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영웅의 존재로 자리 잡은 잔다르크. 단순히 그녀를 영웅이나 성녀라고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에 초점을 둔 이 영화는 기존에 내가 생각했던 그런 잔다르크가 아닌 새로운 느낌의 잔다르크로 나에게 다가오게 만든 영화였다. 여기서 그녀는 신비로우면서도 한 인간으로써 고뇌하고 갈등하는 모습들이 묘사된다.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언니의 모습 -영화에서 극적 요소로 활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어린 잔의 모습과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러한 이류들로 인해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로렌의 처녀”라 불리면서 프랑스의 성녀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그렇게 믿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녀가 신의 계시를 받았을까?’ 라는 의문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특히 그런 의문을 갖게 만드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에서 ‘들판에 놓여진 칼’에 관한 이야기를 감독이 참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당연시하게 받아들여진 나의 기존 생각들이 하나의 고정관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헌에 기록되고 그렇게 배웠다고 당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역사의 재해석을 통해 본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것에서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은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그런 모습을 많이 부각시켰다 하더라도 분명 그녀가 성녀이고 프랑스의 기적을 이룬 영웅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에 영화를 보면서는 정말 막말로 그녀가 충격에 의해 미친 정신병자의 소행이라고도 생각 해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녀가 그녀 스스로 성녀라며 일컫는다고 다 성녀가 되고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논리의 일관성으로 그러한 것들을 보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논리는 우리들의 지각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런 것을 통해 기적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분명코 프랑스의 역사적 영웅이고 성녀였고 그렇지만 우리와 다름없는 고뇌하는 하나의 인간이었던 잔다르크이라고 본다.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을 이야기 하자면 아무리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언니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서 성녀가 되었다는 그러한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느껴졌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조국을 위해 싸운 잔다르크를 단순히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복수심으로 치부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아쉽기도 하다. 물론 감독이 그런 표현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냉소적 시각을 표현했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극단화 된 표현은 도리어 역사의 재해석이 아닌 억지의 모습으로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국과 싸워 당당히 이긴 프랑스의 역사를 영국의 언어인 영어로 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흥행을 생각해서라고도 하지만 나라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 시대적 영웅을 흥행을 위해 일본말로 제작하는 그런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오직 유태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체포되어 아주 처절한 생활속에서 어떻게든지 생명을 유지하려는 죄수들, 그러나 오히려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저자는 자기 체험을 통해 깨닫는 책이다. 여기에는 목적과 염원에 대한 욕망이 우리가 어떤일을 하는 이유를 설명 해 주고,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추구가 인간동기의 근원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저자는 여기서 죄수의 심리적 반응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수용소에 수용되는 단계, 수용소 생활 단계,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석방 내지 해방의 단계로 나누었다.수용소에서 수용되는 1단계에서 이 사실에 대해 죄수는 이상한 심리 상태를 표현했으나 자신에게 있어서 생각하면 정상적 반응이었다. 그리고 제 1단계의 특색은 수용쇼크가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은사망상{) 사형선고 받은자가 교수의 바로 직전에 은사나 받지 않나하고 공상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현 상이라는 병상을 가진다.(이러한 증상을 나타나게 하는 죄수들은 주로 카포들이다.) 또한 이들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 1기에는 고민과 감정의 흥분을 체험한다.2단계라는 것은 무감동의 단계로서 내면적 사망이 차차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수용소에 있는 동안 정신생활이 원시적 충동성을 드러냄으로써 원시적 수준으로 저하된다. 그리고 기아와 수면부족으로 인해 무감동이외에 초조함을 심어주기도 한다. 수용소의 생활의 기쁨이란 쇼펜하우어의 소위 부정적 의미에 있어서의 행복, 말하자면 고뇌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것도 전적으로 상대적 의미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저항하여 자기의 가치관을 높이기 위해 최후의 시도를 하지않는 한 주체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여기서는 결국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지배된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준다. 기아와 수면부족등 열악한 상황은 인간이 인간임을 상실해주기 충분했고 그들은 짐승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소 생활 최후의 시점에서 전형적 수용소 죄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욱 인간으로 머물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한 사람의 인간이 될 것인지의 내적 결단을 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시점이다. 여기서 그들은 대다수의 죄수와 같은 빈곤한 생존을 하느냐, 아니면 지극히 소수의 사람처럼 내적 승리를 거두느냐 둘중의 하나인 것이다.제 3의 단계인 수용소에서의 석방 내지 해방에서는 그들에게 기쁨만으로 가득 넘칠 줄 알았으나 그들은 자유라는 말은 다년간 동경의 꿈속에서 완전히 낡아 버리고, 개념은 퇴색되어 버린 것이다. 왜일까?? 그들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인간기피증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며 불확실하며 단순한 꿈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용소 생활의 극도의 심리적 긴장 상태에서 마음의 평화로 돌아오는 길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리적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채만식 소설에서의 사회주의채만식 소설에서 사회주의는 특정 이념에 제한되지 않고 당대 민족현실의 핵심 문제를 인식, 통찰하고 암울한 현실을 극복, 타개하고자 하는 실천, 세계관, 이상을 함축,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대의 통치 이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어서 금기 시 되었고 따라서 공식 담론에서의 이에 대한 논의는 제한 될 수밖에 없었다. 채만식 소설에서 이를 지향하는 긍정적 인물, 이상적 인간형이 추상과 배경에 머물고 이들 계열의 담론이 명시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한 것도 당대 시대상황의 제약에서 비롯된다 하겠다.에서도 사회주의는 정상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난다. 서두에 도입될 때부터 `거시키, 무엇'하는 미지적 표현의 예비 단계를 거쳐 그 정체 제시가 지연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알려진 뒤에도 `그놈의 짓, 그놈의 것'같은 지시·대용적 표현으로 일관된다. 이러한 내용의 기피는 설화자의 그에 대한 혐오와 회피를 반영하는 한편 될 수 있는 대로 그 내용을 감추려는 숨겨진 작자의 의도도 드러내는 듯하다. 아울러 비명시적 표현은 사회주의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억제, 유보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설화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무지나 천박한 인식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회주의의 정체. 세부 내용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을 유발. 상승시키는 면이 더 두드러진 다.한편, 사회주의에 대한 설화자의 표현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정서가 강하게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놈의 것, 그놈의 짓'의 `놈, 짓'의 비속성은 그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반영하며,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하는 표현은 사회주의의 명칭이나 내용이 확고하지 않고 혼란스러운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같이 그 정체가 미처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에 대해 강한 부정적 태도와 정서를 표출함으로써, 그 정체에 대해 편견과 인상을 갖도록 심리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한다.사회주의가 `아편'에 비유되어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고조된 대목에서 설화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그 역사적 배경, 내용, 전개 과정을 설파, 규정, 논평하고, 계속 `그놈의 것 사회주의'하는 표현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유지, 강화한다.요컨대 사회주의는 지배담론의 관점에서 비판, 공격, 야유할 때는 적극적 논의, 성토 대상으로 전면에 등장하지만 중립적, 긍정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논의 할 대상으로는 배경과 함축으로 암시될 뿐이다. 이때 진지한 태도와 어조의 사조주의 담론이 절제, 기피되는 점은 부정적이고 속물적인 인물들의 경박하고 감정적이며 거친 담론과 대비되어 그들 의식과 담론의 시대착오성에 대한 풍자를 강화한다.태평천하 줄거리일꾼이나 하인은 상전을 섬기기만 하고 대가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윤직원 영감은 인력거를 타고 와서는 그 삯을 깎겠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이 어린 기생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아무것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윤 직원 영감은 자기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소작인에게 땅을 붙여 먹고살게 하는 것도 무슨 큰 자선 사업이나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한 윤 직원 영감에게는 쓰라린 기억이 있다. 출처가 불확실한 돈을 모았던 그의 아버지가 구한말 시절에 화적들의 습격을 받아서 죽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일본인이 들어와 불한당을 막아 주고 `천하 태평'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윤 직원은 진심으로 일본인들을 고맙게 생각한다. 돈을 버는 데는 무엇보다도 권력과의 결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윤 직원은 그러한 이유로써 경찰서 무도장을 짓는데 아낌없이 기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