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志1. 三國志의 구성과 체재삼국지는 후한말의 혼란을 시작으로 하여, 사실상 삼국 정립, 후한에서 魏로의 선양, 蜀의 멸망, 위에서 晉으로 선양, 吳의 멸망까지를 묘사범주로 하고 있다. 삼국지는 총 6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권, 15권, 20권이다. ,는 紀, 傳 두부분으로 구성되었고 紀에는 '武帝紀', '文帝紀', '明帝紀', '三小帝紀' 네편이 있으며, 傳에는 '后妃傳'을 앞에두고, 마지막 한편에는 소수민족에 관한 '오환선비동이전'이 있다. 와 에는 傳만 있고 紀는 없다. 전은 순서 배열상에 있어서 마치 하나의 독립된 기전체로 이루어진 사서 같이 앞에는 두 나라 군주의 傳記 및 촉과 오의 계승과 관계있는 전기를 두고 있다. 에서는 유언, 유장 부자의 전이 가장 앞에 있고, 그 뒤에 '先主傳', '後主傳'이 있으며, 이어서 '二主妃子傳'이 있다. ,에서는 손견과 손책의 전기가 앞에 있고, 뒤에는 '吳主傳', '三嗣主傳'이 있다. , 와 다른점은, 는 한 편의 일반 인물의 전기를 배열한 후에 '妃嬪傳'이 있다는 점이다.삼국지는 구성상에 있어서 후세의 기전체 사서와 다소 다른점이 있다. 첫째로 기, 전의 뒤에 后妃傳을 두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가 '외척전', '원후전'으로 하여 찬탈자 왕망의 전을 없애 마지막에 둔것과는 매우 다른점이다. 둘째는 어떤 항목을 내세운 전이 없다는 점이다. 에서 '유림열전', '화식열전'등 다른 표제의 전이 있는 것은 그 묘사하는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전을 합치거나,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같은 전에 넣고 있으므로 표제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오지 화타등의 전이 '방기전'에 있는 것 외에는 표제가 없다. 이것은 삼국지에서 선발하고 있는 인물이 정치가나 관료들에 국한되었다는 점과 관련된다.2. 魏正統에 입각한 편찬태도진수가 벼슬했던 촉과 시종 적대관계에 있던 魏가 멸망한 것은 진수의 나이 30여 세때의 일이다. 진수는 기전체의 체재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려 하였으나 사마천, 반고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즉 위, 촉, 호 삼국의 군주가 각기 황제를 칭했으니, 특히 헌제로부터 선양받은 위와 후한 황실의 일족임을 주장하는 유비에 의해 다스려진 촉이 서로 정통임을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가들은 각자 분명한 정치 태도와 사관을 갖고 있으며, 사서를 편찬할 때 또한 정통 관념을 표출시킨다.진수가 정통성을 부여한 나라는 魏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지에 보이는 다음 몇가지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첫째로 진수가 晉의 관리였으며 유비가 한실의 후손임을 주장했음에도 를 ,
강의 중에 과제물의 주제를 받고 무엇으로 할까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찾지는 않으나, 서울에는 한 나라의 오랜 수도답게 많은 사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궁궐도 여럿이고 유서 깊은 곳도 적지 않아 어느 곳이 적당한지 귀가 길 버스 안에서 한참을 궁리하다가 문득 익숙하면서 낯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543번 버스를 타고 집까지 오는 길에는 적지 않은 사적들이 있다. 먼저 서대문 고가차도를 지나 사직터널을 빠져나오면 제일먼저 사직단이 보이며 바로 그 다음 광화문과 동십자각 앞을 지나 인사동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교차로를 하나 지나면 창덕궁의 돈화문 앞을 지나 금원으로 해서 원남동을 돌아 훈련원로에 들어서게 되고, 퇴계로5가에서 좌회전하여 광희 고가차도를 건너 광희문 옆을 지나 신당동으로 들어서 버스는 왕십리로 향한다. 입학한지 7년을 내내 이렇게 왕복하였다. 문득문득 눈에 보이는 그곳들이 진작에는 꼭 한번 가고싶었지만 모두 가지는 못하였고, 다만 한 줄 이렇게 적어보았다.수 년 전에 우연히 길에서 지역유선방송으로 보이는 리포터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왕십리의 유래에 관해 물어온 적이 있었다. 자세하게는 알고있지 않았지만 대강은 들어온 대로 몇 마디 나누었는데 오늘에야 여기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두루 묻어있는 시간들을 잠시나마 살펴봤으면 한다.얼마 전 까지는 응봉산 맞은편의 중랑천을 맞 내려보고 한강이 비껴 보이는 산 아래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지만 지난 봄에 응봉산 자락 아래로 이사하였다. 중랑천이 오른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향하고 눈앞에는 성동교에 가려진 살곶이다리가 놓여있는 곳이다.응봉동은 조선시대 초에는 한성부 남부 두모방 신촌리계(新村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豆毛面) 신촌리(新村里)로 불렸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신촌리로 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응봉정(鷹峰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성동구에 속하여, 1946년 응봉동이 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각처에서 날쌔고 힘센 장사들을 모집해 대기시켰다가 왕명이나 공문을 각 지방으로 전달하게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장사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응봉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1930년에는 이 지역에서 BC700년경의 청동기시대 거주지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조선에 태조가 살곶이벌에서 매사냥을 즐기기 위하여 즉위 4년(1395)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한강위, 곧 지금의 응봉 기슭에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응봉은 조선을 조선조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기 전에도 東郊(동교)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했고, 그 후 태종, 세종 때도 이곳에 나와 매사냥을 하여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 간 151회나 매사냥을 했던 기록이 있다.집에서 나와 발길을 북동으로 하여 큰길로 향하면 이내 왕십리 오거리에 닿는데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고, 흔히 들어본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찾으러 왔던 일화가 있는 그 왕십리 바닥이 나온다.무학대사가 마땅한 도읍지를 찾으러 이곳을 지나치다 머뭇거리자 근처에서 소몰이고 밭 갈던 노인하나가 '이놈 소 우매하기가 무학 같구나.'라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이 귀에 뜨인 무학대사가 길을 묻자 그 노인이 '여기서 십리만 더 가라'고 했다는 것인데, 그 노인이 바로 도선 대사로 그 자리쯤이 지금은 도선동이고 왕십리 오거리 가까운 곳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발길을 좀 더 동쪽으로 돌리면 이내 한양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오른편으로 중랑천 기슭에 살곶이 다리가 놓여있다. 정확하게는 한양대학교 옆 성동구 행당동 5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다리는 조선시대 세종 2년(1420)에 공사를 시작해서 중단후 성종 6년(1475)부터 성종 14년(1483)에 완공된 다리로 1973년 서울시에서 수리 복원하여 현재 반은 돌이고 반은 콘크리트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긴 대교여서,「경성부사 3권」에는 실측한 결과 교폭이 20척(尺)(약 6m), 길이가 258척(尺)(약75.75m)이라고 되어 있다.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소풍을 학교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능동의 어린이대공원으로 자주 갔는데 집에 오는 길은 어지간하면 걸어오던 기억이 있다. 화양리에서 중랑천 변으로 하여 살곶이 다리를 건너오곤 했는데 그때도 이미 옛날에 만들었을 법한 돌다리가 그다지 길어 보이지 않았는데 근래에 대규모로 강변도로를 하천 둔치에 건설하면서 살곶이 다리의 품새는 더욱 초라하게 콘크리트로 도배되어진 듯 기분이 들고 다리는 이제 마치 돌무더기 몇 개와 자리를 알리는 표지만이 덩그러이 남아버린 것 같아 보인다. 개발과 보존은 과연 상치되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I. 序청일전쟁 이후 격화되어 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서구식 제도개혁까지 목표로 한 변법운동이 일어나 광서제(光緖帝)의 재가까지 얻었으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정변으로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승리의 비결은 입헌에 있다고 본 신사, 관리들이 입헌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혁명이 일어났다.II. 변법운동의 배경1. 양무운동의 한계와 변법론의 대두양무운동이 한창 궤도에 오른 1880년대 후반부터 서구의 정치제도 도입, 즉 제도적 개혁 을 주장한 변법론이 나왔다. 이는 대외적 위기상황(대만사건, 伊犁사건,청불전쟁)에서의 굴욕적 타협으로 양무운동의 파탄을 자각된 상황이었음을 들 수 있다. 강유위의 정치활동에서의 급격한 부상이 반양무파적 노선의 청류와의 연결을 통해 가능했던 데다 이와 같은 반양무적 분위기가 대외적인 위기상황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궁극적인 방안으로서 양무운동을 대체할 변혁의 이론을 모색하게 하였고 그 와중에 정제로서의 서학을 수용하자는 변법론이 표면화 된것이었다. 다음으로는 관독상판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양무기업이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통한 부강추구에 비효율적이라는 인식도 변법론의 대두에 일조하였다.2. 청일전쟁 후 위기의식의 증대와 변법운동으로의 결집변법론이 변법운동으로 구체화된 계기는 청일전쟁이었다. 막대한 배상금과 개항장에서의 제조업 허가만으로도 중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더욱 큰 충격을 던진 것은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적인 조차지 요구였고, 무엇보다 열등시해온 일본에게 패배하였다는 것은 곧바로 양무운동의 파탄이라는 인식으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전쟁후 열강의 영토할양 요구로 나라가 망하고 중국인이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기존의 양무식 근대화노선은 파탄되었다는 인식의 확대에서 변법론을 운동으로 연결시킨 것은 강유위(康有爲) 등 하급관리와 지식인이었다. 강유위는 1880년대 후반부터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황제, 고관들에게 하는 청류파(淸流派) 대신들의 지원이 컸다.III. 변법운동의 시도와 좌절1. 호남성과 중앙에서의 변법운동변법운동은 중앙 차원에서가 아니라 호남성이라는 지방에서 먼저 실천에 옮겨졌다. 호남성의 개혁은 몇가지 중요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지방적차원의 유일하다시피한 개혁운동사례를 보여주었다. 뿐만아니라 중앙에서의 개혁이 단기간에 좌절된 데에 반하여 2-3년간이라는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실천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론적 기반이나 인적구성으로 볼 때 중앙과 동일한 성격이면서 때로 더욱 급진적인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이미 수구파의 저항에 개혁운동이 약화되어갔던 것은 무술개혁의 진로조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즉, 개혁파와 수구파의 갈등은 향후 전국적 개혁운동에서 수구세력의 반격을 예상하게 해줌으로써 민권론이나 평등론같은 원칙론적 지향을 후퇴하게 만들었고, 어떻게든 전국적 개혁추진 기관을 확보하려고 집착했던 이유도 수구적 분위기에서는 지방차원의 개혁이 가망없다는 인식에서였다고 보인다.호남성의 개혁이 본격화하는 것은 강유위의 제자 양계초(梁啓超)가 호남성의 시무학당(時務學堂)에 초빙된 후, 이를테면 중기였다. 시무학당과 남학회(南學會), {상보(湘報)}(일간지)가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는데, 이들 기관을 통하여 호남성의 개혁론자들이 고취하고자 한 것은 강유위의 변법개혁론, 그 중에도 민권론과 평등론이었다. 물론 여기서 민권과 평등은 전체 국민을 상정한 위에서의 민권이라든가 평등이 아니라 신사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남학회는 학회의 성격을 띄면서 동시에 신사들이 모여 정치에 참여하는 일종의 지방의회의 기능도 가지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호남성의 수구적인 상층 신사들의 눈으로 볼 때는 하층 신사 위주의 개혁론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일로 보였다. 1898년 3,4월 경부터 호남성 개혁론자들에 대 한 수구파의 공세가 본격화하자 양계초 등은 호남성을 떠났으므로 막상 전국적인 차원에서 의 개혁운동이 중앙에서 추진될 무렵 되었다. 그는 일본의 명치유신과 러시아 피터대제의 개혁을 고찰한 글들과 자신의 개혁론을 주장한 글들을 황제에게 올렸다. 이 시기 그가 작성한 상주문의 주요 주장은 영국, 일본 등과 연합하여 분할국면을 타개하자는 외교정책과 제도국을 설치하여 전면적 개혁을 단행하자는 내치정책으로 나눌수 있는데 이 중 내치에 더 초점이 두어졌다. 황제 와 접근할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강유위는 서구식 의원제를 주장하던 종래의 주장에서 후퇴하여 군주권력에 의한 개혁추진을 주장하였다. 1898년 4월 23일 태후의 동의를 얻어 광서제가 개혁을 하겠다는 명령을 내리면서 무술 (戊戌)변법의 막이 올랐다. 강유위는 개혁을 추진해 나갈 기구인 제도국(制度局)을 개설하고 개혁 지향적인 하급관리를 임용할 것, 상업진흥, 신식학교 개설 등을 건의하였다. 황제 는 과거제에서 팔고문(八股文) 같은 형식에 치중한 문체를 폐지하고 서원을 학당으로 변경 하며 유명무실한 관료기구를 폐지하고 개혁을 추진할 기구를 마련하겠다는 등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개혁추진에 미온적인 수구파 관료 몇 사람을 태후의 재가도 없이 파격적으로 파직하고 황제 친위군을 만들 구상을 하였다. 이러한 변법파와 황제의 움직임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고 사태는 결국 정변을 향하여 치달려 갔다.3. 변법운동의 목표, 좌절변법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의회제의 개설을 포함한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이었다. 광서제의 지원을 얻어 중앙에서 변법운동을 추진해가게 된 뒤에는 의회제 주장을 일단 보류한 채 우선 개혁추진기구 마련을 최대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이는 전술적 후퇴였다. 개혁추진기구 마련은 곧 입헌군주제적 개혁을 향한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변법파의 입헌군주제적 지향은 수구파 관료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서구식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전통적 이념의 틀 안에서 추진하기 위해 강유위는 공자개제론(孔子改制論)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역시 수구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금문경(今文經)인 춘추(春秋) 공양변법파를 공격하는 좋은 재료가 되었다. 강유위의 활동을 지원해 주던 청류파 고관들이 그와 결별하게 되는 것도 이런 주장이 계기가 되었다. 광서제가 개혁의 명령을 내리고 있는 동안에도 청조의 실권은 서태후와 수구적인 관리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들은 광서제의 개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서태후는 광서제가 개혁운동을 빌미로 자신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을 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이 강하였다. 변법파가 영국, 일본과 연합하고자 하는 외교방침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을 방문하여 광서제를 소견할 일정이 잡히자 서태후측은 정변을 일으켰다. 변법파가 이토를 통해 일본의 국력을 등에 업고 수구파에 대항할 기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토를 소견하기로 한 하루 전인 8월 4일 광서제가 연금되었다. 서태후의 감시하에 이토를 소견한 다음날이 8월 6일 서태후는 훈정(訓政)을 재개하겠다는 명령과 강유위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정변이 공식화하였다. 강유위, 양계초 등은 간신히 일본으로 도피하고 6명의 개혁파 인물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개혁기에 없앴던 용관의 복구, 사민상서의 철폐, 사묘의 학당전용중지. 팔고문체 복구 등 개혁기의 조치를 원상대로 회복함으로써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IV. 입헌운동의 대두와 청정의 입헌 추진1. 신축신정과 러일전쟁의 영향정변으로 개혁조치가 실패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화단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통해 보수적인 서태후조차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식 개혁정치 곧 신정(新政) 을 추진하였다. 신정의 내용은 강유위의 개혁안에서 입헌군주제를 유보한 정도의 것으로서 교육, 병제, 재정 및 관제 개혁, 새로운 법전편찬, 악습폐지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것 으로 청조의 중앙집권적 권력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청조가 신정을 추진하고 있던 중 러일전쟁(1904-5)이 일어나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아시아의 소국 일본이 서구열강의 일원인 러시아를 이긴 것은 일본이 입헌군주국이고 러시아가 전제군주국이었기 때문이라고 본 중국의 관리, 신사층은 입헌국으로의 정전제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입헌파 신사의 입헌주장은 지방분권적 지향성과 신사의 정치참여 확대라는 오래 된 염원이 분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2. 보황파(保皇派)와 신사층의 입헌운동청조의 신정이 입헌 부문을 제외한 채 진행되고 있을 때 입헌을 요구하는 여론을 형성한 최초의 움직임은 무술년(1898)의 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강유위, 양계초 등의 보황파*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1903년부터 양계초는 청조에 입헌을 준비하도록 권고하였다. 처음에는 입헌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다가 청조가 입헌을 준비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정치단체의 조직, 선전 및 국내 입헌운동 단체와의 연대 등을 통해 신속한 입헌추진을 촉구하였다.보황파: 일본 망명후 강유위 등은 연금된 광서제를 구출하여 그에게 실권을 장악케 한 후 입헌군주제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므로 이들을 보황파라 불렀다.3 신사층의 입헌운동국내에서는 일부 개혁지향적인 신사, 관리들이 개별적으로 입헌을 주장하다가 러일전쟁 후 강력한 운동으로 발전하여 중국 각지에 입헌을 고취하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원세개(袁世凱) 등의 유력한 관리들도 청조에 입헌을 건의하였다. 청조가 입헌방침을 세워 준비단계 에서 자의국(諮議局), 자정원(資政院) 등을 개설하자 입헌파 신사들은 이들 기관을 이용하여 결속하였다. 신사층이 입헌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지방자치론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정치참여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자의국은 지방의회와 그리고 자정원은 중앙의회에 유사한 것이었으나 서구식 입헌제 하에서와 같은 의회의 권한이 없이 행정당국에 대한 자문기구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자의국 의원들은 국회의 신속한 소집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조직적으로 펴나갔다. 자정원과 일부 관리들도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국회를 즉시 소집하자고 하였으나 청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입헌준비기간을 9년에서 6년으로 단축하고 책임내각을 즉각 조직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더이상의 청원운동을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워 청원대표들을 수도에서 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