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문화목차1, 서론-주제선정의 배경과 연구방향2, 본론(1)오타쿠의 의미(2) a,오타쿠의 특성과 성장 b,활동분야(3)오타쿠 문화(4)오타쿠 감독, 안노 히데야키(5)오타쿠의 산물, 가이낙스(GAINAX)3,결론-요약▶▶참고문헌과목: 일본문화의 이해담당교수: 이수경 교수님학과:학번:이름:1, 서론일본 하면 만화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러한 만화왕국으로써의 일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번 리포트를 계기로 전부터 좀 더 깊이 알고 싶었던 일본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주제를 생각해보았다.일본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그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오타쿠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현재 내가 알고있는 것으로는 우리 나라 내에서는 오타쿠와 매니아를 구분해서 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니아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이렇듯 의미가 희석되고 넓어졌지만 오타쿠가 처음 알려진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오타쿠는 1980년대 이전에도 존재해 왔지만 오타쿠들만의 차별 용어로서 특성화되어 있다가 일반인들에게는 연쇄 살인 사건 으로 돌연 대중 미디어에 급부상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88년 8월에서 1989년에 걸쳐 사이타마와 도쿄에서 4명의 여아가 희생된 연속 여아 유괴 살인 사건이다. 범인인 미야자키 츠토무는 홈 비디오나 로리콘계 비디오 매니아로, 공개 된 그의 방 모습 등에서 오타쿠 의 범죄로서 크게 파문을 일으켰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타쿠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내려지기도 전에 신문이나 주간지에서는, 오타쿠는 주로 아니메나 만화의 팬으로, 패션이나 연애에 흥미가 없는 어두운 청소년, 이유 없는 짓을 하고 있어 기분이 나쁘고 사회적 의미가 없는 녀석들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았다.하지만 위와 같은 편견에서의 정의가 아닌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를 잡은 오타쿠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오타쿠의 의미를 알아보고 오타쿠 문화의 형성과 그들의 영역에 대해서 한 장르에만 흥미를 가져 편협된 지식으로 자신만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러한 태도는 오히려 오타쿠적 가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대표적인 오타쿠인 오카타 토시오(가이낙스 설립자로 자신을 오타쿠라 밝히며 대학에서 오타쿠론을 강의)는 이러한 오타쿠적 센스를 미국적 방식이라든지 페미니즘, 생태주의와 같은 것으로 일종의 가치관이자 세계관으로 보고 있다. 애니메이션이 오타쿠의 원조라 할 수 있지만 애니메이션만을 보는 오타쿠는 단지 애니메이션의 팬일 뿐이며 그러한 장르를 넘나들며 간파하고 즐기는 것이 바로 오타쿠적 태도라는 것이다.미디어에 구애를 받지 않는 오타쿠들은 미디어들끼리 연결시켜 즐기기까지 하는데 이런 태도는 작품 그 자체를 숭배하는 팬들에게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만든 사람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오타쿠이기도 하다.가끔 오타쿠들이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자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데 이것은 정보 분석능력이나 문화 창조 능력 면에서 비평가가 되거나 코디네이터가 되어 보통 사람들은 어느 정보를 선택해야 좋을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라 할 때 정보의 가치를 정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오타쿠들의 능력을 꼽을 수 있다.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출생지 주변의 애니메이션, 만화, 특수촬영영화라는 다른 장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아이들은 그것들을 넘나들며 말하고 즐기게 되며 이윽고 질리지 않는 향상심과 자기과시 욕구로 정진하고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이른바 오타쿠가 된다. 나아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여 자기 나름의 시각을 가진 아이들은 제대로 된 오타쿠 예비생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앞으로 15년에서 20년 내에 오타쿠 업계에서 활약할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생겨날 것이다. 한편으로는 넘치는 정보의 가치를 파악하고 코디네이트하고 문화를 선도하는 시장을 좌우할 오타쿠 에디터가 출현할 것이다. 그들은 정보의 바다 속에 진화하고 살아남는 신인종인 것이다.오타쿠들은 그 특성 중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그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오타쿠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들이 나름대로 영역을 구축해가면서 착실하게 성장해 가는 데 절묘하게 맞았던 것이다.b, 활동분야오타쿠가 과연 어디까지 퍼져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범위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타쿠의 시작은 물론 애니메이션이었다. 이제는 요리에서 성우, 아이돌, 철도까지 세세한 분야에까지 자신들의 광범위한 정보량과 지식을 가지고 그들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이번에는 이렇듯 널리 퍼져 있는 분야 중, 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니메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아니메는 오타쿠에의 입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타쿠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야이다. 어쩌면 일본 오타쿠의 핵심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 아니메 오타쿠들에 의한 활동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 오타쿠라는 이름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도 아니메에서였듯이 이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한때 싸구려 TV 시리즈로만 생각되던 아니메는 1990년대 말 현재 이미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를 제패했고, 전세계 TV 애니메이션 공급 물량의 약 65% 가량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일본산 애니메이션의 판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공할만한 수치이다.세계에는 수많은 아니메 오타쿠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일본에서 출시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앞다투어 구입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통용되는 아니메라는 용어는 더 이상 일본 내에만 국한되지 않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일본산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아니메는 리미티드 기법{) 실시에 가까운 동작이라는 원칙을 부정하고 초당 사용되는 셀의 매수를 가변적으로 조정하는 기 법.((오타쿠 문화))을을 토대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학을 작품 속에 투영하면서 마침내 세계를 석권하는 독특한 문화상품으로 성장하였다.여기서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제작된 대표적인 아니메 작품을 통해 아니메 분야 오타쿠들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1974년 사람들이 소비, 향유하는 문화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일본의 경제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친 20년 동안에 지속적인 고성장을 이룩하여 국민 총생산(GNP)도 미국을 뒤따르는 규모가 되었다. 이러한 고도 성장이 문화에 준 영향은 대단히 크며 소비 사회가 도래하게 되었다. 본래는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었던 소비가 생산과는 별도의 의미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은 세계 어느 국가도 급속하게 이류 열강 지위에서 강대국으로의 이행을 이룩하였다. 1945년, 패전이라는 전기 쇼크 요법은 국가의 목적을 급변시켰다. 196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기와 1980년대의 급성장기에 이은 생활 수준 상승에 의해 일본인은 지상에서도 1. 2를 다투는 최강의 소비 민족이 되었다. 이러한 소비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젊은이의 문화도 변화하게 되는데, 1970년 이후의 젊은이들은 모여 있어도 각각 자기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을 하게 되는 개인적인 성향을 보인다. 일본에서의 오타쿠 출현과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과의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1980년대에 오타쿠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은 일본의 교육 시스템의 과부하에 큰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집단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충분한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오타쿠의 대부분은 그러한 시스템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마도 유교 사상의 영향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회는 막 태어난 아이를 교육의 용광로 속으로 보내버려 아이들은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가치관을 몸에 각인 시키는 것이다.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변해 갔다. 이러한 일본적 개인주의는 1970년대 말에 사회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부모님의 삶의 방식을 닮기보다는 영원한 학생이고자 하는 모라토리움(Moratorium) 현상이 나타나 1970년대 말에 이러한 류의 언어가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즉, 사회인이 되는 것을 거 사회 속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오타쿠문화는 J-POP과 같은 국민적 확장을 갖는 문화는 아니지만 결코 마이너 문화도 아니다. 동인지 시장의 규모나 전문지의 판매 부수, 인터넷상의 검색 엔진에의 등록수 등으로부터 추측하는데 오타쿠 소비자는 2차 창작물을 판매하거나 코스프레를 하거나 하는 극히 활동적 층에 한한다 해도 그 규모가 수십만에 이른다. 또한 오타쿠는 이미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오타쿠들이 만들어 낸 만화나 아니메, 게임 등의 독특한 세계는 일반지에서 종종 보도되고 있듯이, 한국이나 태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의 서브 컬처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오타쿠라는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야지키 사건을 계기로 비사회적이고 도착적인 성격 유형을 넓게 연상시키게 되었다. 이 사건 직후, 일반화되어 버린 오타쿠의 이미지는 인간 본래의 커뮤니케이션을 싫어하여, 자기 세계에 닫혀버리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해석이 지금까지도 강하다.한편으로는 완전히 반대 입장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타쿠라는 말은 실은 1990년대, 특정 세대의 오타쿠들에 의해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미야지키 사건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심한 비난에 오타쿠 자신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오히려 과할 정도로 자신이 오타쿠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타쿠들의 그러한 자부심은 좀처럼 매스미디어에 오르지 않았지만, 1995년 에반게리온이 히트를 치면서 오타쿠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이목이 집중됨에 따라 서서히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1990년대가 끝나기까지 오타쿠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정면 돌파를 꺼리게 하였다. 한편, 권위 있는 매스미디어나 언론계에서는 아직까지 오타쿠적 행동 양식에 대한 혐오감이 강하여 오타쿠 문화에 대한 논의는 그 내용 이전에 레벨에서 저항을 받는 경우가 많다.반권위 의식이 강한 오타쿠들에게는 오타쿠적 수법 이외의 것에 대한 불신감이 있어 아니메나 게임에 대해서는 오타쿠 이외의 사람이 논하는 것 자체를 환영하지 것이다.
-러시아 문화의 이해-[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고...과목 : 러시아 문화의 이해담당교수 : 교수님학과 :학번 :이름 :제출일 :지하생활자의 수기...[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주인공 '나'의 독백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아니, 어쩌면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전적 수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주인공 나는, 여태껏 내가 소설에서 대하던 주인공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너무나 극단적으로 표현해 도저히 소설을 따라갈 수 없게 만들었다.1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시간적 배경을 모호하게 한 채 배경 및 인물들의 소개도 없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독자에게 고백하듯이 이뤄진다. 시간의 부재 속에서, 주인공의 내면상황을 느끼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책을 읽는 독자에게 독백체로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작가 즉 '나'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앞에 있는 듯이 사뭇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섬뜩하기도 하였다. 그 작가가 책을 읽는 독자의 심리까지도 파악하려하는 부분에서는 너무 실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알 수 없는 소리, 난해한 말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2부에서는 주인공이 현재에는 소위 '왕따'라 불리는 외롭고 혼자인 '나'가 등장한다. 대충 줄거리를 말하자면, 주인공인 '나'는 도저히 고독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명목상만 친구인 시모노프를 찾아갔다가 두 명의 학교 동창을 더 만나게 된다. 시모노프와 그 두 친구는 그를 보지도 않은 채 즈베르코프라는 친구의 송별회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회비이야기를 할 때 자신도 끼워달라고 말해 저녁식사 약속을 하게된다. 결국 친구들도 원하지 않고 '나'도 원하지 않는 송별회에 간다. 친구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나'는 그들을 따라가지만 친구들은 모두 없었고 그곳에서 리자 라는 한 여인을 만난다. 그의 옆에 있던 리자에게 창녀 생활에 대해 비평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면서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다. 리자는 '나'가있는 주소로 찾아온다. 하인과 싸우던 장면을 리자에게 들킨 '나'는 리자에게 화를 내는 발언을 하면서 리자의 인간내면까지 들쑤셔 놓는다. 그 후 리자가 떠나고 '나'는 후회하고 지하실에서 진눈깨비를 보며 회상하는 것으로 대충 끝나는 이야기였다.어쩌면, 이 사람이 우리에게 보이는 횡설수설하고 장황한 말들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나, 다르게 생각하면 사회의 관습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자의 비굴한 변명처럼 들릴 수 도 있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2부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의 모순을 보고 그 비굴함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반드시 2 × 2 =4가 되어야 하는가. 2 × 2 = 4가 훌륭하다는 것이라는 점엔 이의가 없지만 그러나...... 2 × 2 = 5도 역시 훌륭하다고 해야 할게 아닌가."2 × 2 =4는 이성적인 질서이다. 이성에 의해 정해진 궤도를 따라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거대한 통일성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2 × 2 = 5는 자유로운 질서라고 볼 수 있다. '지하'라는 것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공간으로 2 × 2가 5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이 분출 될 수 있는 곳으로 말할 수 있다.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하고 변명하곤 한다. 그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이며 그 이유를 항상 설명하고 있지만 같은 상황에 부딪히는 두 가지 행동으로 인한 결과를 맘속으로 생각할 뿐 선뜻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든 결론을 내린 행동에 대해서도 항상 후회하고 있다. 또 변명하고 있다. 그것은 타인을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속으로는 즈베르코프와 그의 친구들에게 복수를 할 요량으로 호텔로 가지만 그의 행동과 말은 언제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그러한 모습에서 타인을 의식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패왕별희원저: 릴리안 리(李碧華), 감독: 첸카이거(陳凱歌)주연: 장국영, 장풍의, 공리, 갈우제작사: 톰슨 영화사(홍콩), 1993년 제작.1. 영화의 세 가지 주제이 영화는 경극과 경극의 공연 목록인 ,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가 중국현대사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를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영화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에서 항우 역을 맡은 샤오루(段曉樓. 장풍의)와 우미인 역을 맡은 데이(程蝶衣, 장국영), 그리고 샤오루의 부인이 된 쥬산(菊仙. 공리) 이라는 여주인공을 가리킨다. 주인공들은 현대 정치사에서 중요한 무대, 곧 군벌시대, 국민당 시대, 중일 전쟁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문화 대혁명이라는 큰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고 좌절하다가, 마침내 문화 대혁명의 주역이었던 4인방이 몰락하고 등소평이 등장하는 때에 맞추어 자신들의 연극 인생도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적어도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감상할 수 있다. 하나는 를 통한 경극 이해 그 자체이고, 둘째는 현대 경극사이며, 세 번째는 국가와 문화와의 관계이다.경극 는 사마천의 에 나오는 고사를 중심으로 만든 경극 목록 중의 하나로서, 원대인이 영화 중에서 말한 것처럼 초와 한의 전쟁 고사를 극화한 라는 명대의 작품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진나라 말기에는 진의 지배체제에 항거하면서 일어난 진승 오광의 반란이 있었는데, 항우도 그 일원으로 참여하다, 결국 진을 무너뜨리고 초나라의 패왕이 되지만, 자신이 임명한 한왕 유방에게 싸움에서 패배한 뒤, 마침내 자살하여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리고 항우가 항상 사랑했던 우희(우미인이라고도 한다)도 이해하의 싸움에서 유방의 군대에 포위된 것을 안 항우가 자신의 심정을 절절히 부른 노래, 곧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자기가 사랑하는 말인) 오추마까지 나아가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까.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이끌려 관사부의 경극무대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의 엄마인 연홍은 기루에서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경극배우가 되어 제 한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하는 마음으로 길거리 극단에게 도즈를 데려갔지만, 육손이라서 퇴짜를 맞고 만다. 그러자 모진 마음으로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고, 입단을 허락 받는다. 계약은 10년간이다. 대략 5년여 동안 훈련을 받은 다음, 나머지 5년 정도의 기간은 극단을 위해 무료로 공연을 하는 것이다. 뒤의 5년은 훈련 때에 들어간 비용을 갚는 기간이라고 보면 좋다. 이것이 관례다. 영화는 이 관례를 잘 따르고 있다. 이들 배우도 다른 직업 길드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신 바와 같이(영화 에서도 주신에게 제를 지내고 있다), 자신들의 신인 희신(喜神), 곧 당 나라 때의 현종을 모신 희신전(喜神殿)을 가지고 있었다. '당 명황의 양귀비요'라는 노래 말로 우리에게 알려진 현종이 궁성 안의 梨園에서 예인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뒷날 배우들의 직업신이 된 것인데,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신에게 맹세를 하여야 하는 의식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 신은 앞으로 배우들과 운명을 같이 할 존재로서 무대의 분장실에 항상 모시고 있어야 했다. 도즈, 곧 후일의 데이도 맹세 의식을 거치고 있다. 이 의식은 달리 말하면 신 앞에서 사부와 제자 관계를 맺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부자 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직업 길드에 있어서 최상급자의 지위는 가족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에 필적하기 때문이다. 또 관사부는 패왕별희가 담고 있는 교훈을 단원에게 설명할 때도 이 신전을 이용하고 있다. 그만큼 장엄한 곳이라는 뜻이다.단원이 된 도즈에게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다. 동작을 부드럽고 민첩하게 하기 위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또 대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고통이 따랐다. 후일 영화 속에서 원세경(갈우)이 샤오루를 불러, 패왕의 걸음걸이는 원래 몇 일곱 발자국이었는데, 왜 너는 그것을 다섯 걸음으로 줄었느냐 라고 말하면서 힐난하은 단역(旦役)이었다. 단역이란 남자로서 극중에서 맡는 여주인공 역을 말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경극 배우인 매란방(梅蘭芳, 1894-1961)이 바로 이 단역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도즈는 특히 손가락이 길고 예뻤기 때문에 춤동작에서 마치 난초 꽃과 같은 모양의 난화수(蘭花手)가 일품이었다. 얼굴이나 몸매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고왔기 때문에 단역으로서는 적격이었다. 물론 소두자가 단역을 맡기까지에는 힘든 고통, 특히 사내아이의 정체성을 버리고, 여자로 변신해야 하는 피나는 고통이 따랐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길거리의 공연에서 머리로 돌을 깨어 엉터리 공연으로 분노한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달래었던 시토(小石頭)는 예의 씩씩한 생김새와 뛰어난 무공 때문에 생역(生役)을 맡게 되었다. 생역은 극중의 남자 주인공역을 말한다. 아마 그는 주로 항우역을 맡았으므로, 생역 중에서도 무생(武生)이 적역이었다. 이로부터 뗄 수 없는 단역의 데이와 생역인 샤오루의 관계가 시작된다.경극은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명성을 얻을 수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부유한 후원자를 만난다면 앞으로의 연극 인생은 쉽게 풀릴 수 있다. 청나라 때 같으면 황제도 후원자가 될 수 있고, 부유한 상인이나 관료도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자금성 내에도 가정집을 상징하는 내조(內朝)에 희원(戱院), 곧 공연무대가 있었다. 청나라 말기에 권력을 쥐었던 서태후도 열렬한 연극광이어서, 북경 서북부의 이화원에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청조의 관료층도 경극을 좋아하였고, 이는 영화 에서 장내관이나 원세경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에서 소두자의 생김새나 연극이 마음에 들어 무대에 세운 것도 장내관 쪽이었다. 경극에 출연할 아이와 무대를 선정하는 일은 관사부의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 인정을 받은 도즈와 시토는 장내관의 환갑잔치에 초대되어 이후 그들의 장기로 삼은 를 공연하게 된다. 후원자인 장내관은 환갑잔치라는 경사스러운 잔치에 어울리지 않게 를 요구하였다. 이은 멋진 남자로 성장하였고, 콩처럼 작은 꼬마 도즈는 나비와 같이 하늘거리는 몸매와 동작, 소리 등으로 항우의 희첩인 우희를 맡을 단역으로 성장하였다. 길고 험한 전문 배우 양성과정인 과반(科班)을 수료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초대반(草臺班)이 된 것이다. 초대반은 자금성에서 공연하는 궁정 극단이나 관료 및 대부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반(家班)과는 달리 돈을 벌기 위해 관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공연해야 했다. 관가나 부유한 사대부들의 부름에 응하기도 하지만, 술집이나 찻집과 같은 상설무대나, 시장과 같은 임시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그러나 그들이 북경의 사합원 훈련반을 떠나 세상에 나왔을 때, 중국의 국정은 어수선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와 를 부르짖고 있었다. 란 국민당의 일본 침략에 대한 정책이 무저항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나온 구호이다. 젊은이들은 이 어려운 시국에 경극이나 공연하는 두 배우를 보고 낮 도깨비 같다고 하면서 질타한다. 경멸하고 분노하며 마음껏 조소하는 것이다.그러나마나 데이는 연기에 몰입하면서 단역을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극과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도 자신은 우희여야 하고, 샤오루는 항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대인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극중의 동작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원의 '사랑'은 거절할 만큼, 샤오루에게 집착한다. 왜 그런가? 경극의 단역 배우들이 모두가 여성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데이는 현실과 경극을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데이와 샤오루의 갈등이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자애로운 여자가 되어 샤오루를 보호해 주고 싶은 것인가. 훗일 아편에 빠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면, 모성 결핍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거꾸로 자신을 버리면서 손가락을 자른 것이 어머니였기 때문에, 여성 혐오라도 걸린 것인가. 그도 아니면, 정말로 연극에 몰두해서 자신의 인생은 우희다, 라고 규정하였기 거의 없었던 셈이다. 두 주인공이 화려하게 무대를 수놓던 30년대가 내우외환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반면 개인의 사회였고 즐겁고 통쾌한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옛 꿈의 시대라고 평한 첸카이거의 말을 되돌려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 국민당 시대가 갖는 또 다른 의미가 포착되리라.절정 뒤에는 퇴락이 오는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데이 또래의 학생들은 극장 안에서조차 전단을 뿌려대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결국 극장으로 들어가는 전기를 끊고 문을 강제로 폐쇄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은 예술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일 것이다. 자신들의 내부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애국해야 하는 상황도 파시즘이 낳은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더구나 데이는 일본군의 공연요청을 거절한다. 하지만 체포된 샤오루를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본군 사령관 아오키 앞에서 경극을 실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헤어지고 무대도 삭막해진다. 무대를 잃은 다음의 경극배우에게 오는 것은 우울함과 타락이다. 데이는 점차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샤오루는 노름과 술 따위에 빠진다. 아편과 술 따위는 섬세한 표현과 좋은 목소리를 내야하는 극 배우들에게 독약이나 마찬가지이다.불행한 것은 영화의 경우, 필름을 통해 어느 곳에서나 관객을 만날 수 있었던 반면, 경극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계층과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언어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경극은 지방색이 강한 언어였다. 관객이나 후원자들을 이끌고 무한이나 중경과 같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경극배우들에게 큰 약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북경과 같은 지역에서는 더욱 그랬다. 따라서 경극배우들에게 중일전은 영화배우들보다 훨씬 더 큰 악몽이었다. 샤오루는 이제 호구를 위해 수박장사라도 해야될 판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을 무대에 서게 했던 관사부마저 운명을 달리 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두 사람이 다시 모이기는 하였지만, 관사부의 뒤를 이을 사람
신화가 있는 영화동방불패신화 에세이난봉꾼 제우스를 위한 변명과목:신화와 문화동방불패- 권력,불패,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영화 [동방불패]는 세 가지 신화적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불패를 선택한 영웅의 비극 여자로 변한 남자 절대 죽지 않는 자의 최후 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 세 가지 모티브의 의미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무엇일까. 여기서 파리스의 선택 과 남자 된 여인 카이네우스 를 꼽을 수 있다.아프로디테의 사랑 을 선택한 파리스가 우매하게 보인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권력과 불패의 명예만 있으면 사랑도 따라올 텐데... 그리고 우리는 이런 궁금증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약 파리스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이런 호기심이 바로 영화 [동방불패]의 모티브다. 주인공 동방불패는 사랑대신 불패의 명예를 선택했다. 권력도 돈도 원하는 대로 얻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의 저주는 무서웠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이었던 동방불패도 사랑만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주어졌던 사랑마저 잃게 되고 만다.여자의 사랑 대신에 불패 택한 동방불패는 파리스보다 더 큰 불행을 맞는다. 부귀와 영화를 누려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의미가 없다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헬레네의 사랑을 선택한 파리스는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돈과 명예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느 정도 얻게된다. 그러나 사람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멀어진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사람도 늙으면 여인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게 해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제의를 받아들인 파리스는 현명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없는 권력 보다는 권력 없는 사랑 이 더 낫다는 것. 비록 파리스처럼 헤라와 아테나의 철저한 복수를 당해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은 우리의 삶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러나 사랑을 선택한 파리스도, 불패의 명예를 택한 동방불패도 모두 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위의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어 불행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선의 선택이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나름대로의 고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아프로디테의 복수 를 망각한 현대인어차피 삶이란 고통이다. 가장 행복한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행복한 것은 아무런 인연을 남기자 않고 죽는 것이다. 부처와 예수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간이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이간의 욕망은 어느 것을 택하든 결국 불행해 해지기 때문이다. 욕망을 버리고 절대자에게 귀의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욕망이 없는 인간이란 성자이거나 바보다. 우리는 결국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속세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많은 삶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꿈꾼다. 영화 [동방불패]는 어렵게 업은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출세는 했지만 집안에서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 아내도 자식도 오직 출세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를 외면한 지 오래다. 그는 외롭다. 갑자기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돌이켜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인생의 많은 부분이 망가져 있다.아프로디테는 자기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복수를 한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잊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우리의 파리스의 얼마나 현명한 것이었는지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남성, 여성 아니 제3의 성, 달의 자손카이네우스는 동방불패와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카이네우스가 여자에서 남자로 바뀐 데 비해 동방불패는 남자에서 여자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의 세계를 벗어난 인간은 초인적인 존재가 된다는 원래 남녀가 한 몸이었는데 인간의 힘이 약하게 만들려는 제우스의 농간에 의해 둘로 갈라져서는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며 찾아다님으로써 힘이 반으로 줄어 버렸다는 신화가 나온다.남성은 원래태양의 자손이고 여성은 땅의 자손이며 남녀를 함께 갖춘 제 3의 성 족속은 달의 자손이었다. 달은 양성적인 존재다. 이들은 자신의 조상을 닮아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고 걸음걸이마저 달을 닮아 굴러가듯 움직였다.플라톤이 말한 이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남녀가 나뉘어 있기 때문에 힘의 손실이 크다. 만약 남녀가 한 몸인 존재가 있다면 배우자를 찾는 데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아 훨씬 강한 인간이 될 것이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의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초인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은 여려 민족에 널리 퍼져 있다. 최고의 고수가 되기 위해 성전환을 감수하는 [동방불패]의 신화에서 우리의 성을 초월한 곳에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는 믿음의 또 다른 형태를 발견한다.죽지 않는 자 는 과연 어떻게 될까?카이네우스 이야기는 죽지 않는 자의 죽음 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설화이다. 민담이 주인공의 위대함을 강조하다 보면 점점 더 기적적인 힘을 그에게 부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민담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 불사의 몸이 아닌 영웅을 죽일 방법이 마땅하지 않게 된다. 아니면 거꾸로 불사의 몸이 된 영웅이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절묘하고 천재적인 해결점을 찾기 위해 민담은 독창적인 설명을 붙인다.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약점으로 인해 갑작 스러운 죽음에 이른다.신들의 강에 목용을 했기 때문에 상처를 입지 않는 육체를 갖게 된 아킬레우스의 약점은 발뒤꿈치였고, 온몸이 청동으로 되어 절대로 상처를 입을 수 없다는 탈로스의 약점은 정수리였다. 카이네우스는 나무 기둥으로 두들김을 당하여 땅에 처박혀 죽는다. 그것이 카이네우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동방불패의 치명적인 약점은 사랑이었다. 동방불패는 자신이 의 무술을 익히면서 불패가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지게 되면 그 천하무적의 무술도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천하무적 동방불패는 결국 사랑의 좌절 속에서 죽어간다.죽지 않는 자의 최후는 이렇게 갑작스럽다. 민담의 생산자인 민중의 소박한 생각은 모순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현명한 해결 방법도 찾아내게 마련이다.난봉꾼 제우스를 위한 변명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로마 신화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제우스'를 `유피테르(Jupiter)'라고 부른다. `주피터'는 영어식 발음이다. `제우스'라는 이름은, `빛'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뒤아우스(Dyaous)'에서 유래한다. 언어학자 유재원(한국외국어대)교수에 따르면, 그리스어`아버지 제우스(Zeus Pater)'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어 `유파테르(Jupater)', 라틴어 `유피테르(Jupiter=Diespiter)', `빛이신 아버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뒤아우스 피타르(Dyaous Pitar)'와 언어학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결국 제우스는 그냥 제우스가 아니라 인류의 `아버지 제우스'가 되는 셈이다.`제우스 파테르(아버지 제우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하다. 그는 질투심이 강한 정실부인 헤라의 훼방을 무릅쓰고, 무수한 여신들, 요정들, 인간세상의 처녀들, 심지어는 유부녀들까지 겁탈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악명은 그가 겁탈한 여성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둔갑의 명수였다는 점에서 연유하기도 한다.그는 정실부인 헤라를 꾈 때는 뻐꾸기로, 에우로페를 꾈 때는 황소로, 다나에를 꾈 때는 황금소나기(황금 빛줄기)로, 유부녀 레다를 꾈 때는 백조로 둔갑했다. 뿐만 아니다. 딸 아르테미스의 몸종 칼리스토를 꾈 때는 딸 아르테미스로, 유부녀 알크메네를 꾈 때는 유부녀의 신랑 튄다레우스로 둔갑하기도 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셈이다. 그는 심지어는 고모뻘 되는 여신들에게도 무수한 자식이 태어나게 했다.하지만 제우스에 대해서 약간의 변호가 필요하다. 그가 고모뻘 되는 이치의 여신 테미스의 몸에 끼친 자식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자. 테미스가 낳은 치장하는 계절의 여신 호오라이 세 자매, 미풍양속의 여신 에우노미아, 정의의 여신 디케,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와 동침하고 낳은 딸 아홉 자매는 누구던가.오늘날 우리가 `뮤즈'라고 부르는, 바로 무사이 아홉 자매다. 그러니까 제우스는 그냥 바람만 피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새로운 개념으로 가득 채우려고 했던 셈이다. 제우스가 설치던 그리스의 신화 시대를 `인간 관념의 시운전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그가 겁탈한 여신이나 요정들 또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음악의 신 아폴론,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청춘의 여신 헤베를 낳는다. 그가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가 겁탈한 처녀나 유부녀는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미노스 같은 신인(神人)을 낳음으로써 인류의 세상을 차세대 문화 영웅들로 가득 차게 한다.신화학자들은, 제우스가 그리스 신화로 편입된 시기, 즉 북방계 언어가 그리스어에 편입되기 시작하는, 기원전 20세기 경으로 본다. 그때부터 천신(天神) 제우스는 토착 신앙체계를 밀어내고 전지전능한 올림푸스 신으로 등극하게 된다. 선대(先代)에 속하는 거신(巨神) 티탄(Titan)들과의 전쟁, 거인 기간테스(Gigantes, Giants)들과의 전쟁은 토착과정의 갈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우스가 이 갈등구조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전지전능한 신으로 등극하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왕통을 제우스에게 끌어다 대고 싶었을 것이다. 제우스가 본 모습을 감추느라고 둔갑해서 한 처녀에게 접근하여 자식을 끼치니, 그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이 저희 나라, 혹은 지방의 시조(始祖)라는 식이다.로마제국이 그랬다. 로마는 문화의 부실한 토대를 다지기 위해 그리스 신화를 끌어들이고 윤색하여 저희 왕통을 그리스 신화의 신통기(神統記)에다 이어 붙였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저희 왕통을 제우스에게 끌어다 붙일 때 벌어진 이다.
인간과 교육 REPORT-백지설과 그에 따른 교육적 방향-담당교수님: 강신임학과: 사진학과학번: 200062020성명: 박수민제출일: 2001년 5월 2일(서론)- 백지설이란- 로크의 경험론- 내가 지지하는 백지설(본론)- 교육방법1)획일화된 수업에서벗어나야 한다.2)조기교육은 필요하다.3)학습에 흥미를 잃게 하지않는 것이 중요하다.(결론)서론백지설이란.내가 지지하는 인간의 본성은 백지설이다. 먼저 백지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고자(告子)는 맹자의 성선설을 논박하는 가운데 인간은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도 아니며, 단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어떠한 본성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연못에 있는 물에 비유하면서 연못의 물은 동으로 트게 하면 동쪽으로 흐를 것이며, 서로 트게 하면 서쪽으로 흐를 것이라고 하였다.로크는 인간의 본성은 성선도 성악도 아닌 백지(tabura rasa) 상태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 시에 본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환경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세만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불라 라사(tabura rasa)의 개념에 의하면 인간은 수동적인 환경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동적(動的)인 존재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카메라와 같이 감각을 통하여 인상 지워지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기도 하고 또 과거의 경험을 반사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기록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특수하게 만들어진 카메라와도 같아서 환경으로부터 오는 경험을 그대로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두 개의 경험을 합쳐서 하나의 사진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특정한 능력이나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출생하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동일하게 한 장의 흰 백지를 가지고 태어날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들의 삶은 이 백지 위에 인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에 불과하며, 이 때 그림 도구는 개인의 경험인 것이다.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자신에게 인상 지워지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기도 하고 과거의 경험을 반사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백지설이란 인간이 태어날 당시에는 악하거나 선하지 않지만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악하거나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로크의 경험론.로크는 경험이나 관찰에 의하지 않은 지식이나 개념, 예컨대 신학적인 우주론은 오히려 올바른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보며,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 역시 마찬가지의 계열에 놓았다. 수학적 지식이라 해도 타고난 것은 아니다. 완전한 삼각형 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삼각형이라는 관념을 형성하여 불완전성을 제거한 것뿐이다. 로크 사상에서 오성의 타고난 상태는 백지이다. 우리 마음에 관념이 생겨나는 것은 오직 감각적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는 경험의 원칙이 외적인 실재 대상을 아는 감각과 우리 정신의 내적 작용인 반성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감각과 반성은 우리의 오성이라는 암실 속에 관념의 빛이 비쳐드는 두 개의 창이다. 감각에 의한 외적 경험이 일차적으로 주어지고 반성에 의한 내적 경험이 외족 경험에 의존한다. 감각과 반성에 의한 관념은 다시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뉜다. 단순관념은 인간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서 실제 대상이 정신에 작용하여 형성된다. 단순관념은 실제 대상의 복사 혹은 모상이다. 그러나 복합관념은 우리의 오성이 단순관념들을 결합해서 만든다. 예를 들어 황금산 이라는 개념은 각각 금 과 산 을 보고 받아들인 단순관념을 오성이 결합한 결과로서 복합관념이다. 황금산은 실재하지 않는다. 로크는 관념을 대상과 관련하여 1차적 성질과 2차적 성질로 나누었다. 1차적 성질은 물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성질로서 연장, 형태, 운동, 정지, 수 등이다. 2차적 성질은 색, 맛, 냄새, 소리 등의 주관적 느낌이다. 1차적 성질은 물체의 실제성을 보장하고 2차적 성질은 정신의 실제성을 보장한다고 볼 수 있다. 2차적 성질은 불안하며 개인차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나, 1차적 성질은 사물에 내재하므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감각된다.이상에서 살펴본 로크의 사상에 의하면 경험은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다른 지식에 의존하지 않으며 다른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는 최초의 지식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로크 특유의 표현인 백지상태는 바로 이러한 지식의 원천과 획득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백지상태인 인간의 마음에 경험의 반복으로 감각기관을 자극하면 그 대상의 그림이 마음에 그려지는데 바로 그것이 지식의 기초로서 관념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교육에서도 인간의 본유 상태에 대한 질문은 인간 성장에 있어서 기본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는 유전과 환경에 대한 인식에 대한 주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로크의 경험론적 의미로는 다분히 인간의 환경적 요인에 대한 중요성에 초점이 있다. 인간이 백지상태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 교육은 좋은 환경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내가 지지하는 백지설.여러 가지 다른 입장이 있지만 나는 백지설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남의 집에서 놀다가 장난감을 가져오기도 하고, 먹을 것을 절대 뺏기지 않으려 하고, 누가 뺏으려 하면 때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 아이가 악해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이는 선과 악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자기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행동할 뿐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 본능이 악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본능ㆍ욕구는 어른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어른과 아이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훔쳤다고 가정해보자. 어른은 분명 악을 행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어른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지만, 아이는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선과 악은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본능과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면 위의 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나는 로크의 인간은 태어날 때 특정한 능력이나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출생하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동일하게 한 장의 흰 백지를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 우리들의 삶은 이 백지 위에 인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라는 말에 공감한다.교육이란 아이의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될 수 있으면 밝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구겨지거나 찢어지는 일없이. 어느 누구도 손댄 일없고,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종이이기에 그 작업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힘든 것이다. 부디 그림이 실패작이 되거나,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조금씩 그려주는 것이다. 교육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본론교육방법백지설에 있어서 교육은 후천적으로 생성되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교육을 이끌어 나가야 할지 알아보도록 한다.1)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오늘날의 학교교육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많은 학생 수를 가지고 있다. 그에 있어서 교육은 상위 성적을 가진 아이와 하위 성적을 가진 아이의 개별성은 무시되고 중위권에 맞추어진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외부에서 너는 이런 수준이다 라고 정해주는 것과 같은 수업방식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중위권 위주의 수업은 자신의 다양성을 잃게 만든다. 이런 식의 획일화된 수업방식보다는 인간 개개인의 특성을 살리는 개별교육이 바람직하다.2) 조기 교육이 필요하다.인간 발달의 기본적인 틀은 학교 교육이전, 가정에서 먼저 결정된다. 인간은 어린 시기일수록 주변 환경에 의해 인격형성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이토록 어린 시기가 중요한 것은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형성된 인격은 고치기가 힘들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기교육은 필요하다. 이것은 영어 조기교육 같은 학습을 위주로 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인격형성을 위한 조기교육이다. 즉, 가정교육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학교에서 거의 모든 교육을 담담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가정교육의 자리를 학교로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가정에서 할 수 없는 교육을 해야하고 가정교육 또한 학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교육하는 엄연히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데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맞겨버린 것이다. 학교에서는 단체생활을 익히고 학습을 하지만 가정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과 어려워하는 마음, 예의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 등을 배우게 된다. 이렇듯 사람됨 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디서도 배우기란 힘들다. 점점 축소화되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점차 그 역할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