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論외래어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함의를 가지고 쓰인다.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자면 '커뮤니케이션은 인간(들)과 인간(들)이 의미 공유를 이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행하는 상징적이고 교호 작용적인) 커뮤니케이션은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참여하고, 또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으면서 최종적인 커뮤니케이션 결과를 결정한다는 뜻이다.과정' 이라고 할 수 있다.) 강길호 김현주, 커뮤니케이션과 인간, 한나래, 1999, pp27-35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언어가 없던 원시사회에서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원시적이긴 하지만 손짓과 몸짓, 그리고 소리를 통한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말·글 등이 발명되었고, 15세기 인쇄술의 발달로 17세기 중반에는 근대적 형태의 신문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는 텔레비전과 영화, 그리고 연극이라는 미디어) 사람들의 생각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 방편이라는 뜻이다.가 등장하면서 매스커뮤니케이션) 메시지가 공적으로 기술적 수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 일방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공중에게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말한다.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로 확대되어졌다. 또 인간은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한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간에 말이다.20세기에 들어와서 매스미디어는 가장 중요한 사회화의 장이 되었다. 매스미디어가 조성해 주는 사회화의 환경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의 의식은 생활세계를 지배함으로써 매스미디어는 문화적 출생이 이루어지는 문화적 환경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20세기 초 우리는 영상미디어의 원조로 꼽을 수 있는 영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이후 텔레비전으로 변모해 갔다. 일부에서는 영화가 텔레비전에 의해 완전히 대체된다는 예견이 많았지만) 배규한·류두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량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매스미디어라 말한다.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연구했다.Ⅱ. 매스커뮤니케이션1.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정의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매스 미디어(인쇄미디어, 영상미디어, 음성미디어, 뉴미디어)를 매개로 하여 수행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지는 매개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이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사람들 사이의 의미공유에 있다. 시시각각 기존의 미디어를 대체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쌍방향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면대면 혹은 매스컴의 어느 하나로 확연하게 범주화될 수는 없다.오늘날의 사회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겪어왔다. 과거와는 달리 지구 반대편의 사건과 사고를 알 수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의사 소통이 가능해 짐으로써 서로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신문·방송은 우리들에게 소식이나 생각을 전해주는 새로운 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사회의 공공화된 정보를 개인들로 하여금 공유하게 함으로써 개별화된 인간 체험의 단편성을 극복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윤병철, 커뮤니케이션, 「사회학의 매듭」, 한울, 1999, pp167-181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이러한 환경의 매우 근원적인 토대로서 공간과 시간으로 형성되는 자연환경,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는 사회적 환경이 그것이다. 물론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지는 요소는 바로 인간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인간들이 어떠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지는가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사회적 환경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2.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인간사회의 성립, 특히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매스커뮤니케이션 그 자체는 근대에 인쇄 부수는 1,000부에 지나지 않았고, 독자도 소수의 특권층이나 부유한 지식계급에 국한되어 있었다.매스커뮤니케이션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일간신문이 등장한 18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19세기는 인쇄 미디어의 완성기로서, 현대의 신문·출판의 주요 요소는 19세기 전반에 모두 갖추어졌으며, 통신사의 출현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걸쳐 선진국에서는 격렬한 신문경쟁이 전개되었으나 제 1차 서계대전 때까지 이들 국가의 대부분은 독점신문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레코드·영화도 19세기 후반에 발명되었으나 20세기의 1920년대와 1940년대에 각각 실용화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그때까지 인쇄매체가 중심이었던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일변 시켰다.오늘날에는 다시 전파신문이나 비디오, 카세트 등의 새로운 미디어가 속속 개발되는 한편, 통신위성의 이용에 의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국제화가 추진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www.yahoo.co.kr, (01-11-26, 13:27)Ⅲ.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신문인간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크게 나누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해서 행하는 '대인 커뮤니케이션'과 신문 또는 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행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 볼 때, 근대 이전의 농업을 주로 한 촌락에서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대인 커뮤니케이션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따라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늘어나고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이 확대된 근대사회가 전개되었고, 이에 따라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형태로 대두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www.yahoo.co.kr, (01-11-26, 16:07)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이러한 사회발전 단계에서 성립되었고, 신문도 그 과정에서 최초로 등장하면서 동시에 가장 유력한 미디어가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문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직접 접촉하고자 하는 외적 환경에 관한 뉴스를 주체로 한 갖달, 특히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다소 감소된 반면, 그 대신 해설과 심층보도 기능이 중요시되는 경향을 띤다.1. 신문의 역사근대적인 신문의 탄생은 서구에서 근대적인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이다. 빠른 시간 내에 활자 인쇄를 통해 대량생산 할 수 있다는 기술적 조건이 신문 탄생의 중대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손으로 필사한 서한신문이, 인쇄된 서한신문으로 발전하고 그 독자의 범위가 특정의 계약자에서 불특정의 수신자로 확대되면서 근대적인 신문이 등장하는 길은 닦여져 갔다. 필사한 정기 서한신문이 부정기적인 인쇄뉴스와 결합하여 여기에 마침내 시사성, 공개성, 정기성의 구색을 갖춘 최초의 신문-주간신문-이 등장한 것이다.)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은 독일에서 간행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1609년 독일 제후들이 신·구교로 갈라져 다툴 무렵 독일에서는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와 볼펜뷔텔(Wolfenbuttel)에서 아비소(Aviso) 또는 레라치온(Relation)이라 일컫는 뉴스·팜플렛이 매주 발행되기 시작했다.한편 교통, 통신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우편 제도가 정착되어 신문의 배달이 체계화되면서 매일매일 신문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일간신문이 발행된 곳도 독일이었다. 17세기 말 대량생산과 배급체제의 효율화에 따라 일간신문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1650년에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발행된 아인콤멘데 차이퉁(Einkommende Zeitung)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근대적인 신문이 탄생했던 유럽의 17세기는 중세 봉건사회가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역사적으로는 절대주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다른 모든 인쇄출판물과 함께 신문도 절대주의 권력의 전제적인 지배 밑에 있었기 때문에 반권력적인 엄격한 규제와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없다.) 최정호·강현두·오택섭, 매스미디어와 社會, 나남, 1990, pp83-8419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들이 더욱 발전하였는데, 그 내용과 형식이 입지가 많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전자출판 등의 도입과 함께 급속히 진보하고 있다.2. 신문의 특징신문의 역사는 언론의 역사라 할 수 있으리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언론의 미디어로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문은 오늘날 전체 사회성원의 사회화 과정에도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의 신문은 우리가 매일 접해서 알고 있듯이 국내·외의 중요한 사건·사고를 알려주는 것은 기본이고, 어떠한 사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과 해설을 곁들여 영상매체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방송이 나타난 이후에 신문은 방송미디어에 자신의 수용자와 광고를 빼앗기고 있지만 아직도 다수 사람들에게 정보와 오락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러한 신문의 중요한 첫 번째 특징은 공시성) 한 개인을 뛰어넘어 공중에게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는 특성이다. 나아가 신문이 누구에게나 보급됨으로써 그것에 의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신문은 이제 사실만을 보도해서 알려주는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여론을 형성시켜 정부의 정책형성과정에 견제를 가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지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공시성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즉 독자는 뉴스에 대해 관심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이해할 능력과 신문을 구독할 만한 경제력을 지녀야 한다.신문의 두번째 특징은 기록성이다. 20세기 들어서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파 미디어의 출현과 그 급속한 발전으로 신문은 이미 보도의 신속성에 있어서는 전파 미디어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 이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신문이 문자를 미디어로 하는 인쇄 미디어로서 전파 미디어가 커버할 수 없는 기록성이란 특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회사건의 무한한 변화 중에서 중요한 것, 인간생활에 관계있는 것을 선택·수집하고 기록한다.또 신문은 중요한 사실을 보도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보존성을 가지고 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그
Ⅰ. 序論1980년대 말 사회주의체제의 전반적인 붕괴와 더불어 북한체제의 위기구조가 심화됨에 따라서 통일에 대한 논의도 점차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의 통일관련논의들이 막연한 논리구조에서 벗어나 통일과정과 비용 등 체제경쟁의 논리를 넘은 구체적인 분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최근 제기되고 있는 주요 주제중의 하나는 남북한 이질화의 극복문제이다. 이는 동서독의 통일과 이후의 사회통합과정에서 발생한 사회통합상의 문제가 예상외로 강하다는 경험과 맞물려 우리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분단이후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상호 이질적인 제도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구성원들이 상이한 삶의 문화를 가지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 동안의 통일논의는 정치, 경제 등 제도적인 통일만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사회문화통합에 관한 연구는 소홀히 하였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독일의 통일과 그후 통독 10년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인식은 점차 바뀌게 되었다. 현재 통독의 경우 단기간에 정치·경제 및 사회보장영역에서의 법적, 제도적 '체제통합'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었다고 평가하는 반면, 사회통합에 관해서는 양 국민들간의 사회적·심리적 통합은 아직 옳게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통일초기보다 후퇴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전성우, (통일독일의 사회통합), 「남북한 사회통합-비교사회론적 접근-」, 『민족통일연구원 학술회의 발표논문집(97-04)』, 서울, 통일연구원, 1997즉, 최근 분단체제상에서 나타난 이질화의 영향은 제도적인 차원의 통합만으로 단기간내에 해소되지 않으며, 비교적 장기간의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체제의 구성원들이 장기간 상이한 생활세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단기적인 재사회화로는 해소되기 어려운 신념체계와 행동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은 이질화의 원인은 상호대립적인 분단구조에 있으며, 이는 따라서 1980년대 당국간의 조심스런 교류협력논의가 시작되기 이전에는 사회문화분야의 교류협력 역시 의미있는 수준까지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문화분야에서 체육회담, 문예·학술·보건·언론분야, 종교분야, 여성분야, 학생(교육)분야, 그리고 인도분야의 적십자회담을 비롯하여 역사왜곡 문제, 정신대 문제 등의 개별적이고 구체적 사안에 걸쳐서 개인 또는 NGOs에 의한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협력은 분단체제가 성립된 이래 비교적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회담대책개발기초자료, (남북사회문화·인도분야 회담 관련 주요일지), 서울, 통일원, 1995그럼에도 민간부문의 교류·협력은 정치적 관계의 부산물로서 단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남북한 교류가능성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한반도 주변상황의 경직된 냉전 구조로 인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였다. 그후 1970년대에 와서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를 맞이하여 '남북적십자회담', '7·4공동성명' 등을 계기로 일시적이나마 남북한간 해빙무드가 나타나 남북교류에 대한 기대가 일었으나 실질적인 교류를 통한 가지적 성과는 없었다.)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가 미·소 양극구도에서 중공과 미·일의 접근에 따른 다극화체제로의 변화, 월남전의 종전과 주한미군의 철수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세가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변화로 남한정부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제의하였다. 반면 북한측은 월남의 공산화에 자극받았으며, 미국의 일련의 태도변화를 아시아에서의 후퇴로 간주하였다. 또한 남한내의 정치적 상황도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 남북대화를 통일전선전술에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겼다.이후 1984년 하반기 이래, 남북간에는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및 '국회회담 예비접촉'에 이어 IOC 중재하에 '체육회담'이 열리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남북대화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남북대화 차원에서는 활발하고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도 높은 대내외적 기대와 관심 속에서 서 민간 차원의 개인 또는 단체의 존재가 나타날 수 있었다. 1991년 제 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 지바) 남북단일팀 참가에 대한 최초의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 승인 이후 2000. 12월 31일까지 총 29개 협력단체가 사업 승인을 받았다.) 이중 협력사업까지 승인된 사업은 22건이다.스포츠아트, 한민족복지재단 등 7개 단체에 대한 승인은 1998년에 현대아산, SN21 엔터프라이즈 중 7개 단체에 대한 승인은 1999년에 이루어졌으며, 2000년에는 한민족문화네트워크연구소와 한국문화재단 등 9개 단체에 대한 승인이 이루어졌다.) 본문 뒤의 표1) 참조보다 구체적으로 비정부 차원의 민간단체의 활동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기본 지침」이 마련된 것을 계기로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조 민, (통일과정에서 민간단체의 역할), 「연구보고서96-10」,서울, 19962. NGOs의 개념 정리비정부기구 즉, Non-Governmental Organization(NGOs)는 '공식적으로 조직되고, 비정부성, 비영리성, 비정파성, 자치성을 갖고 일정부분 자원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단체') 조한범, (NGOs를 통한 남북 사회문화 교류·협력 증진방안 연구), 「연구보고서98-15」, 서 울, 민족통일연구원, 1998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제 조직뿐만이 아니라, 국내조직, 풀뿌리조직, 권익옹호단체, 전문직단체, 이익단체, 네트워크, 서비스제공단체, 기부단체, 개발사업수행단체, 지역단체, 협동조합, 빈민단체 등 다양한 단체를 NGOs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NGOs는 비영리적 목적과 사적주도의 상설적 구조로써 사회적 연대성을 실현해야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영리적 목적이라는 점에서 기업과 구별되며, 상설적 조직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공식그룹 등과 다르며, 사적 주도로 설립되므로 비정부적 성격을 가진다. 또한 NGOs는 사회적 연대성을 실현할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정부부문과 기업부문과 구별되는 제3부문의 주요 행위자로 인 이홍균, (시민사회와 비정부조직), 김혁래 외, 「세계화와 한국NGO의 발전방향」, 서울, 경제 정의실천연합, 19971987년 이전 사회운동은 권위주의적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때문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급진노선과 온건노선사이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을 계기로 점진적으로나마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회운동사이의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 1987년 이후 초기에는 민중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했으나, 점차 다양한 분야에서 NGOs가 출현했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1993년 「환경운동연합」, 1994년 「참여민주사회시 민 연대」등이 출범하면서 시민사회 및 신중간 계층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시켰다.전반적으로 1987년 이후 「문민정부」의 등장과 「국민의 정부」출범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회운동과 NGOs활동은 지속적인 발전과정을 겪어왔다.1998년까지 한국에는 3,899개의 사회단체가 등록되어 있으며, 그중 약 730개의 단체가 NGOs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혁래, 세계화와 한국 NGO의 현황, 「세계화와 한국 NGO의 발전방안」, 경제정의실천시민 연합, 1997이중 절반이상이 1987년 이후 등장했다. 1987년 이후 이와 같은 양적인 증가는 질적 변화를 동반하여, 단체의 조직양상이 분화되고, 활동의 내용도 변화하고 있다. 특히 경제정의, 소비자보호, 환경보존 등과 같은 불특정다수의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적 영향력도 증대되고 있다.) 김영래, (한국비정부단체(NGO)의세계화 전략연구), 「국제정치학논집」, 제37집 1호, 1997이와 같은 추세속에서 통일논의에 대한 민간참여가 확대되고, 따라서 통일관련 NGOs의 활동도 활성화되고 있으며,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994년 경실련은 통일관련 민간단체 조사과정에서 대략 250개정도 단체를 찾아냈지만, 실제로 경실련의 조사에 응한 단체는 171개였다.) 경실련 통일협회·동아를 통한 사회문화 교류·협력의 개선 방향 연구1. 사회문화 교류·협력에서의 NGOs의 역할분단이후 현재까지 사회문화분야에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속적인 교류·협력의 시도가 있어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그 동안 남북간은 체제경쟁관계에 놓여있었기에 남북한 사회문화 교류·협력이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독립변수로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남북간의 정치·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남북관계가 경색되거나 호전되느냐에 따라서 사회문화 교류·협력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남한의 반공주의 정책도 사회문화 교류·협력을 경직시키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분단이후 북한과 무력을 동반하는 적대적 긴장관계에 놓여있었기에 남한 정부의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남북 사회문화 교류·협력을 제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하여 남한내 북한에 대한 왜곡현상은 더욱 심하게 되었으며,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제의들은 상대방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제안들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성사가능성도 낮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교류·협력의 형태도 일시적이고 단발적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례로 1994년 일본에서 열기로 한 「코리아 통일미술전 및 예술축전」과 민예총이 북한민 예총과 함께 서울에서 열기로 한 「코리아 통일미술전」은 김일성 사망에 따라 북한측이 이 를 연기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또한 1990년의 「제 2차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 단」이 성사되지 않은 것은 북한측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공연이 문제가 되었으며, 1992년 「노부모 고향방문단」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이인모의 송환과 포커스렌즈훈 련이라는 외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사회문화 교류·협력 그 자체보다 정치적인 선전성을 우선시하는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민간분야의 남북 교류·협력활동은 제약될 수 밖에 없었으며, NGOs의 역할도 부각되지 못했다.) 조한범, (남북의 사회문화적 통합과정에서 시민단체의 역할), 「남북한 사회문화적 통합과 시 민단체
Ⅰ. 序論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의 동유럽, 구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북한체제의 다면적 위기에 따라 남북한 통일은 더욱 구체적으로 손에 잡힐듯한 상황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와 함께 통일 이후의 국가이념, 정치체제, 경제체제, 안보관계 등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통일과정에서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고자 하는 논의, 그리고 양 체제를 정치·경제적으로 통합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무엇보다도 정치학, 특히 국제정치학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고, 사안에 따라 경제학적, 사회학적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즉 통일문제에 관한 기존의 연구 및 정책의 중심적인 접근 시각은 군사·정치적 해결을 통한 영토분단의 극복이라는 통일의 외형에 맞추어져 왔다.그러나 1980년대 말 동·서독의 통일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의 통일논의를 부추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통독의 경우 “놀라운 성공과 심각한 실패가 혼재해 있다”) 전성우, (독일통일의 사회통합), 「남북한 사회통합-비교사회론적 접근-」, 『 민족통일연구원학술회의 발표 논문집(97-04)』, 서울, 민족통일연구원, 1997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성공'의 측면을 보면, 독일은 단기간에 정치·경제 및 사회보장영역에서의 법적, 제도적 '체제통합'은 거의 완벽하게 이룩해 내었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인 특유의 법치 국가적 지향, 관료적 조직력 및 완벽주의가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엄청난 업적이다. 반면 이러한 경제통합 전망의 불투명성과 밀접히 연관됨과 동시에 이와는 차원을 달리하면서 동서독 통일과정 전반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통합'의 문제이며, 이것이 동서독 통일의 가장 심각한 '실패'영역이다. 많은 관찰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제도적 체제통합의 상당한 진척과는 달리 양 국민간의 사회적·심리적 통합은 아직 옳게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보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통일초기보다 후퇴하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남북교류·협력에서·국제적 맥락에서 상이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독일 사례를 무턱대고 한반도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냉전구도 속에서 고착·유지되었던 독일과 한반도 분단의 유사성을 감안하면, 독일의 통일 경험은 문화적 이질화의 실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 태도 정립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통일 대비 차원에서 창조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분명히 있다.Ⅱ. 독일의 사례1. 동서독인의 사회적 이질감과 갈등 배경1). 동서독의 경제력 격차독일통일은 초기에 맛보았던 통일의 행복감이 채 식기도 전에, 통일된 독일의 양 지역은 불안과 걱정, 그리고 괴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새로운 통일독일이 이제는 동서독 지역간의 정신적, 사회적 분열로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게 된 데 대한 불안과 걱정이었다.1991년 동독 노동인구의 약 3분의 1인 300만 명의 동독주민이 실업상태에 있었는데, 이들의 불만은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인파의 데모로 나타났다. 통일이전과는 달리 이제 데모의 불만 대상은 '번영의 땅'을 약속한 콜 정부로, 급증하는 실업과 서독의 40% 수준에 불과한 낮은 임금에 대한 불만이었다.또한 서독지역에서는 콜 수상이 통일 전 선거운동에서 통일이 되더라도 세금인상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나, 1991년 7월부터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통일비용이 점차 증가하는데 대한 부담 때문에 콜 정부와 기민당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이 된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두 지역의 제도적 통합은 이루었지만 하나로 함께 사는 내적 통합을 이루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인들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에는 '1민족 2국가'라고 표현하던 것을 이제는 '1국가 2사회'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다같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힘들고, 또 양측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그런데 동서독지역간 갈등의 중요한 결정적 요인중의 하나는 결국 두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이다. 전체 사회주의로부터 해방된 동독 주민들은 마치 서독주민에 의해 다시 동독주민들의 자유의사로 통일되었지만 모든 정치·경제·사회질서를 구 서독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즉, 동독을 서독에 편입시키고 서독의 기본질서를 동독에 적용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결국 동독인들은 변화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였다. 서독은 그대로 존속되고 통일독일은 새로운 건설도 아니고 타협도 아닌, 구 서독의 확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본질서를 동독으로 이전시키는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작업은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정치·문화, 사회적 연계망, 일상 사회생활 등에서는 많은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독일전체의 동질성 문제와 관련, 서독사회의 체제적 우위성으로 말미암아 서독인들의 의식은 서독의 제도·가치·규범체계 등과 일치된 반면, 동독인들은 서독사회 지향적이 되었다. 이 결과, 서독인의 정체성은 별 문제 없이 형성되었으나 동독인들은 정체성 위기에 봉착하여 독일통일은 통일과정에서 급격한 사회변동 없이 서독에 의한 동독의 편입통합으로 귀결하였다. 즉, 독일통일과정에서의 정체성 형성문제와 관련, 동독사회와 서독 사회의 혼합물인 새로운 제도, 가치규범 등이 창출되어 독일인의 정체성이 새롭게 형성되었기보다는 서독인의 정체성이 동독지역으로 확장되어 동독인의 정체성 형성 대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동독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가 다원주의적 정치체제로,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사회적 시장경제로, 국수주의적 문화가 국제주의적 문화로 전화되어 가는 동안 동독지역 주민들은 근대화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차원의 정체성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동·서독 통합은 서독은 변하지 않고 동독만 변화를 강요한다는 의미에서 결국, 구 동독의 '변혁'만을 말한다.통합은 체제간의 통합 같은 제도적 통합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뒷받침하고 보완하는 문화적 통합이 있다. 모든 제도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적절한 행동모형, 사고방식 및 가치관에 입각할 때만 가능하다. 동독지역 주민 개개인들은 갑작스레 동독체제가 없어지고 서독체제가 도입되자 생활전환의 어려움에서 쉽게 풀려나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기에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동독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공산체제의 권위가 상실하면서 서독인데 대한 평가도 변하기 시작한다. 즉 1987년의 조사에서는 서독인들이 “근면하고, 지적이고, 문화를 사랑하며 믿을 만하고,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전경수, 서병철, (통일 사회의 재편과정 -독일과 베트남-),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그러나 통일이후 이러한 감정에도 변화가 생긴다. 「쉬피겔(Spiegel)」) 독일의 대표적 주간뉴스 잡지. 본사는 함부르크에 있으며, 미국의 《타임》지(誌)와 비슷하다고 해서 '서독의 타임'지(誌)라고 불렸다. 1946년 영국 점령군 아래에서 창간된 《디제보케 Diese Woche》의 후신이며, 1949년 1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지가 발표한(1991. 7. 22) 여론조사에 의하면, 동서독 지역 주민들간의 일체감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할 때에는 상당히 강했으나, 그 이후 급격히 약화되고 이질화 현상이 점차 증대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1990년 가을 여론조사에 의하면 수십 년 동안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던 동서독 주민들이 통일을 매개로 상당히 여러 면에서 일체감을 느꼈으나, 1995년 조사에서는 이질성이 강화되어 '우리 편'이 아니라 '저쪽 편'이 되었다고 여론조사 책임자는 진단하고 있다. 한 예로, 서독지역 주민들이 동독 주민에게 갖는 감정상태는 경쟁관계에 있는 프랑스인이나 냉전시대에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소련인에 대한 것보다도 훨씬 나쁘게 나타났다.) 김국신외 3인, (분단극복의 경험과 한반도 통일Ⅰ), 서울, 한울아카데미, 1994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상호간 불만이 통일이후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불만의 원인으로는 먼저, 동독인들은 통독 후 서독으로부터 통합과정에서 오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과 경제적 활성화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바랬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 생활의 균등화를 위한 일종의 도덕적 요구도 원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독인들은 직도 분명히 스스로를 '2등시민'이라고 느끼고 있다.) 1996년 초 서독지역에서 대략 4분의 3이상이 동서독인 모두에게 사실상 동등한 권리가 있다 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독지역에서는 통일된 지 5년이 지난 1996년에도 약 4분의 1만이 동등한 권리를 입에 올렸을 뿐, 나머지 4분의 3은 스스로를 아직 2등시민으로 여기고 있다.3. 통독 후 사회적 이질감으로 나타난 문제점1). 범죄의 증가통일 이후 실업자가 늘어난데다 동독지역의 경제가 당초 예상과는 달리 쉽사리 불이 붙지 않는 것이 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노동시장이 새로 형성되고 동베를린 지역 주민과 서베를린 지역 주민의 접촉이 잦은 옛날 동·서베를린의 경계에서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범인의 60% 가량이 20세 이하의 청소년층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현장 대르포 獨逸統一의 明暗 -통독3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연합통신, 1993이들 중 상당수는 서독제의 좋은 상품을 단순한 호기심으로 죄책감 없이 범행을 저질렀다.「슈피겔」지에 의하면 통일 후 서독지역에서는 소매치기, 강도 등 일반 범죄자가 20%정도 증가한 반면, 동독지역에서는 이러한 일반범죄가 동독체제하에서보다 거의 4∼5배정도 급증했다고 밝혔다. 독일전역에서의 외국인에 대한 테러, 방화 및 폭력사건은 1991년 500건을 상회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동독지역의 빈민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찰청의 범죄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80년대까지 베를린시 지역의 연간 범죄건수는 30만건 정도였다가, 90년대에는 35만건이 됐고, 통일 이후인 91년에는 50만건 이상이 됐으며, 92년에는 55만건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동일.2). 극우세력 대두동독지역 주민은 정치·경제환경의 급변과 자신감 상실로 인하여 사회심리적 정체성 위기현상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가 동독지역에서의 네오나치즘(Neo-Nazism)등장, 외국인에 대한 배타의식 및 공격행위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신설 5개 주
1. 서론김일성 사후 3년동안 북한은 그야말로 고난 의 연속이었다.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지난 반세기동안 북한을 통치해 왔던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 체제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가중되고 있는 식량난을 비롯한 경제위기, 그리고 체제이완 현상과 탈북자의 급증 등은 김정일정권과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위기에 처한 김정일 중심의 북한지도부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보자는 의도에서 김일성 사후 3년이란 긴 시간을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왕조시대에나 가능할 만 3년상을 치르면서 죽은 아버지의 권위를 빌어 유훈통치 를 지속하면서 군부 주도의 위기관리체제 를 운영하고 있지만 위기 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김일성 사후 3년간 북한지도부는 후계체제의 안정성에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면서 유훈통치 를 지속함으로써 난국 돌파를 위한 체제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에 의존하여 겨우 연명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지난 반세기 동안 북한을 통치하면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수령제 또는 유일체제) 를 구축해 놓으므로써 사회주의권의 붕괴 와중에서도 김정일정권과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의 유지에는 성공 했다. 그러나 수령제 의 구축으로 북한의 통치체계는 경제난을 비롯한 체제위기를 치유하는 자기교정 메커니즘 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김정일은 북한이 난관에 처하게된 원인을 제국주의자들의 경제봉쇄와 자연재해 에서 찾으면서 체제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김일성 사후 3년간 김정일중심의 북한지도부는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비현실적인 정치구호만을 나열할 뿐 체제개혁이나 획기적인 정책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북한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권력을 공식승계한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의 공인된 총비서 로서, 북한의 최고지도자로서 당건설과 당활동 그리고 혁명과 건설의 모든 사업 전반에 걸친 책임을 져야 한다. 북한당국은 김정일동지를 우리 당의 국에서 태어나서 평양에서 성장했다. 어렸을 때 남동생과 어머니를 잃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집안을 돌볼 틈도 없이 바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를 여의고 일년도 되기 전에 터진 한국 전쟁 때에는 중국 동북에 가서 지냈고, 평양에 다시 돌아온 다음에는 북한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김정일은 성장과정을 통해서 북한의 정치 풍토에 적응하게 되었고, 자신의 부친이 이루고자 하는 국가적 사업에 일찍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어머니가 없는 탓으로 김정일은 아버지와 친근한 사이를 유지했던 것 같다. 김일성이 결국 재혼해서 새 가정을 꾸리지만, 이는 김정일이 20세를 넘어 성년이 된 1963년이었다. 그는 죽은 생모를 늘 사모하였고 계모를 좋아하지 않았다.대학 졸업한 김정일은 곧 당에 들어갔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가 조선 인민군에 복무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아버지 김일성과 뚜렷이 구별된다. 김일성은 어렸을 때부터 빨치산으로, 또 무장 투쟁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었던 데 비해 김정일은 군에 입대하지도 않았고, 정규군의 훈련을 받은 일도 없다. 그는 오늘날 조선인민군의 총사령관이지만 군 경력은 전혀 없는 사람이다.3. 김정일의 당권장악 과정1)기반조성단계(1964∼1974)가. 유일사상체계확립과 사상사업강화김정일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 조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배속되어 지도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이 정치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당중앙위원회 제5기 15차전원회의에서 였다. 이 회의에서는 유일사상체계확립에 관한 문제가 토의 되었고 유일사상체계확립에 반대하던 당내 갑산파가 대거 숙청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정일은 당비서국 조직지도부행을 조사하여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등 숙청을 주도하였고, 사건 이후에도 유일사상체계확립을 명분으로 후속숙청작업을 주도하며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제4기 15차전원회의 이후 김정일은 당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에서 선전선동부 문학예술지도과장으로 옮기면서부터까지 당원수가 3백만으로 증가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다. 세대교체론과 3대혁명소조운동북한은 조직정비와 함께 1970년대 초부터 세대교체분위기를 확산시켰다. 김일성은 1971년 후계자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하여 세대교체를 언급함으로써 김정일 후계체제를 암시하였다. 김일성은 1971년 6월 24일 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6차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혁명위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자라나는 새세대들이 혁명을 계속하여야만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우리의 성스러운 혁명위업을 완수할 수 있다 고 말하였다. 김일성이 말한 혁명위업의 완수란 조국이 통일되고 사회주의 혁명이 전국적으로 승리한 다음에도 공산주의를 완전히 건설 하는 것이었다.세대교체론은 3대혁명소조운동을 통하여 추진력을 얻으면서 가속화 되었다.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건설을 위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가급 당조직에서 추진하여 왔으나,1973년 2월 김일성 3대혁명소조운동을 발기한 직후 당중앙위원회에서 직접 3대혁명소조를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에 파견하여 당조직과 함께 3대 혁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공장, 기업소에 나가는 3대혁명소조는 대체로 20∼30명이 한 조가 되었으나 규모가 큰 공장, 기업의 경우는 50명이 한 조가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3대혁명소조의 파견목적이 간부들을 일깨워주고 도와주는 것이며 투쟁대상이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관료주의와 같은 낡은 사상임을 강조하였다.김일성은 3대혁명소조운동을 통하여 혁명수행에 있어서 구세대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세대의 역할을 부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간부들을 무시하거나 혁명대열에서 탈락시키는 등 간부들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였다. 김일성은 3대혁명소조에게 오랜 간부들을 떼어버릴 것이 아니라 잘 도와주어 그들이 지난 기간 일을 잘한 것 처럼 앞으로 일을 잘하여 꽃을 피워나가도록 하여야 하며 간부들의 낡은 사상을 반대하여 타협없이 투쟁하되 그들을 존경하고 받들어 줄 것 을 강조하였다. 즉 확립 되었다 고 할 수 있다.나. 대중동원운동김정일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권력기반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기제로서 대중동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은 우선 지금까지 김일성이 지도하던 3대혁명소조운동을 자신이 직접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운동의 지도체계나 당조직과의 공동작업이 만족스럽게 추진되고 있지 못하다고 파악하고, 1974년 2월 과거 공업과 농업부문 소조를 별도로 지도하던 것을 당중앙위원회가 통일적으로 지도하도록 지도체계를 개편하였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중앙과 도, 시, 군에 있는 3대혁명소조 종합실을 3대혁명소조 지휘부로 개편하였다.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이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혁명소조들은 주로 혁명사상이 강한 당의 젊은 인테리들로서 당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당사업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어 김정일의 지지기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상, 문화, 기술분야에서 낙후된 부분을 일소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라는 3대혁명소조운동의 실질적 목적은 각급 생산단위, 행정기관, 문화기관, 학교 등에 당정책관철과 당간부들의 낡은 사상개조라는 명분하에 혁명소조를 파견함으로써 김정일의 영향력과 이미지가 전체사회에 확산될 수 있었다.김정일의 대중동원은 경제부문에서도 시도되었다. 1971년부터 시작된 6개년인민경제계획의 4차년도인 1974년 공업부문에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김정일 연간계획을 넘쳐 완수하여 사회주의 대건설에서 빛나는 승리 를 목표로 하는 비상조치로서 소위 「70일전투」를 발기하였다. 1974년 10월 21일부터 연말까지 계속된 「70일전투」에서 김정일은 전당, 전국, 전국민을 총동원하여 강력한 속도전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경제사업에 대한 당적지도를 결정적으로 개선강화 하였다. 중앙에는 당과 정무원의 실무자들로 구성된 중앙지휘부가 설치되어 총참모부의 역할을 하였고, 각 도와 시, 군, 중요 생산단위들에는 전권을 행사할 강려간 지도그룹이 파견되었으며,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3대혁명 지도자로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다. 비서국의 경우 세대교체의 폭이 더욱 분명히 나타나서 제5차당대회에서 10명의 비서 중 9명이 혁명1세대였으나 6차당대회에서는 총비서 김일성을 제외한 9명 전원이 혁명 2세대로 교체되었다.그러나 6차당대회에서는 혁명2세대의 부상이 뚜렷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혁명1세대의 퇴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비서국의 경우는 전원이 혁명2세대가 들었지만, 정치국의 경우 여전히 혁명1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혁명2세대가 보충되는 방식으로 인선이 이루어 졌다. 혁명 1세대의 희생없이 혁명2세대가 등장하려다 보니 자연히 정치국원의 수가 증가하여 정치국은 역대 최다인 1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대규모의 정치국은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이 시기 지도부 개편의 한 가지 특징은 김일성 친인척이 본격적으로 중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친인척을 배제하는 인사원칙이 있었으나, 후계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김정일은 친인척을 가장 믿을 만한 세력으로 인식하면서 친인척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6차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이나 비서국 비서로 선출된 박성철, 김중린, 강성산, 황장엽 이외에도 1988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 5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과 비서로 선출된 허당(1991년 사망)등이 대표적 친인척이다. 현재 실세 중의 실세로 알려진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도 1985년 7월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이 되었다. 또한 과거에느 남편이나 아버지가 당기관에서 일하면 가족은 당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후계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이러한 규제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김정일이 공개적인 후계자로 전면에 나서면서 「로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들은 1960년대 말 이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81년 6월부터 영광스러운 당중앙 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세대에 두 사람의 지도자를 함께 받들게 된 조선 인민의 무한한 기쁨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등 김정일에 대
Ⅰ. 서론세력균형론의 탄생시기는 17세기로서 유럽에서 유래된 국제정치 이론이며, 문예부흥 후기의 국제체계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수정된 개념으로 활용되어 왔으나, 세력균형론이 과연 외교정책 전략으로서 국제체계의 기능을 설명하는 개념 또는 국제관계의 유용한 가치를 설명하는데 적합한 개념인가에 대한 학문적 논란의 여지 또한 상존해 왔다. 세력균형론의 개념상 나타나는 결함과 의문이 지대하다 할 지라도 국제관계의 이론을 설정함에 있어서 오랜동안 중요한 분석의 틀로서 취급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제정치의 이론은 현실주의론, 이상주의론, 체계이론, 커뮤니케이션이론, 통합이론, 게임이론, 권력이론, 갈등이론, 세력균형이론, 상호의존론 등 매우 다양한 실정이다. 이 많은 이론 가운데 국제정치 현실을 보다 역사적 . 실증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이론은 역시 세력균형론인 것이다.본서는 대체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력균형론의 발달 배경으로서 주요한 시기였던 17세기,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세력균형론에 대한 고전적 자료에 핵무기 시대의 이상주의적 억지론이 세력균형론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살피고 있다. 특히 저자는 세력균형의 역사적 발달 배경을 추적하고 세력균형론에 나타난 유사한 개념과 상이한 개념을 비교분석하였다.본서의 구성체제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1장은 세력에 대한 내용을 개관하였다; 제2장은 세력균형의 다양한 개념을 소개하였다; 제3장은 세력균형론의 기원과 발달 배경을 추적하였다; 제4장은 외교정책으로서의 세력균형론을 설명하였다; 제5장은 세력균형체계에 대하여 논하였다; 제6장은 18세기의 세력균형 원리를 규명하였다; 제7장은 19세기의 세력균형론의 실제를 분석하였다; 제8장은 다양한 세력균형론을 종합하였다; 제9장은 20세기의 세력균형론을 재 조명하였다; 끝으로 제10장은 결론으로서 21세기 세력균형론의 향배를 기술하였다.Ⅱ. 본론제 1장 개요1. 세력 또는 권력많은 정의들 가운데 중심적인 요서를 선별해 보면, 힘은 위협묶음으로써 성립한다.8. 세력균형의 양태클라우드교수는 세력균형에 대체로 세가지 양태를 발견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즉, 1) 자동적; 2) 준자동적; 3) 인위조작적인 세력균형으로 분류된다.9. 세력균형의 유형세력균형의 유형이란 개별국가들이 자국의 안전보장을 최대화하며 타국과 경쟁하여 자국의 국익을 획득하려고 국력을 조직하고 사용하려는 방법이다. 세력균형의 유형은 한 국가의 힘이 곧 다른 국가에 대해 현실적 혹은 잠재적 위협이 되는 국제체계 속에서 한 국가가 택할 수 있는 독자적 반응이다.10. 세력균형의 저해요인이상주의적 경향은 세력균형을 파괴시켰으나 아직 평화유지의 믿을 만한 대안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11. 세력균형의 체계세력균형체계는 고전적 세력균형 이론을 카플란이 재정립한 개념이다. 그가 제시한 국제체계의 6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인 세력균형체계는 방대한 군사적 . 경제적 능력을 갖는 다섯 이상의 민족국가를 필수적 행위자로 한다.제 2장 세력균형의 개념1. 보편적 개념오늘날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세력균형이라는 용어를 국가간의 세력분배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수 국가의 독립성이 한 국가 또는 다수국가의 연합된 세력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 독립성의 위협을 당하는 국가들은 패권의 형태 또는 지역단위의 제국형성이나 세계적 제국형성을 통하여 그 위협을 견제하려고 한다.2. 다의적 개념국제정치를 연구하는 학도들은 세력균형론의 정확한 개념정립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력균형의 개념은 그 속성상 모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여져 왔다. 또한 이 개념은 사용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개념으로 정의되었으며, 이론적 성격과는 달리 실제에 있어서 지극히 상반된 의미로 노출되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많은 국제 정치학자들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력균형의 정확한 개념정립 작업이나 이를 실제로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3. 세력균형과 현실주의고전적 현실주의 전통학파들은 세계를 특수한 방법으로 관찰하였다. 이 유럽의 문예부흥시대 말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세력균형 원리에 내재되어 있는 참뜻은 잠재적 팽창주의 침략국가 또는 패권 세력을 약소국가들이 힘을 모아 하나의 연합 대항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견제하고 나아가서 봉쇄시키기 위한 국제체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세력균형에 대한 사상은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에 급속하게 발달하였으나 이 사상이 현대적 의미의 세력균형 개념으로 승화된 시기는 17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세력균형이 유럽에서 현실화되어 온 과정에서 종교전쟁의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럽에서의 수차에 걸친 종교전쟁은 현대 국가제도를 탄생케 하였고 종교적 이념에 따라 추구되었던 외교정책시대의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세력균형 원리 발달에 끼친 중요한 요인은 유럽의 과학기술 혁명과 권위문제를 위요한 지식인 사회의 위기를 해결시킨 지식혁명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력균형 원리의 발달시기는 18-19세기로서 그 시대는 유럽인들의 사유력을 뒤흔든 시대였다. 새로운 강대국들의 등장과 연합세력 형성에 가변적 모델의 탄생은 18세기의 세력균형적 국제정치의 체계가 확립된 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제 4장 세력균형 정책세력균형이란 개념은 여러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적용되었던 한 원리였다. 역사적으로 지적한다면 세력균형 원리는 불안정한 국제환경에서 나타났던 국가들의 행위라고 설명되어 왔다. 또한 세력균형원리는 정치지도자들이 자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세력균형 원리는 현명한 정치지도자를 만드는 지침으로도 사용되었다.세력균형 원리의 역사적 발달과정에서 나타났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세력균형 원리에 근거한 세력균형의 현실화는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세력균형 원리가 적용되는 외교정책이 어떻게 집행되었는가에 대한 설명내용이 들은 유용한 책 한 권 발간된 적 없었다.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생존했던 시대의 일반적인 도덕 및 정치적 체제에서 세력균형 원리의 참뜻을 알지도 못한 채욕심을 부리다가 모두 실패한 모델이라고 과소평가할 수 있다. 펠즈 교수의 모델은 18-19세 유럽의 세력균형체계에 적용시키는 데 필요한 충분한 설명이라 할 수 없겠으나, 그의 모델은 예상되는 세력균형체계를 상정하는데 필요한 충분 조건을 제시하였다고 본다. 리틀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카프란 교수가 제시한 여섯 가지 원리는 분명히 이론적이며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모델이다. 그가 제시한 6가지 원리 가운데 3가지 원리는 18세기 세력균형체계를 반영시킨 원리였으며, 나머지 3가지 원리는 세력균형체계 유지를 위한 합리적 지침의 원리라 할 수 있다.4. 준 세력균형과 일반적 세력균형일반적 세력균형체계와 준 세력균형체계간의 관계는 분명치가 않다. 18세기 세력균형체계와 관련된 현대 이론을 엔더슨 교수가 개발하였던 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럽 세력균형체계의 하위체계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 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두 체계간의 관계를 적당히 기술하였을 뿐, 두 체계간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명쾌한 설명조차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5. 세력균형에 대한 실제모턴 카프란 과 리차드 로스크란스 두 교수는 18세기 유럽의 세력균형 모델을 자신들의 이론에 적용시킨 국제정치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반 루아드 교수는 1992년 작 자신의 연구에서 세력균형체계의 기능이 이론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광의의 의미에서 세력균형체계는 대체로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력균형체계의 주요기능 중에 하나는 특정 강대국의 세력확대를 견제한 기능을 들 수 있다.제 6장 18세기 세력균형론 : 1700-18151. 18세기의 제한 전쟁18세기의 세력균형 원리가 실용적 원리로 발달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역동적 추진력으로 작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종교적 편협성과 참혹한 30년 전쟁을 야기시켰던 무자비성과 잔인성만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18세기의 특징 중 하나인 종교적 광분주의가 분출하였던 바, 이 때 영국정부는 연합국을 지원하는체계였다.제 7장 19세기 세력균형론: 1815-19141. 개요1815년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으로 17세기 중엽 탄생되었던 최초의 국제체계인 웨스파리아 체제에 대한 최대 위협요인은 소멸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된 근본 원인은 전시 동맹체인 제 4차 동맹체의 강력한 압박의 결과였다. 이 동맹체는 프랑스에 대항했던 열강간의 긴밀한 군사적. 외교적협력에 기초한 연합체였으며, 프랑스를 공동의 적대국가로 상정한 동맹체였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이후 유럽 열강의 정치지도자들이 당면했던 주요 잇슈는 전후 국제 체계 창출이었다. 이 전후 국제체계의 근본 목적은 국제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고 나폴레옹과 같은 침략국의 새로운 위협적 책동을 공동으로 방지하는데 있었다.2. 협조체제유럽협조체제가 운영되던 시기의 모든 강대국들은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하였으며, 강대국들의 국가이익 추구는 어디까지나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범주내에서 이루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자제력이 발휘되었던 시기는 18세기나 20세기에서도 찾아 보기 힘든 19세기의 특징이었다.3. 협조체제의 붕괴1848년도 유럽은 일연의 혁명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이 혁명은 유럽 전대륙으로 확산되므로서 국제질서는 불안정한 무질서로 빠져들었다. 당시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혁명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1815년이래 모처럼 수립되었던 국제관계의 관행과 국제질서창출을 위한 외교는 황폐화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 새로운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각국은 젊은 세대등에 의한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 젊은 세대들의 사상적 조류는 자국의 건설은 자국의 힘으로 이룩한다는 사상이 팽배하였고, 비엔나 국제회의에서 창조된 집단안전보장 원칙과 그 관행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4. 불안정한 세력균형: 1890-191420세기 초에 이르러 유럽의 세력균형체계는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새로운 형태로 변화된 20세기 초의 세력균형체계는 양극체계의 특성으로 유럽 강대국들은 양 적대진명으로 탈바꿈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