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최근 중국에서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사를 자기들 역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조금 지나서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각종 미디어를 통해 한국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비단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과 학생들의 관심도 높아가고 있으며 뒤늦게 정부 당국도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특히 이것이 종래와는 달리 정부기간이 앞장서서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역사왜곡이라는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토 문제, 국가 전략적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 동북공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는 먼저 동북공정의 구체적 내용과 배경 등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에 대한 우리 정부와 학계, 시민들의 대처 방향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2. 동북공정의 배경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2002년 2월부터 동북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학술작업인 동북공정을 대형 국책사업으로 지정하여 고구려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3조여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특히 소수민족들이 모여 사는 신장 위구르 자치주와 운남성 등 국경 지방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에 1983년 사회과학원 직속으로 국경 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 을 설립한 것이다. 또한 2001년 북한에서 UNESCO에 고구려의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자극받은 중국은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 을 기획·추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북지방은 현성 등 발해유적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북한이 등록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게 되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측의 명분이 사라질 가능성이 많다고 느낀 중국은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을 관리상의 미비 등을 문제삼아 등록을 보류시켰다. 또한 그 사이 2003년 봄 오히려 集安시 주변의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을 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3. 동북공정 의 내용국가적 프로젝트 동북공정 은 과거의 연구 성과를 총정리하고, 우수한 연구 역량에 집중하여 역사상 의문시 되어 온 문제, 현재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문제 등을 총제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한 연구 내용 중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中朝관계 연구, 중국 동북 지방 변경 등의 내용이 있으나 가장 핵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고구려로서 이를 전문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1) 고구려는 중국 영역 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다. 즉, 고구려의 시조인 朱蒙이 중국의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高陽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일주서』는 문제가 많은 사서이며, 고이족은 기원전 10세기경에 등장하는 종족으로 기원전 1세기에 건국된 고구려와 시기가 맞지 않다. 특히 고구려의 주민은 한족이 아니라 예맥족이라는 것은 이미 중국인들도 인정한 사실이다.2) 중국은 고구려가 줄곧 조공과 책봉을 통해 역대 중앙 왕조와 군신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은 중앙집권과 지방정권과의 관계가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적용된 외교형식이었고, 이는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왜, 베트남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3) 고구려의 멸망 후에 그 주체 집단이 한족에 융합되었다는 것 등을 내세워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신라로와 고려의 단절성의 주장하였으며,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적 계승성이 없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왕조는 모두가 성씨가 다른데 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4. 고구려의 정권의 특징과 후기의 역사인식고구려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제적 군현제를 골간으로 한 중국의 역대정권과 다른 특징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중국사서를 살펴보자. 위서『삼국지』에서는 동이전에 고구려를 삼국사(위·촉·)가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를 포함하여, 부여, 옥저, 예, 삼한 그리고 왜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북쪽에 위치한 부여와 고구려 및 동예 그리고 남쪽에 위치한 마한은 같은 성격의 제천대회를 매년 개최했다. 이는 남쪽사회와 북쪽사회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의 하늘에 대한 제사는 제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이들 사회가 제후국이 아닌 독자적인 정치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한편, 우리나라 자료 중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天帝之子 라는 표현이, 모두루묘지명에서는 日月之子 라는 표현이 있다. 중원고구려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표현하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는 고구려과 영락과 연가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 역시 고구려가 중국과는 별도의 천하관을 가진 독립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동명왕편』 등에서도 고구려를 제후국의 역사인 世家가 아닌 本紀에 서술하고 있다 라는 점이다.한편, 중국의 고등중학 중국 역사 교과서는 위나라의 영역을 한강 이북까지 표시해 놓고 있다. 즉, 한사군이 존재하던 시기의 고구려는 인정하지 않으며, 그 이후의 고구려는 인정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 나라의 역사가 아닌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중국사 교과서와 세계사 교과서는 고구려를 서게 되었다. 이에 한국고대사학회에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 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하였으며, 각계 학회 대표들과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특히 이는 단순한 역사 왜곡에 그치지 않고 영토 문제 등 정치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여러 방송사에서 앞다투어 보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시민들의 관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12월 12일 우리 역사 바로알기 시민연대 가 100만인 서명운동에 착수하여 중국 대사관에 이를 전달하였다. 12월 29일에는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가 고구려 부흥 프로젝트-21세기 대한민국 서희찾기 를 시작하여 세계의 역사학자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관련 학자 등 1만 3천 명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의 부당함을 전자우편으로 전달하였다.한편, 초기의 우리 정부의 태도는 냉담했다. 특히 외교통상부에서는 외교 마찰 등을 우려하여 아주 미온적이었다. 그나마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17개 한국사 관련학회가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하자, 12월 13일 국무총리가 국정현안 조정회의에서 고구려사 연구센터 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센터는 독자적인 기구가 아닌, 정신문화연구원 소속하에 있었다. 1월 중순 통일원에서는 남북공조를 위해 학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2월 3일 열리는 남북 장관급 회담의 의제로 삼기로 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되었고, 1월 28일에는 신임 외교통상부 장관이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발표를 하여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늦게나마 세울 수 있었다.6.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유네스코에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학문적 인해전술과 물량공세에의 의한 역사왜곡에 대하여 우리는 국제화와 정보화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 정신과 기상에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고구려사에 대한 전 국민적인 관심이 일시적인 현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학·민·관의든다. 그 중에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학문이라는 것이 이렇게 권력의 시녀 로서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에서 왜곡되기 시작한 한국역사의 왜곡은 내외부적으로 계속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일제의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한국사 연구는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 한국역사를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滿鮮同祖, 당시의 한국 경제를 일본 고대의 촌락경제수준으로 보는 이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초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의 토대가 되었다. 일선동조론은 본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민족으로 한국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과의 합병이나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여 1930년대 일본이 펼친 내선일체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봉건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 낙후를 면치 못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논리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 미화론으로 이어졌다. 타율성론은 한국이 역사를 스스로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시키지 못하고 중국이나 몽골, 만주, 일본 등 주변 외세의 간섭과 힘에 좌우되어 왔다는 논리이다. 한국사는 그 형성에서부터 중국 등의 식민지배에서 출발하였다고 보았는데, 이는 한민족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성향을 부정하고 타율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한민족의 부수된 주변성으로 대표되는 반도적 성격론과 사대주의론에 관한 주장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함께 당파성론도 제기되었는데, 이 주장은 조선의 문화수준이 낮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처럼 발전하지 못한 까닭은 잘못된 민족성을 지닌 탓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파벌을 만들어 싸다.
1. 머리말1979년 이후 개혁 개방 정책의 실시로 중국은 현대화, 산업화 사회로 급속히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대 말 이래, 정치 선전 및 권력 투쟁의도구로 기능해 왔던 중국의 언론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날로 증대하였다. 이는 언론매체의 탈정치화, 기능의 다양화를 의미한다.그러나 시장경제 의 추진을 통한 언론의 자유화는 문화와 사회생활까지도 변화시켰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야기되는 언론매체의 상품화라는 것이다. 각종 법규의 미비, 언론 도덕 자체의 타락 등의 문제는 중국 정부가 나름대로 이론적 해명과 행정적인 규제를 통해 조정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언론 매체의 경제적인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의 정치적 속성인 黨性까지도 보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현 중국 정부가 지닌 딜레마라 할 수 있다.본 고에서는 우선 중국 정부의 개혁 개방 전후의 언론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언론매체 신문, TV, 라디오, 인터넷의 현황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물론, 이 중국 정부의 정책안에는 홍콩 언론에 대한 정책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2. 중국 정부의 언론정책1 개혁 개방 이전의 정책모택동은 일찍이(1957. 5. 6) 사회주의 국가에서 언론(新聞)은 사회주의 경제 즉, 公有制의 기초 위에 계획 경제를 반영해야 한다. 지본주의 국가에서의 신문은 무정부상태와 집단경쟁체제를 반영한 것이다. 계획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방송업을 포함한) 문화교육 사업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지나친 지도계획 통제는 반대한다 는 견해를 피력했다.{ 張濤, , , 1992.이 견해는 수십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중국 언론 이론의 기초가 되어 왔다. 즉, 사회주의 언론 사업은 사회주의 경제 기초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아울러 사회주의 경제를 위하여 봉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헌법에서도 신문 방송이 반드시 국민을 위하여 봉사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한편, 문화혁과 사회 간의 중요한 매개로서 다양한 사회적 기능들을 행사하는 존재로 인식하였으며, 이 같은 맥락에서 언론매체에 대한 인민들의 피드백까지도 중시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또한 중국 정부는 오늘날 사회적 욕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각종 언론매체들은 새롭게 개혁시키고,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언론매체, 특히 방송매체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노력을 보이고 있다.3 언론의 자유중국 헌법에는 언론의 자유와 미디어 활동의 자유를 각각 분리하여 보장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공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에 관한 규정에, 미디어 활동의 자유는 총강의 문화사업으로 국가가 주도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헌법상으로는 완전히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 이는 당 지도노선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즉 반미주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자본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것은 예전의 중국 언론에서는 금지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3대 금기사항인 국토문제, 민족문제,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언론보도에 여러 가지 통제를 받는다. 이것은 사실상 무한정의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언론자유 개념과는 분명 틀리다.또한, 미국의 정보 자유법 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정보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비밀유지권 의 제한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즉 알권리의 개념에 의거하면 정부는 민의를 실현하는 기구에 불과하고, 인민은 정부 업무의 모든 상황에 대해 알권리 를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알권리는 중국에서는 지효권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지효권의 확대가 중국 사회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있다. 즉, 점진적으로 정보 공개를 확산시키며, 제반 정보들을 인민들이 충분히 인식하게 하는 것, 이는 사회주의 고도 민주 체제를 건설하는 기초가 되며,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필수요건이 되는 것이다.한편, 중국의 저널리스트가 처음으로 민중의 데 아직도 매우 요원하다.{ 王國慶, 63p, 《 新聞事業與中國現代化》, 新華出版社, 1992.3. 중국의 언론매체1 신문1 신문사업의 발전과 그에 따른 폐단문화혁명 말에는 전국에 단지 42개 일간지만이 남아 있던 언론계에 신문과 잡지 등이 1980년 이후 우후죽순처럼 속속 창간 내지는 復刊되었다. 1980년 1월 1일에서 1985년 3월 1일까지 약 1900일 동안에 약 1천 개의 신문이 늘어남으로써 평균 이틀에 하나 꼴로 신문이 창간되었다. { 張濤, 앞의 책, pp. 309~311.1988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는 2,509개의 신문, 발행부수 1억 7천 7백만부를 기록함으로써 1978년의 413%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87년까지 8년간의 신문계의 황금기는 87년 신문의 지나친 과열 양상으로 양적인 발전에 일단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그후 1990년 등소평의 南巡講話로 인해 신문계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이후의 신문의 성장은 80년대에 비해 매우 안정된 가운데, 지속적인 발전의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1994년 공개적으로 발행하는 신문이 2,040종, 각 기관 내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이 6,400종, 간행물도 7,596종이나 되었다.{ 于友先, , 《中國報紙月刊》Vol 6, 新聞 出版 著, 1994.한편, 1994년 말 기준 중국 광고 시장 규모는 한화로 1조 8천억원 상당에 이르며, 전국에 1만 6천여 개의 광고 전문업체가 있고, 최근 2~3년간 연평균 46%의 매출 신장을 기록하였다. 중국 신문의 광고 비율은 전체 지면의 10% 수준이나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국지보다는 지역지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정치 선전지보다는 스포츠, 영화, 텔레비전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전문지들이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신문 배달은 우체국이 독점하고 있으며, 일부는 가판에 의존하고 있다.광고가 많은 지역 신문기자와 광고가 적은 지역 신문기자의 월급 차이는 약 6배나 될 정도로 광고가 신문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큰데, 그러다보니 광성 당기관지의 퇴조와는 반대로, 특정대상만을 독자로 삼는 대상성 신문과 특정분야를 다루는 전업성 신문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1992년 통계에 의하며, 중국 전체에 284종의 대상성 신문이 발간되었으며(전체 신문의 17.04% 차지), 전업성 신문은 801종(전체 신문의 48.1%)이나 되었다. 또한, 1993년 기준으로 위구르어, 카자흐어, 몽고어, 티벳어, 조선어, 키르키즈어, 리리어, 타이어, 징퍼어, 와어, 리어 등 12개 소수문족의 문자로 출간되는 91개의 소수민족신문들이 존재하고 있다.{ , 1993, 1994.한편, 경제개방에 따라 기업신문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1990년 중국에는 기업신문이 135개 있었고, 평균매기총발행부수가 175만부에 달하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1992년에는 기업신문이 256종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평균매기총발행부수도 867만부로 늘어나는 등 급증세를 보였다.이와 더불어 국내외의 경제정보와 시장동향을 그 주요 내용으로 삼는 경제신문의 성장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반영하는 특징적 현상의 하나다. 95년 현재 중국에는 경제신문이 약 164종이 있다. 비록 가지수가 기업신문보다는 적으나, 평균매기총발행부수가 1,108만부로서 기업신문보다도 많아 보다 광범위한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한 1990년 이후에는 석간신문이 대량으로 창간되었다. 석간신문의 내용적 특성은 취미성과 시의성을 보다 강조하는 것이다. 1993년 상반기에 66개의 석간신문이 발간되었으며{ 振鵬, , 《新聞戰線》, 1993., 주로 대도시에서 발간되고, 한 도시에 두개의 석간신문이 발행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석간신문의 신속한 증가는 도시인구의 증가, 중국 국민의 소득향상, 정보에 대한 욕구의 증대 그리고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에서 많은 신문들이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寧樹藩 · 葉春華, 《新聞學基礎》, 安徽人民出版社, 1985. 1979년~1992년 중국 신문의 증가 추이{연도신 신문들이 오전 9시에서 낮 12시 사이에 배달되는 것과는 달리, 새벽 6시 30분부터 거리에서 가두판매를 실시하였다. 컬러사진도 1면에 실리며, 8면으로 시작했으나 2000년 현재 16~24면을 발행하고 있다.5 北京靑年報92년까지 일주일에 3번씩 4면정도 발행하는 군소 신문 중의 하나였다. 기자 100명정로 15만부를 발행하는 전국신문이었다. 그러므로 적자를 면치 못하였는데, 93년에 지면개편을 단행하고, 95년부터는 지방신문으로 영역을 좁혔다.한편,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면을 만들기 위해 외부기관에 지면 혁신에 관한 대대적인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독자들을 위한 기사와 편집에 세심한 신경을 쓰는 한편, 우체국을 통한 배달이라는 오래된 관행을 깨뜨렸다. 즉 별도의 판매회사를 두고 베이징 중심 지역은 아침 7시에, 외곽은 8시에 집에서 받아보도록 했다. 판매회사는 배달한 만큼의 수익을 얻기 위해 신문의 이미지 광고까지도 자체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지면과 판매의 혁신을 이룬 『북경청년보』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800여 명의 기자가 매주 200면 이상, 50만부를 발행하는 일간지로 성장했다. 이는 베이징에서 가장 두꺼운 지면이다. 지난 95년에는 518만 위안(7억 5천만원)의 흑자를 기록한 데에 이어 2000년에는 8천88만위안(116억 5천만원)의 흑자로 자력기반을 다졌다. 그러면서 다시 전국 신문으로 나설 계획을 세우고 있다.{ 김수병, , 『한겨레21』, 1999년 11월 18일, 69~70면.2 방송매체1 TV, 라디오 방송의 발전1983년 중국 정부는 방송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정신 문명의 무기 라고 정의하고, 방송 발전을 중국의 국가 경제 발전 계획에 포함시켰다. 정부의 정책적 지지와 사회,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난 10여년 동안 중국 방송매체는 신문을 능가할 만큼 매우 쾌속한 발전상을 나타냈다.1923년 1월 미국 기자 E. C. Osborn이 상해에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한 이래, 1926년 10월 중국 정부는 하얼빈에 최995.
1. 단군신화에 대하여.세계 어느 나라든 역사가 오랜 경우에는 건국신화 를 갖고 있는데,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바로 단군신화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우리민족사의 출발점으로, 단군은 민족의 유구성과 독자성의 상징으로서 인식되어왔다. 신화 세계의 주인공은 神과 그 자손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간이 자연계와 맺고 있던 관계 또는 인간 상호간의 맺고 있던 사회관계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어있다. 따라서 신화에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이 직접 기록되어 있기보다는, 인간의 오랜 역사경험이 神을 주인공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보통이다. 신화는 계급사회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관념형태이다. 물론 그 속에는 원시공동체사회의 여러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남아있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계급사회의 발전과정에서 국가의식이나 계급의식 아래 여러모로 윤색되고 합리화되는 것이다. 단군신화 또한 마찬가지 이다.{ 굳이 단군신화의 내용을 여기서 또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의 중심되는 구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天神族 환웅과 지상의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天降神話는 동북아시아 여러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환인은 천신·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단군이 환인의 손자라 함은 곧 태양신의 손자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환인이라는 용어 자체는 산스크리트어의 Sakrodevendrah라는 말을 한자어로 옮긴 석제환인다라(釋帝桓因陀羅:東方護法神)에 어원을 둔 것으로, 불교의 영향을 보여준다. 환웅은 환인과 마찬가지로 태양신 또는 천신을 뜻하며, 웅녀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남자 신이다. 이러한 환웅의 하강에는 외래 집단의 이주·정착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신시를 건설하고, 곰과 호랑이로 상징되는 토착집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새로운 질서에 적응케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비해 곰은 땅신이나 여성을 뜻하는 것으로, 환웅과 결합하게 된 정치집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집단의 성격은 분명히 알 설명하고 있다. 즉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활동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때문에 신화를 진실이 아닌 이야기 , 거짓된 이야기 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다. 단군 전승을 신화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것도 신화=허구라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지행되고, 특히 현존하는 미개인들의 신화를 그들의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관련시켜 이해해 보려는 인류학적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신화에 대한 이해는 많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즉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는 비합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원시·고대인들은 신화를 결코 거짓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진실된 이야기이며, 또 신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이야기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기원을 안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며, 본질을 이해하면 인간의 의지대로 사물을 조작·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신화는 원시·고대인에게 있어 중요한 지식이기도 했음이 알려지고 있다.그렇지만 신화가 모든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는 지식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의 활동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본받아야 할 모범과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의례인데, 각종 의례들에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들의 행위가 재연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 또 신화는 모든 것의 기원을 신성의 영역과 관련시킴으로써 도덕이나 관습, 질서와 규범을 신선시하고 정당화하는 헌장(憲章,charter)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신화가 위와 같은 것이라 할 때, 단군신화의 경우에도 이것이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이며, 또 고조선 사회에서 어떤 의미와 기능을 가진 것이었겠는가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3. 단군신화의 기능단군신화의 일차적인 기능은 고조선의 시조 단군의 신성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데 있다. 또 몇가지를 더 살펴보면, 정치권력의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풍백·기능을 계속 유지했다. 평양지역에서는 조선후기에도 지역민들이 숭봉하는 神人으로 계속 제사가 올려졌다. 1725년에는 평안도민의 강력한 건의에 의해 사액되어 단군전이 숭령전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황해도 삼성사의 제사의식도 계속 개정되어 결국 평양 단군전과 같은 격으로 높여졌다.몽고침략 전후부터는 단군숭배유형이 국가시조, 역사공동체 시조인 단군숭배 유형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1270년 전후에 쓰여진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제왕운기』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이승휴의 단군 인식을 인정하여 건국과 함께 단군을 국가 시조이자 동방 역사 공동체의 시조라고 선포했다. 국가 명칭 역시 단군의 옛 국호를 잇는 조선 이라 함으로써 역사적 단군으로 받들기를 명확하게 했다. 조선계승의식이 국가적으로 법제화되면서 세종11년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다. 세조2년에는 단군 위패를 조선 시조 로 기자 위패를 후조선 시조 로 확정했다.조선후기의 단군인식조선 고유문화를 출발시킨 영웅으로 단군을 인식하는 유형은 17세기 중반 이후 강력하게 대두했다. 이는 17세기 초부터 정통론에 입각하여 단군부정론을 주장하는 시대분위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기호지방 남인 許穆은 단군혈통인 고구려를 포함하는 모든 시조설화를 하늘과 연결성을 가지는 실제 역사로서 인정하는 등 혈연공동체를 강조했다. '단군 시대뿐 아니라 이미 신시 { 許穆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을 천황(桓雄天王), 신시씨(神市氏)라고 호칭하면서, 신시씨로부터 백성을 잘살아가게 하는 다스림이 시작되었고 단군에 와서 큰 국가공동체로 발전했다고 하였다.시대부터 우리 역사의 문화영웅이 탄생했다는 허목의 단군 인식 유형은 후일 남인 실학자와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 등 단군관련 기록을 더 창의적으로 해석해보려는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목보다 더 명확하게 문화영웅으로서의 단군을 복원하려 노력한 사람은 洪萬宗이다. 그는 1705년에 쓴 『東國歷代摠目』에서 단군 기자 마한 삼국 통일신라로 이어지』에서 단군조선 계승의식을 전혀 무의미하다고 보고, 기자조선 마한 신라를 연결시키 한계승의식만으로 우리 역사공동체를 재구성했다. 단군조선을 우리역사에서 완전히 제거해보리고, 기자조선에서부터 우리 역사공동체가 출발하였고, 고구려는 변방국가로 규정하는 등 철저한 반도 중심·신라중심 사관이 되었다. 이 역사인식 체계가 바로 삼한정통론 이다. 이후 19세기에는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문헌고증에 입각하여 단군의 신성성이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고,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단군의 명칭이나 이름같은 기록들을 대부분 신뢰하지 않았다. 한치윤을 『해동역사』에서 단군에 관한 한 혈연공동체 문제와 문화적 독자성 문제를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한말까지 이어져 대한제국 선포 이후 조선 계승의식 대신 한 계승의식이 더 강조되었다. 그래서 단군이 신인이라는 기록이 없어지면서, 단군조선에서 이어지는 역사공동체 의식이 크게 평가절하되었다. 단군은 우리 역사에서 필요없다는 단군부정론이 그대로 되살아나기도 했던 것이다.5. 근대의 단군인식.민족사학의 대단군론신채호는 대한 제국기 교과서의 한 계승의식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적 단군 교육을 보고 비판하면서 1908년 『讀史新論』을 써서 단군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했다. 단군을 전통시대의 긍정적 단군 인식처럼 문화영웅으로 보기보다 사회의 구조적 형태를 통해 동이족문화까지 포괄한 대제국의 건설자인 대단군으로 그 모습을 복원해보려 하였다. 신채호의 부여계승의식은 곧 종족·강역·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대단군 민족주의였다. 이러한 대단군주의의 제창은 이후 만주를 거점으로 같은 초기 무장투쟁 방략의 독립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정인보는 신채호의 대단군주의를 명확하게 이어받아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오천년 조선의 얼」에서 동이족이 단군족이고 고조선은 많은 단부로 구성된 통일국가라고 하였다. 부여는 가장 완전하던 先人. , 정신의 正嫡인 부여천자. 라고 하여 신채호에서 이어지는 부여계승의식을 명백하게 긍정했다. 곧 신채호에서으로 해석하여 희석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불함문화권에서 시작된 아시아적 대단군주의라는 흐름은 대종교와 다른 노선을 걸으면서 친일인물들을 적극 포섭했던 단군교 계통에서 적극 활용하여 이후 단군숭배와 관련된 다양한 위서들{ ·『揆園史話』-일본·조선·만주족의 연합에 의한 公戰으로 중국 재패를 주장(1930년대 유포)·『桓檀古記』-중국을 우리 민족 최대의 적으로 설정한 민족항쟁사를 쓰면서 고려말 왜구와의 전투기록은 생략한 반면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 및 일본 神道와의 연결성을 설정.(1980년대 유포)·『檀奇古史』-고대 단군민족의 중국민족과의 公戰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권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주의를 주창(1949년 전후 유포)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사적유물론의 지배계급 추장론민족해방투쟁기 대단군주의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유물사관 진영의 백남운과 김태준에게서 나왔다. 백남운은 일본인은 실증주의적 편견에서 임의적으로 부정하고 잇고, 신채호·최남선 등은 설화적 관념표상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독자적으로 신성화함으로써 동방문화에의 군림을 시도한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모두 특수문화사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남운은 단군신화는 문헌상의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인 만큼 귀중한 사료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재화하거나 신비화해서는 안된다. 고 하면서 학문적으로 고산 산림지대, 식용식물의 재배, 남계 추장의 확립, 단군왕검은 지배적 계급적 존칭, 특정한 인격자나 민족시조가 아닌 농업공산사회 붕괴기 원시귀족인 남계 추장이라는 몇가지 사실로 결론지었다. 김태준의 입장도 백남운과 같아 신화도 스스로 어느 정도까지의 세계사적 공통성을 가지 므로 신화를 근본에서 부인, 말살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그 신화를 편찬한 당시의 사회관계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단군은 오랜 옛날에 실재했던 민족시조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민족의 큰 어른으로서 숭배대상인 國祖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동아시아 되었다.
Ⅰ. 머리말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 한국의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협정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 외무장관 시이나(推名 悅三郞), 수석대표 타카스기(高杉 晉一) 사이에 조인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4개의 협정 및 25개의 문서의 총칭이다.부속협정은 어업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다. 조약의 교섭은 14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최종단계에서는 두 나라에서 모두 야당과 학생 등의 강력한 반대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1965년 한일 협정의 체결은 한 일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 있어 그것은 전후 처리 외교의 결정체를 의미했을 수도 있으며, 한국에 대한 경제활동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협정에 따른 보상과 차관 등으로 정부 주도 경제개발에 있어서 베트남 참전 과 더불어 자본의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 한일 협정의 결과로 한국에서는 보상과 사죄의 문제가 때로는 감정적으로 까지 변함없이 대두되고 있으며, 또한 일본 우익세력에게 보상과 사죄는 이미 끝났다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기도 한 점을 미루어 보면 한일 양국의 외교 분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한일협정은 기본적으로 한 미 일 이라는 냉전기 동아시아의 지형적 특징과 이에 따른 미국의 동아시아 통합전략, 그리고 일본의 자국의 안전을 위한 한반도 방어선 구축과 경제성장에 따른 인접 판로와 투자시설 확보 등의 상황이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한국 내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의 반공논리 강화와 정통성 확보를 위한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경제성장이라는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성립된 역사적 사건이다.그러나 한일협정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매우 미흡한 형편이다. 한일협정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적지 않지만, 체계적인 연구의 대부분은 정치외교학 분야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차이에 있었다. 그 단적인 예는 쿠보타발언 파문을 통해 나타났다. 대일강화조약 체결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36년에 걸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민에게 유익한 면이 많았다. 고 한 일본 측 수석대표 쿠보타의 발언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정식, 《한국과 일본-정치적 관계의 조명》, 교보문고, 1986, pp.45~54이러한 일본 측 태도는 과거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 공식적으로 먼저 사과하는 것만이 국교정상화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하던 한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3차 회담 결렬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3차 회담 결렬 후 한국정부는 일본에 대해 쿠보타망언의 취소, 일본의 대한 청구권 포기, 평화선 존중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쿠보타발언 을 철회하고 한일관계를 개선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1957년 2월 25일 기시(岸 信介)내각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활발한 중재로 4년 반 동안 교착상태에 있던 한일회담이 재개의 움직임을 보였다. 기시정권은 1957년 12월 31일 정식으로 쿠보타발언 과 對韓 재산청구권을 철회함으로써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한일화해를 모색하였다. 이로써 양국은 회담재개에 합의하고 1958년 4월 15일부터 1960년 4월 19일까지 4차 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그러나 4차 회담에서도 회담의 개별의제 토론에서 전혀 변화나 발전이 없었으며 더구나 재일한국인 북송문제로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59년 초 기시내각의 재일한국인 북송문제는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자처하던 한국에게 충격적인 배신행위로 받아들여져 한국정부는 1959년 2월 28일의 한일회담 재개를 거부하는 한편 6월 15일에는 대일통상을 단절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곧 미국의 설득과 통상단절로 인한 경제적 곤란과 무엇보다도 직접 회담을 통해 북송을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7월 30일 한일회담의 무조건 재개를 제의했다. 그러나 재일한국인 북송저지 실패로 회담은 또다시 결렬되었고, 이후 1960년 4월 1우호관계가 거시적 입장에서 하루 빨리 타결되어야 한다며 적극성을 띠었다. 미국 역시 1964년 3차례에 걸쳐 한일문제 해결을 종용하는 등 한일협상의 조기타결에 대한 기대를 현저히 표면화하였다. 일본에서도 야쯔기 (矢次 一夫)등의 막후외교 기시(岸 信介)를 앞세운 日韓經濟協會 등이 회담타결을 측면지원하고 있었다.{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일본의 전후처리 외교와 한일회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pp.100~105.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경제적 진출을 모색하던 재계 측에 두드러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한일양국은 상당한 의견의 접근을 보아 3월타결 5월조인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1964년 내에 국교정상화를 타결할 예정이었으나, 타결 단계에 들어갔던 협상은 한국내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좌절되었다.{ 1964년 3월 24일 시작된 굴욕외교 반대투쟁은 6월 3일까지 73일간 이어졌다. 투쟁의 양상이 정권의 존립위기를 불러일으킬 정도로까지 발전하자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 포고 11호로 서울특별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각 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후 각 대학에서는 학생징계를 대대적으로 단행하고 정부는 구속된 학생들을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재오,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 형성사, 1984, pp.224~232.1964년 5월 11일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임명되고 장기영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 기용되었다. 7월에는 이동원이 외무장관에, 10월에는 김동조가 주일대사로 임명되었다. 새내각은 오로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구성된 성격을 띠었다. 현안문제 중 가장 큰 난제였던 청구권문제와 어업협정문제에 대해 대체적인 합의가 이뤄져 있었으므로 1964년 12월 3일 시작된 7차 회담은 최종 마무리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한일교섭은 급진전되어 1965년 2월 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4월 3일에는 청구권, 어업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조약이 가조인되었다. 1965년 6월 22일에는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고 같은 29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같은 해 8월 17일에는 한국 외무장관과 주한 미국대사가 회담하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미 국무성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윌리엄 번디가 한국을 방문하여 10월 3일에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은 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1964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7차 회담에서도 타결을 서두르기 위한 정치적 교섭이 계속되었으며, 외무부장관의 방미 직후인 1965년 6월 22일 한일 회상회담을 통하여 한일회담은 한일조약 · 협정을 맺음으로써 종결을 보게 되었다.2. 일본의 한일협정 추진 배경1) 對韓 안보이익1950년대 말까지 일본은 한일국교정상화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와 같은 이유는 일본이 한일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긴급히 추진해야 할 필요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안보와 일본에 중요한 한국의 안보를 미국이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한국 안보문제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북한과 대립관계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결코 일본에 적대하는 세력에 접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또한 제반 여건으로 보아 국교를 회복하지 않는 것에 의해 고통을 느끼는 것은 한국이지 일본이 아니므로, 일본은 한국이 독립의 세를 타고 온당치 않은 요구를 하고 있는 동안은 방관하고 있다가 상대가 평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유리한 조건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한반도에 일본에 적대시하는 세력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의 對韓 이해관계의 기초가 되고 있었으며, 일본이 그러한 이해관계에서 소련을 경계하고 북한이 친소세력 또는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 적대세력으로 간주되는 한, 한국이 對북한 관계에서 우위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본의 국가 이익상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한일 회담을 찬성하던 일본의 우익세력은 반공, 반소, 반북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한일회담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안보문제는 일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으한 한일 국교정상화 외교정책 결정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했다.{ 유병용, 〈공화당정권과 한일회담〉, 근현대사연구회, 《근현대사 강좌》6호, 한울, 1995, pp.64~65.박정희 정권은 국가안보, 즉 반공과 군사력의 증강을 위해서 미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과 계속된 남북한의 대치상황 속에서 한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국의 안보는 미국의 대외정책여하에 달려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정책의 변경은 생존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으로 하여금 다른 창구를 찾도록 강요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미국원조가 감소됨으로써 발생하는 재정적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경제적 유대를 다양하게 맺어 자본투자를 유치하려고 노력했는데, 당시 진행 중이던 한일회담을 해결한다면 일본이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자원의 공급원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병용, 위의 책.또한 한국은 1962년 이후부터 전통적 대미의존 경제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여 경제적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했다. 군사정권은 한일문제의 전반적 해결과 더불어 일본이 이 경제계획 수행을 위해 실질적인 뒷받침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 후 한일회담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자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한일협정의 조기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공언했다. 박정희 정권에게 경제발전의 목적은 당시의 심각한 경제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0년대 초기 한국의 경제실상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근대적 산업시설과 사회간접자본을 잿더미로 만들고 북한에 편재한 생산기반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어 참담한 처지에 있었다. 이때 미국의 원조는 한국에 큰 역할을 했고 그것은 긴급구호의 성격을 띤 소비재중심의 원조와 군사원조가 대부분이었다. 막대한 미국의 원조는 경제 이었다.
1. 머리말三峰 鄭道傳(1337?∼1398)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朝鮮王朝 建國에 있어서 政治的 主役을 담당한 大政治家인 동시에, 高麗的인 社會秩序와 理念體系를 전반적으로 비판하여 朝鮮王朝의 統治秩序의 기본방향을 제시·설정한 뛰어난 性理學的 理念家이기도 하다.따라서 朝鮮王朝 建國主體勢力의 社會改革理念과 建國初期의 統治秩序의 基本性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鄭道傳의 思想體系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다. 鄭道傳思想의 硏究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鄭道傳은 朝鮮朝를 建國한 易姓革命의 주체로 알려졌듯이 經世家로서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그는 性理學者로서도 우리의 注目을 끌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그는 經世書에 해당하는 『朝鮮經國典』『經濟文鑑』 등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性理學書에 해당하는 『心氣理篇』『心問天答』『佛氏雜辨』 등을 남겼기 때문이다. { 물론 『學者指南圖』의 저술도 있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안다.이러한 性理學의 著述業績으로 보면, 고찰의 범위를 麗末·鮮初의 性理學界를 대표한다. 남겨놓은 業績으로 평가한다면, 麗末·鮮初의 學者로서는 權近 이외에 그 누구도 그와 비견될 인물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麗末·鮮初의 대표적 性理學者인 것이다.여기서는 먼저 鄭道傳의 생애와 그의 朝鮮建國 후의 업적, 그리고 그의 저술에 담긴 그의 사상에 대해서 알아보겠다.2. 鄭道傳의 생애鄭道傳의 자는 宗之, 호는 三峰이며, 경북 봉화 사람이다. 鄭道傳이 평생동안 가장 괴로움을 당하고, 또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敵對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되었던 일 중의 하나는 그의 血統문제였다. 그의 父系血統도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었지만 그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것은 母系와 妻系의 혈통이었다.奉化鄭氏의 始祖 鄭公美는 奉化鄕吏(戶長)으로서 鄭道傳의 高祖가 된다. 曾祖父 鄭英粲은 下級散職에 불과한 秘書郞同正이었으며, 祖父 鄭均 역시 檢校軍器監으로서 散官에 머물렀다. 부친 鄭云敬에 이르러 비로소혁을 反對하는 政敵들이 그를 공격할 때에는 의례히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았다. 鄭道傳은 田制改革 이전까지 經濟的으로 몹시 곤궁한 처지에 있었지만, 이 문제는 田制改革 이후 科田, 功臣田을 받음으로써 충분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풀리지 않은 것은 血統문제였다. 이 점은 그의 社會改革의 방향이나 인격의 형성, 나아가서는 그가 同僚士大夫와 결별하여 學者에서 革命家로 전환하는 이유 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鄭道傳이 사상적으로나 행동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은 禑王元年(1375)에서 禑王 9년에 이르는 9년간의 流配·流浪기간을 통해서였다. 그가 처음 3년간 流配生活을 한 곳은 全羅道 羅州郡 會津縣 居平部曲이었다. 從便이 되자 先鄕인 榮州, 生家가 있는 三峰, 그리고 三角山·富平·金浦 등지를 전전하면서 茅屋을 짓고, 스스로 밭갈이를 하고,{ 流浪시기에 쓴 詩에는 田舍에서의 躬耕生活을 읊은 것이 많다. 自詠 5首·題僧牧庵卷中·山中二首 등이 대표적이다.讀書하면서 6년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물론 經濟的 貧窮과 精神的 孤獨感이었다.이렇게 流浪生活을 하던 鄭道傳은 1383년 李成桂를 찾아간다. 이때 李成桂는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긴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高麗 邊方 東北面의 道指揮使를 맡고 있었다. 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鄭道傳은 李成桂의 천거로 成均館 大司成에 오른다. 이후 1388년 李成桂가 威化島回軍에 성공하자 密直副使로 승진하여 趙浚 등과 함께 田制改革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李成桂가 朝廷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鄭夢周 등과 함께 禑王의 아들 昌王을 폐하고 恭讓王을 옹립하여 佐命功臣에 봉해지고, 1391년 三軍都摠制府 右軍摠制府가 되어 兵權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해 봄 李成桂가 사냥 중에 落馬하여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鄭夢周, 김진양 등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鄭夢 새 왕조의 首都를 移定하는 사업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수도 이정과 관련하여 계룡산의 신도안을 도읍지로 하자는 주장과 仁王山을 主山으로 하자는 주장 등이 엇갈렸으나, 마침내 鄭道傳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그는 새 도읍이 결정된 후 왕명에 의하여 궁전과 궁문, 그리고 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도성 내외의 49坊의 이름도 지었으며, 아울러 新都八景詩를 지어 바쳤다. 또한 태조 李成桂의 창업을 기리기 위하여 文德曲·夢金尺·受寶 등의 악사를 지어바쳤으며, 태조가 사랑하는 끝의 아들 芳碩을 世子로 책봉하도록 전의하고 그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았다.셋째로, 그의 치적 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군사제도의 개혁과 兵法의 개혁, 그리고 요동 수복을 위한 전쟁 준비였다. 그는 의흥삼군부의 책임자로서 중외의 병전을 장악하고 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고려말에 거의 私兵化된 군대를 단계적으로 혁파하여 工兵으로 귀속시켰다. 그와 아울러 중국 역대의 병법을 현실에 맞게 가감하여 陳法·五行陣出奇圖·講武圖·八陣三十六變圖譜·太乙七十二局圖 등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진법에 따라 군사들을 훈련하였다.이러한 일련의 군사 정책은 개국 직후부터 추진된 것으로 그것은 장기적으로는 국방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요동 수복을 위한 전쟁 준비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鄭道傳의 요동수복운동은 南誾·沈孝生·孫興宗 등과 긴밀히 연결되고, 태조의 승인까지 얻어서 은밀하게 추진되었으나, 명 나라는 이것을 일찍부터 눈치채고 그 주동자인 鄭道傳의 제거에 혈안이 되었다. 명 나라는 조선이 요동에 사람을 파견하여 邊將을 유인하고 여진을 說諭한 사실을 트집잡고, 태조 4년에는 조선에서 보낸 表箋文이 무례하다는 것을 이유로 鄭道傳을 그 기초자로 지목하여 그의 압송을 요구하여 왔다. 문제가 된 표전문은 鄭道傳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 나라는 鄭道傳을 조선의 禍根 이라고까지 극언하면서 그를 제거하는 구실로 삼으려 하였다. 그의 요동 수복 정책이 명 나라의 미움을 산 까닭이었다.이 사건을 계 가지고 따진다면, 李成桂의 왕위를 이을 사람은 방원이 가장 적격자인 셈이었다. 그러나 방원을 가장 경계한 것은 鄭道傳이었다. 李成桂가 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물론 李成桂 자신의 의사가 많이 작용했을 것이나, 鄭道傳의 방조 내지는 권유도 적지않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鄭道傳의 입장에서 본다면 야심많은 왕자가 집권할수록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臣權 우위와 관료정치 운영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鄭道傳이 兵制를 개혁하면서 왕자들이 가진 병권을 박탈하려 한 것도 이러한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한편, 방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세자의 지위를 아우에게 빼앗기고, 병제 개혁 과정에서 병권마저 박탈당하게 되니 자신의 정치적 위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고 말았다.鄭道傳과 정치적 갈등 관계를 가진 또 하나의 세력은 개국공신들 사이에도 있었다. 특히 조준(趙浚)이 그러하였다. 조 준은 鄭道傳만큼은 개국에 공로가 크지는 않았으나 그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李成桂의 고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국 후에는 점차로 鄭道傳에게 밀리어 정치적 지위가 하락되어 갔다. 더욱이 鄭道傳의 攻遼 정책은 그에게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개국공신 金士衡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여 개국공신은 마침내 攻遼派와 攻遼派反對派로 갈라지게 되었다. 공요반대파는 차차 방원과 연결을 가지면서 공요운동을 저지하였다.그 다음, 鄭道傳과 대립된 세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역성 혁명에 소극적이었거나 반대적인 입장에 있었던 고려 舊臣세력이었다. 卞季良·河崙·權近과 같은 이는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性理學者로서도 저명한 인물들로서 신왕조에 일단 귀복하기는 하였으나 鄭道傳 일파의 급진적 개혁 정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보다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였다. 특히 권 근은 鄭道傳의 각종 저서에 대한 註釋을 붙여서 鄭道傳과는 매우 친밀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입장까지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역성혁명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어쨌든 을 내세우고 있다. 혁명사상에 의하면 통치권은 천명=天工=天理에 의하여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天命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다른 유덕한 자에게 天命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는다. 이와 같이 천명이 부덕한 통치자로부터 유덕한 통치자에게 바뀌는 것이 곧 〈革命〉 또는 〈易姓革命〉이다. 그런데 혁명은 하늘의 주체적인 의지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天意·天心은 다름아닌 민심의 반영이요, 민심은 유덕자만이 얻을 수 있으므로, 결국 유덕자만이 민심을 얻어서 천명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鄭道傳의 혁명사상은 일종의 비과학적인 비기사상으로서의 천인감응설 내지는 재이설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심을 얻었느냐 못얻었느냐의 판단을 민의 직접적인 의사표시에서 찾지 아니하고, 재이가 있느냐 없는냐 하는 자연현상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연현상을 빌어서 군주의 선정을 촉구한다는 이지적인 면이 있고, 또 실제로 자연의 변이를 계기로 선정이 베풀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나아가서는 악정의 군주를 추방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가진 일정한 진보성을 도외시할 수 없다.鄭道傳의 혁명사상은 조선왕조 건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조선왕조의 건국과정 그 자체가 그러한 혁명사상에 입각하여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왕 李成桂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민심의 추대와 천명의 허락을 받아서 이른바 「응천순인」함으로써 왕위를 얻은 것이다. 李成桂가 민심의 추대를 받았다는 것은 위화도회군 당시 광범한 軍·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과, 비록 인민전체가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50여명의 현직 및 한량관리가 스스로 李成桂 추대를 발의하여 최종적으로 당시의 국가의 최고정무기관이던 도평의사사의 합의를 거쳐서 신왕의 추대가 결정되었다는 데서 증명된다. 한편 고려왕조가 민심과 천명을 잃었다는 것은 공양왕대의 계속적인 재이의 발생이 그것을 닭이다.