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들어가는 말-2중국 차 역사 -2중국차에 얽힌 근현대사-6중국차의 분류-8다기 : 명칭과 용도-12차와 중국의 풍속-13중국 각 지역 각 민족의 차 문화-15중국의 음차 풍속-17중국인들의 飮茶 습관과 관습-18맺음말-18들어가는 글중국음식의 조리과정을 떠올려 볼 때,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커다란 솥의 끓는 기름 그리고 그 속에 각종 재료들이 끓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중국음식은 대체로 볶고(차오:炒), 졸이고(젠:煎), 튀기고(자:炸), 찌고(정:蒸), 굽는(카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조리 과정들의 공통점은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름진 음식을 먹는 중국인 중에 왜 비만인이 잘 눈에 띄지 않을까?말하자면 중국인들은 ‘자연다이어트’ 효과를 내는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차에는 카페인 성분과 함께 알칼리성을 띄는 성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차를 마시게 되면 그것에 체내에 빠르게 흡수되어 높은 농도의 알카리성 대사물질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바로 이같은 원리가 중국인의 비만을 막아내는 역할을 한다. 즉,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면 체질이 산성화되어 소화불량과, 만성피로를 일으키기 쉬운데 차를 마시면 몸속의 알카리성의 대사물질이 기름기를 통해 생긴 산성화된 물질과 반응하여 혈액의 산도를 균형 있게 지켜주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하루 종일 뜨거운 물(카이쉬:開水)을 보온병에 담아서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차를 즐겨 마신다. 이렇게 중국인들의 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문화적인 역할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에게 차는 어떤 의미일까? 중국의 차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다.중국 차 역사고대 전설과 고사일찍이 중국에는 “神農嘗百草, 日遇七十二毒, 得茶而解 (신농이 백(百) 가지의 풀을 맛보며 매일 72가지의 독(毒)을 발견했는데, 차(茶)로써 그것을 모두 해독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인들은 신농씨(神農氏)를 최초로 차(茶)를 발견하고 이물품들을 말한다. 유명한 차들을 골라 지정된 시간, 지정된 장소에서 황제에게 바쳤다. 이를 貢茶라고 하였다. 이시기 중국인은 정교한 茶具와 차 물의 선택, 차를 끓이는 기술, 차를 마시는 예술 등에 대해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한번 차를 끓여서 마시는데 쓰는 茶具와 茶器가 무려 24가지나 되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茶聖”으로 불리었던 육우였는데 그는 일생동안의 심혈을 기울여 “茶經”이라는 책을 써내었다. 거기에는 중국의 차에 관한 상세한 소개, 차를 재배, 가공하는 도구, 차의 가공 과정, 차를 끓이는 도구, 차를 끓이는 방법과 기예, 차를 마시고 흠상하는 방법 등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茶經”은 중국 차 문화 역사의 빛나는 기념비였다. 당나라는 차 문화의 발전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차 문화는 문인, 은사나 스님들에게로 제한되어 있었다.현종 때 봉연이라는 진사가 있었는데 그가 쓴 견문기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태산의 영엄사에는 강마대사라는 스님이 있는데 좌선을 할 때면 차를 즐겨 마셔 모든 이들이 그를 본받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었다." 이 풍속은 산동으로부터 장안에 전해져 장안에는 곧 다관이 생겼고 돈만 있으면 모든 이들이 차를 즐겼다고 한다.이 무렵의 차는 녹차로 만든 고형차가 위주였다. 찻잎을 따서 찐 다음 쌀과 함께 절구에 넣고 빻아 빈대떡 모양으로 굳힌 병차인 고형차를 다시 약연에다 넣고 갈아 가루로 만들어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이 무렵 차를 마실 때는 감초나, 파, 생강, 매실, 감귤, 사향 따위를 첨가하여 죽처럼 걸쭉하게 만들어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육우는 소금을 넣어 마셨고 그 외의 것들을 넣는 것은 중정을 잃는 좋지 않은 습관으로 쳤다고 한다. 육우가 을 짓고, 글씨로도 유명한 안진경이 삼계정을 지어 차 마시는 옳은 법도를 세상에 펴낸 8세기 중엽, 중국의 다도는 하나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당 시대에 있어 다기는 다완이 주로 쓰였지만 급수나 다탁도 등장하였다. 육우는 월들의 생활 속에 침투된 시기였다. 대중적인 차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화차(花茶)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지방도시에까지 다관(茶館)이나 다루(茶樓)가 들어섰다.중국차에 얽힌 근현대사① 유럽에서의 다회(茶會, Tea Party)17세기 네덜란드인을 통해 중국의 차(茶)가 처음 전래될 당시의 유럽 사회는 술 마시고 취하는 풍습이 상, 하 계층에 상관없이 매우 심하였다(그도 그럴 것이 차나 커피가 전래되기 전까지 그들의 음료는 물과 술뿐이었으며. 특히 술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그 역할이 컸다). 이에 포르투갈에서 영국 찰스2세에게 시집 간 캐서린 공주는 차의 좋은 점을 널리 알리고 술에 취하는 악습을 없애기 위해, 먼저 왕실에서부터 술 대신 차를 마시는 음다(飮茶)풍습을 보급시켰다(물론 그 숨은 뜻은 술 마시지 말고 열심히 일하란 것이었다).마침내 이러한 풍습은 모든 계층으로 확산되어져 갔으며, 특히 상류층 사회에서는 사교모임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다회(茶會, Tea Party)가 열리게 되었고, 그것이 예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하지만 삽시간에 유럽의 부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다회(일본의 다도의례를 흉내냄)는 점점 호화로워지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부인들의 지출이 커지고 외출이 잦아지며 귀가시간이 늦어짐에 따라, 남편들은 다시 술집으로 흘렀고,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사라져 버린 많은 가정이 혼란 속에서 파탄되는 결과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즉 유럽에 전래된 차는 그 본연의 성질과 무관하게 가정파괴의 공범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② 미국 독립전쟁유럽을 떠나 신대륙을 살펴보자면, 18세기 중반부터 신대륙의 개척자들은 영국 정부가 그들에게 부과하는 과도한 세금에 불만을 느꼈다. 따라서 그들은 영국의 화물선이 입항하는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영국인들에게 세금에 대한 이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영국 국왕인 조지3세는 동인도회사의 경영난을 덜고자 새로운 관세 조치인 차조례(茶條例)에 서명했고, 미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모국에 대한 심한 배신감3억 6천9백만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고 한다.중국차의 분류녹차녹차는 전 세계적으로도 생산량이 가장 많고 대중화된 차에 속한다. 녹차는 처음에 생으로 끓여 마시는 것에서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거치거나 불을 쬐어 병차(餠茶)로 만들어 마셨고 당대(唐代)에 와서 찻잎을 증청녹차(蒸靑綠茶)로 가공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육우의『다경』에도 증청녹차의 제다방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唐代)에 중국녹차의 기본적인 제다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증청(蒸靑)이란 기법은 어떤 것일까? 증청이란 찻잎을 증기로 찌고 다시 이것을 손으로 비빈 후 말려서 녹차를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그런데 증청법은 명대에 이르러 초청(炒靑)법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증청녹차의 향과 맛이 진하지 않다는 단점을 보완해 주었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초청녹차의 제다방법은 명대의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밖에도 녹차는 다양한 제다방법에 따라 그 종류가 나누어지는데 크게 초청녹차(炒靑綠茶)와 쇄청녹차(?靑綠茶), 홍청녹차(烘靑綠茶)로 나뉜다.초청녹차는 가공방법과 외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초청녹차의 형태는 솥에서 찻잎을 덖을 때에 결정 되는데, 외형이 단단하고 둥근 것을 원초청(圓炒靑)이라하고 납작한 것을 편초청(扁炒靑)이라고 한다.쇄청녹차는 햇볕에 말린 녹차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쇄청녹차는 산차(散茶)로 이용되기도 하고 긴압차(緊壓茶) 만들어져 보이차의 주원료가 된다.)증청녹차는 앞서 언급했듯이 가장 오래된 차의 하나이다. 그 특징으로는 찻잎의 색이 푸르고, 찻물도 푸르고, 젖은 찻잎도 푸르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른바 삼록(三綠)이다.그러면 녹차 중에 널리 알려진 용정차를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용정(龍井)절강성의 항주 서호인근의 용정촌(龍井村)은 용정차의 산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용정차를 서호용정(西湖龍井)이라 칭한다. 명차는 의례히 그 기원과 관련한 전설을 동반하는데, 용정차도 예외는 맛은 맑고 신선하며 순수하고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홍차(紅茶)홍차하면 사람들은 주로 영국을 떠올리게 되지만 본래 중국과 인도에서 기원한다. 중국최초의 홍차생산은 16c 복건성(福建省) 숭안(崇安)에서 시작되었다. 1870넌대 인도의 Geonge Reid는 절다기를 발명하였는데, 이로써 찻잎을 절단하여 만드는 홍쇄차(紅碎茶)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오늘날 홍차의 제다과정에는 다른 차와 달리 위조(萎凋)라는 과정이 더해지는데, 이는 차의 수분을 적당히 증발 시킨 후, 찻잎 속의 효소를 활성화 시키는 과정이다. 또한 홍차가 그 고유의 색을 띄는 이유는 발효과정에서 폴리페놀류에 속하는 카테킨 등의 성분이 산화되어 녹색의 찻잎을 홍색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홍차는 가공방법에 따라 소종홍차(小種紅茶), 공부홍차(工夫紅茶), 홍쇄차(紅碎茶)등으로 나누어진다.정산소정(正山小種)정상소정의 뜻은 “높은 고지에서 만들어진 차‘라는 뜻이다. 소종홍차가 생산되는 동목관이라는 지역은 지대가 높고 험준한 한데, 이러한 자연환경은 소정홍차의 독특함을 만들어준다. 또한 그 제다과정에서 독특한 점이 있는데, 찻잎을 건조 시키는 과정에서 소나무 연기를 쏘이게 하는 것이다. 소종홍차의 탕색은 강렬한 붉은색이며 향기는 강렬하고 자극적이며 소나무 연기에 훈제하였기 때문에 소나무향기가 강하게 섞여 있다. 맛 또한 자극적이고 뒷맛은 약간 달다.흑차(黑茶)흑차는 발효정도에 따라 구분할 때 후발효차에 속한다. 흑차는 제다방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첫째는 녹모차를 발효시키고 난 후 다시 흑차의 제다방법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다. 또한 흑차는 서북지역에서 교역물품으로서 이용되었기에 험준한 지형을 통해 운반하려면 부피를 줄여야했다. 그래서 찻잎을 증기로 쪄서 단단하게 뭉쳐서 구모양의 단차(團茶)형태로 만들어 운송하였다.둘째 방법으로는, 살청과 유념을 한 후 오랜 시간 동안 쌓아두어 찻잎의 색이 검게 변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불에 말리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생차(生茶)는 5-8년간의 진화시간을 거
서 론조선 시대 가사?시조 문학의 대가로 정철과 윤선도를 꼽는다. 두 사람은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는 사대부로서 孝와 忠 그리고 歸去來를 노래하였지만 인생 여정이 다른 만큼 시조와 가사에 영향은 다르게 나타났다. 정철은 서인의 영수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반면에 윤선도는 권력의 주변에 있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남인(南人)의 가문에서 자랐는데, 그가 정계에 나섰을 무렵 남인의 세력은 왕권의 강화와 북인(北人)과 서인의 타도를 주장하며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정권의 주도권은 쉽게 옮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적에 의해 집중적으로 탄핵을 당하여, 그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문학과 삶은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으므로 이들의 시조와 가사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윤선도는 山中新曲 19수와 漁父四時詞 40수를 지은 자연 시인의 최고봉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국문가사를 통하여 국문의 극적 아름다움을 절정에 표현했다고 평가되어지고 있다. 여기서는 윤선도의 대표작품을 통해 그가 표현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조선 중기 역사의 큰 변혁기를 거치면서 붕당정치의 희생자로 살아왔던 고산 윤선도는 85년의 인생기간동안 세 차례의 도합 16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그가 유배를 가게 되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보고 그 기간 동안 쓰여진 작품을 통해 위인으로서가 아닌 그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고자 한다.본 론병진소와 유배윤선도에게 30세(1616, 광해8, 丙辰) 되던 해는 인생의 일대 전환기에 해당된다. 당시는 광해군(光海君)의 정치가 어지러워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던 때였다. 이에 윤선도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하여 유명한 를 올렸던 것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정치의 권세가 아래로 옮아감으로써 임금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고, 민심과 풍속이 어그러졌으며, 인재 등용이 불공평하고, 과거 시험에 부정이 있으니, 먼저 권하게 하였다. 윤선도는 2월에 유배지 경원에 도착하였다. 경원에 도착한 윤선도는 오직 독서를 하거나 때로는 언덕이나 골짜기를 소요하면서 속마음을 노래하여 무려 43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대체로 나라를 걱정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들이었다. 이듬해(32세, 1618, 광해10, 戊午)에는 5수와 등의 시조를 지어 감회를 노래하였다.)슬프나 즐거오나 올다나 외다나내몸의 올일만 닥고닫글 뿐이언뎡그받긔 녀나믄 일이야 분별줄 이시랴내 일 망녕된 줄을 내라야 모손가이암 어리기도 님 위 타시로쇠아 아마리 닐러도 님이혜여 보쇼서츄셩(秋城)딘 호루 밧긔 우러녜 뎌시내야무슴 호리라 듀야의 흐르난다님향 내뜯을 조차 그칠뉘 모로다뫼 길고 길고 물흔 멀고멀고어버이 그린 뜯은 만코만코 하고하고어듸셔 외기러기 울고 울고 가니어버이 그릴줄을 처엄븟터 알란마님군향 뜯도 하히 삼겨시니진실로 님군을 니면 긔불효인가 녀기롸슬프나 즐거우나 옳다하나 그르다하나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그 밖의 나머지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나의 일이 망녕 된 줄 내라하며 모를손가이 마음 어리기도 임을 위한 탓이로다누가 아무리 말 하여도 임이 생각 하소서)경원진 호루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내야무엇하려 밤낮으로 흐르느냐임향한 내 뜻을 따라 그칠 때를 모르는구나산은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많고 크고크고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나니어버이 그릴줄은 처음부터 알았지만임금향한 뜻도 하늘이 만들었으니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도 불효인가 하노라.)처음 시 에서는 다른 이가 무어라고 논하든지 유자(儒者)로써 꿋꿋하게 수신(修身)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 이런 확고한 의지도 다음 시에서 자신의 행동을 망녕이라고 표현하고 유배로 인하여 조금은 강기(剛氣)가 누그러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유배 왔다는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체념하면서도 이 모두가 임금을 위한 충정(忠情)이며 간신(奸臣)을 말을 통하지 말고 임금이 자신의 직언(直言)을 판단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세 욕의 내면 지향적 성격이다. 반면 承句는 結句의 ‘國事’와 연결하여 볼 때, 조정 관료와의 관계에서 표출되는 외적 성격이다. 당시 조정의 실상을 논한의 내용과 관련하여 볼 때 그의 ‘性癖’은 도리에 어긋한 행위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곧 불의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직간하는 성품이 ‘性癖’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변새 밖으로 유배되었다고 화자는 생각하고 있으며 국사(國事)를 잊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현실에 대한 완전한 잊음이 아니 짧은 휴식(休)임이었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병자호란과 유배50세 되던 해(1636, 인조14, 丙子) 12월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윤선도는 해남(海南)에서 이러한 변란의 소식을 들었다. 이에 향족(鄕族)들과 가동(家?)을 규합하여 배 한 척을 얻어 위험을 무릅쓰며 뱃길을 재촉하여 강화도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51세, 1637, 인조15, 丁丑) 1월 29일이었다. 그러나 강화도는 이미 함락된 뒤였다. 이에 윤선도는, 빨리 호남(湖南)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조정(朝廷)의 명령이 통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니 임금의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곳을 알아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배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왔다. 해남(海南)에 돌아와서야 윤선도는 비로소 임금이 항복하고 청나라와의 화의(和議)가 이미 정해져서 임금의 수레가 서울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윤선도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장차 제주도(濟州島)에 들어가 살고자 하였다. 배가 보길도(甫吉島)를 지나게 되었는데 바라보니 봉우리가 수려하고 골짜기가 깊숙하였다. 윤선도는 여기가 살만한 곳이라 판단하고 드디어 여기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峯) 밑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는 편액을 달고는 늙은이의 생애를 마칠 곳으로 삼았다.52세가 되던 이듬해(1638, 인조16, 戊寅) 봄에는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제수(除授)받았으나 병을 일컬어 부임하지 않았다. 윤선도가 대동찰방에 부임하지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한시라고 할 수 있다. 떳떳이 사는 곳을 벗어나 밝은 세상에 이런 길을 가야하다니 부끄럽다며 유배지로 향하는 그의 착찹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윤선도는 왕을 생각하는 忠臣으로 자신만한 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의 유배 기간 중 비교적 짧은 1년을 억울하게 유배를 가면서 정치에 대한 환멸을 조금씩은 느껴갔을 것이다. 그리하여 1642년 인조 20년에 山中新曲의 五友歌 등 국문시 19수를 짓고 한문이란 밀림속에서 우리말의 예술어화와 문화적 가치를 발취하여 창작하게 된다.효종의 묘지 책정 문제와 조대비의 복제문제73세가 되던 해(1659, 효종10, 현종즉위년, 己亥) 5월 4일,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5월 9일, 현종(顯宗)이 즉위하였다. 윤선도는 첨지(僉知)를 제수받고 총호사 및 여러 지관들과 함께 적합한 산릉을 찾았는데 오직 홍제동(弘濟洞)과 수원(水原)이 적합하였다. 현종은 홍제동이 좋기는 하나 인조 때도 길이 멀다 하여 쓰지 않았고 효종도 그 길이 먼 것을 혐의하였으니 자손으로서 쓸 수 없다 하고 수원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 등은 수원이 나라의 대진(大鎭)이며 또 민가 수백 채를 일시에 철거해야 하니 불가하다고 쟁집하였다. 다시 건원릉(健元陵) 왼편 산등성이와 불암산(佛巖山) 화접동(花蝶洞)을 간심(看審)케 하자, 윤선도는 건원릉 왼쪽 언덕의 형세가 수원에 미치지 못하며, 불암산(佛巖山)은 화산(火山)인데 옛부터의 비방에 의하면 화산 아래 혈(穴)을 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7월 11일, 이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수원을 쓰면 나라가 불안해진다는 비기(秘記)의 말이 있다고 하면서 건원릉 안에 있는 건좌(乾坐)의 언덕을 써야 한다고 하자 현종은 드디어 건좌의 언덕으로 결정하였다. 효종의 능이 건원릉 안쪽 건좌(乾坐)의 언덕으로 결정되자 윤선도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십년이 못되어 능 위에 망극한 변고가 일어나 천장(遷葬)을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을 소상히 밝혔다. 이듬해(75세, 1661, 현종2, 辛丑) 4월 10일, 가뭄이 극심하여 원옥(寃獄)을 심리(審理)할 때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은 윤선도를 좀 나은 곳으로 옮겨 주자고 발의하였다. 이에 현종은 윤선도를 북청(北靑)으로 이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행부사직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한 소를 올린 것과 또 윤선도 자신이 삼수에서 지은 이 문제가 되어 북청 이배의 명은 결국 취소되고 오히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이 더해졌다. 76세 되던 해(1662, 현종3, 壬寅) 3월 28일, 위리(圍籬)한 것을 철거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윤선도는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음악을 즐기었다. 윤선도가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을 들은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편지를 보내어 걱정하자 윤선도는 음악론을 펴서 답을 하였다. 요컨대 윤선도가 음악을 즐기는 이유는 그것이 기쁨을 돕는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소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79세 되던 해(1665, 현종6, 乙巳) 2월 27일, 윤선도의 유배지는 북방의 삼수(三水)로부터 남쪽의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81세 되던 해(1667, 현종8, 丁未) 윤4월 17일, 현종은 가뭄이 심하여 원옥(寃獄)을 심리하였는데, 여기서 윤선도의 석방 문제가 거론되었다. 7월 21일, 현종은 드디어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유배에서 풀린 윤선도는 8월에 해남(海南)으로 돌아왔으며, 9월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를 살펴보자.當日爺孃鞠育時 : 당일야양국육시豈知伊蔚乃如斯 : 개지이위내여사衰遲更念恩勤意 : 쇠지경념은근의不是囚山淚欲垂 : 부시수산누욕수그때 부모님이 날 길러 주실 적에어찌 이토록 답답하게 될 줄이야 아셨으리오쇠약하고 굼떠져 다시 은근하신 뜻 생각하니산에 갇힌 일 아니라도 눈물지으려 하는구나)鴨綠源流山外廻 : 압록원류산외회樺泥주室傍山외 : 화니주실방산외罪人稱殺전猶揆 : 죄인칭살전유규言自爲忠世共해 : 언자위충세공해謫日一千半己往 : 적일일천소붕하거
서론1970년에 씌여져 80년대 거친 민중 투쟁의 의식화의 도구로써 필독서 역할을 한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을 언어의 중의적 표현에 유념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사건 전개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서술자의 현실 인식과 이를 통한 작가가 말하고 자하는 바를 나타내 줄 수 있는 문장을 엮어서 기술되었으므로 큰 구조상 Chapter 순으로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순차적 서술은 아니다. 전체적 텍스트의 구성이 가난한 자 - 소외 계층 - 억압 받는 자와 부유한 자 - 특권계층 - 억압하는자 등의 이분적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소외 받고 있는 계층의 실상을 밝히고 이들이 느끼는 정서적 부당함과 설움 등을 표현하고 이런 이들의 생활의 원인을 개인적이 아닌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조명한 작품이다. 일명 ?난쏘공?이라 불리는 작품의 의중을 따라간다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본론?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에는 영수?영호?영희의 서술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맏형 영수의 이야기는 작품 전개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 이들 가족들이 처한 상황과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세 사람의 서술자의 가장 연장자인 영수를 택함으로써 다른 동생들보다 생각의 시야가 넓음을 이용하여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대변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난장이인 아버지와 어머니, 세 자녀들이 처한 입장을 영수의 입을 빌려 살펴보면,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보리밥에 까만 된장, 그리고 시든 고추 두어 개와 조린 감자어머니의 밥상은 고작 보리밥에 된장, 고추와 감자만이 놓여 있는 단촐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민망한 통해 그들의 가난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은 지옥을 생각하지 않지만 여기 지옥에 사람 사람들은 천국을 생각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서술자인 영수가 희망을 품고 암담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가난 속에서 찌든 삶을 극대화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영수는 난장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맞으나 중의적 의미를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 난장이는 사회적 하층민으로 그 지위가 당연히 부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이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그에 걸맞는 대우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으며 선입견과 편견, 억압과 강요의 시선을 보이는 이들에게 그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자신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이런 가난을 어떤 시각으로 영수를 보고 있는지 살펴보면,아버지는 그 동안 충분히 일했다. 고생도 충분히 했다. 아버지만 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대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아버지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을 수 도 있다. ???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할머니들이 최하층의 천인으로서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마음 편할 날 없고, 몸으로 치러야 하는 노역은 같았다. 우리의 조상은 세습하여 신역을 바쳤다. 우리의 조상은 상속?매매?기증?공출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 나는 우리가 이 구역 안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신들의 가난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태와 책임이 아니라 부모님의 혈족들이 예전에는 노비 출신이었으며 이 출생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의 세습과 가난의 악순환은 계급적 세계가 종결된 이 시대에 까지 항하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이런 사회 구조의 부조리 속에서 시름하고 있는 그의 가족과 그는 가난의 순환에서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면,세상은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너무나 엄격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미개한 사회였다. 우리가 학교 안에서 배운 것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 중학교 3학년 초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밀어 줄 힘이 없었다. ??? 우리의 팔목은 공장 안에서 굵어 갔다. ??? 증조부대까지는 선조들이 살아온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나 할아버지대에는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떤 교육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잃었다.그는 가난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교육밖에 없으며 이런 교육으로 이분화된 사회에 대하여 지독한 미개 사회라고 독설을 뿜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교육은 생존의 그늘에 가져질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공장안에서 나이를 먹어 가게 된다. 노예제 폐지의 첫 수혜자인 할아버지는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경험에서 나온 지혜는 필요가 없게 되고 이제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지만 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결국 재산도 잃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조심히 이야기 하고 있다.그런 그의 가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그들은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때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사람은 개천에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고, 우리 동네 건물을 양성화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 다른 사람은 먼저 사람이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겠다고 하니 구청장으로 보냈고, 자기는 이러이러한 나라일을 하겠으니 그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 나는 그들을 증호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였다.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 줄 사람이었다.그의 가족들과 동네 주민들에강제적 이주뿐이었다. ?그들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 줄 사람이었다.?라는 그의 말이 절실히 다가온다.두 번째 장에서는 동생 영호가 작중 서술자로 등장하여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여기서는 영수와 영호가 중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인쇄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부분을 부각시켜서 이야기 할 것이다. 그들이 교육의 혜택에서 이탈되어 열악한 환경속에서 공장 일을 감내야 했던 절실한 감정들을 느껴보자.점심시간이 삼십 분 밖에 안 되었다. 우리는 한 공장에서 일했지만 격리된 생활을 했다. ??? 그들은 점심 시간으로 삼십분을 주면서 십 분 동안 식사하고 남는 이십 분 동안은 공을 차라고 했다. ???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간격을 둔 채 땀만 뻘뻘 흘렸다. 우리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 자랄 나이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발육 부조 현상을 우리는 나타냈다.그들의 점심시간이라고 허용된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하지만 그 30분 중 10분동안 밥을 먹게 하고 나머지는 20 분 동안 공을 차도록 강요하였다. 그들의 건강을 고려하여 사측에서 배려한 조치라 오산하면 안 된다.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여서 할 이야기라고는 그들의 부당한 대우일 것이며 차후에 복잡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고립된 생활 환경을 조성하는 획책이었다.공원들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들어와 중요한 성장기의 삼사 년을 이 공장에서 보냈다. 익힌 기술을 빼놓으면 성장의 기반이랄 것이 없다. 우리 공원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 밖에는 사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 하나 일깨워 줄 사람도 없었다. ???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았다.가장 교육이 필요할 시기에 그들은 공장에서 육체적으로 혹독함을 견뎌야 했고 정신적으로 미숙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지각을 할 여력과 능력조차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못하였다. 이런 어린 노동자들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기계와 같았고 사측에서 환영받았다.사장은 종종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는 그 희망 대신 간이 알맞은 무말랭이가 우리의 공장 식탁에 오르기를 더 원했다.지각 능력이 미숙한 어린 공원들에게 불황이라는 두려움으로 겁을 주었다. 공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고 그 착취의 댓가로 사장은 공장 설비를 늘리고 자신의 부를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은폐되었다. 오히려 불황으로 해고될 수 있다고 분위기를 조성하고 또한 열심히 일하면 같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선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정치인들의 허황된 거짓 구호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 현실적인 것이었다. 영호는 그것을 ?간이 알맞은 무말랭이가 우리의 공장 식탁에 오르기를 더 원했다?라고 말하고 있다.평소에 자신들 굴레는 교육받지 못한 것에서 기인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형 영수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을 것은 동생들에게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런 영수는 다른 인쇄소 공원과 달리 착취와 부당함에 저항하려고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하려 하였다.“우리는 우리가 받아야 할 최소한도의 대우를 위해 싸워야 돼. 싸움은 언제나 옳은 것과 옳지 못한 이 부딪쳐 일어나는 거야. 우리가 어느 쪽인가 생각해 봐.” ???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첫 번째 싸움에서 져 버렸다.영수와 영호는 공원들에게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불만을 사장에게 전하자고 이야기하지도 못한 채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공원들에게 해고의 두려움이 더욱 컸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세 번째 장에서는 난장이 딸이라고 아무도 생각지 않을 미모를 가지고 있는 영희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가족들의 집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집에 대한 권리를 사간 부동산 중개업자를 따라간다.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그는 당시 기득권적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계층을 상징하고 있다. 계층적 하층민이었던 그녀의 미모는 그녀의 사회적 신분과보면,
이 레포트를 쓰기 위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적당한 인물을 구하지 못하여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보게 된 일본 드라마에서 적합한 케릭터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은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연애 감정을 다룬 멜로 드라마이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자와의 연애가 아니다. 부잣집의 딸인 아코는 10억이라는 유산을 상속하게 되고 또한 그 돈을 노리고 등장하는 레지의 사랑이라는 평범하지만은 않은 컨셉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게 된다.우선 두 주인공인 아코와 레지에 대해서 쓰고 주변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실 속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환경과 심리를 보여주고 있기에 주인공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여자 주인공인 아코는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회사일로 바쁜 아버지와 드라마에서는 보여주지는 않지만 아버지와의 어떤 불화로 집을 나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코의 오빠를 데리고 집을 나가게 되고 아코의 오빠는 결국 보육 시설로 넘겨진다. 아코는 어린 시절 어머니 없이 아버지 밑에서 크게 되는데 바쁜 아버지는 아코를 옆에서 많이 챙겨주지 못한다. 그런 아코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애착을 잘 받지 못한 것이다. 가족으로부터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코는 자신이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성격이 삐뚫어지는 아이로 자라게 된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것은 옆에서 항상 필요한 것을 해주고 아코의 투정을 받아주는 비서가 있기 때문이다. 행동주의에서의 보상과 처벌을 통한 강화로 행동의 변화를 시켜야 함에도 모든 것을 받아 준 것이다. 또한 10살 때 뇌에 이상이 있어 시력을 잃게 되는 것도 아코가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으로 인해 더욱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데 크게 일조했을 것이고 그녀가 정서적 불안정으로 반항의 시기인 사춘기 때 탈선하지 못하고 집에서만 ‘외로운 섬’처럼 지내게 했을 것이다.남자 주인공인 레이지는 태어나자마자 탯줄도 안 잘린 채로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시설에서 아동기를 보내게 된다. 그는 유흥가에서 유명한 호스트로 생활을 하면서 여성들에게 사랑을 팔아 여성들에게 돈을 뜯어내지만 자신은 그 여성들에게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직업적인 꾼으로 등장한다. 레이지도 어린 시절 부모로 부터의 애착을 받아본 적이 없기 떄문에 사람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여성들이 듣기 원하는 사랑의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돈을 뜯어내 생활하는 케릭터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을 일생에 걸쳐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 주인공인 아키와의 대화에서 아키가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이고, 내 주위사람들을 분명히 볼 수 있어요”라는 말에 “부럽군..나는 아직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라는 대목에서 자아상이 부족한 경계성 성격 장애의 한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버림 받은 기억으로 남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 것이 남으로부터 또 다시 버림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저변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고 여자들의 심리에 대해 잘 알고 여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그는 여은행원이 회사의 공금인 1억엔을 빼서 자신에게 준 사실이 발각되어 뉴스에 보도되고 기소됐음에도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녀가 바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반사회적 성격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격 장애를 판단할 때 사회적 기능을 잘 하고 있는가가 평가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호스트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남자 주인공에게 바람직한 Social Function을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직업의 function은 가부키쵸(도교의 대표적인 환락가)에서 전설로 남길 정도로 잘하고 있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장애적 문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성격 장애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남자 주인공인 레이지는 아코가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오빠로 가장하여 아코의 오빠 노릇을 하면서 마음을 얻은 다음에 아코를 죽이고 유산으로 물려받은 10억엔을 가로채기 위해 접근한다. 레이지는 7억 3천만엔이라는 빚이 있고 2개월 이내에 갚지 못하면 대부업자들에게 죽음을 당해 장기(臟器)를 팔리게 되어있기 떄문에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코 또한 레이지만큼 애착을 잘 받지 못하여 여지껏 남에게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설적은 호스트의 실력에 쉽게 넘어가지 안는다. 두 사람이 남매 지간으로 지내면서 서로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멜로 드라마이다. 드라마 제목은 드라마 초반에 두 주인공이 모두 ‘사랑따윈 필요없다’고 말한데에서 따와졌다.레이지의 동료 나루는 레이지가 빚으로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코를 죽임으로써 돈을 갖는데 적극 돕는 역할로 드라마 내내 등장한다. 하지만 후반부에 레이지가 아코를 죽이고 돈을 챙겨 빚을 갚아 죽음을 면하는 것보다 아코를 사랑하고 아코의 눈이 치료되 수 있도록 돕는데 더욱 힘을 쓰자 서서히 태도를 돌변하기 시작한다. 빚 상환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레이지의 죽음이 확실해 지면서 그는 거의 공황 상태를 보이는데 “나의 전설 레이지가 죽는다….가부치쵸의 전설 레이지…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눈껌벅도 안 할 비정한 사나이 레이지는 이제 없다…나는 이제 레이지다….내가 바로 레이지다”라는 대사를 하고 레이지를 칼로 찌른다. 이 부분을 통해 그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자아상이 약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자신의 약한 자아상을 레이지로 차용하므로써 레이지는 이상화시켰고 레이지가 더 이상 자신의 선망했던 자아상으로써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를 평가 절하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곧 경계선적 성격 장애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0년이 넘도록 아코의 어머니 역할을 해준 여비서가 유산을 가로채기 위해 아코의 담당의사와 그녀의 약혼남를 가장한 한 남자와 계획하여 서서히 아코를 죽여간다는 다소 충격적인 설정도 눈에 띈다. 특히 여비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결국 아코와 레이지가 사랑을 맺는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이 드라마는 케릭터들이 독특하여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애절한 사랑에 감성을 뒤흔드는데 충분하였다.
서 론몽양 여운형은 한국사에서 너무나 가슴 아프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간 인물이다. 그의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족적을 가슴으로 안아보면 그의 현재의 평가와 지위는 우리나라의 분단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좌파적 인물로 현재 평가되어서 그가 죽은 뒤인 59년만인 2005년 3·1절 기념식에 2급 국가유공자에 그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건국훈장 1등급을 받은 유공자는 28명으로, 이중 독립운동을 원조해 준 쑨원과 장제스 등 외국인 7명이 포함됐다. 외국인도 1등급을 받았는데 그의 업적에 비해 너무 초라한 평가라 할 수 있다.몽양 선생이 살다 간 62년의 세월은 조선민족 근 현대사에서 망국-식민-분단의 시작이라는 비운의 소용돌이 한복판이었다. 그 속에서 그의 명성과 경력은 그 누구보다 화려했다.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리려고 한 당찬 독립운동가,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 독립을 주장한 식민지의 청년 애국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특별당원, 레닌 트로츠키 손문과 한국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지식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처음 주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자 조선체육회 회장, 해방공간을 뜨겁게 달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좌우합작 운동의 선봉, 남북연대 연합을 위해 38선을 5차례나 넘나든 최초의 정치인, 그리고 한국 역사상 12번이라는 가장 많은 테러를 당한 비운의 정치가가 바로 몽양이었다.몽양 여운형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좌파는 혁명 동지로 출발해서 회색적 기회주의자, 친미 허수아비에 이르기 까지 극단을 오르내렸고, 미군정 역시 그에게 온건 민주주의 인사로부터 친공·친북주의자,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 친일 브로커에 이르기까지 양립할 수 없는 인물평을 내렸다. 어떻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단적이며 논란 그 자체일 수 있을까? 해방 후 여운형은 양 극단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펴적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의 표적이 된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며 오직 보적인 사회운동을 통해서만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민족주의운동의 집결체라고 볼 수 있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것은 우리나라 현실을 모르고 정치적으로 암둔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간주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표시하였다. 나는 여러 출판물에서 아버지가 상해 임정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 때 아버지가 주장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정당이었다. -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지음, 김영사, 2001.11.30 p27-283·1 운동에 의해 일본인의 악랄한 식민 통치가 세계에 알려지고 민족적 저항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려하기 위해 일본은 무단통치를 그만두고 소위 문화 정치라는 것을 내세웠다.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쓰면서 친일세력을 배양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에 맞물려 1919년 일본 척식국(拓殖局)장관 고가(古架廉造)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부임하는 미즈노(水野鍊太郞)에게 앞잡이로 누구를 회유할 것인가에 논의하다 국내외적으로 명망있는 몽상을 11월에 일본으로 초청한다. 일본에서 고가(古架廉造)와 육군 대신 다나까(田中義一)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일본의 침략 근성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일본에 있는 동안 여운형이 조선 자치운동을 하러 왔다 라는 신문 기사가 나오고 몽상은 그 기사에 대해 11월 27일 제국 호텔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한 연설을 하게 된다. 그 연설로 인하여 일본 정부 내에 비상한 물의를 일으켰음을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다.{) 제국 호텔에서의 연설내가 이번에 온 목적은 일본 당국자와 그 외 식자를 만나 조선 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고 일본 당국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다.다행히 지금 각원들과 식자 제국들과 간격 없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은 유쾌하고 감사하다. 나는 독립 운동이 내 평생의 사업이다. 구주전란이 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과 보로딘을 그에게 파견할 계획이니 앞으로 그와 연계하여 손문을 잘 도와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지음, 김영사, 2001.11.30 p37손문의 권고로 1924년에는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한중상호협력을 위한 南方革命軍을 위하여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광동에서 국민당대표자대회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공산당과도 우호적으로 지냈었는데 이는 몽양이 극동민족노동자대회 에 참가하여 알게 된 소련 인사와 중국공산당을 연결시켜 상호 협조 체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공산당을 위해 각지로 유세를 하기도 하였다.중국에 머무르면서의 활동으로 몽양은 좌파인사로 낙인이 찍여진 듯 하다. 그렇지만 그가 당시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고통하는 조선과 약소국가의 국민들을 보면서 모든 노동자, 농민이 수탈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사회주의는 그에게는 하나의 빛줄기였을 것이다. 당시에 약소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된 것은 그들의 현실에서 기인된 것이 명확하다.몽양의 아우 여운흥이 말하는 몽양과 공산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서 참석하고 또 레닌과 회담한 이후로 형님은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해 도와줄 나라는 오직 소련뿐이며 나라와 민족의 구체적 조건들을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어느 정도 변형하고 수정하여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일도 있다. 그러나 그 후 형님의 사상이 소련식 공산주의와는 멀어지고 점차로 민주적 사회주의에로 전환하여 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형님은 국토가 협소하고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민족해방을 성취한 후에 민주혁명을 수행하고 점차로 과감하게 사회개력을 실천하여 훌륭한 자주독립 통일의 민주사회주의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여운형, 이기형 지음, 창작사, 1988.3.30 p 97국내에서(1929년-1944년 8월15일)여운형이 1929년 패권을 잡아 미국의 차관이 단연 증가하니 일본은 자기가 독점하지 못한 데 분개하여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점은 영·미가 절대 불허한다. 이 때에 양국은 반드시 합작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다.자본주의의 대요소인 1원료시장2소비시장3투자시장, 이 세가지가 중국에는 구비되어 있다. 이런 좋은 시장인 중국이 경제적 자립을 못하였으니 저기압이 생긴 곳에 공기가 밀려들 듯 자본주의 세력은 이 저기압 시장으로 밀려들 것이고 어느 일국의 독점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국이 침입하는 중에 일국의 세를 제지하고 중국은 갱생의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이런 시장을 어느 한 나라의 독점에 맡겨둘 리가 없는데 더욱이 저들이 만만히 보고 있는 일본국의 독점이야말로 허용할 리가 절대 없다. 영·미는 반드시 중국의 운동을 빌어가지고 일본과 싸울 것이다. 미국 혼자서도 일본을 대항하기에 넉넉할 터인데 황차 삼국이리오. 그러므로 일본은 자멸하고 조선은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하여야 한다.(몽양 직접 구술과 『여운형투쟁사』에서)-몽상 여운형, 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1984.6.5 p 127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장기화될수록 일제의 수탈은 가혹하였고 황민화 운동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에 이르게 된다. 이광수가 가야마 미스로 로 제 1호 개명을 시작으로 친일인사들이 앞다투어 개명을 하였고 몽상에게도 강압이 들어오지만 당당히 거절한다. 몽상은 버티면 버틸수록 친일의 길로 돌려세우려는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게다가 친일분자들이 아버지를 끌어내려고 안달하였다. 명망있는 여운형을 친일로 돌려 세움으로써 자기들의 친일을 정당화·합리화하려고 꾀하였다. 끈질긴 강요와 시달림을 받는 몽상의 그 때를 회상해 쓴 이기형의 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이 거절이라는 말의 진가를 오늘 사람 사람들은 모른다. 이 거절에는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괴로움이 있었다. 신념과 의지와 용기가 없이는 그들의 강요와 협박에 배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씩 안정되어져 갔다.다음은 건준에 대한 기록들이다.건국준비위원회는 계동에 자리를 잡고 원만하고 건전하게 잘 조직되어 있다. 이 위원회의 본래의 사명은 앞으로 신정부 조직에 대한 모든 준비인바 당면한 과제인 치안 유지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8월 17일자위대한 새 조선의 탄생을 앞두고 세기의 진통을 계속하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는 연일 연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주위에 몰려드는 군중의 흥분을 진정시키고 이제는 학도치안대의 경위 속에서 싸여서 착착 제반 시책이 구성 진전되어 가고 있다. 고원한 이상 아래 구상을 짜내는 조선건설 사업은 우리 3천만 민족의 행복을 무엇보다도 전제로 하는 것이다.이 본부에 새벽부터 문화·정치·사상·경제·교육 각계의 저명인사가 잇따라 드나든다. 신문기자반, 사진반, 영화촬영반, 방송반 등의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그칠 새 없이 들이닿는다. 이웃 어느 부인은 죽을 쑤어 이고서 오고, 어느 할머니는 밥을 해 이고 온다. …… 또 어느 청년은 가벼운 주머니를 기울여 기금으로 바치고 간다. 어디에 이만한 우리들의 단결력과 애정이 숨어 있었던고! 밤이 깊어도 방마다 환하게 켜진 불빛은 꺼질 줄을 모르고 그대로 진통을 계속한다. 우리 3천만 형제는 진심으로부터 이 위원회의 원만한 건투를 염원하고 있다. 8월 18일자미국은 아무런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여운형, 이기형 지음, 창작사, 1988.3.30 p197-198이후 몽양의 행보는 좌우익을 포함한 범국민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건국을 하는 것이 말할 수 있다.몽양은 처음부터 좌우익의 분열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국제적으로 눈이 어두운 극우지사들과 과격한 좌익운동가들 사이에는 사상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개인적으로 접촉이 없었다. … 몽양은 이들의 중간에서 민족사의 대도를 걷기 위해 서로 협력하도록 교량역을 수행하는 것이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