처음 3시간 정도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 후에 뒤척임(체동)을 한다. 뒤척임 횟수는 보통 25-30회이지만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경우는 체동이 적다.수면자세도 중요하다. 좋은 수면자세는 머리가 6-8cm 높은 상태로 베개가 필요하다. 허리부분에 생기는 2-3cm의 틈을 요로 메워 몸을 받쳐준다.2. 침상기후취침할 때에는 침구를 사용하여 인체주변에 적당한 침상기후를 형성해야 체영방산이 순조롭게 일어날 수 있다.수면중에는 대사량이 적어 생산열량이 적기 때문에 침상기후는 의복기후 보다 다뜻해야 한다. 보통 온도 29-24 , 습도 40-50%의 침상기후에서 쾌적하다고 한다. 외기있다.겨울에서 봄에 걸쳐 침실의 온도가 10 들 넘으면 눈을 떴을 때 따뜻해졌다고 느낀다.장마가 갠 후 잠을 잘 잘 수 없다고 느낄 때(실온이 28 전후 이상일 때)에는 손과 발로부터 체열을 가능한 한 많이 방산하는 것이 좋으며(이 경우 구간부 특히 복부는 차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소매와 반바지 잠옷이 좋다.흡습성 · 흡수성, 방습성도 중요한 성능이다. 이부자리에 비닐시트를 씌워 인체에서의 땀이 외부로 방산되지 않게 하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1시간 반만 지나도 침상내 온도가 급상승하여 잠을 잘 못 자게 되었다.커버나 시트에 접촉할 때의 접촉 온냉간도 중요하며 추운 시기에 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따뜻한 시기에는 차게 느껴지는 것(돗자리를 펴는 등)을 요구한다.너무 부드러운 요나 침대는 바람직한 수면 자세가 유지되기 어렵고 수면 중의 체동도 많아 잠을 깊이 잘 수 없다. 잠을 자는 상태에서의 압력분포와 수면감과의 관계도 연구되고 있다.4. 쾌적한 수면에 영향을 주는 침구의 조건1) 이불보온성, 흡습성, 투습성이 있어야 하며 적당한 통기성이 있어서 흡습된 수분이 증발하여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불의 충전재로서는 견과 면솜의 보온성이 우수하다.이불이 너무 무거우면 압박감을 주게 되어 숙면을 방해라고, 너무 가벼우면 허전할 뿐 아니라 보온성이 떨어지고 안락한 수면을 지속할 수 없다. 겨울철 크기가 동일한 이불의 면 솜무게를 1.5kg, 3.0kg, 4.5kg으로 달리하여 온돌에서 취침시 형성되는 생리반응을 연구한 결과 4.5kg의 무거운 이불은 덟고 습한 침상기후를 형성하였고 피부온 상승흉도 높아 체동이 증가하고 쾌적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5kg의 이불보다는 3.0kg의 이불을 사용하였을 때가 더 쾌적한 침상기후를 형성하였다.2) 요, 매트신체의 안락한 지탱과 동작의 자유 및 충격의 완화, 균형된 침상기후를 유지하는 성질이 요구된다. 탄력성이 너무 크고 부드러운 것은 신체의 지지가 불안정하고 돌아눕기가 어려워. 겨울철 온돌을 가온하는 경우면 솜인 경우 약 3.5cm정도 두께의 요가 적당한 석으로 나타 났다.쾌적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침3대나 요의 폭은 어깨너비 x 2.5배로서 남자의 경우 어깨너비를 43cm로 보면 약 110cm정도이고 여자의 경우 어깨너비를 38cm정도로 보면 약 95cm가 이상적인 침대와 요의 폭이다. 침대와 요의 길이는 신장 x 1.05 + 15cm로서 보통 남자의 경우 190cm, 여자인 경우 178cm의 길이가 가장 이상적인 침대와 요의 길이이다.3) 침대침대는 요와 같은 조건을 가져야 한다. 너무 푹신한 침대는 몸 전체에 압력을 받으므로 불편한고, 체형이 변형될 우려가 있으며 피부와의 접촉면이 많아서 여름에는 무덥기 때문에 비교적 딱딱한 침대가 등을 평면으로 유지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 침대는 디자인보다는 쿠션의 선택이 더욱 중요하며, 쿠션의 두께는 20cm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4) 베게베게는 누웠을 때 신체의 자세를 바르고 자연스럽게 유지해 주며 체동을 용이하게 해주고 바닥으로부터 전해오는 소리나 진동 등을 차단한다. 또 바닥과 접촉하는 머리에 미치는 압력을 완화해 주고 표면이 유연하여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부적당한 베게로서 지나치게 푹신한 것은 자세 유지가 원활하지 못하고 사용중에 침구 속으로 함몰되는 신체 부분이 많아져서 발한이 많이 되어 불쾌감을 준다. 또한 지나치게 단단한 것은 접촉되는 신체 표면에 체암이 증가되어 장시간 사용할 경우 경부에 통증을 유발하게 된다.베게도 다른 침구류와 같이 지역적인 풍토와 민족적인 생활 습관이나 주민양식에 따라 다르며 또 개인적인 취침자세, 체격에 따라서도 다르다.쾌적한 수면에 영향을 주는 베게의 인자로는 크기, 충전재(베갯속), 형태 등이나 그 중에서 특히 베게의 높이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쾌적한 베게의 높이는 바로 누웠을 때보다 옆으로 누웠을 때 좀더 높아지는데 바로 누웠을 때 6.5-7.5㎝, 옆으로 누웠을 때는 7.5-9.5cm가 적당하다고 한다.들면 성인의 머리 무게는 10-12파운드 정도이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볼링공의 무게가 그 정도이니까 얼마나 무거운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우리가 서있거나 앉아있을 때 그 정도의 무게를 목 위에 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경추가 커브를 상실하여 일자로 변한다면 그 무게가 완충작용 없이 모두 목과 어깨에 바로 실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추디스크, 어깨결림, 두통 등의 증상을 초래하게 된다. 지금까지 경추의 전만을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는 베개를 베는 목적이 수면 중에도 그러한 경추 부위의 곡선을 적절히 유지시켜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개의 역할은 누웠을 때 머리 및 경추 부분과 지면사이에서 발생하는 공간을 채워주는 것으로서 잠을 자는 동안에도 서 있을 때의 자연스런 자세를 유지시켜 주는 베개가 이상적이 베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서 있을 경우에는 책을 읽듯이 고개를 5~6도 정도 앞으로 기울인 자세가 경추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경추의 전만을 잘 유지하는 자세라고 여겨진다.이 자세를 그대로 눕혀 놓으면 잠을 잘 때 가장 편안한 자세가 되는 것이다. 즉 본인에게 알맞은 베개를 사용하면 누웠을 때 경추의 전만이 잘 유지되며 얼굴의 각도는 수평면과 5도를 이루게 된다.그렇다면 자신에게 적절치 않은 베개란 어떤 것이고 또 어떤 부작용들이 있는지 알아보자.고침단명 이라는 말이 있다. 높은 베개를 배고 자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경추는 앞으로 볼록한 커브를 유지해야 정상이다. 현대인의 생활은 책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는 작업이나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하는 컴퓨터 작업등을 많이 요구한다. 이러한 자세들은 경추의 C자형 곡선이 일직선으로 펴지도록 만들며 이 자세가 오래되면 결국은 경추를 일자가 되도록 만든다.옆에서 보았을 때 편하게 선 자세에서 귓구멍이 어깨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다면 경추가 정상보다 펴져서 얼굴이 앞쪽으로 나와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이런 체형에서는 목 뒤쪽의 근육은 항상 늘어난 상태가 되고 목 앞쪽의 근러 척추질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므로 바로 잡아 줄 필요가 있다. 바른 베개의 선택은 그 첫걸음이다.그렇다면 베개를 낮게만 배면 좋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베개의 높이가 지나치게 낮으면 이 또한 목뼈에 무리를 가하고 신경이나 혈관의 흐름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으며 기도가 좁아지게 만들어 원활한 호흡을 방해한다. 베개를 배지 않을 경우에도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얼굴이 붓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또 머리가 지나치게 뒤로 젖혀지고 턱이 들리는 베개를 사용하면 신경계통의 이상과 뇌로 흐르는 혈류량이 많아져 불편을 초래할수 있다.그렇다면 자신에게 알맞은 베개 높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베개 높이의 측정은 경추호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경추호란 옆에서 봤을 때 목이 이루는 커브를 말한다. 누웠을 때 이 부위가 바닥과 형성하는 공간을 베개가 지지해 줘야 한다. 측정은 자연스럽게 선 자세에서 얼굴을 편안하게 5~6도 정도로 기울인 상태에서 실시한다. 목에서 가장 튀어나온 뼈인 제 7경추의 하단에서 위쪽으로 가상의 수직선을 긋고 그 선에서 직각으로 목에 선을 내렸을 때 가장 깊은 지점이 경추호의 깊이가 된다.사람마다 체형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론 자신의 팔뚝 굵기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보통 체격의 남성은 4~6cm, 여성은 3~4cm가 적당한 베개 높이가 된다. 목이 길고 마른 체형은 이보다 1~2cm낮은 베개를 사용하고 어깨가 넓고 살찐 체형은 1~2cm높은 베개를 사용하면 된다. 또 옆으로 누워 자거나 웅크리고 자는 습관이 있는 경우는 위의 치수에 1cm를 더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수치들은 실제로 우리가 베개를 베었을 때 무게에 의해 베개가 낮아진 높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소재에 따라서 배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높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또 베개를 베는 위치와 자세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사용하는 원통형 베개는 머리 밑에만 받치게 되어 있고 소재도 덜 푹신하여 높이도 높은 경향이 있다. 또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네해준다.
Ⅰ. 서론1. 암의 원인건강한 신체의 유전자는 세포분열을 조절함으로써 모세포를 복제하여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데, 이 세포는 성장하여 죽은 세포를 대체하고 손상된 세포를 치유한다. 그러나 암은 세포분열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변이에 의하여 DNA의 화학적 오류를 탐지하는 유전자의 활동이 방해되어 세포분열을 막는 내재적 억제수단이 없어진다. 종양이나 신생물이라고 불리는 비정상적인 세포 덩어리가 성장하면서 성장에 필요한 영양물질을 종양에 공급하기 위해 혈관이 형성되고, 결국 종양은 건강한 조직에 침투하여 퍼지게 된다.암의 발생 원인은 다음과 같다.1) 유전인자일부 암은 유전적 요소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유방암의 가족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유방암이 발생할 위험이 더 크다. 그러나 이것은 그 사람이 암에 걸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2) 면역인자건강한 면역계는 외부 세포를 인식하고 이들을 파괴하는 반면 비효과적인 면역계는 종양세포를 외부세포로 인식하지 못해 암세포가 성장하게 된다. 노화에 의해 면역기능이 저하되므로 나이가 들수록 암 발생률이 증가한다. 면역계와 바이러스 감염을 억제하는 약제나 면역계에 심한 부담을 주는 다른 장애는 암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3) 환경인자환경인자 가운데 방사선, 햇빛, 물과 공기의 오염, 흡연에 대한 노출은 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식이인자식사 성분은 특정 암의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는데, 암 발생을 유발하고 증진시키며 반대로 암 발생에 대한 보호기능도 가지고 있다.2. 주요 암 사망률각종 암에 의한 사망률 변화를 연구해 보면 인구 십만명당 90년 110.4명에서 2000년 122.1명으로 10.6% 증가되었다.지난 90년에 비해 사망률이 증가한 암은 폐암, 대장암, 췌장암, 유방암이다. 특히 폐암은 조기진단의 어려움과 인구의 노령화 등으로 크게 증가하여 2000년에는 지금까지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였던 위암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대장암, 췌장암, 유방암 물질의 작용을 돕는다. 따라서, 하루의 1인당 식염 섭취랸은 8∼9g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보다 섭취랸이 낮을수록 위암 발생률이 저하되나 음식맛이 너무 싱거우면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없어지므로 8g 내외를 일반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또한, 당질의 섭취랸이 많고 짜게 먹으며 단백질이나 녹황색 채소, 비타민 등의 섭취가 적은 나라에서 위암 발생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위암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식품선택, 조리법과 함께 먹는 음식 종류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2) 위암의 치료위암의 치료에는 수술, 방사선 조사, 화학요법이 주로 이용되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조기에 진단해서 암 부위를 절제하는 것이다. 진행암의 수술 후 5년 생존율은 30∼45%이지만 조기 위암에서는 92%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기 위암보다는 진행 위암 상태에서 수술하는 경우가 많다3) 위암 환자식의 기본방침위암을 위한 영양관리는 병의 상태와 위의 기능장애 정도, 암의 존재 부위, 환제의 증세, 항암제에 의한 화학요법 및 방사선요법 등의 치료방법, 증세진행 시기에 따라 최대한 체중유지를 할 수 있도록 한다.암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 수술이 불가능하면 가능한 한 환자가 원하는 음식을 자유롭게 먹도록 하나, 식욕이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입맛을 돋우는 산뜻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1 주식환자의 증세에 따라 미음, 쌀죽, 진밥, 부드러운 칼국수 등을 주식으로 준다.2 단백질 식품흰살코기의 생선으로 만든 생선찜, 생선국, 생선조림, 그라탱, 생선 크림 수프, 부드러운 생선회, 영계백숙, 영계편육, 족편, 순두부, 설렁탕(국물), 곰탕(국물), 달걀찜, 달걀반숙, 수란, 우유, 부드러운 치즈 등을 이용한다.3 채소류지섬유채소가 좋은데, 시금치나물, 당근나물, 애호박나물, 무나물, 콜리플라워찜 등이 좋다. 병세에 따라서는 채소를 삶아 걸러 퓌레로 만든다. 신선한 채소로 만든 채소 주스도 권장한다.4 과일류선미가 강하지 않은 사과를 삶아서 으깨거나 퓌레를 만든다. 잘 익은 복숭아와 파파야, 바리고, 10∼15일 후에는 회복식을 거쳐 보통 음식을 공급하되 무자극성식을 하도록 한다. 환자의 회복 정도에 따라 식사량은 점점 늘어나며 1년 이내에 어떤 화자들은 하루에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위 전체를 절제한 환자들은 평생동안 소량씩 자주 식사하여야 한다.간혹 환자에 따라 경구섭취가 어려울 경우 경관급여를 시행하는데, 위를 절제한 경우에는 공장조루술을 시행하여 소화흡수되기 쉬운 성분영양식을 환자에게 공급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5) 위 절제 후의 영양문제위 절제 후에는 환자의 약 50% 가량이 정상 체중으로 회복되지 못하는데, 위를 얼마나 절제하느냐에 따라 수술 후 발생하는 문제가 다르다. 위 절제 후 위산의 분비 감소와 음식물이 정체됨에 따라 박테리아가 과잉 성장하여 설사 및 흡수불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위 절제로 위의 용적이 감소하므로 식사 시에 만복감을 너무 일찍 느끼고 덤핑 증후군(위 절제 후에 나타나는 일련의 증상)과 설사 때문에 먹기를 두려워하여 식사 섭취가 감소되므로 체중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덤핑 증후군과 설사를 조절하고 음식겁취량을 늘려 주면 어느 정도 체중감소를 막을 수 있다.위산의 부족은 무기질인 철분과 칼슘 흡수불량으로 인해 비혈과 골다공증이 유발된다. 또한, 펩신의 분비 부족으로 단백질의 소화에도 문제가 생긴다. 위 절제 수술로 인해 내적 인자의 부족으로 비타민 B12 흡수부족이 일어나 악성 빈혈이 발병할 수도 있어, 위 전부를 절제한 경우 주사로 비타민 B12의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6) 덤핑 증후군덤핑 증후군은 위의 2/3 이상을 절제한 환자가 음식을 섭취한 후에 유발되는 복합적인 증상으로 위 절제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이 증상은 수술환자 중 20∼40%에서 나타나며, 대부분의 경우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좋아진다.1 원인과 증상일반적으로 섭취한 음식은 위에서 소화되어 미즙이 된 후 소량씩 천천히 십이지장으로 이행된다. 그러나 위 절제로 인하여 위의 크기가 작아지면 위액 분비량도 감소되고 흡수되어 혈당을 올린다. 섭취량을 하루 100-200g으로 줄인다. 그러나 덤핑 증후가 없으면 조심스럽게 당질 양을 늘이되 하루 총 에너지 섭취량의 60% 이내로 제한한다.·섬유소는 당질의 흡수 속도를 늦출 수 있으므로 섬유소가 많은 곡류, 채소, 과일 등을 잘 다지거나 잘 씹어서 섭취하도록 한다.·지방은 음식물의 위통과 속도를 늦추므로 음식을 천천히 장으로 내려 보내고 열량이 많아 체중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므로 지방변이 심하지 않으면 중정도의 양을 주어도 괜찮다.·고단백질식을 한다. 단백질은 체중을 유지하고 상처를 회복하는 데 필요하며 체조직을 구성하고 위점막을 강화시키므로 전체 에너지의 20%를 양질의 단백질로 공급한다.·부드럽고 무자극적인 음식을 소량씩 자주(5-6회/일) 급식하여 위에 부담을 줄이고 장으로의 다량 유입을 막는다.·식사 시의 액체는 위의 공복과 장으로의 빠른 유입을 촉신시키므로 식사 시에는 물이나 다른 액체를 마시지 말고, 식전·식후 30분 내지 1시간 전후에 저당질 음료를 공급하되 특히 찬음료는 위를 빨리 통과하므로 피하고 체온과 비슷한 온도가 좋다. 초기에는 수분 섭취 시 1회량을 50cc 정도로 시작하여 점차 1회 섭취량을 증가시키도록 한다.·환자에게 천천히 식사할 것을 권하고 식후에는 바로 눕혀서 20-30분간 휴식한다. 이것은 음식이 조금 더 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기능적인 유당불내증이 일어나므로 유당이 포함된 우유와 유제품은 피하고 소화해 낼 수 있을 때 공급한다.·표준체중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루 에너지 및 영양소 권장량을 충분히 공급하고 환자 개인마다 음식의 수용능력에 차이가 있으므로 세밀히 관찰하도록 한다.·너무 짜거나 뜨거운 음식은 피한다.·초기에는 엄격하게 식사형태를 제한하나 점차 환자상태에 따라 자유롭게 한다.2. 장암장암은 소장·대장의 상피성 악성 신생물이며, 발생 부위에 따라 소장암과 대장암으로 분류되나, 소장암의 발생 빈도는 낮다. 대장암의 발생 부위는 직장이 가장 많고 다음은 S상 결장, 맹장, 이게 되어 설사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이때, 환자에게 위산의 과다분비를 줄이기 위해 시메티딘을 주로 투여하며, 장운동을 느리게 하기 위하여 로모틸을 투여하기도 한다.3) 장암 환자식의 기본방침대장암의 식사처방은 소화가 잘 되고 설사를 줄이며 장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섬유소가 적으며 열량이 높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다. 저섬유-저잔사-저유당-무자극-저지방 식사를 한다. 알코올과 카페인은 장의 운동을 자극하므로 금하는 것이 좋으면 환자의 소화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고단백, 고열량 식사를 제공하여 정상체중을 유지시켜야 한다. 이 밖에도 특히 수용성 비타민과 칼슘, 마그네슘 같은 무기질의 공급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환자의 경구영양 섭취의 어려움이 있다면 환자의 상태에 따라 장기적인 성분영양식 이나 TPN을 고려해 볼 수 있다.4) 장 수술 후의 식사요법처음 한 달간은 물과 전해질 평형을 조절하고 상처의 감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영양소는 TPN으로 공급한다. 소장이 약 20∼30% 정도 남아 있으면 약 한달 후에 입으로 등장액의 물을 공급할 수 있다. 입으로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은 위장에서의 호르몬 분비를 자극시켜 남아 있는 소장의 흡수 능력을 증가시키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입으로 섭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입으로 소량의 물을 마실 수 있으면 성분영양식을 사용하다가 점차 정상식으로 차츰 옮아가야 한다. 환자는 식사 때 고체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식사 시 물이나 액체를 먹지 않음으로써 위가 비는 속도를 가능하면 늦추어야 한다.일주일에 1∼2가지의 새로운 음식물을 환자가 소화시킬 수 있는 범위에 더해 가면서 서서히 영양소의 섭취를 늘린다. 이 때, 음식 섭취에 관한 일기를 쓰면 도움이 된다.지방이 적은 양질의 단백질 식품으로 흰살코기의 생선, 두부, 달걀 등과 당질에서 영양공급을 하며, 아주 차갑거나 자극성이 강한 음식은 피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복부를 차갑게 하지 않도록 하고, 식후 30분 가량은 안정을 취하는 것에 유의한다. 일반적으한다.
Ⅰ. 서론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함족의 여러 부족들이 사막의 오아시스 주위와 나일강 유역에 흩어져 부족국가를 세웠으며 BC 3000년 경 메네스왕에 의해 상·하 이집트가 통일되었다.이집트는 약 3000년간 30왕조에 걸쳐 통치되었는데 고왕국 시대는 거대한 피라밋이 만들어진 시기이고 중왕국 시대는 상업적으로 활동 범위가 넓어진 시기이다. BC 1600년경부터 시작되는 신왕국 시대는 모든 분야에 걸쳐 국력이 크게 융성하였던 시기이다.이집트는 나일강 연안의 좁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적의 침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폐쇄적인 정치·경제·사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후는 따뜻하고 건조하였으므로 개방적인 의복형태가 발달했다. 특히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농업·정치·종교·학문·예술에 영향을 미쳤다.사회구조는 신격화된 파라오를 정점으로 그 밑에 사제·귀족·관리·군인·농민·노예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기반은 농업이 주가 되었으며 홍해·지중해를 건너 시리아, 레바논과 교역을 하였다. 이집트의 산물인 파피루스와 리넨을 수출하고 소아시아로부터 금·은·동·목재·향료·동물의 가죽 등을 수입하였다. 나일강변의 늪지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의 줄기로 종이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질이 단단한 암석·마노·벽옥·아메시스트 등의 원석과 금이 산출되었다.이집트 문명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집트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전통에 대한 숭상은 문화발달의 중요한 핵심이 되었으며 이집트 문명의 특성은 초기왕조시대에 형성된 형식 그대로 2500여년간 지속되었다. 나르메르왕의 허리띠에 달려있는 황소머리 모양이 3000년간 파라오의 예복의 일부로 남아있는 것이 그 한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종교는 농업과 관계가 깊은 천체와 자연현상을 숭배하는 다신교였으며 그 중에서도 태양신 Ra가 최고의 신이었다. 이집트인은 태양이 모든 생물의 생존을 좌우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여러 가지 명칭과 의식을 통해 태양을 숭배하였다. 또한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은 파라오와 귀족들의 거대한 피라밋을 만들게 하였고 피라밋 내부의 벽면에는 신이나 왕이 주관하는 의식, 노예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일상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고 악기·화장품·무기 등이 부장품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어서 복식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특히 1922년에 투탄카멘 왕의 무덤에서 나온 신왕국 18왕조의 부장품들은 새로운 복식자료로서 쓰이고 있다.Ⅱ. 본론1. 복식의 일반적인 특징이집트에서는 미술분야에서 초기 몇 세기 동안에 형성된 기본형이 긴 세월을 두고 어떤 동질성을 유지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의복에 있어서도 고왕국·중왕국에서는 몸에 천을 둘러 입는 단순한 형태가 지속되었다. BC 1500년 이후 신왕국 시대에 와서 지중해 연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까지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독특한 이집트 복식에 동방의 문화가 융합되어 복식의 종류가 늘어나고 형태에 변화를 가져왔다.무역을 통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 및 노예가 늘어나고 지배계급이 형성됨에 따라 이집트 초기의 단순한 의복의 옷 길이·입는 법·장식물 등이 다양해졌고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물이 많이 생겨났다. 상류 지배계층은 외래적 요소가 가미된 T자형의 튜닉과 칼라시리스·하이크 등의 새로운 의복을 입었다. 생산과 노동에 종사하는 하층 계급에서는 간단한 요의만을 입거나 거의 나체로 생활하였다.고왕국 시대의 남녀복식은 기본 복식에 차이가 없었고 다만 머리장식이나 띠를 매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중왕국 시대 이후부터 남자들의 요의는 주름이 있는 장식적인 형태로 되면서 트라이앵글러 에이프론이나 쉔도트와 같은 장식물이 덧붙어 신분과 권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여자들은 몸에 꼭 맞는 쉬스 스커트를 주로 입었고 로인 클로스·칼라시리스·하이크 등은 남녀 모두가 입었다.옷감은 주로 리넨과 라미를 사용하였으며 후기에는 면직물과 모직물도 사용하였다. 리넨이 옷감으로 쓰인 것은 나일강유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재료이고, 마직물의 특성이 이집트의 기후풍토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얇고 섬세하게 적조된 것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하거나 잔주름을 잡는 데 적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밖에도 아마는 미이라를 감싸는 재료로 사용되었다.이집트인의 의복은 흰색이 대부분이며 노란색이나 적황색의 의복을 벽화에서 다물게 볼 수 있는데 홍화나 대청과 같은 식물성 염료로 마직물에 매염제를 사용하여 염색을 하였을 것이다. 왕족의 그림에서 색깔있는 옷을 볼 수 있으며 띠나 장신구에 녹·황·적·자·청·다색 등이 사용되었다.이집트인의 의복은 흰색의 단순한 형태에 장신구로 색채와 장식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반원형의 턱받이처럼 새긴 넓은 목걸이와 각종의 펜단트, 특이한 모양의 가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2. 상징성사회적인 모든 요인들은 인간의 정신세계 형성에 영향을 주어 복식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복식으로 표현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의식세계를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1) 인체미 존중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 상흔이나 문신, 신체변형 등으로 미를 표현하고 있을 즈음에 이집트인들은 이미 인체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그들의 이러한 미의식의 표현은 먼저 신체노출로 나타난다. 무희들이 춤출 때나 악사가 연주할 때 또 노동할 때 그들은 흔히 허리에 띠만 두르고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하였고, 또 여자노예들은 때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완전노출로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 의복의 가장 기본이 되는 로인클로스는 허리에서 아래 부분만 가리므로 상체, 팔, 다리 등은 그대로 노출되었다.그리고 향유를 사용해 인체미가 돋보이도록 하였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화장품 중 향내 나는 기름덩어리를 가발 속이나 그 위에 놓아두어 기온과 체온에 의해 그것이 녹아내림에 따라 향기도 발하면서 의복을 몸에 밀착시키는 효과를 나타내었다.2) 단순미의 추구고대 이집트인들은 의복을 통해 단순·간결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그들의 기본의복인 로인클로스는 일반적으로 그 착용방법이 간단하며 착용된 모습 또한 아주 단순한 형태를 나타낸다. 신왕국에 이르러 드레이프가 많은 의복들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특권층이 사용하였을 뿐 일반백성들에게는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초기 복장 그대로가 3000년 가량 계속 이어졌다.간결한 머리형이나 가발의 윤곽선 또한 그들의 단순미를 추구하는 정신의 한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3) 권위 존중엄격한 계급사회의 구성원이었던 그들은 질서를 위해 사회계급의 높고 낮음을 복장을 통해서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신왕국 말까지 주로 무늬 없는 간단한 의복만 착용한 데 비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착용하는 복장의 종류수도 일반 백성들보다 점점 많아졌고, 또한 의복을 변화 있게 착용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나타내었다.또 이 시대에는 착용자를 보다 더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들이 착용자의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었다. 왕과 왕비는 신을 상징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아름답고 권위를 상징하는 장신구를 사용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왕의 왕관과 거들에 다는 장식 펜던트이고 또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와 도리깨를 들기도 했는데, 지팡이는 왕국의 지도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통치의 상징이고, 도리깨는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에게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또 그들은 수염을 깎았는데 왕·왕비와 왕족은 권위의 상징으로 인조 수염을 달아서 위엄을 나타내었다.4) 종교 신봉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신을 섬겼고 신에 대한 경배심을 의복에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즉, 태양신을 숭배하여 왕관을 태양 형태로, 또 왕의 로인클로스의 삼각 앞자락을 방사선 주름으로 장식하였다. 또 수호신을 상징하여 매와 독수리를 관과 펙토랄에 장식하고, 여신을 나타내는 소의 뿔, 머리 등을 관, 거들 펜던트, 거울 손잡이 등에 장식하였다.그 밖에 나일강의 신은 직물에 물결무늬로, 바람신은 직물의 문양, 관 등에 깃털로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신의 상징이 복식에 많이 나타난 것은 그들의 의식세계가 매우 종교적이었음을 말하며, 또 신의 상징물이 왕의 복식에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봐 그들 사회가 신정일치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인성교육의 인격교육적 접근1. 서론: 인격교육의 부흥기존의 인성이론은 정신분석적 관점, 인지주의적 관점, 행동주의적 관점이 있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인성교육의 '통합적 관점'이 관심을 끌고 있다. 기존의 주된 관심은 첫째 인간의 인성이 얼마나 비슷한지, 둘째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본질을 규명하려고 하였으며, 셋째 특수한 현상에 대한 특이한 행동을 설명하는 비정상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두어졌다. 이에 따라 상이한 접근의 해결점도 서로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이런 개별적 접근을 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인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인간의 인성이 갖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협소함과 한계가 발견되면서 인성의 통합성을 시도하고 있다(Kurtines & Gerwirtz,1995: 201-208).인성의 통합적 이해는 인격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이름하여 '통합적 인격교육'이라고 불리어진다. 인성교육의 핵심을 차지하는 통합적 인격교육은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차원을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을 특화시킨 분절된 접근이 아니라, 총체적 인간상을 설정하여 통합적(integrated, holistic) 접근을 시도한다. 통합적 인격교육은 역설적으로 동양적 사고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서양에서는 가치갈등이나 문제상황을 중심으로 한 가치명료화 모형이나 콜버그류의 인지발달론을 중심으로 한 도덕적 추리 모형이 도덕성 발달 이론의 주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갖는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인하여 행동에 대한 통합적 주재자로서 인격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인격교육이 다시 부흥하고 있다.우리나라는 원래 동양적 전통에 따라 일찍이 인격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렇지만 동양적 인격교육은 자율성을 가진 민주적 인성이라기 보다는 순종적 성격을 지녔기에 제 기능이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순종적 성격은 인격교육의 정착을 어렵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는 통합적 인격교육은 기존의 인격교육의 부정적 모습을 극복하면서 제기되고 있어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즉, 기존의 인격 위치를 가능하게 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사람(person: 인격체)의 어원을 보면 인격의 특별한 위치를 잘 말해준다. 사람의 어원인 'persona'는 연극을 할 때 쓰고 나오는 가면, 즉 '행위자의 얼굴'을 뜻한다. 행위자의 가면은 배역이 설정되면서 그가 담당하는 역할, 배역이 전달하는 대사의 내용, 개인의 역할과 타인에 대한 관계, 그리고 한 사람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들을 포함한다. 'persona'의 어원이 또 '관계'(relatio)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인격은 기본적으로 자기 아닌 남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신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론적 성격을 보여준다(심상태,1989: 114-115). 인격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자신을 실현한다. 이렇게 인격은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다. 즉, 인격적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유지와 발전은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Langford,1985: 181-186). 이제 인격은 더 이상 인간 존재 자체가 아니고, 사회적 관습의 반영이고 신분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어떤 가면을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칭찬과 비난의 성격이 담겨 있다.그렇다면 가면의 지속적 징표를 갖는 일관된 가면을 올바로 쓰도록 하는 것이 '인격'(charakter)이다. 인격은 그리이스 어원으로 후천적 노력을 통해 '조각된'(engraving) '지속적 징표'(enduring marks)의 뜻을 갖고 있다(Benninga,1991: 134). 즉, 사고방식과 정서적 반응, 그리고 행동양식 등에서 어떤 내적 특질과 성향을 지니는 것이며(Wynne,1998:64), 어떤 궁극목적을 추구하며 일관된 삶을 사는 한 사람의 지속적 자질과 성질을 조각하여 소유하고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Moody-Adams,1990: 115-118).인격은 명료화하고 학생의 자율성을 더욱 확보해주는 것이 도덕성 교육의 효율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각종의 덕목과 규칙, 그리고 가치들이 들어있는 '덕의 보따리'를 아동에게 설교하거나 부과하려는 품성교육 또는 인격교육은 '주입식' 도덕교육의 강제적 방법이라는 것이다(Kohberg,1996:115). 이러한 주입식 도덕교육을 '신보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Pupel,1998:140).그런데도 지금 다시 또 인격교육이 재부상하는 것은 마땅히 가르쳐야 할 가치나 규범을 가르치지 않고 그것을 개인의 선택과 자율성에 의존함으로써 가치의 공동화를 초래하였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어느 사회이든 도덕적 가치의 전수가 도덕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지는 도덕'에서 '실천하는 도덕'으로 전환을 도모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인격의 특성인 양심, 자율성, 고결함, 정직, 용기, 우애, 성실성, 진실성, 책임감, 절제, 자기긍정감, 정의, 공정성, 지혜, 인내, 존경, 친절, 공감, 보살핌, 연민, 분담, 관용 등과 같은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는 '덕목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덕목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고, 인간 삶의 본질적 목적을 구현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인격교육의 주장에 대해 찬반논변이 상당하다. 입장에 따라 합의에 이르기가 매우 어려운 덕목, 이를 테면 정직이나 용기, 정의, 봉사 등의 덕목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는 것은 아동을 맹목적으로 길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대신 근대적 합리주의적 도덕성발달론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양자의 대립적 논쟁을 거치면서 서로의 장단점이 걸러지면서 '통합적 인격교육론'으로 논의가 모아지고 있다.3. 인격의 발달과 기능인격도 도덕성의 발달처럼 다음과 같은 발달단계를 거친다(Leming,1993). 첫째, 훈육이나 강제를 통해 또는 자신의 관심에 따라 활동의 순응이 이루어지는 '자기중심의 단계', 둘째 사회적 집단 속에서 규범이 지를 이해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도덕적 추론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을 도와주고, 가치들이 갈등을 일으킬 때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를 도와주는 원리들을 구성하도록 한다. 아이들의 도덕적 추론이 발달함에 따라 그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또 어떤 일을 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합당한 도덕적 이유들을 규명하여 명료화하는 것이다.인격의 인지적 요소는 인격 발달을 위한 기본적인 것으로서 문제상황의 도덕적 측면을 아는 것, 도덕적 가치들과 구체적 상황에서 그 가치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아는 것, 균형있는 관점을 취하는 능력, 도덕적 추론의 능력, 사려깊은 의사결정의 능력, 그리고 도덕적 자아인식의 능력(자기 자신에 대한 앎과 타자에 대한 앎)이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평가해 보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자기지식을 발달시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의 장점과 단점들을 깨닫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단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한정식 식당에서 모두가 고루 먹게 되어 있는 음식임에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맛있는 음식을 뒤죽박죽 먹어 치워 남의 손이 갈 수도 없게 만드는 사람은 도덕적 판단능력이 마비된 도덕적 문맹자이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위치에서 바꾸어 생각하는 사고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인지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도덕적 문맹자는 선의 실천적 지식과 특정의 상황에서 선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비판적 판단력을 결합시키는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도덕적 독해능력을 갖게 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오늘의 학교교육은 도덕의 암기능력만을 신장시키는 기술공학적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도덕적 가치판단 능력을 신장시키지 못함으로써 도덕적 문맹자를 양산하고 있다.둘째, 인격교육은 '정의적 요소'로 구성된다. 정의적 요소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아무리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느낌이 없으면 행할 수가 없어 있다. 이 점에서 행위를 촉발시키는 동력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있다고 보는 점에서 주자는 서양의 정서주의자 흄과 견해를 같이 한다.주자는 본성(性)이란 마음의 이치이며, 감정(情)은 접촉을 통해서 생기는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성(性)은 사려분별, 가치판단 등의 의식작용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이며, 의식작용과 인지작용이 발동하기 시작한 후의 마음이 사람의 '정'(情)이라고 하였다(이승환,1998: 274-275). 정은 마음의 고요한 상태인 본성을 겉으로 드러나게 움직이게 하는 '氣'라고도 할 수 있다. 맹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사람의 완성된 성질인 마음의 실체인 본성(性)을 넓혀 가득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후천적 능력이나 성질을 '정(情)'이라고 하였다(장대년,1998: 390-395). 측은지심이라는 도덕적 감정은 도덕적 본성인 인(사람됨)이라는 씨앗에서 솟아나오는 싹, 즉 본성의 실마리인 '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리론(主理) 입장과 주기론(主氣) 입장에 따라 인간의 본성 이해는 달라지지만 '본연의 성(理)'과 '기질의 성(氣)'을 모두 융합시켜야 인격의 전인적 발전을 고루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날 서양에서는 이성에서 감성으로의 사고전환을 모색하면서 대체로 통합된 본성론이나 인격론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관심을 끄는 '통합적 인격교육론'이다. 도덕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행위의 결과를 예견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법칙의 윤리를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인격을 갖춤으로써 다양한 도덕적 사태에 대해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윤리, 즉 덕의 윤리를 갖는 것이 도덕적 삶을 사는데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Watson,1990: 449-469; Carr,1998: 107). 추리력, 문제해결, 비판적 사고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합리적 도덕성 발달보다 덕의 발달을 중시하는 인격교육으로 패러다임의 이동을 모색하고 있다. 도덕윤리적 결정과 관련된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일련의 신념과 가치들을 가르치는 인격교육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