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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설사] 역사학파의 시대적배경과 신구역사학파의 특징 평가A좋아요
    1. 역사학파의 시대적 배경(1)독일 자본주의의 후진성영국과 프랑스에 비하여 후진의 자본주의국가였던 독일은 두 개의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는 그 후진성의 밑바탕에 있는 영방국가체제의 타파와 통일적인 자본주의적 국내시장의 형성이고, 둘째는 급속한 자본주의화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노동문제의 해결이었다.영국에서 성립하고 발전되었던 고전학파 경제학 특히 스미스나 리카도 등의 보편적 이론을 기계적으로 독일의 특수경제사정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독일 경제학자들의 일관된 견해였다. 독일의 역사적인 특수사정을 근거로 한 경제이론 정책론 혹은 역사적 연구의 필요성을 파악하고 해설하려고 한 것이 역사학파가 형성하게 된 이유이다.19세기의 전반까지 독일은 아직 농업이 주요산업이었던 경제적 후진국이었다. 국민들은 농업에 집착하였고 수공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국민들에게는 아직 공업을 일으킬 만큼 자본의 축적이 되어 있지 않았고 금융력도 작았으며 시장도 협소했다.독일은 수많은 소영방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산업, 상업상의 법규는 각 영방에 따라 상이했다. 1833년 관세동맹이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영방의 태반이 가입함으로써 복잡한 관세는 상대적으로 간략화되었다. 이 관세동맹은 프로이센을 맹주로 하는 독일통일의 전제로 되었다. 이 뒤의 독일산업은 여러 사정에 힘입어 도약했다. 이리하여 독일은 영국에 비하여 뒤늦게 농업국에서 공업국가로, 그리하여 소영방 분립의 연방으로부터 통일적인 제국에로 약진했다.(2) 경제사상의 신노선역사학파는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자유방임과 자유경쟁을, 또 그것을 발판으로 하는 경제의 자연적 질서의 지배를 거부함과 동시에,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인 경제질서에 대하여서도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고 어디까지나 현재의 자본주의의 바탕에서 그 기능의 수정을 통하여 국민경제를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것을 위하여 제시한이론은 한쪽에서는 경제발전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주장이고, 다른 쪽에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다.2. 구역사학파(1) 구역사학파의 시대적 배경과 그 과제독일의 경제학계에 있어서 역사의식의 각성이 소위 역사적 방법의 제창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나타난 것은 롯셔, 할데브란트 및 크니이스등에 의하여서이다. 이 세 사람은 1840년대로부터 1870년경까지 독일의 강단경제학을 지배하였던 소위 구역사학파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이 세 사람의 주장은 물론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각각 리스트의 역사적 관점을 계승하여 역사적 방법을 확립한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리고 경제학은 고전학파 그중에서도 리카도 및 리카도학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추상적·연역적방법을 유일한 방법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역사적 귀납적 방법쪽이 한층 중요하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이었다.그들이 보는 바에 따르면 경제현상은 시간적 및 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또 고전학파의 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기심만을 유일의 동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공심 기타 이타적 동기에 의하여서도 제약된다. 따라서 모든 시대 모든 국민에게 타당성이 있는 경제이론이나 경제정책은 있을 수 없다.경제학은 역사적·귀납적으로 각 국민경제의 구체적 특수성을 분명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생활은 구체적으로 국민생활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법률이나 정치 그리고 종교는 이미 경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구성계기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떠난 경제 그 자체의 기구나 운동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경제법칙의 자연법칙성을 부정하고 롯셔나 힐데브란트는 경제학이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역사적 발전법칙이어야 한다고 했다.구역사학파의 대표자들은 역사적 방법을 강조함으로써 경제학의 내용적 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반문할 때 무엇도 기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만 선진국인 영국을 연구의 대상으로 해서 확립된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원칙이 후진국 독일에 있어서는 그에 알맞도록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연구방법론에 대하여 이의를 제시하였을 뿐이다.구역사학파는 리스트의 방사적 방법을 생산의 3요소인 자연력, 노동, 그리고 자본등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적용하여 낮은 문화단계에서는 자연력이라는 요소가 지배적이고, 중간단계로부터는 인간력이 점차 현저하게 도며, 높은 단계에서는 한 사회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사멸하고자 하는 유물사관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만을 인정함으로써 모든 급격한 변이나 혁명을 부정하고 있다.롯셔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그는 국민경제학 이론에 있어서 먼저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제학의 출발표적은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욕망을 갖고 있다. 재물은 이러한 인간들의 욕구를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경제라는 것은 인간이 외계의 재물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계획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 경제는 두 개의 정신적 동기에 의한다. 즉 이기심과 공공심이다. 이 양자는 동격적인 대우도 아니고 배타적인 대우도 아니다.롯셔는 분업이 지나치게 되면 각종의 폐해가 수반된다고 보고 정통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분업의 이익의 과장에 대하여 경고했다. 가격론에 있어서는 가격과 수요·공급과의 교호적인 제약성을 강조했으며, 나아가 가격이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결정된다는 일방적인 인과관계를 표시하는 정식을 비난했다.(3) 힐데브란트① 국민경제학의 과제힐데브란트는 롯셔와 같이 경제학이란 국민의 경제적 발전의 학문이며 금세기에 있어서 언어학이 경험한 것과 같이 개혁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법률이나 언어가 한 민족에 있어서 고유한 것처럼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또한 한 민족에 고유한 것이며, 그것은 역사적으로 생성하여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발전의 법칙을 끄집어 내는 것이 새로운 경제학의 역할이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은 고전학파과 같이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하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민족에게 고유한 경제생활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② 경제발전이다. 경제란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적합한 재화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에 관계되며 국민의 가정적 생활부문으로서 국민경제는 그의 경우에 있어서도 국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기체에 지나지 않았다.국민경제학은 지금까지 사재산제도를 전제로 하고 이기심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성립하는 법칙을 탐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아왔다. 그러나 사유재산제도는 역사적인 것이며 이기심이 경제생활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기심이 경제상의 사적활동을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유일한 근본충동으로 보는 국민경제학은 어떤 경우에도 생활상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원래 인간은 공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경제생활에는 이기심 이외에 공동심 내지 정의나 공평에 대한 감각이 작동한다는 것이다.크니이스에 의하면 국민생활의 경제적 발전을 연구하고 확정하는 것이 지금은 경제학의 하나의 특수한 과제이다. 이 때 그것은 먼저 단계적으로 운동하는 국민경제의 역사적 형셩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며 다음에 이 운동의 기초에 놓여진 원인을 탐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크니이스는 과거 및 현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국민경제학자는 역사적인 국민생활의 포과적인 연구에 의해서만 틀린 원인을 현상에 돌리거나 개개의 끝없이 협렵하는 힘을 과대평가하고 다름 힘을 그것의 가치 이하로 평가하거나, 도 개개 원인의 일정한 f합의 결과를 간과하거나 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연구방법은 연구대상에 상응해야 한다.크니이스에 있어서 국민경제학의 연구방법은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귀납적 연구에 귀착한다. 이 귀납적 기초를 주로 해서 광범한 역사적 연구를 구하려고 했다는 데서 최소한 방법론상으로는 그가 역사학파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라고 주장된다.크니이스는 무조건적으로 또 모든 시대, 지역 및 국민성에 대하여 같은 모양으로 참다운 것을 제시할 것을 명백히 또는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소위 이론의 절대주의에 대하여 분명히 경제학설에 있어서의 상대성원리를 긍정했다.② 금속주의크여러 가지 사회 및 노동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통일국가를 지탱하는 독일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폐해에 대처하기 위하여 고전학파 경제학과 아담 스미스를 비판하고, 또 그 목적을 위해 새로운 경제정책 특히 사회정책이라는 형식을 제안하면서 경제학의 성격을 윤리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던 시기이다.② 신역사학파의 성격신역사학파는 세 계보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째, 윤리적·경제적 또는 강단사회주의의 계보로 바그너에 의하여 대표된다. 주로 국가의 재정정책수단 특히 조세정책적 수단을 통하여 사회개량을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둘째로, 브렌타노에 의해서 대표되는 소수파이다. 특징은 사회개량의 목표를 주로 해서 노동자 자신의 자기구조에 두고 국가적 지주나 통제에 대하여 현저히 소극적이었다. 특히 노동조합조직의 강화를 통하여 노동자가 자주적으로 자기 지위의 개선을 도모하는 데 사회개량의 이상을 구하는 것이었다. 셋째 것은 세 계보 중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절충파로 슈몰러에 의하여 대표되었다. 사회개량의 중심과제를 몰락해 가는 중산계급의 보호와 육성에 두고 그것을 국가적 보호정책에 의하여 수행하려고 했다.(2) 슈몰러① 국민경제학 방법론슈몰러는 국민경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어떻게 인간이 정신적·도덕적으로 창조되었고 기술적으로 익숙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들의 풍습과 욕망이 발달했는가? 어떻게 하여서 그들이 가족, 촌락 및 도시로 조직되었는가? 어떻게 자산과 자본이 분배되고 분업과 사회적인 계급구성이 형성되어지고 있는가? 어떻게 시장, 상업, 화폐가 규제되고 있으며 재산 및 국가경제적인 제도가 어떻게 개별경제와 경제적인 진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파악하여야 한다고 보았다.국민경제학의 방법으로서는, 첫째 국민경제현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기술하며, 둘재 이것을 정의하며 분류하고, 셋째 원인으로부터 설명할 수가 있다고 슈몰러는 서술했다. 관찰과 기술의 방법은 국민경제현상이 상이함에 따라 다르다. 이 방법은 다른 학문으로부터 빌리거나 혹은 독자적으로 개발·발전시키
    경영/경제| 2003.06.04| 9페이지| 1,000원| 조회(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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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삼국지감상문 평가D별로예요
    중국 4대 기서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삼국지(정확하게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봉신연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일부에서는 봉신연의를 제외시키고 수호지를 언급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금병매를 빼고 홍루몽을 집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삼국지와 서유기를 4대 기서로 언급하는데 의문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여기서 '기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서'를 우리나라 말로 풀이하자면 '기이한 이야기'정도가 될 것이다. 4대 기서로 일컬어지는 삼국지, 서유기, 금병매, 봉신연의, 수호지 중에서 삼국지를 제외한 나머지 4개는 정말 '기이한 이야기'라 하지 않을수 없다. 보통으로는 절대 인간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 들이다. 서유기와 봉신연의는 최근 횡횡하고 있는 판타지와 비슷할 정도고 수호지는 무협지와 흡사하다. 금병매는... 따로 말하지는 않겠다.하지만 삼국지는 어떤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실화다. 물론 나관중이 삼국지를 삼국지연의로 개작하면서 많은 과장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엄연히 중국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는데 부정할 사람은 없다.놀랍지 않은가? 큰 범주로 보면 '역사서'라고 할수도 있을 삼국지가 '기서'의 목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특히나 삼국시대까지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전무하고(학계의 인정을 받은 것은 이 둘뿐이라고 알고 있다. 한단고기와 부도지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 인정하는 학자는 적은게 현실이다) 그나마 있는 이 두 책들도 고려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게 현실인 우리나 같은 곳에서 역사서가 매우 대중적인 지위를 갖고 있고 '기서'라는 범주에 속해있다는 것은 분명 파격적인 일로 보인다.이 책이 얼마나 대중적인가 하면 우리나라 책이 아닌데도 '삼국지를 3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주변에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삼국지 안읽었다는 사람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리 책 안읽는 2권짜리 어린이들 대상으로 씌여진 것으로라도 읽었을 것이다.혹자는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 단순히 대중적이라는 것만으로 그 책이 좋은 책이라는 기준이 될 수 있느냐고. 좋다. 옳은 지적이다. 대중적이라는 것만으로 책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옳은 판단일 수 없다. 별 내용도 없는 판타지나 무협소설도 많이 읽혀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삼국지는 그런 책들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삼국지는 '양서'목록에도 꼭 들어간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책 안읽는다고 한창 '필독서'지정 붐이 불었을 때 삼국지는 어떤 필독서 목록에든지 그 이름을 올렸었다.그리고 서점에 가보면 삼국지의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갖가지 관점의, 다양한 해석의 삼국지들이 있다. 그리고 발행년도를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그런 책들이 꾸준하게 발매되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어떤 사회적 이슈가 떠올랐을 때 그 이슈에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다. 작년에는 9·11 테러와 미국의 아랍권 침공 때문에 이슬람과 관련된 책이 많이 나왔었고 또 최근에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그리스 로마 신화도 쏟아져 나온 전례가 있다.하지만 이런 책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관심이 잠잠해지면 더 이상 발간되지 않는다. 서점에서도 종적을 감추게 된다. 하지만 삼국지는 관련된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된 적이 없었음에도 꾸준하게 서점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다른 작가의 다른 관점에 따른 해석으로 나오고 있다.이렇게 롱런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그 책의 내용에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책의 내용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이유로 인해서 그 책이 각광을 받는다면 이렇게 오랬동안 관심이 쏠릴 수 없기 때문이다.삼국지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인물'에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많이 나온다고 했던가? 삼국지에는 1000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인물들 개개인은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으며 놀랍도록 섬세한 인물묘사를 통해 독는 '주연급' 인물이 많기 때문에 수많은 해석이 가해질 수 있을 것이다.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와 삼국지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은 '촉'의 유비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여기에는 진수과 나관중의 개인적인 사정이 많이 개입된 탓도 있지만 (나관중은 '촉한' 지방 사람이었고 진수는 진나라 사람인데 '진'은 조조의 '위'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나라다. 보통 식자들은 그 시대의 지배자들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은 지배자들의 실책과 제도의 허점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수도 이런 경향을 갖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진수는 '촉'의 신하였던 사람의 후예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강한 사람보다 약간 세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상대적인 강자를 쓰러뜨리는 식의 이야기에 호감을 많이 갖게 된다. 스포츠에서도 보통 승부보다 역전승이 나왔을 때 관중들이 더 열광하는 것처럼. 동정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는 생각이다. 대부분의 대중은 상대적인 약자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상대적인 약자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조나 손권 보다 유비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주된 사상이었던 '유교'의 사상에 더 적합하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지만 왕족이었다는 배경도 그렇거니와(유비가 자신의 선조라고 주장하는 중산정왕 유순은 사생활이 문란해 유비의 주장을 확인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효자였고 '의'를 중시했다는 점도 그러하다. 이에 상반되게 조조는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난세의 간웅'이라는 평가가 아주 정확한 평이라고 보여 진다. '오'의 손권도 삼국지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기도 하고 약속을 했다가 상황에 따라 깨버리기도 하는 등 유교의 이념에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다.그리고 조조는 한족이 아니라 동이족 이었다는 주장이 유력하고 손권 또한 그의 외모 묘사로 봤을 때 한족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를 묘사한 말 중에서 '눈동자가 푸르고...'라는 색이라면 한인들이 '색목인'이라고 불렀던 이방인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본다. 이에 반해 유비는 한족이다. 이방인보다 동족에게 더 호감이 가는 건 당연한 것이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비를 좋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소위 그가 말하는 '의'라는 것은 불분명하다. '의'를 중시한다는 사람이 자기 형평에 따라서 조조에게 붙었다가 조조에게 칼을 들이대고 원소에게 붙었다가 원소에게 칼을 들이대고 손권에게 형주를 빌린다고 했다가 약은꾀로 돌려주지 않았다. 자신의 수하로 들어온 미축의 재산을 탕진했으며 여러 여자에 빠져 자신의 형세를 돌보지도 않았다. 그가 말하는 '의'라는 것의 실체를 삼국지 처음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강을 건너다가 한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넜다가 노인에게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노인에게 말도 안되게 휘둘리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노인의 명령대로 행하는데 나중에 그 노인이 왜 화도 내지 않고 자신이 하라는 대로 했느냐고 묻는다. 유비의 대답은 처음부터 당신의 요청을 행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으되 이미 당신의 요청을 수락했는데 나중에 힘들다고 그만두면 이제까지 했던 고생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느냐며 그때 참고 요청을 모두 들어준다면 나중에 더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그 노인은 바로 그것이 '의'라고 하는데 내 견해는 그것은 '의'가 아니라 약삭빠른 손익 계산일 뿐이다.내가 보는 유비라는 인물은 큰 지혜는 없으면서 눈앞의 손익은 재빠르게 챙길 줄 아는 약은 인물이며 그 유명한 여포보다 더 배신을 밥 먹듯이 했던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며 상황에 맞는 충고를 하는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거기에 여색을 밝히고 무모하며(자신보다 훨씬 통찰력이 뛰어난 제갈량이 안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를 쳤던 점이나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아서 건조한데도 화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숲에 진을 쳤던 점에서) 자신의 수하들의 별 필요도 없는 힘싸움을 등한시해 중요(제갈량과 관우의 2인자를 두고 알력이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르 취하지 않고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기만 했다가 관우를 죽게 만들었다).요즘에는 조조에 대한 재조명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조조는 현실적이면서 실리를 중시했는데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을 조조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비처럼 왕족은 아니지만 그런 불분명함이 없다.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조정의 실세였던 사람이 아버지였고 자신 스스로도 한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랐다. 반면에 유비는 동네 건달패 였다는 걸 상기하자.조조는 문인으로서도 높은 수준 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조조가 썼다는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맹덕신서'라는 병법서를 쓸 정도로 병법에도 뛰어났으며 일정 수준의 무예도 갖추고 있었다.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났고 무엇보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별 쓸모도 없는 명분이나 의리 따위를 중시했었는데 반해 그는 능력과 실리를 중시했다. 항상 현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법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상벌을 정확하게 행했고 스스로도 규칙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서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조조도 몇 가지 실수한 것이 있긴 하지만 그도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다.중국에서는 관우를 거의 신격화 시키고 있다. 이문열도 삼국지를 쓰려고 중국에 갔다가 현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건드려도(?) 되지만 관공을 트집 잡을 생각은 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관우를 위한 제단이 있다고 하던데, 난 관우가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모르겟다. 무력은 여포에 미치지 못하고 장비와 비슷한 정도이다. 오히려 약간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여포나 장비처럼 '무식한' 무장들과 달리 학식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더욱 의문이다. 관우가 전에 마을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삼국지를 읽다가 관우가 지장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관우 보다 장요나 여몽에게서 지장
    독후감/창작| 2003.05.20| 4페이지| 1,000원| 조회(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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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발전론] 영국일본우리나라의 자본축적 평가A좋아요
    1. 발전단계와 투자자금 공급의 선도 주체자본축적이란 주로 투자자금을 어떻게 마련해서 투자를 위해 이것을 어떻게 동원하는가 하는, 즉 투자자금의 축적과 동원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공업화에 있어서 선두주자·중간주자·낙후주자등의 자본축적과정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전개되는지 영국,일본,한국등 세나라의 사례를 비교하여 살펴본다.세나라의 자본축적과정을 비교연구하는 것은 후진국의 개발문제를 이해하는데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 세나라는 국토넓이와 기후가 비슷하고 자원은 부족한데 인구압력이 크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래서 국내시장이 좁아서 공업화는 해외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같다. 그러나 영국은 18세기 후반, 일본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는 20세기 후반에야 시작해서 세나라의 공업화를 시작한 시기가 100년씩 차이가 난 것이 다르다.그렇기 때문에 세나라를 비교한다면 후진도의 차이에 따라 자본축적이 유형이 어떻게 다른지 쉽게 알 수 있다.자본축적의 기본성격은 농업잉여의 유무와 그 크기 그리고 무역의 역할과 가격기구의 역할 , 외자의존의 유무와 그 크기등에 의해 규정된다.자본공급의 주체는 민간기업·은행·정부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이 가운데 무엇이 공업화의 자본공급을 주도하느냐는 것이 원시축적의 유무와 그 정도 또는 공업화를 시작하는 시기가 얼마나 빠른가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이다.영국의 경우 원시축적이 충분하였는데 원시축적이란 공업화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미 축적되어 있는 민간부문의 농업자본이나 상업자본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은 원시축적은 충분하였지만 어디에 투자되어야하는 것이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영국의 은행은 공업화과정을 통하여 장기시설자금 금융을 할 필요가 거의 없어 상업금융위주로 발전하였다.영국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민간기업 스스로 자본을 조달했으며 정부나 은행의 투자자금 공급기능은 거의 없었다.그다음으로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에는 원시축적이 있었지만 투자수요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처음단계에서는 자금을 모아 주는 은행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그 뒤 민 기업에 자금을 공급하지만 장기설비자금보다도 상업금융에 중점을 두게 되며 기업의 투자자금은 은행대부보다도 사내유보나 주식 또는 회사채시장에서 조달하게 된다.2. 영국의 자본축적과정(1) 농업부문의 원시축적산업혁명에 필요한 자금공급은 무역과 농업이 담당하였으며 특히 농업부문의 원시축적은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국의 농업혁명은 산업혁명이전에 있은 제 1차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이후에 있은 제 2차 농업혁명이 있다. 제 1차 농업혁명은 종획운동을 통하여 공업화의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인이고 제 2차 농업혁명은 비농업의 발전으로 인하여 농공간의 생산성 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이를 농업이 따라가기 위하여 농업의 기계화와 완전한 자본주의화를 실현한 것으로서 이것은 산업혁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종획운동은 백여년에 걸친 농업의 자본주의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운동은 농지합병을 통한 농업경영의 대단위화, 농경지의 목장화, 즉 식량농업의 원료농업화, 근대적 생산방법과 자본의 투입을 통한 생산성의 근대화,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권제도의 확립 등으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는데 이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로는첫째로 중상주의가 만연해있던 영국은 식민저개척에 한창 열을 올렸으며 이는 특히 항해조례를 계기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중상주의적 무역과 식민지 개척을 통하여 영국에는 막대한 금은화폐가 유입되었으며 이 때문에 17세기 후반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이 인플레이션은 특히 농산물 가격과 지가, 그리고 지대 등을 크게 상승시켰다. 이로 인해 토지에 대한 투자유인이 커진 한편 중상주의적 무역과 식민지수탈을 통한 저축자금은 팽배한 상태에 있어서 토지의 매입 및 합병붐이 일어나게 되었다.둘째로 토지에 대한 근대적 소유권이 확립된 점이다. 16세기 전반에 영국의 농지소유 관계는 봉건적체제하에 있었다. 대부분의 토지는 왕실소유였으며 지주는 그관리자였다. 경작농민은 지대를 토후에게 지불하고 소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왕실수입의 대부분은 공업화에 있어서 무역의 역할은 그 특징을 중상주의적 상업이윤축적을 통하여 영국의 잠재저축을 증대시키는데에는 기여한 바가 크지만 소비재를 투자재로 교환함으로써 잠재저축을 투자로 전환시키는 기능은 거의 하지 못했다는 점과 무역을 통한 상업이윤의 축적은 산업혁명자체보다도 농업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잠재저축의 축적에 있어서는 농업보다 상업이 시간적으로 선행하였지만 규모에 있어서는 농업부문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영국의 산업혁명기를 전후한 무역의 성격은 다섯단계로 나누어 볼수 있다.제1기 : 북유럽시장을 상대로 한 보따리 포목상형 무역제2기 : 남유럽시장을 주로 한 보따리 포목상형 무역제3기 : 식민지에 대한 노예거래·재수출·중계무역등의 독점 무역제4기 : 식민지에 대한 국내제조업 생산물의 독점수출제5기 : 세계시장에 대한 국내제조업 생산물의 수출영국이 무역면에서 중세사회를 탈피한 것은 1650년경이다. 그문을 연 것이 바로 항해조례라고 볼수 있다. 항해조례는 모든 식민지로 하여금 종주국인 영국과만 거래하도록 하는 한편 영국 선박만을 이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국가권력이 표면에 나서서 제해권과 무역독점권을 선언한 것이다. 항해조례이후에는 식민지를 상대로 한 중계무역과 노예무역이 지배적이었다.이와같은 무역은 18세기 말까지 식민지무역이 중심이 되어왔다. 식민지는 영국에 대한 원료공급지로서, 상품시장으로서, 그리고 노동력의 공급지로서 활용된 것이다.이오같이 볼 때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한 무역의 역할은 중계무역과 노예무역을 통하여 상업이윤 축적을 쌓음으로써 저축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무역의 역할은 비교적 소극적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영국무역의 이와 같은 성격은 최선두주자라는 여건에서 규정된것인데, 즉 당시의 국제교역량은 크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영국은 최선두주자였기 때문에 영국에 투자재를 공급할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3) 저율의 투자산업혁명기의 영국은 주로 농업잉여에서 다음으로는 상업이윤을 통해서 막대한 양의 저축이장 먼저 공업화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중간주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은 낙후된 주자가 갖는 장단점과 선발주자가 갖는 장단점을 함께 가지고 공업화를 진행했다. 먼저 농업부터 살펴보면첫째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농업이 공급했다는 점은 영국이나 일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농업잉여축적이 영국보다 훨씬 불충분하였다는 점과 영국에서는 농업혁명이 공업화에 선행하였는데 대하여 일본의 경우에 동시적으로 병행되었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은 일본농업의 특징은 일본이 영국보다는 낙후된 주자이기 때문에 농업부문에서 원시축적이 충분히 성숙될때까지 공업화를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일본의 농업잉여축적은 영국에 비하여 훨씬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는 점 등으로 설명될 수있다.둘째 영국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의 농업잉여축적은 봉건적 소작제도와 영세적인 생계농업의 틀 안에서 주로 노동집약을 통한 토지생산성의 증대로 이룩했다는 점이다.셋째 특기해야 할 사실은 농업잉여의 흡수기구로서의 정부역할이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농업생산 증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ga은 이미 보았거니와 증가된 농업소득의 소비화를 막고 이를 저축으로 동원함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였다. 이점으 농업생산의 증대나 농업소득으 저축으로 동원함에 있어 정부가 전연 개입하지 않은 영국의 경우와 크게 대조된다.일본의 경우 농업구조가 전통적인 영세규모의 생계농업인 데다가 농업성장률은 인구증가율ㅇ르 1-2%밖에 넘지 못하였다. 이러한 환경아래서 농업잉여를 짜내는 흡수기구로서 이본에서는 조세와 지대가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특히 정부의 역할은 가장 중요하였다.먼저 정부의 역할은 농어부문으로부터 많은 직접세를 거둬서 이것을 세출을 통하여 비농업부문으로 이전시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농민의 소비를 강제로 감축시킨다는 뜻과 전통적 부문으로 옮긴다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일본의 농업은 세시기로 나눠볼수있는데 우선 제1긴 일본공업화의 초기에 해당하며 이시기에 농업은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과웁가 소극적인 후견인의 범위를 넘어서서 자본을 동원하고, 투자를 배분하여 투자활동을 실행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경제근대화르려 1선에서 이끌어으며 농민으로부터 거둬들인 농업잉여를 재별의 기업활동을 지원하는 방향에서 지출함으로써 재별로 하여금 경제근대화를 이끌게 하였고 투자활동을 위해 정부는 주로 교통, 통신 항만등 사회간접자본과 군사설비를 맡고 재벌은 공장건설등 직접생산부문으맡음으로써 분업을 이루었다는 점이다.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은행의 역할이다. 일본의 은행은 도쿠가시대의 상인인 미쓰이가 은행개설한 이후 모든은행이 재벌의 계열기업화으로써 은행과 기업이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동이체로 발전하였다. 일본의 금융19세기 후반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 늘 자금부족에 허덕여왔으며 이 때문에 1882년 중앙은행인 이본은행이 설립된 이후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의 대출 크게 의존하여 왔다. 이런점에서 일본의 중앙은행은 간접적으로 상업금융뿐아니라 주장기투자금융도 지원했다는 특이성을 있다.일본이 대량의 외자를 도하고 외국인의 직접투자, 기술도입, 민간의 융자등을 허용한 것은 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라 할수있는데그 원인으로서는 공업회 속도는 가속되는 데 반해서 농업의 공업지원력은 없어졌다는 점과 러일전쟁에 따른 전비부담 일본경제의 독립성 유지에 으정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수 있다.4. 우리 나라의 자본축적과정(1) 원시축적의 불가능성한국이 본격적으로 공업화과정에 들어간 것은 군사혁명을 계기로 하여 196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초기적 발전단계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나라는 일본보다도 약 백 년 뒤늦게 경제근대화에 진입하게 된것이며 따라서 한국의 공업화 과정은 가장 뒤늦은 주자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뒤떨어진 후발주자로서 한국이 갖는 여건상의 특징은 농업잉여의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한국의 경우는 공업화에 뒤늦게 들어갈수록 공업화에 있어 농업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거센크다.
    경영/경제| 2003.04.29| 9페이지| 1,000원| 조회(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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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네시아경제현황 평가A좋아요
    인도네시아 경제 현황1. 인도네시아 경제지표 (2001.12월 기준)·GDP : 약 US$ 1,531억불·실질경제성장률 : 4.0 %·1인당 GDP : US$805불·실업률 : 6.2%·물가상승률 : 12.55%·화폐단위 : Rupiah·환율 : US$1 = 9,850 Rupiah (2002.3월 기준)·외채 : US$1,376 억불·외환보유고 : US$319억불(2002.1월기준)·산업구조 : 농업, 경공업이 전체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교역규모 : US$950억불·주요교역품- 수출 : 원유,가스,임산물,금속광물,종이제품,섬유,신발,혁제- 수입 : 기계류,자동차,산업용 및 가정용전자,전자부품,유기화학제품2. 인도네시아 산업구조인도네시아는 19세기 이래 네덜란드에 의해 풍부한 열대자원을 바탕으로 한 농업개발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져 어떤 의미에서는 ‘열대의 보고(寶庫)’로서의 가치를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나라이다. 농업은 이른바 에스테이트에 의해서 수출을 위한 것과 원주민의 식량자급을 위한 것의 2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에스테이트 농업은 예전에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잇달은 독립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전전의 248만ha 중 오늘날 경작되고 있는 면적은 170만ha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카사바·고무 등 식량작물 외에 고무·커피·잎담배·야자유 등이다.자연조건으로 보아 벼농사는 2년5작(二年五作)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농업기술이 뒤떨어져 국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림자원은 수량이 풍부하여 목재산업이 활발할 뿐 아니라 주요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재배림의 대부분은 티크나무로 자바섬이 주 생산지이며, 동부 몰루카 지방의 특산으로 다마르 수지(樹脂)가 있다. 어업도 활발하나 어획방법이 원시적이고 어로지역도 근해가 중심이다. 제염은 마두라섬에서 활발한데, 자연조건으로 보아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염업지(鹽業地)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 동부의 아루제도과한 화교가 인니 경제계 주도가수하르토 집권('67) 이후 화교 공직진출 제한으로 대부분 경제계에서 활동※ 2,067개의 대기업을 소유한 인니 10대 그룹중 9개가 화교자본※ 상장기업 가운데 화교기업 비중 : 73 %※ '98년 5월 폭동시 800억불의 화교자본이 해외로 유출추정2) 가격 시장 현상 심화가'97년 경제위기 이후 바이어의 제품구매 결정요인은 가격가루피아화의 평가절하에 따른 수입가격 상승으로 구매력 감소※ 품질보증기간(1년) 만큼 사용 가능한 저가제품 구매선호3) 석유자원 의존형 경제구조가 아시아 국가로서 유일한 OPEC 회원국 (OPEC내 5% 생산비중)※ 석유/가스는 인니 전체 수출의 25.1% (2000년)※ 한국의 대 인니수입중 석유/가스가 65.2% (34억불) 차지 (2001년)4) 저임금의 풍부한 노동력 보유가 인구 2억 1천 2백만의 인구대국 (세계 4위)가 월 최저임금 594천 루피아(59불) 수준의 저임금 노동시장※ 전체 노동인구(9천만명)중 37%인 3천 3백만명 실업추정5) 외국자본 의존형 경제구조가 자체자본 및 기술 부족으로 경제개발에 대외 의존도 심화가 장기간 식민통치(네덜란드, 1602∼1942)로 국민자본 형성 미흡※외국인 투자 ('67∼'00) : 9,468건/2,328억불※일본 1,279건/342억불(14.7%) 최대, 한국 1,099건/95억불(4.1%)로 7위5. 인도네시아 투자환경- 원유, 천연가스, 주석 등 풍부 한 천연자원과 2억이 넘는 저렴하고 풍부한 인적자원 보유- 외환위기 전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외환위기 이전에는 꾸준한 경제성장 이룩- 인니 정부의 지속적인 개방경제 정책, 자유외환정책으로 90년대 중반까지 외국인투자가 크게 증가- 69년부터 시작된 1차 25개년 장기경제개발 계획기간 중 평균 6%의 경제성장을 이룩- 96년까지만 해도 매년 7~8%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 아세안 지역의 거점기지로서 각광- 현재 외환위기를 벗어나고 인니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부족한 자본을 외국인 직접 투자에 상 ASEAN등에서의「자유무역협정 준수사항」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성실한 협정 이행국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하고 있다.(1) 인도네시아 정부 경제완화 정책발표1) 부과관세율의 대폭인하1996년의 완화정책으로 9,398개의 관세부과 항목이 6,030개로 줄어 들어들었다. 이는 인니 관세율 상의 등록된 총 9,398개 품목의 64,18%에 해당하는 총 6,030개 품목에 달하는 대폭적인 수입관세인하 조치이다. 이 조치로 2003년까지 자동차와 주류를 제외한 모든 공산품의 수입관세가 10%를 초과하지 않게되며 현재 5% 이하의 수입관세를 기록하고 있는 쌀,콩,밀가루,야자기름 등은 제외되었다.2) 수입규제의 완화수입규제가 현행 한정수입자, 등록수입자가 수입하거나 조달청이 수입하는 81개 항목과 식용유 등을 일반수입자에게도 개방하는 등 수입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주요품목의 수입관세인하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문용지는 20%에서 5%로 인쇄용지와 식용유는 15% ~ 20%에서 무관세로 수입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목재 절단용톱, 페인트 원재료 등도 현행 10% ~ 35%에서 각각 5%가 인하되었고, 자동차인 경유에는 수입부가세를 차종별로 인하하였다. 96년 8월 한국 차의 인니 진출로 인하여 일어난 이러한 조치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분석되었다..3) 자유무역지대/ 산업지대의 활성화인니 재무성은 다음과 같이 규제 및 세금을 완화하여 자유무역지대 등 공업지대의 활성화에 기여 하였다. *전자제품(완제품)의 타 관세지역으로 이동시 30%과세 *수입품 포장, 상표인쇄등의 이유로 다른지역으로 이동시 선적 이전의 검사, 관세, 부가가치세, 수입부가가치세, 소득세 삭제 *샘풀수입시 각 상표, 모델, 타입별로 5개 제품 수입허용 * 수입품의 항공시 선적이전의 검사 삭제4) 외국인 투자금지조치의 해제 인도네시아 정부는 현행 외국인에게 전면 투자금지산업중 다음 산업부문은 부분 또는 완전 해제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2) 사업허가와 산업구조의 합리적 개편 내용향후 산업지대에 위치하고, 양도의무 철폐, 최소 투자금액 제한 폐지, 교통 및 통신 등 9개 공공사업분야에 대한 외국인투자 개방 등 외국인투자 규정이 근본적으로 개정되었다.즉, 외국인직접투자 형태면에서는 개인투자도 가능하게 되었고, 투자 최소자본금을 합작투자시 1백만 달러, 단독투자시 2백만 달러 이내로 원칙적으로 제한했던 규제조항을 폐지하였고, 원칙적으로 합작투자시 최대 지분투자 허용범위를 80%에서 95%로 확대하였으며, 이런 투자지분의 양도기간도 합작투자시 생산개시 20년 후 지분의 51% 이상을 현지인에게 양도해야 하는 의무를 철폐하였고 사업허가기간도 최대 30년에서 60년으로 연장하였다.이 밖에도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6년 6월 경제규제완화조치를 발표하여 중앙정부 승인을 획득한 산업공단 내 플랜트 건설 및 건축 투자는 지방정부의 별도승인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등 산업공단 및 보세지역 내 투자절차를 간소화하였으며, 1996년 12월 대통령령을 통해 동부지역에 신규 설립되는 투자기업에 대해 세제감면 등의 특혜조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아자동차의 국민차 프로그램을 비롯한 특혜조치들은 모두 IMF를 계기로 없어졌거나 없어질 계획이다.9. 무역 및 관세제도(1) 무역제도인도네시아에서는 1986년 이후 복잡한 수입허가제도 대신 관세의존적인 수입관리체계를 이행하여 비관세무역장벽(NTBs)에 저촉받는 수입품목의 비중이 1986년의 46%에서 1991년에는 13%로 저하되었으며, 지속적인 무역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도 1990년 5월 공업제품에 대한 수입규제 철폐, 1992년 7월 수입제한 대상품목 축소 (705개 → 241개), 1995년 5월 식용유, 등나무 가구, 자동차, 보일러 및 항공기정비 등에 대한 신규투자 허용, 1996년 6월 수출선적 검사폐지 및 1억 루피아 이하의 물품선적시 수출신고서류 제출을 면제해주고 있다. 특히 1995년 5월 무역자유화 조치로 78개 이상의 상품에 대해 수입제한을 철폐하여 관세대상 품목의 95% 이상이 수입이 자 비가공 농산물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또한 1994년 11월 APEC 각료회의에서 2020년 이후 지역내 무역자유화를 달성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Bogor선언에 의하면 역내 선진국은 2010년까지 모든 무역장벽을 철폐하고 신흥투자국에 대해서는 WTO 규정에 따라 2020년까지 유예할 예정이다.인도네시아는 CEPT 체계에 따라 1994년을 시작으로 아세안 역내 회원국들로부터 수입한 1,941개 품목에 대해 관세를 인하한 데 이어 1995년 1월에는 3,557개 품목에 대해 5∼45%에서 2.5∼30% 수준으로 관세를 인하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0년까지 쌀, 설탕, 밀 등 15개 농산물에 대해서는 CEPT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10. 인도네시아 내 투자시 장단점(1)투자시 장점1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거시경제 환경2 외국인투자 유치확대를 위한 정부차원의 노력 지속3 격오지 투자시 조세감면기간 등의 각종 특혜 부여4 외국환 입출금의 자유화5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2) 투자시 단점1 사회 불평등에 따른 정치불안정2 부패에 노출되어 있는 법무부에 의해 제정된 법규의 미흡3 행정관서의 관료주의 와 부패4 지방의 열악한 사회간접자본 시설5 숙련된 현지 중간관리층의 부족11. 수출입구조(1) 연도별 품목별 수출통계 (단위 : 백만US$ )──────────────────────────────────품 목 '95 '96 '97(1-3)──────────────────────────────────축 산 물 1,647.5 1,653 346야 채 류 1,223.9 1,197 234동 식 물 성 유 지 1,442.7 1,460 389식 품 . 연 초 998.3 1,240 296광 물 제 품 13,221.0 14,814 3,989화 학 제 품 1,146.3 1,445 314프 라 스 틱 고 무 2,729.9 2,871 674가 죽 제 품 282.5 250 61목 제 품 4,091.9 5,233 1,245펄 프 1,452.0 1,386 285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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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경제| 2002.11.27| 11페이지| 1,000원| 조회(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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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문화] 대중문화의 성격
    대중문화의 성격에 대한 이해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누구나 잘 알 것 같은 이 개념은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20세기 한국사회를 설명하면서 '대중문화'란 개념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했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한국사회에서의 문화란 계급적 성격과 지역적 성격이 뚜렷한 가운데 진행된 다시 말하면 문화향유에 있어서의 지엽적인 한계가 분명했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대중문화'의 등장과 함께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비로소 '대중'이란 존재가 주체로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0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대중문화'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또한 앞으로의 한국사회 발전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한편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것은 '대중'이라는 개념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중문화의 주체에 대한 논란까지 그 성격에 대한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대중문화의 '문화'란 개념은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오던 '문화'의 개념과 다른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문화주체와 수용자의 불일치, 생산관계에 있어서 인식론적 비통일, 상하부구조 어디에도 위치 지을 수 없는 유동성, 대중과의 단절성 등이 그것이다. 결국 이제까지의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은 개인의 관념적인 분석에 치우치거나, 아니면 구조적인 종속성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이 글은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검토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한국사회의 대중문화 성격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 글이다.Ⅰ 문화와 대중문화의 의미'문화'라는 개념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예술에 있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정확히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다. 예컨데 문화인류학에서는 '문화'를 수세대에 걸쳐 내려온 문화유산, 예술품, 그리고 제도에 반영되어 있는 신념과 가치의 유형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학이나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문화'는 사회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개념이며 개념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문화를 가르키며 고급문화, 하급문화는 문화 수용자입장에서 사회적 지위를 지칭하면서 쓰이게 된 말이다. 또한 민족문화, 지역문화는 역사적으로 같은 공동체이거나 지역적으로 동일한 문화를 가르치는 말이며 계급문화, 민중문화와 같은 말은 사회구성원의 계급관계를 기본으로 형성된 문화를 가르킨다. 이 외에도 남성문화, 여성문화, 청년문화, 엘리트문화 등 문화라는 말은 수식어로 붙는 단어의 성격에 따라 구분 지을 수 있으며 현재 논의되고 있는 거의 모든 문화담론은 이러한 구분을 기본으로 자신들의 논지를 펼쳐가고 있다고 보여진다.그렇다면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대중문화라고 표현되는 개념은 외국어의 번역어이며 외래의 개념이다. 이 외래의 개념은 크게 mass culture, popular culture 등이 있으며 이들 원어들은 그 뜻을 약간씩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중문화'가 어떤 원어의 뜻을 사용한 말인가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매스 컬쳐로서의 대중문화는 유럽의 근대사회가 성립된 이후의 문화적 현상이지만, 포플러 컬쳐로서의 대중문화는 이보다 역사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전자가 어원적으로 사회계층 구조내에서의 하류층,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며 따라서 대중문화를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다수에 의해 수용된 문화를 뜻한다면 후자는 이러한 개념적 편향성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개념이다. 포플러 컬쳐란 화폐경제의 등장과 함께 수용자와 사업가의 영향속에서 예술성을 구현하는 문화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중산층의 문화라 불리워진다. 이와 같이 대중문화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는 이 두 가지의 어원에 중심을 갖고 연구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와 같은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가 대중문화의 현상을 그 어떤 질적·도덕적 잣대등 관념적인 해석에 몰두했다면 여기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며 나타난 것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의 대중문화에 대한 검토이다. 주로 문화유물론의 입장에서 제시된 이러한 연구방법론은 기존의 연구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은 점 속에서 움직여 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Ⅱ 대중문화의 성격일반적으로 대중문화의 출현이라고 한다면 18세기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자본주의가 자리잡던 시대를 말한다. 대중문화란 대중매체에 의해 대량적으로 생산되고 다수의 문화수용자에 의해 대량적으로 소비되는 대중 지향적 상업주의문화를 가르키는 말로써 혹자는 자본주의 문화의 적자라는 표현 서슴없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대중문화가 갖는 성격은 무엇인가? 대중문화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이 크게 비판론적 입장과 옹호론적 입장이 존재하고 다시 문화산업에 대한 구조주의적 연구가 진척되었다고 본다면 기존의 문화이론은 그 입장에 따라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서로 차이가 크다.먼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론적 입장은 대중문화를 '고급문화를 저급하게 통속화시킨 문화'이며 따라서 대중을 불완전하고 편파적인 인식으로 몰고가 고급문화의 붕괴는 물론 대중의 의식을 마취시키는 문화라고 설명한다. 이에 반해 옹호론적 입장에서는 대중문화는 대중사회의 출현으로 인해 나타난 필연적인 문화이며 이전의 권위적인 문화를 쇠퇴시키고 사회 대다수가 함께 향유하는 문화임을 피력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고급문화, 범속문화, 퇴폐문화가 고루 나타나는 다원주의적 문화이며 궁극적으로 문화저변의 확대와 개인주의의 확산에 기여했음을 말하고 있다. 문화유물론에 있어서의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는 인식의 틀에 있어서 구조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후기 맑스주의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자본주의 계급지배가 그대로 연장되는 하나의 산업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상품문화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함으로써 사회통합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대중문화의 성격은 그 통합의 가장 중요한 기구인 국가권력과 긴밀하게 결합하며 또 그 권력의 성격에 따라 심하게 통제 받기도 하는 문화메카니즘이란 것이다.이 외에 70년대 이후에 아시아를 중심으로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졌던 문화이론을 들자면 종속문화론을 들 수 있다. 종속문은 대중잡지의 창간, 문화예술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초기 대중문화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고급문화의 통속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고 대중문화가 '반문화'의 성격으로 이해되어 '대중문화 반대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초기의 이러한 대중문화 반대론이 이론적으로 근거가 없는 인신론적 공격이었다면 80년대는 이와는 달랐다. 그것은 당시 유행했던 맑스주의 이론을 근거로 한 민중문화론과 종속문화론을 중심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이 사회운동적으로 확산되게 되면서 '문화운동=대중문화반대'라는 등식으로 받아드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초기 대중문화 반대론자와 다른 것이 있었다면 대중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전통문화와 민족문화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문화등 주로 사회하부구조의 실천운동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대중문화반대론은 한국사회에 있어서 그 형성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문화를 긍정적 또는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에 대해 대중추수주의로 몰아가곤 하였다.한편 90년대에 들어서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대중문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반대중적 성격이 '대중문화' 자체에 대한 분석이었기보다는 대중문화를 그 외적인 요소 즉 경제주의적 종속성과 제도적인 규제등 만을 강조하여 대중문화 스스로의 발전에 대하여 경시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90년대의 변화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기존의 유물론에 입각한 반대중문화가 힘을 잃은 반면에 아이러니 하게도 대중문화가 문화적 주체로써 세워지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90년도의 변화는 포스트모던이즘이에 입각한 담론을 통해 이론적으로도 이전까지의 대중문화이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 됨으로써 대중문화의 하방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90년대 진보진영의 '대중속으로' 이라는 가치나 대중운동의 확산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나아가 '대중'을 문화적 주체로써 승격시켰다.Ⅲ 포스트 모의 붕괴와 더불어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바로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일어난 지식인 사회의 혼란이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학문이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되고 체계화되었던 역사적 상황이 해체되면서 일어난 혼란이며 동시에 이전까지의 학문풍토에 대한 전면적인 반발이자 논쟁이었다. '포스트 모던이즘'이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일어난 사상적 전환을 일컫는 말이며 그것은 이전의 모든 이념적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마찬가지고 이러한 포스트 모던이즘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대중문화와 함께 급속하게 번져 나갔다.90년대 대중문화이론에 제기되는 가장 근본적인 성격은 바로 '대중'에 대한 개념적 이해이다. 이전까지의 '대중'에 대한 이해는 '대중은 익명인 상태에서 서로 분리된 채 조직도 없고 단합된 행동능력도 없으며 따라서 통일된 의식이 결여된 집합체라고 설명되어졌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이 제기 되면서부터 이전까지의 대중문화이론이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반대중적 성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기존의 대중문화이론(옹호론, 비판론, 문화유물론)에서는 대중과 대중문화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몇가지 특성으로 말하고 있다. 첫째 대중은 하류계층이나 중산층이며 대중문화란 고급문화의 보편화이거나 통속화이며, 저급퇴폐문화까지도 포함한다. 둘째 대중의 대중문화 향유는 일종의 소비적 행위이며 이러한 대중문화의 생산에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지배한다. 셋째 대중문화에서 대중은 피동적위치로써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재생산하지 못하고 속박당하는 존재다.90년대 제기되는 대중문화이론은 위의 지적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먼저 대중의 개념에 대한 이해이다. 앞서 설명한 대중에 대한 이해는 과거 '민중'에 대한 개념과 대비되어 사용되어져 왔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익명의 상태에서 조직되지 않은' 대중을 '사회모순을 인식하고 조직하여 투쟁하는' 민중으로 가는 전환과정에 있는 조건으로 인식한다. 때문에 이 과정에서말인가?
    사회과학| 2002.10.03| 6페이지| 1,000원| 조회(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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